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프랭코는 수많은 학업을 병행하면서도 자신의 커리어를 다방면으로 넓혀나갔다. 빠르고 철저하게 자신의 영역을 점유해나갔다. 그 모든 과정을 즐기는 것, 그것이 그를 정의할 수 없게 만드는 궁극의 에너지원이다.
영광은 일찍 찾아왔다. TV영화 <제임스 딘>(2001)의 타이틀롤을 맡은 제임스 프랭코는 전설적인 미남 스타가 남긴 여운을 재현하며 ‘제2의 제임스 딘’이란 호평을 얻었고, 골든글로브 트로피까지 거머쥐었다. 이는 그를 메소드 연기의 포로로 만들었다. 로버트 드니로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시티 바이 더 씨>(2002)에서 마약쟁이를 연기하기 위해서 중독자들과 몰려다니며 길거리를 전전했고,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출 데뷔작 <소니>(2002)를 준비하고자 게이 스트립 클럽에 드나들며 스트리퍼들의 행위와 습성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리고 스파이더맨 슈트를 입고자 오디션을 봤지만 결국 해리 오스본 역으로 캐스팅된 <스파이더맨>(2002)은 그의 전세계적인 출세작이 됐다. 하지만 샘 레이미가 <스파이더맨> 트릴로지를 완성하기까지 5년 동안 프랭코가 이룬 경력들이란 대부분 무색한 것들이었다.
“연기가 내 전부였을 때, 스스로에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거듭 말하면서도 내 연기가 나를 규정한다고 생각했다.” 세 편의 출연작이 공개됐던 2006년은 프랭코에게 있어서 대단한 실망을 안긴 한 해였다. <라파예트>를 준비하며 비행조종사 자격증까지 얻은 그는 <아나폴리스>를 위해서 8개월 간 링에서 복싱을 배웠고, 검술을 연마한 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출연했다. 결과적으로 이 세 작품은 흥행과 비평의 면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영화가 잘 되면 행복했고 그렇지 않으면 화가 났다. 배우로서 어떻게든 완성된 결과물에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이 날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그저 미친 짓이었다.” 그리고 그는 의외의 결단을 내린다.
2006년 프랭코는 부모의 바람을 등지고 10년 전에 자퇴했던 캘리포니아의 UCLA로 다시 돌아가서 철저하게 학업에 매진했다. 주전공인 문학과 창작뿐만 아니라 과학론, 프랑스어 등 다양한 학문들을 집어삼키듯 공부해나갔고 끝내 62학점을 이수했다. UCLA 수료 후, 프랭코는 뉴욕으로 거처를 옮겨서 세 개 대학을 옮겨 다니며 문학과 영화, 극작을 공부한다. 심지어 노스캐롤라이나에 머물 당시에는 잠시 시를 공부하기도 했다. 그의 수학은 촬영장에서도 이어졌다. <스파이더맨 3>(2007)를 촬영하는 세트 안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존 밀턴과 제프리 초서의 시를 읽었고, <파인애플 익스프레스>(2008)를 촬영하며 16세기 영국 문학을, <밀크>(2008)의 세트장에서는 토마스 핀천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메소드 연기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완벽한 연기를 위해서 연기적 지식으로 자신을 무장시켰다.
주드 아패토우가 제임스 프랭코를 처음 본 건 12년 전이었다. 아패토우는 의아했다. 멀쩡하다 못해서 여자들의 시선을 단박에 끌어낼만한 매력적인 20대 청년이 어째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일까. 아패토우는 당시 TV시리즈 <프릭스 앤 긱스>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부연하자면, <프릭스 앤 긱스>는 제목 그대로 괴물과 괴짜 같은, 문제아들과 얼간이들로 이뤄진, 덜 자란 아이들의 모자란 일상을 엿보는 너드 코미디물이었다. 그러니까 아패토우는 그가 이 작품에 출연을 희망한다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프랭코는 원작자인 폴 페이그가 졸업한 고등학교가 있는 미시간까지 날아가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조사했다. 그런 그를 보고 모두다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결코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저주 받은 컬트 코미디로 여전히 회자되는 <프릭스 앤 긱스>에 출연하며 주드 아패토우 사단의 웃기는 사내들과 맺은 인연은 결국 대단한 밑천으로 돌아왔다. 이 잘생긴 배우를 가장 고전하던 시기로부터 구원한 것이 바로 그 아패토우 사단의 <파인애플 익스프레스>(2008)였다. 세스 로건과 아패토우가 건넨 시나리오를 받아 든 프랭코는 하루 종일 약에 찌든 채 허허실실하며 얼간이 짓을 해대다가 진창 같은 상황 속으로 굴러들어가는 마약상 사울을 연기하며 새로운 연기적 자아를 얻었다. 치열한 준비 과정과 진지한 캐릭터를 도맡았던 지난 경력들과 달리 반쯤은 맛이 간 너드 역할이 일으킨 대단한 반향은 프랭코의 가치관을 흔들었다. “거기에는 많은 자유와 즉흥성, 창의성이 있었고 다른 이들의 조언이 수렴될만한 여지도 있었다.”
