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벽적인 화이트 칼라가 지배하는 정돈된 식탁과 책상 위로 시선이 미끄러져 나간다. 그리고 그 공간만큼이나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남자가 시야로 들어온다. 그의 눈빛은 때때로 공허하다. 그 남자의 시선에 놓인 초점이 종종 현재가 아닌 과거로 맞춰진 탓이다. 유년시절의 한 페이지가 투명한 창 너머의 광경 기억 너머에서부터 소환된다. 그리고 그 기억은 15세 시절의 열병과 함께 찾아온 기이한 러브스토리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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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살의를 느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이렇게 마음을 추스르기엔 지독하게 끔찍한 현실이다. 비처럼 떨어지는 백린탄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들은 전생에 무슨 죄라도 졌나. 참혹하다. 820명과 10. 팔레스타인 사상자 820명을 이루는 건 대부분 민간인이다. 이스라엘 군 10명이 죽었다는데 개중 7명은 자신들의 실수로 인한 사망이라 한다. 이게 전쟁인가. 이건 학살이다. 홀로코스트다. 유태인 민족을 말살하자 했던 히틀러의 야심이 진정 현안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분노가 차오른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 배웠나.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가 말했다. 그들은 예수의 아들 딸이 아니다. 사탄이다. 악마가 그곳에 있다.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그 행위 속에 악이 있다. 증오와 분노와 살의가 넘친다. 인간을 과녁으로 삼아 유희를 즐기는 이들이 국경지대에 즐비하다. 수용소에 갇혀서 삶을 꿈꾸던 유태인들은 이제 타인을 겨누며 즐기고 있다. 자신들의 비극을 잊고 만행을 전이한다. 언젠가 역사는 반목될 것이다. 공포에 떨고, 분노가 차오른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눈엔 또 한번 돌고 도는 증오의 역사가 서려있다. 왼뺨을 맞거든 오른뺨도 내주어라. 예수가 말했다. 왼뺨을 때리고 오른뺨마저 때렸다. 예수도 고개를 숙일 판이다. 그 와중에 이스라엘엔 악랄한 미소가 번진다. 가자지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즐겁게 한낮의 오락을 즐기고 있다. 폭력을 양성하고 타인의 비극을 즐기는 무리가 저 땅에 있다. 세계의 목소리가 일침해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깡패가 따로 없다. 행패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악의 축이 따로 없다. 십자가 못박혀 죽은 예수가 자신을 못박은 로마인에게 저주를 퍼붓더냐. 예수의 사형을 소리치고 예수 대신 강도 바라바를 사면하라 악다구니를 쓴 건 유대인이었다. 하느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신다고 자부하던 이들은 작당해서 하느님의 아들을 죽였다. 이것이 그들의 역사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에서 가장 먼 길로 가고 있다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가르침을 잊은지 오래다.  

 

주여, 이것이 정녕 당신의 뜻입니까? 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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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에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카운터페이터>는 분명 그 질문의 반대편에 놓여있다. 하지만 <카운터페이터>는 저 물음표를 흡수하는 답변이라기보단 튕겨내는 반문에 가깝다. 인간은 살아남는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여기에 의미를 좀 더 보태보자. 인간이라는 존엄성이 완전히 짓이겨지고 삶이 형태로써의 껍데기만으로 남겨진 순간조차도 살아남는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가? 이토록 많은 질문을 얻었지만 여전히 대답을 얻을 수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카운터페이터>는 답변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 나열된 질문들은 영화가 유도하는 것들이다. 영화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생존의 도구로 몰락한 인간의 삶을 통해 그 존재적 가치에 대한 물음을 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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