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는 참아야 한다. 노리는 공이 들어왔을 때 비로소 휘둘러야 한다. 물론 헛스윙을 할
수도 있다. 빗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그래야 언젠간 안타를 칠 수 있다. 민우혁은 참았다. 그리고 지금 1루에서 2루로
뛰고 있다.
본래 야구 선수였다고 했다. 운동을 하다 뮤지컬 배우가 됐다는 게
이상하진 않았지만 호기심이 동했다. "관심이 다른 데에 있었다. 동료들이 거울 보면서 스윙 연습하는데 나는 H.O.T나 젝스키스
춤을 따라 하고 있었다.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겠단 생각보단 앨범을 내고 싶단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그러니까 민우혁에게는 끼가 있었다. 그리고 그 끼를 남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도 컸다. 그라운드는 무대 같았고, 더욱
큰 환호와 열광을 받고 싶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2~3학년을
부상에 시달리며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을 겪게 됐고, 한 프로구단의 제안으로 제주도에서 재활 훈련을
하던 중 되레 발목인대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그래서 3개월
동안 깁스를 한 채 고민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길은
아닌 것 같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영등포에서 월세 15만원 짜리 고시원방을 잡고 길거리 캐스팅이라도
될까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서성이던 민우혁은 모델 학원 오디션 공고를 발견했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탈락했다. 너무 뚱뚱해서라고 했다. 두 달 동안 이를 악물고 살을 뺐다. 108kg에서 35kg을 줄였다.
결국 오디션에 합격했다. 그리고 우연히 노래를 할 기회를 잡았다. 2003년에 방영한 드라마 <요조숙녀>의 OST에 참여했다. 청사진을
그렸다. 그러나 긴 기다림 속에서 서서히 지워졌다. 무명시절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노래가 하기 싫었다. '차라리
야구를 할 걸'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 그러다 문득 친한 친구 어머니가 연극배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부탁했다. 연기를 배우고 싶다고. 아침마다 찾아가 연기를 배웠다. 물론 그때에도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인생이란 뒤돌아볼 수 있는 것이지, 내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내 과거를 아는 분들은 뮤지컬을 하려고 노래도 하고, 연기도 배운 거라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시절이 긍정적으로
보인다." 그렇다. 민우혁의 어제는 지나갔다. 그는 지금무대에 올라 내일을
본다. 진짜 청사진이다.
올해에만
<레미제라블>, <위키드> 무대에
섰고 <아이다> 무대가 기다리고 있다.
야구로 치면 봉황기, 황금사자기, 청룡기
결승전에 올라가는 기분이랄까.(웃음)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상황인데 마치 누군가가 나를 위해 자꾸 상을 차려주는 느낌이다.
물론 길가다 동전 줍듯이 얻은 기회들이
아니다. 대작 뮤지컬에 연이어 출연하는 만큼 오디션의 치열함도 더욱 크게 느낀 한 해가 아니었을까?
소위 A급이라 꼽히는, 대극장
뮤지컬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이름을 들었을 때 위압감을 느낀다. 그런데 최종 오디션 명단에서 내 이름이
그런 이름들과 함께 있는 거다. 그러니까 어느 프로구단 테스트를 보러 갔는데 류현진이랑 같이 서 있는
느낌?(웃음) 그래서 마음을 많이 비웠다. 목표는 단 하나, 강렬한 인상을 남기자. 캐스팅이 안돼도 다음에 새로운 작품을 준비할 때 민우혁이라는 배우를 떠올릴 수 있도록 하자고, 그러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캐스팅됐다.
그러니까!(웃음) <아이다> 오디션은 <레미제라블>
공연할 때 진행됐는데 사실 그때 인대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서 일주일간 공연을 못했다. 심지어
성대결절까지 온 상태였다. 그런데 하필 <아이다> 2차 오디션까지 겹쳤다. 그래서 결국 오디션 참석이 어려울
것 같다고 연락했는데 감독님이 감안하고 보신다니 걸을 수만 있으면 와달라는 거다. 그래서 일단 병원부터
갔다. 성대결절이라도 조금이나마 나아졌으면 해서. 그리고
다음날 목발을 짚고 오디션을 봤는데 합격했다. 그래서 3차
오디션에선 깁스를 풀었다. 절뚝거리더라도 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걸 보고 오리지널 연출자인 키이스 배튼이 엄지를 척 들더라.(웃음)
<아이다>에서 연기할 라다메스는 이집트 장군인데 상당히 남성적인 캐릭터다.
그래서 강인한 장군 역을 맡기엔 얼굴이 너무 선하고 어려 보인다는 지적도 받았다. 심지어 라다메스가 열여섯 살이라 해서 최대한 어려 보이면 좋을 것 같아 앞머리도 내리고, 캐주얼한 복장으로 3차 오디션 현장에 갔다가 그게 독이 될 거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본격적인 오디션이 몇 시간 정도가 남았을 때 바로 미용실을 찾아가 머리를 짧게
자르고 옷도 새로 사 입었다. 그랬더니 키이스 배튼이 다시 엄지를 척.(웃음) 덕분에 자신감이 확 올라와서 인대가 아프다는 것도 잊고 오디션에 열중했다. 그래서
캐스팅된 게 아닐까 싶다.
라다메스 역에 더블 캐스팅된 김우형은 2010년에 공연한 <아이다>에서도
라다메스를 연기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아무래도 비교될까 봐 긴장되지 않나?
사실 오늘도 우형이 형이 연습하는 걸 보면서 하루 종일 감탄하다 왔다.(웃음) 원래 열정이 과해서 빡세게 연습하는 편인데 우형이 형은 더한다. 마치
처음 하는 사람처럼. 그래서 나 역시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
와중에 나를 잘 챙겨준다. 보통 더블 캐스팅되면 그러기 쉽지 않은데 정말 나한테 다 퍼준다. 덕분에 든든하다. 몸은 힘들지만 너무 행복하다. 우형이 형을 보면서 저런 선배가 돼야겠단 생각을 많이 한다.
<위키드>에서 연기한 피에로와 <아이다>에서 연기할 라다메스는 삼각관계에 빠져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캐릭터마다 감정을 느끼는 원인이 다르니까 피에로의 감정은 완전히 지워버리고, 심지어
내 관점에서의 감정도 최대한 버리려 노력하고 있다. 아무래도 내 입장에서 다가가면 <위키드>의 피에로나
<아이다>의 라다메스나 비슷해 보일 것 같아서 라다메스가 왜 아이다를 사랑하는지
이해하려 노력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
피에로는 요즘 말로 '금수저'라 방탕하고 사치스럽지만 내면에는 공허함이 가득한 인물이다.
피에로가 지독하게 외로운 캐릭터라 생각했다. 그래서 피에로는 자신의
외로움을 방탕한 생활로 감췄는데 엘파바는 자신의 외로움을 다 드러낸다. 그래서 피에로가 엘파바를 사랑하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피에로가 엘파바를 사랑하는 게 설득력이 없다고 느꼈다.
이유는?
솔직히 금수저 물고 태어난 왕자인 피에로가 초록색 마녀인 엘파바를 사랑한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본을 열심히 봤는데 피에로 입장에선 도저히 모르겠더라. 그러다
엘파바를 보기 시작하면서 피에로의 감정이 보였다. 왜냐면 나도 어렸을 때 피에로처럼 외로운 감정을 위장하며
살았으니까. 그런 외로움을 이해하니 피에로를 연기하는 게 수월해졌다.
본인은 어떤 외로움을 감춰온 건가?
10년 동안 야구를 하면서 감정을 위장하는데 익숙해졌다. 운동을 하면 합숙을 하니까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는데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천연덕스럽게
잘 숨겼다. 본래 긍정적인 성격이기도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길들여지니까 누구에게도 내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속 얘기를 털어놓으며 울어본 기억도 없고. 그런데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를 공연할 때 처음으로 감정이
폭발하는 경험을 했다.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는 실화 바탕의 야구 뮤지컬이라 소재면에서 익숙했을 것 같은데, 감정이 폭발했다는 의미는 뭘까?
전국민이 다 아는 이승엽과 함께 청소년대표팀으로 활약했던 김건덕이란 선수를 주인공으로 둔 작품인데 마치 내 인생처럼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막상 눈물을 흘려야 하는 신에서 도저히 못 울겠더라. 모든 감정을 쏟아내며 울어야 하는데 단 한번도 남들 앞에서 울어본 적이 없어서 힘들었다. 그런데 막상 첫 공연 때 완전히 몰입해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다음
신 진행이 안될 정도였으니까. 사실 그때 너무 행복했다. 누군가를
앞에 두고 그렇게 울어본 건 처음이었고, 이런 감정을 견디며 살아왔다는 게 느껴져서.
선수 시절 포지션이?
투수였다.
투수는 경기를 책임지는 포지션이다. 무대에 서면 비슷한 책임감을 느낄 때가 있을 것 같다.
맞다. 그리고 배우는 인내심이 필요한 직업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쫓으면 눈 앞에 좋은 배역이 없을 때 무너지기 쉽다.
꾸준히 어떤 역할이라도 열심히 해나가야 기회가 찾아오는 거 같다. 운동을 한 덕분에 기본적인
인내심을 배운 것 같다.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다.
TV나
영화에서도 연기를 해보고 싶단 의견을 종종 피력했다.
무대에서의 연기가 좋고 관객들로부터 전해지는 리액션이 좋아서 공연을 좋아하지만 연기에 대한 욕심이 늘면서 TV드라마나 영화에도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이젠 노래보단 연기에 더 관심이 많아졌나
보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은 간혹 목소리가 갈라지고 음이 떨어져도 그 노래의 감정을 정확히 전달한다. 결국 좋은 배우가 되려면 노래 실력만으로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옛날에는 피아노를 쳐가면서 노래 연습을 했는데 지금은 가사를 한번 더 보게 되는 것 같다.
올해
11월부터 내년 3월까지 <아이다> 무대에 서야 한다. 긴 시간 동안 무대에 오르려면 자기 관리에도
만전을 기해야 할 텐데.
공연에 들어가면 개인적인 생활 자체가 없다. 공연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가고, 쉴 때에는 말도 줄인다. 예전에 주인공은 무대에서
절대 '삑사리' 내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한때는 우스갯소리처럼
여겼지만 이젠 그 의미가 무겁게 다가온다. 비싼 돈을 내고 공연을 보러 온 관객 입장에서 삑사리를 듣고
몰입이 깨져서 티켓값을 아깝게 생각해버릴 수도 있으니까. 정말 조심해야 한다.
랩퍼가 많아서 흔한 이름은 기억하기 어렵다. 그래서 특별한 이름을
생각하다가 사람들이 나보고 자꾸 크다고 하니까 '자이언트' 그런데
여자니까 '핑크' 그럼 '자이언트
핑크?' 이래 놓고 빵 터졌다. 그래서 이거다 싶더라.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 나를 '자핑'이라
부르고 있고, 신기했다. 그리고 이름이 입에 달라붙더라. 사실 원래 <쇼미더머니
5> 나가기 전에 이름을 바꿀까 생각했거든.
이유는?
소속사에서 이름이 약간 외설적으로 보일 수 있다고 해서. 사실 나는
그런 생각을 못해봤는데 사람들 생각이 다양하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이름에 애착이 남더라. 고집이 생겼다. 그래서 욕 먹더라도 나는 자이언트 핑크를 하겠다고
했다. 욕 먹는 것도 사랑이라고, 내 이름이 기억해주는 게
어디야.
랩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너무 소심해서 시작한 거 같다. 사실 학창시절에 상당히 뚱뚱한 편이었는데
그래서 자존감이 떨어졌다. 이렇게 뚱뚱한데 누가 나랑 친구를 할까 싶어서 항상 남들 비위를 맞춰주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더라. 그래서
가사를 써서 친구에게 들려줬다. 나한테는 그게 통쾌했거든.
가사를 쓰고 싶다는 생각은 어떻게 시작했나?
원래 R&B 힙합을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스무 살 때 자연스럽게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글을 쓰듯이 짜증나는 것들을 썼는데 그렇게 쓰다 보니 랩으로 해볼까 싶어서
과감하게 막 욕도 섞어서 썼다. 그러다 보니까 재미가 생기더라. 그러다가
가끔씩 친구한테 들려주기도 했다.
랩을 하면서 소심함이 극복되던가?
그런 거 같다. 아직도 소심함이 남아있지만 많이 나아졌다. 이젠 기분 나쁘면 할말은 한다.
과거의 본인에게 지금의 본인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겠다.
아무래도 옛날에는 남들 앞에서 노래하고 공연한다는 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거다. 심지어 옛날에는 남들 앞에서 잘 부를 수 있는 노래도 못 부르는 척했다. 그러면
사람을 웃길 수 있을 거 같고, 그러면 재미를 줄 수 있으니까. 옛날
성격은 이랬다.
랩을 한다고 하니 부모님께선 놀라지 않으셨나?
일단 화를 냈다. 왜 그렇게 욕을 많이 하냐고. 그리고 나는 당시에 랩을 잘 모르니까 그냥 무조건 욕을 해야 하는 줄 알았다(웃음).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거더라.
결국 랩퍼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계기는?
아무래도 랩을 하면 좋아해주니까. 사실 한때는 허스키한 목소리 때문에
좋은 말을 못 들었다. "여자 목소리가 왜 저래? 쇠
먹었나?" 이런 식으로(웃음)? 그런데 이젠 시대가 바뀌면서 이 목소리가 먹히더라. 듣기 싫은
보이스가 아니라 개성 있는 보이스로 인정 받게 되고.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 아무래도 칭찬에 훅 올라가는 타입이라, 자신감이 생겼다.
<언프리티
랩스타 3> 초반에는 우승 후보 0순위였는데 후반부에는
탈락 위기까지 몰렸다.
사실 댓글을 많이 보는데 초반에는 칭찬이 많아서 좋기도 했지만 부담도 됐다. 그래서
잘 하려고 가사 쓰는데 공을 들이면서 점점 가사 고치는데 시간을 많이 쓰다 보니 외울 시간이 모자라게 됐다. 다음엔
안 그래야지 싶다가도 사람 욕심 때문에 또 그렇게 되고. 사실 3일마다
트랙 미션을 하나씩 수행하면서 가사 쓰고 무대에 올라가는데 항상 '이 주제를 내가 어떻게 풀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날 뽑아줄까?'란 고민을 하게 됐다. 욕심과 부담감 사이에서 숨막히는 대결을 거듭하니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 결국 7번 트랙까지 음원 하나 따지
못했다. 그래서 파이널 무대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했다.
결국 파이널 무대는 완벽하게 소화했다.
관객들 앞에서 공연할 때랑 프로듀서 앞에서 경연할 때랑은 기분이 다르다. 일단
긴장감부터 환경이나 분위기까지. 일단 즐기면서 랩을 해야 하는데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고 있다는 느낌
자체를 즐길 수 없으니까 불편했다. 랩을 하는 게 아니라 프로듀서 님이 원하는 걸 들고 왔다는 느낌이라
부담감이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언프리티 랩스타 3>에 참가했을 때 트랙을 따는 것도 중요했지만 큰 무대에서 열리는 파이널 공연을 너무 하고 싶었다. 그런데 자꾸 실수를 하면서 끝까지 갈 수 있을지 불안하더라. 그래도
다행히 끝까지 왔고 최대한 즐긴 것 같다.
만약 우승을 못했다면?
아무래도 자신감이 떨어져 있지 않았을까? 사실 나는 서바이벌에는 잘
안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걸 즐기는 애들도 있긴 하더라. 특히 연습생이나 아이돌 출신들은
항상 경쟁해온 애들이라 익숙해 보였다. 나는 누굴 이기려고 해본 적도 없고, 항상 혼자 해왔기 때문에 쉽지 않더라.
앞으로의 계획은?
당장 구체적인 건 없는데 아직 앨범을 낸 적이
없어서 앨범을 내고 싶다. 최대한 빨리.
(ELLE KOREA NOVEMBER 2016 NO.289 'ELLE INTERVIEW')
그래서 다들 무대 경험이 풍부할 거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솔로
활동은 2012년도에 발표한 EP 앨범을 통해서 처음이었는데
그때 솔로로 활동하는 아티스트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3분 30초를
혼자 다 이끌어 간다는 게 쉽지 않더라.
맏언니이자 선배로서 부담되는 자리였을 것
같은데.
다행히도 첫 미션부터 박살 났지(웃음).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꼭 제일 잘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게 돼서.
랩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혹시 UP라는 그룹의 '뿌요뿌요'라는 노래 기억하나? 그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항상 랩 부분을 외우지
못해서 직접 개사해서 랩 부분은 내 마음대로 불렀다. 그리고 그 다음부턴 아예 힙합곡에는 내가 랩메이킹을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자연스러웠다.
랩퍼가 될 거라 생각했나?
사실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내가 노래를 못했기 때문에 노래에 도전하진 않았고 힙합곡에 가사를 쓰면서 랩스타를
꿈꿨지. 사실 스무살이면 랩스타가 돼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허니패밀리로 활동하면서 그 꿈이 이뤄질 거 같았는데 알다시피 잘 안됐다. 그 이후로 꿈을 접을까 하다가
브라운아이드걸스라는 그룹에서 여자 랩퍼를 구한다고 해서 그렇게라도 음악을 계속 하자고 생각하며 멤버로 들어갔다.
<언프리티
랩스타 3>에 출연을 결정한 이유는?
솔직히 죽을 때까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프로그램이었다. 주변에서도
진짜 잘해도 본전일 거란 말이 많았다. 그런데 시즌2 때부터
회사에서 나가보자고 하더라. 계속 고사했는데 갑자기 정면돌파하자고 생각했다. 출연하지 않으면 비난도 안 받겠지만 얻는 것도 전혀 없을 테니까. 결국
도전해보고 변화를 느끼고 싶었다.
어린 후배들과 경쟁하는 건 어땠나?
