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드 팔마가 <미션 임파서블>을 발표한 것이 1996년의 일이었다.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이하, <미션 임파서블 4>)은 15년 만에 발표된 네 번째 속편이다. <미션 임파서블>시리즈는 분명 이단 헌트의, 좀 더 정확하게 이를 연기하는 톰 크루즈의 존재감으로 굴러가는 영화다. 다만 이번 속편에서는 지난 세편의 전작들과 다른 조짐이 발견된다. 전과 달리 전편과의 서사적 연결성이 뚜렷하게 발견되는 이번 작품에서 가장 극명하게 눈에 띄는 건 이단 헌트의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상을 전시하던 전작들과 달리 이단 헌트를 위시한 IMF 팀원들의 조직력이 적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모스크바의 크렘린궁과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를 비롯해서 프라하와 뭄바이 등 세계 각지의 풍경을 미장센으로 삼은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은 그만큼 거대한 스케일을 지닌 블록버스터의 위용을 자랑한다. 반대로 서사 구조는 간결하다. 인류의 멸망을 야기시킴으로써 전세계적인 단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천재 과학자가 핵전쟁을 조장하려 하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단 헌트는 이를 막고자 동분서주한다. 선악이라는 양진영으로 대립하며 뚜렷한 자기 역할을 얻은 캐릭터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명확한 미션을 수행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안에서 각자 자기 진영의 역할을 코스프레한 배우들이 대단한 물량공세를 등에 업고 스턴트 액션을 전시해나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네 번째 속편은 시리즈 안에서 가장 위력적인 액션 시퀀스를 선보이는 작품이다. 극 초반부, 크렘린궁 폭파신으로 파괴적인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이번 작품은 부르즈 칼리파 스턴트신과 이를 잇는 모래폭풍 추격신, 그리고 엘리베이터식 주차장에서 벌어지는 격투신까지, 위력적인 볼거리들을 우월하게 디자인해낸다. 무엇보다도 만화적인 창의력으로 설계된 몇몇 시퀀스가 대단히 인상적인데, 이를 테면 이번 영화에서 가장 화제가 된 부르즈 칼리파 등반 스턴트신의 반중력적인 액션과 거대한 모래폭풍이 밀려오는 한가운데서 보이지 않는 적을 추격하는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그리고 엘리베이터식 주차장에서 뒤엉켜 구르며 펼치는 격투신은 단지 그 위력뿐만 아니라 그 전반적인 액션 시퀀스의 디자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인크레더블’한 인상이다. 이런 이미지의 설계는 ‘픽사’ 출신의 브래드 버드가 연출한 애니메이션 전작들을 연상시킨다. 특히 초반부에 등장하는 공중전화의 변신 광경을 비롯한 몇몇 소품에서 발견되는 위트는 전적으로 그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물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번 작품에서 가장 이질적인 건 바로 역대 시리즈 중 최고의 팀워크를 이룬다는 점이다. 여전히 톰 크루즈의 이단 헌트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전작들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 팀원들은 그의 소품처럼 자리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내는 조직원들의 탄탄하고 유기적인 팀워크를 통해서 미션을 해결해나가는 양상은 시리즈의 쇄신을 예감하게 만들 만큼 신선한 변화에 가깝다. 덕분에 개개인의 조직원 캐릭터들이 극 안에서 발생시키는 영향력 또한 증가했다. 이런 특성 덕분에 이번 작품은 전작들과 차별적인 감정을 얻어내기도 했는데 시종일관 진중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일관되던 전작들과 달리 극 중에서 심심찮게 유머가 발생한다는 것. 이는 사이몬 페그 덕분인데, 긴박한 순간에도 정색하듯 장난스러운 상황이 연출되는 광경 안에서는 대부분 그가 연기한 벤지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단 헌트 못지 않은 가능성을 드러내는 브란트(제레미 레네)와 함께 새로운 팀원으로 확실하게 자리잡은 제인(폴라 패튼)은 시리즈의 차기작을 예고하는 징후나 다름없다. 결국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은 시리즈의 새로운 전환점에 가깝다. 이단 헌트의 원맨쇼 대신 팀워크가 강조된 이번 시리즈는 눈길을 끄는 캐릭터들의 개성을 밑천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다만 여전히 톰 크루즈의 이단 헌트가 차지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그의 체력적 안배가 이 시리즈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한계도 여전하다. 