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제목을 봤을 때 무엇이 맞고 틀리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맞고'와 '틀리다'보단 '지금'과 '그때'가 보다 중요하게 느껴졌다.
두 개의 지금 혹은 두 개의 그때. 결국 지금이라서 맞고,
그때라서 틀린 것. 이것은 결국 옳고 그름의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옳고 그른
것으로 판명해주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언제나 지금은 맞지만 언젠가 그때는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시간이라는 마술적 흐름에 관한, 굉장히 사소한
발견의 깊이.
완전히 분절된 데칼코마니 형태의 출발점에서 제각각 시작되는 두 개의 이야기. 홍상수
감독 특유의 대구 구조를 개별화시킨 두 영화는 하나의 시작을 품었으나 두 개의 우주로 분리된다. 아마
홍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새로운 전형으로 구별될만한 작품일지도. 개인적으론 <옥희의 영화> 이후로 또 한번의 전환점이라 생각했다. 하나의 시점으로 분리시킨 두 가지 삶의 체험. 정말 놀라운 영화적
경험. 사소한 일상의 톤으로 길어 올린 마술적 리얼리즘. 나는
이 영화에 어떤 찬사도 아끼고 싶지 않다. 놀랍다는 말도 부족하다.
정재영은 두 사람 몫을 하며 영화의 너비를 확장하고, 김민희는 한
사람으로서 영화의 경계를 만든다. 두 개의 정재영과 하나의 김민희가 이 영화의 대구를 완성한다. 두 방향으로서 완전한 하나의 영화. 이 영화가 놀라운 건 영화라는
체험이 삶을 어떻게 예언하는가, 삶을 어떻게 반추하는가, 정반대의
방향성을 지닌 두 가지 질문에 합당한 답을 모두 해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현재는 언제나 옳게 합리화되고, 과거는 언젠가 틀려서 부끄러워진다. 그래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하지만 우린 언제나 지금을 사는 인간이다. 부끄럽지 않고 배길 수가
없다. 그게 당연하다.
<탐정: 더 비기닝>은 버디무비로서의 장점이 강한 작품이다. 권상우와 성동일의 케미가 나쁘지 않다. 덕분에 웃음을 유발할만한 코미디로서의 장점이 발휘된다. 능력 없는 민폐 남편이자 구박덩어리로 전락한 권상우의 찌질한 연기를 보는 재미도 있다. 성동일 역시 사회와 가정에서의 이중적인 위세를 지닌 인물이란 점에서 코믹한 극적 장치가 된다. 물론 이게 남성편향적으로 설계된 코미디란 점은 좀 지적하고 싶어지지만.
문제는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추리물이란 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탐정>이라는 제목을 지우고 싶을 정도로 형편 없는 만듦새를 전시한다. 전설적인 강력계 베테랑 형사와 아마추어 추리광이 함께 사건을 풀어나간다는 골자는 흥미롭지만 베테랑 형사는 그 경력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능하고, 아마추어는 그야말로 민폐 덩어리다. 추리를 한다기 보단 완성된 시나리오를 토대로 추리를 끼워맞춘다는 인상이랄까. 추리물이란 장르 안에서 도무지 신뢰가 안 간다. 기이할 정도의 자신감이 묘할 정도.
의외로 이 영화에서 재미있게 여겨지는 건 사건현장이 아니라 각자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부부끼리의 사연이다. 밥벌이에 무능하든, 유능하든 아내보다 약한 남편들의 고충을 나누는 광경이나 밥벌이 제쳐두고 탐정질에 환장한 남편 때문에 힘들어 하는 아내 연기를 하는 서영희의 연기는 <탐정>에서 쓸만한 서브 플롯 노릇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최소한 납득이 가는 추리물로서의 구색을 맞췄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관람을 권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어설픈 슬랩스틱 따위로 범벅된 쌍팔년도 명절 코미디가 아니라 캐릭터의 특성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코미디를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점은 평가해주고 싶다. 그런 면에선 팝콘무비로서 가볍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관객들에겐 미덕이 없는 영화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개인적으로 추천하지 못하겠단 거지.
영화가 흥행한다면 누가 봐도 속편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결말이다. 이미 제목부터 '더 비기닝'이란 부제를 품고 있으니 당연히 결말에 대한 야심이 팽배한 것 같은데, 과연 어떨지. 전통적인 관점에서 추석에 먹힐 영화처럼 보이긴 한다만.
최동훈의 <타짜>가 해운대 앞바다였다면 강형철의 <타짜-신의 손>은 캐리비안 베이다. 인공 파도에 휩쓸리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지만 결국 인공 파도는 인공 파도다. 애초에 기획되지 않았던 속편이란 맹점과 한계를 그나마 강형철이 잘 메우고 이어낸 인상이지만 태생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인상. <타짜>의 캐릭터들이 차, 상, 마, 포 같아서 저마다의 파괴력도 있고, 차가 판을 휩쓰는 압도감과 마가 차를 삼키는 쾌감도 있었지만 <타짜-신의 손>은 '졸'의 향연 같아서 실력이 평준화된 선수들의 싸움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졸'전임이 뚜렷해 보여 김이 새는 지점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속편인지라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진 않아서 크게 아쉽진 않았지만 썩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러닝타임에 비해서 지루하게 느껴지진 않았다는 점에선 본래 품었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는 알다시피 <어벤져스>의 속편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자 마블 히어로 무비의 절정이다.
최근의 슈퍼히어로 무비들은 액션 롤러코스터의 수준을 넘어서 동시대의 고민이 담긴 철학을 껴안은 현대적 신화로 진화하고 있다.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이하, <윈터 솔져>)는 그 최전선에 놓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윈터 솔져>의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는 <어벤져스>(2012) 이후로 각개 전투를 펼치기 시작한 세 번째 마블 히어로다. 지난해에 성공적인 결과를 보여준 <아이언맨 3>와 <토르: 다크 월드>만큼 혹은 그 이상의 만족감을 부여할만한 작품이다.
단순히 히어로 액션물이라는 오락적인 기대감 안에서 보자면 전반적인 액션 연출은 탁월하다. 빠른 속도감과 생생한 타격감을 전달하는 극 초반부의 해상 작전신을 비롯해서 중반부의 리드미컬한 카체이싱 신, 극 후반부의 거대한 공중 액션신 등 전반적인 액션의 스케일을 조절하는 방식과 그 안에서 보여지는 역동적인 액션 연출이 잘 조율된 인상이다. 물론 극초반부터 핸드 헬드 기법을 활용하며 지나치게 화면을 흔들어 대는 탓에 시각적으로 피로해지는 경향도 없진 않지만 현장감을 살린다는 측면에선 필요악처럼 여겨지는 선택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윈터 솔져>에선 저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신구 캐릭터들이 눈에 띄는데 특히 새로운 캐릭터들의 활약상이 극의 전반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개별적인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더한다. 특히 로버트 레드포드의 등장은 이번 작품을 위한 화룡점정에 가깝다. <윈터 솔져>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내부의 적을 찾아내고 맞서 싸우는 과정을 그린다. 완벽한 우리 편이 완전한 적이 되는 상황 속에서 갖은 위기를 건너는 가운데서도 위선의 가면을 쓴 거대악의 진면목을 추적하고 폭로해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과정이 주된 맥락을 차지하고 있다. 덕분에 슈퍼 히어로 블록버스터의 외피만큼이나 정치 스릴러의 내면이 크게 와 닿는 작품인데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존재감 자체가 장르적인 중량감을 설득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를 통해서 <윈터 솔져>는 단순한 흥미를 쥐어주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영화의 이례적인 방향성을 탁월하게 제시하고 완결짓는다.