어린 친구들의 패기가 정말 부럽다고 생각하고 인정할 수 있었다. 나도
어릴 때는 그랬으니까. 그래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거 같다.
나이 든다는 것이 두렵지 않나?
여자라서 두려운 건 있다. 아무래도 여자는 좀 더 젊고 어려야 주목을
받게 되니까. 그런데 나이 먹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두렵다고
해서 피할 수는 없으니까. 결국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내가 어떻게 타계해 나가야 할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 같다. 어쩔 수 없으니까.
방송 상으론 상당히 안정적인 느낌이었다.
다들 그렇게 보였다고 하더라. 실제로는 방송 녹화 기간 내내 심리적으로
불안정했다. 다만 카메라 앞에선 계속 마인드컨트롤 했던 거지. 혼자
작업실에서 가사 쓰면서 종종 땅을 치고 울기도 했다. 이걸 내가 왜 한다고 했을까, 이러면서(웃음). 그러다가
마음을 다잡고, 결국 TV로는 마음을 다잡은 상태만 나갔겠지(웃음).
허니패밀리 시절에 함께 활동한 길이 프로듀서로
나왔다.
사실 허니패밀리 출신 오빠들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첫 미션의 프로듀서부터 길 오빠가 왔다. 그 다음 미션에선 쿠시가 나왔고, 산이나 스윙스도 안면이 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못한 건가. 생각해보니 안면이 전혀 없는 딘의
트랙 미션은 우승한 거 보니까(웃음)? 아무튼 길 오빠가
처음에 나온 덕분에 마음의 준비는 확실히 됐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 프로듀서로 나와도 다 받아들이자고, 내가 알던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게 될 거라고, 마음이 단련됐다.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랩 부분은 직접 작사해서
앨범에 작사가로 이름을 올렸다.
랩 파트는 전문적으로 랩메이킹을 해주던 분들이 있었고, 그분들이 만들어준
대로 랩을 했는데 그런 관례를 깨고 싶었다. 그래서 랩 부분은 내가 쓰겠다고 했고, 랩 부분에 대한 저작권도 보장해달라고 주장했다. 사실 기성 작사가
입장에선 원래 본인 몫이었던 저작권을 왠 어린 애한테 내줘야 하는 거니까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내게도
도전이었다. 결국 의사를 관철시켜서 1집부터 작사가로 앨범에
참여했다.
여자 랩퍼는 남자 랩퍼보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인식을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는 남자나 여자나 공평하다. 의지만 있다면
다 할 수 있다. 다만 여전히 랩퍼가 되려는 여자가 수적으로 적은 것뿐이지. 그러니 당연히 인재풀이 좁아지고, 인재풀이 좁으니 전체적인 실력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거다. 천재적으로 잘하는 친구들이 있다고 해도 평균적으론 어쩔 수 없지. 단지 그 차이인 거 같다.
결국
<언프리티 랩스타 3>에 나간 건 좋은 선택이었을까?
잘한 거 같다. 눈 가리고 모른 척할 수 없도록 지금 내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경험이었고, 덕분에 발전할 수 있는 변화를 얻은 것 같다.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가사를 써본 적이 없다. 아마 태어나서 가장
많은 노력을 한 시기였을 거다.
앞으로의 계획은?
몇 달 간격으로 음원을 지속적으로 발매할 계획을 갖고 있다. 아마
최소한 두 곡씩은 계속 발표할 거 같다.
(ELLE KOREA NOVEMBER 2016 NO.289 'ELLE INTERVIEW')
S.E.S의
바다에서, 가수 바다로 그리고 뮤지컬 배우 바다로, 바다는
언제나 바다였다. 항상 바다라는 이름으로 노래했다. 노래로서
존재했다. 바다를 노래하며 진정한 디바가 됐다. 바다라는
이름으로 완전해졌다.
우연이었다. TV 채널을 돌리다 바다를 보게 된 것은. 한 케이블 채널에서 재방송 중이던 <마이 리틀 텔레비전>(<마리텔>)에서 바다가 나오고 있었다. <캐스트 어웨이> 같은 영화가 연상되는, 모래가 깔린 조악한 세트에서 '생존'이라는 주제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분홍색 파자마를 입고
정신 없음 그 자체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즐기는 바다의 모습을 보며 낄낄거리다가 문득 낯설다는 인상을 느꼈다. 바다라는
이름은 익숙한데 바다라는 사람이 생소했다. 지금 이 TV를
통해 바라보는 저 모습이 진짜 바다일까. 궁금했다. 노래하지
않는 바다는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인터뷰 장소로 약속한 한 카페에서 바다를 기다리는 동안 어떤 질문을
먼저 할지 고민했다. 방금 막 <컬투쇼>에 출연하고 오는 길이라는 바다에게 우연히 <마리텔> 재방송을 봤다고 하자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걸
보셨어요?"라고 되묻고 나서도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그런 경지까지 온 거죠. 어쩌면 그 지경이라 하는 게 맞을 거 같지만(웃음). 사실 모든 상황에 맞춰서 알아서 대처해야 했기 때문에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최선을 다한 거 같아요." 그런데 바다는 왜 <마리텔>에서 생존이란 주제를 선택했을까. "음, 원래 인생이란 게 기본적으로 생존이잖아요." 하이톤의 음성과는
역설적인 진지함이었다. "사실 <마리텔>은 가벼워 보이는 프로그램이잖아요. 그런데 <마리텔>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고, 모두가 그걸 관찰하죠. 그게 마치 이 사회와 인류의 작은 형태나
다르지 않잖아요. 결국 모든 방이 각자의 문화적 형태를 띄는 거죠. 결국
저는 나름대로 무거운 메시지를 담은 문화를 선택한 거고요. 다만 사람들이 가볍게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제가 의외로 철학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요."
어쩌면 생존이란 가장 중요한 화두였을지도 모른다. 바다라는 이름을
걸고 지나온 세월 안에서. 대중음악 역사 안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걸그룹 'S.E.S'의 리더로 활동하다 팀의 해체와 함께 솔로로 독립한 뒤 보컬리스트로서 실력을 인정받고 뮤지컬 무대까지
진출해 최고의 배우라는 찬사까지 끌어낸 그녀가 보낸 19년이란 무성하게 가지를 뻗은 영광의 세월이기
전에 깊게 뿌리 내린 생존의 역사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역사는 단지 그녀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존경하는 패티김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20년만
버티면 자연스럽게 레전드가 된다고. 20년 동안 가수로서 존재할 수만 있다면. 어느새 20년을 앞두고 있다니 실감이 안나요. 그런데 선생님 말씀은 조금씩 이해가 돼요. 요즘 후배들로부터 존경한다는
말을 종종 들어요. 저처럼 20년이 돼도 노래하고 싶다는
거예요. 아이돌 그룹의 리드 보컬들은 대부분 그런 생각을 하겠죠. 저도
그랬으니까. 그러니 그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인생의 목표라 말할 순 없겠지만 계속 노래할 수 있다는 건 제게도 중요한 의미가 될 테니까요."
지난 6월에 공개된 미니앨범
<Flower>는 데뷔 20주년을 앞둔 바다가 오랫동안 자신의 노래를 들어준
팬들을 위해 준비한 첫 번째 선물이다. 타이틀곡 'Flower'를
포함한 네 곡의 넘버를 담고 있는 이 앨범을 포함해 세 차례에 걸친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무엇보다도
2009년에 발표한 네 번째 정규앨범 이후로 무려 7년 만에
앨범을 발표한 만큼 남다른 감회가 느껴졌다. "앨범을 발표하고 싶다는 갈증은 몇 년 전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그럴 갈증을 느낄 겨를이 없었어요. 당시엔 뮤지컬 무대에 최선을 다하느라 너무 바빴으니까. 목이 타긴 하는데 너무 바빠서 물 먹는 걸 까먹을 정도의 상황이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더 이상은 안되겠다고 생각한 순간 정확히 멈춘 거 같아요. 그만큼 <Flower>는 제게도 반가운 앨범이었죠."
사실 바다는 본래 노래보단 연기에 관심이 많았다. 안양예고에서도 연극영화과를
지원했고, 배우가 되길 꿈꿨다. "가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연기에 관심이 많았죠. 그런데 그 당시
저희 집은 가난했고, 당장 가수가 될 기회가 생겼고, 돈을
벌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니 선택하게 된 거죠. 만약 당장 배우가 돼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면
가수보단 배우를 선택했을 지도 몰라요." 그렇다. 바다보단
최성희라는 본명이 더욱 익숙하던 시절, 명창 조통달의 수제자 중 한 명이었던 소리꾼 출신 아버지는 그녀에게
다양한 취향과 재능을 물려줬지만 그녀를 가난으로부터 보호해주진 못했다. 물론 바다는 그 시절의 가난을
비극적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저 그러한 삶을 통해 나아갈 방향이 있었다는 걸 기억할 뿐이다. "운명을 믿어요. 제가 여기까지 온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어디로 닿는다 해도. 다만 어떤 순간에도
제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싶진 않아요."
물론 운명을 믿는다는 것이 주어진 인생에 순응하겠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실제로
그녀가 바다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오늘은 순종적인 딸의 입장에서 벗어나 자신 스스로가 바라는 인생을 선택하겠다는 최초의 의지를 통해 일군 결과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버지께서는 제가 수녀가 되길 바라셨어요.
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중학교 시절부터 수녀가 될 준비를 했고, 수녀가 될 거라 생각했었죠. 하지만 안양예고에 진학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기로 마음 먹었어요. 아버지께서 반대하셨지만 결국 제 의지가 더 강했죠. 만약 그때 제대로
마음 먹지 않았다면 정말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거예요." 그렇다. 덕분에 그녀는 바다라는 이름을, 인생을 얻었다. 만약 그녀가 안양예고에 진학하지 않았다면 축제 무대에서 노래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녀를 발견한 이수만 대표가 가수 제안을 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가
기억하는 S.E.S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바다라는 디바의
노래를 듣게 될 기회도 없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흥미로운 일이다. 그녀의
선택은 단지 그녀의 인생만을 바꾼 것이 아니다. 그녀의 선택을 통해 세상의 기억도 달라진 셈이다. 마치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신비로운 일 아닌가.
사실 바다는 몇 해전 삶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기회를 얻었다. 헤르만
헤세의 저서 <정원 일의 즐거움> 덕분이었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삶의 균형을 찾았다. "정원일처럼
고된 노동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죠. 자기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닐 테고요. 자연에 맡겨야 하는 거잖아요. 자연과 햇빛을 통해 만들어진 것들
그러니까 어쩌면 신이 기획하고 연출한 신에서 인간은 그냥 스태프로 일하는 거잖아요. 정원일이라는 게." 사실 그 책을 통해 얻은 삶의 균형이란 어머니의 죽음과 맞닥뜨린 뒤 느꼈던 흔들림을 가라앉히는 기술이기도
했다. "그런 일이 닥치니까 막상 당장은 담담했던 거 같은데 다가올 두려움을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그래서 인생의 순리를 대면하는 듯한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나 봐요. 사람이 병에 걸리고 죽는 것도 자연의 이치잖아요. 그러니 자식이
부모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자연의 이치인 거 같아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아픔을 지켜보는 과정도 자연을 대면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아침마다 도드라진 나뭇가지를 자르고, 매일 같이 지켜보면서 정원을 아름답게 가꿔가는 것처럼 삶을 살아가는 것이 비슷해 보였어요. 결국 순리대로 가는 것이니까. 그래서 부정적인 상황에 직면한다 해도
가던 길을 멈춰선 안 된다는 걸 알았어요."
자연의 이치처럼 인생을 받아들인다는 건 삶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최선을 다한 결과에 순응하며 매일 같이 최선을 다해 일상을 채우겠다는 의지가 담긴, 나직한 다짐에 가깝다. 동시에 긍정적인 관점은 그런 깨달음을 일상의
실천으로 밀어 보내는 돛과 같은 역할을 해내는 것 같다. "스스로를 완벽하게 알 수 없으니
인생을 통제하긴 어렵지만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오히려 신날 수도 있잖아요. 마치 빨간머리
앤의 대사처럼. 나를 모른다는 게 괴로운 일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능력이 내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저는 일이 끝나면 '고생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지 않아요. 그 말대로라면 제가 힘든 시간을 보낸 거잖아요. 하지만 저는 항상 즐겁게 일하거든요. 지금도 즐겁게 인터뷰하고 있고요. 그래서 고생했다는 말은 절대 안 쓰려해요." 바다가 생각하는
긍정주의란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기 위한 장벽이 아니다. 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즐기며 살아가기 위해
그녀가 발굴한 동력이자 재능에 가깝다. "긍정성을 타고난 사람도 있겠지만 더욱 노력해서 긍정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성향으로 바뀌는 거라 생각해요. 모두가 똑같이 다섯 개의 구슬을 갖고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구슬을 더 얻는 사람이 있고, 잃게 되는 사람이 있는 거죠."
그녀가 지닌 구슬의 양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바다의 긍정주의는 무대 위에서 보다 빛을 발한다. "무대에
서는 건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그러니 열정적으로 해내겠다는 마음을 먹어야만 하죠. 최대한 긍정적으로." 물론 무대 위에서의 긍정주의는 후천적인
경험의 결과다. "아무래도 많이 실패해봤다고 생각하는데 그 덕분에 맷집이 좋아진 거 같아요. 옛날엔 제게 벌어지는 일들을 하나같이 무겁게 받아들였는데 요즘은 가볍게 느낄 수 있는 거 같아요. 노래도 훨씬 편안하게 부르게 됐고요. 사실 디바라는 단어 자체가
무겁잖아요. 그래서 무거운 숙명처럼 느낄 때가 있었는데 이젠 오히려 깃털처럼 가볍게 즐겨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특별한 노래를 부르는 것보다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편안하게 노래하는 이가 진정한 디바라는
걸 요즘 많이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가사가 좋은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그렇게 바다는 세상보다도 자신을 위해 먼저 노래하는 법을 알았다.
바다로서 노래하는 방식을 터득했다.
물론 자신의 무대에 대한 치열함은 별개의 이야기다. 올해 1월 31일까지 무대에 섰던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맡았던 바다는 이 작품이 생존에
관한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스칼렛 오하라는 모든 것을 가진 부잣집 딸이자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잖아요. 그런데 전쟁통에서 폭풍 같은 세파를 겪으면서 오로지 생존을 위해 삶을 헤쳐나가죠. 그리고 제가 스칼렛 오하라를 연기하게 된 건 아무래도 제게도 그런 기질이 있기 때문일 거 같아요.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편이고, 생존에 대한 의지도 강한 편이라 생각하는데
자연스럽게 그런 특징을 끌어다 연기한 거 같아요." 물론 무대와 현실 사이에서 자신의 균형을
찾는 것도 그녀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대에 서는 저와 일상에서의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에요. 인생을 연기하듯이 살 순 없잖아요. 물론 그렇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분들도 종종 있긴 한데 저는 확실히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 같아요. 다만 다행히도 저는 상상력이 많은
편인가 봐요. 캐릭터 분석을 할 땐 정말 많은 상상을 하는데 최대한 디테일한 상상까지 더해서 인물을
구상해요. 예를 들어 눈썹을 치켜 뜨는 버릇이 있는 캐릭터라면 항상 거울로 자신의 버릇을 봐왔을 테니
눈썹을 최대한 아래로 내려 그렸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 상상대로 직접 그려야 하는 거죠."
사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이후로 뮤지컬 배우 바다의 모습을 볼 기회는 없었다. 대신 가수로서 무대에 오르는 바다를
볼 기회가 늘었다. 바다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린 사진을 보여주며 여전히 설렌다는 듯 말했다. "작년에 처음으로 단독 콘서트를 했어요. 사실 여자 솔로
가수가 혼자서 콘서트를 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관객들이 안 오면 어떡하지 걱정이 많았는데 8천명이나 되는 관객들이 와주셔서 정말 놀랐어요. 정말 너무 감격스러웠죠. 그래서 온 몸을 던져서 공연한 거 같아요. 나중에 공연이 끝나고
보니 무릎에 피멍이 들어있더라고요. 그런데 공연할 때는 아픈 줄도 몰랐어요." 올해 그녀는 콘서트에 보다 매진할 계획이라고 한다. 지난 7월에는 가수 휘성과 함께 조인트 콘서트를 열기도 했고, 앞으로 동료
가수와 함께 설 수 있는 무대를 늘려나갈 예정이란다. "요즘은 제 화두는 콘서트에요. 사실 제가 다양한 것에 집중하지 못하지만 한 가지에 집중하면 끝까지 파는 편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앞에 있던 물잔을 들더니 건배를 하자고 제안했다. "장난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행운을 비는 거죠. 이렇게
건배를 함으로써 잔 안에 있는 물의 느낌도 달라진다고 생각하거든요. 물 한잔을 마셔도 긍정적인 기분을
느끼려는 거고,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보는 거예요. 결국
운명을 제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죠."
벌써 올 한 해도 지나간 시간이 지나갈 시간보다 무겁게 다가온다. 이제
세 달 남짓하게 남은 한해 동안 바다가 무엇을 채울 계획인지 궁금해졌다. "올해에는 가수로서
공연을 많이 하고 싶었는데 연말에는 정말 많은 공연을 하게 될 거 같아요. 그리고 슈퍼주니어의 려욱
씨와 함께 싱글을 발표할 예정이에요. 사실 저도 몰랐는데 려욱 씨가 연습생이던 시절에 연습실 거울을
닦고 있었는데 그 옆을 지나가던 제가 갑자기 거울을 같이 닦아줬대요. 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려욱 씨가
말해줘서 알았어요. 그래서 너무 고마웠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묘한 인연이죠." 어쩌면 그녀는 내일 당장 일어날 일을 알 수 없어서 신나는 인생이라기
보단 뿌린 대로 거둬들이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다의 시간은 흘러왔다. 그리고 흘러갈 것이다. "활동을 해오면서 하나씩 배우는
거 같아요. 제 노래를 다시 듣다 보면 새삼 깨닫는 것도 있고. 그렇게
제 자신을 다듬어나가면서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도 노래할 수 있는 디바로서 존재하고 있다면 좋겠어요. 그래서
언젠가 다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바다는 그렇게 자신을 위해 노래하는, 바다 자신을 노래하는 디바로서의 미래를 꿈꾸는 법을 깨달았다. 그
누구의 디바도 아닌 바다로서.