그만큼 새로운 캐릭터들의 활약상을 전시하는 이번 작품이 앞으로 이 시리즈의 미래를 새롭게 제시하는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 물론 드 팔마의 냉소적인 첫 작품을 그리워하는 팬덤 앞에서 이번 작품은 여러 모로 이질적인 결과처럼 인식될 수 있겠지만 스펙터클한 스케일과 다이나믹한 디테일이 공존하는 이번 작품은 시리즈 안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기획으로 인정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미션 임파서블>은 분명 톰 크루즈의 영화다.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도 온 몸을 던지는 톰 크루즈의 열연이 큰 몫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역대 시리즈 중 최고의 팀워크를 이룬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팀원 누구도 이단 헌트의 소품처럼 자리하지 않으며 자신의 임무를 소화해낸다. 액션 시퀀스는 인크레더블한 스케일을 지니고 있음에도 꼼꼼한 디테일을 잊지 않았으며 전반적으로 우월한 퀄리티의 디자인을 뽐낸다. 예고편에서도 자랑했던 두바이 부르즈 칼리파의 빌딩 등반 시퀀스를 비롯해서 장관에 가까운 액션 시퀀스가 네 번 정도 등장하는데, 저마다 장관의 볼거리다. 기존 시리즈의 냉기 서린 분위기를 기대하던 팬의 입장에서는 러닝타임 곳곳에 깨알 같이 자리한 위트가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다. 사이몬 페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듯한데, 긴박함과 장난끼가 어우러진 액션 시퀀스를 보자면 브래드 버드의 ‘픽사’적인 마인드도 일조한 것 같다. 시리즈의 전환점에 가까운, 위력적인 볼거리와 캐릭터의 매력이 공존하는 작품이다.
니콜 키드먼은 ‘될성부른 나무’였다. 키드먼을 ‘떡잎부터 알아본’ 제작자들은 그녀를 발 빠르게 할리우드로 인도했다. 일찍이 할리우드의 뮤즈 자리를 수성한 그녀는 여전히 가지를 뻗고 있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태어난 키드먼은 호주 출신의 부모와 함께 시드니로 건너가 유년시절을 보낸다. 어려서부터 활동적이었던 키드먼은 발레를 배우고자 찾은 호주 유소년 씨어터에서 연기에 관심을 얻게 된다. 175cm에 달하는 장신이었던 열네 살 무렵, 영화 데뷔를 이룬 그녀는 우월한 유전자만큼이나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1987년에 방영된 TV미니시리즈 <베트남>으로 호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키드먼은 <죽음의 항해>(1989)로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눈길을 끈다.
일본의 한 영화제에 참석 중이던 키드먼은 톰 크루즈의 측근으로부터 차기작 계획을 묻는 전화를 받는다. 토니 스콧의 <탑 건>(1986)으로 할리우드의 큰손이 된 크루즈는 <폭풍의 질주>(1990)로 심기일전을 다짐하던 차였다. LA로 키드먼을 초대한 그는 그녀와 출연 계획을 상의한다. 이는 키드먼의 할리우드 진출에 관한 이야기이자 세기의 커플이었던 키드먼과 크루즈의 인연에 관한 서두이기도 하다. 199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부부 서약을 맺은 두 사람은 론 하워드의 <파 앤드 어웨이>(1992)에서 또 한번 호흡을 맞춘다. 아일랜드의 보수적인 귀족 집안에서 자란 진보적인 여인이 자립을 꿈꾸며 미국 땅을 밟은 뒤, 한 남자의 야심에 동참하는 과정은 키드먼의 현실을 연상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톰 크루즈의 아내’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빛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구스 반 산트의 <투 다이 포>(1995)는 키드먼을 위한 영화였다. 수잔 역을 얻기 위해 구스의 집에 직접 전화를 건 키드먼은 그에게 말했다. “<드러그스토어 카우보이>(1989)를 봤어요. 당신과의 작업을 간절히 원해요.” 수잔은 섹슈얼한 매력을 이용해 남자를 물건처럼 이용하는 팜므 파탈이다. 이는 키드먼이 연기한, 강인하고 순정적인 여인들과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으나 그녀를 통해 키드먼은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거머쥔다. 19세기 말, 보수적인 영국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한 제인 캠피온의 고전 로맨스물 <여인의 초상>(1996)에서 지적이며 당돌한, 미모의 여인 이사벨을 연기한 키드먼은 자신이 그려왔던 도전적인 여인들의 면모에 보다 깊은 감수성을 이입해낸다. 진보적인 여인의 초상에 세심한 심연의 갈등을 새겨 넣으며 자신의 연기적 깊이를 증명해냈다.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1999)과 함께 키드먼은 내외적인 고난에 직면한다. 크루즈와 함께 부부로 출연한 이 작품은 금기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남자의 혼돈을 그리고 있으며 키드먼은 전신 노출까지 불사하는, 헌신적 열연을 펼쳤다. 