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개척시대, 포트스미스라는 마을에 매티 로스(헤일리 스타인펠드)라는 소녀가 나타났다. 같은 날 마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당일이 범죄자 세 명의 사형집행일이었던 까닭이다. 어쨌든 소녀가 그 마을에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였다. 말을 사기 위해 포트스미스를 방문한 아버지와 동행한 하인 탐 채니(조쉬 브롤린)가 아버지를 죽이고 주머니의 금화를 들고 인디언 구역으로 달아나버린 것. 영민한 소녀 매티는 그의 뒤를 쫓을 동행자를 고용하기로 결정하고 그 중 거칠기로 악명 높이만 검거율이 대단한 연방보안관 카그번(제프 브리지스)에게 접근한다. 그 와중에 탐 채니가 과거에 저지른 살인의 행적을 뒤좇던 텍사스 레인저 라 뷔프(맷 데이먼)가 그들 주변에 나타난다. 이로서 세 사람의 추적이 시작된다.
존 웨인의 서부극으로 잘 알려진 헨리 해서웨이의 연출작 <진정한 용기>를 리메이크하며 화제가 된 코엔 형제의 <더 브레이브>는 (국내 수입사에서 가져다 붙인 서로 다른 개봉명과 무관하게) 동명의 원제를 지닌 두 작품의 기원이 된 웨스턴 소설의 대가 찰스 포티스의 <트루 그릿 True Grit>을 영화화한 각색물로서도 높은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해서웨이의 <진정한 용기>는 포티스의 원작과 달리 후일담에 가까운 매티의 1인칭 내레이션을 걷어내고 존 웨인이 연기한 카그번의 캐릭터를 묘사하는데 주력한 영웅주의 서부극이다. 하지만 코엔 형제는 매티의 내레이션을 복원하며 극의 흐름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동시에 보다 능동적으로 극적 흐름을 유추하게 만드는 감상자의 역할을 생성시킨다. 극적 발단이 되는 인과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을 걷어내고 인물의 대사와 행위를 통해 자연스럽게 사건의 격발지점을 예측하게 만든다. 이는 보다 많은 서사적 예상과 캐릭터적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효과적이다.
카그번을 연기하는 존 웨인과 제프 브리지스의 이미지만으로도 <진정한 용기>와 <더 브레이브>의 차이는 손쉽게 발견된다. 거친 주정뱅이이자 난폭한 총잡이인 카그번이라는 인물은 지저분하고 게으른 이미지가 농후한 <더 브레이브>의 제프 브리지스가 깔끔하게 정리된 인상이 느껴지는 <진정한 용기>의 존 웨인보다 상대적으로 사실적인 감상을 부른다. 극적인 상황에 따라 연기력의 격차가 짙게 발견되는 <진정한 용기> 속 캐릭터들보다도 <더 브레이브>의 캐릭터들은 뛰어난 상황 몰입으로 실제적인 연기에 접근해 낸다. 동시에 <진정한 용기>와 달리 <더 브레이브>는 원작의 텍스트를 통해 예견되는 황량한 풍경으로 스크린을 채우고 있다. 이렇게 코엔 형제가 연출한 이미지들은 어린 소녀가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좇아 연방보안관을 고용하고 추적에 나선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에 흥미진진한 사실성을 부여한다. 특히 결말부의 태도는 두 작품의 대조적인 관점을 녹록히 드러내는 결정적인 한 수나 다름없다. 보다 낙관적이고 경쾌한 엔딩으로 마무리된 <진정한 용기>의 감상적 태도와 달리 <더 브레이브>는 보다 냉정한 시선으로 목표에 다다른 인물들의 관계적 결말에서 황량하고 건조한 회상의 양식으로 갈무리한다. 이는 해서웨이의 영화가 훼손시킨 포티스의 원작이 지닌 세계관을 복원해낸 결과물이란 점에서도 흥미롭다.