한편 주변부의 캐릭터인 닉 퓨리(사무엘 L. 잭슨)와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 또한 이번 작품을 통해서 보다 뚜렷한 자기 내면을 드러내는데 이를 통해서 극의 심리가 보다 입체적으로 확장되면서도 세계관의 정체성을 강력하게 확립해내고 있다는 인상이 느껴진다. 이는 앞으로 이어질 <어벤져스>까지의 여정을 고려한다면 대단히 흥미로운 예감을 부추긴다. 또한 그 밖에도 캡틴 아메리카의 사이드킥이라 할 수 있는 팔콘(안소니 마킨)과 관계적인 변화가 예상되는 ‘윈터 솔져’ 버키 반즈(세바스찬 스텐)의 등장 역시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를 보다 입체적으로 수식한다. 전반적으로 크고 작은 역할을 하는 캐릭터들이 단지 제 역할을 하는 수준 이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극 안에서 명확하게 세워 넣는다는 점에서 캐릭터의 존재감을 통해서 자기 생명력을 얻는 이 작품으로선 대단히 성공적인 결과물을 낳았다고 평할만하다.
사실 캡틴 아메리카는 <퍼스트 어벤져>(2011)를 통해서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었지만 인지도가 낮은 캐릭터였고, 그만큼 캐릭터에 대한 흥미도 떨어지는 인상이 강했다. 심지어 ‘캡틴 아메리카(Captain America)’라는 캐릭터명이 포함된 원제 <Captain America: First Avenger>가 <퍼스트 어벤져>라는 정식 국내 개봉명으로 확정된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아메리카’라는, 국적성이 뚜렷한 이름을 지닌 탓에 국가적 이데올로기에 대변하는 미국적 영웅의 선전도구라는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경향도 없지 않다.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는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힘을 대변하는 ‘영웅질’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라기 보단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지닌 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영웅성’의 기준을 제시하는 캐릭터다. 게다가 캡틴 아메리카는 <어벤져스>의 세계관의 근본이 되는, ‘쉴드’의 뿌리가 된 캐릭터나 다름이 없다.
캡틴 아메리카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의 선친인 과학자 하워드 스타크가 참여했던 프로젝트를 통해서 개발된 ‘슈퍼 솔저’였고, 하루 아침에 빈약한 청년에서 벗어나 건장하고 강력한 육체를 지닌 최종병기가 된 남자였다. (슈퍼 솔져 프로젝트는 훗날 헐크로 변신하는 과학자 브루스 배너가 연구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수트를 입고 미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선전 도구처럼 전선을 배회하던 그는 본래 국가에 공헌하고자 했던 자신의 의지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힘을 발휘할 기회를 얻고 위기로부터 자국의 군인들을 지켜낸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그 이름처럼 정말 ‘캡틴’이 된다. 미국적인 영웅상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영웅상을 제시한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의 순수하고 강직한 신념은 영웅으로서의 가치 그 자체를 대변한다. 게다가 그 본질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둔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통해서 본질적인 가치관을 훼손하지 않는, <어벤져스>라는 히어로 세계관이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할 본질적인 답변을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세우는 작업이란 이 세계관의 전반적인 균형을 맞추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윈터 솔져>는 캡틴 아메리카라는 개별적인 캐릭터 스핀오프로서의 완결성은 물론 <어벤저스>를 향한 다리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한 작품이라 할만하다. <어벤져스> 이후로 <아이언맨 3>와 <토르: 다크 월드> 그리고 <윈터 솔져>로 이어진 마블 유니버스의 각개 전투가 성공적인 행보를 잇고 있는 만큼 이 시너지가 내년에 개봉될 <어벤져스>의 속편에서 어떻게 폭발할 것인지 사뭇 궁금하다.
한편 장기적으론 <윈터 솔져>는 <어벤져스>의 영웅들이 맞이할 파국이라 할 수 있는 <시빌 워>의 복선이라 해도 좋은 작품이다. 마블 엔터테인먼트에서 그리는 큰 그림을 명확히 알 순 없지만 ‘어벤져스’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구한 영웅들이 활약할수록 그 세계와의 갈등은 보다 거세질 것이다. 그만큼 고뇌도 심각해질 것이며 갈등의 불도 커질 것이다.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의 신념이 향할 길은 명확하다. 세계를 구원하는 영웅들이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고 서로를 파괴하는 파국의 종주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언제나 인형 놀이를 하듯이 영화를 만들어왔던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놀랍도록 비범한 걸작이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를 거듭해서 보면 볼수록 그가 대단히 고집스러운 감독이라는 생각을 확신하게 됩니다. 한치의 흔들림 없이 상하좌우로 정갈하게 이동하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여지없이 딱 떨어지는 좌우대칭의공간 구도, 카메라가 비추는 공간 곳곳을 채운 소품들 하나하나가 모여 이루는 인위적인 완결성, 그 인위적인 풍경 안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캐릭터들의 도드라진 설정과 과장된 연극적인 연기를 펼치며캐릭터 역시 하나의 무대 장치처럼 자리잡게 만드는 배우들, 유아적인 낙천성을 끌어안은 동화적인 세계관.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이 지닌 이 모든 일관성은 그의 영화들을 특별한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특수한 개성이라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론 귀여운 소품 이상의 무언가로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한계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영화 자체가 지닌 특이한 개성에 동감하면서도 사적인 취향으로 점철된 소유물 취급을 당하기 쉽다는 말이죠. 대중적인 공감대를 얻기 쉬운 영화는 아닐 거라는 말입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기존의 웨스 앤더슨의 세계관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동원되는 모든 요소들 또한 감독의 취향과 의도에 완벽하게 복무하고 있고, 철저히통제되고 있습니다. 물론웨스 앤더슨의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그의 인형 놀이에 동참하면서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그 놀이를 즐길 것임에 분명합니다. 배우들 입장에선 이런 방식의 기회가 많지 않을뿐더러 믿을만한 감독이 쥐어준 일탈과도 같은 연기적 경험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보세요.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놀라운 캐스팅입니다. 개중 몇몇은 정말 두 신 안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 영화에 출연하는 건 그만큼 이 놀이를 즐기고 싶어한다는 방증이겠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란 감독에 대한 배우들의 선호도를 대변하는 척도가 될만한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영화는 동유럽에 위치한 가상의 국가 주브로스카의 산 꼭대기에 위치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시작됩니다. 한때 세계 최고급 호텔로 꼽히던 이 호텔의 흥망에 대해서 간략하게 브리핑하며 그 간극의 사연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기던 영화는 직접 인물의 입을 통해서 그 사연에 대해서 상세하게 구술, 정확하게는 재현하기 시작합니다. 궁극적으로<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이야기꾼의 영화입니다. 웨스 앤더슨이 지어낸 허구의 세계를 영화 속 화자의 입을 빌어서 사실적 재현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셈이죠. 언제나 그렇듯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역시 웨스 앤더슨의 전작들처럼 허무맹랑하지만 귀엽고 순진한 어드벤처의 형식을 통해서 이야기를 밀고 나갑니다.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다양한 공간들이 등장하고 그 공간과 공간의 연계는 세트를 부순 자리에 새로운 세트를 바로 지어세우듯이 동선의 연계성을 의심한다는 것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손쉽고 간편하게 이뤄집니다. 그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흥미로운 영화임에 틀림없으며 그 공간의 변화와 함께 등장하고 퇴장하는 배우들의 이름을 수집하는 것 역시 특별한 재미를 주는 작품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기존의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처럼천진난만한 낙관성으로 점철되는 영화가 아닙니다. 인물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통해서 형성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어드벤처는 웨스 앤더슨의 세계관 안에선 이례적인 폭력성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활기가 넘치고 냉소적인 유머와 개성 있는 캐릭터의 향연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 가운데서도 대단히 동적이며 과장돼 있고,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결말부에 다다르면 기존의 웨스 앤더슨표 영화들과다른, 놀라울 정도로 생소한 감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 비극성을 감정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리듯 환기시키는데 생각 이상으로 큰 울림이 남습니다. 개인적으론 웨스 앤더슨의 데뷔작인 <바틀 로켓>부터 최근작이었던 <문라이즈 킹덤>까지 단 한번도 체감해보지 못했던 상심과 애수에 가깝습니다.
