브라이언 드 팔마가 <미션 임파서블>을 발표한 것이 1996년의 일이었다.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이하, <미션 임파서블 4>)은 15년 만에 발표된 네 번째 속편이다. <미션 임파서블>시리즈는 분명 이단 헌트의, 좀 더 정확하게 이를 연기하는 톰 크루즈의 존재감으로 굴러가는 영화다. 다만 이번 속편에서는 지난 세편의 전작들과 다른 조짐이 발견된다. 전과 달리 전편과의 서사적 연결성이 뚜렷하게 발견되는 이번 작품에서 가장 극명하게 눈에 띄는 건 이단 헌트의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상을 전시하던 전작들과 달리 이단 헌트를 위시한 IMF 팀원들의 조직력이 적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모스크바의 크렘린궁과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를 비롯해서 프라하와 뭄바이 등 세계 각지의 풍경을 미장센으로 삼은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은 그만큼 거대한 스케일을 지닌 블록버스터의 위용을 자랑한다. 반대로 서사 구조는 간결하다. 인류의 멸망을 야기시킴으로써 전세계적인 단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천재 과학자가 핵전쟁을 조장하려 하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단 헌트는 이를 막고자 동분서주한다. 선악이라는 양진영으로 대립하며 뚜렷한 자기 역할을 얻은 캐릭터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명확한 미션을 수행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안에서 각자 자기 진영의 역할을 코스프레한 배우들이 대단한 물량공세를 등에 업고 스턴트 액션을 전시해나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네 번째 속편은 시리즈 안에서 가장 위력적인 액션 시퀀스를 선보이는 작품이다. 극 초반부, 크렘린궁 폭파신으로 파괴적인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이번 작품은 부르즈 칼리파 스턴트신과 이를 잇는 모래폭풍 추격신, 그리고 엘리베이터식 주차장에서 벌어지는 격투신까지, 위력적인 볼거리들을 우월하게 디자인해낸다. 무엇보다도 만화적인 창의력으로 설계된 몇몇 시퀀스가 대단히 인상적인데, 이를 테면 이번 영화에서 가장 화제가 된 부르즈 칼리파 등반 스턴트신의 반중력적인 액션과 거대한 모래폭풍이 밀려오는 한가운데서 보이지 않는 적을 추격하는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그리고 엘리베이터식 주차장에서 뒤엉켜 구르며 펼치는 격투신은 단지 그 위력뿐만 아니라 그 전반적인 액션 시퀀스의 디자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인크레더블’한 인상이다. 이런 이미지의 설계는 ‘픽사’ 출신의 브래드 버드가 연출한 애니메이션 전작들을 연상시킨다. 특히 초반부에 등장하는 공중전화의 변신 광경을 비롯한 몇몇 소품에서 발견되는 위트는 전적으로 그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물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번 작품에서 가장 이질적인 건 바로 역대 시리즈 중 최고의 팀워크를 이룬다는 점이다. 여전히 톰 크루즈의 이단 헌트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전작들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 팀원들은 그의 소품처럼 자리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내는 조직원들의 탄탄하고 유기적인 팀워크를 통해서 미션을 해결해나가는 양상은 시리즈의 쇄신을 예감하게 만들 만큼 신선한 변화에 가깝다. 덕분에 개개인의 조직원 캐릭터들이 극 안에서 발생시키는 영향력 또한 증가했다. 이런 특성 덕분에 이번 작품은 전작들과 차별적인 감정을 얻어내기도 했는데 시종일관 진중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일관되던 전작들과 달리 극 중에서 심심찮게 유머가 발생한다는 것. 이는 사이몬 페그 덕분인데, 긴박한 순간에도 정색하듯 장난스러운 상황이 연출되는 광경 안에서는 대부분 그가 연기한 벤지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단 헌트 못지 않은 가능성을 드러내는 브란트(제레미 레네)와 함께 새로운 팀원으로 확실하게 자리잡은 제인(폴라 패튼)은 시리즈의 차기작을 예고하는 징후나 다름없다. 결국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은 시리즈의 새로운 전환점에 가깝다. 이단 헌트의 원맨쇼 대신 팀워크가 강조된 이번 시리즈는 눈길을 끄는 캐릭터들의 개성을 밑천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다만 여전히 톰 크루즈의 이단 헌트가 차지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그의 체력적 안배가 이 시리즈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한계도 여전하다. 