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고개를 돌리며 쳐다봤다. 정작 당사자는 씩씩하게 걷고 웃으며 말한다. "옛날에는 길에서 다 쳐다봤다. 우주복도 아니고,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을 입었는데. 심지어 그때는 머리카락이 있었는데.(웃음) 그럼 내가 씩 웃어줘. 일종의 실천적 참여 작품인 거지. 거리 퍼포먼스! 나는 하고 싶다 생각하면 했다. 그게 내게 큰 힘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 무용가 안은미가 춤을 추게 된 것도 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섯 살의 나이에 우연히 보게 된 한국무용수가 입은 의상의 색을 보고 춤을 춰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하늘의 계시 같은 것이었다. "춤이라는 게 마치 달나라로 가는 판타지처럼 느껴졌다." 결국 7년간 어머니를 조른 끝에 4천원의 레슨비를 허락 받았다. 시장통 건물 2층에 있는 낡은 무용학원에 발을 딛게 됐다. "무언가를 하는 내가 좋았다. 음악이 나오면 좋고, 내가 춤을 춘다는 게 좋았다." 하지만 8개월 만에 첫 번째 비행은 끝이 났다. 어머니의 뜻대로 무용학원 대신 영어학원을 가게 됐다.
다시 본격적으로 무용을 시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사실 진로라는 개념보단 좋아서 한 거지. 그러다 무용반
언니들이 대학을 간다 길래 왜 가냐 물으니 무용과가 좋다는 거다. 그래서 나도 대학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도 춤을 직업으로 삼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대학에선 그녀가 추고 싶은 춤을 가르치는 이가 없었다. 안은미는 학교 밖에서, 그리고 무용 밖에서 답을 찾았다. "학점을 따야 하니 학점
받을 만큼은 하고, 저녁에는 내 것을 했다. 내 마음대로
했다. 그리고 무용계에 있는 사람보단 미술하는 사람들과 많이 놀았다.
최정화나 이불, 이영주, 이수경 등 새로운 관점을
찾고자 하는 작가들을 만나서 뭔가 해보자면서." 실제로 그녀는 미술작가 최정화의 작업물과 무용을
잇는 탈경계적인 작업을 해내기도 했다. 그녀에게 춤이란 보여주기 위한 동작이 아니라 세상과 대화를 나누기
위한 언어였다. "무용이 추상적인 언어 같지만 물리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한다. 막연히 아름다운 몸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자연의 균형감각을 삶에 투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안은미는 뉴욕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한국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 자신을 던져 균형을 잡아보고자 했다. "내 몸에 충격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걸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1992년에 한국을 떠나 뉴욕에 당도했다.
안은미는 뉴욕에서 서서히 자기 영역을 구축해 나갔다. 뉴욕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한 30대 무용수는 뉴욕을 근거지로 안은미라는 이름을 각인시켜 나갔다. 맨하튼 예술재단의 안무가 상을 받고, 뉴욕 예술재단의 아티스트 펠로십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뉴욕은 그런 영광으로 점철된 영토가 아니었다. "그저 열심히 재미있게 살았다. 1년에 한번 공연하고, 영어 배우고, <뉴욕 타임스>
읽고, 아메리카노 마시다가 '방세 언제 내지?' 생각이 들면 나가서 일하고. 그렇게 방세 내고 나면 또 놀고. 그렇게 10년을 뉴욕에서 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10년이 짧다는 걸 알았다.
서두르지 말자. 가만히 있어도 10년은 다 내
것이 된다. 아득바득 살 필요 없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그냥 가는 거지." 한국에서도 안은미는 독보적인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무용은 보수적인 한국 사회를 압도하는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안은미는 2000년 대구시무용단에서 단장직 제안을 받아들이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안은미 컴퍼니에 무용수가 10명 있는데 아마 내가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들을 만나러 왔구나 싶다. 우리 팀은 신선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헌신으로 좋은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다. 거기까지 닿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어느 정도 넘어서면 다들 경이롭게 본다. 외국으로
투어를 나가도 이런 팀워크가 없다." 지난 몇 년 사이 안은미 컴퍼니는 유럽 등지를 돌며 춤을
춰왔다. 한국 할머니들의 막춤을 무대에 올린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를 비롯해 여고생과 아저씨가 등장하는 <사심
없는 댄스>, <아저씨들을 위한 무책임한 댄스>가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덕분이다. 그녀가 이런 막춤을 무대에 올리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무용수들과 형식적인 작업을 해오다 보니 안무가로서 만족하면서도 색다른 시각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할머니들의 몸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나갔고, 한달 만에 270명을 찍었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시각을 얻었다. 할머니들 춤을 막춤이라 부르지
않나. 쉬운 춤이라 생각했는데 카메라를 통해 들여다본 몸에 놀라운 힘이 있더라. 살아오면서 축적된 정서, 배경, 성격
등이 함축된 몸을 흔드는 거다." 막춤 안에 깃든 세월과 세상과 인생을 보았다. 그래서 무대에 올리길 결심했다. 학생들과 아저씨들을 무대에 올린
것도 마찬가지다. "할머니들을 기록하다 다른 세대가 궁금해졌다. 같은 질문을 애들한테 하면 어떨지, 아저씨들한테 하면 어떨지. 애들은 무조건 아이돌 댄스를 춘다. 그리고 아저씨라고 불리는 걸
싫어하는 한국 남자들은 춤추는 걸 부끄러워한다. 그 부끄러움 역시 역사이고, 객관적인 시점이니 그런 몸을 기록했다."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는
무용수들이 춤을 추는 1부와 할머니가 등장하는 20분짜리
영상을 보여주는 2부 그리고 그 영상 속의 할머니가 무대 위로 올라와 막춤을 추는 3부로 구성된다. 그리고 피날레에선 공연을 보던 관객들까지 무대로
올라와 춤을 춘다. "무대는 아티스트의 영역, 객석은
관객의 영역, 이런 틀을 없앴다. 그런데 우리가 봐도 놀라운
정도로, 관객들이 해일이 밀려오는 것처럼 무대로 뛰어올라온다. 그리곤
할머니들과 무용수들과 같이 춤을 춘다. 나이든 국적이든 상관 없다. 언어보다
더 센 표현이 터지는 거다." 춤의 장을 넘어 삶의 장으로 변모한 무대, 그것이 안은미가 춤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리고 춤을
통해 자신을 살리는 방식이다. "예술 하는 사람은 안정감을 가지면 안 된다. 자신을 코너에 세우고 긴장감 있게 살아야 한다. 작가가 결과물을
못 내면 창피한 거잖아. 지구를 떠나야지. 그러니 매일 내
자신을 코너에 밀어 넣는다." 마치 영원히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을 사람 같다. 하지만 언젠가 그녀의 춤도 멈출 것이다. 달나라로 가는 판타지에도
마지막 장은 있을 것이다. 안은미는 말했다. "아마
방전되는 날, 그날 갈 거다. 우주선 타고. 상상만 해도 귀엽지 않나?" 이보다 유쾌할 순 없다.
about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사심 없는 댄스>, <아저씨들을 위한 무책임한 댄스>로 유럽 등지를 열광시킨 안은미는 동시대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무용가다. 안은미
컴퍼니 소속 무용수들과 함께 세계를 돌며 무대에 오르는 그녀는 파격보단 자유를 추구하며 행복하게 춤을 추고 있다.
뮤지션 정재형은 기분 좋게 망가지는 법을 알았다. 드디어 조금 방송을 알게 됐다. 어느 정도 카메라가 익숙해졌다. 이젠 카메라 앞에서 요리도 한다.