기존의 웨스 앤더슨 영화들이 외부의 사건을 감독 개인의내적인 세계관에 집약시키는 방식에 가까웠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영화의 모티프가 됐을 법한 외부적인 사건을 내적인 세계관에 반영해서 인테리어했을 뿐, 그 외적인 모티프의 너비를 보존한 가운데서 보다 폭넓게 외부적인 영역으로 확장해 낸듯한 인상입니다. 영화는 여러 모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파시즘이나 나치즘이 부른 살풍경들을 연상시키는데 이런 비극성의 요소들을 극적인 소품으로 활용하지 않고정면으로 마주보며 그 의미 안으로돌진해버립니다. 결국 그 비극성을 우회하지 않고 돌파해버리는 것이죠. 결국 객석의 관객들 역시 영화와 함께 그 비극성의 통증을 고스란히 관통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 드러낸 최초의 비범함이자 거장으로서의 면모라고도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부연할 필요도 없는 걸작입니다. 게다가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가운데서도 이런 감정적인 여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웨스 앤더슨이란 창작자가품고 있었던 새로운 너비를 선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 웨스 앤더슨의 작품 가운데서 가장 오랫동안 회자될 작품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개인적으론 영화의 결말부를 지나며 가슴 속에서 종이 울리는 기분마저 느꼈습니다끼기도 했습니다. 마음의 울림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서 상영관을 벗어난 뒤에도 한동안 멍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기분이었죠.
웨스 앤더슨의 영화답게 음악의 완성도가 뛰어납니다. 명 음악감독인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와 랜달 포스터가 함께 완성한 이번 OST는 러시안 포크를 비롯해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동유럽의 악기들을 최대한 활용한 음악들로 채워져 있는데 덕분에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선율에도 영화의 특이성이 적극적으로 반영됐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것이 한편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리는 세계관의 특이성을 보다 도드라지게 반영하고 있다는 감상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화면 비율이 거듭 바뀌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1960년대에 유행했던 2.35:1의 와이드 스크린 비율을 비롯해서 1930년대에 유행했던 1.37:1, 그리고 오늘날에 자주 활용되는 1.85:1의 비율로 화면이 변하는데 이는 각각 그 시대에 유행했던 화면비를 적용한 결과라고 합니다. 화면비의 적용이란 곧 이 영화가 보여주는 엄격한 완벽주의적인 성향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그 시대의 시선을 대변하겠다는 야심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 적극적으로 반영한 최초의 현실적인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결과적인 상심이나 애수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지금 웨스 앤더슨과 같은 창작자 역시도 간과할 수 없는 폭력의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환기시키는 사실 아닐까요. 영화의 배경이 된 동유럽에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현실입니다.
올해에도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다. 작품마다 명암이 엇갈렸다. 보고 싶은 작품은 여전히 넘쳤다.
사실 생중계를 보진 못했다. 그저 결과만 실시간으로 체크했을 뿐이다. 그래서 U2의 라이브 무대를 생방송으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아쉬웠다. 게다가 사회를 맡은 엘렌 드제너러스가 꽤 진행을 잘했던 것 같다. 미국의 유명한 TV쇼 프로그램인 <엘렌 쇼>의 진행자답게 유연한 진행 실력을 뽐내면서도 시상식의 품위에 어울리는 유머를 구사한다. 시상식이 열리는 할리우드의 코닥 극장으로 피자를 배달시켜서 브래드 피트가 손수 서빙을 하게 만든 건 정말 훗날에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일 거다. 그녀가 할리우드의 대단한 배우들과 찍은 셀카가 트위터상에서 무한하게 리트윗되는 과정은 오스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도 효과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세계 최고의 배우들이 모인 현장에서 권위보다도 대단히 소소한 동료애를 목격한다는 건 할리우드가 지닌 저력을 체감한다는 것과 같다. 영화를 통해서 삶을 공유하고 있다는 동료 의식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축제를 즐기고 있다는 인상이 오랜 할리우드의 역사와 함께 해온 86년 전통의 아카데미 시상식만의 저력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상 결과를 놓고 보자면 이번 아카데미는 <그래비티>를 위한 무대였던 것 같다. 10개 부문의 후보에 올랐고, 7개 부문을 수상했다. 시각효과 부문을 비롯해서 촬영, 음향효과 등 기술 부문을 거의 독식한 건 익히 예상한 결과였다. 지난 해에 발표된 영화 중 <그래비티>만한 기술적인 성취도를 보여준 영화를 언급하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다만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주요부문에서 <그래비티>가 호명될 수 있을 지가 관건이었다. 그런 점에서 편집상과 감독상 부분 수상은 할리우드가 보기 드물게 SF영화를 인정한 결과라는 점에서 이례적이지만 한편으론 <그래비티>가 구현해낸 영상 기술이 특정한 장르적 표현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적인 영화적 감동을 전달하는데 혁혁한 매개체가 됐기 때문임을 아카데미 위원회 역시 인정한 것이 아닐까. 사실 <아메리칸 허슬>의 차지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편집상을 <그래비티>가 차지한 것도 기술적인 효과를 넘어서 영화라는 결과물로서의 완성도를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만약 <그래비티>가 작품상을 수상했다면 어땠을까? 반대로 <노예 12년>의 감독 스티브 맥퀸이 작품상 대신 감독상을 쥘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랬다면 제86회 아카데미는 역사상 꼽힐만한 오스카로 기억됐을지도 모른다. 기술적인 진보를 인정하는 의미는 더해지고 흑인 감독의 능력을 인정한 오스카로 기억됐을 테니까. 어쨌든 스티브 맥퀸은 처음으로 작품상을 수상한 흑인 감독으로 기록되며 역사에 남게 됐다. 덕분에 브래드 피트 또한 피자를 서빙했던 특별한 경험을 넘어서 배우로서 오른 적 없었던 아카데미의 단상을 제작자로서 오르게 됐다. <노예 12년>은 흑인 감독이 연출한 흑인 노예에 관한 영화라는 점에서 보다 주목을 받을만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흑인 감독이 이토록 중립적인 시각과 건조한 감정 묘사를 통해서 그 시대성을 완벽하게 사실적으로 환기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놀라운 작품이었다. 