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된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두려운 일이다. 가족을 위한 책임감은
무겁고, 세상의 풍파는 버겁지만 가족 앞에선 강인해야 한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끊임없이 휘청거리고 흔들린다. 그럼에도 아버지로서 한 걸음씩 나아간다. 그렇게 아버지는 성장한다. 그런 성장통을 겪는 아버지들에 관한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능력 있는 아버지는 부족함 없이
아들을 키웠다.아이는
건강했고,집안은
화목했으며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런데아이의 여섯 살 생일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아이가 태어났던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고,병원 관계자로부터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병원에서 아이가 바뀌었다고. 거짓말 같았지만
참말이었다.아들과
함께 했던 지난6년간의 삶이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 된 마당에서 아버지는 기로에 선다. 6년간
함께 한 정을 선택할 것인가.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유전자를 선택할 것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연출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던지는 물음표란 이렇다.
자식이 태어나면 남자는 아버지라
불린다. 하지만 아버지라 불리는 것과 아버지가 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10개월 동안 어머니의 몸 속에서 성장한다. 엄마와 함께 숨쉬고, 엄마와 함께 먹고, 엄마와 함께 잔다. 모성애라는 진부한 단어를 동원하지 않아도 어머니와
아이의 교감은 아버지가 끼어들 수 없는 한 몸에서 10개월 일찍 잉태되고, 그렇게 어머니가 된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아이란 한 몸이었던 적이
없는 미지의 존재다. 아이가 태어날 때 비로소 아버지도 태어난다. 아버지란
아이와 같은 출발선에서 함께 성장하는 존재인 것이다.
6년간 부자 관계로서 정을 나눈 아이가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 남자는 단호한 결심을 내린다. 친아들을 되찾자. 하지만 6년 만에 만난 친아들은 부유하진 않아도 자유분방한 가풍에서
자랐고, 엄격하게 일상을 통제하는 친아버지의 기대를 손쉽게 무너뜨린다.
좋은 아빠가 되기가 여간 힘들다. 심지어 자신을 길러준,
지난 6년간의 아빠를 찾아 떠나버린다. 그리고
남자는 문득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6년간 자신을 아버지라 부른 아이의 존재를, 새삼 되새긴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신을 아버지로서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엄격함을 견뎌온 것임을 알게 된다. 어린 아들의 사려 깊음이 자신의 부족한 마음을 되레 채워주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이가 아버지를
만든다.
<더 웨이>
의사인 아버지는 버클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이수 중인 아들의 미래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은 어느 날 갑자기 박사 과정
이수를 그만 두고 여행을 떠날 것이라 선언한 뒤, 정말 떠나 버린다.
하루 아침에 자신의 인생에 자부심이 됐던 아들이 등을 찌르는 배신감으로 돌변한다. 그런데
황망한 소식이 전해진다. 골프 모임 중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달려간 뒤 대서양
너머 프랑스 생장으로 날아간다. 아들이 죽었다고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폭풍에 휘말린 탓이라 했다. 아들의 유해를 챙겨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려던 아버지는 아들이
남긴 배낭을 보고 석연찮은 기분을 느낀다. 결국 아버지는 길을 나선다.
아들이 걷고자 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아들의 유골을 안고 대신 걸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더 웨이>다.
한때 아버지의 어깨에 올라타있던, 품에 안겨있던, 손을 잡고 있던 자식들은 필연적으로 아버지의 눈높이까지
자라 자기 인생을 논할 나이가 되기 마련이다. 어떤 아버지들은 자식과 대화하는 법을 익히며 진화했지만
어떤 아버지들은 더욱 깊은 침묵을 선택하며 뼈대만 남은 권위를 유지하려 한다. 그래서 자식들도 아버지
앞에선 침묵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하지만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침묵하는 건 자식이 미워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아들 혹은
딸에게 나약한 아버지로 기억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나이가 들수록 외로워진다. 침묵을 고집할수록 말할 수 있는 길은 요원해지고 전할 수 없는 진심만 고독하게 맺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선 아버지는
그 길 위에서 여러 번 아들을 마주친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빚어낸 착시겠지만 그 길에서 아버지는
비로소 아들과 대화를 나눈다. 아들이 걸었을지도 모를 길을 걸어나가면서, 아들이 봤을지도 모를 풍경을 보고, 아들이 만났을지도 모를 이들을
만나고, 아들이 느꼈을지도 모를 기쁨과 슬픔을 느낀다. 그렇게
아들을 만난다. 대화를 할 순 없지만 마음을 헤아리고 아들을 이해한다.
그리고 끝내 자신이 몰랐던 세계를 만난다. 자신이 직접 일러주지 않아도 아들이 찾아가려
했던 길을 걷고 알게 된다. 아버지의 이름에 갇혀서 보지 못했던 세계를 만난다. 아들의 마음을.
<이민자>
멕시코 불법체류자 신분인 아버지는
아들을 가난과 범죄로부터 보호하고자 좋은 학교가 있는 동네로 이사 가길 바라지만 불법체류자 신분으로는 하루 종일 녹초가 되도록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아들은 가난하면서도 매몰차지 못한 아버지가 부끄럽고 밉다. 그런 어느 날 아버지는 친척의 도움으로 트럭을 사고 청소 장비를 구매한다. 희망을
품는다. 아들에게도 들뜬 희망을 전한다. 하지만 한 순간의
방심으로 모든 걸 도둑 맞는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한심하면서도 걱정스럽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트럭을 찾으러 나선다. 그 와중에도 타인에게
너그럽고 조심스러운 아버지를 보면 울화가 치밀던 아들은 점점 아버지의 진심을 느끼고,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짚게 된다.
전통적으로 아버지는 경제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가난한 아버지는 자식 앞에서 면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가난한 아버지들은 자식에게 곧잘 미움을 받는 존재로 전락한다. 책임감을 떠안고 생업에 뛰어들며 온갖
고생을 견뎌도 여전히 가난한데 좋은 아빠가 될 기회도 아득하다. 자식 역시 밤 늦은 시간에서야 술 냄새를
풍기며 볼을 비비는 아빠에 대한 기억이 아름답기란 요원하다. 그 마음을 언젠가 이해한다 해도 대부분
늦다. 결국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분투하는 아버지의 행위란 필연적으로 외롭지만 견뎌야 하는 일이다. 자신이 추구하던 가치관이 무너지더라도 자식이 굶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자식의
행복이 인생의 우선적인 목표가 된다.
자동차 암시장에서 트럭을 찾은 아버지와
아들은 경비원 몰래 트럭을 빼내기로 결심하고 담장을 넘는다. 망을 보던 아들은 차를 탈취한 아버지가
총구를 겨누는 경비원의 경고에도 굴하지 않고 전진해 끝내 탈출하는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지른다. 언제나
착해빠져서 답답했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존경스럽다. 하지만 그 환호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경찰의 단속에 차를 세운 아버지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추방될 위기에 놓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미국인 신분을 취득한 누이에게 아들을 맡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만난 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남긴다. 가난하고 무력하기만 했던
아버지를 미워했던 소년은 아버지가 자신의 인생을 뒤로 제쳐두고 자신을 위해 살았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다.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스스로의 삶을 잊었다. 아니, 그것이 아버지의
삶이었다. 자신을 위한 삶에서 아들을 위한 삶으로 이민을 간 아버지.
어쩌면 모든 아버지들은 <이민자>일
것이다.
“나는 인생의 위기를 좋아해. 펀치를 맞아주는 거지. 계속 구석에 몰리다가 마지막에 한 방을 날릴 수 있게 해주니까.” <라라랜드>에 등장하는 이 대사는 감독 데미안 차젤레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처럼 들린다. 학창 시절, 재즈 드러머가 되길 꿈꿨던 데미안 차젤레는 재능의 한계를 체감하고 하버드 대학교 영화 연출 관련 학과에 진학했다. 일찍이 뮤지컬 영화에 매혹됐던 그는 대학 시절부터 구상했던 <라라랜드>의 영화화를 꿈꿨다. 하지만 유명한 오리지널 넘버가 없는 뮤지컬 영화에 투자할 영화사는 없었다. 결국 자신의 경험을 투영해 만든 <위플래쉬>를 연출했고, 잭팟이 터졌다. 330만 달러에 불과한 제작비를 훌쩍 뛰어넘는 50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둔 것이다. 이 성공은 <라라랜드>를 위한 담보로서 값어치가 충분했다.
데미안 차젤레는 <라라랜드>에서 과감하고 도전적인 신을 구상했다. 특히 원신원컷으로 구현된 오프닝 시퀀스부터 압도적이다. 대부분의 관객은 이 신이 어떤 트릭으로 구현된 것인지 궁금해하겠지만 이 신은 오롯이 진짜다. 세 개의 쇼트를 연결해 원 테이크 신처럼 보이게 만든 절묘한 편집술이 활용됐지만 크레인을 동원한 고공 촬영술과 무용수들의 열연만으로 완성했다. 주말 이틀 동안 LA 외곽의 고가도로를 통제하며 수많은 인파와 차량을 동원해 시간에 쫓기듯 촬영했지만 끝까지 원 테이크 촬영을 고수하며 진행했다. 촬영 전 고가도로에서의 동선을 대비해 무용수들과 숱한 리허설을 거듭해야 했고, 첫 촬영 중에 무용수가 카메라를 매단 크레인에 머리를 부딪힐 뻔한 아찔한 상황도 있었지만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과 무용수들의 집념이 진짜 스펙터클을 만들어냈다. “전통적인 할리우드 뮤지컬을 사랑하며 자란 만큼 우리가 지금 진부하다고 생각하는 당시의 영화 제작 형식을 반영해 영화를 제작하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오늘날 그 활기를 되찾고 싶었다.” 그렇다. 데미안 차젤레의 꿈이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지방 소도시에 있는 테마파크 비슷한 것을 연상시키는 <라라랜드>라는 국내 개봉명은 <LA LA LAND>라는 영문 제목을 음역한 것이다. 보다시피 제목에 LA가 세 번 등장한다. 그러니까 이는 캘리포니아 남부의 LA, 직접적으론 할리우드에 대한 은유적인 별명이다. 할리우드는 기회의 땅이다. 수많은 이들이 스타가 되기 위해 부푼 꿈을 안고 할리우드로 향하지만 대부분은 잡을 수 없는 별의 높이와 인생의 쓴맛만 체감한다. 그래서 ‘라라랜드’는 ‘환상의 세계’ 혹은 ‘비현실적인 허상’을 의미하는 단어가 됐다. 하지만 <라라랜드>는 비현실적인 허무 속에서도 별처럼 반짝이는 꿈을 안고 신음하는 영혼들을 위한 송가에 가깝다.
