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출신 배우답게 또박또박한 발음이 인상적인
펠리시티 존스는 유년시절부터 배우가 되길 꿈꿨고, 꿈을 이뤘다. 그리고
이젠 세계가 사랑하는 배우로 거듭나고 있다. 보는 이를 기분 좋게 만드는 커다란 미소만큼이나 큰 재능과
매력으로.
“레이저 블래스터는 대단히 신나는 경험이었어요. 스톰트루퍼의 공격을
피하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스톰트루퍼는 정말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적응하는데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지만 말이죠!” 테마파크에 다녀온 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어린 소년의 상기된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가. 사실 이는 <스타워즈> 시리즈 안에서 최초로 기획된 스핀오프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이하,
<로그 원>)의 촬영을 마친 펠리시티 존스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다. 그녀는 최근 미국 ABC채널의 나이트쇼인 '지미 키멜 라이브'에 출연해
<로그 원>에서 연기한 진 어소의 레고 피규어가 나왔다며 자랑하기도 했다. 그럴만한 일이다.
올해 12월말에 공개될 예정인
<로그 원>에서 펠리시티 존스가 연기한 '진
어소(Jyn Erso)'는 우주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독재적인 권력을 장악한 제국군에 대항하는 반란군
특공대에 가담해 제국군이 건설 중인 전투용 인공행성 '데스 스타'의
설계도를 탈취하는 작전을 수행한다. "진 어소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자라왔고, 신체적으로도 작고 왜소하지만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신념이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자신의 동료에게 힘을
불어넣고 동기부여를 줄 수 있다. 결과적으로 큰 용기를 갖게 만든다."
펠리시티 존스의 말처럼 진 어소는 아웃사이더에 가까운 신분을 갖고 있지만 강인한 믿음을 통해 악에 맞서고 선의에 힘을 불어넣는, <스타워즈> 세계관의 새로운 아이콘이 될 인물이다. 흥미로운 건 작년 12월에 공개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와 마찬가지로 <로그 원>에서도 세상을 구할 새로운 영웅상으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스타워즈> 세계관에서의 여성이란 여왕 혹은 공주로서 타고난 신분을 견뎌야 하는 숙명에 갇혀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둘
때 이는 가히 세계관의 진화에 가깝다. 그러니까 펠리시티 존스는
<스타워즈>라는 전설적인 시리즈를 현재진행형의 우주로 띄워 올리는 핵심 동력인
셈이다.
<로그 원>을
연출한 감독 가렛 에드워즈는 펠리시티 존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강인함, 부드러움 혹은 풍부한 감수성, 대부분의 배우들은 이중 한 가지 요소만을
지니고 있지만 펠리시티 존스는 이 모든 것을 갖고 있다. 누구나 친구가 되고 싶어지는, 매우 친근한 매력을 갖고 있다." 대단한 찬사다. 그리고 펠리시티 존스에 관해 이토록 대단한 찬사를 남긴 건 가렛 에드워즈만이 아니다. 2011년 선댄스영화제 특별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멜로드라마 <라이크
크레이지>의 메가폰을 잡은 감독 드레이크 도리머스 역시 펠리시티 존스에 대한 특별한 첫인상을 언급한
바 있다.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해보니 그 동안 캐릭터가 겪어왔을 것이라 짐작되는 온갖 슬픔이 그
얼굴에 담겨있었다. 우린 다같이 ‘오 마이 갓, 바로 그녀야!’라 말했다."
펠리시티 존스가 출연한 최근작 중 하나인 <인페르노>의
감독 론 하워드 역시 마찬가지다. "펠리시티 존즈는 지적인 반짝임으로 가득한 배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근하면서도 편안하게 인상으로 다가온다."
2014년에 공개된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스티브 호킹과 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제인 와일드의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었다. 제인 와일드는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의 인문학과에 진학해 물리학도였던 스티브 호킹을 만나 연인이 됐고, 그가 루게릭병을 앓으며 시한부 선고까지 받았음에도 모두의 만류를 무릅쓰고 결혼을 선택한 여인이었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제인 와일드가 쓴 동명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영화화한 작품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제인 와일드를 연기한 펠리시티 존스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는 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루게릭병으로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스티브 호킹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만큼이나 그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는
제인 와일드의 서사가 중요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제인 호킹 역을 맡은 펠리시티 존스는 생애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되는 영광을 얻었다. "제인 호킹을 만난다는 건 굉장히 흥분되고
초조한 일이었다. 항상 그녀를 존경해왔는데, 밝은 성격과
뛰어난 결단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굉장히 관대한 느낌을 받았다. 결국 제인과 스티븐은 용기 있는 방식에
대한 생각을 전환시켜준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펠리시티 존스가 말하는 제인 와일드가 앞서서 감독들이
말한 펠리시티 존스와 유사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지적이면서도 편안한 인상으로 풍부한 감정을 연기한다는
펠리시티 존스와 밝고 관대하면서도 뛰어난 결단력을 지닌 제인 와일드 사이에는 거리감이 없어 보인다.
아마 펠리시티 존스가 지적인 느낌을 주는 건 실제로 그녀가 지성을 겸비한 배우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드럽고 세련된 옥스퍼드 액센트를 구사하는 펠리시티 존스는 옥스퍼드대학의 단과대학 중 하나인 워드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차석으로 졸업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런 그녀가 배우로서의 꿈을 갖게 된 건 그녀
어머니 덕분이었다. 영화와 연극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어머니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많은 영화와 연극을
보게 됐고, 자연스럽게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다. 그리고
유년 시절부터 연기 수업을 받으며 12살 무렵부터는 TV영화와
드라마, 연극 무대에서 아역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부터 연기를 시작한 건 굉장한 행운이었다. 20여 년의 경험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 주목 받지 못했던 시절에 실수를 만회하는 방법들을 알게 됐다는 것도.” 그리고
이제 만인이 주목하는 배우가 된 그녀는 자신이 경험하는 그리고 더욱 크게 경험하게 될 유명세에 대해서도 단단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무슨 일을 하든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책임감을 갖는 방식이니까.”
아마 올해 12월에 <로그
원>이 공개된 이후로 펠리시티 존스의 입지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스타워즈>라는 신화적 세계관의 아이콘이 되어 전세계를 누비게 될 그녀는 훌륭한
가능성을 지닌 배우에서 전세계가 사랑하는 배우로 거듭날 것이다. 게다가 시고니 위버와 함께 출연한 신작
판타지물 <몬스터 콜>, 니콜라스 홀트와 함께
출연한 액션 스릴러물 <아우토반>까지 그녀의 다채로운
매력을 다양하게 제시할 작품들이 연이어 줄을 서있다. 그리고 그녀의 미래가 보다 기대되는 건 그녀가
이 모든 과정을 진지하면서도 성실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배우로서 산다는
게 특권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지는 일이란 없다. 영화란 수많은 사람들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에 늘 쉽게 선택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내가 선택한 작품에 대한 해법을 스스로 고민하며 발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녀는 이미 자신만의 공식을 찾았고, 답을 찾아가고 있다. 한 걸음씩, 정직하게.
타자는 참아야 한다. 노리는 공이 들어왔을 때 비로소 휘둘러야 한다. 물론 헛스윙을 할
수도 있다. 빗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그래야 언젠간 안타를 칠 수 있다. 민우혁은 참았다. 그리고 지금 1루에서 2루로
뛰고 있다.
본래 야구 선수였다고 했다. 운동을 하다 뮤지컬 배우가 됐다는 게
이상하진 않았지만 호기심이 동했다. "관심이 다른 데에 있었다. 동료들이 거울 보면서 스윙 연습하는데 나는 H.O.T나 젝스키스
춤을 따라 하고 있었다.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겠단 생각보단 앨범을 내고 싶단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그러니까 민우혁에게는 끼가 있었다. 그리고 그 끼를 남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도 컸다. 그라운드는 무대 같았고, 더욱
큰 환호와 열광을 받고 싶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2~3학년을
부상에 시달리며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을 겪게 됐고, 한 프로구단의 제안으로 제주도에서 재활 훈련을
하던 중 되레 발목인대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그래서 3개월
동안 깁스를 한 채 고민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길은
아닌 것 같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영등포에서 월세 15만원 짜리 고시원방을 잡고 길거리 캐스팅이라도
될까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서성이던 민우혁은 모델 학원 오디션 공고를 발견했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탈락했다. 너무 뚱뚱해서라고 했다. 두 달 동안 이를 악물고 살을 뺐다. 108kg에서 35kg을 줄였다.
결국 오디션에 합격했다. 그리고 우연히 노래를 할 기회를 잡았다. 2003년에 방영한 드라마 <요조숙녀>의 OST에 참여했다. 청사진을
그렸다. 그러나 긴 기다림 속에서 서서히 지워졌다. 무명시절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노래가 하기 싫었다. '차라리
야구를 할 걸'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 그러다 문득 친한 친구 어머니가 연극배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부탁했다. 연기를 배우고 싶다고. 아침마다 찾아가 연기를 배웠다. 물론 그때에도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인생이란 뒤돌아볼 수 있는 것이지, 내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내 과거를 아는 분들은 뮤지컬을 하려고 노래도 하고, 연기도 배운 거라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시절이 긍정적으로
보인다." 그렇다. 민우혁의 어제는 지나갔다. 그는 지금무대에 올라 내일을
본다. 진짜 청사진이다.
올해에만
<레미제라블>, <위키드> 무대에
섰고 <아이다> 무대가 기다리고 있다.
야구로 치면 봉황기, 황금사자기, 청룡기
결승전에 올라가는 기분이랄까.(웃음)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상황인데 마치 누군가가 나를 위해 자꾸 상을 차려주는 느낌이다.
물론 길가다 동전 줍듯이 얻은 기회들이
아니다. 대작 뮤지컬에 연이어 출연하는 만큼 오디션의 치열함도 더욱 크게 느낀 한 해가 아니었을까?
소위 A급이라 꼽히는, 대극장
뮤지컬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이름을 들었을 때 위압감을 느낀다. 그런데 최종 오디션 명단에서 내 이름이
그런 이름들과 함께 있는 거다. 그러니까 어느 프로구단 테스트를 보러 갔는데 류현진이랑 같이 서 있는
느낌?(웃음) 그래서 마음을 많이 비웠다. 목표는 단 하나, 강렬한 인상을 남기자. 캐스팅이 안돼도 다음에 새로운 작품을 준비할 때 민우혁이라는 배우를 떠올릴 수 있도록 하자고, 그러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캐스팅됐다.