구스 반 산트의 <밀크>(2008)에서 하비 밀크의 애인 스콧 스미스로 등장한 프랭코는 그 뒤로도 <하울>(2010)의 비트제너레이션 작가 앨런 긴스버그 역으로 동성애자 역할을 맡았다. 이 두 독립영화는 동성애자가 등장함과 동시에 실존인물을 극화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는 프랭코의 성정체성에 대한 루머로 번져나갔다. 하지만 되레 프랭코는 이런 반응에 관심을 보였다. “나는 반규범적인 생활양식 대로 살아가는 이 사람들이 반대 세력을 다루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그저 내가 게이일 거라 안다 해도.” 프랭코는 연기를 벗어나서 자신의 행위 자체가 끼치는 사회적 영향력을 거대한 예술적 행위로 인식하고 있다. 2009년 9월부터 낮 시간에 방영되는 3류 연속극 <제너럴 호스피털>에 프랭코라는 동명의 인물로 등장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는 현실과 허구 사이에 놓인 배우와 캐릭터 사이의 상호연관관계와 그것이 작품의 안팎으로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탐구적 흥미를 직접 칼럼으로 써내기도 했다.
“그는 이미 잠정적으로 정해진 캐릭터를 연기했기에 새로운 가능성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걸 잘 점령했다. 기적에 가까운 연기였다.” 협곡 사이로 미끄러지다 떨어져 내린 돌에 팔이 끼어서 사투를 벌이다 끝내 자신의 팔을 잘라내고 탈출한 아론 랄스턴의 실화를 영화화한 <127시간>(2010)의 대니 보일은 프랭코를 극찬했다. 비행기를 타고 뉴욕과 촬영지를 오가며 연기한 그는 틈나는 대로 마르셸 프루스트를 읽어가면서 바위 사이에 갇힌 한 남자의 고립된 감정을 감각적으로 환기시킨다. 이 연기로 첫 오스카 후보에 오른 프랭코는 애파토우 사단의 코믹 판타지물 <유어 하이니스>(2010)로 한숨을 돌리고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으로 오랜 시리즈의 기원을 세우는 일에 동참했다.
최근 예일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이수한 프랭코는 뉴욕대에서 시를 영화로 변환하는 강의를 맡았다. 지난 해에는 단편소설을 써내기도 했다. 현재 그는 연기 외에도 연출에 관심이 많다. 제임스 딘의 <이유없는 반항>(1955)에 출연했던 살 미네오에 관한 작품을 연출하고 베니스 오리종티 부문에 출품했다. “연기할 수 있는 역할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도전이며 그 도전들은 보람이고 즐거움이다.” 그는 안주하지도, 서두르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모든 것을 즐기는, 정의할 수 없는 에너지를 지닌 배우, 그가 제임스 프랭코다.
원숭이가 지배하는 세계에 불시착한 사람들. 그 세계에서의 탈출을 고대하며 행동에 옮기던 그들은 자신이 발 디딘 땅의 정체를 알아버린 뒤, 자신의 안식을 위해줄 영토가 없음을 절실하게 체감한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블의 원작을 영화화한 <혹성탈출>의 충격적인 결말은 인간사와 지구사를 동일시해온 인류에게 있어서 경종을 울릴만한 사건이었다. 1968년, <혹성탈출>이 첫 작품의 상영 이후로 여섯 편에 달하는 시리즈로 진전된 것도 그런 반향이 만들어낸 추진력 덕분이었다. 물론 이 시리즈가 시초가 된 첫 작품 이후로 팀 버튼의 리메이크작을 포함한 어떤 것도 그 이상의 흥미를 자아낸 것은 아니었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하, <진화의 시작>)에 대한 흥미와 의심의 눈길이 모이는 것도 그런 전례에서 기인한다.