발리에 서핑을 하러 갔다가 급작스럽게 맹장수술을 받게 돼서 살이 빠졌다던데, 맹장수술을 받았다는 것보다 서핑을 한다는 게 의외였다.
작년 10월부터 시작했는데 나도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몇 년 전부터 아는 후배가 해보면 좋아할 거라고 추천해서 생각만 하고 있다가 일단 수영을 먼저 배웠다. 그리고 수영이 어느 정도 능숙해질 무렵 (장)기하랑 부산에 놀러 갔다가 나만 하루 더 묵게 됐는데 뭘 할지 고민하다 부산에 있던 후배들한테 연락했고 서핑을 배우게 됐다. 지금은 컴퓨터에서 파도 그림만 봐도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서핑은 의외지만 요리는 어울린다. 올리브TV에서 진행하는 <정재형의 프랑스 가정식>을 제의 받게 된 과정은?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됐다. 작년에 방송 관계자와 저녁을 먹다가 프로그램 이야기가 나왔는데 만약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면 프랑스 가정식을 할 수 있겠다고 했다. 거창하게 느껴지는 메뉴가 아니라 브라세리(brasserie)에서 먹던 소박한 가정식 말이다. 물론 그 당시엔 당장 바빠서 여건이 안됐다. 요리 프로그램을 해본다는 게 망설여지기도 했고. 그러다 이렇게 하게 됐다.
원래 요리는 즐겨 하는 편이었나.
파리에선 그랬다. 처음 도착하자마자 했던 건 아니었다. 시간도 없었고, 해봐야 계란밥 정도? 그렇게 1년이 지날 무렵 피부 질환이 생겨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식생활을 묻더라. 당시엔 육류 위주로 먹거나 인스턴트로 대충 때우곤 했다. 그러니 병이 나지 않겠냐고 묻는데 그럴 만했다. 그 다음부턴 매끼마다 샐러드를 만들었고 그렇게 시작했다. 파티에 초대되면 항상 레시피를 물어보곤 했는데 한번은 일본 친구들이 끓인 카레에 놀란 적이 있었다. 6시간 동안 양파를 볶아서 카라밀라이즈를 만드는데 요리도 하나의 창작이라고 느껴지더라. 음악처럼 남들을 즐겁게 만들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메뉴 선정 방식은?
<마스터 셰프> 출신의 박준우 씨가 감수를 도와준다. 지금은 10회 정도까지 대략적인 레시피를 정했다.
메뉴 선정에 개인적인 경험도 반영될까?
그래야 할 얘기가 생기더라. 그래서 하고 싶은 메뉴를 한 20가지 정도 뽑아놓은 다음에 가능하겠다 싶은 걸 추려낸다. 그런데 ‘블랑켓 드 포’처럼 손이 많이 가는 메뉴보단 ‘크래프 수제트’ 같이 간단한 메뉴가 반응이 좋다. 요리 프로그램에서 원하는 느낌을 배우면서 수정을 해나가기도 한다.
반응도 체크하나?
안 본다고 말할 줄 알았겠지만 챙겨본다! 그런데 이거 마케팅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적극적인 리뷰가 많더라. 직접 만들어서 사진을 올린 글을 보고 ‘오!’ 이러면서.
음악에 대한 반응을 접하는 것과는 기분이 다를까?
분명히 그렇다. 아무래도 내 음악과 방송에서의 이미지는 극과 극이기도 하고. (유)희열이가 그랬다. ‘굳이 중간 지점을 찾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떤 면에선 유일한 사람 아니냐. 그냥 형이 보여줄 수 있는 걸 예능에서 보여주면서 음악과 같이 가면 되지 않겠냐.’ 그런 것 같다. 내가 언제까지 방송을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흐르는 대로 가려고 한다.
뒤늦게 생각해보면 <무한도전> 출연이 큰 전환점이 된 셈인데.
물론 그 당시엔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어리둥절했지. 당시에 수많은 프로그램 출연 제안을 거부했던 것도 내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내가 원래 정리가 안되면 한발도 못 뗀다. 그런데 요즘 <정제형의 프랑스 가정식>은 좀 편하게 하고 있다. ‘편집을 잘해야 할 텐데’라고 생각하다 보면 불안하기도 하지만(웃음).
의외로 방송 활동에 적극적이란 인상이다. 가끔은 즐기는 것도 같고.
예능을 할 거라면 어설프게 하진 말자고 생각했다. 잘하겠다는 야심이라기 보단 최선을 다하자는 각오랄까? 물론 음악 활동을 해치지 않는 선을 유지하면서.
그런데 새 음반은 아직도 기약이 없나?
곧 영화음악 작업을 하나 시작한다. 사실 <무한도전> 이후로 고정 출연했던 방송이란 게 <유&아이> <불후의 명곡>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내가 음악 외에 다른 것에 신경 쓰다 보니까 정신을 못 차린 거다. 원래 써놓은 곡들이 있었고 한 2~3년 전에 음반을 냈어야 하는데 이제야 조금 진정이 돼서 시작해보려고 한다.
멀티태스킹이 어려운 편인가 보다.
멀티태스킹보단 또 다른 정재형들의 유닛 활동이라고 해두자(웃음). 어쨌든 마흔 살까지 음악만 보고 살았는데 내 인생에서 이렇게 한 발 뒤에서 음악을 해보는 건 처음이기도 하다. 사실 음악을 만들고, 가사 쓰고, 공연하고, 그 일정들은 생각보다 버겁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거다. 서핑이 그렇다. 서핑을 하다가 높은 파도가 오면 덜컥 겁이 난다. 나는 지금 아주 낮은 파도만 탈 수 있으니까. 그래서 잠시 멀리 떨어져서 낮은 파도를 기다리는 거다. 음반 활동은 내겐 큰 파도와 같다. 에너지를 비축해야만 한다. 그런데 최근에 아파 보니까 알겠더라. 기도를 하고 있더라. ‘잘못했어요. 음악 할게요.’ 음악을 미루고 있다는 데에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나 보더라.
그런데 한창 잘 활동하다가 나이 서른에 불쑥 파리로 유학을 갔다.
내가 원래 좀 ‘또라이’다(웃음). 사실 주위에서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나는 점점 이게 내 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영화음악을 배우겠다고 유학까지 떠난 이유는?
사실 영화 음악은 그냥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베이시스 2집 즈음에 <마리아와 여인숙>이란 영화에 음악감독으로 참여했는데 극장에서 보니까 내가 너무 민망하더라. 아무 것도 없이 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럽 영화를 좋아해서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됐다. 그렇게 2년 정도 공부해서 영화음악 과정이 끝나고 나니까 클래식 공부에 욕심이 생기더라.
9년이나 머물 거라 생각했나.
정말 몰랐다. 길어야 3년 정도? 밀린 공부를 하겠다고 갔는데 기간이 길어졌다. 사실 클래식을 전공할 때 가요를 하면서 교수님들로부터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유학 가서 영화음악 과정을 마치고 클래식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깨달았다. 나도 구분하고 있었던 거다. 그 뒤론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지금까지 음악을 배워왔던 기간보다도 음악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엔 음악 작업을 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꾸준히 영화 음악 작업 의뢰가 들어왔고, 현지 학교에 내야 하는 과제 작업물도 있었고. 돌아보면 30대가 음악적으로 가장 치열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자양분이 있었기 대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도 있었던 것 같고.
아무래도 체류비가 적지 않았을 텐데.