정체된 고가도로 위에 멈춰 선 차를 수평으로 지나치며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오프닝 시퀀스의 카메라 너머로 각기 다른 차 안의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저마다 다른 음악을 듣고 흥얼거리는, 각기 다른 얼굴의 사람들. 그렇게 수평으로 이동하던 카메라가 사선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한 여성의 얼굴을 비추자 기다렸다는 듯이 경쾌한 멜로디가 시작되고 그 여성이 차에서 나와 노래를 부르며 카메라를 향해 걸어온다. 동시에 내린 모든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춤을 추고 노래를 이어받는다. 우연히 스크린 속 풍경에 매혹된 열일곱 살 무렵의 기억을, 자신을 이 번잡한 도시까지 다다르게 만든 유년 시절의 꿈을, 그리고 언젠가 영화의 주인공이 될 자신을, 그렇다면 열일곱 살의 나와 함께 영화를 봤던 네가 나를 보게 될 것임을. 그렇다. <라라랜드>는 꿈에 관한 영화다. 그런데 단지 꿈을 이룰 ‘나’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꿈을 이룬 나를 보게 될 ‘너’를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라라랜드>는 관객에게 말을 거는 영화란 말이다.
만약 <라라랜드>를 봤다면, 영화가 시작될 때 정사각형 비율인 흑백의 화면이 좌우로 넓어지며 컬러로 바뀌는 것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스크린을 꽉 채운 영문의 세 단어를 목격했을 것이다. “Presented in cinemascope(시네마스코프로 제공됩니다).” 여기서 시네마스코프는 1950년대에 유행한 영화 상영 비율을 의미한다. 원래 1950년대 이전까지의 영화는 대부분 1.37:1의 비율, 그러니까 정사각형에 가까운 프레임으로 상영했지만 1950년대에 급속도로 발전한 TV 산업에 위협을 느낀 할리우드에서는 영화만의 장점을 보여줄 수 있는 전략이 필요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시네마스코프다. 정사각형 비율의 TV 브라운관과 차별된 스펙터클을 구현하기 위해 스크린의 가로 폭을 늘린 2.55:1의 상영 비율을 선택한 것. 결국 시네마스코프는 영화만의 어떤 것을 대변하는 선언이었다. <라라랜드>가 이를 재현하는 것도 그렇다. 지금 객석에 앉아 있는 당신에게 특별한 영화를 보여주겠다는 선언. 관객을 매혹시키는 꿈이 될 것이라는 약속.
흥분의 도가니라 할 만한 오프닝 시퀀스 이후 천연덕스럽게 차분한 현실로 돌아온 고가도로 위로 시선을 들이미는 카메라에 두 남녀가 차례로 등장한다. 그 이후로 <라라랜드>는 미아(엠마 스톤)와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의 꿈과 사랑을 좇아간다. 미아는 볼더시티라는 한적한 도시에서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할리우드로 넘어와 오디션을 전전하는 여자다. 재즈를 사랑하는 피아니스트인 세바스찬은 대중에게 외면받는 스탠더드 재즈의 현실을 개탄하며 정통 재즈를 연주하는 클럽을 열겠다는 꿈을 꾸는 남자다. 미아와 세바스찬이 사랑에 빠지는 건 단지 서로를 매력적인 이성으로 인지했기 때문이 아니다. 미아와 세바스찬은 서로의 꿈을 이해하고 응원한다. 배우가 되기 위해 시시껄렁한 오디션을 전전하는 미아에게 세바스찬은 루이 암스트롱이 되라 말한다. 단순한 트럼펫 연주자가 아닌 자신의 음악을 통해 전설적인 뮤지션이 된 루이 암스트롱처럼 당신의 이야기를 쓰고 연기해보라 권한다. 그래서 미아는 직접 무대에 올라 연기할 수 있는 희곡을 쓰기 시작한다. 언젠가 재즈만을 위한 클럽을 열겠다는 세바스찬의 꿈도 미아의 신뢰를 통해 고무된다. 자신을 위해 재즈 클럽의 이름까지 짓고 그 꿈을 응원하는 미아로 인해 삶을 긍정하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희망을 불어넣는다. 함께할 수 있는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이뤄지지 못한 꿈은 위태로운 현실을 건너야만 한다. 오래전 함께 음악을 했던 친구의 권유로 새로운 밴드의 키보디스트로 활동하게 된 세바스찬은 이상과의 괴리에 잠시 갈등하지만 안정적인 내일을 구상할 수 있다는 합리로 이를 인내한다. 재즈를 꿈꾸던 세바스찬에겐 미아라는 꿈이 생겼고, 무엇보다 소중해졌다. 그래서 안정적인 현실을 위해 잠시 꿈을 외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세바스찬을 흔들어 깨우는 건 미아다. 미아는 세바스찬에게 다시 꿈을 꾸라 말한다. 하지만 세바스찬은 이것이 나의 현실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다 결국 무명 배우의 주제 넘은 참견이라는 뉘앙스를 남긴다. 선을 넘었다. 순간적인 화를 이기지 못한 폭언은 진심이 아닐지 몰라도 금이 가버린 마음은 진실로 각인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서로의 꿈이 서로를 사랑하게 만들었지만 사랑을 지키기 위해 꿈을 포기했다는 진심이 되레 사랑을 무너뜨린다. 본래의 진심은 속절없을 뿐이다.
<라라랜드>의 결말이 가슴을 저미는 건 그래서다. 우연히 들어선 클럽에서 오래전 자신이 응원하던 꿈의 징표를 보게 된 미아의 얼굴에서, 클럽의 무대에 올라 객석에 앉아 있는 미아를 발견하고 잠시 말문을 잊게 되는 세바스찬의 얼굴에서 지나간 계절이 떠오른다. 겨울에서 봄으로, 여름으로, 가을로 계절이 지나며 쌓아온 그 시절의 꿈과 사랑이 거짓말처럼 지워졌다는 것이 실로 형형해진다. 처음으로 함께 걸어 올라간 언덕에서 티격태격하다 함께 발을 맞추고 구르며 노래하던 순간의 흥겨움이, 처음으로 함께 간 영화관에서 가까스로 손을 잡고 입을 맞추려던 떨림이, 늦은 밤에 들어선 천문대에서 함께 날아올랐던 우주의 황홀함이, 피아노에 나란히 앉아 노래하며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빛나고 있다’며 활짝 웃던 그 미소가, 배우라는 꿈과 재즈라는 꿈이 너와 내가 함께하는 우주 안에서 형형하게 빛날 것이라 믿었던 어떤 미래가. <라라랜드>의 결말부가 마음을 미어지게 만드는 건 그래서다. 그들이 함께 꿈꾸던 미래가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렸다는 사실을 목도할 때 보는 이의 억장도 함께 무너진다.
그럼에도 <라라랜드>의 결말은 보는 이의 감정을 무중력으로 띄워 올린다. 벅차오르는 환희를 체감하게 만든다. 오랜만에 재회한 두 사람의 비통한 눈빛이 끝내 미소로 다다르는 순간, 비애와 환희로 감정을 수놓는 불꽃놀이 같은 여운이 폭발한다. <라라랜드>를 비범한 결과물로 되새기게 만드는 건 아무래도 결말부다. 한때 당연하리라 믿었던, 우리라는 우주로 삶을 팽창시키진 못했지만 결국 서로가 응원하던 꿈을 완성해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는 별이 됐음을 확인하는 마지막 순간, 우리의 지난 사랑이 값진 세월을 일궈낸 것이라는 위안을 얻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그 사랑이 너와 나를 별처럼 빛나게 만드는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열정에 끌리게 돼 있어. 자신이 잊은 걸 상기시키니까.” 그렇다. 우리는 <라라랜드>를 통해 벅찬 꿈을 꾸던, 뜨겁게 사랑했던 계절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있던 그 계절 덕분에 나와 당신이 빛나는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음을, 당신과 함께한 그 시절 덕분에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믿게 만든다. 꿈꿀 수 있다는 용기와 사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양손에 쥐여준다. 그러니 용기와 희망을 쥐고 살아가야 한다. 다시 또, 꿈꾸고 사랑하기 위해서.
(Esquire Korea No_256 JANUARY 2017 'The Big Bite FILM')
영화를 예매하려다 시간 여행을 떠나는 기분을 느꼈다. 10년 전에
극장에서 봤던 영화들은 왜 다시 극장으로 돌아온 걸까?
<인생은 아름다워>,
<이터널 선샤인>, <500일의 썸머>,
<죽은 시인의 사회>, <파이트 클럽>,
<포레스트 검프>, <유주얼 서스펙트>,
<매트릭스>, <벤허>. 두서
없이 나열한 이 영화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근래에 극장에서 다시 상영된 영화들,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재개봉작이다. 그런데 왜 이 묵은 영화들은
다시 극장에서 상영된 걸까? 2015년 11월에 재개봉한
<이터널 선샤인>은 무려 32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2005년 개봉 당시 16만여 명의 관객이 이 영화를 봤으니 재개봉으로 두 배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것이다. 이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해외에서 수입한 영화를 개봉할 수 있는
판권 계약 기간은 보통 7년에서 10년 정도다. 2015년에 <이터널 선샤인>의
개봉판권을 가진 수입사는 2005년의 수입사로부터 소멸된 개봉판권을 재구입해서 재개봉시켰다. 재개봉 판권의 가격은 신작 판권의 10~30%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2015년에 재개봉된
<이터널 선샤인>은 2005년에 개봉됐을
때보다 월등히 싼 가격으로 수입했지만 두 배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으니 수배에 달하는 수익을 거둔 셈이다. 재개봉작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 것이다.
사실 2013년에도 <레옹>과 <러브레터>가
재개봉했고 각각 4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재개봉작을 블루칩으로 여기지 않았다. 시장 상황이 판이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200개 미만의 상영관에서 개봉하는 영화들이 다양성 영화로
분류된다. 중소 규모의 해외 수입영화들과 저예산 독립영화들이다.
2013년 다양성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작품은 약 18만 명을 동원한 <로마 위드 러브>였다. 이
작품을 포함해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다양성 영화는 불과 여섯 편 정도였다. 그런데 2014년엔 다양성 영화 중 18편이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심지어 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작품도 10편이나 된다. 다양성 영화 시장은 금광이 됐고, 영화 수입사들 간의 골드 러시도 시작됐다.
다양성 영화의 수입단가는 지난 2년 사이 무려 두 배 이상 상승했다. 덕분에 평균적으로 1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면 수익 실현이 가능했던
중소 규모의 수입 영화들은 2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야만 본전을 얻을 수 있다. 상영관 수는 한정돼 있고, 할리우드 대작이나 한국 상업영화들이 70~80% 이상의 상영관을 싹쓸이하는 국내 실정에서 다양성 영화들의 각축전만 치열해지고 있는 양상이란 것. "아트하우스 영화시장이 과열되면서 다양성 영화들의 수입가가 많이 상승했다. 결국 인지도가 떨어지는 수입영화들은 흥행이 어려우니 재개봉작을 싸게 들여와 개봉하는 건 상대적으로 안전한 일이
된다. 게다가 이미 인지도도 존재해서 홍보비용도 절감된다."