큐브릭에 대한 깊은 애정은 부부의 공동출연으로 이어졌지만 이로 인한 세간의 지독한 관심은 두 사람의 관계에 치명타를 입혔다. 오랜 제작기간이 소요된 이 작품은 급기야 최종편집이 끝나기 전에 찾아온 큐브릭의 죽음으로 기로에 선다. 결국 영화의 불완전한 완성과 함께 두 사람의 관계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2001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장에서 각자 퇴장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포착됐다. 그 뒤로 키드먼은 다시 '힐을 신을 수 있'었지만 '삶이 붕괴되는' 극심한 상실감에 시달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해에 키드먼의 경력은 보다 반짝이기 시작했다. 환락가의 여신 사틴 역을 맡은 바즈 루어만의 뮤지컬 <물랑루즈>에서 다이아몬드와 같이 반짝이는 미모를 자랑한 키드먼은 빼어난 가창력과 안무까지 뽐내며 관객들을 현혹시켰다. 톰 크루즈가 기획자로 참여한 호러 <디 아더스>가 공개된 것도 같은 해였다. 이듬해, 이 두 작품으로 각각 골든글로브 두 개 부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키드먼은 <물랑루즈>로 두 번째 골든글로브 트로피를 얻게 된다.
영국의 여류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생에 얽힌 세 여인의 삶을 그린 <디 아워스>(2002)에서 메릴 스트립, 줄리언 무어와 같은 쟁쟁한 배우들과 함께 한 키드먼은 버지니아 그녀를 연기한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예민하고 우울한 예술가의 생을 연기해내야 했던 키드먼은 인공적으로 제작된 모형 코를 달고 그녀를 연기한다. 자신을 잊은 채 온전히 버지니아라는 인물로 빠져들었다. 이는 여전히 그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혼에 대한 아픔을 지울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이는 그녀의 경력에 정점이 됐다. 2년 연속 골든글로브 수상을 이어간 그녀는 수상자 신분으로 오스카 단상에 오르는 첫 영광을 차지한다.
할리우드의 주류배우로 꼽히는 키드먼은 독립영화에서 보다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여왔다. 그녀의 캐릭터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자주 동원되는 건 예민한 심성과 불안한 정서다. 독립적인 여성의 의지를 강인하게 피력하던 그녀는 점차 히스테리한 여인으로서 존재감을 피력해왔다. 돌발적으로 공기를 불안하게 잠식하는 그녀의 캐릭터들은 극적인 분위기를 강화하는 요소로 영화에 기여해왔다. 연극적인 무대를 날것처럼 카메라에 담아낸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2003)이 178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온전히 그녀의 연기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탄생>(2004)과 <인터프리터>(2005)에서도 이는 유효하다. 결혼을 앞둔 여인이 죽은 옛 연인임을 자칭하는 소년을 만나 벌어지는 미스터리와 국제적인 정치적 음모에 휘말리는 한 여인의 정체적 모호함에서 비롯되는 서스펜스는 키드먼의 존재감이 발휘된 결과물이다.
미국의 여류 사진가 디앤 아버스의 삶을 모티프 삼은 <퍼>(2006)는 한 여인의 자립을 그린, 잉태적 삶에 관한 이야기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모호한 이 작품에서 특유의 예민한 표정으로 등장하는 키드먼은 불안과 설렘의 경계를 부유하던 한 여류 사진가의 거짓말 같은 생에 사실적인 감정을 부여한다. 보다 현실적인 일상에 근접한 <마고 앳 더 웨딩>(2007)이나 <래빗 홀>(2010)에서도 이런 특성은 발견된다. 우연히도 두 작품에서 남편과 갈등을 빚는 아내이자 여동생과의 반목을 거듭하는 누이로 등장하는 키드먼은 각각의 영화에서 부풀어 가는 불화를 찔러 터트릴 것마냥 날이 선 심성을 휘두르는 불안 그 자체다. 롭 마샬의 <나인>(2009)은 키드먼이 여전히 빛나는 외모를 자랑하는 할리우드의 여신 자리에서 내려설 생각이 없음을 대변한다. 하지만 키드먼의 마이너한 감성은 그녀를 메이저 배우로 인식하길 방해하거나 거부하도록 만든다. “나는 영감을 주거나 강박적인 사람들과 일하길 좋아한다.” 가늠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빛을 발하는 할리우드의 뮤즈, 니콜 키드먼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미완의 초상이다.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배회하는 남자는 평범한 행색과 달리 눈초리가 심상찮다. 곧 한 여자에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지던 남자는 곧 접근을 시도한다. 두 번에 걸친 부딪힘은 남녀를 동상이몽의 비행으로 유도하고, 두 사람의 우연적인 혹은 필연적인 인연은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 안에서 범상치 않은 관계로 발전을 거듭해나간다.
