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크 질렌할은 멋진 미소를 지닌 배우다. 슬픈 눈을 가진 배우다. 그리고 지금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안목을 지닌 배우다. 그는 단 한번도 안주하지 않았다. 그 경험이 비로소 그를 눈뜨게 만들었다.
“젊은 배우들은 자기 그릇에 맞는 작품을 만나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의 연인이라거나 순진한 역할을 벗어나 ‘바로 그 배우’가 되는 때 말이다.” <러브 & 드럭스>(2010)의 감독 에드워드 즈윅의 말처럼 어쩌면 지금 제이크 질렌할도 ‘바로 그 배우’가 되어가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몇 년 사이 질렌할이 출연한 작품들을 꾸준히 따라온 관객 중엔 그에게서 특별한 인상을 얻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최근작인 범죄액션물 <엔드 오브 왓치>(2012)를 비롯해서 SF액션물 <소스 코드>(2011), 멜로물 <러브 & 드럭스>와 판타지 어드벤처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2010), 스릴러 <브라더스>(2009)까지, 최근 그가 선택한 작품들은 다양한 장르의 경계를 넘어선다. 배우에게 있어서 연기적인 경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는 작품을 통해서 찾아온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다양한 영화적 장르에 머무르며 다채로운 연기적 시공간을 경험해온 셈이다.
물론 그 모든 작품이 엄지손가락을 올릴만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인기 고전 어드벤처 게임을 영화화한 디즈니 픽쳐스의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는 질렌할의 경력 중 가장 이색적인 시공간을 제공했고,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가질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으며 오점에 가까운 경력까지 안겼다. 두뇌마저 근육질이 된 것마냥 지능이 모자랐던 이 작품의 계약서에 질렌할이 도장을 찍은 것을 두고 세간에선 일찍이 그가 스파이더맨과 배트맨 코스튬을 입을 적임자로 거론됐던 과거를 언급했다. 영웅적인 블록버스터의 주연을 맡는 것에 매력을 느꼈으리라 지레 짐작한 것이다. 하지만 질렌할의 생각은 다르다. 그가 원했던 것이 히어로 코스튬이었다면 반대로 헐벗어야 하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꼈을 리가. “개인적으론 촬영 자체가 꽤나 즐거웠다. 몸값만 흥정하는 배우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즐겁게 촬영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배우 사이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곧 그가 상당히 약아빠진 방식으로 경력을 관리하는 배우는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브로크백 마운틴>(2005)은 이안의 손으로 연출되기까지 7년 동안 표류했다. 시나리오를 받았던 숱한 배우들은 하나 같인 손사래를 쳤다. 이유는 분명했다. 남성간의 동성애 연기를 펼친다는 건 누구에게나 큰 부담이었으니까.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히스 레저는 결국 자신에게 전달된 이 시나리오를 주저하지 않고 선택했다. 그는 훗날 말했다. “우린 에이전시나 매니저의 승낙이 필요한 수준의 배우들이 아니었고 출연을 결정하는 건 순전히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었다. 솔직히 이 배역을 맡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말해준 이가 없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란 레저 자신과 상대역을 맡은 질렌할을 말한다.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던 결과란 그들을 둘러싼 사소한 소문 따위와 대단한 명성이었다.