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비롯해 아시아에서도 최초다.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은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이는 한강 홀로 쌓은 탑이 아니다. 그렇다고
한국이 거들었다는 말은 아니다.
지난 5월 17일 <채식주의자>의 작가 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단언컨대 한반도에서 맨부커상의 존재 자체를 아는 한국인은 출판 관계자를 제외한다면 굉장히
드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의 맨부커상이 전국적인 화제가 된 건 이 상이 정말 대단한 상이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언론의 헌신적인 보도 덕분이었다. 그 어느 나라보다도 노벨상을 염원하는 한국인들에게
맨부커상이 노벨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에 꼽히는 것이라고 주지되는 순간 한강은 이미 메시아 같은
존재가 됐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문장이니라. 그런데
말입니다. 한강은 어떻게 맨부커상을 수상했을까?
한강이 수상한 맨부커상은 본래 영국의 연방국가에서 출판된 영어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상이었다. 한강이 수상한 부문은 2005년에 신설된 인터내셔널 부문인데 영국의
비연방국가에서 출판된 소설을 영어로 번역한 소설을 후보작으로 선정하고 수상작을 가린다. 그러니까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변역한 <The Vegetarian>이 맨부커상을 수상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의미다. 그리고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은 원작자와 번역자가 모두 수상자로 호명된다.
소설을 번역한다는 것을 그저 언어의 형태를 바꾸는 수준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언어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 결과물로서 원작을 집필하는
것과 동등한 위치에 두고 평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국의 정서를 자국의 언어로 이해시키는 작업이란
점에서 번역된 소설은 제2의 창작에 가깝다. 맨부커상은 그
가치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더욱 값지다.
사실 맨부커상을 수상하거나 말거나, 한강은 이미 뛰어난 작가였다. 그래서 한강에게 몰리는 찬사란 새삼스럽지만 이처럼 훌륭한 작가를 제대로 조명할 기회가 왔다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걸리는 건 열광의 기저에 놓인 어떤 심리들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2007년 10월 30일에 발표된 소설이다. 출간 당시엔 그 주의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 20위권에도 들지 못했다. 출판사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맨부커상 수상 직전까지 8년 7개월 동안 대략 6만권의 책이 팔렸다고 한다. 3월에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타전된 이후 4만부
이상이 판매됐으니 실질적으로 맨부커상과는 무관한 판매량은 2만권 정도인 셈이다. 해외에서 상을 타기 전후의 상황이 극명하게 갈린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의 하루 독서시간은 6분에 불과하다. 정말 이상한
일 아닌가. 이처럼 소설을 읽지 않는 나라에서 매년마다 한국인 작가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를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물론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이 한국 문학계에 새로운 활기가 될 수 있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최근 신작소설 <종의 기원>을
발표한 작가 정유정을 인터뷰로 만났을 때 그녀는 이와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문학으론 변방국가나
다름 없는데 한강 작가가 기회를 열어준 셈이니 박수를 쳐주고 싶다. 아마 작가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거다." 그러니까 <채식주의자>의 맨부커상 수상이 해외에 번역돼 있는 한국소설을 주목하게 만들거나 한국소설을 번역하고자 하는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강 작가 덕분에 독자들이 소설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는 정유정의 말 역시 유효하다. 최근 서점가에선 전년 대비
소설의 판매량이 급증했다. 소설에 대한 관심이 소설을 읽는 행위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얼마나 긴 지구력을 안고 달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누군가가
어느 대단한 상을 수상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한국이 국제적으로 문학계의
변방국가로 분류된다는 것보다도 한국 안에서 문학 자체가 변방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일 것이다.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을 누고 한 신문에선 '맨부커상이 K픽션의 문을 열었다'는 헤드라인을 내걸었다. 언제부턴가 한국사회에선 모든 분야의 앞머리에 K라는 성씨를 붙이면
해외진출이 가능하다는 미신이 생긴 것 같다. 혹은 이뤄졌다는 착시를 느끼는 것 같다. 어느 개인의 노력으로 차린 밥상에 숟가락만 얻겠다는 심리가 읽힌다. 사실
K픽션은 한국에서도, 영국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생소한 말이다. 데보라 스미스는 '소주'나 '만화'를 '코리안 보드카'나 '코리안 망가'로 표현하자는
편집자의 제안을 거절하며 이렇게 설득했다고 한다. "한 국가의 문화를 다른 국가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싶지 않다." 이 대목에서 ‘K픽션’은 소주를 코리안 보드카라고 명명하는 행위와 유사하게 보이지 않는가? 실체가
없는 K픽션은 과연 한국문학을 대변하는 언어가 될 수 있을까? 영국소설을 E픽션이라고 부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럴 리가.