내 음악감독비가 비싼 편이었다. 물론 잘 하니까(웃음)? <중독>에 참여한 이후로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었다. 방학 동안 작품 하나 하고 그 돈으로 파리에서 1년씩 생활했다. 그게 아니었으면 그 긴 시간을 감당할 수 없었지. <정재형의 Paris Talk>라는 책을 낸 것도 그런 결핍이 찾아준 경험이 아니었을까. 만약 베이시스의 정재형으로 늙었다면 지금과는 달랐겠지.
결국 9년간의 생활이 지금 큰 자산이 되는 것 같다.
남자는 5~60대에 정말 멋있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여러 가지 경험으로 나를 채워서 그 다음에 쓸 양분이 생긴다. 그렇게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파리 홍보 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이적이 그러더라. ‘형, 쫌만 더하면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받을 수 있겠는데(웃음)?’
요즘 <정재형의 프랑스 가정식>을 보면서 방송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다.
아마 <불후의 명곡>을 하면서 많이 배운 것 같다. 게스트도 많고, 단순히 <유&아이>처럼 진행과 게스트의 경계가 별로 없다. 완전 전쟁터지. 내가 던져주는 리드 멘트보다 중요한 건 게스트들의 대답이다. 그렇게 고생해보니까 조금 알겠더라. 꼭 ‘조금’ 알았다고 써야 한다(웃음).
<무한도전> 출연 이후에 이효리 씨와 진행한 <대학가요제> 당시엔 정말 심각했는데.
그때 (정)형돈이가 보고 그랬다. ‘다른 건 몰라도 형 옆모습은 눈 감고도 그리겠다! 무슨 측면 진행자냐. 카메라 좀 봐라(웃음).’
<정재형의 프랑스 가정식>은 혼자 진행한다는 점에서 부담은 없었을까?
녹화시간이 1회당 네 시간 정도인데 이게 레시피 프로그램이지만 재미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도도 기저에 깔려있어서 쉽지 않다. 그래서 녹화 전날엔 고민이 많았는데 그걸 안고 가니까 또 잘 안 풀리더라. 그래서 녹화장으로 향할 땐 되도록 발걸음을 가볍게 가져가려고 노력한다.
혼자 떠들면 어색하지 않나?
그래도 스태프들이 다 내 식구 같아서 편하다. 내 입장에선 시청자나 다름없기 때문에 스태프들과의 공감대가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손이 많이 가는 요리를 하다가 손이 부족하면 ‘빨리 와서 이거 저어봐’라고 나도 모르게 말하는데 그러면 스태프도 나와서 젓고 있다(웃음). 친구들이랑 밥을 만들어 먹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한 입 프렌치’라는 유용한 코너도 있고, 생각보다 실용적인 프로그램이더라.
알차지(웃음). 사실 처음 준비할 때 제작진한테 다양하게 해보자고 코너 하나씩 짜오라고 쪼아댔다. 지금도 계속 그런다. 계속 아이디어를 달라고 닦달하는 중이다.
방송에 대한 적극성이 생겼다고 할까?
다 나를 위해서(웃음).
그래도 어느 정도 요리에 대한 자신감은 있었나 보다.
방송으로 보여주려니까 조금 버거울 때는 있지만 맛있게 만든다는 자신감은 있다. 그래서 ‘맛있다’는 말을 들어야만 만족스럽다. (김)동률이네 막내 동생이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하면서 종종 우리 집에 왔었는데 패션 계통에 있는 둘째 동생도 종종 파리로 출장을 오곤 했다. 한번은 우리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했는데 계속 맛있다고 그러더라. 사실 걔가 좀 무뚝뚝하거든. 나중에 헤어질 때 한 마디 하더라. 팁을 듣고 왔다고. 동률이랑 동률이 막내 동생이 정재형이 만든 밥을 먹을 땐 맛있다는 말을 열 번씩은 해야 한다고 그랬다나(웃음). 아니면 그 다음 요리가 안 나올 거라고. 스태프들이 와서 먹을 때도 “맛있지? 맛있지?”라고 계속 물어본다. 그럼 다들 맛있다고 한다(웃음).
김동률 씨가 제작진에게도 팁을 줬나 보다.
아마 소금을 줘도 맛있다고 할걸(웃음).
팬들로부터 음악요정으로 불렸는데 요즘은 요리요정이라고 불리더라. ‘요정’이 된 기분은?
예전에 <우리 집에 왜 왔니?>라는 영화 음악으로 인연을 맺었던 황수아 감독이 아이유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면서 연기를 해줬으면 좋겠다더라. 그런데 역할이 음악 요정이었다. 그래서 유희열이 공식석상에서 ‘음악요정이십니다’라고 소개를 하면서 음악요정이라고 불리게 됐다. 처음엔 민망했는데 점점 나를 친근하게 느낀다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물론 ‘요리요정’ 정재형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때도 고민이 많았다. 사람들이 또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잖아. 지금은 그냥 ‘요리 요정님’하면 ‘왜?’ 그런다(웃음).
<밀리언셀러>라는 파일럿 프로그램에서 박명수 씨랑 작곡 대결을 한다던데.
다양한 사람들이 신청한 사연을 모티프로 작곡가들이 곡을 쓴다. 그리고 매회마다 PR해줄 가수에게 곡을 주는 건데 첫 회엔 주현미 씨가 나온다. 어쨌든 내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카테고리에 있는 분이 아니고, 트로트를 써야 된다는 점에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개인적으론 내 상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연을 리터치해서 가사를 쓴다는 점에서 환기가 된 부분이 있다. 사실 지금까지 앨범 발매가 지연된 건 가사 쓰기가 힘들어서였거든. 아무래도 좀 고무적이랄까. 재미있을 것 같다.
유희열 씨나 이적 씨와 친분이 두터워 보인다. 두 사람도 예전에 비해서 예능 활동이 활발해지기도 했는데.
얼마 전에 (이)적이를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는데 이렇게 서로 꾸준히 조명을 받을 수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들 스무 살에 데뷔했던 친구들인데 아직까지 사랑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 아닌가 싶어서.
음악적으로 비교했을 때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지?
예전엔 이런 질문하면 약간 머뭇거렸는데 요즘은 그냥 ‘내가 최고지(웃음)!’ 사실 그들의 작업을 보고 있으면 자극도 되고, 존경심이 생긴다. 그들이 음악을 파는 에너지는 남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니까. 정말 잘하는 아이들이다.
<집으로 가는 길>은 방은진의 세 번째 연출작이다. 그녀는 배우 시절부터 줄곧 영화 현장에 자리했다. 그리고 어느 새 카메라 뒤에 서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 됐다.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내 작품’이라고 말하는 느낌은 다를 것 같다.
배우로서 아무리 연기를 잘했다 해도 영화의 완성도가 기대에 못 미쳐서 관객의 외면을 받게 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반대로 배우가 열심히 했는데 작품이 기대 이하라면 감독으로선 그게 다 죄책감이 된다.
아무래도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니까.
영화를 처음 만들면서 ‘영화는 감독의 것도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관객의 것이더라. 관객의 대중성을 정확히 판단할 순 없으니까 보편화시킬 수 있는 감정을 만드는 건데 결국 관객들의 반응을 통해서만 내 의도가 성공했는지 알겠더라.
98년도 즈음부터 연출을 생각했다던데.
단순한 이유였다. ‘카메라 너머에선 내 연기가 어떻게 보일까? 그 너머에서 영화의 공정을 지켜보면 좀 더 연기를 잘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연기적 욕심의 연장선상이었나 보다.