영화수입배급사 유로커뮤니케이션 이재진 본부장의 말처럼 신작에 비해 단가가 낮고 수익성이 충분한 재개봉작이 주목받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이는 아트하우스 영화를 수입하는 중소 규모 영화사들에겐 부담스러운 일이다.
"다양성 영화관은 한정돼서 다양성 영화들의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매주 재개봉작까지 개봉관 확보에 뛰어들다 보니 인지도가
떨어지는 신작들은 상대적으로 버티기가 어렵다." 영화사 진진의 마케팅팀 장선영 팀장의 말처럼
인지도가 형성된 재개봉작들의 시장 유입이 거세지면서 되레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수입영화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게다가 최근 멀티플렉스들이 다양성 영화의 단독 개봉을 유치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데 인지도 높은 재개봉작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만큼 개봉관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영화수입사들의 신작 수입영화들과 관객들의
접점이 좁아진 것이다.
"재개봉작들도 다양성 영화시장에서 좋은 콘텐츠가 될 수 있다. 관객 입장에선 재개봉작도 영화의 다양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다만
재개봉작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변별력이 사라지는 건 아쉽다. 수요와 공급 조절이 필요한데 소화가
안될 정도로 과잉 공급돼서 적절한 프로그래밍도 어렵고, 관객들의 피로감도 가중될 것 같다." 영화수입배급사 그린나래미디어의 유현택 대표의 말처럼 재개봉작도 다양성 영화의 한 축이 될 수 있다. 다만 긴 안목이 필요하다. 명성이 자자한 과거의 개봉작들을 극장에서
다시 만난다는 건 영화팬 입장에서도 귀한 기회다. 수입사 입장에서도 효율적인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산업 안에서 좋은 동력이 된다. 어차피 영화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잊혀질 뿐이다. 결국 시대를 넘어 관객을 만나는 영화가 존재한다는
건 일종의 귀감이 된다. 좋은 영화는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귀감. 재개봉작들은
그런 미덕을 품고 있다. 그러니 혜안이 필요하다. 지금의
영화와 과거의 영화가 공생할 수 있고, 그 중에서도 좋은 영화는 오래 살아남을 기회를 줄 수 있는, 혜안 말이다.
배우는 작품을 통해 이름을 얻는다. 브라이언 크랜스턴은 50세에 다다라서야 이름을 얻게 됐다. 정말 긴 기다림이었다. 인생의 반환점을 돈 시점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만난 배우의 절정, 어쩌면 이제야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브레이킹 배드>가
내 인생을 바꿨다." 그렇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브라이언
크랜스톤이 <브레이킹 배드>에 출연하는 동안 그의
입지는 확실히 달라졌다. 지난 2013년 다섯 번째 시즌까지
종영된 TV시리즈 <브레이킹 배드>는 2014년 에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하고, 배우 부문에서도 여우주연상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 부문까지 수상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브레이킹 배드>의 알파이자 오메가라 할 수 있는 월터
화이트를 연기한 브라이언 크랜스턴 역시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브레이킹 배드>에 출연하며 네 번째로 받는 에미상 남우주연상이었다. 이보다
좋은 결말이 없었다.
<브레이킹 배드>는
일개 고등학교 교사였던 월터 화이트가 마약 업계의 거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본래 월트
화이트를 연기할 후보로 물망에 올랐던 건 크랜스톤이 아니었다. 존 쿠삭과 매튜 브로데릭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캐스팅을 고사하면서 크랜스턴에게 기회가 넘어왔다. 제작사
입장에선 크랜스턴이 탐탁지 않았다. <브레이킹 배드> 이전에
크랜스턴은 <말콤네 좀 말려줘>라는 TV시트콤으로 익숙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7년간 악동 같은 네 아들의
장난질에 샌드백처럼 당하기만 하는 아버지 역할을 맡아온 크랜스턴이 선악의 경계를 치열하게 오가는 월터 화이트를 소화해낼 수 있을지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의 총괄프로듀서인 빈스 길리건은 크랜스턴을 믿었다. 빈스 길리건은 1998년에 연출한 <X파일>
시즌6의 한 에피소드에서 시속 50마일로 달리지
않으면 죽는 남자로 크랜스턴을 캐스팅했고, 그가 어두운 내면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임을 알고 있었다. 크랜스턴 역시 <말콤네 좀 말려줘> 이후로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낼 만한 캐릭터를 거듭 제안 받는 것에 대한 신물이 난 상태였고, 새로운 전환점을 찾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마약계의 대부가 될 남자일
것이라 예상하진 못했지만.
혹시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를
봤다면 크랜스턴이 출연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아마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라이언 가문의 4형제 중 막내를 제외한 모두가 전사했다는 보고를 받는 육군대령으로 잠시 등장할 뿐이니까. 심지어 엔딩 크레딧에도 '육군대령(War
Department Colonels)'이라는 역할로 표기되는, 이름도 없는 역할이었다. <브레이킹 배드> 이전까지의 크랜스턴의 경력을 보면 그가
할리우드에서도 특별히 언급될만한 배우로 꼽히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를 통해 그의 이름은 할리우드에서도 자주
오르내렸던 것이 틀림없다. 2011년부터 크랜스턴의 필모그래피에 지각변동이 생긴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테이젼>(2011)과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2011) 등
주목할만한 감독의 작품에서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고, 1990년도에 발표된 동명 SF고전을 리메이크한 <토탈리콜>(2012)과 벤 애플렉의 연출작이자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인 스릴러물
<아르고>(2012)에서는 시선을 끄는 역할로 자리하며 배우로서의 경력에 무게를
더했다. 심지어 범죄스릴러물인 <콜드 컴즈 나잇>(2013)에선 포스터에서부터 그에 대한 존재감이 달라졌음을 깨닫게 만든다. 동명 블록버스터를 리메이크한 <고질라>(2014)에서도 비중은 적지만 확실한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크랜스턴은 그의 인생에서 두고두고 중요하게 언급될 작품과 조우하게 된다.
전세계가 냉전으로 얼어붙은 1950년대에 매카시즘 광풍이 한창이던
미국을 배경에 둔 <트럼보>는 반공산주의를 표방하며
반자유적인 횡포를 일삼던 정부의 태도에 반기를 든,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에 관한 실화를
다룬 전기물이다. 할리우드의 인기작가였던 트럼보는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겠다는 명목으로
사회적 공포를 주입하는 반미활동위원회에 맞선 인물이다. 덕분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할리우드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된 그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11개의 가명을 쓰고 B급 영화 시나리오를 대량생산하게 된다. 할리우드의 명품 작가라는
명예 대신 이야기를 만드는 기술자로서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가족을 위해 자신이 추구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된다는 과정이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를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또한 연신 시나리오를
써내며 얻은 스트레스를 가족에게 전이시키며 의도와 달리 가족의 불행을 조장하는 트럼보의 히스테릭한 면모는
<브레이킹 배드>에서 악인의 카리스마에 탐닉하며 가족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월터
화이트의 이중성과 닮아있다. 크랜스턴은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처음 노미네이트됐다.
브래드 퍼먼이 연출한 범죄 스릴러물 <링컨 차를 탄 변호사>(2011)에 출연한 바 있는 크랜스턴은 브래드 퍼먼의 차기연출작인 <인필트레이터: 잡입자들>(2016)에서 주연을 맡았다. <트럼보>와 마찬가지로 실화를 바탕에 둔 이 작품은 콜롬비아의
마약왕이었던 파블로 에스코바의 마약 거래 내역을 확보하고자 5년간 잠입 수사를 펼친 미국의 관세청 특수요원
로버트 마주르에 관한 작품이다. <브레이킹 배드>의
월터 화이트가 하이젠버그라는 가명으로 신분 세탁을 하며 마약을 제조한 것처럼 <인필트레이터: 잠입자들>의 로버트 마주르는 밥 무셀라라는 가명으로 신분을
위장해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에 접근하고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무엇보다도 <브레이킹 배드>와
<트럼보> 그리고 <인필트레이터: 잠입자들>은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가장의 진심과 그 내면에
잠재된 캐릭터의 양면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브라이언 크랜스턴이라는 배우의 장기를 대변하는 공통분모의 사례처럼 보인다. 온화한 인상 뒤편에 잠재된 폭력성, 윤리적인 언어와 행동의 내면에
자리한 일탈적 본능, 안정을 추구하면서도 때론 쾌락을 탐닉하는 부조리함. 이 모든 이중성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재능이 그가 배우의 삶을 지속해올 수 있었던 비결이었을 것이다.
"캐릭터를 이해해야 한다.
진정으로 캐릭터를 이해하면, 삼투압 되듯이 캐릭터가 스며들 거다. 거기서부터 당신은 캐릭터를 필터 삼아 생각하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거기에 한 가지 방식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식으로 그걸 이뤄내든 그 방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크랜스턴은 지난 9월에 열린 에미상 시상식에서 다시 한번 남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된 바 있다. 존 F. 케네디의 암살 이후 국정을 이어받아
대통령직을 수행한 린든 존슨에 관한 실화를 극화한 TV영화 <올
더 웨이>에서의 호연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비록 수상은
못했지만 크랜스턴이란 이름이 주는 신뢰감은 보다 명확해졌다.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나아갈 방향에 따라 걸어갈 뿐이다.
대만에서 태어나 9살에 미국으로 넘어온 저스틴 린은 영화를 전공했고, 영화감독이 됐다.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미국에서 경계 없는 평범함과 특별함을 영화에 담아낸다.
J.J. 에이브럼스를 통해 현재진행형의 이름으로 거듭난 <스타트렉> 리부트 시리즈 중 세 번째 작품인 <스타트렉 비욘드>(2016)는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한 해에 공개될 프랜차이즈의 신작이다. “처음 J.J.에이브럼스에게 전화를 받은 뒤 이 프랜차이즈를 연출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만 며칠이 걸렸다. 프랜차이즈의 전통적인 팬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모든 것은 가슴으로부터 시작해야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섭고 두려웠다.” 그런 그에게 J.J.에이브럼스는 단호하게 조언했다. “대담해져라. 그리고 그냥 차지해라.” 그는 저스틴 린의 첫 번째 우주비행을 위한 완벽한 멘토였다.