다양한 장르적 연출을 시도하면서도 직관적인 시선과 냉소적인 위트로 세상을 관조하는 코엔 형제의 세계관은 <더 브레이브>에서도 유효하다. 낭만주의 웨스턴과 수정주의 웨스턴의 길목에 위치한 원작의 관점은 사실적인 관점과 냉소적인 위트로서 현상을 직시하는 코엔 형제의 시선을 통해 또 한번 새롭게 거듭났다. 소품에 가까운, 우스꽝스러운 블랙코미디의 연출가로서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코엔 형제는 <파고>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같이 냉정한 태도로 세상을 직관해내는 스릴러물을 통해 품격 있는 걸작들을 만들어 내곤 했다. 물론 <더 브레이브>가 코엔 형제가 만들어낸 필모그래피 속에서 상대적으로 걸작의 반열에 들만한 작품이라 평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코엔 형제의 냉소적인 시선이 견지된 <더 브레이브>는 코엔 형제라는 이름 안에서 가능한 영화적 품위가 담긴 작품 가운데 하나로서 기억될만한 작품이다.
웨스턴 복수극이라는 평면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으나 <더 브레이브>는 그 사건 속에 놓인 인물들의 입체적인 성격을 통해 극적 전개에 대한 흥미를 높인다. 서술자의 위치에 놓인 인물이자 사건의 기준이 되는 매티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다부진 면모를 드러내며 이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를 자아낸다. 동시에 나태하고 독설적이지만 정의적인 위엄을 지닌 카그번과 소심하고 융통성이 부족하나 인정이 깊은 라 뷔프의 동행은 다양한 갈등과 충돌을 빚으며 평면적인 극의 흐름에 흥미로운 에너지를 부여한다. 서부 개척 시대 웨스턴의 풍경을 넓게 조망하면서도 인물들의 성격을 세심하게 조명하는 <더 브레이브>는 세계관의 너른 풍경 속에서 깊은 인간적 체온을 발췌해낸다. 포티스의 원작이나 해서웨이의 <진정한 용기>를 접한 이들에게도 영화의 이런 입체적인 면모는 흥미를 끌만한 대목임에 틀림없다. 리메이크와 소설의 영화화라는 형식적 의미를 뛰어넘는 영화적 성취이자 또 한편으로는 그런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코엔 형제의 장인적인 면모에 대한 재확인으로서도 깊은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더 브레이브>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총망라된 동시에 그들의 빼어난 연기가 조화로운 앙상블을 이루는 작품이란 점에서 감탄을 부르는 영화다. 똑똑하고 야무진 매티 로스를 연기하는 헤일리 스타인펠드는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가장 이상적인 캐스팅에 가깝다. 소심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지닌 라 뷔프는 맷 데이먼이 연기한 지난 캐릭터들의 연장선에 놓여 있으나 보다 능숙한 연기적 방식으로서 극에 일조하고 있다. 특히 제프 브리지스의 연기는 <더 브레이브>의 완성도에 일조한 하나의 영화적 특성이라고 평해도 손색이 없다. 존 웨인의 말쑥함과 달리 지저분한 행색의 제프 브리지스는 극적인 사실성을 더하는 동시에 보다 중후한 위엄을 갖추며 영화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데 혁혁한 공헌을 해낸다. <더 브레이브>가 코엔 형제의 영화가 아닌 제프 브리지스의 영화로 불려진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 잠언 28장 1절을 인용하며 시작되는 이 영화는 극의 마무리까지, 중후한 세계관의 중량감을 유지하면서도 감각적인 리듬감을 통해 신을 열고 닫으며 극적인 흥미를 자아내며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 나간다. <더 브레이브>는 이미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낯설지 않은 코엔 형제가 일정한 영화적 성취를 완수해내는 장인의 궤도로 들어섰음을 확신하게 만드는 인장과 같다. 동시에 이 작품은 역시 장인이라 불려도 좋을 명배우의 중대한 일조를 통해 빚어낸 웨스턴의 위엄이란 점에서 보다 고무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밀크>란 제목은 우리가 잘 아는 그 보통명사의 의미가 아니다. 이는 실존했던 어떤 사람의 이름, 즉 절대명사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밀크>는 전기영화란 말이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공직자로 활동한 게이이자 게이인권운동가로서 활발히 활동했던 하비 밀크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다. 영화는 그의 생의 일부, 즉 그가 죽은 1978년으로부터 8년 전인, 1970년에 시작된다. 이유는 명확하다. 하비 밀크란 인물에 대해서 말할 때, 그 8년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건 딱히 유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1970년, 밀크(숀 펜)는 뉴욕에서 연인 스콧 스미스(제임스 프랑코)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2년 후, 뉴욕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거처를 옮긴 뒤, 그곳에서 자신들의 사진현상 가게 ‘카스트로(Castro)’를 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 새로운 삶이란 단지 그들에게 한정된 새로움이 아니었다. 그들의 가게는 게이들의 안식처가 됐고, 그들의 커뮤니티를 위한 중심지가 된다. 그리고 밀크는 점점 더 게이들의 인권을 위한 새로운 방법론을 고민하게 된다. 게이 정치가가 탄생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고, 스스로 자신이 고안한 방법을 실천하기 위해 시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그리고 거듭된 낙선 속에서도 도전을 이어나가다 결국 시의원 배지를 가슴에 얻게 된다.