그것도 그렇지만 영화를 굉장히 사랑해서 그 주변에 머무르고 싶었던 거랄까. 지금이야 여배우들의 활동 연령대가 좀 더 높아졌지만 90년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98년엔 내가 30대 중반이었는데 역할이 많이 좁아지는 게 느껴졌다. TV로 넘어가서 아침드라마라도 해야 할까 싶었지만 내가 워낙 연극 베이스였고, TV 자체를 잘 보지 않아서 TV가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그 당시 IMF가 터지면서 준비 중이던 뮤지컬 제작이 무산됐고, 가열차게 출연을 거절했던 영화들이 상업적으로 대성공하면서 시나리오를 보는 눈에 대한 의심도 생겼다. 그럴 때 과감하게 시점을 바꿔보면 어떨까 싶었다.
진짜 감독이 돼야겠다 마음먹은 건?
2000년쯤? 내가 원래 의상 전공인지라 영화를 배워야겠다 생각해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명계남 선배님이 제작자협회에서 가져온 시나리오를 열심히 각색하기도 했다. 그렇게 감독이 되겠다고 출사표를 던지고 상업영화의 주류 장벽을 넘는데 5년 정도가 걸렸다. 그런데 원래 대부분의 감독들이 데뷔하기까지 곡절이 많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없었나?
그렇게 5년을 보내는 동안 덜컥 마흔이 됐다. 이창동 감독님이 “나는 마흔셋에 데뷔했다”고 하시는데 앞에서 말은 못했지만 ‘당신은 어차피 소설가잖아’라고 생각했다(웃음). 그만 두자니 쪽 팔리기도 하고 도망간다는 게 부끄럽기도 해서 망하더라도 한번 해봐야겠다고 두 눈 질끈 감고 견딘 시간이 5년이었지.
연출데뷔작 <오로라 공주>(2005)는 강렬한 데뷔작이었다. 여성 감독으로서 장르영화로 데뷔했다는 것도 신선했고.
여자 감독이, 여자가 사람 죽이는 영화를 만들었으니까(웃음). 엄정화 씨의 파격적인 변신도 흥미롭게 보였나 보더라.
두 편의 전작은 모두 허구였지만 <집으로 가는 길>은 실화 바탕의 영화다.
스토리텔링의 토대가 무엇이든 거기에 입힐 장르를 명확하게 생각하면 된다. 한 여자의 이야기로 풀 것인가, 가족의 이야기로 풀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가족의 이야기를 선택했고 그 여인의 억울한 옥살이에 방만하게 대응한 대사관을 안타고니스트(antagonist)로 세우면서 영화의 모양새가 보다 확실해졌다. 실화의 서사를 정확히 지키면서도 다양한 내러티브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선택한 내러티브로 무엇을 전달할 것인지 결정하고 실제 인물의 팩트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부분들을 구별하고 허구의 살을 붙여나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이 그냥 픽션을 만드는 것보단 좀 더 공정이 많아지는 것 같긴 하더라.
실제 인물에게 허락을 받는 과정도 있었을 텐데.
엄밀하게 따지면 꼭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다. 법률적으로 명시된 권리는 아니니까. 하지만 향후에 당사자들에게 어떤 상황이 닥칠지도 모르니까 허락을 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친구>도 실제 인물에게 허락을 받아서 만들었다. 그러면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어쨌든 다신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영화화를 허락했던 것처럼 나 역시 이래선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영화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근거는?
누구나 심지어 나도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만약 재정적으로 난처한 상황에 놓였을 때 누군가가 400만원을 주겠다며 그런 제안을 하면 솔깃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해서 이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만약 내가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영화에 관심도 없었을 거다.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최대한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다.
초반부 가족의 설정은 어디까지가 허구였나?
10년 넘은 친구에게 빚보증 사기를 당한 건 실화다. 그 친구가 밥 얻어먹으러 왔다가 후에 자살한 것도 사실이고. 다른 건 실제론 부부가 함께 프랑스로 가려고 했다고 들었다. 영화상에서와 직업도 달랐고.
배우 시절에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첫 번째 해외 로케이션이는데?
해외 로케이션 경험이 있는 스태프들의 도움이 컸다. 현지로 미리 넘어가서 스태프들을 뽑고, 여타의 엑스트라들을 스탠바이시키고 장소 섭외하고. 물론 차질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염두에 뒀던 장소 섭외가 불가능해졌거나, 이틀간 촬영하려 했던 신을 현지 배우 사정으로 하루 만에 끝내기도 하고. 촬영 당시 한국은 겨울이었지만 도미니크는 30도가 넘는 곳이었고, 시차도 커서 힘들었지. 아마 배우들이 가장 힘들었을 거다. 여담이지만 여유가 생겨서 도연 씨와 호텔 수영장에서 2시간 정도를 누워있었는데 촬영장에서의 햇빛과 호텔 수영장에서의 햇빛은 정말 다르더라(웃음).
한국과 프랑스, 도미니크 공화국을 오가며 촬영했다.
한국에서 촬영을 시작하고 프랑스로 넘어가서 대사관과 구치소 외관만 스케치한 후 도미니크 공화국에서 교도소 신을 촬영한 뒤 프랑스로 다시 넘어와서 오를리 공항신과 정연의 이송신을 찍고 한국으로 돌아와 해외 세트 분량을 촬영했다. 순차대로 지구 한 바퀴를 돈 셈이다. 그 전에 헌팅을 나갔다 온 것까지 더하면 한 바퀴 반 정도 돌았겠네.
공항에서 시간이 모자라서 계획했던 촬영을 다 못했다던데?
입국 심사장 직원의 시점으로 정연의 뒷모습을 보는 장면이 콘티에 있었는데 카메라를 넘겨서 찍으려는 순간 공항 직원이 막더라. 정해준 시간에서 5분이 남았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절대 비켜주질 않았다. 사실 프랑스 공항에서 촬영하는 게 어려운 편은 아니다. 아예 담당부서까지 있고, 담당직원 자리엔 유명한 감독이나 배우와 함께 찍은 사진도 걸려있다(웃음). 원래 2회차 분량을 찍으려 했는데 돈을 더 준다고 해도 12시간 안에 찍어야 한다고 해서 콘티까지 다 수정했다.
프랑스령인 마르티니크 섬의 교도소를 대체한 나야요 여자 교도소는 도미니크 공화국에 있다. 어떻게 도미니크 공화국까지 알아봤나?
최초에 PD 혼자 헌팅하던 시기가 있었다. 사실 마르티니크에서 찍고 싶었고 실제로 헌팅까지 했지만 비용이 8배나 차이가 났다. 도미니크는 처음 봤을 때 스페인풍의 느낌이라서 반대했는데 실제 교도소에서 찍을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었다. 다만 교도소가 너무 작고 편안해 보여서 촬영감독이 반대하기도 했지만 다른 교도소들을 타진해보니 여자교도소 자체가 남자교도소만큼 험하지 않더라.
전도연을 캐스팅한 건 이 영화에서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전도연 씨는 원래 이 작품의 태동부터 있었던 배우였다. 제작이 지지부진해졌다가 결국 내가 최종 각색을 한 뒤 프로포즈했다. 사실 하고 싶어하는 배우는 많았다. 배우라면 도전하고 싶은 역할이었겠지. 애 엄마라는 점만 빼고(웃음). 하지만 전도연 씨를 제외한 배우는 생각나지 않았다. 영화를 촬영하면서 서로 믿어주길 바래왔던 관계였던 것도 같다.
배우 출신 감독으로서 배우들과 소통하는 방식의 기준이 있을까?