어쨌든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은 대단한 성취다. 게다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최초의 수상자라는 점에서도 이는 분명 대단한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맨부커상 수상이 <채식주의자>뿐만 아니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삼은 한강의 또 다른 수작 소설 <소년이 온다>를 더불어 주목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하다. 한강이
맨부커상을 수상한 날은 5월 17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수상소감을 이렇게 시작했다. "깊이 잠든
한국에 감사 드린다." 그리고 다음날 잠에서 깬 한국에서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 소식을 전하는
어느 뉴스의 헤드라인은 이랬다. "한국 문학의 쾌거."
그렇게 한국은 한강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얻게 됐다. 진정한 한강의 기적이다.
<소년이 온다>를
이제야 읽었다.읽어
내려가며 속도가 붙으니 멈출 수가 없었다.마음 속에
서리가 앉았다가 천불이 나서 죄다 증발했다가 이를 몇 차례 반복하고 나서 책장의 끝에 다다르니 재 같은 감상이 마음 아래 수북이 쌓였다.마음
한 구석에서 시리게 얼어붙었던 결정이 끝내 뜨겁게 타버린 재의 형상으로 남아서 흩날려버릴 것 같아 무엇이라도 써서 기록하고 싶었다.
5월18일은 문득 잊고 살다가도 그 날이 오면 되새길 수 밖에 없는 그런 날이었다.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 부모님을 따라 내려간
광주에서 초,중,고를
졸업했다.초등학교3학년 시절에
처음 들었던 전라도 사투리는 지금도 선명하다. “아따,너 말 이상하게 한다잉.”나는
표준어를 쓰는 이방인이었다.어쨌든
그 친구들은 나와 함께 자랐고, 나 역시 조금씩 사투리가 점차 자연스러워졌을 무렵이 된 중학교1학년 시절, 5.18을 보게 됐다.유치원,여중,남중, 여고,남고,전문대까지,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꽤나 커다란 학원에 속해 있었고 우리는 종종350원짜리 육개장 컵라면과150원짜리 자판기 음료수를 사먹기 위해서 대학교 매점을 드나들었다.그날도 어느 날과 같이 대학교 매점에 들어섰다.그리고
벽을 봤다.그날은5월18일이었다.
어쩌면 얼굴이었으리라.그러니까 그건 얼굴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는 폭력의
흔적들이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벽을 메우고 있었다.하나하나가 검지를 엄지손가락에 대고 둥글게 말았을 때만큼의
크기의 사진들이었는데 내 키만큼 높고,열
걸음쯤 옮겼을 때 끝에 닿을 만큼 넓게 상하좌우로 쭉 나열돼 있었다.일그러지고 뭉개진 형상들마다 한때 누군가의 체온이 돌고
감정을 담았을 얼굴의 잔상이 미세하게 남아있었다.그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살벌한 예감에 뒷골이 서늘해진다는
말을 체감했다. “아,글쎄.사람을 탱크로 밀어버렸당께!”이미
귓바퀴를 돌아 들어와 흩어졌던 어느 노인의 언성이 메아리처럼 가슴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나는 그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들이 좀처럼 흩어지지
못하는 연기처럼 매캐하다고 느꼈다.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그
원망에는 굴뚝이 없었다.그래서
아마 노인의 삶도 매웠을 것이다.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에게도 아궁이가 생겼다. 5월18일에
대해 뚜렷하게 자각하기 시작했다.직접적으로
겪어보지 못한 내게도 그것은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의문이 됐다.대체 왜 그랬을까?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어린 시절 매년5월 즈음이 되면 광주 곳곳에선 최루탄이 터졌다.충장로나 금남로 시내에서 터진 최루탄 냄새가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두암동의 우리 아파트 창문까지 와 닿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 주변을 지나기라도 한다면