인물을 조명하는 전기영화들은 대부분 그 인물의 삶이 남긴 것들을 조명한다. 왜냐면 적어도 전기영화가 다루는 인물들은 무언가 이야기할만한 것들을 남기고 떠나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밀크>도 마찬가지다. 하비 밀크는 게이로서 자신의 신분을 떳떳이 밝혔으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갔다. 그 당당함이 대단한 미덕이라기 보단 그런 태도가 그의 삶을 수식했으며 그의 정체성을 특별하게 인식시킨 덕분이다. 그를 정치 무대에 데뷔시킨 건 생존의 야망이었으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게이들의 삶을 보다 단단하게 다지기 위한 노력의 방법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약자나 사회적 소수자들과 연대했으며 그 세력을 규합해 자신의 지론을 단단하게 이루는 근거로서 삼았다.
<밀크>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하비 밀크에 대한 연민보단 이상적인 삶을 꿈꾸는 유능한 정치가로서의 하비 밀크를 담담하면서도 강렬하게 묘사한다. 동시에 그를 둘러싼 악의에 감정을 쏟아 넣으며 인물에 대한 동정을 유발하기 보단 보다 객관화된 사회적 시선을 강화하고 그 태도에 집중함으로써 인물의 행위적 근거들을 뚜렷하게 각인시킨다. 동성애자의 시민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당대의 인물들을 소수의 권리를 억압하는 악인이 아니라 시대적 무지를 드러내는 상징적 존재로서 부각시킨다. 이는 <밀크>가 단순히 어떤 인물에 대한 감상적 조명을 꾀하는 작품이 아니라 그 시대 상황을 반추함으로써 그 환경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인물의 이상적 자아를 분명히 각인시킨다는 점에서 뚜렷한 의미를 지닌다. 인물을 연출하지 않고 진짜 인물을 그려낸다.
사실 <밀크>는 근래 몇 년간의 구스 반 산트의 작품과 다른 선상에 놓인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구스 반 산트의 근작들이 어떤 가치관을 표방하기 보단 개인적인 심리적 불확실성을 묘사하는데 보다 치중한 까닭이다. 특히 비선형적인 서사와 불안정한 묘사를 통해 커트 코베인이라는 실존인물의 실루엣을 불투명하게 포착한 <라스트 데이즈>와 <밀크>는 상당히 다른 지점에 놓인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때 <굿 윌 헌팅>과 같은 드라마를 만들기도 했던 구스 반 산트의 사례를 상기시킨다면 <밀크>의 방식이 딱히 구스 반 산트와 동떨어진 작품이라 이해하긴 어렵다. <밀크>는 하비 밀크라는 인물의 영향력을 묘사하기 보다 그 개인의 가치관과 삶 자체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드라마틱한 감성과 다큐적 리얼리즘을 동반한다. 무엇보다도 공정한 정치적 견해를 표방하는 인물의 삶에 포커싱을 맞출 때 그 인물의 대의적 공정함 자체는 드라마틱한 요소로서 발효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밀크>는 구스 반 산트의 이례적인 작품이라기 보단 소재의 관성이 작가주의적 흐름과 결부될 때 발생하는 자연스런 현상이라 이해할만하다.