그러니까!(웃음) <아이다> 오디션은 <레미제라블>
공연할 때 진행됐는데 사실 그때 인대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해서 일주일간 공연을 못했다. 심지어
성대결절까지 온 상태였다. 그런데 하필 <아이다> 2차 오디션까지 겹쳤다. 그래서 결국 오디션 참석이 어려울
것 같다고 연락했는데 감독님이 감안하고 보신다니 걸을 수만 있으면 와달라는 거다. 그래서 일단 병원부터
갔다. 성대결절이라도 조금이나마 나아졌으면 해서. 그리고
다음날 목발을 짚고 오디션을 봤는데 합격했다. 그래서 3차
오디션에선 깁스를 풀었다. 절뚝거리더라도 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걸 보고 오리지널 연출자인 키이스 배튼이 엄지를 척 들더라.(웃음)
<아이다>에서 연기할 라다메스는 이집트 장군인데 상당히 남성적인 캐릭터다.
그래서 강인한 장군 역을 맡기엔 얼굴이 너무 선하고 어려 보인다는 지적도 받았다. 심지어 라다메스가 열여섯 살이라 해서 최대한 어려 보이면 좋을 것 같아 앞머리도 내리고, 캐주얼한 복장으로 3차 오디션 현장에 갔다가 그게 독이 될 거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본격적인 오디션이 몇 시간 정도가 남았을 때 바로 미용실을 찾아가 머리를 짧게
자르고 옷도 새로 사 입었다. 그랬더니 키이스 배튼이 다시 엄지를 척.(웃음) 덕분에 자신감이 확 올라와서 인대가 아프다는 것도 잊고 오디션에 열중했다. 그래서
캐스팅된 게 아닐까 싶다.
라다메스 역에 더블 캐스팅된 김우형은 2010년에 공연한 <아이다>에서도
라다메스를 연기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아무래도 비교될까 봐 긴장되지 않나?
사실 오늘도 우형이 형이 연습하는 걸 보면서 하루 종일 감탄하다 왔다.(웃음) 원래 열정이 과해서 빡세게 연습하는 편인데 우형이 형은 더한다. 마치
처음 하는 사람처럼. 그래서 나 역시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
와중에 나를 잘 챙겨준다. 보통 더블 캐스팅되면 그러기 쉽지 않은데 정말 나한테 다 퍼준다. 덕분에 든든하다. 몸은 힘들지만 너무 행복하다. 우형이 형을 보면서 저런 선배가 돼야겠단 생각을 많이 한다.
<위키드>에서 연기한 피에로와 <아이다>에서 연기할 라다메스는 삼각관계에 빠져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캐릭터마다 감정을 느끼는 원인이 다르니까 피에로의 감정은 완전히 지워버리고, 심지어
내 관점에서의 감정도 최대한 버리려 노력하고 있다. 아무래도 내 입장에서 다가가면 <위키드>의 피에로나
<아이다>의 라다메스나 비슷해 보일 것 같아서 라다메스가 왜 아이다를 사랑하는지
이해하려 노력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
피에로는 요즘 말로 '금수저'라 방탕하고 사치스럽지만 내면에는 공허함이 가득한 인물이다.
피에로가 지독하게 외로운 캐릭터라 생각했다. 그래서 피에로는 자신의
외로움을 방탕한 생활로 감췄는데 엘파바는 자신의 외로움을 다 드러낸다. 그래서 피에로가 엘파바를 사랑하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피에로가 엘파바를 사랑하는 게 설득력이 없다고 느꼈다.
이유는?
솔직히 금수저 물고 태어난 왕자인 피에로가 초록색 마녀인 엘파바를 사랑한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본을 열심히 봤는데 피에로 입장에선 도저히 모르겠더라. 그러다
엘파바를 보기 시작하면서 피에로의 감정이 보였다. 왜냐면 나도 어렸을 때 피에로처럼 외로운 감정을 위장하며
살았으니까. 그런 외로움을 이해하니 피에로를 연기하는 게 수월해졌다.
본인은 어떤 외로움을 감춰온 건가?
10년 동안 야구를 하면서 감정을 위장하는데 익숙해졌다. 운동을 하면 합숙을 하니까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는데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천연덕스럽게
잘 숨겼다. 본래 긍정적인 성격이기도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길들여지니까 누구에게도 내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속 얘기를 털어놓으며 울어본 기억도 없고. 그런데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를 공연할 때 처음으로 감정이
폭발하는 경험을 했다.
<너에게
빛의 속도로 간다>는 실화 바탕의 야구 뮤지컬이라 소재면에서 익숙했을 것 같은데, 감정이 폭발했다는 의미는 뭘까?
전국민이 다 아는 이승엽과 함께 청소년대표팀으로 활약했던 김건덕이란 선수를 주인공으로 둔 작품인데 마치 내 인생처럼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막상 눈물을 흘려야 하는 신에서 도저히 못 울겠더라. 모든 감정을 쏟아내며 울어야 하는데 단 한번도 남들 앞에서 울어본 적이 없어서 힘들었다. 그런데 막상 첫 공연 때 완전히 몰입해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다음
신 진행이 안될 정도였으니까. 사실 그때 너무 행복했다. 누군가를
앞에 두고 그렇게 울어본 건 처음이었고, 이런 감정을 견디며 살아왔다는 게 느껴져서.
선수 시절 포지션이?
투수였다.
투수는 경기를 책임지는 포지션이다. 무대에 서면 비슷한 책임감을 느낄 때가 있을 것 같다.
맞다. 그리고 배우는 인내심이 필요한 직업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쫓으면 눈 앞에 좋은 배역이 없을 때 무너지기 쉽다.
꾸준히 어떤 역할이라도 열심히 해나가야 기회가 찾아오는 거 같다. 운동을 한 덕분에 기본적인
인내심을 배운 것 같다.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다.
TV나
영화에서도 연기를 해보고 싶단 의견을 종종 피력했다.
무대에서의 연기가 좋고 관객들로부터 전해지는 리액션이 좋아서 공연을 좋아하지만 연기에 대한 욕심이 늘면서 TV드라마나 영화에도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이젠 노래보단 연기에 더 관심이 많아졌나
보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은 간혹 목소리가 갈라지고 음이 떨어져도 그 노래의 감정을 정확히 전달한다. 결국 좋은 배우가 되려면 노래 실력만으로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옛날에는 피아노를 쳐가면서 노래 연습을 했는데 지금은 가사를 한번 더 보게 되는 것 같다.
올해
11월부터 내년 3월까지 <아이다> 무대에 서야 한다. 긴 시간 동안 무대에 오르려면 자기 관리에도
만전을 기해야 할 텐데.
공연에 들어가면 개인적인 생활 자체가 없다. 공연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가고, 쉴 때에는 말도 줄인다. 예전에 주인공은 무대에서
절대 '삑사리' 내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한때는 우스갯소리처럼
여겼지만 이젠 그 의미가 무겁게 다가온다. 비싼 돈을 내고 공연을 보러 온 관객 입장에서 삑사리를 듣고
몰입이 깨져서 티켓값을 아깝게 생각해버릴 수도 있으니까. 정말 조심해야 한다.
배우는 작품을 통해 이름을 얻는다. 브라이언 크랜스턴은 50세에 다다라서야 이름을 얻게 됐다. 정말 긴 기다림이었다. 인생의 반환점을 돈 시점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만난 배우의 절정, 어쩌면 이제야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브레이킹 배드>가
내 인생을 바꿨다." 그렇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브라이언
크랜스톤이 <브레이킹 배드>에 출연하는 동안 그의
입지는 확실히 달라졌다. 지난 2013년 다섯 번째 시즌까지
종영된 TV시리즈 <브레이킹 배드>는 2014년 에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하고, 배우 부문에서도 여우주연상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 부문까지 수상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브레이킹 배드>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할 수 있는 월터
화이트를 연기한 브라이언 크랜스턴 역시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브레이킹 배드>에 출연하며 네 번째로 받는 에미상 남우주연상이었다. 이보다
좋은 결말이 없었다.
<브레이킹 배드>는
일개 고등학교 교사였던 월터 화이트가 마약 업계의 거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본래 월트
화이트를 연기할 후보로 물망에 올랐던 건 크랜스톤이 아니었다. 존 쿠삭과 매튜 브로데릭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캐스팅을 고사하면서 크랜스턴에게 기회가 넘어왔다. 제작사
입장에선 크랜스턴이 탐탁지 않았다. <브레이킹 배드> 이전에
크랜스턴은 <말콤네 좀 말려줘>라는 TV시트콤으로 익숙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7년간 악동 같은 네 아들의
장난질에 샌드백처럼 당하기만 하는 아버지 역할을 맡아온 크랜스턴이 선악의 경계를 치열하게 오가는 월터 화이트를 소화해낼 수 있을지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의 총괄프로듀서인 빈스 길리건은 크랜스턴을 믿었다. 빈스 길리건은 1998년에 연출한 <X파일>
시즌6의 한 에피소드에서 시속 50마일로 달리지
않으면 죽는 남자로 크랜스턴을 캐스팅했고, 그가 어두운 내면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임을 알고 있었다. 크랜스턴 역시 <말콤네 좀 말려줘> 이후로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낼 만한 캐릭터를 거듭 제안 받는 것에 대한 신물이 난 상태였고, 새로운 전환점을 찾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마약계의 대부가 될 남자일
것이라 예상하진 못했지만.