<진화의 시작>과 팀 버튼의 <혹성탈출>이 지닌 공통점은 두 작품이 과거의 오리지널보다도 진화된 영상 기술을 담보로 보다 세련된 이미지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진화의 시작>은 수작업으로 완성된 침팬지의 탈을 쓰고 연기하던 과거의 시리즈물에 비해서 모션 캡처 퍼포먼스를 활용한 디지털 캐릭터로 보다 사실적인 묘사력을 얻어냈다. <진화의 시작>에서 사실적인 묘사란 영화를 위한 수식어가 아니라 필수적 요소처럼 보인다. 팀 버튼의 그것을 포함해서 과거의 시리즈가 가상적인 메타포의 세계관처럼 보이는 탓에 퇴보적인 VFX의 요소가 되레 그 가상성에 어떤 특성을 부여하는 것과 달리 <진화의 시작>은 영화 밖의 현실을 영화로부터 환기시켜야 될 만큼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이미지가 요구되는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화의 시작>은 오늘날의 진화한 디지털 비주얼을 통해 현실화된 프로젝트라 할만하다.
<스타워즈>의 프리퀄 3부작이나 J.J. 에이브람스의 <스타 트렉>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리지널 프랜차이즈보다도 앞선 근본을 그린 프리퀄 무비가 그 기원보다도 나은 영상 기술로 구현된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진화의 시작>도 그렇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는 새로운 예감을 품게 만든다. <진화의 시작>은 1968년의 그것을 이루는 세계관이 어디서 출발했는가를 되짚는, 보다 정확하게는 그 기원의 역사를 뒤늦게 기획해낸 <혹성탈출>의 프리퀄이다. 하지만 <진화의 시작>과 <혹성탈출>은 분리된 세계관처럼 보인다. 이 작품을 단순히 프리퀄이라고만 정의할 수 없는 까닭도 여기 있다. 시리즈의 원류가 된 <혹성탈출>을 통해서 설명하자면 <진화의 시작>은 우리가 목격한 그 디스토피아의 원류를 그리는 프리퀄이다. 동시에 <진화의 시작>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도 상관없는 시리즈의 리부트라 논해도 좋을 작품이다.
현시대의 풍경으로부터 멀리 나아간 과거의 시리즈와 달리 <진화의 시작>이 작금의 풍경을 그릇 삼아 영화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이는 이 작품 이후에 이어질 (가능성이 충만해진) 새로운 시리즈의 이미지가 보다 현실적인 환경 안에서 세워질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해낸 셈이다. <진화의 시작>은 화석 같던 시리즈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은, 동시에 그 모든 이미지들을 새롭게 단장해낸 작품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런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건 결국 <진화의 시작>이 그럴 만한 완성도를 지닌 작품이기 때문이다.
<진화의 시작>은 과거의 시리즈에 대한 경험 유무와 관계 없이 저마다의 흥미를 얻어낼 수 있는 작품이다. 그 끝을 알고 있는 관객에게 <진화의 시작>이 단순히 자신이 봤던 그 작품의 원점을 살필 수 있는 기회에 가깝다. <혹성탈출> 속에서 그려지는 인류의 처참한 상황은 <진화의 시작> 속의 침팬지가 처한 상황과 일 대 일로 조응한다. <진화의 시작>은 <혹성탈출>의 메타포가 된 현실을 영화에 담아내는 동시에 그 메타포를 영화적 모티프처럼 응용해낸다. <혹성탈출>이 인간과 유인원들의 역전된 관계를 그리며 오늘날의 인류가 유인원(, 그리고 여타의 동물들)에게 가하는 일방적인 폭력에서 메타포를 얻은 우화임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프리퀄의 서사를 통해서 그 세계관이 우화의 수준을 넘어서 현실적인 세계관으로 안착시킨다.