배우가 갖는 고충에 대해선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최대한 배우를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만큼의 득실도 있다.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고 싶은데 배우와 합의가 어려우면 크게 고집하진 않는다. 배우가 자유롭게 선택하고 판단할 수 있길 바란다. 물론 그래선 안 되는 배우들도 있다. 배우마다 특성에 맞게 저마다 다른 디렉션을 준다고 생각했는데 항상 맞아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감독으로서 디렉션을 주는 게 가장 어렵다. 그래도 배우를 부른다거나 배우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면서 디렉션을 해본 적이 없다. 항상 배우한테 가서 배우가 앉아있으면 무릎을 꿇고 디렉션을 한다. 그런데 배우들은 선배 배우라고 생각해서인지 나를 어려워하는 것 같다. 그렇게 아껴주는데(웃음)!
최근 제작보고회에서 다시 배우로 나올 계획이 없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 질문은 꼭 하더라. 사실 예전엔 감히 연기를 했다면 지금은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니까 함부로 연기를 다시 하겠다고 말하기가 무섭다. 그렇다고 연기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옆에 있는 배우들에게 실례 같다. 어쨌든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 인생이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닌데. 중요한 건 연기를 하면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자고 할 사람이 점점 늘어난다는 거다(웃음).
세 편의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여성들이 고난의 주체로 등장한다.
의도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 그냥 그녀들이 거기서 헤쳐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기더라. 고난을 준다기 보단 그 상황을 주도적으로 끌고 나가는 인물이 여성이라면 능동적으로 헤쳐 나오길 바란다.
세 연출작은 표면을 들춰봐야만 내면의 진실이 드러나는 이야기 줄기를 지녔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코드가 있다. 그게 영화에 입체적인 구조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배우를 오래했던 사람인 만큼 인간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배우로서 캐릭터를 만들 때 단순화시키면 안되고 인간의 가변성을 꼭 봐야 한다. 이 사람이 유쾌한 사람이라 해서 슬픔이 없는 사람이라 단정할 순 없듯이 이면을 생각하면서 입체적인 구조를 연상해왔다. 나는 늘 그것이 캐릭터의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관객이 돈을 내고 볼만한 영화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회 비판적인 시각도 엿보이지만 직접적인 판단을 지양하는 인상이다.
메시지를 위해서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랬다면 다른 일을 했겠지. 메시지는 관객들이 찾아주는 거다. <오로라 공주>에서 누군가가 아이에게 “너희 엄마 어디 있니?”라고 물어봤으면 과연 그 아이가 유괴를 당했을까 싶은 순간이 있다. 아예 메시지가 없는 영화는 아니겠지만 주장하는 대신 감정적으로 버무려서 호소할 수는 있는 거다.
<용의자 X> 이전에 <이화에 월백하고>라는 섹스코미디를 준비했다던데.
13고까지 시나리오를 만지다가 나왔다. 영화사에서 진행시켜주지 않으니까. 지금은 다른 감독이 만지고 있다는 것 같던데.
그게 두 번째 연출작이 됐다면 이 인터뷰 내용도 완전히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럴지도. 조선시대 과부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었다는 허구를 모티프로 일종의 금기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는 여자들이 함몰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어쩌면 그 영화가 대리만족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전작이 워낙 센 작품이어서 예쁘고 발랄한 영화를 하고 싶기도 했고. 그런데 결국 이렇게 됐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게 다른가 보지. 사실 액션 영화를 연출하는 게 꿈이다.
왜인가?
소소한 얘기를 싫어하는 편이라서. 개인적으로 일상에 천착하는 일본 영화도 좋아하지 않는다.
감독으로서의 책임감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작품의 흥행도 신경 쓰이나?
당연하다. 나는 그게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영화를 하고자 연출을 시작한 사람인 만큼 대중적으로 인정받는 게 가장 큰 목표다.
세 번째 연출작인만큼 나름 감독으로서 정착했다는 기분이 들진 않나?
영화는 할수록 어렵다, 점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고 볼수록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노하우를 찾았다고 생각해도 그 방식이 쉽게 운용되지 않는다. 항상 스태프들이 바뀌면서 새로운 색깔을 입히니까. 관객들은 항상 새로운 걸 찾는다. 그만큼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 항상 만만치 않다.
파격적인 동성애 영화로 알려진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그 어떤 멜로보다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러브스토리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지독한 멜로물입니다. ‘이별을 통한 소녀의 성장통’이란 식으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건 영화가 끝날 무렵까지 그 이별이 성장으로 해소되기 보단 통증으로 내려앉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은 길에서 마주쳤던 엠마(레아 세이두)와의 우연한 재회를 통해서 예상하지 못했던 체험들을 거듭해나갑니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은 물론 아티스트로서의 미래로 나아가는 엠마와 그 주변부의 삶에 종속되기 시작하면서 삶이 예상 밖의 궤도를 돌게 되는 셈이죠.
단순히 성정체성을 깨닫는다는 것 이상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저편으로 나아가버리는 셈이에요. 결과적으로 아델에게 있어서 엠마와의 이별이란 감정적인 단절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기회와의 단절로도 이해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죠. 그만큼 이별이라는 진통은 아델의 삶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절망이자 비통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신이 보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저편까지 나아가 그 일상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 원점으로 튕겨져 추방돼버린 셈이니까요.
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히 좋습니다. 특히 아델 역을 맡은 아델 엑사르코풀로스는 전반적으로 영화의 서사와 함께 인상이 변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인데 이별 이후의 감정적 진폭을 드러내는 후반부의 연기는 정말 연기가 아니라 실제라고 믿어질 만큼의 감정적 몰입도를 보여줍니다. 충동적인 계기로 맞닥뜨린 이별에 의한 심적인 고통이 스크린 밖으로도 절절하게 전이되는 기분이죠. 게다가 그 반대편에 선 엠마 역을 맡은 레아 세이두는 거대한 감정적 파고를 형성하는 매개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이별 이후에 남게 되는 애틋함 같은 감정의 끈을 놓지 않음으로써 극적인 페이소스를 극한으로 끌어올립니다. 두 배우의 화학작용 자체가 이 영화의 감정을 입체적인 구조로 이끌어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 영화가 화제가 된 건 대단히 수위가 높은 여성간의 섹스신이 긴 분량으로 등장한다는 점이었죠. 그런데 대단히 적나라해서 한편으론 담담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은밀하고 농염한 연출을 위한 카메라 앵글이 동원되기 보단 사물을 관찰하듯 평범한 프레임 안에서 행위가 목격되는 인상입니다. 오히려 저는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무언가를 먹을 때 보는 이의 욕구를 건드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토마토 파스타를 너무나 맛있게 먹는 장면에선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느낌이기도 했죠. 색욕보다도 식욕이 강렬하게 느껴진다니 좀 묘하지 않습니까? 그건 아마 이 영화가 섹스신을 특별한 영화적 체험처럼 위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동성애라는 소재는 이 영화의 주요한 키워드가 될 뿐,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사안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결말부에서 묘사되는 찰나의 엇갈림을 보면서 ‘운명’이란 단어에 설득 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뒤바꿀 수 없는 결과를 등 뒤에 두고 터벅터벅 걸어가야 하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끄덕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델의 뒷모습을 비추는 엔딩시퀀스의 롱테이크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건 그래서입니다. 그 너머의 삶에 대해서 염려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걸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죠. 그렇게 그 너머를 살아가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요. 사실 저는 원작의 비극적인 결말보다도 영화의 결말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죽음에 대한 연민보다도 이면의 생에 대한 호기심이 지워지지 않는 여운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한편 영화에선 프랑스의 전인적인 교육 환경을 목격할 수 있는데 학생들이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는 가두 시위를 하는 신에서 '민영화를 반대한다!'는 대사가 나올 땐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물론 불법시위라는 목적을 앞세운 과격한 진압 장면 같은 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건 비단 저뿐만이 아닐 것이라고, 문득 생각하게 되네요.