혹시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를
봤다면 크랜스턴이 출연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아마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라이언 가문의 4형제 중 막내를 제외한 모두가 전사했다는 보고를 받는 육군대령으로 잠시 등장할 뿐이니까. 심지어 엔딩 크레딧에도 '육군대령(War
Department Colonels)'이라는 역할로 표기되는, 이름도 없는 역할이었다. <브레이킹 배드> 이전까지의 크랜스턴의 경력을 보면 그가
할리우드에서도 특별히 언급될만한 배우로 꼽히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를 통해 그의 이름은 할리우드에서도 자주
오르내렸던 것이 틀림없다. 2011년부터 크랜스턴의 필모그래피에 지각변동이 생긴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테이젼>(2011)과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2011) 등
주목할만한 감독의 작품에서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고, 1990년도에 발표된 동명 SF고전을 리메이크한 <토탈리콜>(2012)과 벤 애플렉의 연출작이자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스릴러물
<아르고>(2012)에서는 시선을 끄는 역할로 자리하며 배우로서의 경력에 무게를
더했다. 심지어 범죄스릴러물인 <콜드 컴즈 나잇>(2013)에선 포스터에서부터 그에 대한 존재감이 달라졌음을 깨닫게 만든다. 동명 블록버스터를 리메이크한 <고질라>(2014)에서도 비중은 적지만 확실한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크랜스턴은 그의 인생에서 두고두고 중요하게 언급될 작품과 조우하게 된다.
전세계가 냉전으로 얼어붙은 1950년대에 매카시즘 광풍이 한창이던
미국을 배경에 둔 <트럼보>는 반공산주의를 표방하며
반자유적인 횡포를 일삼던 정부의 태도에 반기를 든,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에 관한 실화를
다룬 전기물이다. 할리우드의 인기작가였던 트럼보는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겠다는 명목으로
사회적 공포를 주입하는 반미활동위원회에 맞선 인물이다. 덕분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할리우드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된 그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11개의 가명을 쓰고 B급 영화 시나리오를 대량생산하게 된다. 할리우드의 명품 작가라는
명예 대신 이야기를 만드는 기술자로서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가족을 위해 자신이 추구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된다는 과정이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를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또한 연신 시나리오를
써내며 얻은 스트레스를 가족에게 전이시키며 의도와 달리 가족의 불행을 조장하는 트럼보의 히스테릭한 면모는
<브레이킹 배드>에서 악인의 카리스마에 탐닉하며 가족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월터
화이트의 이중성과 닮아있다. 크랜스턴은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처음 노미네이트됐다.
브래드 퍼먼이 연출한 범죄 스릴러물 <링컨 차를 탄 변호사>(2011)에 출연한 바 있는 크랜스턴은 브래드 퍼먼의 차기연출작인 <인필트레이터: 잡입자들>(2016)에서 주연을 맡았다. <트럼보>와 마찬가지로 실화를 바탕에 둔 이 작품은 콜롬비아의
마약왕이었던 파블로 에스코바의 마약 거래 내역을 확보하고자 5년간 잠입 수사를 펼친 미국의 관세청 특수요원
로버트 마주르에 관한 작품이다.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가 하이젠버그라는 가명으로 신분 세탁을 하며 마약을 제조한 것처럼 <인필트레이터: 잠입자들>의 로버트 마주르는 밥 무셀라라는 가명으로 신분을
위장해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에 접근하고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무엇보다도 <브레이킹 배드>와
<트럼보> 그리고 <인필트레이터: 잠입자들>은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가장의 진심과 그 내면에
잠재된 캐릭터의 양면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브라이언 크랜스턴이라는 배우의 장기를 대변하는 공통분모의 사례처럼 보인다. 온화한 인상 뒤편에 잠재된 폭력성, 윤리적인 언어와 행동의 내면에
자리한 일탈적 본능, 안정을 추구하면서도 때론 쾌락을 탐닉하는 부조리함. 이 모든 이중성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재능이 그가 배우의 삶을 지속해올 수 있었던 비결이었을 것이다.
"캐릭터를 이해해야 한다.
진정으로 캐릭터를 이해하면, 삼투압 되듯이 캐릭터가 스며들 거다. 거기서부터 당신은 캐릭터를 필터 삼아 생각하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거기에 한 가지 방식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식으로 그걸 이뤄내든 그 방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크랜스턴은 지난 9월에 열린 에미상 시상식에서 다시 한번 남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된 바 있다. 존 F. 케네디의 암살 이후 국정을 이어받아
대통령직을 수행한 린든 존슨에 관한 실화를 극화한 TV영화 <올
더 웨이>에서의 호연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크랜스턴이란 이름이 주는 신뢰감은 보다 명확해졌다.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나아갈 방향에 따라 걸어갈 뿐이다.
길게 흐트러진 머리와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커다란 눈에 가득한 애수. 고독한 한 마리 늑대처럼 나타나 전세계적인 팬심을 자극한 세바스찬 스탠은
우직하면서도 유연한 남자다.
마블 유니버스는 21세기 배경의 신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유럽의 신마저 뉴욕을 밟게 만든 이 맹랑한 세계관은 실제 도시를 배경에 두고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감상에 활력을 더한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2014)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로 확실하게 착륙한 세바스찬 스탠 역시 이런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코믹북에 기반을 둔 영화는 신화이지만 어떤 면에선 사람들이 논의하길 바라는 지점보다 더
많은 부분이 현실적으로 반영돼 있다.” 그렇다. 그에게 있어서 마블 유니버스는 진짜는 아니되 진짜를 겨냥하는 세계다. “많은 재향군인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사회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모른다. 사회는 더 이상 기존과 같은 방법으로 그들을 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속한 사회를 이해하는 것, 그것이 이번 작품에서 이
캐릭터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다. 그는 그 사회에서 어떻게 적응해나갈까?” 여기서 ‘이번 작품’은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를
의미하고 ‘이 캐릭터’는 당연히 스탠이 연기한 버키다. 그리고 그가 남긴 물음표에 대한 답은 마블 유니버스의 차기 라인업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다.”겸손함이 느껴지지만 스탠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알게 된다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버키는 루마니아를 배경으로 처음 등장한다. 사실 세바스찬 스탠은 흑해 연안의 항구 도시 콘스탄차에서
태어난 루마니아 출신 배우다. 하지만 그는 여덟 살의 나이에 루마니아를 떠나 오스가십트리아의 빈으로 건너갔고, 열두 살이 되던 해엔 미국으로 건너갔다. 어린 시절의 스탠에겐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스탠의 내면을 강인하게 다듬어주는 계기가 됐다. “우리 가족이 세 나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무엇을 기대해야 하고, 어디로
다다를 수 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내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지든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여겼다. 믿음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스탠이 처음으로
연기에 발을 들인 건 처음으로 국경을 넘어 당도한 빈에서였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오디션장에서
첫 역할을 얻었다. 루마니아의 노숙자 아이들 중 하나였다. 이
경험을 통해 어린 스탠은 배우라는 길에 흥미를 느꼈다고 말한다면 근사한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전철 안에서 촬영한 단편이었는데 도무지 좋아할 수 없었다. 세트장
안에서 긴시간 동안 기다린다는 건너무
지루했다.”그리고 두 번째로 국경을 넘어 정착한 미국 뉴욕에서 그가 배우를
꿈꾸게 됐다는 말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근사한 계기가 찾아온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첫 해에서야
연기를 좋아하게 됐다. 청력 장애가 있었음에도 학교 연극을 모두 책임지던 친구가 있었다. 장애에도 좌절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사실상 나를 도전하게 만들었다.”그렇게 고등학생 시절부터 배우라는 꿈을 품고 오디션에 참가하며
청사진을 그려온 스탠은 뉴저지의 예술학교에 진학하고, 1년간 영국에 있는 극단을 찾아가 연기를 수학하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선 긴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스탠은 수많은 오디션장을
전전하면서 수없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오디션장에서 마셔왔던 숱한 고배 끝에 맛본
성취가 자신을 키운 자양분이 됐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일들을
돌아보면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럽고, 마음 상하는 일이었지만
거기엔 놀라운 것도 있었다.” 그는 2년 동안 한 캐스팅 감독 앞에서 10번이 넘는 오디션을 치렀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비로소 그 캐스팅 감독에게서 합격 통보를 받아냈다.
“한 번도 붙지 못했지만, 그 캐스팅 감독님과 연결될 수 있을 때마다 오디션을 봤다. 그랬더니 다음 번엔 나를 기억하더라." 어쩌면 이런 근성이야말로 스탠이 지닌 진짜 재능일지도 모른다.
스탠은 TV시리즈 <가십걸>과 <킹스>에 출연하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조금씩 얻어나갔고
조나단 드미가 연출한 <레이첼, 결혼하다>(2008)나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2010)과 같은 준수한 영화에도 이름을 올리며 경력을 확장했으며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를 통해 대중적인 얼굴로 거듭났다. 그런데 전작인 <퍼스트 어벤져>(2011)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의 궤도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되레 뒤늦게 주목을 얻었다. 당연한 일이다. 캡틴 아메리카가 되기 전 연약한 청년이었던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를 돕는 버키 반즈는 캡틴의 전우이자
스티브의 절친으로 거듭나지만 영화의 결말부에 다다라 죽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얼굴을 두건으로 가린 채 등장하는 윈터 솔져의 정체는 영화가 공개되기 전까진 철저히 봉인된 상태였다. 물론
원작을 충실히 따라잡은 코믹북의 팬이라면 그의 전사를 명확히 짚고 있었겠지만 일반적인 관객 입장에선 윈터 솔져가 버키일 것이란 예감을 쥐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속편에서 테러 집단의 세뇌를 받고 캡틴 아메리카를 공격하는 빌런 ‘윈터 솔져’로 부활한 버키는 캡틴 아메리카가 던진 비브라늄 방패를
맨 손으로 잡아내는 장면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이를 통해 마블 유니버스는 새로운 동력을 확보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대립을 그린다는 점에서
강력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그 이벤트를 폭발시키는 버튼은 바로 버키다.
세계적인 기대감을 모으는 볼거리에서 가장 강력한 갈등을 유발하는, 그야말로 시리즈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작품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존재감을 과시한 덕분에 세바스찬 스탠의 인지도는 만월처럼 차 올랐다.
그러나 스탠은 대학시절의 은사이자 멘토로 꼽는 래리 모스의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배역을 얻고 인물에 공들이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데서 시작해라'라고
말했다. 결과보다 경험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경험을 점차 늘려나가고 있다. 리들리
스콧의 <마션>(2015)에 출연했던 스탠은 <더 브론즈>(2016)라는 코미디 영화를 통해 새로운
모습을 선보인다. 또한 J.K.시몬스와 맨디 무어가 출연하는
또 다른 코미디물 <아임 낫 히어>(2017)의
출연 계약을 마쳤고, 평소 흠모하는 배우로 꼽던 짐 캐리가 제작하는
TV시리즈에서도 등장할 예정이다. 버키의 여정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세바스찬 스탠 역시 현재진행형의 배우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의 좌우명을 따라 걸어왔다. "만약 이 일이 잘되면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보겠다.” 다행히도
이 좌우명은 스탠에게 잘못된 길을 가리키진 않은 것 같다. 그러니 멈추지 않을 것이다. 보다 즐겁게, 더욱 사랑하면서.
