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조기 문양의 슈트를 입은 미국산 슈퍼히어로라니, 20세기 후반 즈음까지 유효했던 ‘인디펜던스 데이’ 필이 충만한 시절에나 가능했을 듯한 팍스 아메리카나 히어로물이 아닐까 의심한다면 그 의심이 틀린 것은 아니다. 사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는 이름만으로도 딜레마이자 아이러니다. 미국적 영웅주의를 대변하는 듯한 ‘캡틴 아메리카’라는 이름의 상징성은 되레 미국의 영웅주의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지침을 행동으로써 증명하는 도덕적 헌신으로 역전된다. <퍼스트 어벤져>는 미국산 슈퍼히어로들의 원조격인, 바로 그 ‘캡틴 아메리카’에 대한 영화다. 물론 온전히 ‘캡틴 아메리카’만을 위한 영화인 건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에 맞선 미국과 연합군을 이끈 캡틴 아메리카의 탄생과 활약상을 그린 <퍼스트 어벤져>는 이 오래된 영웅의 낡은 면모를 새롭게 단장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내기 보단 복고적인 영웅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정면승부를 감행한다. 그리고 굴하지 않는 의지로 악의에 맞서고, 강단 있는 헌신을 갖춘 인물의 진지함이 ‘캡틴 아메리카’라는 히어로로서의 자격과 연결될 때, 그리고 그러한 인물이 이런 소망을 스스로 심각하게 어필할 때, 영화의 이러한 태도는 전략이라기 보단 필요에 의한 결과였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촌스럽게 보일 수 있는 구시대의 영웅을 현시대에 재현하겠다는 기획은 그 시대의 감수성, 더 정확하게는 구시대적인 복고물의 특성을 반영한 영화의 전략을 통해서 성공적인 제작으로 나아갔다.
<퍼스트 어벤져>는 여느 슈퍼히어로물들, 특히 최근 <어벤져스>의 제작과 함께 급물살을 탄 마블의 히어로물들과 비교해도 액션 시퀀스의 빈도가 약해 보인다. 영화는 캡틴 아메리카라는 히어로의 기원과 활약상, 그리고 그가 긴 세월을 넘어 오늘날을 현대 21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어벤져스의 일원이 되기까지의 서사를 기술하는데 집중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는 캡틴 아메리카와 대적한 악의 세력, 즉 레드 스컬과 같은 악역 캐릭터가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이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경향이 캡틴 아메리카의 활약을 지켜보는 재미 또한 반감시키는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퍼스트 어벤져>는 분명 액션보다는 캐릭터의 고뇌와 운명적인 서사가 주를 이루는 드라마에 가깝다. 특히나 이 영화에서 액션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건 멜로다. 이는 앞으로 이어질 <어벤져스>에서도 캡틴 아메리카라는 히어로에게 결핍과 고독을 부여하는 주요한 요소로 작동될 것이다.
<어벤져스>로 가는 징검다리와 같은 근래의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슈퍼히어로물들이 하나 같이 독립적인 아이덴티티보다도 거대한 이벤트를 위한 전야제 성격의 도구로 매몰되는 인상을 보였던 것처럼 <퍼스트 어벤져>도 그런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어벤져스>를 위한 예고편으로서의 기능이 노골적인 이 작품은 동시에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의 당위를 설득해내고 그 캐릭터가 지닌 능력을 전시하는 프리퀄로서의 기능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또한 <어벤져스>의 마지막 떡밥, 즉 <아이언맨>시리즈의 토니 스타크의 선친인 하워드 스타크가 등장하고, <아이언맨2>에서 등장하는 슈퍼 쉴드를 들고 싸우는 캡틴 아메리카의 모습, 그리고 <토르>의 쿠키에서 등장했던 코스믹 큐브까지, 이 모든 조각들을 하나씩 수집해나가며 <어벤져스>를 기대하고 있을 어떤 관객들에게 <퍼스트 어벤져>는 또 한번의 유효한 이벤트다. 특히 엔딩 크레딧 이후에 공개되는 <어벤져스> 맛보기 영상은 이 모든 징검다리의 여정 끝에 다다른 건너편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마블 히어로 규합을 위한 마지막 영웅 결의, 이 정도 떡밥은 물어야 제 맛이다.
늑대인간은 드라큘라와 함께 서구의 고전적인 서스펜스의 소재로서 이야기를 통해 장수를 누려왔다. <울프맨>은 이 고전적 소재가 현대에서도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가를 설득하고자 하는 작품 같다. 1941년, 조지 와그너가 연출한 동명원작을 리메이크한 <울프맨>은 ‘랩 디졸브(Lap Dissolve)’ 기법을 활용하며 당대 영상기법의 교과서적 선례로 추앙받았던 원작의 시대로부터 현격하게 진화된 CG기술력을 토대로 현대적인 영상기술의 발전을 증명하면서도 고전적인 특수분장기법을 포용함으로써 클래식한 이미지를 구현해낸다. 원작이 동시대 안에서 파격적인 가치를 증명했던 것과 달리 <울프맨>은 되레 복고적인 가치를 어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형식적 태도는 원작의 형태를 수용한다는 점에서 리메이크라는 방식의 가치를 생산해낸다.