저스틴 린이 <스타트렉 비욘드>를
연출할 수 있었던 건 당연히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블록버스터급 프랜차이즈로 성공시킨 장본인이란 점이 주요했을 것이다. 본래 혈기왕성한 젊은 캐릭터들을
앞세운 스트리트 레이싱을 그린 범죄액션물이었던 <분노의 질주>가
전세계적인 흥행가도를 기록하는 블록버스터로 체급을 올릴 수 있었던 건 저스틴 린의 공이 팔 할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J.J.에이브럼스가 <스타트렉>의 차기 지휘권을 저스틴 린에게 넘긴 이유란 이렇다. “저스틴은 자신이 대단히 뛰어난
이야기꾼임을 스스로 거듭 입증해냈다. 하지만 어떤 것보다 나를 사로잡은 건 <스타트렉>에 대한 그의 진짜 애정이었다.” 그렇다. 그는 <스타트렉>의 전통적인 팬 그러니까 ‘트레키’였다. 그의
부모님은 ‘피시 앤 칩스’를 주메뉴로 한 작은 식당을 운영했는데
보통 저녁 9시에 가게 문을 닫고 10시쯤에 집에 와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저녁식사를 마친 뒤 린과 그의 동생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모두 TV 앞에 모였다. 11시부터 방영되는 <스타트렉>을 보기 위해서였다. “8살부터 18살이 될 때까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집을 떠날 때까지 그건 우리 가족만의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스타트렉>이라는 전통적인 프랜차이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의 애정은 시리즈에 새로운 모험의 좌표를 제시하는데 유용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해체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훌륭한 프랜차이즈였고, 50년 동안 지속돼 왔으며 다른 매체들 안에서 여전히 살아있다. 나는
작가로서의 사이먼 페그와 더그 정과 함께 모여 이미 성공한 것과 검증된 것에 안주하지 말자고 했던 게 기억난다.
우리가 사랑했던 것의 DNA를 사용하면서도 앞으로 더 나아가고자 했다.” 그래서였을까. <스타트렉 비욘드>에선 프랜차이즈의 상징과도 같은 엔터프라이즈
호를 완전히 파괴시켜버린다. 오래된 팬들 입장에선 그 자체만으로 이번 작품이 파격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스타트렉 비욘드>에서는 지난 두 전작에 비해 캐릭터의 다양성이 돋보인다. 이는
전통적인 프랜차이즈에서 유지해온 캐릭터들의 다양성을 계승하는 것과 같다. 이는 저스틴 린보다도 더욱
‘트레키’에 가까운 사이먼 페그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프랜차이즈의 리부트가 시작될 때부터 함께 한 스코티 역의 배우 사이먼 페그 말이다. “<스타트렉>을 내 일부라 여길 만큼 애정을갖고 있지만
솔직히 모든 대사를 읊을 순 없다. 에피소드의 모든 제목까지 아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이먼은 가능하다!”
저스틴 린이 할리우드의 흥행감독 대열에 들어선 건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통해서였다. 빈 디젤과 폴 워커를 위시한 <분노의 질주> 프랜차이즈는 국적과 인종을 초월한 다양한
캐릭터들이 팀을 이룬 활약상을 펼치는데 이는 본래 다양성의 가치를 일상적으로 대면할 수 있는 <스타트렉>의 세계관과 닮아있다. 무엇보다도 이는 저스틴 린이 추구하던
본질적인 세계관이 <분노의 질주>에 반영된 결과에
가깝다. UCLA에서 영화를 전공하던 시절 <분노의
질주>(2001)를 본 저스틴 린은 동양계 미국인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깊은 흥미를 얻었다. 하지만 동시에 동양계 미국인이 악역만을 맡았다는 사실에 대단히 실망했다. 그리고
훗날 도쿄를 배경에 둔 세 번째 속편 <패스트 & 퓨리어스-도쿄 드리프트>(2006)의 연출 제안을 받은 뒤 그가 해낸
첫 업무는 불상이나 게이샤 소녀들로 점철된 시나리오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는 일이었다. 단순히
동양을 배경에 두거나 동양계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을 넘어 편견을 뛰어넘는 역할을 주고자 하는 것이 그의 본질적인 목표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계 미국인인 성 강이 연기한 한은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의 궁극적인
페르소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뒤로 저스틴 린이 연이어 연출한 <분노의
질주: 더 오리지널>(2009)과 <분노의 질주: 언리미티드>(2011),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2013)에서도
거듭 한이 등장해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는 것 또한 그렇다.
<베터 럭 투마로우>(2002)는 저스틴 린의 단독연출
데뷔작으로 평범한 동양계 미국인 소년들의 일상과 일탈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이 작품은 큰 호평을 얻었는데 당대의 저명한 영화평론가였던 로저 에버트는 <베터 럭 투마로우>에 대해 “단순한 스릴러도, 단순한
사회적인 다큐멘터리도, 단순한 코미디나 로맨스물도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이 명확하게 보이고 훌륭하게 완성된 영화”라고 평하며 엄지를
세웠다. 저스틴 린 자신이 성장한 LA교외의 오렌지 카운티의
한 마을을 배경에 둔 이 작품은 부족할 것이 없는 동양계 중산층 가정에서 우등생으로 자란 세 명의 고등학생 소년이 사소한 일탈에 빠져드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려나가면서도 끝내 예측 밖의 끔찍함을 여운처럼 남긴다. 이 모든 과정을 동양계 미국인이 겪는
특별한 상황이라기 보단 보편적인 이들도 저지를 수 있는 특수한 행위로 인식하게 만듦으로써 인종과 문화에 대한 차별 의식을 훌쩍 뛰어넘은 성취에
가깝다. <스타트렉>과 <분노의 질주>라는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의 캐릭터를 통해서도
이런 의식은 공평하게 배분된다.
아마 저스틴 린의 차기작이 <스타트렉>이나 <분노의 질주>가 될 것 같진 않다. 대신 제레미 레너를 앞세운 <본>시리즈의 스핀오프 <본 레거시>(2012)의 속편을 연출할 감독직을 받아들인 상황이다. 전작이
미진한 반응을 불렀던 것과 달리 그가 만들 속편이 얼마나 대단한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진 미지수다. 하지만
<스타트렉>과
<분노의 질주>를 통해 확인한 그의 재능은 분명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본> 시리즈 최초로 인상적인 동양계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을지, 기대해봐도
좋지 않겠는가.
이재용 감독의 신작 <죽여주는 여자>는 중의적인 제목이다. 그러니까 <죽여주는 여자>는 감탄사로 쓰이는 '죽여준다'와 동사로 쓰이는 '죽여준다'는 의미로 수식되는 여자의 삶을 그린 영화다. 먹고살기 위해 노인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늙은 여성은 과거 자신과 거래한 전적이 있는 남성들이 갈망하는 죽음을 돕는다. 죽여준다던 그 여자가 정말 죽여주는 여자가 된 건 결국 남루한 노인들의 삶이 방치되고 외면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이 존재하는 덕분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여러 모로 귀찮고 성가신 일이 되는 사회에서 노인들은 버겁게 현실을 버티거나 버거운 내일을 지운다.
물론 <죽여주는 여자>를 목격한 1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목도한 건 우울하고 괴로운 노년의 초상만은 아닐 것이다. 유쾌한 활기와 따뜻한 정감이 공존하는 영화 속 풍경에는 한국 사회의 여느 구석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소수자들의 표정들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 다양한 생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되짚게 된다. 그리고 다양한 삶의 군상들도 하나 같이 늙어가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삶은 결국 죽음으로 수렴되는 여정이다. 다만 죽음이 다다를 때까지 살아간다는 것과 죽음을 향해 찾아간다는 것 사이에는 우주만 한 괴리가 있다. 결국 <죽여주는 여자>는 죽음을 통해 삶을 관통하는, 역설적인 영화일지도 모른다.
전작인 <두근두근 내 인생>은 선천성 조로증에 걸린 아이에 관한 영화였는데, 신작인 <죽여주는 여자>는 노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늙다'와 '죽다'라는 동사가 두 작품의 공통분모라 할 수 있겠다. 원래 <두근두근 내 인생>의 연출을 마음먹기 전에 나이 들어가는 여배우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대중에게 늙어가는 삶을 노출하며 산다는 건 배우의 숙명이지만 여배우가 늙어간다는 건 남자 배우가 늙어가는 것과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 작품을 영화화하기 위해 투자자를 구하던 중에 <두근두근 내 인생>의 연출 의뢰를 받았고, 대중적인 영화를 연출한 경력이 차기작을 제작하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수락했다. 게다가 나이 들어간다는 것과 죽음이라는, 내 관심사와 연결되는 작품이기도 했고.
그런데 <두근두근 내 인생> 이후로 여배우에 관한 영화 대신 <죽여주는 여자>를 만들었다. 여배우에 관한 영화로 돌아가려던 차에 박카스 할머니를 다룬, 노인 성매매에 관한 기사를 접했는데 거기에 좀 경도됐다. 사실에 기반한 현실을 다룰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에 보다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늙어가는 여배우에 관한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여배우였을까, 늙어간다는 것이었을까? 그 질문에 답을 하려면 더 앞선 시점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웃음) 2007년에 <귀향>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실향민 노인이 금강산 관광을 갔다가 자신의 고향인 원산까지 걸어간다는 내용이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15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생명을 부지한 아내 때문에 딸이 시집을 못 가는 것 같다고 생각한 할아버지가 아내의 생명을 끊고 딸을 시집보낸 뒤 자신도 신변 정리를 하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는 이야기였다. <꽃보다 할배>처럼 남자 노인들이 어울려 다니며 낄낄거리는 모습도 묘사되는데 실제로 이순재 선생님을 캐스팅했다. 늙어가는 부모님을 보고, 나 역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런 주제를 자꾸 건드리는 것 같다.
<귀향>은 영화로 제작하지 못한 건가? 제작 단계 직전에 금강산 관광이 백지화되면서 촬영이 무산됐다. 그런데 지금도 영화가 엎어졌다고 말하진 않는다.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면 할 수도 있을 테니까.
<죽여주는 여자>의 시나리오를 착안한 건 언제였을까? <두근두근 내 인생>을 끝낸 뒤 2014년 여름쯤 착안했고, 가을쯤 시놉시스를 구상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는데 반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 해 겨울, 윤여정 씨에게 원래 제안했던 나이 든 여배우 이야기보단 박카스 할머니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다. 윤여정 씨는 생각을 좀 해보더니 자신이 여배우라서인지 사람들이 여배우 얘기를 얼마나 현실감 있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박카스 할머니 이야기는 사회성도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여배우 이야기가 더 대중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오히려 <죽여주는 여자>는 소재만으로도 대중영화라 받아들여지기 힘든 지점들이 있으니까.
