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자. 만약 당신이 스마트폰으로 ‘스머프 빌리지’를 다운로드 받은 뒤, 이를 운영하는 플레이어라고. 그런 어느 날, 당신 앞에 스머프 몇 명(?)이 나타나 갑작스럽게 당신의 삶에 침입한다면? (오래 전 TV로 보았던 그 스머프들 말고) <개구쟁이 스머프>의 발상은 그렇다. 뉴욕의 타임스퀘어를 활보하는 스머프들을 생각해보자. 쿨한가. 예고편만 보더라도 알겠지만, 영화 <개구쟁이 스머프> 속의 스머프들은 과거에 그들을 보고 자랐던 혹은 다 자란 뒤에 봤던 간에, 그 셀 애니메이션 속에서 살아 움직이던 그들이 아니다. 3D CG 애니메이션으로 변환됐을 뿐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달라져 버린 양감이 낯설다. 좋다. 변한 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런 변화의 필요성이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단점들을 나열하는 건 어쩌면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스토리의 조악함을 설명하기 전에 언급돼야 할 것은 이 영화의 탄생배경에 있을 것이다. 실제와 분리된 자신들의 세계에서 살아가던 스머프들을 굳이 뉴욕으로 끌어낸 건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이 스머프라는 캐릭터의 상품성을 높게 산 덕분일 것이다. 스머프를 뉴욕으로 끌어내자는 아이디어의 유무보다도 중요했던 건 결국 그 계획의 실행을 위한 제작자들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아이디어를 완수하기 위한 시나리오가 계발되고 그 결과가 지금의 결과로 이어졌다. 스머프 탄생 53주년 기념은 이를 위한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할만한 사항이었을 것이다.
앞서 나열한 것처럼, 영화 <개구쟁이 스머프>는 현재 이 작품의 상태로 보건대, 이런 방식의 제작 과정을 짐작하지 아니할 수 없는 작품이다. 단지 이 캐릭터들의 시장성만을 염두에 둔 스토리 개발 과정이 얼마나 대단한 난관이었을지, 시나리오 작가들의 노고가 눈에 선하다. 기본적으로 단순한 스토리지만 순진하다기 보단 유치하고, 선하다기 보단 둔감해 보인다. 보다 중요한 건 이 작품이 <개구쟁이 스머프>란 것이다. 스머프들이 등장한다. 그들을 보고 자란 관객들에게 이 영화 속의 스머프들이란 낯설고 어색한 존재에 가까울 것이다. 매력이 부재하다. 내가 알던 그 파란 피부와도 다를 뿐더라, 내가 알던 그 이름의 캐릭터 같지도 않다. 벨벳 재질의 스머프 탈을 쓰고 그들의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생물을 보는 것만 같다. 심지어 그들이 뉴욕의, 사실은 현대문명의 이기에 심취해서 쇼를 벌일 때, 안쓰럽다 못해서 혐오스럽다는 인상마저 든다.
적어도 양감을 얻은 CG 스머프들의 오리지널인 셀 애니메이션을 체험한 바 없는 요즘의 어린 관객들에게 이런 단점은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이 영화가 어떤 수준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가조차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고로 이 리뷰도 그들을 대상으로 쓰여지지 않았다. 영화 <개구쟁이 스머프> 속의 스머프는 이미 그들을 알고 있던 당신의 기억 속의 그 스머프들이 아니다. 차라리 실사로 연기한 가가멜과 CG로 만들어낸 아즈라이가 되레 그 만화와 실사의 엄격한 간극 아래서 아이러니하게 보다 현실적으로 보인다. 결국 이 스머프들이 대체 왜 뉴욕을 활보하고 있는 것인지 당최 모르겠다고생이 많다. 쿨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알던 그들이 아닌 것을, 그렇다고 매력적이지도 않은 것을, 어쩌겠나. 스크린 너머 스머프들이 정말 ‘스머프’하지 않은 것을. 코스프레 하느라 고생이 많아 보이는 것을.
밤이 되면 박물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살아있다. 뼈대만 남은 공룡이건, 모형 사람이건, 크기나 재질에 관계없이 살아나거나 작동된다. 신묘한 힘을 지닌 이집트 아크라 석판의 힘 덕분이건 뭐건 간에 그렇다. 따지고 들수록 스스로에게 연민을 품어야 할 정도로 엉터리 같은 법칙이지만 그 세계가 만들어내는 소동극의 이미지는 분명 오락을 발생시킨다. 연대가 다르고, 종이 다르고, 생사가 다름에도 다들 그냥 어울려서 일으키는 소란이 장관이다. 엉터리처럼 구겨 넣은 레시피가 맛깔스런 잡탕으로 거듭난 형국이다.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엉터리 같은 재료들을 긁어 모아 우려낸 국물이었지만 마시기 편하고 입맛에 너그러운 묘미가 있었다. 그야말로 킬링타임용 엔터테인먼트였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는 온전히 전작의 성공에 편승한 기획이다. 컨셉은 같다. 밤만 되면 오만 잡것들이 살아나는 박물관의 야간 소동극을 재현하는 것. 하지만 그건 딱히 장기적인 유효기간을 지닌 것이 아니다.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란 간단하다. 내려갈 깊이 따윈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드니 너비를 넓힐 것. <박물관이 살아있다 2>를 다른 제목으로 대체한다면 ‘박물관이 넓어졌다’즈음 된다. 넓어진 만큼 채워 넣을 것도 많아졌다. 그만큼 더욱 두서가 없어지고 난장판의 범위는 제어가 되지 않는 지경에 다다랐다. 엉터리 같은 기획상품이 다시 한번 더 많은 엉터리를 끌어 모아서 대박을 노린다.
박물관이라는 장소의 특성을 아이디어로 승화시킨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어드벤처와 판타지의 장점을 두루 갖춘 효과적인 영화가 됐다. 박물관이라는 실내 공간은 적절하게 상황을 통제할만한 너비의 한계를 지님으로서 미니멀한 장르적 수용을 가능케 한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는 너비를 넓힌 속편이다. 넓어진 박물관은 플러스같지만 되레 마이너스다. 자신의 부실한 단점을 가리기 좋은 규모를 간과하고 오히려 곳곳에 한계를 명확하게 전시한다. 연대나 지표 따위와 무관하게 소통하는 캐릭터들은 더 이상 귀엽다기 보단 유치하다. 전작의 매력이 어디서 발생했는가를 심각하게 놓치고 있다. 최소한 전작은 그 열악함을 눈감아 줄 정도의 아량을 발생시킬 정도로 적당한 매력을 구사할 만한 아담한 규모 속에서 소동극을 연출했다. 하지만 속편은 자신의 밑천을 깡그리 부수고 새집을 짓더니 자신의 어리석음을 곳곳에 전시한다.
열악한 스토리를 대체하는 캐릭터의 매력도 전혀 계승하지 못한다. 전작에서 매력을 발생시키던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별 쓸모가 없다. 개체 수를 늘린 새로운 캐릭터들 역시 별반 흥미를 끌지 못한다. 래리(벤 스틸러)의 변화를 설명할만한 단서 따위를 기대할 요량도 없지만 그의 성찰을 도모하는 진지함 자체가 지독하게 작위적이라 감동 대신 조소가 발생한다. 그나마 에이미 아담스의 귀여운 매력이 유일한 숨통이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는 전형적인 속편의 한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소한 볼거리와 위트를 구사하는 킬링타임 무비로서 미덕이 유일한 장기였던 전작의 성과가 계산된 결과가 아닌 우연한 취득에 불과했음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플러스 된 모든 것이 하나 같이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역시 머리가 커졌다고 똑똑해지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