그만큼 새로운 캐릭터들의 활약상을 전시하는 이번 작품이 앞으로 이 시리즈의 미래를 새롭게 제시하는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 물론 드 팔마의 냉소적인 첫 작품을 그리워하는 팬덤 앞에서 이번 작품은 여러 모로 이질적인 결과처럼 인식될 수 있겠지만 스펙터클한 스케일과 다이나믹한 디테일이 공존하는 이번 작품은 시리즈 안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기획으로 인정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미션 임파서블>은 분명 톰 크루즈의 영화다.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도 온 몸을 던지는 톰 크루즈의 열연이 큰 몫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역대 시리즈 중 최고의 팀워크를 이룬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팀원 누구도 이단 헌트의 소품처럼 자리하지 않으며 자신의 임무를 소화해낸다. 액션 시퀀스는 인크레더블한 스케일을 지니고 있음에도 꼼꼼한 디테일을 잊지 않았으며 전반적으로 우월한 퀄리티의 디자인을 뽐낸다. 예고편에서도 자랑했던 두바이 부르즈 칼리파의 빌딩 등반 시퀀스를 비롯해서 장관에 가까운 액션 시퀀스가 네 번 정도 등장하는데, 저마다 장관의 볼거리다. 기존 시리즈의 냉기 서린 분위기를 기대하던 팬의 입장에서는 러닝타임 곳곳에 깨알 같이 자리한 위트가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다. 사이몬 페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듯한데, 긴박함과 장난끼가 어우러진 액션 시퀀스를 보자면 브래드 버드의 ‘픽사’적인 마인드도 일조한 것 같다. 시리즈의 전환점에 가까운, 위력적인 볼거리와 캐릭터의 매력이 공존하는 작품이다.
보스턴의 찰스타운은 가족사업처럼 범죄가 대물림 되는 도시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더그 맥레이(벤 애플렉)도 은행 강도를 저지르다 검거되어 교도소에 수감된 아버지와 같이 역시 범죄의 길로 발을 들인지 오래다. 선택의 여지 없이 은행강도의 길로 들어선 그는 자신의 삶이 인생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지만 발을 빼고 다른 길을 걷는 것 역시 덫과 같은 관계들 때문에 자칫하다 발목이 날아갈 판이라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순탄치 않은 삶에 특별한 인연이 찾아온다. 은행강도 중 현장에 있던 여자 부지점장 클레어(레베카 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 그 사랑이 맥레이에게 어떤 결심을 도모하게 만든다.
저명한 범죄소설작가 데니스 루헤인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가라, 아이야, 가라>를 연출한 벤 애플렉의 감독 데뷔는 성공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해도 좋을 결과였다. 4살 소녀의 실종을 통해 격발되는 미스터리 범죄물인 이 작품은 사회의 온갖 모순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동시에 이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던지는 원작의 세계관을 인상적으로 포착하며 배우 벤 애플렉의 연출력에 대한 의문을 완전히 집어 던지게 만든 수작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다시 유명한 범죄소설작가 척 호건의 <PRINCE OF THIEVES>를 자신의 두 번째 연출작으로 선택한 벤 애플렉의 하이스트 무비 <타운>은 전작과 일관된 태도가 발견되는 동시에 또 다른 그의 연출적 시도가 동원된 작품이다.
보스턴 출신의 벤 애플렉이 보스턴을 주무대로 삼는 데니스 루헤인과 척 호건의 작품을 차례대로 선택한 건 분명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단 두 편의 영화를 만든 벤 애플렉을 거장의 반열로 올리는 건 성급한 일이겠지만 그가 만든 두 작품은 마치 뉴욕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와 같은 길을 보스턴에서 걷겠다는 신념을 선언하는 야심처럼 보인다. 사회적인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동시에 그 부조리 속에 놓인 어느 개인의 본성을 끌어내는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적 시선은 벤 애플렉이 연출한 두 편의 작품에서 엿보인다. 또한 이 모든 현실적 관점이 휴머니즘을 기초로 한 드라마로 유려하게 풀어낸다는 점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흔적을 의심하게 만든다.
