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ebook me.”우리 식대로 하자면 일촌 신청해달라는 의미로 통용될만한 이 말은 ‘페이스북’이라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전세계적인 열풍을 대변하는 유행어다. 207개국의 5억여 명의 회원이 이용한다는 페이스북은 대표적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이자 250억 달러의 가치를 지녔다고 하는 글로벌 기업의 이름이다. 페이스북의 개발자이자 창립자인 마크 주커버그는 자신이 개발한 페이스북을 통해 세계 최연소 억만장자 기업자 자리에 오르며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시대의 신화가 됐다.
<소셜 네트워크>는 바로 그 페이스북의 성장에 관한, 마크 주커버그의 성공에 관한 서사를 다룬 이야기다. 하지만 <소셜 네트워크>는 페이스북과 마크 주커버그의 성공을 위해 마련한 전기가 아니다. 페이스북 이전까지 소셜 네트워크라는 명칭이 존재했듯이, 이 영화의 제목이 <소셜 네트워크>라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명확하다. 페이스북은 소셜 네트워크라는 시스템 안에 귀속된 하나의 현상에 가깝다. 페이스북을 다룬, 그 시작이 된 마크 주커버그라는 인물을 다룬 이 영화가 <소셜 네트워크>라는 제목으로 명명된 것은 이 영화의 배경이 ‘소셜 네트워크’라는 온라인 관계 맺기 그 자체를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바드대에 재학 중인 주커버그(제시 아이젠버그)가 자신의 애인인 에리카(루니 마라)로부터 이별을 통보 받는 시작부터 페이스북을 개발하고 성공을 거둔 뒤, 두 개의 소송을 겪게 되는 결말부까지를 다루는 <소셜 네트워크>는 큰 줄기로 이뤄진 순행적인 플래쉬백의 서사의 중간 중간에 현재 시제의 두 시점으로 나눠진 두 개의 소송 합의를 이행 중인 주커버그를 비춘다. 다층적인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서사의 흐름은 매끄럽고, 엄청난 대사량을 지니고 있으며 방대한 정보량을 쏟아냄에도 극을 이해하는데 큰 무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거대한 정보가 유려하게 흐른다.
<소셜 네트워크>는 스토리의 운용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큰 너비의 서사를 주요한 맥락의 덩어리로 나눈 뒤, 다양한 캐릭터들의 개별적 서사를 그 틈새에 밀어 넣고 매듭처럼 이야기들을 연결해낸다. 인물의 내면을 깊숙하게 살피는 동시에 인물의 주변부를 조망하며 시대적 공기를 포착한다. 특히 관조적이고 유려한 연출력은 데이빗 핀처가 거장의 경력을 쌓아가고 있음을 직감하게 만들 정도다. 캐릭터의 특성을 통해 리듬을 만들어내는 방식도 훌륭하다. 캐릭터들의 특성을 묘사해내는 방식과 극의 흐름에 있어서 저마다의 캐릭터들이 뚜렷한 역할을 이룸으로써 영화의 시야는 폭넓게 확보되고 극의 흥미는 그만큼의 위력을 얻게 된다.
결과적으로 <소셜 네트워크>의 서사는 결말부를 통해 비춰지는 거대한 아이러니 그 자체를 드러내기 위한 여정이나 다름없다. 전세계를 연결하는 광대한 네트워크망을 창조해낸 이가 현실에서 혼자임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깊고 심각한 고독을 체감하게 만든다. <소셜 네트워크>는 광역화된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되레 지독한 고립감에 시달리게 되는 아이러니 그 자체를 비춘다. 가입과 로그인을 통해 자신만의 공간을 개설하고 전세계 누구와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온라인이라는 가상의 세계로부터 로그아웃한 뒤, 두 발을 딛은 현실 위에서 체감하게 되는 고독이란 오늘날 현대인에게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소셜 네트워크>는 그 실풍경을 따뜻한 동정을 담아 응시한다.