왕대륙이라고 했다. 쉽게 잊혀질만한 이름이 아니다. 누군가에겐 여전히 생소하겠지만 왕대륙은
이미 쓰나미 같은 팬덤을 부르는 뜨거운 이름이다. 이 남자가 문득 궁금해졌다.
발음할수록 거대하게 와 닿는 이름이다. 왕대륙이라니, 한반도는 집어삼키고도 남을만한 이름 아닌가. 그 거대한 이름이 심심찮게
들리기 시작한 건 대만영화 <나의 소녀시대>가
국내에서 개봉한 5월 11일부터였을 것이다. 대만에서 역대 흥행 최고 기록을 얻었다는 이 작품은 중국, 홍콩, 싱가포르에서도 차례대로 개봉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도장격파에 나선 무림고수와 같은 행보를 이어나가던 이 영화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국내 영화팬들에게도
심상찮은 반응을 얻었고, 올해 개봉 이후 적은 상영관 수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관객을 몰았다. 결국 대만영화 최초로 40만 관객을 돌파한 흥행작이 됐다.
<나의 소녀시대>는
대만영화뿐만 아니라 근래에 개봉한 중화권 영화 가운데서도 이례적인 흥행작이다. <응답하라 1994>처럼 1994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고, 학창시절의 우정과 사랑이라는 보편적 경험을 낭만적으로 극화했는데 이를 통해 대만이라는 지역적 정서를 뛰어넘는, 보편적 공감대와 트렌디한 매력을 전파하는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청춘이란 단어로부터 툭 튀어나와버린 듯한 캐릭터들은 자칫하면 유치하고 뻔하게 읽힐 수 있는 영화의 감정선에 특별한 숨을 불어넣는 생생한 육체가
됐다. <나의 소녀시대>의 흥행이 주연배우들을
향한 팬덤으로 이어진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유덕화의 아내가 되길 꿈꾸는 평범한 소녀 임진실을 연기한 송운화와 교내 최고의 불량학생이자 짱으로 군림하는 소년 서태우를 연기한 왕대륙을 중심으로 태풍의 눈이 형성됐다. 그리고 이런 기류를 감지한 배우들이 내한
의사를 밝히며 팬들의 술렁임도 가속화됐다. 특히 유덕화의 아내가 되길 꿈꾸는 임진실처럼 SNS상에서 왕대륙의 여자친구를 자처할 정도로 지극한 팬심을 내보이길 주저하지 않던 여성팬들의 관심이 지대했다. 지난 6월 5일에 내한한
왕대륙이 <나의 소녀시대> 상영관을 찾아 무대인사
일정을 소화했을 땐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암표까지 판매됐을 정도였다. 이에 왕대륙은 ‘비글’처럼 상영관 곳곳을 분주히 오가며 팬심에 적극적으로 부응했다. 그를 따라잡는 경호원들이 진땀을 흘릴 정도였다. 덕분에 ‘비글미’ 있는 배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렇게 1박 2일간의
짧은 일정을 꽉 채우고 돌아간 왕대륙은 한 달여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촬영 중인 영화가 있어서 겨우 시간을 내서 온 거라 일정이 빠듯했지만
내가 출연한 영화를 사랑해준 팬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자리를 갖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기분은 좋았다. 한편으론
한국에선 첫 팬미팅이라 긴장됐다.” 왕대륙이 다시 한국에 발을 디딘 건 7월 13일 새벽 1시였다. 그리고 그 늦은 시간에도 왕대륙을 마중하기 위해 인천공항에 모여든 팬들은 왕대륙의 본명인 ‘왕 따루(Wang Ta Lu)’를 외치며 선물 공세를 펼쳤다. 그리고 당일 오후, 650명에 달하는 팬들과 두 시간 여의 팬미팅을
가졌다. 팬미팅 행사가 끝나고 나서도 거의 모든 팬들과 하나하나 사진을 찍어주는데 여념이 없었다는 관계자의
전언을 듣고 그에게 한국 팬과의 만남이 어떤 의미일지 궁금했다.
“미인이 많다.” 대답을
한 뒤 상대방의 반응을 기다리는, 장난끼가 가득 배어 있는 표정에서
<나의 소녀시대>의 쉬타이위가 느껴졌다. 거창한
이름만큼이나 커다란 미소가 짓궂게 느껴지지만 결코 밉지 않은 유쾌함. “사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팬들은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해주는 거 같다. 예를 들면 그저 웃기만 해도 좋아해주고, 작은 애교에도 환호해 주니까. 다만 안타까운 점은 있다. 사실 나는 내 스스로가 굉장히 유머러스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그런 면을 제대로
이해시킬 수 없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팬들 하나하나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것이었을까.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말없이 가만히 서있는 것보다 직접 몸을 움직여서 팬들을 만나는 게 즐겁다. 다른 나라를 가도 그렇다.” 그러니까 진정 ‘비글미’가 넘치는 남자인 것이다.
1991년생인 왕대륙에게 1994년을
배경에 둔 <나의 소녀시대>는 겪어보지 못한 시절이다. 경험해 보지 못한 시절의 주인공이 됐으니 타임머신을 타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쉬타이위는 굉장히 캐주얼한 캐릭터이고 그에게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상황이 묘사된다. 게다가 러브스토리가 중심에 놓인 영화였기 때문에 1994년이란 시절이
큰 제약으로 다가오는 것 같진 않았다. 결국 내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바탕으로 연기를 했기 때문에
캐릭터에 몰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물론 거저 먹듯이 연기했다는 말은 아니다. 왕대륙이 연기한 쉬타이위는 문제아들 중에서도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대장 노릇을 하는 인물이다. “현장에서 다른 배우나 스태프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있곤 했다. 패왕
같은 캐릭터라 그에 어울리는 패기나 두목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래도 거칠고 사나운
면은 나와 다른 지점이기 때문에 성격을 조절해야 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자신과 닮았다고 느낀 점은
없었을까? “장난끼가 많다. 무엇보다도 나처럼 굉장히 귀엽다는
점?”
장난끼가 다분하고 거칠게 행동하는 쉬타이위는 마음을 바로잡고 공부에 매진하지만 심각한 편견에 맞서야 한다. 왕대륙은 그런 쉬타이위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나도 남들에게 잘 공감 받지 못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말로
부정당한 경험이 있다.” 다행히도 왕대륙은 쉬타이위처럼 삐뚤어지지 않았다. “결국 내 의지를 꺾지 않기 위해 더욱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에겐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일곱 명 정도
있다. 그 친구들이 있어서 괜찮았다. 특히 배우로 활동하는
가진동과는 15년 넘게 친구로 지냈다.” 가진동은 지난 2012년에 개봉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로 왕대륙보다도 한국에 먼저 알려진 대만 출신 배우이기도 하다. “나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남들이 뭐라고 말하는지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주변사람들과 어려움이나 고통을 나누기 보단 즐거움을 나누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 코미디를 많이 좋아한다.”
왕대륙은 코미디물에 대한 애정을 적지 않게 언급해 왔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주성치를 꼽기도 했다. 그건 배우로서의 재능이 코미디와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8년 동안 다양한 작품을 소화하면서 코미디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았다. 한번은
진지하게 정극 연기를 하고 있음에도 내가 등장할 때마다 관객들이 많이 웃는 걸 보고 내게 사람을 웃기는 소질이 있음을 알았다. 이런 재능이 있다면 제대로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소녀시대>에서 연기한 쉬타이위를 통해서도 웃음을 주고자 참고한 것이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일본만화를 좋아하는데, <슬램덩크>를 비롯해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코믹한 캐릭터 톤을 많이 참고했다. 실제로
쉬타이위는 <슬램덩크>의 강백호를 닮았다.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저돌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자상하고 따뜻한
남자. 실제로 왕대륙은 얼마 전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강백호의 그림을 게시한 적이 있다. 아무래도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왕대륙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8년간의 무명생활을 겪었다고 말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소녀시대>는 왕대륙이 배우라는 궤도에 올라 처음 성공적으로 착륙한 경유지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그에게 지난 무명시절은 어떻게 다가올지 문득 궁금했다. “사실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다. 1년 동안 한 작품도 하지 못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평생 자신에게 어울리는 캐릭터를 기다리는 것이 배우의 운명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그 시간을 보내는 게 어렵진
않았다. 결국 그 시절이 연기할 수 있는 힘으로 남겨진 것 같다.” 어쩌면
그건 처음부터 대단한 야심을 품고 연기에 도전한 것이 아니었던 덕분일지도 모른다. “로드 캐스팅을 받고
광고를 찍게 됐는데 광고에서의 연기는 짧은 시간만 허락되는 지라 내가 과연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결국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사실 당시엔 어렸을 때라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물론 지금의 왕대륙은 배우로서 진지한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스물다섯 살에 찾아온 이른 성공에 도취되지 않고자 마음을 다잡는다. “아직 젊으니까
조급해하지 않고 지금 내가 가진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해낼 거다. 천천히 시간을 들이며 다양한
이들로부터 많은 걸 배우고 싶다. 그래서 진짜로 연기하고 싶은 캐릭터를 생각해보고 언젠가는 그에 어울리는
배역이나 스토리를 직접 찾아갈 수도 있을 거다.”