전작과의 우열을 논하자면 <타운>은 <가라, 아이야, 가라>보다 더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꺼려지는 작품이다. 하지만 <타운>은 전작에 비해 보다 생동감이 넘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영화의 초반과 후반부를 장악한 사실적인 총격신의 연출 덕분일 것이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는 총격신은 현장에 위치한 3자의 시선을 빌려 사건을 중계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부여할 정도로 빼어난 연출력을 선사하고 있다. 또한 사건의 중심에 놓인 갱단의 평범한 일상을 정적하게 비추던 카메라가 같은 방식으로 담담하게 범죄 현장을 중계할 때, 하나의 시선에 놓인 정보의 차이로 인해 파격적인 감상이 도모된다. 연속적인 삶의 일상 속에서 분리된 일상을 넘나드는 갱단의 이야기는 이런 연출 방식을 통해 보다 현실적인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타운>은 문제의식을 던지는 전작과 달리 보다 적극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다. 범죄의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인물에 대한 연민을 강요하기 보단 그 인물의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이 빚어내는 파국을 조명하고 아이러니한 심정을 고스란히 객석의 여운으로 승화시킨다. 스토리의 운용면에서 인위적인 장치적 설정들이 드러나긴 하지만 <타운>은 무리 없이 흐르는 인과를 설득시키는 작품이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스토리 라인 속에서 드라마틱한 감정적 여운과 공정한 사회적 현실에 대한 의식을 남긴다는 점에서 <타운>은 좋은 각색물의 수준을 넘어선 수작이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에서 또 한번 자신의 재능을 입증해낸 벤 애플렉은 자신이 연출한 전작이 결코 우연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해내는데 성공했다.
자신의 심장을 겨누는 탄환의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자신의 몸을 찢이길 폭탄 위에 서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이라크 한복판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미군 가운데서도 EOD(폭발물 전담 제거반)는 모든 생의 조건을 내걸고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직책이다. 정체가 불확실한 폭발물이 발견된 현장에서 그들은 생존에 대한 갈망마저도 잠시 내려놓듯 숨을 죽이고 눈 앞에 놓인 공포와 매일 같이 대면해야 한다. 긴박한 임무의 연속 안에서 감각은 무뎌지고, 되레 공포는 잦아드든 것 같지만 종종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터져나오는 실전 상황을 대면하다 보면 잠자듯 죽은 공포가 자신의 온 몸을 지배한지 오래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최근 개봉된 <그린 존>의 핸드헬드가 현장감의 간접적 체험을 가능케 하는 쾌감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 <허트 로커>의 핸드헬드는 불안에서 야기되는 심리적 통증의 끊임없는 주입에 목적을 두고 있다. <허트 로커>의 핸드헬드는 <클로버필드>의 그것과 동일하다. 보이지 않는 실체를 찾아 두서 없이 고개를 흔들어 대는 카메라는 끊임없이 불안한 심리를 수집해 낸다. 그 불안한 심리는 참혹한 현상의 목격을 대면할 것이라는 불안의 징후를 파편처럼 쏟아낸다. 폭발물을 처리하는 EOD대원들의 동선을 따라 좇는 그 영상을 끊임없이 목격해야 할 관객들은 그 영상을 통해 통증과도 같은 긴장을 대면해야 한다. 현장감의 재현은 (어쩔 수 없이) 체험적인 쾌감을 동반한다. <허트 로커>의 현장감 또한 그 쾌감의 속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최대한 쾌감에서 거리를 둔, 끝없는 통증의 환기라는 점에서 다른 차원의 의미가 확보된다.