이재용 감독의 신작 <죽여주는 여자>는 중의적인 제목이다. 그러니까 <죽여주는 여자>는 감탄사로 쓰이는 '죽여준다'와 동사로 쓰이는 '죽여준다'는 의미로 수식되는 여자의 삶을 그린 영화다. 먹고살기 위해 노인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늙은 여성은 과거 자신과 거래한 전적이 있는 남성들이 갈망하는 죽음을 돕는다. 죽여준다던 그 여자가 정말 죽여주는 여자가 된 건 결국 남루한 노인들의 삶이 방치되고 외면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이 존재하는 덕분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여러 모로 귀찮고 성가신 일이 되는 사회에서 노인들은 버겁게 현실을 버티거나 버거운 내일을 지운다.
물론 <죽여주는 여자>를 목격한 1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목도한 건 우울하고 괴로운 노년의 초상만은 아닐 것이다. 유쾌한 활기와 따뜻한 정감이 공존하는 영화 속 풍경에는 한국 사회의 여느 구석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소수자들의 표정들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 다양한 생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되짚게 된다. 그리고 다양한 삶의 군상들도 하나 같이 늙어가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삶은 결국 죽음으로 수렴되는 여정이다. 다만 죽음이 다다를 때까지 살아간다는 것과 죽음을 향해 찾아간다는 것 사이에는 우주만 한 괴리가 있다. 결국 <죽여주는 여자>는 죽음을 통해 삶을 관통하는, 역설적인 영화일지도 모른다.
전작인 <두근두근 내 인생>은 선천성 조로증에 걸린 아이에 관한 영화였는데, 신작인 <죽여주는 여자>는 노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늙다'와 '죽다'라는 동사가 두 작품의 공통분모라 할 수 있겠다. 원래 <두근두근 내 인생>의 연출을 마음먹기 전에 나이 들어가는 여배우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대중에게 늙어가는 삶을 노출하며 산다는 건 배우의 숙명이지만 여배우가 늙어간다는 건 남자 배우가 늙어가는 것과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 작품을 영화화하기 위해 투자자를 구하던 중에 <두근두근 내 인생>의 연출 의뢰를 받았고, 대중적인 영화를 연출한 경력이 차기작을 제작하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수락했다. 게다가 나이 들어간다는 것과 죽음이라는, 내 관심사와 연결되는 작품이기도 했고.
그런데 <두근두근 내 인생> 이후로 여배우에 관한 영화 대신 <죽여주는 여자>를 만들었다. 여배우에 관한 영화로 돌아가려던 차에 박카스 할머니를 다룬, 노인 성매매에 관한 기사를 접했는데 거기에 좀 경도됐다. 사실에 기반한 현실을 다룰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에 보다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늙어가는 여배우에 관한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여배우였을까, 늙어간다는 것이었을까? 그 질문에 답을 하려면 더 앞선 시점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웃음) 2007년에 <귀향>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실향민 노인이 금강산 관광을 갔다가 자신의 고향인 원산까지 걸어간다는 내용이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15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생명을 부지한 아내 때문에 딸이 시집을 못 가는 것 같다고 생각한 할아버지가 아내의 생명을 끊고 딸을 시집보낸 뒤 자신도 신변 정리를 하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는 이야기였다. <꽃보다 할배>처럼 남자 노인들이 어울려 다니며 낄낄거리는 모습도 묘사되는데 실제로 이순재 선생님을 캐스팅했다. 늙어가는 부모님을 보고, 나 역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런 주제를 자꾸 건드리는 것 같다.
<귀향>은 영화로 제작하지 못한 건가? 제작 단계 직전에 금강산 관광이 백지화되면서 촬영이 무산됐다. 그런데 지금도 영화가 엎어졌다고 말하진 않는다.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면 할 수도 있을 테니까.
<죽여주는 여자>의 시나리오를 착안한 건 언제였을까? <두근두근 내 인생>을 끝낸 뒤 2014년 여름쯤 착안했고, 가을쯤 시놉시스를 구상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는데 반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 해 겨울, 윤여정 씨에게 원래 제안했던 나이 든 여배우 이야기보단 박카스 할머니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다. 윤여정 씨는 생각을 좀 해보더니 자신이 여배우라서인지 사람들이 여배우 얘기를 얼마나 현실감 있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박카스 할머니 이야기는 사회성도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여배우 이야기가 더 대중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오히려 <죽여주는 여자>는 소재만으로도 대중영화라 받아들여지기 힘든 지점들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무겁다'라는 선입견이 생기는 소재이긴 하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죽여주는 여자>를 만들고 싶었다. '더 늦기 전'이란 의미는 시사성 있는 소재를 다룬 만큼 빨리 공론화해야 할 것 같았다는 말이다. 게다가 먼저 구상했던 여배우 이야기는 다른 이가 생각할 만한 시나리오는 아닐 테니까. 어쨌든 실제로 시나리오를 써내려 간 건 2개월 남짓한 시간이었다. 막연하게 이런저런 구상을 하다 작년 3월쯤에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서 후다닥 썼다.
<죽여주는 여자>는 노인과 죽음 외에도 다양한 시사적 화두를 건드리는 영화다. 지난 필모그래피를 돌아봤을 때 현실과 밀착한 시사성을 다룬 작품은 <죽여주는 여자>가 처음인 것 같다. <귀향>이 영화화됐다면 처음은 아니었을 텐데. 남북문제와 실향민 문제 그리고 노인 문제까지 다룬, 시사성 있는 작품이었으니까. 사실 이런 류의 영화를 만들 땐 용기가 필요하다. 투자 여건이나 제작 환경을 고려하면 고심할 수밖에 없다. 종종 농담처럼 누가 돈만 대주면 평생 이런 영화만 찍으면서 살 수도 있다고 하는데 어쨌든 나는 2년에 영화 한 편씩 만드는 일개 감독일 뿐이고, 세월은 제한적이다 보니 쉽진 않은 거 같다.
한국 남자와 필리핀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자녀를 의미하는 코피노와 트랜스젠더, 장애인 그리고 노인 등 우리 사회에서 소외받는 대상들이 이태원의 한 집에 모여 살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존재감이 피력된다. 어떤 면에선 종합 선물세트처럼 나열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늘 영화를 구상하면서 스크랩해오던 소재들이었고 이번 기회에 자연스럽게 녹여보고 싶었다. 이태원은 <귀향>의 주인공 할아버지가 이태원 복덕방을 운영한다는 설정을 두면서 이미 관심을 갖고 있던 동네였다.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서울 안에 자리한 작은 국제도시 같기도 하고 골목마다 정겨운 구석이 있어서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영화라는 게 역사적 기록물이 될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미군 부대 주변에서 생업을 이어나간 경력이 있는 소영(윤여정)의 입장에선 이태원에 머문다는 것이 자연스럽기도 하다.
저마다 만만찮은 사연이 있을 법한 인물들이지만 소영을 제외한 인물들의 과거에 대해선 어떠한 언급도 되지 않는다. 처음 시나리오상에선 도훈(윤계상)의 개인사를 털어놓는 장면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날라리처럼 지냈는데 친구를 태우고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건데 결국 친구는 즉사했고 자신은 다리를 잃어서 죽을 생각까지 했다가 어느 날 문득 그냥 '살아가야지'라는 마음이 생기면서 역경을 극복했다는 사연이다. 결국 시나리오를 각색하며 정리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삶이 영화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영화 속의 모든 인물들도 주인공일 순 없다. 티나(안아주)도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로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연과 시련을 겪었겠나. 하지만 어차피 우리가 모든 사람의 사연을 알고 살아가는 건 아니니까 그런 얘기를 다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흔히 비참한 인생일 것이라 여겨지는 소외 계층의 일상을 다루고 있지만 아기자기하고 귀엽게 묘사되는 덕분에 영화가 선택한 소재의 무게감이 버겁게 다가오진 않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걸 달가워하는 타입이 아닌 것 같다. 내 관심사를 공유하고 싶을 뿐이지, 사람들을 계도하고 싶진 않다. 어떤 주의나 의식을 웅변하고 자각하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없다. 물론 그들의 삶에 비참한 단면이 있을 거다. 하지만 매일을 지옥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그럴수록 어떻게든 살아갈 구실을 만들어내고, 작은 온기에서도 삶의 동력을 얻을 거라 생각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처럼 박카스 할머니를 직접 찾아가 인터뷰하고 취재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 같다. 상당히 디테일한 설정들도 묘사되니까. 박카스 할머니를 직접 대면하고 조사하진 않았다. 이미 내 머리 속에 그런 세계가 어느 정도 구축돼 있었고, 윤여정이란 배우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인물이 있었으니까. TV 다큐멘터리나 시사 프로그램을 참고하기도 했다. '연애하고 갈래요?'라는 대사도 거기서 알게 됐고. 그런데 이미 캐릭터들은 어느 정도 구체화된 상황이라 특별한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다.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바빠져서 그럴 여유도 없었고.
실제로 만나서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지 않던가? 종로를 오가면서 간접적으로 관찰하긴 했다. 처음에는 구분을 못하겠더라. 그냥 마실 나와서 할아버지들과 노닥거리는 할머니 같기도 하고, 매춘하는 할머니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몇 번 보니까 알겠더라. 어딘가 지친 기색이 있고 얼굴에서 빛이 사라진 느낌이랄까. 그러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도 되는 것인지, 혹시 내게 오해는 없는 건지 검증받고 조언을 들어보고자 박카스 할머니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교수님을 만나서 시나리오를 보여줬는데 직접 취재하고 만들어낸 캐릭터가 아니라고 하니 놀라더라. 그래서 안심했다. 실제로도 마음을 열고 이야기해보면 다들 명랑하다고 하더라. '집에 남편 재워두고 나왔잖아'란 식으로 자기 얘기도 서슴없이 하고.(웃음) 사실 자기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이야기하는 것만큼 비참한 일도 없지 않나. 그럼 사는 게 진짜 지옥이 되는 거니까. 다만 어떻게든 살아갈 구실이 필요한 거다. 그리고 구실을 찾아서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극한으로 밀어 넣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상에서 소영이 한 여자를 찾아가 돈을 주는 장면이 두 번 등장하는데 그 전후 과정에 대한 특별한 설명이 없어서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오해를 조금 산 것 같다. 원래 소영이 목돈을 빌렸다가 나눠서 갚는 장면이었는데 포주에게 돈을 바치는 것 같다는 추측까지 나오는 걸 보니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다. 소위 말하면 일수 개념으로 빌린 돈을 보름에 한 번씩 갚는 장면인데 영화 상에서 그녀의 모습이 너무 여유롭게만 보일 것 같아서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데 의미가 있는 장면이었다. 실제로는 갚아야 할 돈도 있고, 집세도 내야 하고, 그런 삶을 견디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소영은 유일하게 영화상에서 과거사가 밝혀진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인 소영이 동두천에서 미군을 상대할 때 'So young'이라는 영어를 음역한 것이란 사실은 우연히 만난 옛 동료와의 대화에서 드러나는데 그녀의 과거사가 넋두리처럼 들리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물론 다큐멘터리 촬영용 인터뷰를 빌미로 줄줄이 설명하는 장면도 있지만 구구절절 말할 수 없으니 극 사이사이에 잘 배치하는 게 관건이었다. 아마 결말부를 유심히 본 관객이라면 무연고자 납골당 신에서 소영의 본명인 양미숙의 생년월일이 1950년 6월 19일로 적혀 있다는 걸 확인했을 거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가 6.25 발발 일주일 전에 태어났다는 걸 알았을 거다. 실제로 중반부에 '3.8 따라지'라 말하기도 하고. 어쨌든 고아원을 거쳐 식모살이, 공순이, 동두천 양공주까지, 결국 한국 현대사에서 겪을 수 있는 비극을 죄다 경험한 한 여자의 일생으로 점철된다. 사회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한국 현대사에서 여성의 위치를 대변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론 전쟁이 한 여자의 인생을 이렇게 짓밟아놓을 수도 있다는 걸 기저에 깔아놓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쟁이란 남자들이 벌일 수 있는 최상위의 폭력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여자들은 희생자가 된다. 사실 우리가 양공주라 부르는 여성들은 엄밀히 말하면 미군 위안부다. 국가적으로 성매매를 금지해놓고 기지촌에서만 허용한다는 건 사실상 국가가 미군에게 성매매 서비스를 제공한 셈이니까. 결과적으론 그녀들을 외화 벌이의 수단으로 여겼고. 그런데 사회적으로는 미군한테 다리 벌린 여자 취급을 당하며 손가락질만 당했다. 결국 그녀들에겐 자기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없었던 거다.
몰염치하거나 무책임한 한국 남자들의 군상을 인지하게 되는 부분도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코피노 문제도 그렇고. 영화에서 코피노 소년 민호의 아빠로 추정되는 의사도 결국 애만 싸질러 놓고 도망친 셈인데 그걸 보고 간호사가 한마디 하지 않나. "한국 남자들은 다 개새끼야." 물론 페미니스트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여성을 다루다 보면 결국 약자로서의 여성성을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다. 현실이 이 모양이니까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남자의 시각으로 씌워놓은 관념들이 워낙 많다. 이를 테면 모성 같은 것? 그래서 자기 죽음 하나 어찌하지 못하는 남자들을 대신해 그들을 죽여주는 소영이 여성성의 화신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여성들이 감내해온 역사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걸 목격하게 만들어주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상대적으로 그녀가 꿋꿋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대단해 보이지 않나. 게다가 그녀가 성을 파는 건 살아남기 위해 폐지나 빈 병을 줍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선택한 방식일 뿐이다.
사실 죽음을 사주하는 남자 중 재우(전무송)도 비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고 여자의 여생을 망쳐버린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마치 자신의 평온한 죽음을 위해 여자의 삶을 산 제물처럼 바쳐버린 느낌이랄까. 맞다.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이다. 솔직히 영화적 설정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가 주길 바라는 요량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소영은 첫 번째 노인의 부탁을 들어준 뒤 재우에게 그런 사실을 감추지 않고 고백한다. 그분이 너무 원해서, 차라리 그렇게 사는 것보다 나을 거 같아서 했다고. 그만큼 소영에겐 공감능력이 있는 거다. 그리고 사람을 죽였으니 자신은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녀의 측은지심이 재우의 결심을 도운 것이라고 해석했다.
<죽여주는 여자>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건 약자가 약자를 돕고, 노인이 노인을 죽인다는 사실이다. 결국 상처를 입어야만 상처를 이해할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 느낌이랄까. <죽여주는 여자>를 만들 때 부담이 컸던 건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이 영화가 인용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반대로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쳐서 이를 실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 일종의 사회적 발언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다. 결국 그런 걱정을 다잡게 만든 건 이런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돼선 안 된다는 마음이었다. 이렇게 그들을 방치해선 안 되는 거니까. 그래서 이 영화를 통해 사회안전망에 관한 문제들이 공론화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존감을 지키면서 잘 죽는다는 건 무엇일지, 이런 성찰도 공유하고 싶었고.
삶보다 죽음을 갈망하는 남자들의 입장에 타당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고민이 있었을 거 같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죽음을 그리는 게 힘들었다. 어떻게 하면 개연성이 생길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다 내가 어떤 상황일 때 죽고 싶을지 고민해봤다. 첫 번째 남자 같은 경우엔 사는 게 창피하다고 하지 않나. 평소 댄디하게 차려 입고 부족함 없이 돈을 써가며 멋지게 살아왔던 사람이 한순간에 제 몸도 못 가누고 침대에 누워 여생을 보내야 된다면 정말 죽고 싶겠더라. 그리고 치매에 걸린 채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떠돌면서 남에게 폐를 끼칠 거라 생각하니 끔찍했다. 마지막으로 의지할 가족들이 모두 떠나갔을 때 무슨 낙으로 살아갈 것인지 막막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노인 자살을 부추기는 전형적인 유형 세 가지라는 걸 알게 됐다. 정확하게는 거기에 빈곤이 겹쳤을 때라더라.
소영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세 노인 중 두 명은 실내에서 죽지만 한 명은 산에 올라가 벼랑으로 떠밀려서 죽음을 맞이한다. 목격자가 발생할 수 있는 산에 올라가서 자살을 위장한다는 건 합리적인 선택과는 거리가 먼 발상처럼 보이는데, 굳이 산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소영이 도훈한테 어떻게 죽으면 고통이 덜할지 물어보는 장면이 있었다. 그리고 떨어져 죽으면 가장 짧게 고통을 느낄 거 같다는 결론에 다다르는데 그 장면을 다 걷어냈다. 어떤 의미에선 산에서 죽는 게 낭만적이라고도 생각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집에서 생을 마감하면 비참할 거 같고. 덕분에 내 영화 특유의 이상한 농담도 넣게 됐는데 이를테면 산으로 올라가면서 "야, 힘들어 죽겠다. 잠깐만 쉬자"라고 하는 대사 같은 것. 죽으려고 올라가는데 힘들어 죽겠다니, 웃기지 않나. 결국 그런 게 사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고.
어쩌면 공간성을 다양하게 고려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그런 바도 있다. 방, 산, 호텔, 이렇게 다양한 장소들을 확보하면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주로 도심을 배경으로 둔 영화라 한 번쯤은 확 트인 곳에서 한 템포를 쉬어가는 것도 좋을 거 같았다.