목을 켁켁거리기 일수였지만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연례행사 같은 것이라서 되레 그런 기억이 과거형으로 저물어 아득해졌음을 문득 체감했을 땐 그렇게
됐음이 되레 생소하기도 하였다.어쨌든20대가
되어 광주를 떠나 서울로 다시 올라왔을 무렵에5.18에 관한 사회적 인식은 조금 변한 것도 같았지만 여전히 노인은 굴뚝을 찾지 못했을 것 같았다.때때로'폭도'란 식의 무지한 언변을 뱉어내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건 그들을 탓해봤자 무력해지는 일이었다.무엇보다도
놀라운 건 내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 이야기가 서울에선 손쉽게 생소해진다는 사실이었다.어느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끔찍한 역사를 안고 사는
사람들의 영토가 있다는 것,억울했다.화가
났다.슬펐다.달랠
길이 없었다.굴뚝이
없는 아궁이처럼 타 들어가는 속을 안고 그 시절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는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었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 내가 마주했던 중학교1학년 시절의 그 벽을 떠올렸다.누군가에겐 이 소설이 그 벽과 같은 체험이리라.물론
누군가에게 이 소설은 그저 끔찍하고 과장된 비극적 허구이리라.하지만 권력의 첨탑 아래 짓뭉개진 얼굴의 반석 위에서
우린 서있고,살아있다.살고
있다.살아서
살고 있다.소설을
읽으며 나는 나의 무력감과 비루함을 연신 체감하고 되삼켰다.만약 내가 그 시절에 태어나 광주에 있었다면 과연 나는
총을 매고 누군가를 대신해 내 목숨을 바쳐 순수한 양심을 헌화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기꺼이 행동할 수 있었을까.나의 양심은 과연 광주에 있었던 그 도청에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시대적 불의에 저항했다고 평가되는 누군가일 수 있었을까.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대답할
수 없어서 고통스러웠다.여전히
끔찍한 역사는 제 자리를 맴돌고 있고,뭉개진
얼굴들은 위로를 얻지 못한 채 그 벽 위에 서있다.나는 여전히 그 벽 앞에 서있다. 5월18일은 올해에도 올 것이다.그리고 또 지나갈 것이다.아마도
나는 그 벽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을 것이다.그저 미안하고 불안하기만 한 양심으로 그 벽 앞을 맴돌다
다시 한번 뒤돌아 서서 모른 체1년을 보낼 것이다.벌써부터 무력해진 마음이 타 들어간다.연기가
자욱하다.
<소년이 온다>는
좋은 책이다.이
책을 보고 목격해주길 바란다.그
벽 앞에 서주길 바란다.보다
많은 사람에게5월18일이 통감할 수 역사가 되길 바란다.사람이
죽었다.그날
사람을 죽였고,사람이
죽었다.그것을
함께 슬퍼하고 분노했으면 좋겠다.왜
그랬을까?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그
벽 앞에서, 함께 묻고,함께 화를 내줄,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어찌해도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어찌할 수 없는 물음을 던지며 살아가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산 자의 삶은 더욱 살아갈 만한
것이 될 것이다.
남자의 눈은 충혈됐다. 그는 지금 자신이 갚아야 할 대출금을 전화로 확인하는 중이다. 발 밑으로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지금 자살을 계획 중이다. 전화를 끊은 남자는 뛰어내린다. 행동은 명확하다. 빠르게 달리는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사이, 남자도 사라진다. 넓은 수면 위로 점 같은 파문이 인다. <김씨표류기>는 한 남자를 옥죈 절망적 피로감에서 시작되는 영화다. 그 남자가 예감한 생의 마지막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남자의 이야기는 사후세계가 아닌 현실에서 계속된다. 남자의 자살은 실패했다. <김씨표류기>는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한강 한복판에서 표류를 결심하는 남자 김씨(정재영)와 그를 지켜보게 된 여자 김씨(정려원)에 관한 이야기다. 제목 그대로 ‘김씨표류기’다.