<나잇 & 데이>는 스파이물과 액션, 로맨틱 코미디 등 기존의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의 클리셰들로 총공세를 펼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오락물이다. 그만큼 <나잇 & 데이>는 기존의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의 결핍을 고스란히 떠안은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실수라기 보단 고의적인 의도에 가깝다. 공항 한가운데서 두서 없이 출발하는 오프닝 이후로 급행열차처럼 달려나가는 <나잇 & 데이>의 서사는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쾌감을 상승시키기 위해 마련됐던 수많은 오락영화들의 전략들을 밀고 나가기 위한 레일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나잇 & 데이>는 지능이 떨어지는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의 야심에 갇힌 영화가 아니라 그 야심들로부터 형성된 어떤 전형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영화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스파이물에서 시작해 로맨틱 코미디로 매듭을 짓는 <나잇 & 데이>는 시종일관 액션과 유머로 범벅이 된 혼합장르물로서 스케일을 자랑하는 작품이다. 오락적 묘미를 극대화시키는 볼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가운데 대단한 물량공세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나잇 & 데이>가 오락이라는 핵심적인 목표를 겨냥할 수 있는 건 영화의 모든 풍경을 배회하는 두 인물로부터 비롯된다. <나잇 & 데이>의 스케일이 영화의 충분조건에 해당된다면 로이 밀러(톰 크루즈)와 준 헤이븐스(카메론 디아즈)는 이 영화의 가능성을 책임지는 필요조건 그 자체다.
<나잇 & 데이>의 로이 밀러(톰 크루즈)는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과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로부터 고독함과 진지함을 온전히 삭제한 뒤, 그 빈 공간에 낙관과 긍정을 채워넣은 듯한 캐릭터다. 그리고 그 상대역인 준 헤이븐스(카메론 디아즈)는 마치 기억 상실에 걸려 자신의 능력을 잊어버린 <미녀 삼총사>의 나탈리 쿡처럼 보인다. 두 캐릭터는 <나잇 & 데이>의 쾌감을 발생시키는 원천이자 기폭제다. 음모의 중심에 놓인 스파이와 이에 휘말려 동행하게 된 여인은 생명을 위협하는 적들과 긴박한 추격전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감정적 교감을 이뤄나간다. 두 캐릭터가 이뤄내는 사연의 형태보다도 두 캐릭터가 사연의 형태 속에 어떻게 놓여있는가가 먼저 발견된다. 두 캐릭터는 영화의 단점을 가리는 위장막이자 장점을 부각시키는 방점이나 다름없다.
결과적으로 <나잇 & 데이>를 이루는 대부분의 요소란 과거로의 회귀에 가까우며 이는 흔히 말하는 복고의 의미에 가까운 가치를 품고 있다. 사실 두 캐릭터의 만남으로부토 얻어지는 사연들의 대부분은 낭비적이거나 무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잇 & 데이>는 좀 더 천연덕스럽고 뻔뻔한 방식으로서 그 낭비적인 신들을 제 입맛에 맞게 버무린다. 중간중간 몽타주신을 이용해서 긴 설득이 필요할 만한 서사를 일거에 압축해버린다거나 세계 각지를 도는 로케이션은 어떤 액션들을 연출하기 좋은 병풍처럼 나열된다. 백치스럽지만 명확하고, 단순하지만 간단하다. <나잇 & 데이>는 명확하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오락영화다. 빈 구석이 눈에 띄지만 그 빈 공간마저도 하나의 전략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영악한 작품인 셈이다. 백치와 백치미가 다르듯, 멍청한 척하는 것도 일종의 전략이다.