거친 질감의 입자가 떠도는 스크린의 핸드헬드 영상은 이라크 바그다드의 풍경을 흔들며 영화로 들어선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응시하며 잡담을 나누는 미군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은 시내 한가운데 매설된 폭발물을 해체하러 온 폭발물 전담 제거반이다. 이런 현장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유롭게 농담을 나누지만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새어나온다.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 부풀어 오른 긴장감이 도처에서 웅크리고 있다. 그 시야에 포착되는 모든 상들은 의심스런 징후로 포착된다. 긴장을 감춘 표정으로 농담을 나누지만 주변의 작은 움직임 앞에서도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역력한 긴장감이 새어 나온다. 예감은 현실이 된다. 비극에 대한 의심은 곧 목격으로 돌변한다. 터져나간 폭탄은 선혈이 가득한 주검을 남기고, 여유를 위장하던 대화는 절규로 변질된다. <허트 로커>는 바로 그 공포의 현장 한가운데 놓인 덕분에 자신이 유지할 수 있는 생의 너비를 확신하지 못하고 탈출을 꿈꾸거나 그 의식에 매몰된 인간들의 심리를 첨예하게 파고 든다.
‘포스트 9.11’ 시대를 맞이한 미국영화들은 그 날의 테러리즘으로부터 잉태된 공포의 성장과 전이를 끊임없이 주시해 왔다. 뉴욕에서 폭발한 테러리즘의 불씨는 전쟁으로 번져 나간 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도 이라크의 도처에 살아남아 타오르고 있다. 이라크는 화약고 같은 땅이다.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에게도 그곳은 위협이 매설된 공포의 지뢰밭이다. <허트 로커>는 이라크를 점령했다 말하는 미 정부의 발표와 달리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는 미군 병사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들에게 이라크는 주둔지라기 보단 감옥이다. 그들은 항상 자신이 당장 보고 있는 풍경이 생의 마지막 목격이 될지도 모른다는 잠재적 위협에 시달린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 그 통증은 곧 잊을 수 없는 쾌감으로 변질된다. 마치 체내에 흡수된 뒤, 축적될 뿐 배출되지 않는 중독성 물질처럼 전장에서의 긴장감이 생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삶을 꿰찬다. 이는 결과적으로 무시무시한 불행이다. 영원히 그 현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포 속을 떠도는 유령의 삶으로서 개인은 철저히 속박된다.
공포는 마음으로 감지되는 통증이다. 뇌를 통한 사고적 판단 이전에 감각을 통해 전이되며 감각적으로 반응된다. 뇌의 판단이나 신경의 전달보다도 빠른 육체의 떨림과 경직으로 예감되는 긴장을 통해 본능적으로 환기된다. 지각과 사고로서 전달되는 전기 신호이기 이전에 자율신경의 반응이다. 전쟁은 공포다. 인간은 명분을 걸고 전쟁을 수행하지만 그 현장에 놓인 인간은 끝없는 공포와 싸우며 생존에 대한 욕구를 되새김질한다. 실리나 정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전쟁을 결정하는 자와 전쟁을 수행하는 자 사이에는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통증의 간극이 자리한다. 그 자리에 서는 순간, 생의 시계는 움직임을 보류한다. 그리고 그 공포에 노출된 이들은 서서히 잠식당하듯, 그 공포에 무뎌짐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고, 그 긴장의 역치 상태에 중독된다.
거대한 폭력의 목격과 체험을 통해 개인의 모든 삶이 파괴되고 증발되며 남은 것은 결국 공포 속에서 거듭 분비된 아드레날린의 과잉적 효과에 예속돼버린 어느 개인들의 삶이다. 전쟁이 멈추지 않는 이상, 그 중독도 결코 멈출 수 없다. 그렇게 개인들은 체제가 만들어낸 거대한 음모적 현실 안에서 자각조차 잊은 채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나간다. <허트 로커>는 여전히 달궈지고 있는 화약고와 같은 위태로운 현실을 겨냥하며 그 현실 위에서 파편 같은 긴장 속을 통증처럼 받아들이는 누군가의 삶을 주시한다. 죽을 수 없지만 사는 것도 아닌, 살아있는 시체들의 땅 위에서 진짜 진실을 목격하기 위해 카메라는 쉼없이 흔들리고 달려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