사실 한강의 무인도에 표류한 남자라는 설정은 사실 어딘가 무색한 지점이 있다. 수많은 인구가 밀집한 서울의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한강의 밤섬에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아무리 무인도라지만 버젓이 섬 위를 활보하고 불까지 피우는 그 생활이 어느 누구에게 방해 받지 않은 채 몇 개월 간 유지될 수 있다는 설정엔 모종의 설득력이 필요해 보인다. 단지 그 상황의 리얼리티보다도 그 상황 자체를 합당하게 인식할만한 설득력이 필요하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강에서 표류 중인 남자라는 아이디어의 참신함을 활용하기 전에 그 참신함을 온전히 소비할 수 있게 만드는 합리적 설득이 선행돼야 한다.
<김씨표류기>는 심플한 아이디어를 상징적 컴플렉스로 치환한다. 도시 한복판에 고립된 남자, 김씨는 이미 사회로부터 유기된 삶을 살고 있었다. 정지된 카드로 채워진 지갑, 대출상환을 독촉하는 전화, 일방적인 해고 통보와 희박한 취업가능성, 무능력을 이유로 이별을 고하는 애인까지, 김씨의 삶 자체가 죽음을 결심할만한 계기로 작동한다. 하지만 밤섬에 떠밀려와 죽음에 실패한 김씨는 말한다. “죽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습니다.”아이러니하지만 그는 자신을 몰락시킨 도시의 한가운데로 도피해 혼자만의 자급자족적 삶을 꾸려나간다. 하이레벨의 개그나 다름없던 아이디어에 현실적 생기가 돈다. 게다가 그 남자의 고립을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는 설정에서 사회적 무관심과 도시의 무심함이 읽힌다. 남자가 섬에서 나갈 수 없는 상황보다도 남자가 섬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계기와 그 남자의 삶을 인식하지 못하는 도시의 정서가 부각된다. 이는 아이디어에 설득력을 마련하는 날개나 다름없다.
남자 김씨의 밤섬 표류기가 자리를 잡을 때 즈음, 여자 김씨(정려원)가 등장한다. 여자 김씨는 흔히 말하는 히끼꼬모리에 가깝다. 쓰레기 더미로 가득한 방과 폐쇄적인 일상은 그녀를 규정하기 쉽게 만든다. ‘몇 번의 클릭으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웹 안에서 ‘회원가입’을 통해 ‘얼마든지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아바타처럼 살아가는 그녀는 ‘하루를 열심히 산 것 같은 착각’을 위해 만보기 운동에 열중하기도 하며 세상과 자신을 단절해주는 방안에서 규칙적으로 부팅되고 로딩되듯 일상을 반복한다. 그녀가 유일하게 창문을 여는 건 일년 중 단 두 번, 세상이 멈추는 ‘민방위 훈련’이다. 그때마다 그녀는 DSLR 망원렌즈를 통해 세상을 관찰한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우연히 남자 김씨를 발견하고 그의 표류기를 꾸준히 관찰해나가다 결국 그 삶에 접촉을 시도하는 유일한 대상이 된다.
영화의 중추는 단연 아이디어에 있다. 아이디어의 기반은 고립과 진화다. 도시 한복판에서 원시적 자급자족의 삶을 연명하기 시작하는 김씨는 수렵과 채취, 사냥을 거듭하다 종래엔 농경의 단계로 삶을 발전시켜 나간다. 밤섬은 마치 인류의 진화를 대변하는 소우주와 같다. 물론 이 과정의 묘사에서 두드러지는 건 진지함보다도 대사와 행위를 통한 유머다. “어류보단 조류가 맛있다”며 “진화는 어쩌면 맛있어지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엉뚱한 해석을 펼쳐내는 대사와 나레이션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좌하는 효과적 유머가 된다. 밤섬을 무대로 상대배우 없이 혼자 극을 끌어가는 정재영의 연기도 탁월하다. 마치 일인극 무대를 이끌어가듯 독백에 가까운 대사를 홀로 주고 받는 정재영의 연기는 설정의 한계를 연장하는 원동력이 된다. 물론 실험적 상상력에 보편적인 설득력을 입히는 건 세심한 스토리와 리드미컬한 연출력이다.
