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에서 오랫동안 성실하게 근속해온 래리(톰 행크스)는 어느 날, 회사의 상부로부터 일방적인 퇴직 통보를 받는다. 이유는 그에게 대학 졸업장이 없다는 것.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된 래리는 새로운 직장을 찾고자 동분서주하지만 그를 원하는 곳은 없다. 그리고 그는 중고매매상인 이웃의 권유로 대학 입학을 결심하게 된다. 대학강사 테이노(줄리아 로버츠)는 이른 아침부터 스피치 강의에 나서야 한다. 의욕도 없는 그녀에게는 고역 같은 의무다. 하지만 수업을 신청한 학생 수가 10명을 채우지 못했기에 폐강을 알리려던 찰나, 부랴부랴 강의실로 들어서는 중년의 남자와 마주친다. 래리와 테이노는 그렇게 만난다.
로맨틱 코미디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포스터처럼 <로맨틱 크라운>은 우연처럼 만나서 필연처럼 사랑하게 된 40대 남녀의 만남을 그린다. 그러나 그 이전에 오랫동안 근무한 직장에서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삶을 일구던 래리가 자신의 직장에서 해고되는 광경에서 시작한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자신이 머물던 삶의 궤도로부터 강제로 퇴출당한 남자가 다시 한번 자신의 궤도를 찾아나서는 드라마틱한 여정을 묘사하는데 보다 주력한다. 하루 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된 래리는 이혼한 아내에게 위자료를 내주기 위해 받았던 주택 담보 대출금 상환을 비롯한 현실적인 난관들과 대면한다. 하지만 재취업의 기회는 요원하고 집안의 가재도구마저 내다 팔아야 할 정도로 삶은 팍팍해진다. 하지만 래리는 분노하지 않고 고민한다. 래리의 이런 태도는 긍정과 낙천의 기운이 충만한 영화의 분위기와 직결된다.
이는 때때로 무신경에 가깝게 보일 정도다. 실물적인 삶의 난관에 봉착한 남자의 삶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화가 래리의 삶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조작하고 있다는 인상이 종종 느껴진다. 결과적으로 영화에서 모든 계기가 된 문제들은 손쉽게 풀려버린다. 지나치게 긍정적인 시선으로 현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의심이 작동한다. 그럼에도 이런 불신을 잊게 만드는 건 역시 그런 긍정을 먹고 자라난 중년 남녀의 낭만적인 러브스토리다. 더 이상 혈기왕성한 청춘일 수 없는, 노화의 흔적이 얼굴에서도 드러나는 중년 남성이 온화한 태도로 삶의 난관에 맞서고 유연하게 흘러가는 방식에는 수긍할만한 구석이 있다. 누구보다도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던 남자가 어수룩하듯 차근차근 제 삶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발견되는 천진난만함을 응원하고 싶어진다는 것도 때때로 부정하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품성이 착한 영화다. 이로 인한 장단은 있지만, 적어도 멍청하거나 어리석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런 성격이 영화에 끼치는 영향은 부정보다는 긍정 쪽에 가깝다. 아둔할 만큼 우직하게 살아온 중년 남성이 다시 한번 삶의 흔들린 갈피를 잡아나가는 과정은 어울리지 않게 귀엽지만 그게 싫지 않다. 무엇보다도 삶을 이루던 기반 밖으로 내몰리듯 쫓겨난 남자가 배려를 망각한 남편과 권태로운 삶에 치이듯 살아가던 여자를 만나고, 결국 각자의 방향을 찾아나선 뒤, 삶의 회복을 위한 마지막 조우를 완성해낸다. 물론 모든 삶이 이처럼 상큼하게 무르익거나 훈훈하게 불어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와 같은 낙관을 꿈꾸는 것도, 혹은 그리 살 수 있는 것도 틀린 일은 아니지 않은가. <로맨틱 크라운>은 일종의 로맨틱 라이프 지침서다. 그 수많은 지침서가 당신의 미래를 설계해주는 정답이 아니듯, 이 영화 또한 그럴 뿐이다. 적어도 이 영화는 긍정과 낙관을 전할 뿐, 훈계하진 않는다. 귀엽다. 그네들의 삶이. 그리고 무르익어 가는 삶 속에서도 빛나는 미소를 간직한 줄리아 로버츠와 톰 행크스도 반갑다.
안정된 삶을 뒤로 하고 불현듯 여행을 떠나버린 <먹고 사랑하고 기도하라>(2010)의 리즈처럼 줄리아 로버츠는 <클로저>(2004)이후로 한동안 스크린에서 모습을 감췄다. 할리우드의 톱여배우라는 무거운 수식어를 내려놓고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자아를 돌보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된 지금도 그녀는 거창한 꿈을 키워나가는 것만큼이나 소소한 일상을 돌보는 것에 큰 가치를 느끼고 있다. “우린 얼마나 운이 좋은가. 서로를 많이 사랑함으로써 세 아이를 가질 수 있었으니.” 이처럼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이들의 삶을 돌봄으로써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배우로서 자신의 삶을 가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버츠는 자신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특별한 직업을 지닌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저 겸손한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는 것. 그건 그녀가 깨달은 진정한 성공이었다.