실존 인물을 다룬 <소셜 네트워크>가 얼마나 사실성에 충실한 작품인가라는 의문에 있어서 이 작품은 논픽션에 기초한 2차적 생산물, 즉 결론적으로 가공된 픽션이라고 보는 쪽이 옳을 것이다. 실제로 마크 주커버그가 <소셜 네트워크>를 본 뒤, 자신과의 연관성을 부정했다는 사실처럼 <소셜 네트워크>와 마크 주커버그 사이에 놓인 진실의 간극은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소셜 네트워크>는 마크 주커버그라는 인물 그 자체를 둘러싼 거대한 아이러니로서의 드라마로도 탁월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수작임에 틀림없다. 이는 곧 <소셜 네트워크>가 품은 사실로서의 가치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다. 중요한 건 마크 주커버그가 아닌 당신이다. 당신은 소셜 네트워크 하고 있습니까? 알고리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당신의 진짜 네트워크는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진짜 관계를 맺고 있을까?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본체다.
자신의 재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이들을 우리는 천재라고 부른다. 그 재능이란 실로 부러운 것임에 틀림없지만 단지 부러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만든 세상을 보라. 그리고 즐겨라.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그 재능이 당신을 풍요롭게 만들 지이니.
찰리 채플린 –영화에 숨결을 불어넣은 희극지왕
찰리 채플린을 그저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의 달인 즈음으로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의 영화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히치콕이 서스펜스의 창시자라면 찰리 채플린은 코미디의 개척자다. 채플린은 단순히 움직이는 영상 즈음으로 여겨지던 무성영화에 예술의 의미를 새겨 넣었다. 삼류 연극 배우였던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란 채플린은 가난하고 불우했던 유년 시절의 경험들을 희극으로 전복시키며 세상의 비애를 돌봤다. 자신의 경험을 필름에 투영한 기념비적인 장편 데뷔작 <키드> 이후로 채플린은 <황금광 시대>나 <서커스>를 통해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을 역설적인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부조리한 세상을 겨눈 <시티 라이트> <모던 타임즈> <위대한 독재자> 등의 작품을 통해 코미디를 저항적 유희로 끌어올렸다. 완벽주의자로 유명한 채플린은 삶이야말로 진짜 예술이 될 수 있음을 자각한 희극지왕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슬픔을 어루만지는 진심이자 불의를 향한 강력한 저항으로서 여전히 세상에 숨결을 불어넣고 있다.
스탠리 큐브릭 –기술을 예술로 승화시킨 장인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와 같이 시대를 앞서 나간 작품들은 되레 동시대인의 공격을 얻곤 한다. 스탠리 큐브릭은 아마 이 방면에서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공개될 당시 저명한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온전히 기술에 심취해 버린 껍데기처럼 취급해 버렸다. 하지만 오늘날 큐브릭의 작품들은 창작자의 직관과 도전이 이룬 독창적인 성과로서 인정받았다. 큐브릭은 기술로서 시대를 선도하는 테크니션이었지만 일찍이 씨네필이었던 그는 단지 기술적 실험의 매체로서 필름을 남용하지 않은, 기술의 미학적 가능성을 제시한 필름 장인이었다.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지만 그를 작가적 반열에 올린 건 SF의 고전으로 꼽히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계태엽 오렌지>와 같은 작품이었다. 특히 폭력적이고 암울한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그린 <시계태엽 오렌지>는 당시 런던에서 영화가 개봉되면 가족을 살해하겠다는 위협을 얻을 정도의 문제작이었지만 이 작품은 영화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걸작으로서 큐브릭에게 영생을 부여했다.