걸작의 면모가 충분한 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앞서서 설명한 이유 때문에 한편으로 대중적인 호감을 얻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건 되레 이 영화가 관객의 감정을 고양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영화가 묘사하는 시대성의 비극을 생생하고도 건조하게 전달하는, 그만큼 무겁고 엄중한 시대적 목격이 될만한 영화다. 작품상 수상은 이 영화에게 어울리는 대우처럼 보인다. 그리고 <노예 12년>은 <헝거>와 <셰임>을 통해서 자신의 재능을 줄곧 증명해왔던 스티브 맥퀸에게서 명확하게 드러난 거장의 면모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환영할만한 결과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으로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매튜 맥커너히와자레드 레토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정확하게는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 출연한 이후부터 배우 경력의 전후를 나눠버리 듯 눈부신 경력을 이어나가고 있는 매튜 맥커너히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완벽하게 메소드 배우로 진화해 버린다. 에이즈에 걸린 텍사스의 마초 역을 맡은그는 죽음의 기로에서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미국 내에서 금지된 해외 제약사의 약품을 들여오고 이를 판매하는 사업을 벌이며 불합리한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맞서는 동시에 에이즈에 대한 편견과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 속에 갇혀 살던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인물을 온 몸으로 연기한다. 단순히 체중을 얼마를 줄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 이 영화 속에서 살았던 것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장담하건대 아마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 이후로 오스카에 노미네이트된 어떤 배우도 이만한 연기를 보여줬던 적이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의 연기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 영화엔 자레드 레토도 있다. 아무래도 국내 인지도가 낮은 배우이지만 <레퀴엠>과 같은 작품에서 혹은 지난해에 개봉된 <미스터 노바디>에서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이 배우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보다 확실하게자신의존재감을 발산한다. 매튜 맥커너히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란 영화를 가득 채우는 면과 같다면, 자레드 레토는 이 영화의 결을 만드는 선과 같다. 일찍이 <영 빅토리아>와 같은 실화 바탕의 영화를 연출한바 있는 장 마크 발레를 통해서 재현되는 시대적 풍경 또한 인상적이며 두 배우의 훌륭한 연기를 위해 마련된 완벽한 무대 노릇을 한다.
한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블루 재스민>의 케이트 블란쳇이 아카데미를 수상한 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시종일관 모순된 일상을 전전하는 신경질적인 여인을 연기하며 풍자적인 웃음을 유발하다 결말부에 다다라 놀랍도록 처연한 심연의 민낯을 드러내며 영화 자체의 감정적인온도를 바꿔버린 그녀의 표정은 애초에 <블루 재스민>이란 영화가 품고 있었던 완벽한 결정과도 같았다. 물론 한편으론 <그래비티>의 산드라 블록에겐 조금 아쉬운 오스카가 아니었을까. 지난 2010년 <블라인드 사이드>로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거머쥐긴 했지만 <그래비티>는 그녀에게 대단히 특별한 작품이었을 거다. 한편으론 이번 아카데미 최대의 이변으로 꼽힐만한 루피타 니옹고의 여우조연상 수상은 지난 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프레셔스>의 모니카에게 여우조연상을 안겼던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떤 식으로든 놀라운 결과다. 납득할 수 없는 결과는 아니지만 미친 듯한 연기력을 선보인 <아메리칸 허슬>의 제니퍼 로렌스나 탁월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낸 <블루 재스민>의 샐리 호킨스를 생각한다면 두고두고 이례적인 선택으로 회자될 것만 같다.
<슈퍼배드 2>를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버린 <겨울왕국>이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한 건 역시 익히 예상한 바이지만 픽사가 아닌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한 건 최초란 점에서 특별한 사건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은 2002년에 처음 신설됐다. 게다가 전통적인 주제가의 명가였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주제가상 수상은 2000년 제72회 오스카에서 <타잔>으로 수상한 필 콜린스 이후로 무려 14년만이기도 하다. 한편 <겨울왕국> 상영 전에 짧게 소개된 단편 애니메이션 <말을 잡아라!>가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수상이 유력하다고 생각했지만 <미스터 허블롯>이란 작품에게 밀린 건 꽤나 놀라웠다. 애니메이션의 기술적인 변천사를 디즈니의 전통적인 흑백 캐릭터들을 통해서 유머러스한 연출과 테크니컬한 구현에 성공한 수작을 밀어낸 작품의 정체가 실로 궁금하다. 한편 미술상과 의상상을 수상하며 2관왕에 오른 <위대한 개츠비>는 영화가 지닌 야심에 비해서 아쉬웠던 결과물을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씁쓸한 결과처럼 보인다. 올해만큼은 내심 오스카 트로피를 노렸을지도 모를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또 다른 주연작이었다는 사실에선묘한 연민이 드는 것도 같다. SNS상에서 떠도는 레오의 아카데미 수상 실패에 관한 '짤방'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수상 실패가 인류 대화합에 기여하고 있는 것도 같다. 게다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매튜 맥커너히가 그와 함께 잠시 호흡을 맞춘신을 복기한다면동정심이 더해지는 효과가 유발되는것 같다.
물론 이번 아카데미에서 최악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던 건 <그래비티>와 함께 10개 부문 후보로 오른 <아메리칸 허슬>이었다. 이 작품이 단 한 개 부문도 수상하지 못한 건 역시 이례적이다. 사실 <아메리칸 허슬>은 영화를 만드는 기능적인 면에서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으로 보이는 반면 결과적으로 정서적인 울림이 얕은 작품처럼 느껴지긴 했다. 마치 캐릭터들의 전장처럼 보일 정도로 배우들 저마다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인상이 느껴지는이 영화는 시대를 조망하는 시야와 능수능란한 연출과 빠른 편집이 돋보이는 코미디물이지만 그 실화의 재현이 끝내특별한 감흥까지 가 닿는다는 인상을 느끼진 못했다. 뛰어난 범작을 보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것이 아마도 골든글로브에 비해서 영화적으로 보수적인 아카데미 위원회의 호응을 끌어내기엔 역부족이었을지도. 어쨌든 축제는 끝났고, <아메리칸 허슬>은 놀랍게도 무관의 제왕으로 남겨졌다.