(<혹성탈출>을 아는 대다수의 관객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진화의 시작>은 유인원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인간의 몰락이 어디서 시작됐는가에 관한 영화다.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인해 우연 같은 필연으로 지능을 얻게 된 침팬지가 인류를 제압하고 자신들의 세계를 건설하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는 인간에 의해서 의학적 실험 대상으로 유린 당하는 침팬지들이 인간의 손에 의해 개발된 의학적 산물로 인해서 진화적인 사고를 얻게 되고 자신들의 생존권을 주장하는 과정을 논리적인 인과로서 설득해낸다. 동시에 진화한 유인원들이 인류의 주도권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세계를 건설해내는 과정이 생략된 덕분에 현실의 메타포로 머무르던 <혹성탈출>의 세계관에 완전한 사실성을 부여한다. <진화의 시작>은 단순히 침팬지들의 진화로 인한 세계의 전복이 아니라 자신들의 재능으로 인해서 스스로 몰락하게 되는 인류의 과정을 그린다. 단순히 시리즈의 서사적 빈칸을 메우는 수준을 넘어서 그 논리적인 공백을 메워버리는, 그야말로 완벽한 프리퀄인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어떠한 인물들보다도 매력적인 캐릭터 시저는 프로그래밍된 가상의 눈동자를 통해서 어느 인간보다도 진실된 감정을 전달해낸다. 탄탄한 서사가 <진화의 시작>을 이루는 육체라면, 앤디 서키스가 연기하는 디지털 캐릭터 침팬지 시저를 비롯한 유인원 캐릭터들은 영화를 밀고 나가는 심장이다. 노예 해방 운동에 가까운 계급적인 투쟁처럼 발전해나가는 침팬지들의 반인류적인 활약은 그것을 지켜보는 인간 관객들에게 경종을 울릴 만큼 뜨거운 감정을 전하는 동시에 흥분할만한 긴장감을 전한다. 민첩하고 유연한 움직임을 지닌 침팬지들이 주변의 환경을 이용해서 인간의 공격에 맞서고 되레 역습을 가하는 이미지는 탁월한 묘사력 자체만으로도 역설적인 경고인 셈이다. 특히 클라이맥스라 할만한 금문교 전투 신은 실로 압권이다. 카리스마가 대단한 리더로 진화한 시저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이는 유인원들의 활약은 심장의 박동처럼 경쾌하고, 그 사이에서 희생을 결심하고 서로를 고무시키는 그들의 소통 방식은 그 자체로 마음을 달군다. 특히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객석마저 장악하는 시저의 포효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될만한 명장면이다.
<진화의 시작>은 유명 시리즈의 프리퀄 수준을 넘어서 동물적인 감각과 이성적인 사고를 배합해낸 진화적인 블록버스터다. 이미 그 이후를 알고 있음에도 흥미를 사로잡는 시작은 소름 돋는 전율로 다다라 끝을 맺는다. 무엇보다도 발달된 CG기술의 남용을 전시하는 할리우드발 블록버스터 광풍 속에서도 <진화의 시작>과 같은 작품은 그 기술적인 가치의 활용성을 설득시키고도 남는다. 그리고 <진화의 시작>을 통해서 <혹성탈출>은 다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한 시리즈로 재탄생했다. 진화란 이런 것이다.
한 남자가 있었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는 인텔의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진짜 존재감을 다른 곳에서 찾았다. 그는 언제나 틈나는 대로 무작정 여행을 떠나고 누군가가 정해놓지 않은 길을 개척하며 생의 쾌감을 좇아갔다. 그런 어느 날처럼 그는 무작정 유타주의 블루존 캐넌으로 도보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예기치 않게 동행을 만나 자신만의 루트 안에서 그들에게 새로운 쾌감을 안긴 뒤, 또 다른 영역으로 혼자 떠나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던 그 사내는 위풍당당하게 협곡을 건너기 위해 틈새에 놓인 바위 위에 발을 내디딘다. 순간 발을 지탱하던 바위가 떨어졌고 그는 협곡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자신의 오른손이 협곡 사이에 끼인 바위 틈새로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통증보다도 경악스러운 건 결코 손을 뺄 수 없다는 것. 누구도 찾지 않는 깊은 협곡 속에서 오른팔을 볼모로 남자는 갇힌다. 그리고 결국 그 남자는 127시간을 버티다 자신의 괴사된 오른팔을 잘라내고 사막을 걸어 나와서 비로소 구조된다. 이는 실화다. 아론 랠스톤이 바로 그다.