사실 <밀크>는 구스 반 산트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숀 펜의 작품이라 말하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숀 펜의 연기는 미사여구를 동원한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정말 훌륭하다. 메소드 연기가 모든 연기의 궁극이라 말하긴 힘들지만 적어도 숀 펜은 메소드 연기의 우월함을 설명하는데 유용한 근거라 할만한 결과물을 선사했다. 적어도 숀 펜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밀크>는 그의 뛰어난 전작들을 제치고 그를 설명하는 가장 훌륭한 사례로서 현재까지 유효하다. 동시에 <밀크>에 등장하는 모든 배우들은 저마다 탁월한 제기능을 발휘한다. 특히 댄 화이트를 연기하는 조쉬 브롤린은 인물의 결과적 행위를 지켜볼 관객들이 품을 만한 감정적 악의를 무마시킬 만큼 인물의 감정을 중립적으로 설득시킨다. 그 배우들의 이름만으로도 더 이상 가치를 나열할 필요가 없을 정도랄까.
구약성서 사무엘상 17장 48-51절은 이스라엘 민족과 블라셋 민족의 전쟁이 벌어진 엘라 계곡에서의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전전긍긍하게 만든 블라셋의 거인전사 골리앗을 물매(새총)로 물리쳤다는 이스라엘의 청년영웅 다윗을 그린다. 성서를 통해 전승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그 이후로 현세까지 수많은 이야기꾼들에게 영감을 주며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2003년, 800여 개의 크루즈 미사일을 동원해 이라크를 초토화로 만든 미군의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 이후, 미국은 국제질서를 지키겠다는 명목 하에 자국의 청년들에게 총을 쥐어준 채 먼 이국 땅으로 밀어 넣었다. 성경구절에 등장한다는 그 전장을 적시한 <엘라의 계곡 In the valley of Elah>은 외박을 나갔다 사라진 아들을 추적하는 아버지와 그 주변인들의 시선을 통해 먼 타국에서 벌어지는 비극의 조우를 소환한다.
군수사관 퇴역장교인 행크 디어필드(토미 리 존스)는 ‘다리가 부러져도 점호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원칙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다. 그는 자신의 소신에 입각해 두 아들을 모두 군대에 보냈으며 군에서 큰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이라크에 파병됐다 귀환환 둘째 아들 마이크(조나단 터커)가 외출 후 미복귀 탈영 중이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 직접 아들의 행보를 수사하고 추적해나가던 행크는 결국 암담한 현실과 대면하며 그 현실의 뒤편을 추적하다 자신의 뿌리깊은 소신마저 뒤흔들만한 진실을 목도하게 된다.
포스트 9.11 이후, 미국과 중동의 갈등관계를 묘사한 작품들은 차고 넘치게 등장했으며 그만큼 그 관계의 폭력성과 이로 인한 증후군에 대한 성찰도 낡고 고루한 것이 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엘라의 계곡> 또한 마찬가지다. 이라크로 파병됐다 돌아와 실종된 아들 마이크를 뒤쫓는 행크가 간접적으로 목격하고 수집해나가는 건 먼 이라크 땅에서 아들이 겪어야 했던 폭력적인 경험들이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라크 땅에서 죽음과 직면하며 살아가는 청년들은 결국 그 공포에 맞서기 위해 괴물로 자라난다. 결국 행크가 찾게 되는 건 아들이 아닌, 아들의 괴물 같은 시절이다. 저 너머에서 벌어지는 참상 속에서 자신의 아들이 견뎌야 했던 끔찍한 비극을 목도하고 자신들이 서있는 현실의 안위가 무엇을 밟고 서있는가를 극명히 깨닫는다. <엘라의 계곡>은 결국 거대한 세계적 음모 속에서 압사당한 어느 개인적 비극을 환기시킴으로써 그 세계에 깊게 뿌리내린 부조리의 실체를 벗겨내고 그 세계관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엘라의 계곡>의 목적지가 그 성찰에 놓여있다면 그 목적지로 관객을 유도하는 표지판의 역할은 미스터리적인 추리극의 플롯에 있다. 사라진 아들의 행방을 뒤쫓는 아버지의 행보는 사건에 접근해나가는 흥미를 자아내는 가운데, 사건의 실체를 이루는 뒤편의 진실에 대한 호기심을 점증시켜나가는 구실로서 진전된다. 또한 그 서사적 추이는 허구적인 연출력과 사실적인 정보력 사이의 균형을 잘 메워나가며 적정수준의 몰입도를 유지해나간다.