<나의 소녀시대>에서
가장 특별한 이벤트는 유덕화가 깜짝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작품의 제작자로 참여하기도 한 그는 현재 중화권
배우들이 우러러보는 대배우다. 왕대륙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녀시대>에선 유덕화가 젊은 시절에 출연했던 <천장지구>의 주제가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쉬타이위가 그 시절의 유덕화를 따라 하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왕대륙은 실제
유덕화의 모습을 따라잡기 위한 디테일에 고심했다고 설명한다. “청재킷을 똑바로 입으면 안 된다. 어깨에서 벗겨질 것 같은 느낌으로 살짝 걸쳐야 한다. 유덕화는 언제나
그렇게 입었으니까.” 그러면서 익살맞게 코피를 닦는 흉내를 내며 말했다. “유덕화도 한때 거친 남자 역할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왕대륙에게
유덕화는 단순한 별이 아니다. 자신의 위치를 되짚게 만드는 북극성과 같은 존재다. “유덕화도 젊은 시절엔 다양한 역할을 많이 소화했다. 그처럼 멋진
배우가 되려면 다른 배우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왕대륙은 시간을 달릴 준비가 돼있다. “배우로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섣불리 변신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잘 할 수 있는 역할에 집중하고 좀 더 내공이 쌓이면 다른 역할을 시도해보고 싶다.”
<나의 소녀시대>는
학창시절의 아련한 짝사랑에 관한 영화다. 왕대륙에게도 영화 같은 과거가 있다. “어렸을 때 한 여학생을 좋아했는데 문제는 같은 반의 모든 남학생이 그 여학생을 좋아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고, 1년 뒤 그녀는 유학을 떠나버렸다. 그런데 그녀가 유학을 간 뒤 한 친구가 그녀도 나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기회가 된다면 그녀와 같이 <나의 소녀시대>를 보고 싶다.” 로맨틱한 사연이다. 그렇다면 왕대륙은 쉬타이위와 달리 우정보단 사랑을 선택할 수 있을까? “만약
친구와 한 여자를 두고 다투게 된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포기할 거다.” 단호했다. 그럼 아무래도 20년 동안 사랑하는 여자를 기다릴 순 없는 걸까? “물론이지. 그건 영화다! (웃음)” 역시 단호했다.
영화 촬영 스케줄 때문에 하루에 서너 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한다는 왕대륙은 한국에서 보낸 1박2일 동안에도
동분서주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인터뷰와 촬영이 끝나면 밤 비행기로 대만에 돌아간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촬영 중인 무협 판타지 영화 <교주전>의 현장으로 곧바로 돌아갈 예정이다. 게다가 성룡이 출연하는
코믹 액션물인 <철도비호>와 중국의 거장 장이모우
감독의 딸인 장말이 연출하는 판타지물 <28세 미성년>을
준비하는 등 바쁜 일정이 줄줄이 이어질 예정이다. 그러니 서울을 두 번이나 방문했음에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게 그럴만했다. 그러다 문득 서울에서 어딜 가면 좋을지 추천해달라며 왕대륙이
물었다. 하지만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아 생각할 시간을 청했다. 그리고
그와 헤어지고 나서야 답변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니 지금까지 이 글을 읽은 왕대륙의
팬들은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대신 답변을 전해주길 부탁한다. 물론 비글미 넘치게 분주한 일정을 자청하는
그가 다시 한국을 찾았을 때에도 한가하게 여유를 즐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각 같은 외모와 근육질 몸매를 지닌 헨리 카빌은 갈 수 있는 길에서 최선을 다해왔다. 그렇게 슈퍼맨이 돼서 날 수 있었지만 걷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헨리 카빌은 정말 잘 생겼다. 만약 지금이 고대 그리스 시대나 로마
시대였다면 많은 시간이 지나 훗날 지금의 시대가 됐을 때 미술 입시 학원에서 헨리 카빌의 얼굴을 본뜬 흉상을 두고 데생 연습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헨리 카빌의 학창 시절 별명이 ‘뚱보 카빌’이었다는 게 짐작이나 되는가. “아이들은 항상 짓궂게 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전혀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관점을 갖게 해줘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
이 남자, 관대하다.
하지만 신은 헨리 카빌에게 관대할 생각이 없었나 보다. 브라이언 싱어가
연출한 <슈퍼맨 리턴즈>(2006)의 슈퍼맨 역으로
오디션을 봤지만 슈퍼맨 역에 낙점된 건 브랜든 라우스였다. 물론 이 작품이 혹평에 시달리며 흥행에 고전했던
걸 생각한다면 전화위복일지도 모르겠지만. 한편 <007 카지노
로얄>(2006)에 출연해 제임스 본드가 될 수도 있었다. 감독이었던
마틴 캠벨까지도 그가 제임스 본드를 맡는 것을 지지하며 스크린 테스트까지 진행했지만 영화사에선 조금 더 나이 든 제임스 본드를 원했고 결국 다니엘
크레이그를 선택했다. 반대로 나이가 많아서 출연이 불발되기도 했다.
<트와일라잇>(2008)의 원작자 스테파니 메이어는 <몬테 크리스토 백작>(2002)의 카빌을 보고 에드워드
컬렌 역에 적격이라 생각하며 그에게 역할을 주길 원했다. 하지만 결국
17세 역할을 맡기엔 너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캐스팅 선상에서 제외됐다. 그리고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기회는 로버트 패틴슨의 것이었다. 카빌은 <해리포터: 불의 잔>(2005)에서도 로버트 패틴슨에게 기회를 내준 적이
있었다. <배트맨 비긴스>(2005)의 배트맨
역으로 거론됐던 건 오디션을 본 것도 아니었으니 앞선 사례들에 비하면 아쉬울 일도 아닐 정도다.
물론 그가 대단한 기회를 상실하면서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카빌에게
유명세를 안긴 건 영국의 문제적 왕이었던 헨리 8세를 다룬 TV시리즈 <튜더스>였다. 헨리 8세와 가까운 사이로서 그의 종잡을 수 없는 행적을 보좌한 찰스 브랜던을 연기한 카빌은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죽음을
맞이한 탓에 오랫동안 캐릭터의 명운을 지키기 힘들었던 이 시리즈가 시즌 4까지 진행되는 2007년부터 2010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남은 희귀한 인물로 등장했다. 그만큼 카빌의 인지도도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인상적인 역할은
아니었지만 매튜 본 감독의 판타지 로맨스물인 <스타더스트>(2007)와
우디 앨런의 코미디물인 <왓에버 웍스>(2009)에
출연하며 할리우드에서 경력을 쌓아나가던 카빌은 마침내 첫 번째 주연작을 얻게 된다.
그리스 신화를 배경에 둔 블록버스터 <신들의 전쟁>(2011)에서 신이 간택한 영웅 테세우스 역을 맡게 된 카빌은 특별한 주문을 받게 된다. 식스팩도 아닌 에잇팩을 만들 것. 금빛으로 반짝이는 화려한 의상과
미장센이 넘실거리는 영화적 분위기와 달리 시종일관 윗옷을 입지 않고 상체를 드러내는 신이 많은 작품에서 그의 몸은 단단한 근육으로 무장한 갑옷과도
같은 역할을 해야만 했다. 결국 체지방 6%대의 조각과도
같은 육체로 거듭난 그는 격렬한 액션신을 소화해 냈지만 심각한 혹평에 시달리며 기대 이하의 반응을 경험해야 했다.
게다가 이듬해에 공개된 액션 스릴러물 <콜드 라잇 오브 데이>(2012)에선 브루스 윌리스와 시고니 위버라는 쟁쟁한 베테랑 배우들과 함께 출연하며 기대를 모았음에도
신랄한 혹평에 시달리며 대중적으로도 좋은 반응을 얻기 어려웠다. 심지어 세계적인 평점사이트로 신선한
토마토와 썩은 토마토로 평점을 매기는 로튼토마토닷컴에선 신선도 5%를 기록하는 수모를 얻게 됐다. 하지만 다행인 건 이 작품들 이후로 카빌에게 큰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2011년, 카빌은 비로소
자신을 각인시킬 수 있는 역할을 제안하는 서류에 사인을 하게 된다. 과거 슈퍼맨이 되고자 했던 카빌은
결국 새로운 슈퍼맨 수트의 주인공으로 낙점됐다. 새로운 슈퍼맨 시리즈이자 DC 코믹스 세계관을 격발하는 첫 번째 실탄이라 할 수 있는 <맨
오브 스틸>(2013)에서 슈퍼맨을 연기하게 된 것이다. “슈퍼히어로의
신전에서 슈퍼맨은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언제나 존경 받는 캐릭터였다. 그가 빅스크린으로 복귀하는 과정의
일부가 될 수 있다니 영광스럽다.”
카빌의 말처럼 영화가 공개되기 전부터 영화화되는 슈퍼맨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지대했고 그 관심은 자연스럽게 카빌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카빌은 매일 아침마다 일어나 “나는 슈퍼맨이다”라는 주문을 외우며 최선을 다해 역할에 몰두했다. 무엇보다도 신체적으로 슈퍼맨에 걸맞은 체형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흐트러짐이 없도록 만전을 기했다. 그건 단순히 캐릭터에 어울리는 육체적 조건을 만드는 것 이상의 작업이었다. “만약
내가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활보하면 사람들은 슈퍼맨이라 생각하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책임감이 있다.”
사실 이런 책임감은 지나친 몰입이거나 과한 발상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슈퍼맨과 같은 세기적인 아이콘을 연기한다는 건 결국 슈퍼히어로의 코스튬 이상의 상징성을 입게 되는 것이다.
<맨 오브 스틸>과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2016)으로 두 번에
걸쳐 슈퍼맨을 연기한 카빌은 새로운 시대의 슈퍼맨으로서 완전히 각인됐다. 마블의 <어벤져스> 격인 DC의 <저스티스 리그>를 영화화한 두 편의 작품도 예정돼 있다. 그만큼 슈퍼맨에 걸맞은 육체를 유지하고 그 이미지를 수호하는 건 프로다운 행위이자 각오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작품이 세간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가라는 문제는 배우가 책임질 수 없는 지점이니 배우로서
노력할 수밖에.