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라는 의심의 꼬리표 따윈 대수가 아니었다. 자신의 경력에 밀도를 채워줄 작품을 만날 기회가 초짜 배우에게 잦은 일은 아니었으니까. “사람들이 나를 양성애자라고 말하는 건 배우로서는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배역에 대한 선택의 폭이 넓어질 테니까. 그러니 나를 뭐라 부르든 상관없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아니었다면 혹한 재난 영화 <투모로우>(2004)가 질렌할의 대표작으로서 좀 더 오랜 수명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질렌할은 꽤 인상적인 필모그래피를 지닌 소년이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성장드라마 <옥토버 스카이>(1999)에서 열연을 펼치기도 했지만 일찍이 그가 눈길을 끌었던 건 컬트적인 창작력이 돋보이는 미스터리 <도니 다코>(2001)였다. 음침하고 기괴한 전개의 끝에서 놀라운 결말을 선사하는 이 작품에서 질렌할은 정신분열적인 성향의 롤타이틀을 연기하며 뛰어난 가능성을 드러냈다. 하지만 유년시절부터 현재까지 질렌할이 연기한 캐릭터 대부분은 <굿 걸>(2002)에서의 제니퍼 애니스톤의 대사를 빌려서 설명할만한 것들이었다. “네 입술은 여자처럼 뿌루퉁하고 눈은 항상 슬퍼 보여.” 그 슬픈 눈엔 불안과 열망이 깃들어있다. 이는 질렌할이란 배우의 평형을 유지하는 저울의 양쪽 추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유부녀와 철없는 사랑에 빠져버린 <굿 걸>(2002)의 홀든을 비롯해서 갑작스럽게 자라난 비밀스러운 사랑을 애틋하게 간직하는 <브로크백 마운틴>의 잭, 아프가니스탄 참전 중에 사망했다고 전해진 형의 형수를 사랑하게 돼버린 죄책감과 절실함 사이를 방황하는 <브라더스>의 토미, 불치병에 걸린 연인과의 사랑 앞에서 번뇌하는 <러브 & 드럭스>의 제이미가 겪는 러브스토리엔 불안과 열망이 깃들어있다. 탄광촌의 편견을 이겨내고 우주를 꿈꾼 <옥토버 스카이>의 호머나 불의의 사고로 죽은 약혼녀에 대한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는 <문라이트 마일>(2002)의 조, 희대의 살인마를 추적하는 <조디악>(2007)의 암호광 로버트, 남아공 테러의 용의자와 관련된 음모 앞에서 고뇌하는 <렌디션>(2007)의 CIA요원 더글라스의 고민이나 갈등에도 불안과 열망이 깃들어있다. 특유의 해맑은 미소와 애수가 깃든 눈동자는 정서적인 보색을 이룬다. 이는 결국 영화의 감정을 입체적으로 건축한다.
질렌할의 최근작인 <소스 코드>와 <엔드 오브 왓치>(2012)는 장르도, 시제도, 무드도 완전히 다른 작품이지만 저예산 제작과 질렌할의 출연이란 특징을 공유한다. 열차 폭탄테러범을 찾아내고자 8분간의 기억에 담긴 과거로 돌아가 거듭 죽음을 체험해야 하는 <소스 코드>의 콜터와 살벌하고 끔찍한 범죄의 온상인 LA의 경찰인 <엔드 오브 왓치>의 브라이언은 그 다른 풍경 속에서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로 인한 생을 꿈꾼다. 불안 속에서도 자신의 열망을 거듭 확인한다. 질렌할은 두 작품의 감정선을 완성하는 화룡점정과도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두 작품은 배우로서 작품을 보는 질렌할의 눈썰미를 확신하게 만든다. 창의적인 SF적 발상을 멜로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착상한 <소스 코드>나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응용해서 현장감을 주입하며 이야기의 흥미를 끌어내는 <엔드 오브 왓치>는 새로운 전형이면서도 탁월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두 작품은 저예산의 자본으로도 장르에 어울리는 스케일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가격 대비 효과도 뛰어난 작품이다. 질렌할의 탁월한 눈썰미가 이를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자질이 이를 소화해낸 것이다. “내가 어떤 배우인지, 원하는 게 뭔지, 지금처럼 확실히 깨달은 적이 없었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남다른 경력을 쌓아나가던 질렌할은 비로소 자신의 세계를 찾았다. 배우로서 진정한 눈을 뜬 것이다.