무엇보다도 <엘라의 계곡>은 시종일관 서로를 팽팽하게 끌어당기면서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신경전을 벌이듯 캐릭터로서 분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실질적으로 메시지 전달에 대한 목적성이 뚜렷한 <엘라의 계곡>에서 배우들의 연기란 그 뚜렷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권태로움을 덜어내는데 공헌한다. 특히 지혜로운 관록과 고집스런 원칙을 담아낸 냉소적 표정으로 보수적인 성찰을 도모하는 토미 리 존스는 <엘라의 계곡>에서 뛰어난 방패와 같다. 의욕이 넘치는 여형사 에밀리 샌더스를 연기하는 샤를리즈 테론의 혈기를 눙치면서도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고 아내인 조안 디어필드를 연기하는 수잔 서랜든으로부터 밀려오는 페이소스의 속도감을 적절하게 줄여낸다.
“미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전하지만 이라크는 꽤 위험합니다.” 어쩌면 <엘라의 계곡>은 먼 이국의 현실에 불과할지 모르기에 국내 관객에게 적당한 거리감을 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시에 팍스 아메리카나의 실체에 담긴 지난한 희생을 가리키는 낡은 성조기의 조난 신호는 지정학적인 거리감을 더욱 선명히 구체화시킨다. 하지만 그것이 실화를 모티브로 둔 작품-Inspired by actual events-이라는 점을 밝힐 때 그 허구에 담긴 진의는 우리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국익을 위해 젊은 피를 요구하는 영화 속 미국의 현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네 현실 역시 다를 바 없는 선택을 감행하고 있다.
그 땅엔 괴물이 자란다. 그 괴물은 결국 국가적 영웅주의로 위장한 이 세계의 편협한 음모를 방조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 세계의 구성원 모두가 키워낸 비극적 산물인 셈이다. 엘라의 계곡에서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영광스러운 승전보 이전에 그 땅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그리고 그 피가 실로 누구를 위한 영광이었는지, 우린 지금 따져 물어야 한다.
과거 미국의 동시상영관에서나 줄창 틀어대던 싸구려 B급 영화를 현대에서 재현해보겠다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야심이 짙게 드리운 <그라인드 하우스>는 시종일관 농후한 장난끼가 가득하다. <데쓰 프루프>와 <플래닛 테러>, 그리고 4편의 페이크 예고편으로 이뤄진 종합세트는 시대를 역행하는 이미지와 내러티브로 채워져 있다. 흔히 말하는 오늘날의 웰메이드 영화는 상극에 가깝다. 맥락이 무성의한 서사 구조와 시종일관 필름의 훼손도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이미지, 게다가 중간부분을 날려먹었음을 당당하게 알리는 미싱 릴(missing reel)까지, 연출된 저속함과 위장된 열악함이 가득하다. 먼저 국내에서 개봉된 <데쓰 프루프>와 마찬가지로 <플래닛 테러> 역시 고의성이 다분하게 단연 후진 완성도를 자랑한다.
<데쓰 프루프>의 짝패답게 <플래닛 테러>는 적나라한 싸구려 유희를 있는 힘껏 발산한다. 다만 페달을 밟듯 체감속도를 높여나가는 <데쓰 프루프>와 달리 <플래닛 테러>는 부지런히 스텝을 밟는 움직임으로 스태미나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 상황에 대한 논리적 유추를 조롱하듯 <플래닛 테러>는 그저 기저에 깔린 상황들을 두서없이 풀어놓고 마냥 떠들어댄다. 사건이 형성될 뿐, 그것이 어떤 원인에서 비롯됐으며 어떤 근거로 진행돼나가는가라는 상세한 논리 따위는 안중에 없다. 그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짐짓 모른 척 잡아다 놓고 시치미 딱 떼듯 진전시켜나갈 뿐이다. 왜 저것이 저 자리에 놓이게 된 건지, 대체 저 사람의 능력이 어디서 발생한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적 관점을 지속한다면 스스로 자폭할 가능성이 크다. <플래닛 테러>는 그저 영화가 깔아놓은 난장판을 의식 없이 즐겨야만 합당한 이벤트에 가깝기 때문이다.