영화적 배경이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는데 촬영시기와 영화 속 풍경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인상이었다. 어쩌다 보니 우연과 필연이 잘 겹쳐졌다. 원래 가을에 찍어야 할 영화라고 생각하긴 했다. 늦여름에서 시작해 가을로 물들어가는 남산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그 시기에 맞게 투자가 완료됐고, 그때 빨리 촬영을 끝내야만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출품할 수 있는 스케줄이었기 때문에 부랴부랴 촬영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잘 맞아떨어졌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종로는 실제 박카스 할머니들의 터인데 장충단이나 남산 산책로는 의외의 선택지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곳에서도 그런 성매매가 이뤄지는 걸까? 그렇진 않다. 다만 가끔 남산을 산책하다 보면 거기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한국의 발전을 대변하는 신기루처럼 보였다. 그래서 꼭 그 장소를 넣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근의 장충단 공원으로 무대를 옮긴 거다. 남산의 한적함과 여유로움 속에서 소영이 홀로 쓸쓸히 배회하는 모습도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 풍경 안에서는 유령 같은 존재처럼 보이니까.
영화상에서 경쾌하면서도 쓸쓸한 선율의 연주음악이 몇 차례 들려지는데 장영규 음악감독에게 물어보니 공간성과 오래된 정서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더라. 장영규 감독과는 개인적으로 오랜 친분이 있다. <정사>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음악을 함께 작업하기도 했고, 일단 그냥 맡겨도 될 만큼 신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앞선 두 작품과 달리 <죽여주는 여자>에선 명확히 떠오르는 음악이 없었다. 그래서 편집본을 보여주면서 떠오르는 걸 얘기해달라고 하니까 오래된 이탈리아 영화 같은 느낌이 떠올랐다고, 그런데 약간 뽕끼가 있어야겠다고 하더라. 그리고 그가 보낸 샘플 중에서 두 가지 음악을 골랐다.
촬영 면에서 핸드헬드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단 한번도 흔들지 않더라. 흔들 수 없는 영화였다. 3D 영화 제작 지원금으로 만든 영화였으니까.
3D 영화 제작 지원금을 받아서 제작했다면 두 대의 카메라를 리그(Rig)로 연결한 3D촬영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단 말인가? 맞다. '카파(KAFA)'에서 마련한 3D 영화발전기금을 지원 받은 세 번째 영화다. 김태용 감독과 류승완 감독이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신촌좀비만화>가 첫 지원작이었고, <죽여주는 여자>는 <방 안의 코끼리>에 이은 세 번째 지원작이다.
아무래도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 같은데.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다 보니 카메라가 한번 이동하는 데에만 20분씩 소모됐다. 카메라가 일반적인 촬영 현장에서 사용하는 것보다 3배는 크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산에 끌고 올라가야 하는 건데 산에 올라갈 땐 정말 쉽지 않았다. 게다가 좁은 방 안에서 촬영할 땐 카메라가 너무 크다 보니 화각을 확보하기도 어려웠다. 평소 촬영 현장보다 스태프 수도 15% 가까이 늘었고, 촬영 시간도 더 많이 필요했고 3D 영상 컨버팅부터 색보정 작업, CG 작업 등의 후반작업도 더 복잡했다. 난제가 많았다.
트랜스젠더인 티나 역에 진짜 트랜스젠더를 섭외했다. 일단 아마추어 배우를 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자가 그 역할을 맡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디션을 보니 남자배우들은 다들 클리셰 같은 연기를 하더라. 마치 <개그콘서트>에 나오던 황마담처럼 호들갑스럽고 과장된 느낌으로. 그래서 결국 수소문 끝에 티나를 찾았다. 처음으로 연기한다지만 30년 가까이 무대 생활을 많이 한 덕분인지 끼가 상당했고, 그래서 선택했다.
윤여정 씨와는 <여배우들>, <뒷담화:감독이 미쳤어요>에 이어 세 번째 작업이지만 극영화로 만난 건 처음이다. 지난 두 작품에선 항상 윤여정으로 나왔지만 처음으로 극 안에서 역할을 준 작품인데 특별히 다를 건 없었다. 윤여정이라는 배우가 양미숙이란 이름으로 불리지만 윤여정으로 연기해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처음부터 윤여정 씨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했는데, 그만큼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이 영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로 들린다. 사실 어떤 소재를 떠올리고 어느 배우랑 해야겠다고 생각한 뒤 시나리오를 쓴 건 처음이다. 그만큼 내겐 영감을 주는 부분이 많았다. 윤여정 씨가 평소에 냉소적인 농담을 잘하고 나 역시 그런 농담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농담들이 시나리오에 반영됐는데 그 의미를 물어볼 필요 없이 알아서 다 소화해냈다. 이를 테면 "계산 도와드릴게요"라는 종업원의 말에 "계산해줄 것도 아니면서 도와주긴 뭘 도와줘?"라고 혼잣말을 하는 장면처럼 내가 의도한 뉘앙스를 잘 파악하고 소화해버린다.
어떤 의미에선 윤여정이라는 배우를 통해 익히 예상할 수 있는 바가 있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실 윤여정이라는 배우는 모든 역할을 윤여정스럽게 연기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하는 배우도 있지만 윤여정은 항상 윤여정으로서 소화하는 것 같다. 그런데 <죽여주는 여자>를 하면서 힘들어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가고,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그런 처지에 놓인 이들의 세계를 알게 되고 그런 감정에 이입하게 되면서 우울해하고 힘들어했다. 그 당시 윤여정 씨 어머니께서도 좀 편찮으셨던 것도 본인에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고.
구강성교 신 같은 경우는 배우 입장에서는 고역스러운 촬영이었을 것 같다. 원래 그 장면에서 등장하는 벌거벗은 남자는 시나리오상에서 하의만 벗은 상태로 묘사했는데 막상 현장에서 보니 작위적인 느낌이었다. 그래서 현장에서 남자 배우에게 전신 탈의를 부탁했더니 흔쾌히 응해줬는데 윤여정 씨 입장에선 그런 남자가 눈 앞에 떡 하니 앉아있으니까 당혹스러워했다. 그래서 그 신을 촬영하면서 테이크를 다시 가겠다고 했을 때의 윤여정 씨는 지금까지 봤던 모습 중에 가장 화가 나 보이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그 장면에서의 표정을 보면 정말 질색하는 표정이 현실감 있게 와 닿는데 그게 단순히 연기적인 표현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주사를 놓을 때 주사기에 공기를 빼는 디테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 테이크를 다시 간 뒤, 주사를 놓은 뒤 서비스를 할 때 살짝 위를 올려다봤으면 좋겠다고 다시 한 테이크를 가겠다고 했다가 지금까지 들었던 윤여정 씨의 음성 가운데 가장 강렬한 소리를 들었다. "왜 이걸 다시 해야 하는데!"하면서 비명을 지르는데 정말 이를 가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잔뜩 독기가 올라 있는 상황이라 정말 실제처럼 느껴지는 연기가 나온 것 같다. 개인적으론 정말 미안했지만 결과적으로 감독으로선 '와, 이거 건졌다'라고 생각했다.(웃음)
그런데 소영이 남자에게 놓는 그 주사의 정체는 대체 뭔가? 주사기로 성기의 정맥에 주사를 놔서 발기하게 만드는, 일종의 발기제 같은 건데 할아버지들이 실제로 맞는 거라더라. 실제로 남자 배우의 성기에 붕대를 감아놓고 주사를 가져다 대는 부분에 십자가를 그려놓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자살을 꿈꾸는 사람은 다 남자다. 반대로 소영은 마지막까지 살아서 여생을 마치고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는데 상대적으로 죽음을 갈구하는 남성들에 비해 더 강인해 보이는 인상이다. 실제로 남편이 죽은 여자들보다 부인이 죽은 남자들의 삶이 더 빨리 무너지고 더 일찍 생을 마감한다더라. 아무래도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공감대가 크고 연대의식이 있어서 함께 모여 생활하는데 능하지만 남자들은 자기 부인이 아니면 잘 연대하지도 못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존재가 된다. 생리학적으로도 여자들이 더 오래 산다. 평균 수명도 더 길고.
결말부에 등장하는 죽은 소영의 얼굴에선 종교적인 평온함과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그렇게 얘기하는 분이 많더라. 굉장히 성스럽다고. 그녀가 일종의 천사 같고, 성녀 같고, 보살 같다고. 실제로 중국에서 관음보살은 자비의 신이기도 하지만 창녀들의 신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계사에서 소영이 합장할 때 의도한 게 아니지만 그 뒤로 관음상 벽화가 등장한다. 그리고 홍콩영화제에서 <죽여주는 여자>가 상영될 때 중국어로 변환된 제목이 우리말로 <선녀관음>이었다. 그들이 소영은 관음보살 같은 여자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결말부의 교도소 신 이전에 이태원에서 소영이 연행되는 과정으로 영화를 끝냈다 해도 무리가 없는 느낌인데 그랬다면 영화에 대한 감상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 같다. 시나리오 초고에선 교도소 신이 없었다. 이태원에서 연행되면서 영화가 끝나는 거였지. 그런데 너무 쿨해 보이더라. 남루하게 살던 사람의 인생을 너무 쿨하게 다루는 거 같았고, 내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사족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녀의 유골이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인들과 함께 살아왔지만 원래부터 무연고자였고, 마지막에도 결국 혼자 남게 됐으니까. 그렇게 홀로 밥을 깨작깨작 먹어가며 여생을 살아가다 자연사한 뒤, 세상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만을 남긴 그녀가 태어나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그녀의 죽음을 통해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고 싶었다.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는 개인의 자유와 죽음을 방조한다는 사회적 윤리 사이에서 물음이 남는 셈인데, 어쩌면 답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한 물음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오래 사는 것이 중요했지만 이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잘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대가 됐다. 서구에서는 일찌감치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선택할지에 대한 논의도 시작됐다. 장례식 방식을 넘어서 안락사에 대한 논의까지. 결국 사회가 성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죽음도 논의할 수 있는 문제가 되는데 우리는 아직도 죽음에 대한 논의를 터부시 한다. 미리 수의 해놓는 것은 물론 영정사진 찍어놓는 것마저 불길한 짓으로 취급하고. 결국 의식 있는 사람들이 미리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면서 후손들의 고민을 덜어줄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 물론 어려운 문제다. 죽음 자체는 너무 두려운 일이니까. 사형수들도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 신발을 슬쩍 벗는다고 하더라. 신발을 다시 신을 시간을 벌기 위해서, 몇 초라도 더 살아보려고, 그런 게 생인가 보더라.
고인이 된 백남기 씨가 물대포에 맞아서 의식을 잃었다는 뉴스 장면이 등장하고, 경찰 조사를 피해 조계사에 머물던 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 씨에 관한 플래카드와 경찰들도 영화상에서 목격된다. 시대가 하 수상하다 보니 심상찮게 보이는 측면이 있다. 일단 조계사에서 촬영이 가능한 날짜는 단 하루였는데 그날 경찰들이 대치하는 상황이었고, 우리도 촬영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대로 영화에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백남기 씨 뉴스도 영화의 배경이 되는 날짜가 2015년 11월경이었고, 그 당시 가장 이슈가 된 뉴스를 찾아보니 그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분위기를 가장 명확하게 대변할 수 있는 사건을 선택해서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라는 것이 기록이 될 수도 있고, 타임캡슐이 될 수도 있으니까. 다만 그런 상황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몫인데, 어쨌든 이게 2015년 11월 14일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현실감을 주고 싶었다.
말을 하다 보니 노래를 하게 됐다는 이랑은 그림도 그리고, 연출도
하고, 글도 쓴다. 낭랑한 목소리에 담긴 범상치 않은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오다가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부서졌다. 유쾌했다.
내일 해외에 나간다면서요?
일본에 가요. 앨범이
나오거든요. 1집 <욘욘슨>과 2집 <신의
놀이>가 한꺼번에 9월에 발매돼서 현지 레이블과 디자인
상의하고, 인터뷰도 해요. 여행도 갈 거고요.
<신의 놀이>는 4년만의 신보에요. 초판
1천장이 다 매진됐다던데.
아마 지금 인쇄 중일 거예요.
그런데 CD 대신 다운로드 코드번호만 있더군요.
앨범을 제작한 음반사 ‘소모임’ 대표가 밴드도 하는데 1집 앨범을 내면서 패키지에 공을 많이 들였대요. 그런데 막상 아무도 CD를 안 듣더란 거에요. 그래서 제 신보는 그냥 CD 없이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대요.
음원서비스를 하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
열심히 만든 책이 너무 예쁘니 다들 책을 사서 만져봤으면
하는 마음에 미뤘죠. 음원을 다운 받으면 음반을 사지 않을 테니까 책 자체가 있는지도 모를 거라서.
아무래도 음반보다는 책을 한 권 산 기분이에요.
1집처럼 손 글씨로 가사집을 써볼까 했는데 그러기엔 가사가 길었어요.
그래서 타이핑하고 보니까 글을 더 붙이고 싶어졌고, 가사에 어울리는 글을 구성하다 보니
책처럼 만들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작가인 데이비드 실즈의 양장본 원서와 커트 보네거트의 얇은
에세이를 제시하면서 이런 걸 만들고 싶다고 하니 대표님도 동의하면서 그렇게 결정됐어요.
작곡가들은 악상을 떠올린다고 하는데, 악곡보단 가사가 더욱
중요하게 느껴지는 군요.
원래 악상 같은 걸 떠올릴 수 없는 사람이라(웃음). 항상 일기를 고르는 걸로 노래 만들기를 시작해요. 노래를 처음 부를 땐 음이 거의 없어요. 혼잣말하면서 기타를 치는
식이죠.
구어체 가사의 말맛이 느껴져서 장기하의 여자 버전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반야심경 같기도 하고(웃음). 말 자체에 있는 음악적 리듬이 중요하죠. 노래를 한다기 보단 말을
좀 더 크게 하는 느낌이랄까요? 창법 자체를 생각해본 적도 없고.
처음 음반을 낸 계기가 궁금하네요.
집에서 만든 데모 음원을 싸이월드에 올렸더니 제 친구가
소모임 음반사 대표님께 소개시켜줘서 미팅을 했는데 제 음반을 내고 싶어 했어요. 사실 소속 뮤지션 하나
없는 곳이라 음반을 낼 수 있다는 근거가 없었는데 보는 눈이 있더라고요. 노래에 재미있는 구석이 있지만
이건 웃긴 사람의 노래가 아니라 슬픈 사람의 노래라고. 사실 제가 슬플 때만 음악을 만들었거든요.
<신의 놀이>에선 신과 죽음이란 단어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거 같아요. 마치
자신을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이 느껴지기도 하고.
재수 없게 들릴 수도 있는데 저는 남들 위에 서서 모든
것을 조종하고 싶나 봐요. 심지어 제 자신도 관전하듯 보거든요. 스스로를
이랑이라는 캐릭터로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렇게 이랑이란 캐릭터를 관찰하는 동시에 이랑이란 캐릭터로서
고민도 하고.
1번 트랙인 ‘신의 놀이’에는 ‘어쩌면
난 영화를 만드는 일로 신의 놀이를 하려는 지도 몰라’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감독으로서의 철학이 느껴졌어요.
한예종에서 이창동 감독님의 연출 수업을 들었는데 카메라
앞에서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게 좋은 연출이라며, 그게 신의 연출이라 하셨어요. 결국 감독은 자기 세계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조종해 자연스럽게 조작하는 역할이잖아요. 남보다 위에 올라서 있는 느낌인데 저는 이런 느낌을 즐기는 거 같아요. 이번에
웹드라마 <게임회사 여직원들>을 4회 정도 연출하면서 ‘신브레이크다운’이란 걸 처음 해봤는데 파트별로 20여명의 사람들이 제가 쓴 대본을
두고 둘러앉아 질문하는 거에요. 소품의 형태나 음악 등 준비할 것들을 물어보고 제가 대답만 하면 다들
알아서 준비해요. 배우들은 연기하고, 소품팀은 소품 챙기고, 연출부는 연출과정을 일일이 짚어주고, 촬영팀은 콘티까지 다 짜서
촬영하고, 끝나면 편집기사님이 편집하고, 믹싱기사님이 믹싱하고, 솔직히 제가 할 일은 별로 없어요. 그런데 제 작품으로 나가잖아요. 결국 이 모든 걸 제가 컨트롤하는 셈이니 신기한 위치인 거죠.
웹드라마 <출출한 여자>의 에피소드 연출을 제안했던 윤성호 감독과의 인연으로 <게임회사
여직원들> 연출에도 참여했다던데 윤성호 감독은 어떻게 알게 됐나요?
한예종에 와서 수업을 했어요. 친해질 기회가 생겼죠. 짧은 콩트를 찍는데 도와달라 그래서 대본
외우고 연기한 적도 있었어요. 그러다 제 졸업작품이 재미있다고 칭찬하더니 <출출한 여자>를 같이 하자고 해서 참여했고, <게임회사 여직원들>도 하게 됐죠.
아무래도 주변에서 뭔가를 제안하는 사람이 많은 거 같아요.
사람들에게 많은 걸 보여주고 말해주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지금 이걸 이렇게 할 거야’란 식으로. 조금 더 발전되면 또 얘기하고. 노래 만들기 시작했을 때도 매일
학교 식당 앞에서 불렀어요. 당시에 학교 작업실에서 살 때였는데 방에서 부르면 심심하니까 앰프 갖고
나가서 부른 건데 애들도 좋아해 주니까. 그렇게 공짜로 많이 풀었어요.
7번 트랙인 ‘평범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노래처럼 느껴지는데 그 위로의
대상엔 본인도 들어갈까요?