물론 카빌이 슈퍼맨 수트만 입는 배우는 아니다. 그가 슈퍼맨으로 분한
두 작품 사이에 공개된 영화 <맨 프롬 엉클>(2015)에선
섹시하면서도 능청스러운 스파이로서의 매력을 발산한 것을 보면 카빌의 야심이 단순히 빨간 망토를 두른 슈퍼히어로에 국한돼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많은 관객들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에 제작자들이 고용하길 원하는 이름 중 하나가
되길 바란다.” 카빌의 말이 단순히 대중에게 인기를 끄는 상업적인 배우가 되길 바란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대중을
만족시킬 수 있는 연기를 통해 상업성을 인정 받을 수 있는 배우가 되길 원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리고
올해엔 보다 현실적인 인물로서 스크린에 등장할 예정이다. 그는 이라크 배경의 전쟁드라마인 <샌드 캐슬>(2016)에서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군인으로서
두 발을 땅에 딛고 싸울 예정이다. 카빌에게 슈퍼맨이란 자신이 맡은 하나의 책임감일 뿐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질 수많은 책임감을 위해 마음을 비우고 있다. “할리우드엔
나보다 멋진 사람들과 나보다 나은 배우들이 있다. 나는 그저 그들을 따라잡으며 능가하는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심각하지도, 지나치게 낙천적이지도 않은 진지함, 헨리 카빌의 가능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강렬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던 한예리는 시종일관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생각을 발음해냈다. 다른 사람처럼 서 있다가 다른 사람처럼 말했다. 완벽한 거짓말 같았다.
2009년도에 만났을 땐 배우보단 무용수로서의 삶에 초점을 맞춘 인상이었어요.
연기를 하다 보니 모든 스케줄을 연기에 맞추게 됐어요. 체력적으로도 힘들어서 전공에 방해가 될 정도로 연기를 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연기는 서른까지만 하려 했는데 스물 여덟 겨울에 이소영 대표님을 만났어요. 저라는 배우를 저보다 더 확신하고 계셨고, 이렇게까지 가능성을 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해봐야 할 것 같았어요.
결국 덕분에 여기까지 왔군요.
사실 대표님을 세 번 만나고 몇 달이 지나서야 연기를 하겠다고
했어요. 회사에 들어가면 무용을 못할 줄 알았거든요. 반대할
거라 생각했죠. 무용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저울질하게 됐죠. 하지만 대표님은 연기 외적으로
즐길 수 있는 장기가 있다는 건 배우로서 좋은 일이라고 권하셨어요. 덕분에 지금도 꾸준히 공연을 해요.
지금은 확실히 배우라는 직업에서 중력을 느끼는 셈이군요.
그럴 시기니까요. 이
일에 만족하는 한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재미있어서 하고 싶다’에서
‘잘 해보고 싶다’로 바뀐 건가요?
좋아하다 보니 욕심도 생겼어요.
연기에 대한 진심을 확인한 셈이랄까요?
그만큼 연기에 임할 때 더 치열해지진 않았나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그저 감독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 제가 생각하는 인물과 감독님이 생각하는 인물의 차이가
크면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그 차이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죠. 가끔
감독님도 잘 모르실 때가 있어서 대화를 하며 함께 찾기도 하고요.
<최악의 하루>에서
김종관 감독님과는 어떤 대화를 나눴나요?
은희가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했어요. 그리고 감독님께선 그게 늘 상대방에게 진심을 다하는 방식이라고 말했어요. 알고
보면 은희는 늘 진심인 거라고.
<최악의 하루>라는
제목처럼 은희는 최악의 상황에 내몰리는데 사실 최악의 상황으로 스스로를 내몬다는 점에서 정말 최악이죠. 그런
은희를 어떻게 이해하고 연기했나요?
'은희가 만나는 남자들이 원하는 은희는 누굴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들 각자가 원하는 은희를 표현해주고자 했죠. 그들이 생각하는 각자의 은희에 부합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래서 리액션만
해준다고 생각하고 연기했어요. 게다가 은희는 배우니까, 이미
거짓말하는 직업을 갖고 있잖아요.
결국 하등 나을 게 없는 남자들에게 맞춰주다 그들에게 지탄을 받는
쪽이 되니 정말 최악이죠.
사실 은희 같은 경우가 많을지도 몰라요.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상대에게 맞춰주기만 하는, 미숙한 연애를 할
때가 있잖아요.
일본배우인 이와세 료 씨와 영어로 대사를 주고 받았는데 그래서
특별한 건 없었나요?
영어를 잘 못하는 두 사람이 영어로 대사를 주고 받으니 오히려
편했어요. 더 집중해서 듣게 돼서 자연스러운 부분이 생겼죠. 리딩을
한번 했는데 감독님이 리딩을 다시 하지 말자고 하셨어요. 둘 다 영어를 잘 몰라서 '음...어...아?' 이런 제스처가 나왔는데 그 느낌이 너무 자연스러웠어요. 그런 반응을
기억하려 노력했죠.
<최악의 하루>는 8월쯤 개봉한다던데, 그 밖에도 개봉을 기다리는 작품이 많네요.
6월에 <사냥>이 공개될 거 같고, 장률 감독님의 <춘몽>도 촬영이 끝났으니 올해 안에 개봉하겠죠.
전주국제영화제는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가했어요. 심사 받는 입장에서 심사하는 입장이 됐네요.
마음 같아선 다들 뭐라도 하나씩 쥐어주고 싶었어요. 고생했을 게 보이니까. 영화제의 성격에 부합하는 영화를 선정하다
보니 제 취향과 무관한 선택도 하게 됐고, 그래서 재미있었죠. 서로
같은 작품을 선정할 땐 다들 보는 눈이 비슷하구나 싶기도 했고요.
얼마 전 칸국제영화제가 열렸는데 칸에 가보고 싶진 않나요?
가보고 싶죠. 대단한
영화제이니 기회가 생기면 좋겠죠.
결국 좋은 작품을 만날 기회가 중요하겠죠.
계속 한정적인 연기에 갇히지 않을 기회를 잡는 게 정말 중요해요. 하지만 기회를 얻는 게 쉽진 않죠.
조만간 김종관 감독님의 신작
<지나가는 마음들: 더 테이블> 촬영에
들어간다던데, 임수정, 정유미, 정은채 여배우 캐스팅이 대단하더군요. 게다가 노 개런티로 출연한다던데.
일단 시나리오가 재미있어요. 제가
나오는 부분은 정말 마음에 들었고요. 한 공간 심지어 한 테이블을 두고 인물들을 계속 바꿔가며 찍는
영화라니 재미있는 시도잖아요. 결과가 궁금해요. 이렇게 좋은
배우들과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다니 개런티는 중요하지 않았죠. 게다가 촬영분량이 총 6회차 중에 1회차 밖에 안되기도 하고요.
만약이란 말은 부질 없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돌아봤을 때 서른 전에
연기를 그만 뒀다면 아쉬운 선택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랬다 해도 무용에 만족하며 살았을 거예요. 하고 싶은 걸 못 찾았다면 속상했겠지만 무용을 사랑하니까요. 게다가
그땐 제가 이렇게 살 거라 생각하지 못했어요
반대로 연기를 하길 잘했다는 생각은?
늘 하죠.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하게 되니까요.
좋은 경험이란?
많은 사람을 만나 다양한 생각을 듣고, 얘기하는 것? 무용만 했다면 계속 무용하는 사람들만 만났겠죠. 그런데 연기를 하며 생각을 전환할 계기를 얻고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어요.
사람 만나는 게 부담스럽진 않나 봐요.
큰 부담은 없어요. 게다가
정리가 된다고 할까요? 내가 어떤 사람일지, 혼자 있으면
알기 힘들잖아요. 스스로 찾아내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타인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되는 사람인 거죠.
불편한 사람을 만나도 잘 견디나요?
그런 것 같아요. 적당히
잘 듣고 웃어주니까. 나쁜 습관이죠. 의사표현이 불확실한
거니까.
상대방에게 맞추려는 경향이 있나 봐요.
아무래도 무용을 할 땐 맞춰주는 편이었어요. 다수가 함께 무대에 올랐을 때 서로 배려하지 않으면 충돌하니까요. 그런데
영화 촬영장에선 많은 스태프들이 배우를 배려하니까 제가 맞추려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 경험에 영향을 받진 않았을까요?
의사 표명이 분명해졌다는 거? 예전보단
저에 대해 많이 묻게 됐어요. 영화 현장에선 내 관점을 정확히 전달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겨요. 그래서 분명한 생각을 전달하려 노력했어요.
촬영 현장 밖에서는?
음, 메뉴를 고를 때? (웃음) 예전엔 '먹고
싶은 거 하나 더 시켜'란 식이었는데 지금은 제가 먼저 어디 가자, 이거
먹자, 이러니까 친구들도 신기하대요.
그런데 정말 살이 찌지 않는 편인가 봐요.
사실 <육룡이
나르샤>하면서 많이 빠졌어요. 추위에 너무 떨어서. (웃음)
<육룡이 나르샤>는
첫 드라마 현장이었는데 어땠나요?
빠르게 진행되는 속도를 맞추는 게 중요했어요. 개인적으론 준비할 시간이 적어서 아쉬웠죠.
예상치 못한 등장이라 신선했는데 칼을 든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어요. 액션 연기에는 흥미가 있나요?
재미있을 거 같아요. 무용을
했던 게 도움도 됐고요. 기본적으로 쉽진 않았지만 최소한 기초부터 배우지 않아도 됐고, 어색하게 느껴지진 않았어요.
알아보는 사람이 늘지 않았나요?
늘긴 했지만 특별히 크게 신경 쓰이게 하는 분들은 없어요. 게다가 요즘은 다들 스마트폰을 보고 있으니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잘 모르잖아요.
SNS엔 관심이 없죠?
관심이 없기도 하지만 일단 부지런하질 못해요. 심지어 셀카도 못 찍고요. (웃음)
나이가 서른 셋이니 연애나 결혼에 대한 관심도 있을 텐데.
결혼보단 아이? 친구들과
모이면 '빨리 마흔 되기 전에 낳아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얘기 많이 해요. 정작 남자도 없으면서. (웃음)
당연한 일일 수 있겠지만 아이를 낳고 싶은 특별한 이유가 뭔지
묻고 싶네요.
여성으로 태어나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경험이잖아요. 남성은 알 수 없는 그리고 아이를 낳지 않으면 여자도 알 수 없는 경험이니까,
특권과 같은 경험이라 생각해요.
폴 러드에게 있어서 앤트맨 수트를 입는다는
건 새로운 도전이자 설레는 경험이었다. 동시에 이 또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앤트맨 수트도, 영화도 아니었다.
