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규, 춤을 긴장시키다
“형이 음악을 좋아했다. 집에서 형이 음악을 크게 틀어놓으면 방문 너머로 귀동냥하고는 했다.” 장영규는 형을 통해 자연스럽게 음악을 들었고,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음악 감상에만 관심이 있었던 형과 달리 그는 스스로 연주해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고, 곡을 써보기도 했다. 그리고 장영규에게 음악적 관심을 심어준 형은 음악적 진로를 결정짓는 존재로 거듭났다. "형이 어린 나이에 밴드 활동을 하는 나를 보면서 아버지에게 ‘영규가 저렇게 음악을 좋아하는데, 전자기타 하나 사달라’며 졸랐다. 그 덕에 중학교 2학년 생일 선물로 전자기타를 받았다.” 그렇게 장영규는 고등학교 때까지 쭉 밴드활동을 했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진학하려니 가고자 하는 학과가 없었다. "그 당시엔 실용음악과가 없었다. 하지만 다들 대학에 가니 학과는 선택해야 하는데 클래식을 전공할 준비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부모님 말씀을 듣고 중국어학과에 진학했다."
장영규는 대학에 들어갔지만 중국어에 대한 흥미가 없었으므로 학교 생활에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때 인생을 좌우하는 결정적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무용가 안은미다. "미술을 전공한 사촌누나와 가깝게 지냈는데 당시에 누나는 영화, 연극, 무용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 혹은 그 지망생과 어울려 다녔다.” 그때 만난 이들 중엔 먼 미래에 각자의 분야에서 대단한 역량을 펼칠 인물들이 즐비했다. 이를테면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된 이불과 최정화 그리고 영화감독 이재용 등이었다. “그들은 홍대나 종로 일대의 클럽을 휘젓고 다니며 즉흥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며 놀았는데 나는 그들을 쫓아다니며 짐을 들어주거나 촬영을 했다. 그리고 종로에서 록음악을 주로 틀던 ‘오존’이란 바에서는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행위예술을 펼치곤 했는데 별의별 사람이 모여 예술 활동을 하는 걸 보며 ‘이런 것도 있구나’ 싶었다.”
그 중에서도 안은미는 오늘날의 장영규를 각성시킨 자궁 같은 인물이었다. “하루는 LP판 12개를 가지고 와서는 ‘공연에 쓸 음악을 네 마음대로 만들어봐라’고 던져주더라. 집에 가져가서 곡을 이리저리 자르고 붙여 짜깁기해 한 시간짜리 음악을 만들었는데, 그 음악이 마음에 든다며 가져다 쓴 공연이 좋은 성과를 거뒀다.” 1991년 안은미가 제1회 MBC 창작무용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고 이듬해 축하 공연으로 준비한 <알라리 알라리요>였다. 당시 장영규는 심각하게 진로를 고민하던 차였다. “취직을 해야 하나 걱정할 무렵이었는데 안은미와의 인연으로 무용 음악을 시작했다. 하지만 먹고 살기는 빠듯했기 때문에 가수들 공연장에서 세센맨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무용 음악은 결국 장영규의 작품 세계를 확고히 다지는 축이 됐다. “당시에 공연 음악 하나 만들고 받은 돈이 10~20만원 남짓이었다. 그 돈으론 작곡가를 쓸 수도 없었고, 컴퓨터도 없으니 기존에 있는 음악을 4채널 짜리 카세트로 짜집기해서 공연 음악을 만드는 게 당시의 관습이었다. 그렇게 음악을 끝없이 자르고 섞었던 작업이 공부가 됐고, 음악 활동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사실 장영규를 대중적으로 알린 건 무대음악보단 영화음악이었다. 그의 첫 영화음악은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이었다. 그 후로 60편이 넘는 영화음악을 작업했고 최근엔 <곡성>의 음악감독을 맡으며 회자되기도 했다. 문득 장영규가 생각하는 영화음악과 무용음악의 차이가 궁금했다. "영화에서는 음악이 딱 짜여진 틀에서 흘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제약이 많은데 무용음악은 상당히 자유롭다. 이야기가 명확한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 추상적인 작업이다 보니, 어떻게 가든 끝내 한 지점에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 갈 수 있는 길이 수없이 많아 무용 작업이 더 흥미롭다.” 그렇다면 장영규가 원하는 작업 과정 방식은 어떨까? “무용수가 음악에 긴장하게 만드는 작업이 좋다. 연습 기간에는 기본적인 리듬만 작업해 주고, 안무가 완성되면 그때 비로소 곡을 입힌다. 처음부터 명확한 색깔을 만들어 주고 작품을 그에 맞추면 어딘가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처음에는 최대한 색깔을 빼고 마지막에 확 입히는 거다. 그러면 무용수들이 몸에 익은 리듬과 박자임에도 새롭게 들어온 음악적 색을 느끼고 긴장 관계를 이룬다."
한편 장영규는 지난해에 직접 무용을 연출하기도 했다. 국립무용단과 협업하여 국립극장 무대에 올린 <완월>이 바로 그것. 소치동계올림픽 국제아트페스티벌에 공연하러 갔다가 국립무용단이 강강술래를 추는 걸 보곤 영감을 받아 국립무용단에 작업을 제안했다가 오히려 연출을 제안 받고 고민 끝에 이를 수락했다. 사실 장영규가 끌린 건 강강술래의 음악이 아니라 원형의 동작이었다. "<강강술래>라는 노래에 동작이 갇힌 느낌이었다. 기존의 민요를 걷어내고 새로운 음악을 입히면 현대적인 작품으로 거듭날 거라 생각했다." 음악감독이 아닌 연출자로 참여한 그는 무용 동작의 연출도 관여했다. "마치 음악 작업할 때처럼 원형의 동작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듯 만들어봤다.”
사실 장영규는 규정하기 힘든 뮤지션이다. 무용, 영화, 연극음악과 역시 규정하기 힘든 밴드 어어부 프로젝트와 국악기를 다루지만 국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닌 비빙 그리고 민요 밴드라 일컫는 씽씽까지, 가히 전방위적인 음악을 섭렵해왔다. 그야말로 소리수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존의 악기와 어디에나 있는 소리로 작업하는 게 지루할 때가 많다. 그래서 그렇지 않은 소리를 수집하여 그걸 근원적으로 쪼개 악기로, 소스로 만들어 작업한다.” 현재 파리를 비롯해 유럽 등지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안은미의 <조상에게 바치는 댄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작업된 음악을 사용한다. 전국을 다니며 수집한 할머니들의 목소리와 노래를 따서 음을 쪼개고 더해 전혀 다른 느낌의 음악으로 만들었다. "음악을 만드는 요소가 다양하겠지만 내가 관심을 갖는 건 화성, 선율보단 소리, 구조, 리듬이다. 언제 흥미가 바뀔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여기 집중하고 있다." 장영규는 오로지 자신의 흥미를 따라간다. 그리고 그 흥미가 세상을 향해 문을 열어주었다. 흥미롭지 않은가.
about
장영규는 전방위적인 음악가다. 무용음악, 영화음악, 연극음악, 시각예술 사운드 작업, 밴드 어어부 프로젝트, 국악기 프로젝트 비빙, 민요 밴드 씽씽 등 한 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다방면의 음악적 작업을 전개하면서도 소리의 해체와 조립이라는 실험적인 스타일을 추구해 나간다.
(동방유행 July 2016 VOL.10 '유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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