첫 앨범을 내고 인터뷰를 한 덕분에 몇몇 매체나 브랜드랑
친분이 생기면서 공짜 선물을 받거나 행사에 초대받는 경험을 했는데 그게 무서웠어요. 쉴새 없이 선물을
받고, 매일 같이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멋지고 아름다운 것을 무감각하게 받고, 쓰고, 자랑하면서 그게 이상하다는 걸 잊어버릴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노숙자도 무섭거든요. 표정이 없잖아요. 질문하는 걸 까먹은 사람 같아요. 자기 모습을 잊어버리고, 수치심조차 없어진 사람. 결국 그런 두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남들과의 차이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가 위로하고 싶은 평범한 사람들인 거죠. ‘왜 나는 저렇게 될 수
없지?’라며 누군가와의 차이를 생각한다는 건 최소한 자기 위치에 대한 생각이란 걸 하고 사는 사람이니까,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아서 스스로를 연민하는 그런 마음을 위로하고 싶은 거에요.
자신을 잃어버릴까 봐 두렵나 봐요.
맞아요. 한번은
파티에 초대됐는데 TV에 나오는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게 무섭더라고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이건 언젠가 써먹을 수 있는 장면이라며 스스로를 관전하고 있고(웃음). 어쨌든 그런 걸 즐기다가 그런 기회가 사라졌을 때의 우울감을 예측하니까 정신차리는 거죠. 본연의 모습도 아닌데 본래 갖고 있던 아름다움마저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게 싫어요. 결국 그런 상실감 때문에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처지를 비난하다 자살할 수도 있잖아요.
유명세가 오히려 결핍이 된다면 아이러니하겠네요.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제 친구한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어요. ‘좋아요’ 같은 거 더 받으려고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지금 할만한 일을 하라고. 저는 유명해지고 싶어한다는 그런 마음이 제일 무섭게 느껴져요. 아마 유명한 상태가 되면 유명하다는 느낌조차 무감각해질 거에요. 돌이켜보면
지금이 제일 유명한 때일 수 있잖아요. 가장 유명한 때인데 정작 유명한 걸 즐길 수 없는 거죠.
그런데 ‘평범한 사람’에서
등장하는 멋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조금 유치할 수 있는데 제가 모델 김원중을 좋아하거든요. 김원중 사진을 보다가 김원중은 거울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 생각했어요. 아침에
일어나도 멋있을 거 같고, 자기 전에도 멋있을 거 같고(웃음).
8번 트랙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제목 자체가 비참하면서도
결연하게 들려요. 경험이 반영된 노래일까요?
경험에서 가져온 것도 있죠. 제가 겪은 미움이라던지, 가족이나 죽음에 대한 생각 등 제 경험을
확장한 부분들이죠. 그걸 노래로 하기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져서 생기는 사건은 제대로 설명해도 왜곡되고 가십으로 소비되지만 쓰고 부르는 건 이야기로 불리니까 나한테 생긴 일을 일일이 알진 못해도
그런 정서를 노래함으로써 공유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러니 일일이 설명하고 이해 받는 것보다도
노래를 해서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좋은 일 같아요.
음악적인
평가에 대해서 신경 쓰이진 않나요?
보긴 하지만
솔직히 신경 쓰이진 않아요. 저는 결과보단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는 편이기도 하고요. 책도, 만화도, 대본도
막 끝냈을 때 혼자 기뻐서 울고 난리가 나요.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이 된 거 같아서 셀카도 찍고(웃음). 그런 과정이 결과물을 보는 것보다 재미있어요. 그래서 완성된 곡을 다시 부르는 것도 솔직히 재미가 없어요. 오늘 <게임회사 여직원들>도
마지막화까지 공개됐는데 역시나 그러려니 하게 되더라고요. 아무래도 결과물에 대한 평가도 그래서 신경
쓰이진 않나 봐요. 그나마 <신의 놀이>는 책을 읽으면 노래만 듣는 것보단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도 음악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런 평가가 새로운 동기부여가 되진 않나요?
2년 전부터 지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찍어왔는데 일본에 사는 친구 어머니가 베틀 짜는 모습도 찍었어요. 그리고 며칠 전 뮤직비디오
촬영에서 베틀을 짜는 모습을 마임으로 보여달라고 주문했어요. 다양한 직업군의 행위를 촬영한 것을 바탕으로
무용을 만들었죠. 그래서 베틀을 짜던 친구 어머니에게 그 뮤직비디오를 빨리 보여주고 싶어요. 덕분에 이런 걸 만들었다고. 그럼 기뻐하실 거 같거든요. 그런 게 제겐 재미있는 일이에요. 수만 명이 ‘좋아요’를 눌러주는 것보다도.
(ELLE KOREA SEPTEMBER 2016 NO.287 'ELLE INTERVIEW')
김지운 감독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을 다룬 영화를 연출한다고 했을 때 조금은 의아했고, 한편으론 궁금했다. 솔직히 말하면 김지운 감독이 아픈 역사를 헤집으며 뜨거운 공분을 부를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냉정하게 마음을 식히고 바라볼 수만은 없을 듯한 시대를 관통한다는 점에서 김지운 감독의 작품 가운데 이례적인 한 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문득 궁금했다. 그리고 <밀정>이 공개됐다. 아마 <밀정>은 김지운 감독의 영화 가운데 가장 뜨거운 온도로 자신을 내던지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일 것이다. 어쩌면 <밀정>은 김지운 감독의 영화 가운데 가장 다단하고 모호한 심리를 품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일 것이다. 섞이지 않는 냉기와 온기가 등을 맞대고 한 몸을 이룬 듯한, <밀정>은 그런 영화다.
개봉 첫 주에만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압도적인 흥행세인데 아무래도 대자본이 투자된 작품이니 흥행에 대한 부담이 없지 않았을 것 같다. 뭔가를 과시하고자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닌 이상, 투자된 자본을 회수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든 감독이 된다는 건 중요하다. 물론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겠다는 욕심으로 영화를 만든 것도 아니지만 차기작을 연출할 기회를 이어나갈 수 있을 정도로 최소한의 상업적 성과는 거두길 바란다. 상업영화 감독으로서의 자격을 인정 받기 위해선 대중과의 접점을 계속 증명해야 하니까. 그리고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나 배우들의 헌신과 열정을 봐온 입장에선 그들에게도 성과로 여겨질 만한 결과를 책임지는 감독이 되고 싶다. 결국 상업적인 성공이 그들을 위한 보상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어느 정도 흥행을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3년 전의 인터뷰에서 "항상 지금의 모순이나 괴로움에 대한 반대급부가 차기작에 대한 욕망으로 연결된다"라고 말했다. <밀정> 또한 그런 과정을 거쳐 나온 또 하나의 결과물일 텐데. 전작의 모순과 욕망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현재의 작품을 만들고 있지만 언제나 현재의 작품에서도 여전히 진전되지 못한 부분들이 보인다. 다만 영화에 대해 설명하다 보면 해명의 강도가 높아지니 해당 작품이 완전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보이고, 아직도 도달해야 할 목표가 있다는 걸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다. 항상 아직 대표작이 없다고 말해왔는데 <밀정> 역시 대표작은 아닌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한 거 아닌가?(웃음) 쉽게 얘기해서 내 역량이 내 눈높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차이를 보는 게 생각보다 괴롭다. 그래서 내 영화를 편하게 보기도 힘들다. 결국 내 역량과 내 눈높이의 차이를 최대한 좁혀나가고 일치시켜서 내 영화를 남의 영화처럼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경지까지만 갈 수 있다면 영화를 만든 의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밀정>의 장르가 '콜드 누아르'라고 직접 언급했는데 '누아르'라는 장르명을 '콜드'라는 단어로 수식하는 의도가 보다 중요해 보인다. 일단 비정하고 냉혹한 스파이들의 세계를 바탕에 둔 영화라는 점에서 '콜드'라는 단어의 온도가 적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누아르 세계관 특유의 명암에는 뜨거움과 차가움이 공존하고 있다고 보는데 <밀정>은 보다 차갑게 느껴지는 누아르이길 바랬다. 그래서 의상을 비롯한 전반적인 미장센에 블랙이나 블루 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차가운 정서를 담아내고 싶었다. 인물의 감정을 최대한 감추거나 눌렀기 때문에 영화의 감정 또한 차갑게 느껴질 거라 생각한다. 다만 의열단이라는 역사적 실체를 서사에 옮기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뜨거움이 발생하더라.
<밀정>은 <악마를 보았다> 이후로 각본가가 아닌 각색가로 이름을 올린 두 번째 작품이다. 시나리오를 읽고 영화화를 결심한 까닭이 궁금하다.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땐 의열단을 중심으로 읽게 됐다. 그래서 <암살>에 가까운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스파이물의 느낌이 보다 강한 정도? 그런데 두 번째로 읽었을 때 이정출(송강호)이 크게 들어왔다. 그래서 <암살>의 동어반복이 아닌, 새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정출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나? 이정출은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이라는, 이미 정체성부터 복잡한 인물이다. 그 시대의 모순이 집약된 인물이라 느꼈고, 이정출을 이야기하는 건 결국 그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이란 확신이 생겼다. 사실 이정출의 심경 변화가 개연성이 없다는 평을 보기도 했는데 생각해 보면 그 인물 자체가 시대적 모순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회색주의자 특유의 모호함이 개연성 없게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입장에선 대사나 상황을 비롯한 플롯으로 이정출의 선택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황옥 경부 폭탄사건'이라는 실제 역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지만 실존인물이 언급되거나 등장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팩션이라 할 수 있지만 허구라 해도 상관 없을 만한 이야기다. 의열단은 3.1 운동 이후인 1919년도에 창립됐고, 1920년 초반에는 가장 전위적인 활동을 펼쳤지만 중반부터 세력이 약화됐다. 일제가 무서워했던 단체였던 만큼 집중적으로 와해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밀정>은 1923년도를 배경에 두고 있지만 정확한 시간 연대에 일치시켜 영화를 만들면 영화적 소재가 무력해질 수 있기 때문에 1920년대의 시대적 배경을 큰 덩어리 삼아 시간을 해체하고 재조합했다. 그래서 사실 각색 과정에서 "와해된 의열단을 재조직하는 걸 보면 정채산(이병헌)이 대단한 인물이다"라는 히가시(츠루미 신고)가의 대사가 있었는데 꼭 필요할 거 같진 않아서 삭제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이정출이 김장옥(박희순)에게 자수를 권유할 때 그가 공적을 쌓기 위해 회유한다기보단 진심을 다해 살아남으라고 호소하는 인상이라 이정출의 진짜 감정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진심인 거 같지만 그것이 김장옥의 편에 선 진심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된 친구를 적으로 만나 눈 앞에서 자결하는 모습을 본 뒤 그의 인명부를 들여다 보는 이정출의 표정에선 복잡한 감정이 읽힌다. 그것만으로도 이정출의 감정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이 됐다고 생각했고, 거기서부터 이정출의 내면에 겹겹이 쌓인 층위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히가시를 통해서 김장옥과의 친구 관계가 환기되고, 의열단에 침투하기 위해 김우진(공유)에게 접근했는데 거기서도 김장옥 이야기가 나온다. 결국 이정출이 의열단을 돕게 되는 건 자신을 둘러싼 상황의 모순과 혼란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빚'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회색주의자로서의 경계는 여전한 거다. 그러니까 생존에 대한 철학을 진심으로 피력하지만 결국 변절자의 회유일 수밖에 없는, 이중성에 갇히는 셈이다. 결국 윤리적인 관점에서 이정출을 보자면 그가 면죄부를 받을 만한 인물은 아닌 것 같다.
이정출은 결국 의열단의 조력자 노릇을 한다. 하지만 그가 김우진을 비롯한 의열단원처럼 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극 초반에 이정출은 김장옥에게 "너는 이 나라가 독립될 거 같냐?"고 묻는다. 그리고 극 말미에 김황섭(남문철)에게 "이 나라가 독립될 거 같소?"라고 묻는다. 결국 이정출은 끝까지 회색주의자로, 허무주의자로 남아있는 거다. 그는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는 길을 선택한 게 아니다. 다만 자신의 감정을 변화시킨 사람과의 약속을 완수하는 것뿐이지. 어떤 경험을 통해 마음을 편하게 둘 수 있는 쪽을 선택했고, 어느 역사에 이름을 올릴지 결정한 거다. 그렇게 정채산의 말처럼 '마음이 움직이는 게 가장 무서운 것'이 된다. 결과적으로 이는 자신의 감정에 손상을 입힌 히가시에 대한 복수극이기도 하다. 그래서 폭탄을 터트리는 장면에서 제의적인 의미를 지닌 음악인 'Bolero'를 사용했다. 대의적인 임무를 수행한다기보단 스스로를 위해 축배를 드는 이정출의 심리를 음악으로서 설명해주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우진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의 단호한 신념이 두드러지는 것 같다. 덕분에 그들의 희생이 상대적으로 숭고해지는 인상이기도 하고. 사실 희망은 누구나 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를 내던져서 희망을 찾고 세상을 전진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은 아무나 할 수 없다. 나 자신부터 조국을 되찾겠다고 목숨을 던지고, 모진 고문을 견딜 자신이 있는지 모르겠더라. 결국 뒤늦게야 이 사람들이 굉장한 로맨티스트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들이 선택한 것에 스스로까지 내던질 수 있는 불나방인 거다. 그러니 결국 뜨거운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밀정>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아무래도 이정출과 김우진과 정채산의 삼자대면 신이었다. 적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란 게 진심을 바탕에 둔 호소라는 점은 어떤 의미로는 너무 뜻밖이라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정채산이 김우진과 이정출의 이야기를 몰래 귀담아 듣다가 이정출을 사람으로서 만나는 게 가장 좋은 전략이라 판단한 셈이다. 그리고 술은 남자들의 세계를 잇는 최선의 매개니까 자연스럽게 선택한 것이다. 그런 선택을 본 관객 입장에선 정채산이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존재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 내가 신뢰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관객을 설득시킬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송강호와 이병헌의 카리스마와 그 사이에서 무너지지 않는 공유의 존재감이 삼위일체를 이루니 인물들의 관계 변화가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했다.
동시에 긴장감이 폭발할 법한 상황에서 오히려 가장 극적인 유머가 발생한다는 점에서도 탁월하다. 처음으로 이정출을 의열단 쪽으로 기울게 만드는 신이란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굉장히 과감한 연출 방식을 선택했다고 평할 수 있다. 그 신의 목표는 세 사람 사이에 형성된 냉기가 급속도로 해빙되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고도의 수싸움을 펼치는 장면이란 점을 이해시키고 그런 관계를 설득력 있게 납득시켜야 하지만 논리적인 방식으로 보단 직관적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아이러니한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하고 세 사람이 자리한 그 공간이 따뜻하게 느껴지길 바랐다.
이병헌은 특별출연으로 이름을 올렸음에도 두 주연배우 못지 않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실 <밀정>에서 마지막에 캐스팅된 배우가 이병헌이었다. 심지어 상해에서 촬영을 시작했을 때까지도 캐스팅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웃음) 불안하지 않았나? 굉장히 불안했다. 그래도 믿음이 있어서 기다렸는데 결국 그 믿음이 중요했던 것 같다. 정채산도 결국 이정출을 믿어서 성공하지 않았나.(웃음) 나 역시 믿고 기다린 덕분에 그 효력을 봤다.
하시모토(엄태구)가 처음 등장해 일본어로 말을 할 땐 당연히 일본인 경찰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정출과 조선말로 대사를 하는 걸 보고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인지 궁금해졌다. 사실 영화상에서 이 부분을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사실 편집 과정에서 히가시와 하시모토의 대화 장면이 하나 삭제됐다. 히가시가 하시모토에게 이정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면서 "아, 자네도 조선인 출신이지?"라고 긁으니까 하시모토가 자신의 출신성분을 부정하는 답변을 하는 장면이었다. 자신이 의주 출신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일본에서 살았고, 자신은 완벽한 일본인이라는 식으로. 아무래도 그 장면이 삭제돼서 그의 출신 성분을 명확히 대변하는 신이 사라진 셈이다.
하시모토의 출신 성분을 아는 게 꼭 중요한 건 아니다. 다만 그가 조선인 출신의 일본 경찰이라면 상대적으로 동일한 신분인 이정출이 친일파로서 정체성조차 얼마나 얕은가를 대비적으로 드러내는 역할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하시모토를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로 설정했다. 같은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임에도 성질이 다르고, 세대가 다르고, 의지와 신념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게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차이가 이정출을 밀어내는 동력으로 작동되기도 한다.
하시모토 역을 맡은 배우 엄태구는 <밀정>의 발견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주로 과묵한 역할을 맡아온 배우였는데 <밀정>에서의 하시모토는 대사량이 상당한 캐릭터다. 그래서 그를 캐스팅한 배경이 궁금했다. 사실 엄태구는 내가 생각했던 하시모토의 이미지에 가까운 배우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봤을 때 나를 전율시키는 에너지가 있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 온전한 기운 덩어리처럼 느껴졌다고 할까. 그런 기운이 하시모토에게 더 적합해 보여서 결국 엄태구를 선택했다. 그런데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이 있더라. 한번은 촬영장 스튜디오 구석에서 감정에 몰입하면서 의식을 치르듯이 혼자 대사를 하는 모습을 멀리서 본 적이 있는데 진짜 배우를 만난 기분이었다.
엄태구를 만나기 이전에 구상했던 하시모토는 어떤 이미지였을까? 건장한 육체와 말끔한 인상을 가진 인물을 떠올렸는데 기존 배우로 예를 들자면 주지훈 같은 이미지였다. 상대적으로 엄태구는 마르고 빈약한 느낌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기이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예상하기 힘든 악질의 느낌이랄까. 그러다 보니 내가 연상했던 기존의 이미지는 너무 전형적인 것 아니었나 싶기도 하더라.