아무래도 '무겁다'라는 선입견이 생기는 소재이긴 하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죽여주는 여자>를 만들고 싶었다. '더 늦기 전'이란 의미는 시사성 있는 소재를 다룬 만큼 빨리 공론화해야 할 것 같았다는 말이다. 게다가 먼저 구상했던 여배우 이야기는 다른 이가 생각할 만한 시나리오는 아닐 테니까. 어쨌든 실제로 시나리오를 써내려 간 건 2개월 남짓한 시간이었다. 막연하게 이런저런 구상을 하다 작년 3월쯤에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서 후다닥 썼다.
<죽여주는 여자>는 노인과 죽음 외에도 다양한 시사적 화두를 건드리는 영화다. 지난 필모그래피를 돌아봤을 때 현실과 밀착한 시사성을 다룬 작품은 <죽여주는 여자>가 처음인 것 같다. <귀향>이 영화화됐다면 처음은 아니었을 텐데. 남북문제와 실향민 문제 그리고 노인 문제까지 다룬, 시사성 있는 작품이었으니까. 사실 이런 류의 영화를 만들 땐 용기가 필요하다. 투자 여건이나 제작 환경을 고려하면 고심할 수밖에 없다. 종종 농담처럼 누가 돈만 대주면 평생 이런 영화만 찍으면서 살 수도 있다고 하는데 어쨌든 나는 2년에 영화 한 편씩 만드는 일개 감독일 뿐이고, 세월은 제한적이다 보니 쉽진 않은 거 같다.
한국 남자와 필리핀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자녀를 의미하는 코피노와 트랜스젠더, 장애인 그리고 노인 등 우리 사회에서 소외받는 대상들이 이태원의 한 집에 모여 살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존재감이 피력된다. 어떤 면에선 종합 선물세트처럼 나열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늘 영화를 구상하면서 스크랩해오던 소재들이었고 이번 기회에 자연스럽게 녹여보고 싶었다. 이태원은 <귀향>의 주인공 할아버지가 이태원 복덕방을 운영한다는 설정을 두면서 이미 관심을 갖고 있던 동네였다.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서울 안에 자리한 작은 국제도시 같기도 하고 골목마다 정겨운 구석이 있어서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영화라는 게 역사적 기록물이 될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미군 부대 주변에서 생업을 이어나간 경력이 있는 소영(윤여정)의 입장에선 이태원에 머문다는 것이 자연스럽기도 하다.
저마다 만만찮은 사연이 있을 법한 인물들이지만 소영을 제외한 인물들의 과거에 대해선 어떠한 언급도 되지 않는다. 처음 시나리오상에선 도훈(윤계상)의 개인사를 털어놓는 장면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날라리처럼 지냈는데 친구를 태우고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를 당했다는 건데 결국 친구는 즉사했고 자신은 다리를 잃어서 죽을 생각까지 했다가 어느 날 문득 그냥 '살아가야지'라는 마음이 생기면서 역경을 극복했다는 사연이다. 결국 시나리오를 각색하며 정리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삶이 영화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영화 속의 모든 인물들도 주인공일 순 없다. 티나(안아주)도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로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연과 시련을 겪었겠나. 하지만 어차피 우리가 모든 사람의 사연을 알고 살아가는 건 아니니까 그런 얘기를 다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흔히 비참한 인생일 것이라 여겨지는 소외 계층의 일상을 다루고 있지만 아기자기하고 귀엽게 묘사되는 덕분에 영화가 선택한 소재의 무게감이 버겁게 다가오진 않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걸 달가워하는 타입이 아닌 것 같다. 내 관심사를 공유하고 싶을 뿐이지, 사람들을 계도하고 싶진 않다. 어떤 주의나 의식을 웅변하고 자각하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없다. 물론 그들의 삶에 비참한 단면이 있을 거다. 하지만 매일을 지옥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그럴수록 어떻게든 살아갈 구실을 만들어내고, 작은 온기에서도 삶의 동력을 얻을 거라 생각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처럼 박카스 할머니를 직접 찾아가 인터뷰하고 취재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 같다. 상당히 디테일한 설정들도 묘사되니까. 박카스 할머니를 직접 대면하고 조사하진 않았다. 이미 내 머리 속에 그런 세계가 어느 정도 구축돼 있었고, 윤여정이란 배우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인물이 있었으니까. TV 다큐멘터리나 시사 프로그램을 참고하기도 했다. '연애하고 갈래요?'라는 대사도 거기서 알게 됐고. 그런데 이미 캐릭터들은 어느 정도 구체화된 상황이라 특별한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다.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바빠져서 그럴 여유도 없었고.
실제로 만나서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지 않던가? 종로를 오가면서 간접적으로 관찰하긴 했다. 처음에는 구분을 못하겠더라. 그냥 마실 나와서 할아버지들과 노닥거리는 할머니 같기도 하고, 매춘하는 할머니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몇 번 보니까 알겠더라. 어딘가 지친 기색이 있고 얼굴에서 빛이 사라진 느낌이랄까. 그러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도 되는 것인지, 혹시 내게 오해는 없는 건지 검증받고 조언을 들어보고자 박카스 할머니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교수님을 만나서 시나리오를 보여줬는데 직접 취재하고 만들어낸 캐릭터가 아니라고 하니 놀라더라. 그래서 안심했다. 실제로도 마음을 열고 이야기해보면 다들 명랑하다고 하더라. '집에 남편 재워두고 나왔잖아'란 식으로 자기 얘기도 서슴없이 하고.(웃음) 사실 자기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이야기하는 것만큼 비참한 일도 없지 않나. 그럼 사는 게 진짜 지옥이 되는 거니까. 다만 어떻게든 살아갈 구실이 필요한 거다. 그리고 구실을 찾아서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극한으로 밀어 넣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상에서 소영이 한 여자를 찾아가 돈을 주는 장면이 두 번 등장하는데 그 전후 과정에 대한 특별한 설명이 없어서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오해를 조금 산 것 같다. 원래 소영이 목돈을 빌렸다가 나눠서 갚는 장면이었는데 포주에게 돈을 바치는 것 같다는 추측까지 나오는 걸 보니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다. 소위 말하면 일수 개념으로 빌린 돈을 보름에 한 번씩 갚는 장면인데 영화 상에서 그녀의 모습이 너무 여유롭게만 보일 것 같아서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데 의미가 있는 장면이었다. 실제로는 갚아야 할 돈도 있고, 집세도 내야 하고, 그런 삶을 견디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소영은 유일하게 영화상에서 과거사가 밝혀진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인 소영이 동두천에서 미군을 상대할 때 'So young'이라는 영어를 음역한 것이란 사실은 우연히 만난 옛 동료와의 대화에서 드러나는데 그녀의 과거사가 넋두리처럼 들리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물론 다큐멘터리 촬영용 인터뷰를 빌미로 줄줄이 설명하는 장면도 있지만 구구절절 말할 수 없으니 극 사이사이에 잘 배치하는 게 관건이었다. 아마 결말부를 유심히 본 관객이라면 무연고자 납골당 신에서 소영의 본명인 양미숙의 생년월일이 1950년 6월 19일로 적혀 있다는 걸 확인했을 거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가 6.25 발발 일주일 전에 태어났다는 걸 알았을 거다. 실제로 중반부에 '3.8 따라지'라 말하기도 하고. 어쨌든 고아원을 거쳐 식모살이, 공순이, 동두천 양공주까지, 결국 한국 현대사에서 겪을 수 있는 비극을 죄다 경험한 한 여자의 일생으로 점철된다. 사회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한국 현대사에서 여성의 위치를 대변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론 전쟁이 한 여자의 인생을 이렇게 짓밟아놓을 수도 있다는 걸 기저에 깔아놓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쟁이란 남자들이 벌일 수 있는 최상위의 폭력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여자들은 희생자가 된다. 사실 우리가 양공주라 부르는 여성들은 엄밀히 말하면 미군 위안부다. 국가적으로 성매매를 금지해놓고 기지촌에서만 허용한다는 건 사실상 국가가 미군에게 성매매 서비스를 제공한 셈이니까. 결과적으론 그녀들을 외화 벌이의 수단으로 여겼고. 그런데 사회적으로는 미군한테 다리 벌린 여자 취급을 당하며 손가락질만 당했다. 결국 그녀들에겐 자기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없었던 거다.
몰염치하거나 무책임한 한국 남자들의 군상을 인지하게 되는 부분도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코피노 문제도 그렇고. 영화에서 코피노 소년 민호의 아빠로 추정되는 의사도 결국 애만 싸질러 놓고 도망친 셈인데 그걸 보고 간호사가 한마디 하지 않나. "한국 남자들은 다 개새끼야." 물론 페미니스트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여성을 다루다 보면 결국 약자로서의 여성성을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다. 현실이 이 모양이니까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남자의 시각으로 씌워놓은 관념들이 워낙 많다. 이를 테면 모성 같은 것? 그래서 자기 죽음 하나 어찌하지 못하는 남자들을 대신해 그들을 죽여주는 소영이 여성성의 화신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여성들이 감내해온 역사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걸 목격하게 만들어주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상대적으로 그녀가 꿋꿋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대단해 보이지 않나. 게다가 그녀가 성을 파는 건 살아남기 위해 폐지나 빈 병을 줍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선택한 방식일 뿐이다.
사실 죽음을 사주하는 남자 중 재우(전무송)도 비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려고 여자의 여생을 망쳐버린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마치 자신의 평온한 죽음을 위해 여자의 삶을 산 제물처럼 바쳐버린 느낌이랄까. 맞다.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이다. 솔직히 영화적 설정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가 주길 바라는 요량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소영은 첫 번째 노인의 부탁을 들어준 뒤 재우에게 그런 사실을 감추지 않고 고백한다. 그분이 너무 원해서, 차라리 그렇게 사는 것보다 나을 거 같아서 했다고. 그만큼 소영에겐 공감능력이 있는 거다. 그리고 사람을 죽였으니 자신은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녀의 측은지심이 재우의 결심을 도운 것이라고 해석했다.
<죽여주는 여자>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건 약자가 약자를 돕고, 노인이 노인을 죽인다는 사실이다. 결국 상처를 입어야만 상처를 이해할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 느낌이랄까. <죽여주는 여자>를 만들 때 부담이 컸던 건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이 영화가 인용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반대로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쳐서 이를 실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 일종의 사회적 발언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다. 결국 그런 걱정을 다잡게 만든 건 이런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돼선 안 된다는 마음이었다. 이렇게 그들을 방치해선 안 되는 거니까. 그래서 이 영화를 통해 사회안전망에 관한 문제들이 공론화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존감을 지키면서 잘 죽는다는 건 무엇일지, 이런 성찰도 공유하고 싶었고.