한편 각본상을 수상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허>와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파올로 소렌티노의 연출작 <그레이트 뷰티>가 궁금하다. 해외 평에 따르면 <허>에서 호아퀸 피닉스가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줬다고 한다. <존 말코비치 되기>와 <어댑테이션>,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같이 범상치 않는 작품들을 연출해온 스파이크 존즈의 작품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또한 전작 <아버지를 위한 노래>로 한국에서도 알려진바 있었던 파올로 소렌티노의 <그레이트 뷰티> 역시 눈길을 끈다. 참고로 <그레이트 뷰티>는 6월에 개봉된다고 한다. 아직 <허>는 개봉 여부가 불투명한 인상인데 아카데미의 힘을 빌어서 개봉에 탄력을 받았으면 좋겠다. 또한 수상엔 실패했지만 스타 캐스팅 하나 없는 흑백 영화로서 주요 부문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네브라스카>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디센던트>와 <사이드웨이>, <어바웃 슈미트>와 같은 작품을 연이어 내놓은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신작이라니 어찌 기대하지 아니할 수가. 이미 해외에선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아카데미 특수를 마저 누릴 순 없을까. 우리가 아카데미를 주목하는 것도 그곳에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가 있기 때문이니까.
<미 앤 유>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말년작이 될 것임을 제외한다면 큰 특이점이 없는 작품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거나 비범한 걸작으로 분류되진 않을 거다. 하지만 노장만이 지닐 수 있는 사려 깊은 시선을 명징하게 증명하는 작품이다. <몽상가들> 이후로 무려 10년 만에 발표한 베르톨루치의 <미 앤 유>는 소소한 성장 영화에 가깝다. 물론 영화 속의 상황이란 그리 평범하지 않다. 지하실에 마련한 자신만의 아지트에서 은신을 즐기려던 소년이 이복 누나와 우연히 동거하게 되며 벌어지는 7일 간의 사연이란 그 공간성과 행위 설정의 의도로부터 어떤 지적인 메타포를 읽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든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미 앤 유>는 한 시대를 풍미한 노장이 새로운 어린 세대에게 내미는 따뜻한 손길에 가깝다. 부모 세대로부터 얻은 상처를 통해서 고립의 장벽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혹은 자신을 망가뜨릴 탐닉과 환각으로 도피하려는 동세대간의 소통을 통해서 삶에 대한 회복과 치유를 일깨울 수 있다는 조언이자 충고 혹은 그러한 믿음의 전달에 가깝다. 혁명과 자유를 꿈꾸던 20대의 유아기적 낭만을 아름다운 미장센 안에 담아낸 <몽상가들>이 역설적으로 텅빈 도구 같은 영화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미 앤 유>는 본질적인 질문에 집중하는 인상이라 결과적으로 꽉 찬 인상이기도. ‘Space Oddity’와 함께 맞이한 엔딩 시퀀스에서 소년의 얼굴을 줌인하는 엔딩 컷은 사실 보기 드물게 낡은 방식이라 생경하기도 했는데 베르톨루치라는 감독의 시대를 반추했을 땐 묘하게 다가오는 것도 같았다. 지나갈 시대를 미리 보고 있다는 기분. 그래서 어쩌면 <미 앤 유>는 베르톨루치의 유언 같은 작품일지도 모르겠다고, 내심 생각했다.
누구나 스스로 빛날 수 있길 바란다. 기회를 꿈꾼다. 별을 꿈꾼다. 엄태웅과 김민준도 별을 바라봤다. 결국 별이 됐다. 그리고 잠깐의 반짝임이 아니길 다시 꿈꾼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톱스타>로 많은 관객들을 직접 만났다. 아무래도 배우에겐 가장 긴장되면서도 설레는 순간이 아닐까?
엄태웅(이하 ‘엄’)무대인사를 하면서 상영관을 헷갈릴 정도로 많이 긴장했다. 그런데 관객들이 재미있게 봐주는 거 같더라. 나도 부산에서 처음 완성된 영화를 봤는데 박중훈 감독님이 영화를 찍으면서 “이 장면에선 관객들이 이런 감정으로 받아들일 거야”라고 했던 게 대부분 와닿더라. 정확한 생각을 갖고 정확하게 준비한 신들이 잘 그려졌다고 느꼈다.
김민준(이하 ‘김’) 현장에서 배우로서 긴가민가할 때가 있다. 그럴 때 감독님이 말했다. “약속 하나 할게. 이 부분을 영화로 보면 전혀 이상하게 안 보일 거야.” 영화를 보니까 그게 다 지켜졌더라.
엄우리 영화가 공개되기 전에 사람들이 너무 올드하지 않을까 생각했다는데 내가 객관적으로 우리 영화를 볼 순 없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올드한 영화는 아니다.
김트위터에서 마음에 드는 리뷰 하나를 발견했다.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어머니랑 함께 본 딸이 올린 것 같은데 ‘영화보고 나서 엄마랑 할 얘기가 많아서 좋다’고 했다. 할 얘기를 많이 만들어주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대가 다른 어머니와도 할 수 있는 얘기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더라.
배우가 영화를 볼 땐 무엇을 볼까?
엄요즘 밀린 영화들을 본다고 극장을 자주 찾는데 어제 <관상>을 봤다. 송강호 선배님 연기를 보니까 감탄이 절로 나오더라. 너무 잘하니까 질투하다가도 감탄하게 된다. 아무래도 단순하게 영화 자체를 보려고 하지만 결국 배우들의 연기를 많이 관찰하게 된다.
<톱스타>를 주목하도록 만드는 건 아무래도 ‘감독 박중훈’이라는 이름이다.
엄단순히 28년 동안 배우로 살아왔다는 이유로 감독이 되는 건 아닌 거 같다. 박중훈 선배님 자체가 그런 자질이 있는 사람이더라. 머리도 좋고, 리더십도 있고, 너무 좋은 감독이었다.
김항상 ‘만약 감독이 된다면?’이란 생각을 해왔던 사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독으로서의 첫 현장에서 그렇게 스태프들과의 융화를 이끌어낼 수 없었을 거다. 아무래도 배우 입장에선 감독과의 소통이 중요한데 내가 이런 감독 앞에서 제대로 연기하지 못한다면 정말 자질이 없는 배우일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탁월하게 디렉션을 주셨다.
엄 컷이 이렇게 나뉘니까, 카메라가 이렇게 들어가니까, 여기서는 어떻게 행동하는 게 더 효과적인가. 이런 기술적인 요령을 지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배우들을 잘 격려해주셨다. 그렇다고 연기에 대한 짐이 덜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런 사람이 모니터로 나를 봐준다는 것 자체로 마음이 편해지더라.
두 사람의 친근한 모습만 봐도 현장 분위기가 좋았을 거라 짐작된다.
엄단언컨대(웃음), 현장 분위기는 정말 최고였다. 물론 다른 작품에서의 현장이 별로였다는 건 아니다.
김수습하는 거야(웃음)?
엄<톱스타>가 특별했던 건 감독님이 우리를 처음 만나서 했던 약속을 거의 다 지켰다는 점이다. 감독님이 자존심을 걸고 지킨 거지. 그래서 놀라웠다. 감독님이 현장에서 싫은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바빠도 현장의 모든 사람에게 ‘야!’ 혹은 ‘너!’라고 하지 않고 이름을 불렀다.