<밀정>은 배우 송강호와 함께한 네 번째 영화다. 연출 데뷔작인 <조용한 가족>과 두 번째 연출작인 <반칙왕>에 출연했다는 점에서 감독 김지운과 배우 송강호는 함께 성장한 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아무래도 한국영화가 활발해질 무렵에 함께 머리가 컸으니까. 사실 내가 연출한 전작들을 자주 보진 않지만 간혹 볼 기회가 생기면 저럴 때도 있었구나 싶긴 하다. 아무래도 그때는 눈높이와 역량의 차이가 더욱 컸기 때문에 훨씬 더 절망적이었을 거다.(웃음)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송강호라는 배우는 일관성 있는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항상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결 같다. 프로로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지민이 연기한 연계순은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제 역량을 가장 잘 드러낸 여자 캐릭터란 점에서 특별해 보인다. <밀정>은 기본적으로 두 남자의 이야기이고, 어쩌면 한 남자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연계순은 두 남자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역할로 봤다. 처음에는 신인 배우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시나리오가 확장되면서 신뢰감을 줄만한 배우가 필요했다. 개인적으로 <밀정>에서 압권이라 여기는 부분은 연계순의 기차역 액션 신이다. 기차역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연계순을 중심으로 흩어지는 모습에서 고립감과 외로움이 전해지지만 흔들리지 않는 위엄이 느껴지는 동시에 맵시도 산다. 결국 그 장면에서의 연계순이 의열단 그 자체를 보여준다. 내겐 더없이 만족스러운 장면이다.
한편으로는 여성 캐릭터로서 대상화되고 있다는 인상이 남기도 했다. 사실 뒤늦게 반성한 지점이 있다. 기차에서 하시모토를 발견한 연계순이 옷을 풀어헤쳐 가슴골을 드러내고 담배를 피우는 건 약국에서 하시모토를 마주쳤을 때의 단정한 차림새와 정반대의 분위기를 연출해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다. 일종의 장르적 클리셰인데 뒤늦게 그것이 여성 캐릭터에 대한 고정관념에 갇힌 설정이라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서 너무 성찰 없는 인용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반성하게 됐다.
<밀정>의 의열단 단원들은 자기 신념을 뜨겁게 발화하고 웅변하는 인물들이다. 사실 지금까지 연출한 작품들의 인물들은 명확한 신념을 따르는 인물들이라기보단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행동 방침을 정하는 인물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밀정>은 김지운이라는 감독의 영화 안에서 새로운 태도를 발견하게 된 작품이기도 했다. 사실 <밀정> 이전까지 내가 영화를 대하던 태도는 '세상이 이렇게 흉측하고 힘들고 어두운데 뭐가 저렇게 밝고 즐겁니?'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현실이 영화보다 더 어둡고, 끔찍하다 보니 영화에서까지 실패한 역사를 말하고 다루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다루는 인물의 태도까지 크게 바뀌는 건 아니지만 실패한 역사라 해도 그걸 딛고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 <밀정>과 관련은 없지만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을 겪게 되는 현실이니까. 어떤 식으로든 전진해 왔다고 믿었던 세대로서 처음으로 시대가 퇴보한다는 기분을 느꼈을 때의 충격이 내게도 있었던 것 같다.
클로즈업 신이 상당히 많다. 인물들의 얼굴과 표정이 <밀정>의 주요한 미장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아무래도 표정의 서사로 읽혀지길 바란 영화였던 만큼 인물을 타이트하게 촬영한 신들이 많다. 인물의 표정을 통해 극의 무드가 전달되지 않으면 서사도 무너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작은 모니터로 볼 때는 완급조절이 잘 되고 있는 건지 판단하기 힘들어서 후반작업으로 사이즈를 조절할 수 있도록 카메라를 좀 더 뒤로 빼서 거리를 두고 찍기도 했다. 그래서 편집과정에서 컷의 사이즈를 조절해 표정을 좀 더 채운 부분들도 있다. 다행히도 배우들의 표정이 좋아서 의도를 잘 살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일본경찰에 의해 의열단원들이 하나씩 척살당하는 신이야말로 <밀정>에서 가장 뜨겁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인데 그 순간에 루이 암스트롱의 넘버 'When You're Smiling'이 흐르면서 찬물을 쫙 끼얹듯 감정의 온도를 확 가라앉히는 느낌이었다. 극후반부의 'Bolero' 역시 극적인 상황과 역설적인 감상을 준다는 점에서 유사한 장치적 역할을 하는 느낌이고. 일종의 온도 조절기 같은 역할이었다. 사실 영화를 만들 때마다 사진과 음악에서 많은 도움을 받는 편인데 루이 암스트롱의 넘버 'When You're Smiling'을 비롯해 <밀정>에서 등장하는 음악들은 모두 영화를 제작하면서 수집했던 플레이리스트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그리고 모두 다 비슷한 시기에 유행한 음악들이었다. 슬라브 무곡은 1900년도에 유행하던 음악이었고, 'Bolero'도 1920년대 초에 발표됐고, 스윙재즈도 1920년대 중후반에 등장해 193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감미로운 스윙재즈 넘버가 동시대 지구 반대편에서 식민지배를 받는 이들에겐 향유할 수 없는 박탈감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그래서 의열단이 척살당하는 신에 루이 암스트롱의 넘버를 얹었을 때 비극성이 더욱 명징해진다고 느껴졌다. 이정출의 고문 신에서부터 넘버가 흐르기 시작해 경성에 잠입한 의열단이 소탕되는 과정으로 이어지는데 만약 그 넘버가 없었다면 감정이 넘쳐서 신파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을 거다.
대부분의 스코어 넘버들은 짧고 간결한 음을 초시계처럼 빠르고 일정하게 반복함으로써 서서히 긴장감을 조성한다. 반면 컷의 호흡에는 대체로 여유가 있어서 컷 전환의 속도는 스코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긋한 인상이라 역설적이란 느낌을 받았다. 컷의 긴박감보단 공기의 긴박감을 통해 감상을 조여보고 싶었다. 그래서 배우들에게도 '스몰 액팅'을 요구했는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도록 다른 속셈을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표정을 주문했다. 그리고 마주앉은 상대방이 모르게 타인의 시선을 포착하고 은밀하게 눈빛을 주고 받는 시선 처리 등을 보여주기 위해 컷의 호흡을 최대한 안배했다. 대신 음악을 통해 긴장감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음에 가까운 사운드를 내는 성질의 악기들을 활용한, 인더스트리얼한 음악을 만들고자 했다. 외부에서 유입된 소음이 오히려 집중력을 높여주듯이, 그런 성질의 음악이 영화적 상황을 보다 몰입하도록 만들 테니까.
타이틀 시퀀스와 극의 최후반부를 제외하면 페이드 아웃을 통해 신을 전환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특히 디졸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신을 전환할 때조차 프레임 공백을 없애고자 애쓴 느낌마저 든다. 전통적으로 디졸브를 활용할 땐 이전 신의 긴장감을 해소하고 다음 신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밀정>에서는 앞선 신의 긴장감을 다음 신까지 끌고 가고 싶었다. 그래서 옵티컬 디졸브보다 CG 디졸브를 많이 썼다. 예를 들면 김우진의 얼굴에서 정채산의 뒷모습으로 카메라가 패닝할 때 그 위로 이정출이 탄 기차 이미지가 밀고 들어오고, 이정출이 하시모토와 하일수가 나간 방 안의 창문으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상념에 잠길 때 그 뒤로 자동차 불빛이 쭉 들어온다. 이게 다 CG로 작업한 디졸브인데 이렇게 그림들이 매끄럽게 이어지면서 긴장감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고전적인 느낌을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구현했다는 성취감도 있었다.
열차 신은 <밀정>에서 최상의 스펙터클과 최고조의 긴장감을 제공하는 신이다. 그런데 원래 시나리오에선 없는 장면이었다고 들었다. 각색 전 시나리오에서의 열차는 상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싣고 가는 운송수단에 불과하다. 의열단원들은 압록강을 건넌 뒤 열차에서 내려 기생으로 변장해 인력거로 옮겨 탄다. 신의주의 부유층들이 기생들을 불러 연회를 열곤 해서 기생으로 변장하면 검문을 통과하는 게 용이했다고 한다. 실제로 독립단체가 국내에 잠입할 때 활용한 방식이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그 지점에서 영화적 긴장감이 뚝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열차를 운송수단 이상의 극적인 무대로 만들고 싶었고 각색을 통해 지금의 열차 신을 만들었다.
비좁은 열차의 제한된 동선을 통해 극적인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비좁은 공간에서 전개되는 신을 설계하는 걸 좋아한다. 내가 잘하는 부분 중 하나라 생각하기도 하고. 그래서 인물의 동선이 제한되는 열차에 모든 상황을 때려 부어서 두 인물의 감정선을 극대화시켰다. 김우진과 이정출을 부조리한 상황으로 끊임없이 몰아붙이고 예상치 못한 결과로 내달리는 열차가 예측하기 힘든 시대성을 대변하는 공간이란 인상을 주고 싶었다. 사실상 영화의 하이라이트도, 주제도 다 거기 있다. 그 모든 것을 부어 넣고 가열시켜서 끓는 점이 됐을 때 튀어나오는 인물들의 형태를 통해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열차 신으로 촬영된 분량은 40여분이지만 신의 절반 정도를 편집해 지금의 분량이 남았다.
그렇다면 감독판을 추가 개봉해도 좋겠다. 그러기엔 편집할 시간이 없다. 너무 오랫동안 <인랑>을 미뤄왔는데 이젠 정말 빨리 해야만 한다.
오래 전부터 연출작으로 언급됐던 <인랑>이 드디어 <밀정>의 차기작으로 언급되고 있다. 사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영화화하는 건 처음일 텐데 워낙 유명한 원작이니 부담될 것 같다. 그래서인지 너무 안 풀려서 힘들다.(웃음) <인랑>은 일본의 '전공투' 세대가 공유한 허무주의적인 정서로 점철된 세계관이라 원작의 무드를 최대한 살려서 영화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원작을 대변하는 주요한 요소들만 남기고 완전히 뒤집어볼까 고민 중이다.
<인랑>에서 보존하고자 하는 주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강화복의 형태나 인랑이라는 비밀 스파이들의 암투 그리고 짐승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대성 같은 것이다. 정말 뻔뻔하게 이것만 가지고 가볼까라는 고민도 있다. 사실 너무 오래 끌어온 프로젝트인데 이젠 정말 해야 한다. 지금 생각으론 내년 3~4월쯤 크랭크인에 들어갈 것 같다.
<덕혜옹주>라는 제목과 허진호라는 이름을 한 줄에 넣고 보니 어딘가 낯설다는 기분이 느껴졌다. 멜로라는 장르의 브랜드처럼 여겨지던 그가 롤타이틀 영화를, 실화를 바탕에 둔 시대극을, 그리고 멜로가 아닌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다. <덕혜옹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허진호 감독에게 '처음'이라는 단어를 매단 물음표를 던지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는 긴 시절의 고민을 건너온 영화에 복잡하게 얽혀 있던 사연을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행복>(2007) 이후로 중국에서 <호우시절>(2009)과 <위험한 관계>(2012)을 만든 이후 다시 국내로 돌아와 4년 만에 <덕혜옹주>를 발표했다. 오랜만에 한국영화를 촬영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특별한 소회가 있었을까?
디지털로 찍은 건 <덕혜옹주>가 처음이다. 중국에서 <위험한 관계>를 촬영할 때만 해도 대작은 필름으로 찍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 당시에도 디지털은 경험해보지 못했다. 현장에서 나름대로 적응하긴 했지만 확실히 낯설었다. 그리고 항상 현장은 낯설게 느껴진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프닝 시퀀스에선 정통사극 톤인데, 타이틀 시퀀스 이후부터 일본을 배경으로 근대화된 이미지가 펼쳐지니 전후가 분리된 영화처럼 보인다. 사실 사극 톤에서 최대한 벗어나려 했는데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공간성의 차이가 두드러지니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말투나, 복장도 그렇고.
솔직히 <덕혜옹주>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허진호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라 자꾸 감독 이름을 까먹게 되는 것 같았다. (웃음) 롤타이틀 영화는 처음인데 그만큼 인물 자체에 중점을 둔 작품이 처음이란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덕혜옹주라는 인물에게 끌린 이유가 궁금하다. 7~8년 전쯤에 TV에서 덕혜옹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그때 마음이 움직였다. 영국 황실에서 공주가 태어나면 전세계가 주목하듯이 그 당시 덕혜옹주를 둘러싼 분위기도 그랬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에 낳은 딸이라 어렸을 때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인지라 조선의 희망이고, 보물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였다. 그 시절의 아이돌 같은 존재였다고 할까. 마치 아이돌 스타에 관한 사생활을 다룬 기사가 나오듯이 덕혜옹주의 일거수일투족에 관한 기사도 많이 실렸다고 한다. 굉장히 암울한 시대였지만 큰 사랑을 받고 자란 만큼 쾌활하고 밝은 성격이었다는데 아버지인 고종이 독살을 당했다는 설을 믿으며 충격을 받았고, 열네 살의 나이에 일본으로 끌려간 뒤로 급격하게 어두워졌다고 한다. 결국 타국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전해 듣고, 강제로 결혼도 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이혼당하고, 딸까지 자살하고, 정말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영화화를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정적인 이유는? 다큐멘터리에서 덕혜옹주가 37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광경이 나왔는데 '아기씨'라 부르며 덕혜옹주를 마중하는 상궁들의 모습이 깊게 각인됐다. 당시 50대 중반에 다다르는 할머니가 된 상궁들이 과거 궁에서 입던 옷을 차려 입고 덕혜옹주에게 절을 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다.
그 장면이 특별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내가 다시 만난다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거 같다. 나도 잘 몰랐는데 지금까지 만든 영화들을 보면 어떤 식으로든 결국 다시 만나거나 만나기 위해 찾아가는 과정이 등장한다. 결국 <덕혜옹주>를 통해 세월을 두고 다시 만나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 같다.
결국 영화를 만들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제작비가 많이 들 수밖에 없는 영화였는데 영화화하기 힘든 소재라는 반대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후에 <덕혜옹주>라는 소설이 나와서 읽어봤더니 (김)장한이랑 복순이라는 캐릭터를 극화시켜서 픽션을 만들었더라. 그리고 덕혜옹주의 내면을 많이 투영했다. 그리고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출판계에서도 이례적인 사건이라 했다. 아무래도 주류소설이 아니었으니까. 당시에 화제를 모은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을 죽이기 위해 삼성에서 사재기를 했다는 루머까지 돌 정도였다. 어쨌든 소설이 인기를 얻는 것을 보고 이 정도까진 각색을 해도 되겠다고 판단했다.
영화화를 반대하는 의견은 대체로 어떤 것이었을까? 아무래도 덕혜옹주가 잘 알려진 위인도 아니고,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로 여겨질 만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결국 우울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데다가 여자 주인공이라 투자자들에게 강한 물음표가 생겼던 거 같고, 그런 물음표를 지우는 게 쉽진 않았다.
연출작 가운데 첫 번째 12세 관람가 영화다. 그런가? <8월의 크리스마스>가 12세 관람가 아니었나?
아니더라. 아무래도 그 당시에 일부러 15세 관람가로 넘겼나 보다. (웃음)
아무래도 이 작품이 멜로물이 아니란 것도 12세 관람가란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아무래도 수위 높은 애정신 자체가 등장할 가능성 자체가 없으니까. 그런데 사실 멜로로 발전시킬 수 있는 요소가 많은 소재였던 것 같은데 자제한 인상이었다. 사실 멜로로서의 가능성이 다분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고민하긴 했다. (김)장한이 일본에서 덕혜옹주를 데려오는 이유가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이라고 초점을 맞추면 멜로가 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런 바탕의 시나리오도 있었다. 그런데 덕혜옹주를 데려오는 이유가 그렇게 보여선 안될 거라 생각했다. 아무래도 장한이 지닐 법한 역사적인 책임감을 존중하고 관객도 그런 책임감을 크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멜로로 받아들일 만한 부분은 최대한 줄이고, 촬영이 끝난 뒤에도 멜로처럼 느껴질 만한 부분은 걷어내 버렸다.
멜로가 돼선 안 된다고 생각한 이유는? 지키고 싶은 선이 있었다. 덕혜옹주를 극화시키는 정당성이라고 할까. 멜로로 가져간다면 그 선을 넘어갈 것 같았다. 지나치게 극화된 느낌도 들고. 사실 박해일이 한번은 덕혜옹주와 김장한이 동침을 해야 말이 되는 게 아니냐고, 그래야 정한이 덕혜옹주를 한국에 데려오려고 애쓰는 걸 납득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이 함께 겪었던 고난만으로도 충분히 재회를 꿈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덕혜옹주가 해방된 지 17년이 지난 1962년에 귀국한 것이니 37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건데 이건 결국 민족적인 자존심의 문제에 가깝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니 김장한에겐 덕혜옹주를 데려와야 할 이유가 충분했던 거다.
김장한은 실존인물이었지만 영화 속 김장한과는 거리가 있다. 영화 속의 김장한은 소설에서 가져온 인물이긴 했지만 실제로 그는 고종이 덕혜옹주와 결혼을 시키려고 했던 남자이기도 했다. 고종이 덕혜옹주의 짝을 빨리 점지해주고 싶어했다는데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면서 백지화된 셈이다. 그런데 덕혜옹주와 결혼을 시키려 했던 김장한에겐 김을한이란 형이 있었는데 신문기자였고, 김을한의 아내가 덕혜옹주와 학교 동창이었다고 한다. 결국 지금의 김장한을 완성하기 위해 그의 주변인물들을 끌어온 부분들이 있었다.