삶보다 죽음을 갈망하는 남자들의 입장에 타당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고민이 있었을 거 같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죽음을 그리는 게 힘들었다. 어떻게 하면 개연성이 생길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다 내가 어떤 상황일 때 죽고 싶을지 고민해봤다. 첫 번째 남자 같은 경우엔 사는 게 창피하다고 하지 않나. 평소 댄디하게 차려 입고 부족함 없이 돈을 써가며 멋지게 살아왔던 사람이 한순간에 제 몸도 못 가누고 침대에 누워 여생을 보내야 된다면 정말 죽고 싶겠더라. 그리고 치매에 걸린 채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떠돌면서 남에게 폐를 끼칠 거라 생각하니 끔찍했다. 마지막으로 의지할 가족들이 모두 떠나갔을 때 무슨 낙으로 살아갈 것인지 막막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노인 자살을 부추기는 전형적인 유형 세 가지라는 걸 알게 됐다. 정확하게는 거기에 빈곤이 겹쳤을 때라더라.
소영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세 노인 중 두 명은 실내에서 죽지만 한 명은 산에 올라가 벼랑으로 떠밀려서 죽음을 맞이한다. 목격자가 발생할 수 있는 산에 올라가서 자살을 위장한다는 건 합리적인 선택과는 거리가 먼 발상처럼 보이는데, 굳이 산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소영이 도훈한테 어떻게 죽으면 고통이 덜할지 물어보는 장면이 있었다. 그리고 떨어져 죽으면 가장 짧게 고통을 느낄 거 같다는 결론에 다다르는데 그 장면을 다 걷어냈다. 어떤 의미에선 산에서 죽는 게 낭만적이라고도 생각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집에서 생을 마감하면 비참할 거 같고. 덕분에 내 영화 특유의 이상한 농담도 넣게 됐는데 이를테면 산으로 올라가면서 "야, 힘들어 죽겠다. 잠깐만 쉬자"라고 하는 대사 같은 것. 죽으려고 올라가는데 힘들어 죽겠다니, 웃기지 않나. 결국 그런 게 사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고.
어쩌면 공간성을 다양하게 고려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그런 바도 있다. 방, 산, 호텔, 이렇게 다양한 장소들을 확보하면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주로 도심을 배경으로 둔 영화라 한 번쯤은 확 트인 곳에서 한 템포를 쉬어가는 것도 좋을 거 같았다.
영화적 배경이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는데 촬영시기와 영화 속 풍경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인상이었다. 어쩌다 보니 우연과 필연이 잘 겹쳐졌다. 원래 가을에 찍어야 할 영화라고 생각하긴 했다. 늦여름에서 시작해 가을로 물들어가는 남산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그 시기에 맞게 투자가 완료됐고, 그때 빨리 촬영을 끝내야만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출품할 수 있는 스케줄이었기 때문에 부랴부랴 촬영에 들어갔다. 다행히도 잘 맞아떨어졌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종로는 실제 박카스 할머니들의 터인데 장충단이나 남산 산책로는 의외의 선택지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곳에서도 그런 성매매가 이뤄지는 걸까? 그렇진 않다. 다만 가끔 남산을 산책하다 보면 거기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한국의 발전을 대변하는 신기루처럼 보였다. 그래서 꼭 그 장소를 넣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근의 장충단 공원으로 무대를 옮긴 거다. 남산의 한적함과 여유로움 속에서 소영이 홀로 쓸쓸히 배회하는 모습도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 풍경 안에서는 유령 같은 존재처럼 보이니까.
영화상에서 경쾌하면서도 쓸쓸한 선율의 연주음악이 몇 차례 들려지는데 장영규 음악감독에게 물어보니 공간성과 오래된 정서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더라. 장영규 감독과는 개인적으로 오랜 친분이 있다. <정사>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음악을 함께 작업하기도 했고, 일단 그냥 맡겨도 될 만큼 신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앞선 두 작품과 달리 <죽여주는 여자>에선 명확히 떠오르는 음악이 없었다. 그래서 편집본을 보여주면서 떠오르는 걸 얘기해달라고 하니까 오래된 이탈리아 영화 같은 느낌이 떠올랐다고, 그런데 약간 뽕끼가 있어야겠다고 하더라. 그리고 그가 보낸 샘플 중에서 두 가지 음악을 골랐다.
촬영 면에서 핸드헬드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카메라를 단 한번도 흔들지 않더라. 흔들 수 없는 영화였다. 3D 영화 제작 지원금으로 만든 영화였으니까.
3D 영화 제작 지원금을 받아서 제작했다면 두 대의 카메라를 리그(Rig)로 연결한 3D촬영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단 말인가? 맞다. '카파(KAFA)'에서 마련한 3D 영화발전기금을 지원 받은 세 번째 영화다. 김태용 감독과 류승완 감독이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신촌좀비만화>가 첫 지원작이었고, <죽여주는 여자>는 <방 안의 코끼리>에 이은 세 번째 지원작이다.
아무래도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 같은데.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다 보니 카메라가 한번 이동하는 데에만 20분씩 소모됐다. 카메라가 일반적인 촬영 현장에서 사용하는 것보다 3배는 크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산에 끌고 올라가야 하는 건데 산에 올라갈 땐 정말 쉽지 않았다. 게다가 좁은 방 안에서 촬영할 땐 카메라가 너무 크다 보니 화각을 확보하기도 어려웠다. 평소 촬영 현장보다 스태프 수도 15% 가까이 늘었고, 촬영 시간도 더 많이 필요했고 3D 영상 컨버팅부터 색보정 작업, CG 작업 등의 후반작업도 더 복잡했다. 난제가 많았다.
트랜스젠더인 티나 역에 진짜 트랜스젠더를 섭외했다. 일단 아마추어 배우를 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자가 그 역할을 맡아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디션을 보니 남자배우들은 다들 클리셰 같은 연기를 하더라. 마치 <개그콘서트>에 나오던 황마담처럼 호들갑스럽고 과장된 느낌으로. 그래서 결국 수소문 끝에 티나를 찾았다. 처음으로 연기한다지만 30년 가까이 무대 생활을 많이 한 덕분인지 끼가 상당했고, 그래서 선택했다.
윤여정 씨와는 <여배우들>, <뒷담화:감독이 미쳤어요>에 이어 세 번째 작업이지만 극영화로 만난 건 처음이다. 지난 두 작품에선 항상 윤여정으로 나왔지만 처음으로 극 안에서 역할을 준 작품인데 특별히 다를 건 없었다. 윤여정이라는 배우가 양미숙이란 이름으로 불리지만 윤여정으로 연기해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처음부터 윤여정 씨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했는데, 그만큼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이 영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로 들린다. 사실 어떤 소재를 떠올리고 어느 배우랑 해야겠다고 생각한 뒤 시나리오를 쓴 건 처음이다. 그만큼 내겐 영감을 주는 부분이 많았다. 윤여정 씨가 평소에 냉소적인 농담을 잘하고 나 역시 그런 농담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농담들이 시나리오에 반영됐는데 그 의미를 물어볼 필요 없이 알아서 다 소화해냈다. 이를 테면 "계산 도와드릴게요"라는 종업원의 말에 "계산해줄 것도 아니면서 도와주긴 뭘 도와줘?"라고 혼잣말을 하는 장면처럼 내가 의도한 뉘앙스를 잘 파악하고 소화해버린다.
어떤 의미에선 윤여정이라는 배우를 통해 익히 예상할 수 있는 바가 있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실 윤여정이라는 배우는 모든 역할을 윤여정스럽게 연기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하는 배우도 있지만 윤여정은 항상 윤여정으로서 소화하는 것 같다. 그런데 <죽여주는 여자>를 하면서 힘들어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어가고,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그런 처지에 놓인 이들의 세계를 알게 되고 그런 감정에 이입하게 되면서 우울해하고 힘들어했다. 그 당시 윤여정 씨 어머니께서도 좀 편찮으셨던 것도 본인에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고.
구강성교 신 같은 경우는 배우 입장에서는 고역스러운 촬영이었을 것 같다. 원래 그 장면에서 등장하는 벌거벗은 남자는 시나리오상에서 하의만 벗은 상태로 묘사했는데 막상 현장에서 보니 작위적인 느낌이었다. 그래서 현장에서 남자 배우에게 전신 탈의를 부탁했더니 흔쾌히 응해줬는데 윤여정 씨 입장에선 그런 남자가 눈 앞에 떡 하니 앉아있으니까 당혹스러워했다. 그래서 그 신을 촬영하면서 테이크를 다시 가겠다고 했을 때의 윤여정 씨는 지금까지 봤던 모습 중에 가장 화가 나 보이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그 장면에서의 표정을 보면 정말 질색하는 표정이 현실감 있게 와 닿는데 그게 단순히 연기적인 표현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주사를 놓을 때 주사기에 공기를 빼는 디테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 테이크를 다시 간 뒤, 주사를 놓은 뒤 서비스를 할 때 살짝 위를 올려다봤으면 좋겠다고 다시 한 테이크를 가겠다고 했다가 지금까지 들었던 윤여정 씨의 음성 가운데 가장 강렬한 소리를 들었다. "왜 이걸 다시 해야 하는데!"하면서 비명을 지르는데 정말 이를 가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잔뜩 독기가 올라 있는 상황이라 정말 실제처럼 느껴지는 연기가 나온 것 같다. 개인적으론 정말 미안했지만 결과적으로 감독으로선 '와, 이거 건졌다'라고 생각했다.(웃음)
그런데 소영이 남자에게 놓는 그 주사의 정체는 대체 뭔가? 주사기로 성기의 정맥에 주사를 놔서 발기하게 만드는, 일종의 발기제 같은 건데 할아버지들이 실제로 맞는 거라더라. 실제로 남자 배우의 성기에 붕대를 감아놓고 주사를 가져다 대는 부분에 십자가를 그려놓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자살을 꿈꾸는 사람은 다 남자다. 반대로 소영은 마지막까지 살아서 여생을 마치고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는데 상대적으로 죽음을 갈구하는 남성들에 비해 더 강인해 보이는 인상이다. 실제로 남편이 죽은 여자들보다 부인이 죽은 남자들의 삶이 더 빨리 무너지고 더 일찍 생을 마감한다더라. 아무래도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공감대가 크고 연대의식이 있어서 함께 모여 생활하는데 능하지만 남자들은 자기 부인이 아니면 잘 연대하지도 못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존재가 된다. 생리학적으로도 여자들이 더 오래 산다. 평균 수명도 더 길고.