레오 까락스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는 시네아스트
프랑스가 전세계 영화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누벨바그는 영화의 비현실성을 하나의 표현 양식으로 끌어올린 ‘새로운 흐름’그 자체였다. 그리고 누벨바그의 포스트 세대라 할 수 있는 누벨 이마주는 영화를 이미지의 예술로 승화시킨 또 다른 사조였다. 그 누벨 이마주의 중심에 레오 까락스가 있었다. 레오 까락스의 영화는 시퀀스의 이미지 혹은 단 한 컷만으로도 깊은 인장을 남긴다. 물론 그는 단순한 비주얼리스트가 아니다. 그가 구현하는 영화적 이미지는 그 찰나만으로 영원을 설득할 수 있을 낭만이나 좀처럼 눈을 뗄 수 없는 비범한 광기가 서려 있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통해 유려하면서도 심오한 시네아스트로서의 재능을 선보인 그는 <나쁜 피>와 <퐁네프의 연인들>을 통해 고통과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 비현실적으로 꿈틀대는 사랑을 무언으로 설득한다. “도시의 어디에나 내 사랑이 있다.”까락스의 영화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이 한 줄의 대사는 자신의 영화처럼 좀처럼 말이 없는 까락스의 절망이 진정한 사랑을 위한 통과의례임을 깨닫게 만든다.
쿠엔틴 타란티노 – B급으로 위장한 컬트의 수집가
일명 B급 영화라고 국내에서 통칭되는 ‘B무비’는 동시상영관을 의미하는 ‘그라인드하우스’에서 떠리처럼 상영되던 삼류영화들을 지칭하는 언어에 불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이 B급 영화들이 컬트의 영역으로 승격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남자의 공이 8할이다. ‘키치’라는 용어를 훈장처럼 미화시킨 주범이기도 한 쿠엔틴 타란티노는 유년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극장을 드나들며 다양한 영화적 형식을 목격하고 그 모든 취향을 제 것으로 섭렵해낸다. 이는 결국 그의 창작적 뿌리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됐다. 그는 B급 영화의 경박한 완성도 속에 자리한 통렬한 쾌감을 포착해내고 이를 하나의 위장된 영화적 트릭으로 활용하는데 성공한 재간꾼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즐겼던 다양한 영화들, 즉 필름 누아르부터, 웨스턴 무비,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쿵푸영화, 일본 사무라이 영화 등 자신을 흥분시켰던 다양한 영화적 이미지들을 재현하고 탁월하게 조립하며 자신의 영화로서 재창조해낸다. 영화광이었던 소년은 스스로를 B급으로 무장하며 그렇게 컬트의 중심에 섰다.
크리스토퍼 놀란 –역설의 경계를 지배하는 야심가
<메멘토>의 망각과 기억, <인썸니아>의 수면과 각성, <프레스티지>의 환상과 트릭, 크리스토퍼 놀란은 언제나 대조적인 관념이 공존하는 세계관을 오가는 인물의 혼돈과 착시를 설득시키고야 마는 야심가다. 등을 돌리듯 맞선 두 세계의 대조적인 단면을 의식과 무의식의 대칭적인 구조로 설계하고 이를 통해 두 세계의 이미지를 구체화시킴으로써 자신의 논리를 명료하게 설득해낸다. <배트맨 비긴즈>를 통해 호흡정지 진단이 내린 히어로 시리즈의 생명연장을 이룬 놀란은 <다크 나이트>에 이르러 블록버스터를 거대한 철학적 명제의 장으로 끌어올리며 전세계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거대한 스케일을 반도체적인 세심함으로 완성해낸 <다크 나이트>는 작은 결점조차 허락하지 않는 놀란의 이성적 두뇌가 총 집약된 야심작이다. 그리고 <인셉션>은 놀란이라는 작가의 뇌구조를 대변하는 총아적인 단서나 다름없다. 꿈과 현실을 넘나 드는 인물들의 분투는 <다크 나이트>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새삼 각인시키며 전세계를 ‘꿈의 해석’으로 끌어들였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 드는 듯한 놀란의 꿈은 상업주의와 작가주의의 경계를 지배하는 야심으로서 세계를 매혹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