세계2차대전이 한창 중인 튀니지 사막에서 독일군 대령 장교는 다짐한다. 나는 조국 수호가 아닌 인류 수호를 위해 싸우겠다. 그는 히틀러가 독일의 영웅이 아닌 인류의 주적이라 판단한다. <작전명 발키리>(이하, <발키리>)는 그 독일군 대령 슈타펜버그(Stauffenberg, 톰 크루즈)의 양심적인 성찰을 조명하는 데서부터 영화를 시작한다. 일종의 정치적 선언이자 연기의 입을 빌어 던지는 일종의 고백성사다. 동시에 이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도입부에 이를 명백히 밝힌다. 적어도 이 허구적 산물의 어느 측면까지 실재가 반영된 것인지 가늠할 순 없겠지만-또는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이는 적어도 영화의 태도를 의심하지 않게 만드는 적절한 방어기제 노릇을 한다.
일단 <발키리>는 어느 비윤리적 집단 내부에서 피어난 양심적 선언에 대한 재현이라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발키리>는 모종의 정치적 야심을 숨기고 포복시키는 영화이기도 하다. 인물들의 두려움은 온전히 그 시대에 내포된 정신병적 파시즘에서 비롯된다. 인물들이 대항하는 건 거대한 악이 아니라 거대한 악처럼 강요되는 정신병적 불안이다. 두려움은 충돌과 갈등을 도모하고 이는 곧 영화적 서스펜스의 주체로 발전한다. 서스펜스의 날을 세우는 건 인물의 외부에서 형성되는 이미지의 결과물이 아니라 갈등과 충돌로서 이뤄지는 심리적 불안감이다. 그 불안은 인물들을 머뭇거리게 만들고 제약하며 가둔다. 그 사이에서 차분하고도 점진적인 서스펜스가 영화를 잠식해나간다.
<발키리>의 결말을 언급하는 행위가 스포일러로 규정될 이유는 없다. 어차피 이 영화는 실패한 혁명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의 허구적 야심은 역사적 기록을 뒤집고자 할 만큼 과감하지 않다. 실패한 혁명은 적어도 그 당시엔 반역으로 기록되고 처형당한다. <발키리>는 그 당시엔 반역이라 불리던 에피소드다. 히틀러가 암살당해서 죽었다는 기록을 본적이 없는 이상, 그가 자살했다는 역사적 증언을 아는 이상,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적 몸통이 온전히 실화로부터 빌려온 것임을 선언하는 영화의 도입부를 확인하는 이상, 결과는 명백하다. 슈타펜버그의 신념은 결국 무덤으로 향할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미 결론이 도출된다. <발키리>는 정해진, 혹은 예고된 결말을 향해 달리는 이야기다. 결과가 아닌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인물들의 심리적 변화와 추이를 묘사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동시에 그 정해진 비극을 향한 인물의 의지가 대두된다.
관객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온전히 비극적일 수 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한 가지 물음은 어째서 당연한 비극적 결과를 전개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슈타펜버그의 고결한 양심적 선언을 비추기 위해서? 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첨언이 필요하다. 더 잠재적인 야심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이 매그니토의 유태인 수용소 씬을 등장시키는, 울버린의 인체 실험적 장면이 나치를 연상시키는 <엑스맨>의 수장 브라이언 싱어가 만든 <발키리>엔 사유화된 욕망이 잠재돼있다. <발키리>는 영화감독 브라이언 싱어와 유태인 브라이언 싱어가 공존하는 영화다. <발키리>의 슈타펜버그는 히틀러에게 대항한 범인류적 위인의 삶을 추적하는 영화이기 전에 브라이언 싱어가 복원하고픈 어떤 정의에 대한 추도다.
슈타펜버그가 히틀러 암살 기도를 꿈꾸는 군내부 세력들과 처음 접촉하는 장소에서 목격하는 건 일종의 정치다. 독일의 미래를 위해 히틀러를 죽이고자 하는 그가 히틀러를 죽이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부터 생존을 위한 정치적 모략을 목격한다. 그들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적임자를 찾고 있다. 그들의 사명감은 히틀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안전에 있다. 패전이 점차 시일 안으로 다가오자 패전국의 전범으로 기록되지 않기 위해 히틀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하지만 슈타펜버그는 히틀러의 죽음이 사명이라 믿는다. 그런 그에게 정치는 온당치 않다. 정의를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생을 위한 정치란 일종의 사기와 같은 것이다. <발키리>의 슈타펜버그는 그런 사람이다.