결말부에 등장하는 죽은 소영의 얼굴에선 종교적인 평온함과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그렇게 얘기하는 분이 많더라. 굉장히 성스럽다고. 그녀가 일종의 천사 같고, 성녀 같고, 보살 같다고. 실제로 중국에서 관음보살은 자비의 신이기도 하지만 창녀들의 신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계사에서 소영이 합장할 때 의도한 게 아니지만 그 뒤로 관음상 벽화가 등장한다. 그리고 홍콩영화제에서 <죽여주는 여자>가 상영될 때 중국어로 변환된 제목이 우리말로 <선녀관음>이었다. 그들이 소영은 관음보살 같은 여자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결말부의 교도소 신 이전에 이태원에서 소영이 연행되는 과정으로 영화를 끝냈다 해도 무리가 없는 느낌인데 그랬다면 영화에 대한 감상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 같다. 시나리오 초고에선 교도소 신이 없었다. 이태원에서 연행되면서 영화가 끝나는 거였지. 그런데 너무 쿨해 보이더라. 남루하게 살던 사람의 인생을 너무 쿨하게 다루는 거 같았고, 내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사족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녀의 유골이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인들과 함께 살아왔지만 원래부터 무연고자였고, 마지막에도 결국 혼자 남게 됐으니까. 그렇게 홀로 밥을 깨작깨작 먹어가며 여생을 살아가다 자연사한 뒤, 세상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만을 남긴 그녀가 태어나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그녀의 죽음을 통해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고 싶었다.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는 개인의 자유와 죽음을 방조한다는 사회적 윤리 사이에서 물음이 남는 셈인데, 어쩌면 답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한 물음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오래 사는 것이 중요했지만 이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잘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대가 됐다. 서구에서는 일찌감치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선택할지에 대한 논의도 시작됐다. 장례식 방식을 넘어서 안락사에 대한 논의까지. 결국 사회가 성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죽음도 논의할 수 있는 문제가 되는데 우리는 아직도 죽음에 대한 논의를 터부시 한다. 미리 수의 해놓는 것은 물론 영정사진 찍어놓는 것마저 불길한 짓으로 취급하고. 결국 의식 있는 사람들이 미리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면서 후손들의 고민을 덜어줄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 물론 어려운 문제다. 죽음 자체는 너무 두려운 일이니까. 사형수들도 사형장으로 가는 길에 신발을 슬쩍 벗는다고 하더라. 신발을 다시 신을 시간을 벌기 위해서, 몇 초라도 더 살아보려고, 그런 게 생인가 보더라.
고인이 된 백남기 씨가 물대포에 맞아서 의식을 잃었다는 뉴스 장면이 등장하고, 경찰 조사를 피해 조계사에 머물던 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 씨에 관한 플래카드와 경찰들도 영화상에서 목격된다. 시대가 하 수상하다 보니 심상찮게 보이는 측면이 있다. 일단 조계사에서 촬영이 가능한 날짜는 단 하루였는데 그날 경찰들이 대치하는 상황이었고, 우리도 촬영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대로 영화에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백남기 씨 뉴스도 영화의 배경이 되는 날짜가 2015년 11월경이었고, 그 당시 가장 이슈가 된 뉴스를 찾아보니 그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분위기를 가장 명확하게 대변할 수 있는 사건을 선택해서 보여주고 싶었다. 영화라는 것이 기록이 될 수도 있고, 타임캡슐이 될 수도 있으니까. 다만 그런 상황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몫인데, 어쨌든 이게 2015년 11월 14일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현실감을 주고 싶었다.
<인페르노>는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톰 행크스)을 앞세운, 댄 브라운의 소설을 영화화한 세 번째 탐정물이다. 그런데 <다빈치 코드>와
<천사와 악마>의 로버트 랭던이 기호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중세부터 이어져 오던
종교집단들의 은밀한 광기를 추적해 나간 것과 달리 <인페르노>의
로버트 랭던은 현대문명을 관통하는 인구과잉문제와 연관된 테러리즘에 맞선다. 어떤 의미에서 <인페르노>의 로버트 랭던은 그가 아니어도 될만한 일까지
떠맡은 셈인데 그의 역할을 만들어주기 위해 동원된 건 단테라는 모티브를 통해 구상한 기호학적인 퍼즐이다. 그러니까 <다빈치 코드>와
<천사와 악마>가 로버트 랭던의 개입을 자연스럽게 유도할 수 있는 이야기였던
것과 달리 <인페르노>에선 인위적인 구조적 설계가
필요하다.
<인페르노>의
로버트 랭던은 의문의 사나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억상실증 상태로 피렌체의 한 병원에서 깨어나는
순간 그가 품은 의문과 관객의 의문은 똑같이 제시된다. 결국 그가 기억을 회복하며 단테의 지옥도에 담긴
의미를 쫓아 피렌체와 베니스, 이스탄불을 누비는 과정에 동참하는 관객의 흥미는 그가 왜 이 사건에 휘말렸는가라는
물음표에 놓여있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인페르노>는 <다빈치 코드>나 <천사와 악마>처럼 로버트 랭던을 탐정처럼 앞세운 지적인
추리극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미스터리에 더 큰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초반에 제시하는
물음표의 흥미는 중후반부에 다다라 싱거워지는데 아무래도 각본의 내러티브가 완급조절에 실패한 인상이다.
전반부가 정체불명의 물음표로 가득한 호기심을 잉태하는 장이었다면 후반부는 그 물음표의 장막을 벗긴 실체의 위압감을
증명해야 하는 장이다. 문제는 로버트 랭던이 고도의 지적 추리를 통해 추적한 적의 실체가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영화를 지탱하던 의문들이 손쉽게 자기 손을 들어서 정체를 드러내듯 미스터리의
동력이 손쉽게 소진된다. 게다가 극의 향방을 전환시키는 결정적 존재가 자기 정체를 드러낸 직후 그 인물과
관련된 과거사를 제시하는데 그 순간 이 영화가 멜로를 지향했던 것인가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감상적이라 영화의 지향점에 의문이 생길 정도다. 덕분에 영화의 서스펜스를 지탱하던 물음표의 패가 모두 다 열린 극 후반부에선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완전히 증발돼버린
듯해서 클라이맥스의 존재감 자체가 부재한 인상마저 준다.
한편 <인페르노>에서
탁월한 병풍 역할을 하는 피렌체와 베니스, 이스탄불의 풍경들은 아이맥스 카메라의 광대한 시선을 등에
업고 관광영화의 묘미를 극대화시킨다.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두오모돔과 조토의 종루 그리고 베키오
궁전과 우피치 미술관을 아우르는 피렌체부터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 그리고 이스탄불의 하기스 소피아 성당과 예레바탄 지하궁전까지, 세계적인 유산이라 할만한 풍경이 아이맥스 카메라의 광대한 시선을 통해 중계되는 건 영화적 완성도와 무관하게
그럴 듯한 볼거리를 이룬다. 물론 충분한 기회비용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최근 재개봉작과 관련된 칼럼을 쓰면서 이런저런 자료를 뒤지고 취재를 했다 재개봉작이 주목 받게 된 결정적인 방아쇠는 작년 11월 <이터널 선샤인>이 재개봉하며 30만 이상의 관객을 끌어 모은 덕분이겠지만 그에 앞서 2014년부터 다양성영화 시장이 활성화된 것이 일종의 장전 역할을 한 것 같다. 실제로 2013년에는 다양성영화 순위에서 10만 관객을 넘긴 영화가 6편에 불과했지만 2014년도에는 18편으로 늘었고, 이중에서 20만 관객 이상을 동원한 작품도 10편에 이른다. 심지어 그해에 <비긴 어게인>과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3백만 관객을 돌파하며 그 해의 뻥튀기가 됐지만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역시 7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정도였다. 2013년도에 다양성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 18만여 명을 동원한 <로마 위드 러브>였으니 확연한 차이다. 다양성 영화 시장에 대한 주목도가 남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문제는 그 이후에 다양성영화에 대한 주목도가 상승하면서 약간의 투기 심리가 형성됐다는 것. 실제로 해외 마켓에서 다양성 영화 시장에서 먹힐 만한 영화들을 구입하고자 하는 수입사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해당 영화들의 단가가 두 배 이상 상승했고 결국은 시장 안에서의 수익성 악화로 이어졌다. 2015년도에도 다양성 영화 시장은 나름대로 선방했는데 1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 18편에 달했고, 2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작품도 8편에 이른다. 180만 명 이상을 동원한 <위플래쉬>와 같은 홈런작도 나왔다. 물론 2014년은 거의 마약 같은 한 해였으니 비교불가분이지만 어쨌든 다양성영화의 시장성이 어느 정도 지속되고 있다는 건 확인이 가능하다. 문제는 동일한 시장 규모에서 수입가가 상승한 탓에 시장 전체의 수익률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필연적 결과다. 게다가 올해 다양성영화 시장의 전체 시장성은 지난 해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인상이다. 아직 한 해가 끝나지 않았지만 10만 이상의 스코어를 기록한 18편 가운데 2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는 4편에 불과하다. 그만큼 다양성 영화를 통해 재미를 본 수입사가 현저히 줄었을 것이란 예상이 가능하다.
결국 재개봉을 통해 3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이터널 선샤인> 이후로 재개봉작들이 점점 많아지는 현상은 2014년 이후로 다양성 영화 시장이 확대된 덕분이기도 하지만 다양성영화 시장의 과열 이후로 이어진 시장성 악화로 인한 투자심리의 위축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근거로서도 유효한 결과 같다. 아무래도 신작에 비해 10~30% 수준의 수입가로 개봉 판권을 가져올 수 있는 재개봉작은 이미 인지도가 형성돼 있다는 점에서도 마케팅에 유리하다. 물론 모든 재개봉작이 흥행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기본적인 수입가가 현저히 낮기 때문에 투자가치는 충분하다. 마케팅 비용을 절감함으로써 P&A를 낮출 수 있고, 낮은 수입단가 덕분에 BEP 즉 손익분기점도 상당히 낮다. 간단히 말하면 망할 가능성이 굉장히 낮고, 망한다고 해도 그 손실이 신작에 비해 역시 낮다. 투자가치가 충분하다는 판단이 서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이런 재개봉작들이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다양성영화 시장 안에서 새로운 경쟁구도를 형성한다는 점에 있다. 새로운 신작들도 개봉관 확보에 애를 먹고 있는 가운데 재개봉작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인상이 있는데 이를 테면 요즘 단독상영 정책을 펴는 멀티플렉스 입장에선 좋은 상품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브랜딩은 어느 정도 구축이 돼있기 때문에 극장에서 마케팅에 힘을 실어줬을 때 효과를 볼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서는 작품들이 꽤 있다. 반대로 시장의 인지도부터 구축해야 하는 신작 다양성영화들은 역설적으로 상영관 확보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 물론 영화마다 상대적이겠지만 한 회차 상영조차 아쉬운 다양성영화 입장에서 경쟁률이 높아진다는 건 여간 부담이 아니다. 특히 중소 규모의 수입영화를 대거 들여오는 몇몇 수입사의 부담감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느낌이다.