마블 스튜디오의 총제작자인 케빈 파이기는 <앤트맨>(2015)에 폴 러드를 캐스팅한 것에 대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수트를 입고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가 하찮은 사기꾼 출신인데, 그가
폴 러드 같은 사람이라고 보자. 그는 다른 사람의 집에 침입하는 등 다소 불미스러운 행동을 해도 여전히
매력적일 수 있고, 당신이 응원할만한 사람이기에 그의 구원을 만족하게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앤트맨>을 관람했거나
관람하게 된다면 이 의견에 대해서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연기한 <앤트맨>의 스콧 랭은 케빈 파이기의 말처럼 응원할만한
매력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앤트맨>의 스콧 랭은 마블 코믹스의 세계관의 영화적 세계관을 의미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히어로들 가운데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스타로드(크리스 프랫)에 비견될 수 있을 만큼 유머 감각이
차고 넘치는 캐릭터다. 동시에 MCU 안에서 유일하게 부성애를
지닌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앤트맨>은 폴 러드에게 개인적으로 진지하고 긍정적인 의미를 남긴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내 아이들과 함께 볼
수 있을 거라는 점이 정말 마음에 든다. 내 딸은 다섯 살이라 아마 별 관심이 없을 거 같은데 열 살짜리
아들은 재미있게 볼 거다. 아이들이 촬영장에 온 적이 있는데 아들이 수트와 헬멧을 보고 정신을 못 차렸다. 정말 멋진 일이라 생각했다고 하더라. 아들과 나란히 앉아서 영화를
볼 거다. 정말 좋을 것 같다.”이건 폴 러드가 아니라 <앤트맨> 속의 스콧 랭이 하는 대사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케빈 파이기가 보는 눈이 있었단 말이다.
혹자는 ‘이런 배우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을까?’ 궁금하겠지만
사실 폴 러드는 아주 오래 전부터 할리우드에서 활동해온 배우였다. 그렇다고 그가 변변찮은 무명 시절을
견딘 불운한 배우였던 건 아니다. 다만 그는 망가짐을 두려워하지 않는,
되레 뻔뻔하게 즐기는 코미디 배우로서 오랜 경력을 쌓아왔다. <앤트맨>의 캐스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 <앵커맨>(2004)은 웰 페럴과 스티븐 카렐이 출연하는 코미디물이다. 이미
두 배우의 출연만으로도 성격이 명확하게 보이는 이 코미디물에서 폴 러드는 예측불허의 얼간이 짓을 일삼는 방송뉴스팀의 직원으로 등장한다. 큼지막한 콧수염까지 붙인 채로 등장한다. 진지함이라곤 1g조차 없어 보이는 <앵커맨>의
폴 러드는 <앤트맨>의 폴 러드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면서도 종종 닮았다. <앤트맨>의 스콧 랭은
언제나 긍정적인 방향을 모색하는 인물이다. 무모하게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최선의 방향을 찾아 달려나가고
백치미 돋는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진정시키는 힘이 있다. <앤트맨>이 기존의 마블 히어로물들과 달리 가족드라마적인
안정감을 선사하는 것도 폴 러드라는 배우가 품은 그런 자질과 무관하지 않다.
앞서 언급한 <앵커맨>의 제작자였던
주드 아패토우의 연출작인 <40살까지 못해본 남자>(2007)와 <사고친 후에>(2007)에서도 폴 러드는 선하지만 어딘가
덜 떨어진 인상의 남자들과 어울리며 하향평준화된 삶을 마냥 즐기듯 전전한다. 비록 한가운데 서서 주목을
독점하는 주연 캐릭터는 아니지만 그 주변부에서 타인의 삶을 진지하게 경청하면서도 백치미 넘치는 태도로 위로를 전한다. 심지어 <아워 이디엇 브라더>(2011)에선
우울증을 호소하는 경찰에게 천진난만한 태도로 대마를 한 움큼 쥐어주다 감옥에 수감돼서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인물을 연기한다. 인간적인 공감대를 쥐어주는 것이 그에겐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준이다. “캐릭터를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앤트맨>의 스콧 랭 역시 슈퍼히어로로서 보여주는 기상천외한 활약상만큼이나 돋보이는 건 공감할만한 진심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멋진 격투신이나 화려한 시각효과가 눈엔 즐거울지 몰라도 깊이는 떨어진다. 캐릭터들과 공감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이 영화는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멋진 액션신은 물론 격투신들은 정말 최고다. 이전엔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볼 수 있을 거다. 일부 기술은 최초로
사용된 기법이기도 하고, 정말 획기적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정말 기억했으면 하는 것은 캐릭터들과 그들간의 관계다.”
물론 슈퍼히어로가 되는 과정이 그저 마음을 다스리는 것만으로 가능했을 리가. 하지만
다채로운 고생문을 열고 닫았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에 비해 폴 러드의 답변은 일관되게 유쾌한 톤을 유지한다. “촬영하는
것은 매우 즐거웠다. 솔직히 말하면 싸우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싸울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트레이닝과 액션신들을 준비하는 것 자체로도 정말 즐거웠다.” 다만 유일하게 불편한 건 와이어의 안장이었다. “원치
않는 곳으로 파고들어서. 그걸 빼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재미있더라. 공중에 매달려서 ‘이게 내 일입니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죠’라고 말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 또한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서 입는
데에만 30분의 시간이 소요되는 디테일한 수트를 입고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독특한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의상을 입게 되면 캐릭터 표현에 굉장한 도움이 된다.
서는 자세부터 다르고 생각하는 것마저 달라진다. 처음볼 땐 너무 좋아서 아찔했다. 헬맷을 처음 써봤을 땐 어린 시절에 봤던 스톰트루퍼 헬맷이 생각났다. 만약
어린 나이로 돌아가면 많은 그림을 그렸을 거다.”
한편
<앤트맨>에서 폴 러드는 단순히 연기에만 참여한 것이 아니다. <앵커맨>의 연출을 맡았던 감독 아담 맥케이와 함께 시나리오
각본에 참여했다. 사실 폴 러드에겐 이미 영화 기획과 각본, 제작
경력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앤트맨>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런 작업은 항상 저예산 코미디
작품에서 경험했던 거다. 이런 스케일에서는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그에겐 당연히 의미가
있는 도전이었다. “각본에 참여하면 모든 캐릭터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항상 캐릭터의 의도를 생각하고 내 선택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처음보다 스토리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덕분에 우린 이토록 유쾌한 앤트맨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우리가 만드는 건
영화일 뿐이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웃는 거다.
정말 진심으로 웃는 일 말이다.” 폴 러드의 말을 따르자면 그에게 있어서 영화란 인생의 낙을 찾는 여정에 가깝다. 그러니까 웃음을 찾아가기 위해 건설하는 기차 레일과도 같은
것이랄까. 참고로 폴 러드는 계약상 앤트맨 수트를 세 번 이상 입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토록 유쾌한 히어로를 볼 기회가 최소한 두 번 이상 더 남아있단 말이다. 이보다 좋을 수 있겠는가.
이미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로
꼽히는 케이트 윈슬렛은 그럼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진화를 거듭하는 배우다. 그녀는 여전히 배우로서의
삶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어줄 작품을 찾고 있다.
“나는 열셋 혹은
열네 살 때부터 항상 실제보다 나이를 더 먹은 것처럼 느꼈다.” 영국 출신으로 11세 무렵부터 연기를 배운 케이트 윈슬렛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그녀의
연기 데뷔는 13세가 된 1991년 영국의 TV시리즈물을 통해서 이뤄졌다. 스크린 데뷔작도 10대가 지나기 전인 17세에 찾아왔다. 지금은 할리우드의 대가가 됐지만 한때 B급 장르물의 대가로서 악명이
자자했던 피터 잭슨의 <천상의 피조물>(1994)이
바로 그것이었다. 끔찍한 실화를 밑그림으로 삼고 있지만 광기적인 판타지로 채색된 이 영화는 비현실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두 소녀의 기괴한 우정이 끝내 한 소녀의 어머니를 살해하기까지의 내용을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 친구의 엄마를 살해하는데 조력하는
폴린 역으로 등장하는 윈슬렛은 나이에 비해 조숙한 외모만큼이나 섬뜩한 연기력으로 눈길을 끌었고,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했다.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삼촌까지 극단에서 활동하는 배우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배우로서의 삶은 어쩌면 운명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겐 확실히 타고난 유전자가 있었던 것 같다.
윈슬렛은 제인 오스틴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이안 감독의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5)에서 연기한 마리안 대시우드 역을 통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는
영예를 얻었다. 그러니까 10대가 지나가기도 전에 케이트
윈슬렛은 배우로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에 근접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윈슬렛에게 있어서
그건 이른 경험이라기 보단 시작에 가까웠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 이후로 윈슬렛은 시대극의 경력을 이어나갔고,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해냈다. 19세기 영국에서 대담한 주제를 소설로 담아냈던 토마스 하디가 남긴 마지막 소설을
영화화한 <쥬드>는 종교적인 관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19세기 영국을 배경에 둔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다. 자신의
사촌을 사랑하게 된 여인 수를 연기한 윈슬렛은 애절한 사랑을 가로막는 시대적 한계를 절감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여인의 가련하고도 강인한 표정을
완벽하게 체화해냈다. 한편 같은 해에 공개된 <햄릿>(1996)에서는 그 유명한 오필리어를 연기한다. 아버지를 잃고
미쳐버린 뒤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오필리어의 광기에 압도적인 페이소스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타이타닉>(1997)에서도 비극과 대면하는 여인의 세계관은 거듭 이어졌다. 필연적인
비극을 향해 항해하는 배 위에서 자신이 꿈꾸는 삶과 사랑을 선택하는 열정적인 여인 로즈를 연기했다. 윈슬렛은
그렇게 비극적인 운명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여인으로서의 운명을 연기하는데 능했다. 혹은 능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윈슬렛이 연기한 여성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시대적 편견이나 관습을 견뎌내야 하거나 평범한 삶에 깃든 내밀한
욕망을 향해 손을 뻗는 경우가 많았고 그때마다 케이트 윈슬렛은 고요하면서도 강인하고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대혁명
이후로 도래한 삼엄한 공포정치 속에서 금기시된 음란소설에 탐닉하며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여인 마들렌으로 분한 <퀼스>(2000)와 무료한 삶에 찾아온 예기치 못한 불륜에 빠져드는 여성 사라를 연기한 <리틀 칠드런>(2006), 제2차 세계대전의 광풍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독일의 첩자로 내몰리게 된 여인 한나를 연기한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8)
그리고 안온하게 위장된 권태로운 삶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듯 살아가는 여인 에이프릴로 등장한 <레볼루셔너리 로드>(2009)까지, 이 모든 작품에서 윈슬렛은 저마다 다른 환경에 놓인 각기 다른 여인을 연기하면서도 결국 ‘나’라는 존재 혹은 ‘나’라는 여성에 대한 자문을 거듭한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 혹은 자신이
알고자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시대적 금기의 담을 넘거나 위장된 삶 너머로 시선을 돌린다. 이는
근작인 <레이버 데이>(2013)에서 또한 마찬가지다. 공황장애로 인해 세상과 자신의 삶을 분리시키며 유일한 가족인 어린 아들에게 기대며 살아가는데 우연히 맞닥뜨린
탈옥수로 인해 기이한 방식으로 삶을 회복해 나간다. 불안하고 예민한 심리에 묶여 깊게 침전해있던 여성으로서의
욕망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라 그녀에게 현실적인 의지를 부여한다. 금새 꺼져버릴지라도 가장 밝게 빛나는
한 순간을 위해 타오르는 성냥과도 같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의 가련한 슬픔과 강인한 의지가 동시에 전해진다. 윈슬렛은
바로 그런 배우였다.