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처음 감독으로서 현장에 서면서 머리 위에 물음표 하나 얹고 시작했을 텐데 그걸 다 설득시키고 증명해가며 현장을 끌어갔으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다.
서로에 대한 첫인상은?
엄나는 예전부터 드라마에 나오는 걸 봤고, 가끔씩 산책하다가 운동하는 모습을 본적도 있었다.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랑 친해질 사람 같지 않았다. 취미나 취향을 봐도 나와 많이 다른 사람 같으니까. 그런데 <톱스타> 덕분에 김민준이란 사람을 알게 된 게 정말 고맙다.
김태웅이 형이 한번은 “김민준이란 사람을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좋다”고 하시는데 그 말만으로도 마음을 열어주신다는 느낌이었다. 의지할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게 너무 좋다. 사실 그런 속내를 남자들끼리 털어놓긴 힘들지 않나.
엄그러니까 울면서 손 꼭 잡고 털어놔야지(웃음).
작품을 같이 한 배우들끼리 꼭 친해지는 건 아니지 않나?
엄대부분 매일 보게 되면 서로 모나지 않은 이상 친해지기는 하는데 작품 끝나면 서로 바빠지니까 소원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민준이와도 그럴 수 있겠지. 그런데 나는 민준이가 형 같았다. 뭐랄까. 신체적인 위압감 같은 게 있잖아. <톱스타>에서 민준이가 양복을 입고 서있는 뒷모습을 보는 장면이 있는데 마치 격투기 선수가 등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민준이는 동생들을 좋아하더라. 자연스럽게 동생들을 대하는데 나는 막내이다 보니까 사람 자체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그런 면에선 나보다 남자답다고 느껴졌다.
김아! 맞다. 박중훈 감독님이 뒷모습을 되게 잘 찍더라. 나도 굉장히 마음에 드는 형 뒷모습이 있었거든. 뒷모습을 잘 찍는 감독이라는 수식어는 굉장히 매력적이지 않나? 물론 앞모습이 별로라는 건 아니고(웃음). 뒷모습에 그런 페이소스를 담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뒷모습에 집중하면서 영화를 봐야겠다. 혹시 배우들 간의 기싸움을 경험한 적은 없나?
엄사실 기싸움보단 시샘이 더 정확한 단어 같은데(웃음). 가끔 그런 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다가 부각돼야 하는 인물이 죽고 다른 사람이 살아버리면 영화를 망치는 거다. 어떤 식으로든 그런 사람이 있다면 마음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이번 현장은 너무 좋았다. 캐릭터의 역할이 명확하게 구분돼있고, 감독님의 지시가 명확했으니까. 그걸 잘 못하는 감독을 만나면 정말 힘들다. 배우가 자기 캐릭터의 당위를 주장할 때마다 수긍하면서 결국 시나리오와 다른 영화를 찍어버리고 이상한 게 나오니까(웃음).
김 그런 면에서 박중훈 감독님은 명확한 기준을 갖고 있었다. 현장에서 감독들이 배우들 간에 스파크가 튀는 상태에서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고 하지만 이론적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가 만들어지긴 힘들다고, 그게 좋지도 않다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감독의 능력이 의심스러울 때 배우 입장에선 가장 힘들지 않을까.
엄서로 믿음이 없으면 그렇게 된다. 일단 생각이 별로 없는 감독이 있다. 예를 들면 “배우들끼리 상의해서 좀 챙겨주세요.” 이러면서 배우들한테 다 맡겨버리는 경우엔 너무 답답하다.
감독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없나?
엄 없었다. 멋있고 재미있어 보이지만 내가 할 일은 아닐 거 같더라. 나는 이렇게 스태프들과 현장을 꾸려서 운영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김나는 기술적인 호기심이 많긴 하다. 이 대사가 어떻게 녹음되는지, 카메라가 어떻게 움직이면서 배우의 연기를 극대화시키는지, 신기하다. 나날이 테크놀로지가 발달하면서 과거엔 힘들었던 일이 너무 쉬워진다. 필름 시절엔 불가능했던 리테이크를 디지털 시대에선 계속 가도 괜찮다. 퀄리티도 계속 좋아진다. 그렇다면 과거에 연기를 돋보이도록 만드는 방식과 지금의 방식의 차이가 얼마나 다를까라는 궁금증이 있다.
단순히 기계를 좋아해서가 아닐까?
김영화적인 호기심인 거 같다. 사실 고등학교 때부터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어도 배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배우라면 누구나 인지도 있는 배우가 되길 원한다. 그 간절한 시절을 되돌아보진 않았나?
엄처음 영화에 출연했을 땐 몇 번씩 극장에 가서 보고 그랬다. 누군가 날 알아보지 않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어쩌다가 알아봐주는 사람이 생기면 쑥스럽지만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번 작품이 다음 작품으로 이어질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만으로 연기하던 시절이었지. 계속 작품이 들어와서 연기로 돈을 벌면서 살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싸인을 해주면서 기분 좋았던 순간들, 잘 나가는 배우를 부럽게 바라봤던 기억, 그 시절이 다 <톱스타>에 있었다. 그래서 캐릭터의 감정을 잘 알겠더라.
김7년 정도 모델 생활을 하다가 97년도에 IMF 위기가 터져서 모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지방에 내려가 작은 옷 가게를 운영했는데 의상학과에 다니는 여학생들이 어느 잡지에서 스크랩한 사진을 보여주면서 사장님이랑 닮은 모델이 있다고 하더라. “이거 난데?” 그랬더니 “웃기지 마세요”라고 하는데 가슴속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정말 난데(웃음)! 어느 날 함께 일하던 ‘절친’이 그러더라. 돈은 언제든지 벌 수 있으니까 지금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그 길로 가게 접고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그 친구 말이 아니었다면 지금 그냥 동대문에서 장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고마운 친구지.
엄사실 민준이는 재주도 많고, 이것저것 관심이 많은 친구다. 신기한 물건도 많이 갖고 있어서 덕분에 현장에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김박중훈 선배님께서 농담을 잘 하시는데 어느 날은 이러셨다. “민준이는 이런 것도 알고, 저런 것도 알고, 그런데 야, 연기를 똑바로 해야지. 연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하라고(웃음).”
김민준 씨는 레스토랑도 운영하고 있고, 뭔가 생활인으로서의 안정감이 느껴진다.
김사실 매형이 운영하는 가게다. 나는 적당한 자본을 투자하고 아이디어를 던져서 내 능력을 한번 시험해보고 싶었다. ‘내가 이런 걸 해볼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과 ‘이런 거 해보면 좋을 거 같다’는 흥미가 첫 번째였다. 그런 생각 하나로 시도한 가게인데 결과적으로 재미있더라.
엄우리 부부도 가끔 가서 서비스도 얻어먹었다(웃음).
김 그런데 태웅이 형 소속사에서 우리 가게 주변에서 빙수 가게를 운영하는데 최근에 어묵을 판다더라. 우리 가게 메인이 어묵인데(웃음).