<집으로 가는 길>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다. 마약 운반 혐의로 2년간 프랑스의 교도소에 억류됐다는 한국인 여성에 관한 실화 말이다. 어쨌든 2006년 한 TV 시사프로그램을 통해서 알려진 이 기구한 사연은 여론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이 여론을 통해서 그녀의 귀국에 결정적인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 사건의 보도가 환기한 것은 국가 기관의 어이 없는 작태였다. 국민의 안전을 보호한다던 외교통상부 산하의 주불대사관에서 이국에서 범죄 혐의로 조사를 받는 자국민을 외면해버린 진실은 국내 여론을 뜨겁게 달궜다. 그녀를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만든 것도 그 여론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대단히 비극적인 사연을 담고 있는 영화다. 영화를 보는 동안 절절하고 속이 끓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 감정의 발화점이 되는 건 바로 전도연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전도연은 심장과 같다. 그녀의 연기를 통해서 객석 곳곳으로 피가 돌듯이 오롯한 심정이 전달된다. 특히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카리브해 질주 신에서 전도연의 얼굴은 삼라만상 같다. 공터 같은 표정에서 역설적으로 모든 감정이 느껴진다. ‘연기력’이란 기능적인 단어로 그녀의 연기를 설명하길 꺼려지게 만든다. ‘경지’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그리고 그 대단한 연기로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문장을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한다. 정말 좋은 배우다.
단점이 없는 영화는 아니다. 때때로 신과 신의 이음새에서 성급한 인상이 느껴지기도 하고, 할말이 너무 많아서 넘치는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순간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길>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해내는 영화다. 이야기의 바탕이 된 실화와 가공된 허구를 재단하고 접목해서 영화적인 언어로서 현실적인 공감대를 쥐어준다. 인물의 고난을 전시하며 눈물샘을 자극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고난을 가혹하게 여겨야 할 이유를 추적하고 제시한다. 그리고 현실을 환기시킨다. 어쩌면 당신이 공감하는 건 단순히 영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집으로 가는 길>에 공감한다면 그건 우리가 속한 이 사회에 대한 불안이 반영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권력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사회와 국가가 영화적 비극을 완전하게 보완한다. 이건 희극인가, 비극인가.
가련하게 빛나는 에디트 피아프의 삶을 통해서 마리온 코티아르도 ‘장밋빛 인생’으로 피어났다. 프랑스와 할리우드를 오가며 행보를 거듭해나가는 그녀의 삶은 여전히 활짝 피어 오른다.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나리오 앞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탐나는 역할이었다. 비련의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를 대신해서 무대에 오른다는 건 일종의 영광과도 같았다. 한편으로는 독이 든 성배와도 같은 자리였다. 피아프의 노래처럼 ‘아니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녀는 피아프를 잘 아는 두 사람을 찾아갔다. 조르주 무스타키는 피아프가 부른 ‘Milord’의 작사가이자 연인이었다. 기뉴 리셰는 피아프와 진심을 나눴던 15년 지기 친구였다. 그들은 그녀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용기를 얻었다. 결국 무대에 올랐다.
2008년 LA의 골든글로브 시상식장에서 마리온 코티아르의 표정은 상기돼 있었다. “진실로 이 자리에 올 수 있길 고대했다. 프랑스 여자에게 이는 매우 특별한 일이니까.” <라비앙 로즈>(2007)로 에디트 피아프를 재현한 코티아르는 골든글로브와 오스카 트로피를 차례로 손에 쥐었다. 프랑스 배우가 오스카 후보로 이름을 올린다는 건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영어 대사가 아닌 자국어로 연기한 비영어권 배우가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건 <두 여인>(1960)의 소피아 로렌 이후 코티아르가 처음이었다. 그녀의 수상은 이례적인 성공담인 것이다. 물론 당시에도 코티아르는 프랑스와 할리우드를 오가며 나름의 경력을 쌓고 있었다. 하지만 <라비앙 로즈>는 꽃봉오리처럼 피어 오르던 그녀의 재능이 활짝 만개하는, ‘장밋빛 인생’의 서막이었다.
파리에서 태어난 코티아르는 루아레의 오를레앙에서 성장했다. 그녀의 부모는 배우이자 스승이었다. 코티아르는 말했다. “어떻게 연기하는지 그 방법을 배울 수는 없다. 감정과 느낌을 활용하는 법을 배웠던 거다.” 코티아르의 부모는 그녀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모든 감정들을 찾아내서 이를 연기로 승화시키는 법을 깨닫게 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말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해.”어린 코티아르의 갈망은 대단했다. 부모의 무대를 보고 종종 그 위에 오르며 꿈을 키운 코티아르가 다시 파리에 발을 들인 건 16살 무렵이었다. 배우로서 보다 폭넓은 기회를 얻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성공한 배우들의 빤한 소회처럼, 코티아르 역시 절치부심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에게도 갖은 오디션을 거쳐 제작자들의 선택을 기다리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기회가 온다. 뤽 베송이 제작한 <택시>(1998)를 통해서 그녀의 경력은 서서히 엑셀레이터를 밟기 시작한다. 코티아르는 이후 제작된 세 편의 시리즈에서 꾸준히 드라이브를 이어나갔다. 그 사이, 주연 자리를 꿰차기 시작한 그녀의 이름이 서서히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팀 버튼의 <빅 피쉬>(2003)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뉴욕에서의 삶은 그녀에게 일종의 모험이자 계기였다. 영어 대사와 할리우드의 제작 시스템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과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택시>시리즈의 대단한 흥행은 한편으로 코티아르에게 압박을 가하는 사건이었다. “비상업적인 영화에서 진지한 연기가 가능함을 증명해야 한다.” 코티아르에게 <빅 피쉬>는 일종의 피난처와 같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녀의 할리우드 정착을 위한 밑거름 같은 시간이었다.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뉴욕 맨하탄의 한 아파트에 입주해서 영어를 익히는 한편, 프랑스와 다른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성공을 좋아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그들은 상업적인 영화를 혹평한다. 그들은 그저 약자 편이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성공을 환영한다.” 코티아르의 열정과 야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자질은 이미 그녀에게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한때 코티아르는 엉뚱한 상상력으로 채워진 로맨스물 <러브 미 이프 유 대어>(2003)로 <아멜리에>(2001)의 귀여운 여인 오드리 토투와 비교되기도 했다. 하지만 코티아르는 체질적으로 발랄하거나 유쾌한 캐릭터가 될 수 있는 배우가 아니었다. <라비앙 로즈>의 에디트 피아프 이후로 코티아르의 필모그래피가 가련한 여인들로 채워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퍼블릭 에너미>(2009)의 빌리와 <나인>(2009)의 루이자 그리고 <인셉션>(2010)의 맬까지, 이 여인들을 관통하는 건 바로 비극의 대상이라는 점에 있다. 결실을 맺지 못하거나, 배신당하고 버려지거나, 파국적인 종말을 맞이하거나, <라비앙 로즈>로 시작된 이어지는 코티아르의 비련은 <인셉션>까지 이어졌다. <라비앙 로즈>로 주가를 한껏 올린 코티아르가 이런 캐릭터들을 거듭해서 연기한다는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그녀는 항상 희극보다 비극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이유는 분명하다. “비극을 연기할 때, 나는 즐겁다. 그건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매우 거대한 공간이다.”