<Duplicity>라는 원제처럼 <더블 스파이>는 시종일관 ‘표리부동’한 정체를 유지하는 캐릭터들의 심리전이다. 각각 ‘MI6’와 ‘CIA’근무경력이 있는 전직 국가요원 레이(클라이브 오웬)와 클레이(줄리아 로버츠)는 현재 대기업 산업스파이로 활동 중이다. 2003년, 두바이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구면이지만 초면처럼 낯선 인사를 반복적으로 주고 받아오곤 했다. 마치 정해진 대사처럼 대화를 나누고, 정해진 배역처럼 마주치고 헤어졌다. 첫 만남을 묘사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바로 5년 뒤로 점프 컷, 그리고 그 중간중간의 서사를 플래쉬백하는 영화의 속내를 읽기란 마지막까지 쉽지 않다. 저 두 사람만큼이나.
2003년을 서사의 출발점으로 삼은 <더블 스파이>는 첩보물의 예감을 부르지만 한때 세계를 지배하던 동서진영의 이념적 대립과 무관한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물론 ‘본’시리즈의 각본가이자 <마이클 클레이튼>의 감독인 토니 길로이의 이름을 인지할 수 있다면 그런 예감쯤은 애초에 지닐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살아남은 첩보원이 자신을 폐기하려는 국가에 대항하던 스토리나 기업의 비윤리적 노폐물을 청소하던 로펌 변호사의 양심적 결심을 묘사한 이야기는 거대한 반윤리에 맞서는 개인 윤리의 승리를 그린다는 점에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다만 <더블 스파이>는 앞선 사례들처럼 비범한 야심을 내세우는 영화가 아니다.
전자들과 달리 <더블 스파이>는 어떤 본질적 질문에 답하기 위한 캐릭터의 활약상을 전시하지 않는다. '제이슨 본'과 '마이클 클레이튼'이 개인의 본질을 복원하기 위해 삶을 역류했던 것과 달리 레이와 클레이는 개인의 욕망에 삶을 복무시킨다. 반윤리적 질서 속에서 몰락한 개인의 가치를 복권하기 위한 고행을 감내했던 전자들과 달리 <더블 스파이>의 남녀는 사유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껍데기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이를 실행한다. 상대를 속이는 동시에 상대의 진심을 의심해야 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연출된 거짓처럼 인식시키며 철저하게 위장된 삶을 살아간다. 5년의 너비를 확보한 서사는 그 간격을 오가며 두 사람의 진심을 끊임없이 캐묻고 덮는다.
관객에게 있어서 <더블 스파이>는 두 사람의 진심을 추적하는 게임과 같다. 스파이를 소재로 두고 있지만 첩보물과 거리를 둔 <더블 스파이>는 경쾌한 범죄영화의 외형에 로맨틱코미디의 정서를 함양한다. 물론 그 모든 형태와 정서를 포괄하는 스토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의심을 부르는 미궁처럼 설계됐다. 하지만 ‘본’시리즈와 <마이클 클레이튼>이 그랬던 것처럼 좀처럼 해법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이야기에 명확한 마침표를 찍듯 군더더기 없는 결말은 탁월하다. 줄충한 스토리 설계자로서 토니 길로이의 능력은 <더블 스파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다만 미로 같은 심리를 헤매는 과정이 온전히 매력적이라고 떠받들기엔 걸리는 구석이 없지 않다. <더블 스파이>는 제로섬 게임과 같다. 관객은 예측 불가능한 결말에 도달하기까지 영화 속 캐릭터들과 함께 끊임없이 그 진심을 의심하면서 반복적인 플래쉬백을 통해 서사를 수집하고 배열해나가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가 요구하는 수고와 노력에 비해 결말이 주는 보상은 충분한 위안이 될 만큼 비범한 것이 아니기에 허무에 시달리는 관객이 존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컷어웨이 방식의 장면 전환 역시 지나치게 반복적이라 권태로운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더블 스파이>는 분명 뛰어난 스토리 그 자체를 핵심에 두고 다양한 장점을 장착해나가는 영화다. 클라이브 오웬과 줄리아 로버츠의 앙상블은 진심을 가늠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의 모호한 관계를 이루는데 있어서 절묘한 호흡을 선사한다. 로맨스적 감수성과 대결 구도의 긴장감까지 아우르는 캐릭터 수행 능력은 이야기를 위한 훌륭한 보호색으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또한 대사를 차단한 채 경쾌한 배경음과 슬로모션을 통해 연출한 오프닝 시퀀스의 난투극은 고조된 감정을 여과 없이 분출하면서도 한껏 우아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연출한다. 마치 춤을 추듯 멱살을 잡고 팔을 휘두르다 이내 바닥에 뒤엉키는 톰 윌킨슨과 폴 지아매티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섬세하게 포착된다. 극의 결말에 다다라서야 온전한 이해가 가능한 씬이지만 그 씬의 독자적인 형태만으로도 인상적이다.
한편으로 <더블 스파이>에 등장하는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산업스파이들은 삶의 본질보단 물질적 수단으로서의 일상에 속박된 신자유주의 시대의 현대인과 닮았다. 결국 모든 작전은 거대한 제로섬 게임으로 봉착하고 결과적으론 물질적 실리가 없는 승패가 구성된다. 물론 그 뒤에 커다랗게 존재하는 건 패자들의 실체 없는 허무다.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힌 채 껍데기 같은 일상에 복무하는 현대인들의 삶은 한방을 계획하는 산업스파이들의 위장된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토니 길로이는 결국 게임의 윤리를 빌미로 막대한 이윤을 부과하지 않는다. 오락적 자질을 뽐내는 동시에 작가의 가치관을 배반하지 않는다. 토니 길로이의 양심은 결코 변질되지 않는다. 뿌린 만큼 거두리라. 완벽한 결말만큼 계산도 철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