엄 빙수 팔다가 겨울에 굶어 죽게 생겼어. 그래도 우리 어묵이 너네 어묵처럼 고급스럽진 않잖아(웃음).
김어쨌든 태웅이 형도 알겠지만 연기에 도전하는 것만큼 두려운 일도 없다. 그러니까 뭔들 못하겠냐는 생각도 든다.
엄태웅 씨는 작년 초에 <네버엔딩 스토리> 제작보고회에서 관객 250만 명을 동원하면 결혼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하더니 1년 만에 결혼했다. 250만도 안됐는데(웃음).
엄그때 웨딩 컨셉트의 기자회견을 했는데 그래서 농담처럼 했던 거다. 그런데 기사가 막 나가면서 어머니한테 혼났다. 결혼하고 나선 아내한테도 혼나고(웃음). 이번엔 공약 물어봐서 아무 것도 안했다(웃음).
결혼하고 나서 변한 것이 있다면?
엄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더라. 얼굴이 변했나. 어쨌든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니까 이제 아버지 역할도 할 수 있겠더라. 예전에 드라마 <추적자>에서 손현주 선배님 연기를 보면서 나는 할 수 없겠다고 생각한 적 있었는데 지금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딸을 잃은 부모 심정을 알겠거든. 뭔가 연기할 아이템 하나가 더 생긴 것 같다고 할까? 그리고 안정적인 기분도 들고. 그래서 얼굴이 좋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김민준 씨는 아직 싱글인데 아직 결혼 생각은 없나?
김(결혼을) 맨날 생각한다(웃음). 태웅이 형도 이렇게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지만 주변에서도 결혼하면 다 행복하게 살더라. 친구인 장혁도 결혼한 이후부턴 항상 형처럼 느껴진다. “네가 결혼도 안하고 애도 없어서 말인데…”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항상 할말이 없어진다(웃음). 그래서 과연 그 기분이 뭘까 생각하기도 하고.
엄신기한 게 자주 만나는 고향 친구 두 명이 있는데 두 명 중 한 명은 단 둘이서 만나기엔 불편했는데 그 친구가 결혼하고 나도 결혼하고 서로 애도 생기니까 원래 만나던 친구보다도 그 친구한테 연락을 하게 된다. 신기하더라.
김그런데 왠지 결혼하면 책임감이 생겨서 어른스러워질까 걱정된다.
엄내가 어른스럽진 않잖아(웃음). 아마 민준이는 곧 할 거 같다. 나름 준비도 된 거 같고.
김뭔 소리야. 아직 한참 더 벌어야 돼(웃음).
엄<톱스타> 대박 나면 되지. 어쨌든 자리도 잡았고, 할 자세도 됐으니까 결혼만 하면 될 거 같은데.
최근 <나 혼자 산다>에 김민준 씨가 출연해서 길고양이 밥을 주는 걸 봤다. 원래 동물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김우리가 동물들의 자리를 뺏은 만큼 도의적인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양이에게 약간의 사료와 물을 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누군가는 그 우리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대체 어떤 면에서 얼마나 해가 된다는 건지 반문하고 싶다. 요즘은 SNS를 통해서 고양이들 입지가 좋아져서 그나마 다행이다.
대중의 주목을 받는 입장에서 삶의 괴리를 느껴본 적은 없을까?
엄사실 배우로서만 알려졌을 땐 사람들이 ‘엄태웅이네?’라고 해도 선뜻 다가오진 않았다. 그런데 <1박 2일>을 하면서 그게 무너지기 시작하더라. 나는 원래 낯을 가리고 남들한테 친근하게 다가서지 못하는 편이다. 그런데 <1박 2일>에 출연한 이후부터 어디서나 낯선 이들이 친근하게 다가오는데 내가 거기에 부드럽게 대처하지 못하니까 자꾸 힘들어서 사람 많은 곳이 꺼려지고 피하게 된다. 아내도 나랑 연애할 때 부담스러워했다. 친근한 이미지가 생기는 건 좋지만 문제는 내가 항상 사람들에게 맞춰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닐 수도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다.
김방송을 통해서 한 사람의 작은 면이 집중적으로 부각되니까 그게 그 사람의 전부라고 인식되는 면이 있다. 만약 내가 <1박 2일>에 출연했다면 나는 형과 다른 이미지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것도 나이긴 하겠지만 그 순간의 이미지가 극대화되는 거니까 그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기고 사람들에게 고착되는 것 같다.
대중들은 스타에 대한 환상을 품기도 하지만 경멸하기도 한다. 이중적인 시선이 존재한다. 항상 조심해야 하는 위치일지도 모른다.
엄부산에서 중훈이 형이 그러더라. 우리가 저 멀리 있는 별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손가락질도 하는 거라고. 그냥 어쩔 수 없는 일 같다. 말이나 글로 정하진 않았지만 어떤 규칙이 생긴 거 같다고 할까.
김정말 공인의 기준이 뭘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나는 배우로서 역할을 해주고 그 대가를 받으며 살아가는 국민 한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율권과 기본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이 침해 당하게 되면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내가 팬 미팅이나 시사회 같은 공적인 자리에서 사람들을 마주쳤을 땐 배우로서 최선을 다하는 게 맞겠지만 내 일상에서 주변 사람들이 나로 인해서 피해를 볼 정도면 양해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경계가 민감하게 느껴진다.
엄 그래서 가끔씩은 차라리 내가 그 자리에 안 갔으면 거기 계신 분들도 괜찮을 테니까 차라리 내가 집에나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싶을 때도 있다. 내가 좀 더 성숙해지면 괜찮을지, 아직까진 가리고 싶은 게 많아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
오래 전 연기를 하고 싶다는 초심이 있었듯이 지금 또 다른 초심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엄배우로서 연기하며 생활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면 이젠 그보단 큰 책임감을 느낀다. ‘열심히’가 아니라 ‘잘’ 해야 하고, 영화가 좋지 않은 평가를 얻게 되면 미안해지는 부분도 생긴다. 촬영 현장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았던 시절엔 그래서 더 못하는 게 있고, 아쉬운 게 있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있었지만 이젠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현장이 생긴 만큼 마음이 편해져서 더 할 수 있는 게 많아졌으니까 그만큼 잘 해야 한다. 그런 책임을 느낀다.
김나는 동료들의 신임을 얻는 배우가 되고 싶다. 그렇다면 관객이나 시청자들의 신임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김민준이 이 역할을 한다고 하면 ‘잘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잘됐네’라는 말, 지금은 그게 가장 갖고 싶다.
파격적인 동성애 영화로 알려진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그 어떤 멜로보다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러브스토리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지독한 멜로물입니다. ‘이별을 통한 소녀의 성장통’이란 식으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건 영화가 끝날 무렵까지 그 이별이 성장으로 해소되기 보단 통증으로 내려앉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은 길에서 마주쳤던 엠마(레아 세이두)와의 우연한 재회를 통해서 예상하지 못했던 체험들을 거듭해나갑니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은 물론 아티스트로서의 미래로 나아가는 엠마와 그 주변부의 삶에 종속되기 시작하면서 삶이 예상 밖의 궤도를 돌게 되는 셈이죠.