앞서 나열된 비련의 여인들이 지닌 또 하나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매혹적인 뮤즈로 통한다는 것이다. 뭇 남성들과 사랑을 주고 받았던 에디트 피아프와 1930년대 미국 경제 공황기 시대의 전설적인 은행강도 존 딜린저의 연인이었던 빌리는 물론이고, 이탈리아의 필름 거장 귀도의 아내 루이사와 코마와 유사한 림보를 무릅쓰고 인셉션을 행하는 코브의 아내 맬까지, 코티아르를 통해서 그 매혹을 설명하고 있다. 가련하면서도 강인한 양면성, 코티아르는 우아한 프랑스 배우의 기품과 함께 남미 대륙의 열정적인 매혹이 공존하는 배우다. 가늘게 이어진 턱선이 연약하게 감정을 자극하지만 그 위로 굳게 다문 입이 결연하다. 커다란 눈동자는 갖가지 감정들을 담아내는 호수와 같다.
우디 알렌의 신작 <미드나잇 인 파리>(2011)는 문화적 향취로 그윽한 1920년대 파리로 안내하는 마술 같은 영화다. 이 영화로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간 코티아르는 전작들보다 한결 밝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그녀는 만인의 사랑을 얻는 뮤즈 역할을 소화하고 있다. 현재 그녀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다크나이트>(2008)의 속편에 참여하고 있다. 코티아르는 안다. “나는 동시에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다.” 다작을 할 수 없기에 매 순간의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 그녀는 이 역시 안다. “지금 내게 불가능한 것은 없다.”영원히 시들지 않는 피아프의 노래처럼, 코티아르의 ‘장밋빛 인생’도 영원을 향해 피어 오른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세계적인 해안 관광지 코파카바나, <코파카바나>에서는 그 코파카바나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코파카바나를 사랑하는 한 여인이 등장한다. 중년을 넘긴 나이에도 소녀처럼 해맑은 성격을 지닌 그녀는 좀처럼 감당하기 쉽지 않은 산만함과 무책임함으로 주변인들에게 본의 아닌 민폐를 끼치는 통에 딸 에스메랄다(롤리타 샤마)의 결혼식조차 참석할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자신을 처량하게 만드는 가난을 극복하고,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로부터 멀어져 혼자가 되기 위해 그녀는 새로운 삶을 계획한다. 프랑스 국경을 넘어 벨기에에서 콘도 이용권을 파는 영업직 사원일을 시작하기로 한 것. 엘리자베스, 그러나 스스로 바부(이자벨 위페르)라고 지칭하는 그녀는 그렇게 뒤늦은 독립을 꾀한다.
변변한 직장 하나 없는 가난한 싱글맘인 바부는 어른으로 성장했지만 어른다운 성숙한 일상을 꾸리지 못하는 여인이다. <코파카바나>는 어쩌면 한 여인의 삶을 비추는 성장드라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인물을 고난의 린치로 몰아가며 성장을 강요하거나 그런 변화를 드라마틱하게 포장하지 않는다. 인물의 일상적인 변화를 쫓으며 사건들에 주목하지만 그 사건들은 인물의 심리를 쉽사리 바꾸지 못한다. 바부가 꿈꾸는 여유로운 이상향 코파카바나처럼 이 영화는 쉽게 꺾이는 인물의 의지와 심리적 변화를 삶의 성찰로 연계시키는 여느 성장드라마들과 달리 스스로의 방식으로서 삶을 돌파해나가는 한 여인의 낙관을 지지한다. 물론 이는 무책임한 방관이 아니다.
자신의 방식으로 삶의 돌파구를 찾아나가던 여인이 역시 스스로 선택한 자선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드라마틱한 아이러니를 깨닫게 만든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낙관으로 삶에 올인하는 그녀가 이를 통해 삶을 역전시키는 과정은 다소 극화된 아이러니이지만 되레 통쾌하다. 완전한 기회를 쥔 상태에서도 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꾸릴 줄 모르는 여인의 삶을 지켜본다는 건 아슬아슬한 일이지만 영화는 그녀의 선의를 관객에게 노출시킴으로써, 그리고 그 진심을 성의껏 관찰함으로써 그녀의 삶을 응원하게 만든다. 또한 그녀가 겪어나가는 삶의 아이러니를 매끄러운 서사에 녹여냄으로써 거부감 없는 감상을 이끌어낸다.
무엇보다도 이런 감상을 가능케 만드는 건 바부를 연기하는 이자벨 위페르다. 다소 과장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적절한 여유를 안고 극을 걸어나가는 그녀는 때때로 나이를 잊은 듯 발랄하면서도 오랜 경험에 기반한 관록이 무엇인가를 증명하듯 바부를 연기한다. 냉정과 격정 사이에서 감정적인 기복이 큰 캐릭터를 연기해온 누벨바그 여신 이자르 위페르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만들지만 씩씩하고 낙천적으로 삶 위로 부유하듯 살아가는 여인을 연기해내는 <코파카바나>에서의 그녀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이자벨 위페르의 존재감은 <코파카바나>를 완성하는 이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자벨 위페르의 관록은, <코파카바나>의 낙관은, 정처 없는 삶에 작은 위로를 얹는다. 케세라세라, 어떤 식으로든 삶은 그리 향하기 마련이다. 당신의 꿈이 오롯이 놓여 있는 그곳으로.
배우의 얼굴만큼이나 그 표정을 둘러싼 풍경으로 기억되는 영화들이 있다. 그와 그녀의 사연이 담긴, 방이 있는 영화 속 풍경으로 당신을 안내한다.
맘마미아!