사실 <울프맨>은 서사적인 측면에서도 원작의 자장 안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10여 년 간,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로렌스(베네치오 델 토로)에게 동생이 실종됐다는 비보가 전해지고, 이로 인해 로렌스는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로 인해 아버지 존(안소니 홉킨스)과 재회하는 로렌스는 괴기한 사건에 휘말림과 동시에 아버지와 관련된 트라우마에 다시 사로잡히게 된다. 큰 틀 안에서 원작과 특별한 차이를 두지 않는 서사는 딱히 그 원작을 경험해보지 못했을 현대의 젊은 관객들에게도 낯설게 느껴질 만한 것이 아니다. <울프맨>은 전형적인 늑대인간 이야기를 정통적으로 계승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소재가 잉태한 스토리의 원형에 근접한 작품인 까닭이다. 예기치 않게 늑대인간의 운명에 속박돼 버린 사내의 비극적 운명론, 그리고 그 위에 덧입혀질 로맨스적 비극 등은 하나 같이 고전적인 소재의 전형성을 설명하기 좋은 사례에 가깝다.
물론 <울프맨>이 원작의 서사적 육체에 온전히 빙의된 것만은 아니다. 변형된 캐릭터의 이름은 자처하고라도, 로렌스와 대립각의 위치에 선 아버지 존의 캐릭터의 변화는 원작과 <울프맨>사이의 정서적 거리감을 이루는 가장 큰 수단이다. 액자구성에 가까운 아버지의 서사에 비극적인 감정선을 부여한 원작과 달리 <울프맨>은 철저하게 존에게서 비극적인 감정선을 배척시킨다.그는 <울프맨>에서 로렌스의 분노를 야기시키고 그의 비극성과 폭력성을 보다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대립각으로서 보다 강한 존재감을 설득한다. 동시에 존을 연기하는 안소니 홉킨스는 이런 영화의 의도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할만한 연기를 선보인다. 이런 캐릭터의 완성도는 결말부에 연출되는 파국적 정서를 보다 강력하게 보좌하는 것이기도 하다.
<울프맨>은 CG를 비롯한 현대적 영상기술을 전시하며 늑대인간의 변신이나 폭주가 발생시키는 잔인한 볼거리를 부각시키기 보다도 고전적인 서사와 문학적 비극의 연출에 보다 적극적이다. 늑대인간이 된 인간의 비극적 운명론과 오이디푸스적인 트라우마, 그리고 멜로적 파토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정서적 무게가 중후한 시대적 이미지를 포착하는 영상을 곁들이며 <울프맨>에 앤티크(antique)한 가치를 부여한다. 실제로 로렌스가 배우로서 <햄릿>의 무대에 서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는 <울프맨>은 마치 세익스피어의 비극적 딜레마가 극적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울프맨>이 추구한 과거지향적인 방식의 수용은 때때로 낡은 산물이라는 인식을 온전히 차단해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늑대인간이라는 고전적 소재의 낡은 감성 덕분일 수도 있겠지만 고전적인 연출을 지향하는 영화의 서사적 투박함에서 기인한 문제이기도 하다. 비극적 정서를 지향한 서사적 의도는 일면 비범한 구석이 있지만 그것을 탄탄하게 여며야 할 서사적 진전에서 느슨한 간극들이 발견된다. 또한 늑대인간이 연출하는 서스펜스적 긴장감과 액션의 박진감을 묘사하는데 많은 러닝타임을 할애하기 보다도 개인의 트라우마와 딜레마를 정신분열저인 이미지로 묘사하는데 공을 들이기도 하는 양상이 때때로 혼란스럽다. 고전적인 서사의 양식을 수용하겠다는 극적 의도와 달리 인물의 정서는 현대적인 정신질환적 분석 안에서 적극적으로 해부되는 양상이다.
물론 영화의 중후한 무게감을 관철시키는 언해피엔딩의 결말부까지, <울프맨>은 자신의 서사적 의도를 며확히 관철시키는 작품이란 점에서 평가를 얻어낼만한 작품이다. 동시에 고전적인 중후함과 우아함을 갖춘 배우들의 풍모와 기질은 <울프맨>의 의도를 명확히 다지는 영화적 밑천으로서 유효한 역할을 해낸다. 다만 고전적인 품위를 유지하는 이미지 안에서 현대적인 정신분석학에 기인한 트라우마를 연출해내는 작품의 기질로부터 발생할만한 감상적 불협화음은 상업영화적인 자극적 세기를 원하는 오늘날 대다수의 관객의 기대감 안에서 불협화음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하다. 마치 안티히어로의 감수성에 젖은 현대 관객의 기대감에 고전적 괴물의 트라우마를 들이미는 꼴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