<발키리>의 슈타펜버그는 실제적인 슈타펜버그로부터 어느 정도 가공된 인물이다. 가공의 주체는 브라이언 싱어다. 그는 슈타펜버그가 히틀러의 나치를 윤리적으로 부정하는 인물로서 바라보고 싶었을 가능성이 크다. 슈타펜버그와 목적을 같이 하는 주변의 군부 세력들이 패전국 독일의 역사에서 명예롭게 히틀러의 존재를 지우길 원하는 것과 궤가 다르다. 패배가 예감되는 전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보유하려는 이들의 정치 가운데 슈타펜버그만이 유일하게 히틀러에 대한 윤리적 타락을 본다. 슈타펜버그는 유일한 양심이자 조직의 윤리적 타락을 비판하기 위한 기제에 가깝다. 브라이언 싱어는 슈타펜버그의 육체를 빌려서 독일 나치에 대한 윤리적 물음을 던진다. 내부적인 양심을 발효시킨다. 외부에서 유입된 강제적 진압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잉태된 자율적 신념이 스스로의 모체를 부정하길 바란다.
세계2차대전을 시간적 배경으로 두르고 있지만 <발키리>는 전장을 묘사하는 영화가 아니다. 극 초반 튀니지에서의 씬을 제외하고 전쟁터다운 장면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베를린 독일군부의 장교만이 등장한다. 연합군과 독일군과의 전투 장면은 찾아볼 수 없다. 쉽게 말하면 <발키리>는 전쟁영화라기 보단 정치영화에 가깝다. 어떤 이들은 벌써부터 이 영화에 스펙터클이 부족하다고 꼬집고 있으나 의도하지 않은 바를 스스로 원해서 실망했다 말하는 건 석연찮다. <발키리>는 전쟁의 승패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패배한 체제의 전복을 통해 자신을 보수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미 패배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전범의 역사에서 어떻게든 발을 빼려 바둥거리는 이들의 처량한 사연이다.
<발키리>에서 흥미로운 건 히틀러에 대한 테러를 주도하는 세력들간의 정치적 갈등이 발견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그 테러의 주변부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을 가늠하는 제3자들의 태도다. 슈타펜버그의 비장함이 때때로 무색하게 느껴지는 건 이 덕분이다. <발키리>는 어느 한편에 선 자들의 묵묵한 표정보다도 그 중간지대에서 방목하듯 살아가는 회색분자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지점을 갈등하고 고심할 때 더욱 흥미로운 표정을 드러낸다. 슈타펜버그의 결의에 찬 눈빛은 흔들림이 없다. 그만큼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의 편에 설 것인지를 망설이는 자들의 표정은 흥미롭다. 결국 <발키리>는 어떤 선의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 선의와 건너편의 악의 사이에 놓인 중간자들의 흔들림이 드러날 때 더욱 매력적인 흥미를 부른다. 중심부보다 주변부의 설계가 더욱 흥미롭다.
사실 슈타펜버그가 나치의 비윤리적 태도에 항거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독일의 이익에 반하는 히틀러의 행위적 결과가 참담하다는 데서 악을 규정한다. 윤리라기 보단 실리에 가깝다. 브라이언 싱어의 <발키리>가 균형을 잃는 것도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는데 있다. <발키리>는 독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어느 애국자에 대한 항거적 실화다.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자의 내면에 다른 욕망이 숨겨져 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피해의식이 우회한다. 히틀러를 숭배하거나 숭배하는 척을 하며 살아갔던 독일인들의 무기력에 대한 항의와도 같다. 이런 태도는 <발키리>를 때때로 지극히 사유화시킨다. <발키리>는 정치를 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드러날 때 긴박해진다. 목적을 완수하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망설이고 머뭇거린다. 윤리적 신념이 아니라 정치적 야심에서 비롯된 미션이라 끊임없이 스스로의 행동을 검증하고 자신의 안위를 판단한다. 유일하게 행동을 위한 행동을 펼치는 슈타펜버그만이 적극적이다. 그는 그의 말대로 정치를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슈타펜버그를 소환한 주체가 종종 의무감의 주체를 헷갈리듯 보인다는 점이다. 실제 인물의 의지를 허구의 틀 안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의무감과 캐릭터의 탈을 쓰고 자신의 유전자적 트라우마를 투영하려는 의무감이 캐릭터의 균형을 흔든다. 슈타펜버그의 강력한 정치적 매력은 그가 정치를 하지 않는 인물이란 점에서 발생한다. 그를 따르는 사람 대부분이 그의 신념을 본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때때로 슈타펜버그를 통해 어떤 정치를 하려 든다. 슈타펜버그를 윤리적 주체로 삼아 히틀러라는 상징적 비윤리를 비판하려 든다. 결말의 숭고함은 어딘가 지나치다. 페이소스가 발생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영역의 안타까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슈타펜버그의 안위와 그의 가족에 국한된 사안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발키리>는 비정치적인 인간을 통해 인간의 정치적 태도를 탐구한다. 전쟁의 패배자로 기록될 것을 예감한 이들은 자신들의 안위가 보존될 길을 찾는다. 그건 그 전쟁 속에서 정치적으로 공정한 사람이 되길 시도하는 것이다. 히틀러를 죽이면 전범이란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 패배를 자신들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자 하는 몸부림에 가까운 것이다.