스스로 수준 이하를 표방하지만 엄밀히 살피자면 <플래닛 테러>는 영리한 셈법으로 다양한 감정적 체험을 유도하는 수준 이상의 오락물이다. 불현듯 뭔가 튀어나올 듯한 상황을 통해 가열된 긴장감은 강도 높은 고어적 잔혹함을 통해 폭발되기 일쑤지만 긴박해 보이는 상황과 정면으로 대치된 도전적인 유머가 도처에서 발견된다. 잔혹성을 바탕으로 한 긴장감과 그런 상황을 배반하듯 촌티 날리는 유치함을 빙자한 유머감각은 <플래닛 테러>를 이끄는 평형감각에 가깝다. 물량 공세를 아끼지 않는 총격씬과 함께 액션의 화력도 단연 화끈하다. 또한 <데쓰 프루프>를 통해 이미 한차례 체험한 관객도 있겠지만 스크래치가 난무하고 화질의 상태를 극악하게 조작함으로써 ‘그라인드 하우스’의 체험을 이색적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플래닛 테러>의 싸구려 유희에서 화룡정점을 이루는 코스는 포스터부터 눈길을 끄는 체리 달링(로즈 맥고완)의 아크로바틱 액션이다. 인간형 범용결전병기까진 아니지만 그 자체만으로 강렬한 포스를 뿜어내는 기관총 다리로 무장한 관능적인 그녀는 단연 <플래닛 테러>의 최종병기다. 단지 고고댄서였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화려한 몸놀림을 보일 수 있는가, 다리에 장착된 기관총이 어떻게 자유자재로 발사될 수 있는가, 란 의문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 황당한 액션에 온몸으로 호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능청스럽게 멀둔 중위 역으로 등장해 흉물(?)로 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브루스 윌리스와 냉정한 의사지만 의처증이 심한 싸이코 근성을 지닌 윌리엄 박사 역의 조쉬 브롤린, 그리고 자신의 성기가 녹아 내리는 와중에도 혐오스럽게 섹스에 집착하는 광기어린 연기를 펼치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특별한 출연까지, 배우들의 헌신적 열연은 <플래닛 테러>의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특별한 카드로서 제각각 유효하다.
<플래닛 테러>는 지독하게 고의적이지만 명백히 순수한 의도를 담고 있다. 농염한 스트립 댄서의 전신을 적나라하게 비추며 떨어지는 앵글과 찢겨지고 터져나가는 인간의 육체를 정면에서 과감하게 비추는 샷이 말해주듯 <플래닛 테러>는 지극히 불결하고 혐오스러운 것들을 거리낌없이 비추고 이를 통해 직설적인 유희적 욕망을 숨김없이 들춘다. 명품을 표방한 싸구려가 널린 판국에서 <플래닛 테러>는 싸구려 유희의 정체성을 과감히 드러내고 스스로 즐긴다. 당신은 그저 이 순수한 싸구려 유희 앞에 앉아 염치 따윈 잊고 낄낄거리다가 영화가 끝난 뒤, 점잖게 극장을 빠져나가면 그만일 뿐이다.
TIP_<그라인드 하우스>에는 4편의 페이크 예고편이 함께 담겨있다. 하지만 이 중, 로드리게즈 감독이 연출한 <마쉐티>만이 <플래닛 테러>의 인터내셔널 버전에 포함됐을 뿐이다. 현재 <데쓰 프루프>와 <플래닛 테러> 인터내셔널 버전을 수입한 '스폰지'에서도 나머지 세 개의 예고편을 정식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전했다. 결국 국내 관객에게 공개되지 못한 나머지 세편의 예고편은 미싱 릴(Missing Reel)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발빠른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머지 예고편을 이미 봤거나 보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겠지만. (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