가장 강력한 장기는 소품활용능력이다. 작고 큰 소품들이 더러 등장하는 <김씨표류기>는 귀여운 이미지를 통한 간결한 방식으로 의미로 전달한다. 특히 영화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자장면은 <김씨표류기>를 위한 핵심적 소품이나 다름없다. 우연히 발견한 ‘짜파게티’수프를 통해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 김씨는 ‘사람을 똑똑하게 만드는’욕망을 통해 삶을 진화시켜나간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배달된 자장면을 거부하고 자신이 ‘진짜루’만들어낸 자장면을 먹게 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이를 지켜보는 재미와 더불어 진솔한 감동을 일궈나간다. 자장면을 거부한 김씨가 ‘자장면이 희망’이라는 결의를 전할 때, 소유가 아닌 성취를 목표로 하는 인간의 결의라는 숭고함이 함께 전해진다. 소유를 위한 소비에 길들여지다 빚더미에 오르는 도시에서 몰락한 김씨가 소박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만드는 자장면은 소품의 기능성을 넘어 의미를 얻는다. 일상적인 소품들이 이색적으로 활용되는 형태만으로도 흥미를 부르지만 효과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매개로 활용된다는 점에서 특별한 생명력이 더해진다. 다양한 소품들은 의미를 발생시키고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두 개의 공간, 밤섬과 방은 고립과 폐쇄라는 심리를 통해 도시의 각박한 정서 그 자체를 대변한다. 전자가 작은 아이디어를 통해 발전된 무대라면 후자는 그 아이디어를 보충하기 위한 인위적 수단처럼 보인다. 남자 김씨의 밤섬과 여자 김씨의 방은 대비적이지만 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건 아니다. 밤섬이 하나의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잡은 것과 달리 방은 인테리어처럼 배치된 느낌을 준다. 전자에 비해 후자의 설득력은 다소 연약해 보인다. 그만큼 두 공간의 정서를 연결하는 캐릭터의 설득적 가능성 역시 차이를 드러낸다. 하지만 두 공간은 고립을 결심한 이의 터전이 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 의미를 발생시킨다. 처지가 다르지만 정서적으로 연관된 두 사람의 로맨스가 성립되는 과정에 심리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단지 후자보단 전자의 공간에 흥미를 유발할 여건이 많다. 후자는 로맨스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인위적 배치의 기능성이 강한 덕분이다.
<김씨표류기>는 결국 남자의 기구한 표류기로부터 기이한 방식의 멜로에 선착하는 영화다. 거짓의 자아를 내세운 웹페이지를 헤매며 지저분한 방에 자신을 가둔 히끼꼬모리 여자는 우연히 관찰한 ‘수줍음이 많으며, 더러운 걸 좋아하고, 모험을 즐기는 변태’에게 짧은 영어로 교신을 시도하며 고립의 보호벽을 차츰 무너뜨려나간다. 마찬가지로 섬에서의 고립을 받아들이고 지저분한 표류에 적응한 남자는 자신에게 접속을 시도하는 여자의 정체를 의식하며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김씨표류기>는 도시의 물질주의 정서 속에서 고립된 남자와 개인주의 정서 속으로 침전한 여자의 연대를 통해 희망을 역설한다. 그 희망은 극복의 대단원적 메시지가 아닌 단순한 마주침으로 얻어진다. 어떤 희망적 결과를 말하는 건 시기상조지만 그 만남은 어떤 희망을 꿈꾸게 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하다 때때로 뭉클해지고 결정적으로 벅차 오른다. 더럽게 웃기다가도 더럽게 슬퍼진다. 기교와 재치로 일궈낸 이야기는 소박한 감동을 수확한다. 그리고 이해준 감독 역시 <김씨표류기>를 통해 성공적인 독립이란 선명한 의미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