<발키리>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그 어떤 홀로코스트 영화보다도 강한 자의식을 품고 있다.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비극적 역사에 갇힌 유태인들의 기적 같은 구원담을 말해온 건 그들의 처지에 대한 슬픔에서 비롯된다. 그건 휴머니즘에 기반한 일종의 대항적 희망이다. 비극에 대한 방어적 성찰이다. 하지만 <발키리>는 그 비극을 잉태한 주체의 몰락을 직접적으로 갈망하듯 재현한다. 동족의 비극을 기획했던 자들의 내부적인 몰락을 기획한다. 비극을 묘사하는 방식으로서의 간접적 고발이 아니라 비극의 발원지에서 펼쳐지는 자기 모순을 통해 정신병적인 체제를 고백하듯 그린다. 더 이상 과거를 동정하듯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극복으로 나아간다. 일종의 야심이 담겨있다. 더 이상 유태인의 비극을 그리는 추모제가 아니라 비극을 기획한 적의 심장부를 겨눈 직접적인 가해를 꿈꾼다.
전쟁에서 패배한 뒤 전범으로 기록되지 않고자 했던 이들은 정치적으로 승리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하려 했다. 전쟁의 무의미를 깨닫는 슈타펜버그만이 비정치적 사명을 위해 바삐 움직인다. 그리고 그의 결단과 행위를 지켜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갈대처럼 흔들린다. 그 와중에도 정치적 이득을 계산하고 망설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비정치적인 인간이 정치적인 결단을 종용한다. <발키리>의 성과는 그 아이러니한 지점에서 발생한다. 지나친 감정을 요구하는 결말이 불합리한 감상을 부여하는 건 그 때문이다.
드라마틱한 페이소스를 부화시키려는 막판의 시도가 지속적인 서스펜스의 리듬을 흐트러뜨린다. 섬세하게 간격을 유지한 채 심리적인 기저에서 찬찬히 흐르고 불거지던 긴장의 구조적 흐름이 허망하게 급류된다. 특히 너비보다도 깊이에 치중하던 <발키리>의 서스펜스 구조가 양적으로 팽창하는 감정적인 과잉 상태에서 마무리된다는 점은 여러모로 아쉽다. 그건 단지 결말이란 정보의 개방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지속적으로 유지하던 온도가 변했기 때문이다. 일정한 음역 대를 규칙적으로 연주하던 오케스트라가 마지막 악장에 다다라 갑작스럽게 고음역대로 음을 집중시키는 것처럼 불안정하다. 그건 어디까지나 <발키리>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무마시키기 위해 극 말미에 다다라 지나친 무리수를 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브라이언 싱어는 자신의 정치적 승리를 위해 영화적 패배를 방조한 셈이다. 오로지 슈타펜버그만이 비정치적인 인물처럼 묘사되지만 슈타펜버그조차도 비정치적 태도로 정치를 완수한다. 결국 휴머니즘은 무색해진다. 시대적인 정신질환을 진단하던 영화가 뒤늦게 인간미를 설득하는 건 어딘가 무력한 일이다. 정치적 승리를 원했던 패배자에게 숭고함을 부여할 때 그것은 명예가 아니라 일종의 모욕적 미화로 남게 된다.
그는 다짐한다. 인류를 위협하는 히틀러를 척결하겠노라. 그는 히틀러를 자신의 적으로 선포하는 중이다. 그는 장교다. 그러나 히틀러가 숨쉬는 독일을 향해 진군하는 연합군의 장교가 아니다. 나치의 표식을 달고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한 독일군의 장교다. 그는 자신의 최고 상관을 적으로 규정한다. 성공하면 혁명이 된다. 실패하면 반역이 된다. 기로에 선 그 남자는 성공을 다짐한다.