<맘마미아!>는 전설적인 스웨디시 팝그룹 아바의 명곡들로부터 모티프를 삼아 기획된 뮤지컬이다. 1999년 런던 초연 이후로 브로드웨이 진출을 거쳐 현재까지 160여 개국에서 공연된 롱런 뮤지컬로 거듭났다. 그림 같은 지중해 가운데서도 백미에 가까운 그리스 해변가를 배경으로 주옥 같은 넘버들이 하나의 러브스토리를 치장하는 이 작품이 동명의 뮤지컬 영화로 기획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영화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상의 뮤지컬 무대가 자아내는 환상을 살아있는 풍경으로 전시해내는 일이었다. 제작진은 촬영 한 달 전부터 최상의 무대를 찾고자 그리스 전역을 뒤졌고, 스포라데스 제도의 스키아토스 섬과 스코펠로스 섬, 다무하리 섬이 최고의 병풍이 되리라 확신했다. 그 중에서도 스코펠로스 섬은 <맘마미아!>가 선사하는 진경의 핵심지다. 푸른 지중해를 병풍처럼 두른 스코펠로스 타운은 붉은 지붕을 쓰고 하얀 회벽으로 몸을 감싼 아기자기한 주택들이 능선을 따라 얼굴을 내밀고 앉아 있는 고지대 마을이다. 온화한 아치형 창문으로 시원한 바닷바람과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하는 이 주택들은 춤과 노래의 향연을 위한 천혜의 무대였다. 아기자기한 장식들이 눈에 띄는 복식 구조의 주택은 경쾌한 가무에 입체적인 동선을 치장한다. 집 안팎 곳곳에 자리하며 일상을 영위하던 인물들은 계단을 오르고 내리거나 창문을 여닫고 때때로 뛰어내리며 스크린을 역동적인 뮤지컬 무대로 탈바꿈시킨다. 그림 같은 카스타니 해변을 비롯해서 소피(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세 아버지들과 처음 마주하는 아그논다스, 그리고 소피의 결혼식을 위해 긴 계단을 오르던 도나(메릴 스트립)가 옛 연인의 고백을 애절하게 뿌리치는 아기오스 요다니스 성당,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을 조망하는 영화 속 그 집에 머무를 수 있다면 스스로 인생의 승자가 됐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만 같다. 영화 속 그 노래, “The winner Takes it all”처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자전적인 여행 에세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한 여인이 행복을 찾아 나서는 3막 3장 여행기다. 영화는 그 일탈의 경험이 기록된 활자를 영상으로 치환하며 일탈의 충동을 보다 입체적으로 부추긴다. 뉴욕에서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꾸려나가던 리즈(줄리아 로버츠)는 그 편안한 삶이 자신을 서서히 풍화시키고 있다는 위기를 느끼기 시작한다. 결국 그녀는 결혼을 비롯해서 손에 쥐고 모든 것들을 과감히 놓은 채 1년 간의 순례를 결심한다. 풍요로운 진미가 넘치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먹고, 명상으로 마음을 정화시키는 인도의 아쉬람에서 기도한 뒤, 소박한 일상을 영위하며 새로운 운명을 발견해내는 발리에서 사랑하는, 한 여인의 이 모든 여정은 영혼의 허기를 채우고자 떠나는 순례나 다름없다. 그 모든 여정의 종착지 발리는 새로운 삶을 위한 약속의 땅이다. 현대적인 물질 문명의 침입이 상대적으로 덜한 발리의 자연적인 경관으로 둘러싸인 리즈의 집은 안온한 인상을 부른다. 목재로 건축된 친자연적인 이 주택 곳곳에 놓인 창과 문은 자연을 향해 마음껏 열려있으며 이는 곧 자신을 놓고, 새롭게 가다듬던 리즈의 여정이 비로소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차례에 놓여 있음을 대변한다.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한, ‘더 큰 균형’을 찾아간 그녀는 비로소 발리에서 새로운 연인을 만나게 되며 그 앞에서 다시 한번 고민하고 갈등하지만 두려움 속에 머물던 지난 날을 떠올리며 새로운 사랑 앞에서 뒤돌아서지 않길 다짐한다.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사치스럽게 보이는 고민이겠지만 쳇바퀴 도는 삶 속에서 지쳐가는 현대인 누구나 한번 즈음은 꿈꿔봤을 진짜 일탈이 담긴 이 영화는 대리만족으로서가 아닌, 당신에게 진짜 일탈을 촉구하는 일종의 안내서다.
언 애듀케이션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 닉 혼비는 저널리스트 출신의 저술가 린 바버가 한 잡지에 기고한 짧은 회고록 에세이에 사로잡혔다. 이를 바탕으로 한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한 그는 끝내 영화 제작까지 관여했다. 바로 그 영화가 <언 애듀케이션>이다. 17세 소녀 제니(캐리 멀리건)는 옥스포드 진학을 기대할 정도로 뛰어난 학업성적을 자랑한다. 하지만 스스로는 보수적인 부모와 엄격한 학교에 갇히듯 살고 있다 여기며 작은 일탈로 숨통을 열어두길 원한다. 딱딱한 라틴어 공부보다는 첼로 연주와 샹송을 즐기고 프랑스 파리에서의 삶을 염원한다. 기회가 찾아온다.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중년남자 데이빗(피터 사스가드)과 만남을 거듭하던 제니는 그로부터 제공 받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학교와 집을 오가던 일상에 대한 필요성을 잊기 시작한다. <언 애듀케이션>은 전통적인 영국드라마의 서정적인 분위기와 함께 전쟁 직후인 1960년대 영국의 일상적인 풍경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샹송과 재즈, 올드팝을 즐기던, 테일러드 복장의 말쑥한 청년들과 심플한 스타일과 짙은 눈화장의 첼시룩 여성들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의 풍경이 재현된다. 빈티지한 데코와 장식들로 가득한 실내 인테리어들도 눈에 띈다. 오늘날 오랜 멋과 정취를 지닌 스타일로 인식되는 빈티지풍의 실내 정경은 단아하고 소박한 1960년대 영국의 현실을 대변한다. 고리타분한 가치관 속에 갇혀있다 믿는 제니에게 그 모든 것은 벗어나야 할 낡은 풍경에 불과하다. 하지만 결국 잘못된 선택으로 삶이 뒤틀린 이후, 제니에게 그 풍경은 곧 새로운 기회를 되찾기 위한 안식처가 된다. <언 애듀케이션>은 안온한 일상 속에서 새로운 자극을 꿈꾸던 소녀가 백일몽과 같이 짧고 강렬한 경험을 거친 뒤 얻게 되는 큰 깨달음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제목에서 명시하는 ‘교육’이란 바로 그 시행착오조차 품어줄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주는 배려이자 덕목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가르치고 있다.
아멜리에
소녀는 어려서부터 특이했다. 아니, 어쩌면 특별했다. 아버지의 손길에 심장박동이 빨라진 탓에 심장병 진단을 얻었고, 소녀는 쉽게 외출을 허락 받지 못한 탓에 자신의 외로움을 함께 견뎌줄 친구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그 덕분인지 아멜리(오드리 토투)금붕어의 자살마저 눈치챌 정도로 누군가의 마음을 읽는, 남다른 재주를 얻게 됐다. 그런 어느 날, 화장실에서 우연히 발견한 누군가의 오래된 소지품을 발견한 그녀는 주인을 찾아나선 뒤 결국 그 물건들을 되돌려주는데 성공하며 대단한 보람을 얻게 된다. 누군가의 행복이 자신을 기쁘게 한다는 것을 체감한 그녀는 주변의 모든 이들이 행복한 감정을 얻을 수 있기를 갈망하며 그들이 모르는 선물을 준비한다. 프랑스가 배출한 귀여운 여인 아멜리는 사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여인이다. 어려서부터 혼자에 익숙한 그녀는 그 외로움을 달래고자 타인의 행복을 위한 대리만족의 일상으로 도피해나간다. 강렬한 레드톤으로 채워진 아멜리의 방은 그녀의 욕구불만을 간접적으로 발산시키고 이를 대리 충족시키는 공간인 셈이다. 화려하고 강렬한 컬러가 방 안에 가득하지만 소박하고 귀여운 도구들로 채워진 그 방의 정경은 아멜리의 마음을 대변한다. 타인으로부터 괴리된 자신만의 공간 속에 숨겨둔 욕망의 도피처이자 사랑 받고 싶은, 혹은 사랑하고 싶은 여자로서의 심리를 유일하게 보관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인 것. 결국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그 사랑에 다가서길 망설이는 아멜리의 불안은 그 상대를 방 안에 들이는 순간 눈 녹듯 사라진다. 남에게 결코 보여주지 않았던 강렬한 염원 속에 그토록 바라던 사랑이 찾아온다. 이 사랑스러운 로맨틱 코미디는 마음의 열쇠를 여는 남녀의 만남에 관한, 판타지 같은 러브스토리다.
프랑스 상류층들의 휴양지로 잘 알려진 도빌은 ‘꽃으로 수놓은 해변’이라 불리는 해안 도시다. 그리고 매년 3월, 이 아름다운 도시는 아시아 영화를 위한 축제의 장으로 변모한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아시아 영화만을 상영하는 도빌 아시아영화제는 올해로 13회를 맞이한다. 이스라엘 출신 감독 아모스 지타이가 심사위원장을 맡은 가운데, 프랑스가 사랑하는 한국 감독 홍상수의 회고전도 마련됐다. 3월 9일부터 13일까지, 도빌의 그림 같은 해변에서 오리엔탈 드림이 상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