15분. <127시간>이라는 영화의 타이틀은 영화가 시작되고, 영화의 타이틀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을 잊어버렸을 즈음에서나 떠오른다. <127시간>은 거기서 시작되는 영화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스타일리스트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시 새롭게 구축해내는데 성공한 대니 보일은 <127시간>을 통해 자신만의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동시에 서사적 구조의 운용력을 탁월하게 검증해낸다. 실화에 바탕을 둔 <127시간>은 그 사연만으로도, 오른팔을 잘라내고 자신의 생명을 구해냈다는 어떤 남자의 진짜 사연만으로도 특별해질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대니 보일의, 그리고 제임스 프랭코가 연기한 <127시간>은 단지 그 사연을 재현한 영화라는 것으로만 언급될 작품이 아니다. 혹은 대니 보일의 스타일리쉬한 영상, 제임스 프랭코의 괄목할만한 연기, A.R.라만의 탁월한 음악도 주인공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결과적으로 그 남자의 생이 증명한 무언가를 위한 것이다.
오른팔이 협곡과 바위 사이에 끼인 채, 협곡에 갇힌 남자가 탈출하기까지 견뎌야 했던 127시간의 여정을 90여분의 러닝 타임 내에 녹여낸 <127시간>은 사실 어느 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매우 심심해 보이는 이야기인 것도 사실이다. 최근 개봉된 <베리드>와 비교되기도 하는 -대조가 아닌- 이 작품은 하나의 공간에 놓여 있으나 그 공간적인 한계를 다른 방식으로 극복해내는, 어쩌면 그것을 통해 작품의 아이덴티티를 보다 확고하게 구축하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라 여기던 사내가 좁은 협곡에 갇힌 채 자신의 생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야금야금 좀먹어 가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오른팔을 버리는 자해에 가까운 탈출을 감행함으로써 자신의 생을 구원하게 된다는 과정을 재현하는 <127시간>은 단지 아론 랠스톤이라는 실화적 인물을 위한 장이 아니다.
<127시간>은 단지 어느 한 인물의 극한에 다다르는 자기 극복의 체험기가 아닌, 극한의 위기 속에서 생의 끝에 다다를 수도 있었던 어느 한 인간의 승리를 전 인류적인 승리로 승화시키는 작품이다. 협곡과 바위 사이에 끼인 자신의 오른팔을 빼내고자 안간힘을 쓰던 아론이 누군가의 구조를 기다리며 버티다 그 사이에서 자신의 지난 날을 돌아보게 되고 자신이 당연하다 여기던 햇살 한줌의 은혜와 가족이라는 존재의 위안을 깨닫다 결국 생을 위해 자신의 오른팔을 버리고 지상으로 올라와 누군가의 도움으로 생을 되찾고 그 이상의 생을 깨닫게 되는 여정이란 그 참담했던 지난 날만큼이나 아름답고 숭고한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자신의 팔을 자르는 남자의 모습이 처참하기 보단 통쾌함으로 느껴진다는 건 <127시간>이 그만큼 인간의 한계, 즉 자기 육체의 일부를 포기하고서도 생의 전부를 놓을 수 없다는 인간의 집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쾌감 덕분일 것이다. 이는 육체의 일부를 상실하고도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가는 누군가의 삶을 지켜보는 것과 유사하다. 결과적으로 완전한 삶을 이루는 기본적인 조건에서 벗어나서도 결과적으로 삶은 가능한 것이라는 일종의 완전성에 대한 해방감이 전달된다. <127시간>은 그 실화 자체가 주는 일종의 경이감을 보다 현실적인 체험 혹은 체감으로 전달하는 진정한 인생실용서라 해도 좋을 것이다.
대니 보일의 스타일리시한 감각은 <127시간>에서도 빼어난 능력을 자랑한다. 분할컷으로 시작되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중간중간 다각도의 시점으로 상황을 묘사해내는 연출력은 <127시간>의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고 영화에 역동적인 인상을 부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가장 뛰어난 자질이다. 또한 홀로 협곡 속에 갇힌 채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감정적 변화를 겪은 실존인물을 대신해 그런 과정을 생생하게 대변해낸 제임스 프랭코의 연기 또한 탁월하다. 하지만 <127시간>을 이루는 모든 훌륭한 요소들은 하나 같이 어떤 하나의 의미를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들에 가깝다. 그건 바로 인간의 존엄성이다. 식상하고 지루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127시간>은 그 심플한 사연을 이토록 거대한 가치로 승화시키는 영화다. 놀라운 실화의 의미를 넘어선 그 의미를 재발견하고 보다 쉽게 이해시킨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실화다. 적어도 당신을 감동시키기 위해 조작된 사연이 아니다. 그러니 깨달아야 한다. 당신의 오른팔을 내주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 그건 바로 지금 당신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