사실 실화를 바탕에 둔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도 처음이다. 소설을 허구의 축으로 삼아 이야기를 각색하는 것만큼이나 사실에 대한 고증 문제도 중요했을 거 같다. 사실 김장한이란 인물을 언급한다는 건 실화에 기반을 둔 부분이지만 그가 정혼자로서 덕혜옹주를 찾아간다는 건 소설에서 빌려온, 명백한 허구다. 그리고 영친왕의 망명 사건을 다룬 부분은 완벽한 허구인데 실제 역사에선 영친왕과 관련된 극적인 망명 사건은 없었지만 그도 망명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임시정부에선 영친왕이 상해를 여행 중일 때 망명을 권했다는데 영화에서처럼 폭파 작전과 연계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영화 속 시대가 이봉창 열사가 일왕 암살을 시도했던 시기와 맞물리기도 해서 덧붙여 각색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친왕의 망명 시도는 실제로 어땠는지 궁금하다. 영친왕이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망할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갖고 있었던 거 같다. 아무래도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을 텐데 영친왕도 고위직에 속하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영친왕이 망명을 고민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다. 그런데 당시 영친왕의 상해 여행 시점에 맞춰 망명을 도모했던 상해임시정부에선 영친왕이 일본인 아내와 이혼하길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영친왕은 일본인 아내를 데려가길 원했고 결국 망명을 거부했다고 하더라.
영화상에서 영친왕의 이미지는 유약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 영친왕이란 인물은 열한 살에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실제로 일본사람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를 양아버지로 생각하고 따를 정도였고, 그의 제사에도 참석했다고 하니까. 그런데 영친왕의 처인 이방자 여사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럼에도 영친왕 스스로가 조선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마지막 인간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친일을 했다기 보단 한 나라의 왕으로서 독립 이후의 국가에 대한 생각이 조금이나마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영화상에서 그린 망명 작전 신은 나름대로 개연성이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덕혜옹주는 영친왕에 비해 강인하게 묘사된 거 같다. 아무래도 영화와 실화 사이의 줄다리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덕혜옹주가 일본에서 강제 노역 중인 조선인들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도 극화된 장면인데 사실 친일을 옹호하는 버전의 신도 촬영했었다. 한택수(윤제문)에게서 어머니인 양귀인(박주미)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친일 연설을 하면 조선으로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제안한 뒤 덕혜옹주가 친일 연설을 하고 나니 한택수가 그제서야 사실 어머니가 죽었다고 전하는 시퀀스도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의 결과를 선택한 걸까? 최소한 덕혜옹주에게 그 정도는 해주고 싶었다. 사실 영화상에서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나. 그래서 '어쩌면 한 번쯤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됐고 그런 장면을 연출했다. 아무래도 영화를 찍는 동안 극화된 인물이나 장면의 정당성과 개연성을 잘 설득하고 있는지 걱정이 많았다. 아무래도 잘못하면 왜곡시켜버린 것으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경계를 살피는 과정이 힘들었다.
모든 연출작을 통틀어서 액션신을 볼 수 있는 첫 작품이기도 하다. <아저씨>와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촬영감독인 이태윤이 <덕혜옹주>의 촬영감독을 맡았는데 내가 <외출>을 찍을 당시 촬영감독 조수였던 인연이 있었다. 아무래도 액션 연출에서는 기술적인 면이 중요한데 솔직히 이번 촬영을 통해 촬영감독과 미술감독에게 많이 배웠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말이 되느냐'의 문제인데 액션 신에선 말이 안 된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때가 있더라.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음,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긴 한데.(웃음) 예를 들어 김장한이 배에 총을 맞고도 나중에 막 뛰어다니는데 '총을 맞았는데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지?'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웃음) 아무래도 그런 부분을 그냥 넘어갈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만약 '저거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말이 안 되는 거니까. 그리고 한택수가 배 위에서 총을 쏘는데 '어떻게 저렇게 잘 맞출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웃음) 아무튼 말이 되는 기준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 납득하는 게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다.
정상훈이나 라미란처럼 희극에 능한 배우들 덕분에 코미디물로서의 인상도 종종 느껴지는데 과거 인터뷰에서 코미디를 연출해 보고 싶단 말을 한 적이 있더라. 사실 웃음만큼 확실한 반응은 없다. 내가 영화를 재미있게 찍은 거 같다는 확신을 주는 반응이란.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 만든 모든 작품에 웃음을 주는 요소가 있었던 거 같은데, 그만큼 어떤 상황에서든 영화에 유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외출>로 함께했던 손예진과 11년 만에 재회했다. 그녀에게 예민하고 치열한 캐릭터를 입혀보고 싶단 생각을 했던 이유가 있었을까? <외출>을 촬영할 때 감정에 깊게 빠져들어야 하는 신이 더러 있었는데 그때 힘이 있는 배우라고 느꼈다. 그런데 이번 작업을 통해 더욱 놀랍게 다가왔다. 집중력이라 할 수도 있고, 몰입도라고 할 수도 있는데 연기적으로 강한 힘이 있는 배우라는 걸 알았다. 정말 그 인물이 돼버리는 순간이 있었다. 그래서 촬영장에서 실제로 신기가 있는 거 같다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덕혜옹주가 고국에 돌아가려다 실패하고 항구에 드러누워 미쳐버리는 장면을 찍을 때가 새벽이었고 굉장히 피곤한 순간이었다. '몹 신(Mob scene)'인데다가 촬영 여건도 좋지 않았고 당시 촬영을 강행하던 시점이라 배우 본인을 비롯해 스태프들도 굉장히 피곤한 상황이었는데 그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서 연기적인 집중력을 보여주니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덕혜옹주가 감정의 파고를 형성하는 역할이라면 김장한은 그 파고를 담고 견디는 둑 같은 느낌이다. 감독으로서 손예진이란 배우에게선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었다면 박해일이란 배우가 감정적인 중심을 잡아주길 기대했을 거 같은데, 그만큼 박해일과의 소통이 중요하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일단 (박)해일 씨와는 친하다. 막걸리 마시는 걸 좋아하는데, 해일 씨도 좋아하고(웃음). <덕혜옹주>를 함께 하기로 결정한 뒤로 실제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있었는데 그때 인사동에 있는 단골 막걸리집에 함께 자주 갔다. 그리고 영화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 본인 스스로 김장한이란 인물을 만들어나가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서로 툭툭 던지듯이 의견을 주고받으며 조금씩 인물을 매만졌던 것 같다. 결국 촬영을 시작하니까 박해일이란 배우 스스로 김장한을 만들어놓았더라. 매 촬영마다 미세하게 감정을 쌓아가는 게 보여서 정말 좋았다. 사실 감정을 표출해서 소진하는 게 아니라 차곡차곡 쌓아간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인데 훌륭하게 해내더라.
특별출연 배우가 많은데 고수 같은 경우엔 극적인 비중이 상당하다. 사실 대부분 고수가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고 하더라. 이우 왕자는 실제 사진으로 봤을 때 상당히 잘생긴 외모를 갖고 있었고, 멋쟁이로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민족의식도 상당했고. 그래서 어느 정도 존재감이 있고 멋있다고 생각하는 배우가 이우를 연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고수 씨가 이우와 닮았다. 그런데 고수 씨가 하게 돼서 개인적으론 참 좋았지.(웃음)
작년부터 일제강점기 시절을 배경에 둔 영화가 많이 나오고 있다. <덕혜옹주>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는데 이런 현상에 대한 특별한 관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솔직히 내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웃음) 그냥 <덕혜옹주>만 두고 말해보자면, 사실 전작인 <위험한 관계>도 1930년대 상하이가 배경이니 <덕혜옹주>와 비슷한 시기를 배경에 둔 작품인 셈이다. 그 영화를 하면서 이 시대가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그런데 <덕혜옹주>를 일제 강점기 배경의 영화라고 정의하기엔 조금 어려울 것 같다. 사실 영화의 주무대가 일본이기도 하고. 게다가 내가 <덕혜옹주>를 선택한 건 시대상황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 시대상황이 묘사돼야 했기 때문에 그 시절이 그려진 것뿐이다.
혹시 막연하게라도 차기작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지점이 있다면? 새로운 장르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 싶다. 액션이나 코미디, 아니면 스릴러? 장르적인 작품에 대한 관심도 생기고. 아니면 예전처럼 일상적인 영화를 다시 한번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하는데 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
<덕혜옹주>를 만들었기 때문일까? 사실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다. <덕혜옹주>도 내가 해왔던 영화와 다른 느낌이니까 이젠 아예 완전히 다른 걸 해보면 어떨까 궁금하다.
연상호라는 이름을 부지런히 쫓아온 이들에게도, 연상호라는 이름 자체가 생소한 이들에게도, <부산행>의 감독 연상호란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애니메이션 장르의 대가로 꼽히는 감독이자 사회파 작가로도 분류되는 연상호의 <부산행>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보기 드물게 대중적인 오락물이면서도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좀비를 위시한 한국형 장르물이자 한국사회를 정통으로 가로지르는 문제작이기도 하다. 그리고 개봉 첫 주말에 이미 5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흥행작으로 단숨에 내달린 시점에서 연상호 감독을 만났고, 그를 만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벌써 800만 명의 관객이 <부산행>을 봤다는 소식을 접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첫 실사영화로, 어쩌면 올해 가장 뜨겁게 기억될지도 모를 작품을 만든 연상호 감독에게선 그 열기와는 거리가 있는 차분함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연출한 실사영화가 100억이 넘는 블록버스터 영화인데 개봉 첫 주에만 5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전작들을 꾸준히 봐온 입장에선 벼락부자를 보는 느낌이다. (웃음) 아무래도 의아하게 생각한 분들이 많았을 거다. <부산행>을 연출한다는 소식이 처음 알려졌을 때엔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에게 이런 대작을 맡겨도 되냐는 의견도 있었던 걸로 안다. 심지어 기존에 내 작품을 좋아했던 관계자 분들도 그런 얘기를 했다니까.
구체적으로 제안을 받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투자배급사인 '뉴(New)'에서 <사이비>를 제작했는데 뉴의 장경익 대표가 <사이비>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실사영화 연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100억대 예산의 영화를 맡길 수도 있다고. 그 당시엔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싶기도 했고, 솔직히 나름대로 애니메이션 작업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제안이 크게 당기진 않았다. 어쨌든 그때 워낙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정작 <부산행>에 들어가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실사영화 연출 제안을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나? 그전에도 시나리오를 보여주면서 실사영화를 연출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긴 했지만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가 없었다. 그래서 좋은 시나리오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 실사영화를 할 일은 없겠구나 생각했다.
아무래도 애니메이션 연출과는 다른 일인데, 두렵진 않았나? 사실 애니메이션 연출과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사실 국내에서 애니메이션이 제작되는 경우가 드물고, 산업도 체계화돼 있지 않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즐기며 작업해왔다. 하지만 <부산행>을 만들면서 느낀 건 역시 실사영화 제작 체계가 잘 잡혀있다는 것이다. 애니메이션보단 확실히 편했다. 프로들이 모여 있고, 분업화도 잘돼있고. 애니메이션은 산업 자체가 구체적이지 않아서 주먹구구식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애니메이션을 만들 땐 혼자서 다양한 영역을 도맡아야 했던 걸로 안다. 아무래도 예산이 없으니까. (웃음)
그런 면에서 다양한 스태프와 상의하며 협업해 나가는 과정이 중요했을 텐데, 낯설진 않았을까? 어차피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옛날에 외주 일을 많이 해봐서 스태프들의 짜증을 유발하는 지점을 잘 안다. 감독의 방향성이 없으면 정말 피곤하다.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 했다가, 덕분에 다들 죽어나가는 거지. (웃음) 그런 걸 아는 덕분인지 스태프들과 소통하는 건 편했다.
KTX의 홍보효과가 상당할 것 같은데 코레일로부터 도움을 받진 않았나? 사실 KTX 설계도를 받고 싶었는데 관련 보안이 철저했다. 그래서 받지 못했다. KTX 열차칸을 똑같이 구현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미술팀이 KTX를 타고 다니면서 일일이 열차칸의 치수를 쟀다. KTX 열차의 의자와 비슷한 의자를 구하기 위해 발품도 많이 팔았다. 폐차된 무궁화호 한 칸 정도의 의자를 수거해 와서 천갈이를 하는 식이었다. 스크린으로 봤을 땐 크게 티가 나지 않았겠지만 실물에선 차이가 많았다. 예를 들면 KTX는 선반을 앞으로 펼 수 있는데 우리 세트에선 불가능했다. 실제로 KTX에서 쓰는 의자가 아니라서 선반은 형태만 흉내 낸 모형이었으니까. 정말 미술팀에서 고생이 많았다. 순제작비가 80억 정도이니 큰 예산이지만 마냥 넉넉한 예산은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 <부산행>을 이 정도 예산으로 찍었다는 건 효율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비좁은 공간에서 2시간 여의 이야기를 끌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고민이 있었을 거 같다. 아무래도 기차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영화이기 때문에 그런 고민이 더욱 절실했는데 촬영감독님과 미술팀이 잘 해결해 줬다. 보통 현장에선 '덴깡'이라고 하는, 세트를 분리하거나 연장하는 작업이 용이하게 이뤄졌고, 내가 추구하는 스타일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영화적으로 다양한 앵글을 구현했다.
공간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편집의 리듬감도 중요했을 것 같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어느 정도 리듬감을 설계했고, 그렇게 설계된 리듬에 맞춰 촬영과 편집을 감행했다. 사실 후반 편집보단 현장 편집에 많은 공을 들였는데 현장에서 촬영본을 바로 확인하면서 호흡이 떨어지는 신을 수정하고, 경우에 따라 신을 날리기도 했다.
현장편집을 치열하게 가져간 이유는? 아무래도 영화가 잘 만들어지고 있는지 제일 빠르게 확인하려면 그때마다 완성된 신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면에선 현장편집본을 디테일하게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장편집본과 최종편집본의 분량 차이가 별로 없을 정도였다. 한 3~4분 정도?
최종 편집은 편했겠다. 거의 이틀 정도? 별로 할 게 없었다.
<부산행>에서 가장 끔찍한 역할을 하는 건 결국 좀비보다 사람들이다. 좀비에게 고립된 일행을 구해 생존자들과 합류한 이들을 감염자로 몰고 윽박지르는 사람들로부터 약자의 치졸함 같은 것이 드러난다.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 같은 작품과 일관성 있는 주제의식을 이어가는 신이기도 한데, 결국 가장 '연상호다운 장면'이기도 하다. 그런 점을 잘 보여주고 싶었다. 사실 시나리오 개발 중에 용석이한테 권총이라도 하나 쥐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의견도 나왔다. 그렇지 않고서 저렇게 많은 사람이 용석에게 동조하는 게 말이 되냐고. 그런데 나는 용석이가 권총을 갖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보통 사람들에게서 악마성 같은 기질이 관성처럼 터져 나오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런 관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후반부에서 느껴지는 처연함도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감정이라 생각했고. 방금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윽박을 지르는 보통 사람들이란 우리가 평소에 인간적이라 생각하는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난다. 그런 순간이 피해자나 피해자의 가족들 입장에선 굉장히 슬프게 다가올 거라 생각했다.
권총 얘기가 나왔는데 사실 용석 자체가 권총이다. 그가 장전하면 사람들이 죽어나가니까. 그리고 그렇게 가혹하게 캐릭터를 죽일 수 있는 단호함이란 결국 감독의 의지일 테고. 결국 방아쇠를 당기는 건 감독 본인이란 말인데 그런 면에서 이렇게 많은 인물을 주저하지 않고 죽이다니, 정말 가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웃음) 블라인드 시사회를 비롯한 여타의 시사회에서의 설문조사나 감상평을 보고 재미있게 느꼈던 부분이 있다. 용석이로 인해 여러 사람이 죽게 되는데 사람들이 그 숱한 죽음에서 가장 큰 충격을 느끼는 건 10대 커플인 영국(최우식)과 진희(안소희)의 죽음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런 감상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10대 커플은 장난스럽고 철없게 보인다. 예를 들면 둘이 울면서 통화하는 장면에선 슬퍼 보인다기 보단 장난스럽게 보일 정도로 철부지 애들이란 거다. 사실 용석이 승무원인 기철(장혁진)의 등을 떠밀 때에는 관객들이 큰 충격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우습게 생각했던 아이들이 쓰레기처럼 버려졌을 때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더라. 어떻게 보면 관객들이 방심한 탓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되진 않을 거라 생각했던 애들이 생각지도 못한 폭력에 내몰렸을 때 느껴지는 충격 같은 거랄까. 그때는 용석이란 인물이 끝까지 갔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기도 한데 그 이후부터는 그가 어떤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런 측면에선 배우들의 연기가 괜찮았다. (김)의성 선배나 소희나 우식이나.
사실 10대 커플의 죽음은 예상치 못한 순간이란 점에서 충격적이기도 한데, 용석의 비열함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적인 죽음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낭비적으로 느껴지는 죽음이기도 하다. 결국 관객이 예상치 못한 순간이 돼서 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길 바랐다. 철없고 한심해 보이는 어린 세대들이 내가 속한 세대에게 가혹하게 짓밟히는 꼴을 봤을 때의 참담함을 느꼈으면 하는 부분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그만큼 애정이 있기 때문에 죽인 셈이랄까. 아이러니하다. (웃음) 아무래도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게 있었으니까. (웃음)
석우의 죽음은 그의 원죄를 생각한다면 명분이 있다. 다만 주인공을 죽인다는 점에서 망설임은 없었을까? 석우를 죽이는 건 시작부터 정해져 있던 거라. (웃음) 사실 용석과 석우는 그 세대를 책임지는 인물이란 점에서 이미 어떤 식으로든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 공멸 혹은 자멸하는 운명이랄까. 다만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이 등장하는 거고.