제목만으로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동명의 고전 어드벤처 PC게임을 연상하는 이들이 많겠지만 사실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이하, <페르시아의 왕자>)는 그것과 시간차를 두고 있는 후속작에 가까운 롤플레잉 콘솔 게임을 모티브로 완성된 작품이다. 추억을 연상시키는 제목이며 실제로 그 양자에 가까운 후속 모델을 모티브로 완성된 작품이지만 실상 그 추억은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 <페르시아의 왕자>는 제목 그대로 <페르시아의 왕자>이되, 그 누군가가 기억하는, 혹은 반가워할 그 게임과는 직결되지 않는 동명의 타이틀을 지닌 영화에 가깝다.
고아였지만 우연히 페르시아 제국의 왕의 눈에 띄어 샤랴만 왕의 아들로 입양된 다스탄(제이크 질렌홀)은 왕가의 막내 왕자로서 활발하고 호탕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라난다. 그러던 중, 신성한 도시라 불리는 ‘알라무트’가 위험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게 된 왕자들은 도시를 공격하고 다스탄의 활약으로 도시를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공주 타미나(젬마 아터튼)를 만난 다스탄은 곧 함정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도망자로 전락하게 된다.
<페르시아의 왕자>는 올드한 고전의 명성처럼 근래 보기 드물게 올드 패션한 영화다. 스턴트와 파쿠르, 야마카시 등으로 채워진 액션 신의 팔 할은 서커스적인 재미를 부여하며 활극적인 기운을 부여한다. 하지만 일관적으로 뛰고, 구르는 액션으로 이뤄진 역동적인 움직임을 응시하다보면 굉장히 활동적인 가운데서도 느슨하게 벌어져 가는 지루함을 떨쳐내기 어렵다. 그것은 그 역동적인 움직임들이 때때로 실소를 부를 정도로 과장된 액션으로 이뤄져 있으며 그 액션의 줄기를 이루는 서사가 막무가내에 가깝게 흐르는 덕분이기도 하다.
단검에 채워진 모래로 인해 시간을 되돌리고, 이로 인해 운명의 수정과 보완이 가능하다는 설정은 영화에 적절한 흥미와 신비를 부여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서사의 흐름과 소재의 활용은 과거적이라는, 그러니까 향수를 자극할만한 수단으로서 감상을 부추기기 보단 언어 그대로 오래된, 그러니까 무언가 낡은 것을 보고 있다는 인식을 부풀린다. 마치 오래된 아동용 디즈니 영화가 성인용 오락 블록버스터의 흉내를 내고 있는 형태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고 할까.
조금 기묘한 감상을 낳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페르시아의 왕자>는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던 시절의 정세를 상기시키는 설정의 묘가 발견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위험한 살상무기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신비의 도시를 침공했지만 정작 그 전쟁을 발발시킨 무기는 발견되지 않으며 권력에 눈이 먼 권력자의 야욕에 의해 왕가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현실을 겨냥한 교훈 따위와는 거리가 먼 영화라는 것. 철저하게 제리 브룩하이머 식의 엔터테인먼트로 가득 채워진 <페르시아의 왕자>는 스케일을 통해 대단한 오락적 너비를 확보하는 특유의 방법론을 적극 활용한 어드벤처 무비로서의 기능성만을 염두에 둔 오락영화라고 말해도 좋은 작품이다. 그러니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오락영화로서의 만족감일 것이다. 뭔가 거창하고 날렵한 것을 보고 있는 듯하지만 반복적이고 느슨한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추억은 재미를 보장하지 않는다.
유년 시절 동명의 원작 게임을 즐긴 이들에게는 이름만으로 추억이 되겠지만 그 제목의 형태 이상의 의미는 염두에 두진 말 것. 마치 올드한 아케이드 어드벤처 게임을 상기시키듯 올드 패션한 어드벤처 무비를 완성시킨 것마냥 촌발 날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적당한 합의는 거둔 오락영화랄까. 투박하지만 활극적인 묘기에서 발생하는 서커스적인 재미를 즐길 수 있다면 그럭저럭. 하지만 그 빤하디 빤한, 종종 막무가내처럼 흐르는 서사와 액션을 즐길 수 없다면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