단순히 성정체성을 깨닫는다는 것 이상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저편으로 나아가버리는 셈이에요. 결과적으로 아델에게 있어서 엠마와의 이별이란 감정적인 단절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기회와의 단절로도 이해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죠. 그만큼 이별이라는 진통은 아델의 삶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절망이자 비통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신이 보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저편까지 나아가 그 일상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 원점으로 튕겨져 추방돼버린 셈이니까요.
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히 좋습니다. 특히 아델 역을 맡은 아델 엑사르코풀로스는 전반적으로 영화의 서사와 함께 인상이 변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인데 이별 이후의 감정적 진폭을 드러내는 후반부의 연기는 정말 연기가 아니라 실제라고 믿어질 만큼의 감정적 몰입도를 보여줍니다. 충동적인 계기로 맞닥뜨린 이별에 의한 심적인 고통이 스크린 밖으로도 절절하게 전이되는 기분이죠. 게다가 그 반대편에 선 엠마 역을 맡은 레아 세이두는 거대한 감정적 파고를 형성하는 매개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이별 이후에 남게 되는 애틋함 같은 감정의 끈을 놓지 않음으로써 극적인 페이소스를 극한으로 끌어올립니다. 두 배우의 화학작용 자체가 이 영화의 감정을 입체적인 구조로 이끌어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 영화가 화제가 된 건 대단히 수위가 높은 여성간의 섹스신이 긴 분량으로 등장한다는 점이었죠. 그런데 대단히 적나라해서 한편으론 담담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은밀하고 농염한 연출을 위한 카메라 앵글이 동원되기 보단 사물을 관찰하듯 평범한 프레임 안에서 행위가 목격되는 인상입니다. 오히려 저는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무언가를 먹을 때 보는 이의 욕구를 건드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토마토 파스타를 너무나 맛있게 먹는 장면에선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느낌이기도 했죠. 색욕보다도 식욕이 강렬하게 느껴진다니 좀 묘하지 않습니까? 그건 아마 이 영화가 섹스신을 특별한 영화적 체험처럼 위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동성애라는 소재는 이 영화의 주요한 키워드가 될 뿐,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사안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결말부에서 묘사되는 찰나의 엇갈림을 보면서 ‘운명’이란 단어에 설득 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뒤바꿀 수 없는 결과를 등 뒤에 두고 터벅터벅 걸어가야 하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끄덕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델의 뒷모습을 비추는 엔딩시퀀스의 롱테이크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건 그래서입니다. 그 너머의 삶에 대해서 염려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걸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죠. 그렇게 그 너머를 살아가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요. 사실 저는 원작의 비극적인 결말보다도 영화의 결말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죽음에 대한 연민보다도 이면의 생에 대한 호기심이 지워지지 않는 여운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한편 영화에선 프랑스의 전인적인 교육 환경을 목격할 수 있는데 학생들이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는 가두 시위를 하는 신에서 '민영화를 반대한다!'는 대사가 나올 땐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물론 불법시위라는 목적을 앞세운 과격한 진압 장면 같은 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건 비단 저뿐만이 아닐 것이라고, 문득 생각하게 되네요.
뱀파이어들이 등장하는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좀처럼 목을 물지 않는다. 매혹적인 이미지로 이빨을 드러낼 뿐이다.
‘영원히 산다’라는 말을 뒤집어 봅시다. ‘영원히 죽지 못한다’라고 생각해봅시다. 영원히 산다는 건 그만큼 권태롭고 지겨운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두 존재가 있습니다. 사람이란 단어를 굳이 수정한 건 두 존재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단히 오래된 존재처럼 말하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1세기 남짓의 경험만이 가능한 인간과 달리 그들은 수 세기 동안 인류의 역사를 살피며 살아왔습니다. 아니, 살아남았습니다. 언제, 어떤 연유로 뱀파이어가 됐는지 몰라도 태초부터 그들의 삶엔 낮이 없었던 것만 같습니다. 매우 평온하지만 은밀하고 때때로 아슬아슬한 그들만의 밤을 수 세기 동안 버텨왔습니다.
일단 뱀파이어라는 소재가 주는 장르적인 기대감을 품고 상영관을 찾았다면 대단히 곤란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짐 자무쉬가 연출한 영화라는 사실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애초에 그런 종류의 기대감을 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단히 서정적인 리듬감과 시적인 묘사로 특유의 미학적인 시선을 견지해온 짐 자무쉬의 뱀파이어물에서 장르적인 공포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낯선 것이니까요. 그리고 짐 자무쉬 특유의 미학적인 방식은 이 영화가 주목하는 뱀파이어들의 영속성과 맞아떨어지는 측면도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나른한 분위기 속에서 고상하고 우아하게 소모되는 뱀파이어들의 평범한 일상은 때때로 대단한 블랙코미디의 자질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고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Only Lovers Left Alive>라는 시적인 문장은 생각보다 절박하고 짓궂은 제목입니다. 특히 느슨하게 풀려있던 영화의 흐름을 강하게 확 당기는 듯한 결말부 덕분에 이 영화 자체가 대단히 악랄하고 재기발랄한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살아남는다’라는 절박한 감정과 직접적인 행위의 중의성을 한번에 깨닫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한편으론 뱀파이어들이 ‘인간 따위가’란 식으로 계급적인 우월성을 드러낼 때 그들이 지닌 고매한 정신이 느껴지지만 인간 세계에 기대서 자신의 삶을 연명해나가는 일상을 거듭 목격하다 보면 멸종을 앞둔 동물의 자존심을 보는 것과도 같은 아이러니가 느껴집니다.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낡아 버린 귀족 가문의 풍경 같기도 하고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됐다고 할법한 존재들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가 대단한 아이러니이기도 하죠.
나이트신으로만 점철되어 낮은 조도의 색채감으로 채워진 영화의 풍경은 그만큼 정적입니다. 어둠과 어둠을 밀어내는 조명들로 채워진 영화의 몽환적인 풍경과 비현실적인 색감 자체에서 시간의 흐름을 지워버린 듯한 근사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물들만큼이나 영속성을 지닌 듯한 소품들로부터 반시대적인 낭만 같은 것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백미는 캐스팅입니다. 틸다 스윈튼은 그냥 뱀파이어를 섭외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아요. 특유의 신비감과 중성적인 매력이 더해져서 영화의 비현실성을 강화하는 도구적인 역할도 해내고 있다는 인상도 들고요. 반대로 톰 히들스턴은 뱀파이어로서 ‘생존’과 ‘생활’이라는 현실적 화두를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캐릭터의 조합이 영화 자체의 시공간에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하도록 이끄는 것도 같고요. 서사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미아 바시코브스카와 안톤 옐친은 캐릭터의 쓰임새나 표현력이 적절합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비장한 페이소스와 역설적인 냉소를 품게 만드는 존 허트의 존재감도 탁월하고요. 완벽하다고 칭송해도 모자랍니다. 기꺼이 목을 내주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