그래도 캐릭터들마다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점에선 허투루 동원된 느낌은 아니다. 감독의 입으로 이런 얘길 하긴 조금 민망할 순 있지만 <부산행>에는 일종의 논리가 있었다. 보통 아포칼립스 영화들은 세대론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부산행> 역시 캐릭터의 세대를 어떻게 설계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이데올로기가 느껴지는 영화는 아니지만 유일하게 두 노인 여성을 상반된 이데올로기의 상징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 분들의 시대 자체가 이데올로기의 시대였으니까. 그 다음 세대는 성장 중심의 사회에서 자랐으니 석우와 용석 같은 캐릭터가 떠올랐고, 그 다음 세대인 10대는 일종의 희생양 노릇을 하게 된다. 그리고 수안이나 성경(정유미)이 임신한 아이는 다음 세대에 대한 희망일 수도 있지만 나는 우리가 쥐어야 할 당위에 더 아깝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 인터뷰에서 마지막에 둘 다 쏴죽이는 게 연상호다운 거 아니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었는데 그 정도의 당위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당위가 뻔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지만 당위는 항상 뻔한 거니까.
마지막에 수안이가 부르는 '알로하 오에(Aloha Oe)'라는 노래는 이별과 재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노래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을까? 마지막에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까 고민했는데 <송곳> 작가인 만화가 최규석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일단 가사 자체가 감성적이고 비하인드 스토리가 괜찮았다. 원곡이 하와이 왕조가 무너졌을 때 마지막 여왕이 만든 민요라는데 그런 사연이 마음에 들었다. <부산행>이란 아포칼립스 영화를 개인의 감정에 실어서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기획 의도와도 맞아떨어졌다. 한 나라가 망해갈 때 재회를 약속하는 노래라는 점에서 종말론적인 상황을 다루는 이 영화의 엔딩톤과 어울리게 들렸다.
수안이가 아빠 앞에서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결국 아빠가 죽으니까 부르게 된다는 점에서 페이소스가 형성된다. 개인적으로 엔딩 크레딧이 나오기 직전에 클로즈업된 수안의 표정이 힘있고 단단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엉엉 우는 게 아니라 씩씩하게 노래를 끝까지 부르고 힘있는 표정을 보여주길 바랬다.
유사 좀비를 다룬 장르물이란 점에서 주목을 받았는데 좀비에게 물린 부위에 따라 좀비가 되는 시간차가 있더라. 목을 물린 사람이 팔이나 다리를 물린 사람보단 확실히 빨리 변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절대 목을 물리지 않는다. (웃음)
하지만 주인공에겐 우대 쿠폰을 준 느낌도 든다. 특히 석우는 인저리 타임이 긴 느낌이기도 하고. (웃음) 그런데 석우는 고속촬영 부분이라 길게 느껴지는 거다. 실제론 되게 짧은 시간이다. (웃음)
사실 좀비는 나올 만큼 나와서 좀비를 묘사할 때 어떤 시도를 해도 참신하다는 말을 듣기란 어렵다. 그런 면에서 <부산행>은 차별적인 좀비를 보여주겠다는 야심보단 일반적인 좀비를 충실하게 묘사하고 합리적으로 활용하는 인상이다. 사실 요새는 별의별 좀비가 다 나오지 않았나. 생각하는 좀비도 있고, 뱀파이어와 좀비가 더해진 타입까지 나왔는데 나는 좀비물이 너무 많이 변형되는 게 싫었다. 그래서 되레 클래식한 느낌을 주고자 했다. 조지 로메로가 만든 좀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단순한 좀비 말이다. 물론 뛰느냐, 걷느냐, 라는 이슈가 있기도 했는데 뛰는 좀비도 이미 익숙한 편이다. 대신 어두울 때 앞이 잘 안 보인다는 설정은 아마 <부산행>을 통해 처음 가미된 부분일 거다.
구제역 사태를 언급하는 오프닝 시퀀스나 근래의 시위 진압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방송 장면 등이 요즘 세태와 직결된 느낌을 준다. 심지어 벨소리로 들려지는 '오 필승 코리아'도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데 아무래도 리얼리티를 위한 의도적 장치처럼 느껴진다. 아무래도 낯선 소재를 다루기 때문에 관객이 느끼는 진짜 사회와 영화 속의 사회가 다르다고 느끼면 몰입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재미있게 느낄 수 있는 뉘앙스를 뿌린 셈인데 생각보다 그런 부분을 크게 받아들이는 분들이 많았다. 아마 그런 인상이 영화의 흥행에도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싶다.
오는 8월 18일엔 <부산행>의 프리퀄인 애니메이션 <서울역>이 개봉한다. <서울역>에서 목소리 연기로 참여한 심은경 씨가 <부산행>의 첫 번째 좀비로 등장하는데 이걸 복선이라고 봐도 될까? 연결고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잘 연결된다고 느끼긴 어려울 거다. 하지만 별개의 캐릭터라고 여기기엔 비슷한 점도 많을 거다.
미끼를 던지는 건가. 그렇다. (웃음)
<서울역>은 본래의 장기인 애니메이션인데 <부산행>이 흥행한 만큼 <서울역>으로 연상호의 애니메이션을 처음 접하는 관객이 많아질 수도 있다. 아무래도 15세 관람가가 나오기도 했으니까. 조금 기대는 되지만 아직 개봉일자가 많이 남아서 특별히 별다른 기분이 들진 않는다. 다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폐막작으로 미리 상영하는 게 좋은 선택인지 모르겠다.
이유는? 스포일러라고 여겨질 만한 요소가 굉장히 세다. 사실 <부산행>은 스포일러가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치는 영화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울역>은 <식스센스>처럼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다, 란 식으로 말해 버리면 김이 샐 수도 있는 작품이라 이게 독이 될지, 득이 될지 잘 모르겠다. 사실 올해 프랑스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초청작으로 상영된 적이 있었는데 이동화 PD가 상영관에 가서 반응을 봤는데 관객들이 경악한다고 하더라. 나도 영화제 폐막식에 가서 반응을 보려 한다.
왕대륙이라고 했다. 쉽게 잊혀질만한 이름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여전히 생소하겠지만 왕대륙은
이미 쓰나미 같은 팬덤을 부르는 뜨거운 이름이다. 이 남자가 문득 궁금해졌다.
발음할수록 거대하게 와 닿는 이름이다. 왕대륙이라니, 한반도는 집어삼키고도 남을만한 이름 아닌가. 그 거대한 이름이 심심찮게
들리기 시작한 건 대만영화 <나의 소녀시대>가
국내에서 개봉한 5월 11일부터였을 것이다. 대만에서 역대 흥행 최고 기록을 얻었다는 이 작품은 중국, 홍콩, 싱가포르에서도 차례대로 개봉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도장격파에 나선 무림고수와 같은 행보를 이어나가던 이 영화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국내 영화팬들에게도
심상찮은 반응을 얻었고, 올해 개봉 이후 적은 상영관 수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관객을 몰았다. 결국 대만영화 최초로 40만 관객을 돌파한 흥행작이 됐다.
<나의 소녀시대>는
대만영화뿐만 아니라 근래에 개봉한 중화권 영화 가운데서도 이례적인 흥행작이다. <응답하라 1994>처럼 1994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고, 학창시절의 우정과 사랑이라는 보편적 경험을 낭만적으로 극화했는데 이를 통해 대만이라는 지역적 정서를 뛰어넘는, 보편적 공감대와 트렌디한 매력을 전파하는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청춘이란 단어로부터 툭 튀어나와버린 듯한 캐릭터들은 자칫하면 유치하고 뻔하게 읽힐 수 있는 영화의 감정선에 특별한 숨을 불어넣는 생생한 육체가
됐다. <나의 소녀시대>의 흥행이 주연배우들을
향한 팬덤으로 이어진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유덕화의 아내가 되길 꿈꾸는 평범한 소녀 임진실을 연기한 송운화와 교내 최고의 불량학생이자 짱으로 군림하는 소년 서태우를 연기한 왕대륙을 중심으로 태풍의 눈이 형성됐다. 그리고 이런 기류를 감지한 배우들이 내한
의사를 밝히며 팬들의 술렁임도 가속화됐다. 특히 유덕화의 아내가 되길 꿈꾸는 임진실처럼 SNS상에서 왕대륙의 여자친구를 자처할 정도로 지극한 팬심을 내보이길 주저하지 않던 여성팬들의 관심이 지대했다. 지난 6월 5일에 내한한
왕대륙이 <나의 소녀시대> 상영관을 찾아 무대인사
일정을 소화했을 땐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암표까지 판매됐을 정도였다. 이에 왕대륙은 ‘비글’처럼 상영관 곳곳을 분주히 오가며 팬심에 적극적으로 부응했다. 그를 따라잡는 경호원들이 진땀을 흘릴 정도였다. 덕분에 ‘비글미’ 있는 배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렇게 1박 2일간의
짧은 일정을 꽉 채우고 돌아간 왕대륙은 한 달여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촬영 중인 영화가 있어서 겨우 시간을 내서 온 거라 일정이 빠듯했지만
내가 출연한 영화를 사랑해준 팬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자리를 갖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기분은 좋았다. 한편으론
한국에선 첫 팬미팅이라 긴장됐다.” 왕대륙이 다시 한국에 발을 디딘 건 7월 13일 새벽 1시였다. 그리고 그 늦은 시간에도 왕대륙을 마중하기 위해 인천공항에 모여든 팬들은 왕대륙의 본명인 ‘왕 따루(Wang Ta Lu)’를 외치며 선물 공세를 펼쳤다. 그리고 당일 오후, 650명에 달하는 팬들과 두 시간 여의 팬미팅을
가졌다. 팬미팅 행사가 끝나고 나서도 거의 모든 팬들과 하나하나 사진을 찍어주는데 여념이 없었다는 관계자의
전언을 듣고 그에게 한국 팬과의 만남이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다.
“미인이 많다.” 대답을
한 뒤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는, 장난끼가 가득 배어 있는 표정에서
<나의 소녀시대>의 쉬타이위가 느껴졌다. 거창한
이름만큼이나 커다란 미소가 짓궂게 느껴지지만 결코 밉지 않은 유쾌함. “사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팬들은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해주는 거 같다. 예를 들면 그저 웃기만 해도 좋아해주고, 작은 애교에도 환호해 주니까. 다만 안타까운 점은 있다. 사실 나는 내 스스로가 굉장히 유머러스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그런 면을 제대로
이해시킬 수 없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팬들 하나하나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것이었을까.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말없이 가만히 서있는 것보다 직접 몸을 움직여서 팬들을 만나는 게 즐겁다. 다른 나라를 가도 그렇다.” 그러니까 진정 ‘비글미’가 넘치는 남자인 것이다.
1991년생인 왕대륙에게 1994년을
배경에 둔 <나의 소녀시대>는 겪어보지 못한 시절이다. 경험해 보지 못한 시절의 주인공이 됐으니 타임머신을 타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쉬타이위는 굉장히 캐주얼한 캐릭터이고 그에게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상황이 묘사된다. 게다가 러브스토리가 중심에 놓인 영화였기 때문에 1994년이란 시절이
큰 제약으로 다가오는 것 같진 않았다. 결국 내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바탕으로 연기를 했기 때문에
캐릭터에 몰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물론 거저 먹듯이 연기했다는 말은 아니다. 왕대륙이 연기한 쉬타이위는 문제아들 중에서도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대장 노릇을 하는 인물이다. “현장에서 다른 배우나 스태프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있곤 했다. 패왕
같은 캐릭터라 그에 어울리는 패기나 두목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래도 거칠고 사나운
면은 나와 다른 지점이기 때문에 성격을 조절해야 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자신과 닮았다고 느낀 점은
없었을까? “장난끼가 많다. 무엇보다도 나처럼 굉장히 귀엽다는
점?”
장난끼가 다분하고 거칠게 행동하는 쉬타이위는 마음을 바로잡고 공부에 매진하지만 심각한 편견에 맞서야 한다. 왕대륙은 그런 쉬타이위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나도 남들에게 잘 공감 받지 못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말로
부정당한 경험이 있다.” 다행히도 왕대륙은 쉬타이위처럼 삐뚤어지지 않았다. “결국 내 의지를 꺾지 않기 위해 더욱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에겐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일곱 명 정도
있다. 그 친구들이 있어서 괜찮았다. 특히 배우로 활동하는
가진동과는 15년 넘게 친구로 지냈다.” 가진동은 지난 2012년에 개봉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로 왕대륙보다도 한국에 먼저 알려진 대만 출신 배우이기도 하다. “나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남들이 뭐라고 말하는지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주변사람들과 어려움이나 고통을 나누기 보단 즐거움을 나누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 코미디를 많이 좋아한다.”
왕대륙은 코미디물에 대한 애정을 적지 않게 언급해 왔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주성치를 꼽기도 했다. 그건 배우로서의 재능이 코미디와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8년 동안 다양한 작품을 소화하면서 코미디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았다. 한번은
진지하게 정극 연기를 하고 있음에도 내가 등장할 때마다 관객들이 많이 웃는 걸 보고 내게 사람을 웃기는 소질이 있음을 알았다. 이런 재능이 있다면 제대로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소녀시대>에서 연기한 쉬타이위를 통해서도 웃음을 주고자 참고한 것이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일본만화를 좋아하는데, <슬램덩크>를 비롯해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코믹한 캐릭터 톤을 많이 참고했다. 실제로
쉬타이위는 <슬램덩크>의 강백호를 닮았다.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저돌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자상하고 따뜻한
남자. 실제로 왕대륙은 얼마 전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강백호의 그림을 게시한 적이 있다. 아무래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왕대륙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8년간의 무명생활을 겪었다고 말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소녀시대>는 왕대륙이 배우라는 궤도에 올라 처음 성공적으로 착륙한 경유지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그에게 지난 무명시절은 어떻게 다가올지 문득 궁금했다. “사실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다. 1년 동안 한 작품도 하지 못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평생 자신에게 어울리는 캐릭터를 기다리는 것이 배우의 운명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그 시간을 보내는 게 어렵진
않았다. 결국 그 시절이 연기할 수 있는 힘으로 남겨진 것 같다.” 어쩌면
그건 처음부터 대단한 야심을 품고 연기에 도전한 것이 아니었던 덕분일지도 모른다. “로드 캐스팅을 받고
광고를 찍게 됐는데 광고에서의 연기는 짧은 시간만 허락되는 지라 내가 과연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결국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사실 당시엔 어렸을 때라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물론 지금의 왕대륙은 배우로서 진지한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스물다섯 살에 찾아온 이른 성공에 도취되지 않고자 마음을 다잡는다. “아직 젊으니까
조급해하지 않고 지금 내가 가진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해낼 거다. 천천히 시간을 들이며 다양한
이들로부터 많은 걸 배우고 싶다. 그래서 진짜로 연기하고 싶은 캐릭터를 생각해보고 언젠가는 그에 어울리는
배역이나 스토리를 직접 찾아갈 수도 있을 거다.”
<나의 소녀시대>에서
가장 특별한 이벤트는 유덕화가 깜짝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작품의 제작자로 참여하기도 한 그는 현재 중화권
배우들이 우러러보는 대배우다. 왕대륙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녀시대>에선 유덕화가 젊은 시절에 출연했던 <천장지구>의 주제가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쉬타이위가 그 시절의 유덕화를 따라 하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왕대륙은 실제
유덕화의 모습을 따라잡기 위한 디테일에 고심했다고 설명한다. “청재킷을 똑바로 입으면 안 된다. 어깨에서 벗겨질 것 같은 느낌으로 살짝 걸쳐야 한다. 유덕화는 언제나
그렇게 입었으니까.” 그러면서 익살맞게 코피를 닦는 흉내를 내며 말했다. “유덕화도 한때 거친 남자 역할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왕대륙에게
유덕화는 단순한 별이 아니다. 자신의 위치를 되짚게 만드는 북극성과 같은 존재다. “유덕화도 젊은 시절엔 다양한 역할을 많이 소화했다. 그처럼 멋진
배우가 되려면 다른 배우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왕대륙은 시간을 달릴 준비가 돼있다. “배우로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섣불리 변신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잘 할 수 있는 역할에 집중하고 좀 더 내공이 쌓이면 다른 역할을 시도해보고 싶다.”
<나의 소녀시대>는
학창시절의 아련한 짝사랑에 관한 영화다. 왕대륙에게도 영화 같은 과거가 있다. “어렸을 때 한 여학생을 좋아했는데 문제는 같은 반의 모든 남학생이 그 여학생을 좋아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고, 1년 뒤 그녀는 유학을 떠나버렸다. 그런데 그녀가 유학을 간 뒤 한 친구가 그녀도 나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기회가 된다면 그녀와 같이 <나의 소녀시대>를 보고 싶다.” 로맨틱한 사연이다. 그렇다면 왕대륙은 쉬타이위와 달리 우정보단 사랑을 선택할 수 있을까? “만약
친구와 한 여자를 두고 다투게 된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포기할 거다.” 단호했다. 그럼 아무래도 20년 동안 사랑하는 여자를 기다릴 순 없는 걸까? “물론이지. 그건 영화다! (웃음)” 역시 단호했다.
영화 촬영 스케줄 때문에 하루에 서너 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한다는 왕대륙은 한국에서 보낸 1박2일 동안에도
동분서주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인터뷰와 촬영이 끝나면 밤 비행기로 대만에 돌아간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촬영 중인 무협 판타지 영화 <교주전>의 현장으로 곧바로 돌아갈 예정이다. 게다가 성룡이 출연하는
코믹 액션물인 <철도비호>와 중국의 거장 장이모우
감독의 딸인 장말이 연출하는 판타지물 <28세 미성년>을
준비하는 등 바쁜 일정이 줄줄이 이어질 예정이다. 그러니 서울을 두 번이나 방문했음에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게 그럴만했다. 그러다 문득 서울에서 어딜 가면 좋을지 추천해달라며 왕대륙이
물었다. 하지만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아 생각할 시간을 청했다. 그리고
그와 헤어지고 나서야 답변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니 지금까지 이 글을 읽은 왕대륙의
팬들은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대신 답변을 전해주길 부탁한다. 물론 비글미 넘치게 분주한 일정을 자청하는
그가 다시 한국을 찾았을 때에도 한가하게 여유를 즐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