<작전명 발키리>(이하, <발키리>)는 실패한 혁명에 앞장 선 남자의 이야기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장교로서 국가 전복을 꿈꿨던 슈타펜버그(톰 크루즈)의 실패한 혁명에 관한 실제적 사연이다. 쉽게 말하면 <발키리>는 어느 한 인물의 일대기인 셈이다. 궁극적으로 <발키리> 역시 결과는 훤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결과가 정해진 사연이다.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이뤄진 영화가 이에 충실하다면 이야기의 구조는 새로울 것이 없다. 정해진 길을 따라갈 뿐이다. 정해진 결말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이야기에 대한 의문은 불필요하다. 단지 그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들려지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이미 공개된 결말이나 다름없는 <발키리>엔 결말에 대한 짐작이 필요없다. 슈타펜버그가 히틀러에 반하는 군부 세력과 연합하여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과정엔 미스터리의 흥미가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는 사전에 공개된 정보를 통해서 극도의 긴장감을 선사하는 히치콕의 방식과 유사하게 서스펜스를 발생시킨다. 인물의 사소한 움직임마저 세심하게 포착하는 카메라의 샷은 공간의 여백까지 번져나가는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적 충돌을 세밀하게 담아낸다. 전쟁이 벌어지는 시대적 배경을 두르고 있으나 <발키리>는 전쟁영화라기보단 정치영화에 가깝다. 베를린 한복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광경은 전쟁의 승패를 가늠하기 위한 전투가 아니라 전쟁의 끝을 예감하는 이들의 각기 다른 표정이다.
그 표정엔 공통적으로 어떤 두려움이 엄습해있다. 이미 자신들의 전쟁이 패배할 것임을 아는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전쟁의 끝을 맞이할 것인가라는 고뇌를 품고 있다. 패망을 알면서도 체제에 기대는 이들이 있는 반면,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각기 다른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다. 그 와중에 슈타펜버그만이 자신의 신념을 통해 행위를 관철시킨다. 히틀러의 죽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동조자들이 갈등할 때 슈타펜버그는 과감히 행동을 펼친다. 여기서 슈타펜버그는 양심적인 내부자로 묘사되곤 하는데 이는 때때로 브라이언 싱어의 잠재된 혈통의 욕망을 읽게 만든다. 그를 묘사하는 주체의 욕망이 슈타펜버그를 선으로 규정하려 할 때 <발키리>는 때때로 격양된 감정을 품는다. <발키리>의 가장 큰 흥미는 양립된 야심의 중간자들이 갈등하고 추이를 지켜보는 표정에서 발생한다. 중간에 선 자들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표정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고뇌가 감지된다.
<발키리>는 비상전시체제를 대비한 독일의 예비군 동원을 뜻하는 작전명이다. 또한 극중에선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에 삽입된 ‘발키리의 비행’이 흐르기도 한다.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발키리는 용맹하게 전사한 전장의 용사를 천상의 발할라 궁전으로 인도하는 여신이다. 발키리는 때때로 남성 인간과 결혼하기도 했지만 결국 남자를 떠나거나 그 반려자가 된 남자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고 묘사된다.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발키리 여신 브륀힐테와 결혼을 약속한 지상의 영웅 지그프리트는 갈등과 반목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발키리 작전을 믿었던 슈타펜버그 역시 작전 지휘자의 변심으로 혁명의 수장에서 반역을 선동한 주범으로 반전된다.
물론 현대의 역사는 그를 반역자로 기록하지 않고 있으나 그의 최후는 명백하다. 역사는 항상 정의의 편에 선 것만은 아니다. 동시에 그것이 절대적 정의였는지 알 수가 없다. <발키리>의 결말이 과정보다 감흥이 덜한 건 단지 예상된 결과인 것만은 아니다. 슈타펜버그의 의지가 숭고한 정의에서 비롯된 것처럼 묘사하는 태도가 어딘가 식상하기 때문이다. <발키리>의 결말은 휴머니즘을 향하고 있으나 실상 그것은 정치 드라마에 가깝다. 전쟁에 패배했지만 정치적 승리를 꿈꾸던 이들의 표정이 흥미롭다. 하지만 결말은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마치 홀로코스트 영화의 영웅을 접대하듯 관성적이다. 영웅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그것이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는 핑계는 식상하다. 브라이언 싱어의 욕망이 영화를 사유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예의 수여라기 보단 지나친 미화적 욕심에 가깝다. 브라이언 싱어 역시 <발키리>에서 자신의 정치적 승리를 위해 영화적 패배를 감수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