<어 리틀 카오스>(2015)를
통해 오랜만에 시대극으로 돌아온
그녀는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의 분수 디자인을 맡기 위해 경쟁하는 정원사 사빈 역을 맡았다. “사빈느와 나 사이엔 닮은 점이 많다고 느꼈다. 그녀는 일생 동안
큰 슬픔과 어려움을 여러 번 이겨냈고, 내 삶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녀가 그 모든 슬픔과 어려움을 극복했다는 사실에 있어 존경심이 든다. 그녀는 슬픔을 질질
끌고 가지 않았으며, 세상이 그녀를 불쌍히 여길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매우 긍정적이고 흥이 많다. 시대극에서 이러한 캐릭터를 많이 만날 순 없지.” 사빈은 윈슬렛이 연기했던 시대극 속의 여자들과는 또 다른 목표를 제시했다. 한편 <타이타닉> 이후로
대작 출연을 고사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상업영화 출연 경력이 드물었던 그녀는 최근 SF시리즈물인 <다이버전트>(2014)와 <인서전트>(2015)에 연이어 출연하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그녀 스스로 새로운 경력의 필요성을 느낀 것일까?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은 독립영화를 하겠다는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절대 그렇지 않다. 모든
작품 이후에 항상 얼마나 다른 걸 보여줄 수 있을지를 고려한다. 내게 도전이 될 수 있는지, 영감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지금보다 내 직업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인지 말이다.” 그녀에게 상업적인 할리우드 대작이 도전이 되고, 영감을
줄만한 때가 된 것이다. “사실 나는 상당히 운이 좋다. 오직
나 자신을 위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불평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비범한 것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매우 흥미롭고, 도전적이며, 창조적인
자극을 주는 일을 끊임없이 해왔다.” 윈슬렛은
실패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경력을 좀처럼 쌓지 않았다. 이미 이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 중 하나로 꼽히지만
그녀의 전성기는 아직도 지나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그녀는 길을 찾고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배우로서의 삶을 더욱 사랑하게 만드는 도전과 영감의 길 위에서, 케이트 윈슬렛이라는 이름으로.
셰익스피어 해석의 권위자로 꼽히는 감독
케네스 브래너는 언젠가부터 셰익스피어의 것이 아닌 세계를 탐하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를 등진 것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어깨 너머로 새로운 세상을 탐구한다는 말이다.
케네스 브래너가 마블 유니버스와 디즈니 왕국에 접근하는 방식은 기존에 자신이 해왔던 ‘셰익스피어적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토르: 천둥의
신>(2011)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이건 거대한 규모 안에서 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다. 거창한 허구의
시나리오 한가운데 있는 인간의 이야기.” 그리고 그는 <신데렐라>(2015)에 대해서도 명확한 관점을 고수했다. “처음 이 작업에 관여하게 됐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큰 그림이 뭔지 알 거다. 그건 그 길에서 벗어나는 거야’라고.” 공통분모는
단 하나였다. “이건 셰익스피어로부터 비롯됐다.”셰익스피어적인 관점 안에서 이는 모두 지극히 가능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배우 출신 감독들과 달리 브래너는 처음부터 배우이자 감독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력 초기부터 카메라 뒤에 서서 ‘액션!’과 ‘컷!’을 외쳤다. 물론
자신의 연출작에서 주연을 맡게 되는 경우엔 예외였지만. 그리고 그의 데뷔 연출작인 <헨리 5세>(1989)부터
그 예외적인 경력이었다. 휴전 중이던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을 재개하며 프랑스에 상륙해 대승을 거둔 영국의
왕 헨리 5세에 관한 작품으로 대단히 비장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일관된 작품이다. 동명의 셰익스피어 희곡을 각색한 이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감독 경력에 발을 디딘 브래너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부문과 남우주연상 부문 후보로 지명되며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그의 차기작 <환생>(1991)이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것도 그런 덕분이다.
<환생>은 40여 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전생과 윤회에 관한 미스터리물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시제에 따라 흑백과 컬러 영상으로 전환되는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알프레도 히치콕의 서스펜스 감각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브래너 역시 이런 영향력을 언급한 바 있다. “항상 히치콕을
사랑했고, <환생>의 준비를 시작할 때부터 <다이얼 M을 돌려라>(1954)를
비롯해 <레베카>(1940), <스펠바운드>(1945), <오명>(1946) 등 수많은 히치콕의
영화들을 다시 봤다.”그리고 당시 브래너의 부인이었던 엠마 톰슨과
함께 자신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브래너에게 이 작품은 비평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성공적인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확고한 명성을 안겨준 건 결국 히치콕이 아니라 셰익스피어일 수밖에 없었다.
<헛소동>(1993)은
케네스 브래너라는 감독에게 있어서 대표작으로 꼽힐 만한 작품이다. 브래너 자신과 엠마 톰슨은 물론 덴젤
워싱턴, 키아누 리브스, 케이트 베킨세일, 마이클 키튼 등 대중적으로 친숙한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극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가운데서도 가장 유쾌한 작품이라 알려진 것처럼 브래너의
<헛소동>은 연극적인 연출력이 두드러지는, 유쾌하고
낭만적인 기운이 충만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이러한 성공에 고무된 덕분인지 브래너는 대작의 야심을 품게 됐는데 영국계 여류 작가인 메리 셸비의 고전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영화화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공동제작자로 참여했고,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으로 합세하며 큰 그림이 완성됐다. 브래너의 <프랑켄슈타인>은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지만 그의 전작들에 비하면 지독하게 심각하고 무거운 작품이었다. 특유의 위트나 페이소스가 실종된 이 작품에 대해서 평단의 반응은 이례적으로 차가웠다. 하지만 진정한 야심작은 따로 있었다.
브래너가 직접 각색하고 연출한 <햄릿>(1996)은 셰익스피어가 집필한 희곡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영화적인 원형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무려 네 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은 그런 노력이 반영된 결과라 해도 좋을 것이다. 원작에 등장하는 주옥 같은 대사가 고스란히 영화에서 발음되고, 모든
장면들이 존재하는 <햄릿>의 실사판은 여전히 브래너의
것이 유일하다. 높은 완성도를 평가받은 로렌스 올리비에 감독의
<햄릿>(1948) 역시 그런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브래너의 <햄릿>은
셰익스피어만을 위한 제단이 아니라 브래너 자신을 세우는 새로운 무대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중세 덴마크를 배경에 둔 셰익스피어의 원작과 달리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19세기 덴마크로 시대배경을
옮긴 브래너는 이를 통해 보다 현대적인 인상의 <햄릿>을
완성했다. 또한 대사와 인물에만 집중하는 연극적인 연출 대신 다양한 몽타주를 동원하는 영화적 기법을
통해 지극히 영화적인 <햄릿>을 완성해냈다. 또한 에너지가 넘치는 브래너 특유의 연기가 반영된 햄릿은 그 어느 햄릿보다도 재기발랄한 개성이 있다. 브래너에게 <햄릿>은
감독으로서 가장 절정의 경력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작품이다.
<햄릿> 이후로
4년이 지나서야 발표한 <사랑의 고통이 사라지다>(2000)와 그로부터 다시 6년이 지나 공개된 <당신 좋으실 대로>(2006)는 모두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영화화한 결과물이었지만 그는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통해 새로운 영광을 얻진 못했다. ‘추락’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건 확실했다. 주드 로와 마이클
케인이 출연한 <추적>(2007)은 부조리극의
대가 해롤드 핀터의 각본을 브래너 영화화한 작품으로서 그가 연극이라는 초심으로 되돌아간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각별한 인상을 준다. 그 이후로 그는 셰익스피어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것처럼 할리우드에서 최적화된 상업적 블록버스터를 연이어 연출했다. <토르: 천둥의 신>과
액션 스릴러물인 <잭 라이언: 코드네임 쉐도우>(2014) 그리고 <신데렐라>까지, 그의 최근작들은 셰익스피어의 인장이 명확했던 브래너의
과거와 완벽하게 분리된 인상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자신을 매료시킨 셰익스피어처럼 또 다른 무언가에
매료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동화는 2000년이 넘는
지난 세월 동안 다양한 문화권 안에서 구전돼서 손쉽게 응용됐고, 많은 각색을 거쳐왔다. 보다 적극적인, 더욱 21세기적인
캐릭터로, 새로운 느낌의 신데렐라를 만드는 게 중요했다.”셰익스피어에 주목하고 해체시킨 방식으로 슈퍼히어로와 고전동화의 세계관을 응시한다.
브래너의 연출 차기작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일련의 뉴스에서는 그가 <토르>의 새로운 시리즈에 복귀를 희망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물론
결과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확실한 건 케네스 브래너의 연출 차기작이 셰익스피어라는 자장 안에서 맴도는
작품이 아닐 것이란 예감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언젠가
그가 셰익스피어라는 중력으로 다시 발을 디딜지 몰라도 지금의 그는 분명 셰익스피어를 넘어선 우주로 유영하고 있다.
그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