동시에 다양성영화 시장도 소모될 가능성이 있다. 한번 구축된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재개봉작이 늘어나고 해당 영화들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 다양성이란 단어에 대한 인식이 재개봉작으로 대체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시장성이 급격하게 낡아버릴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이 역시 분명 문제라면 문제다. 사실 재개봉작 시장은 장기적으로 좋은 포석이 될 수 있다. 자본력이 약한 중소 규모 수입사들 입장에선 수익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되고 관객 입장에서도 고전을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받는다는 점에서 윈윈일 수 있다. 결국 수요와 공급이 얼마나 균형을 이룰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특히 올해처럼 다양성 영화 시장의 위축이 확연히 보여지는 상황을 본다면 특히나 이런 화두는 중요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대세는 VR이다. 모두가 VR을 언급한다. 바람이 분다. 물론 이것이 판을 뒤엎을 바람인지는 알 길이 없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선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화제가 된 VR영화
<카타토닉>을 상영했다. <카타토닉>은 특별한 스토리가 있다기 보단 휠체어를 타고
괴기스러운 공간을 돌아다니며 소름 끼치는 광경을 목격하게 만드는 과정을 체험하게 만드는데 목적을 둔 호러 단편물이다. 이를 테면 테마파크의 귀신의 집 같은 거랄까. 특별히 마련된 휠체어에
앉아 안내에 따라 VR헤드셋을 쓰니 플레이 과정에 대한 선택을 묻는 문구가 떴다. 헤드셋의 전면부를 터치하니 영화가 시작됐다. 다른 세상이 시야에
꽉 찼다. 아니, 다른 세상이었다. 뭔가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기이한 풍경 속으로 내가 떠밀려가고 있었다.
긴장감이 엄습하면서도 호기심이 발동해서 주변을 자꾸 두리번거렸다. 앞서 영화를 본 여자가
상모 돌리듯 머리를 돌려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VR영화는 고개를 돌리면 그 시점에 해당되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관객이 시점을 결정할 수 있다. 신기해서 상모 돌리듯 상하좌우로
고개를 돌려 보게 됐다. 그런데 무언가 굉장히 끔찍한 것이 오른쪽에 있었는데 내가 왼쪽을 보고 있어서
지나쳐 버린 것 같다. 본의 아니게 긴장감 대신 내가 외면한 귀신의 쓸쓸함을 느껴버렸다. 게다가 영화를 보는 내내 시력이 0.5 정도 떨어진 것만 같았다. 화질이 선명하지 않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날 영화를 보는데 활용된 건 삼성기어VR인데 해상도가 좋지 않다는
지적이 담긴 기사가 적지 않게 검색된다. 콘텐츠의 가능성을 막는 기술적 한계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어쨌든 흥미로운 변화다. 아이맥스,
3D, 4D 등 새로운 관람 방식이 더러 등장했지만 VR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체험이다. 그만큼 전세계 영화계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루카스필름 산하의 한 스튜디오에선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VR영화를 제작할 것이라 발표했다. 관객이
다스베이더가 등장하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이 다스베이더의 시점으로 영화에 참여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아이맥스(IMAX)사에서도 VR영화를 제작할 것이라 발표했다. 아이맥스사에서 만드는 VR영화이니만큼 기존의 VR기기에 비해 화각이 넓은 VR기기를 제공할 것이라 밝혔다.
VR영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기존의 영화산업에 몸담고 있던 이들만이
아니다. 지난해 구글에선 <헬프>라는 단편 VR영화를 발표했다.
간단한 테스트 영상 정도를 만든 게 아니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와 <스타트렉 비욘드>를 연출한 저스틴 린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으로 우주에서 날아든 괴물이 활보하는 도시를 1인칭 시점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시청자가 영화 속 공간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어려웠다.” 구글과 함께 <헬프>를 제작한 콘텐츠 기업 불릿의 대표 토드 마커리스의 변이다. 그렇다. 영화란 감독의 예술이다. 감독이 결정한 시점에 영화의 의도가 담겨있다. 문제는 VR영화는 관객이 시점을 결정함으로써 영화의 의도를 완벽하게
외면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관객의 체험이 의도치 않게 영화적 실패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관객에게 360의 시야각을 열어줌으로써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건 VR영화가 지닌 현재 시점의 한계인 셈이다. 그리고 이는 과연 VR영화가 영화산업의 미래를 견인할 화두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모종의 답변일 수도 있다.
VR영화가 영화를 대체하는 미래일 것 같진 않다. 다만 VR영화는 하나의 장르를 자처할 수 있다. 1인칭 시점의 영상을 통해 관객에게 영화적 체험을 주입하려는 시도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극명한 오락적
장점을 품고 있다. 다만 VR영화라는 것이 보편화되려면 극장의
풍경이 달라져야 한다. 관객의 자리마다 VR헤드셋이 비치돼
있거나 3D입체안경처럼 상영관 출입구에서 관객에게 VR헤드셋을
하나씩 나눠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거대한 스크린이 아니라 각자의 머리에 쓴 고글을 통해 각자의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같은 상영관에서 본 영화에 대한 기억은 제각각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극장에서 VR영화를 본다는 건 의미가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홈비디오 시장 혹은 기존의 극장과 다른 형태의 VR영화관이라는
신종 사업을 통해 활로를 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엔 VR영화를 볼 수 있는 VR시네마라는 영화관이 문을 열었는데 그곳엔
거대한 스크린 대신 저마다 자리를 잡고 영화를 볼 수 있는 VR헤드셋이 다량으로 배치돼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VR영화에 대해 이와 같이 말했다. “VR영화는 위험하다. 왜냐면 관객은 감독의 의도와 다른 곳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VR기술을 개발하는 한 회사의
고문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대가에게도 VR영화는
흥미롭게 다가오는 쟁점인 셈이다. 결국 VR영화는 그에 어울리는
기획과 결합됐을 때 완벽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VR은 영화의 미래라기 보단 새로운 영토, 즉 신대륙의 발견인 것이다.
김지운 감독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을 다룬 영화를 연출한다고 했을 때 조금은 의아했고, 한편으론 궁금했다. 솔직히 말하면 김지운 감독이 아픈 역사를 헤집으며 뜨거운 공분을 부를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냉정하게 마음을 식히고 바라볼 수만은 없을 듯한 시대를 관통한다는 점에서 김지운 감독의 작품 가운데 이례적인 한 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문득 궁금했다. 그리고 <밀정>이 공개됐다. 아마 <밀정>은 김지운 감독의 영화 가운데 가장 뜨거운 온도로 자신을 내던지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일 것이다. 어쩌면 <밀정>은 김지운 감독의 영화 가운데 가장 다단하고 모호한 심리를 품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일 것이다. 섞이지 않는 냉기와 온기가 등을 맞대고 한 몸을 이룬 듯한, <밀정>은 그런 영화다.
개봉 첫 주에만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압도적인 흥행세인데 아무래도 대자본이 투자된 작품이니 흥행에 대한 부담이 없지 않았을 것 같다. 뭔가를 과시하고자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닌 이상, 투자된 자본을 회수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든 감독이 된다는 건 중요하다. 물론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겠다는 욕심으로 영화를 만든 것도 아니지만 차기작을 연출할 기회를 이어나갈 수 있을 정도로 최소한의 상업적 성과는 거두길 바란다. 상업영화 감독으로서의 자격을 인정 받기 위해선 대중과의 접점을 계속 증명해야 하니까. 그리고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나 배우들의 헌신과 열정을 봐온 입장에선 그들에게도 성과로 여겨질 만한 결과를 책임지는 감독이 되고 싶다. 결국 상업적인 성공이 그들을 위한 보상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어느 정도 흥행을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3년 전의 인터뷰에서 "항상 지금의 모순이나 괴로움에 대한 반대급부가 차기작에 대한 욕망으로 연결된다"라고 말했다. <밀정> 또한 그런 과정을 거쳐 나온 또 하나의 결과물일 텐데. 전작의 모순과 욕망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현재의 작품을 만들고 있지만 언제나 현재의 작품에서도 여전히 진전되지 못한 부분들이 보인다. 다만 영화에 대해 설명하다 보면 해명의 강도가 높아지니 해당 작품이 완전한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보이고, 아직도 도달해야 할 목표가 있다는 걸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다. 항상 아직 대표작이 없다고 말해왔는데 <밀정> 역시 대표작은 아닌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한 거 아닌가?(웃음) 쉽게 얘기해서 내 역량이 내 눈높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차이를 보는 게 생각보다 괴롭다. 그래서 내 영화를 편하게 보기도 힘들다. 결국 내 역량과 내 눈높이의 차이를 최대한 좁혀나가고 일치시켜서 내 영화를 남의 영화처럼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경지까지만 갈 수 있다면 영화를 만든 의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밀정>의 장르가 '콜드 누아르'라고 직접 언급했는데 '누아르'라는 장르명을 '콜드'라는 단어로 수식하는 의도가 보다 중요해 보인다. 일단 비정하고 냉혹한 스파이들의 세계를 바탕에 둔 영화라는 점에서 '콜드'라는 단어의 온도가 적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누아르 세계관 특유의 명암에는 뜨거움과 차가움이 공존하고 있다고 보는데 <밀정>은 보다 차갑게 느껴지는 누아르이길 바랬다. 그래서 의상을 비롯한 전반적인 미장센에 블랙이나 블루 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차가운 정서를 담아내고 싶었다. 인물의 감정을 최대한 감추거나 눌렀기 때문에 영화의 감정 또한 차갑게 느껴질 거라 생각한다. 다만 의열단이라는 역사적 실체를 서사에 옮기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뜨거움이 발생하더라.
<밀정>은 <악마를 보았다> 이후로 각본가가 아닌 각색가로 이름을 올린 두 번째 작품이다. 시나리오를 읽고 영화화를 결심한 까닭이 궁금하다.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땐 의열단을 중심으로 읽게 됐다. 그래서 <암살>에 가까운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스파이물의 느낌이 보다 강한 정도? 그런데 두 번째로 읽었을 때 이정출(송강호)이 크게 들어왔다. 그래서 <암살>의 동어반복이 아닌, 새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정출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나? 이정출은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이라는, 이미 정체성부터 복잡한 인물이다. 그 시대의 모순이 집약된 인물이라 느꼈고, 이정출을 이야기하는 건 결국 그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이란 확신이 생겼다. 사실 이정출의 심경 변화가 개연성이 없다는 평을 보기도 했는데 생각해 보면 그 인물 자체가 시대적 모순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회색주의자 특유의 모호함이 개연성 없게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 입장에선 대사나 상황을 비롯한 플롯으로 이정출의 선택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황옥 경부 폭탄사건'이라는 실제 역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지만 실존인물이 언급되거나 등장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팩션이라 할 수 있지만 허구라 해도 상관 없을 만한 이야기다. 의열단은 3.1 운동 이후인 1919년도에 창립됐고, 1920년 초반에는 가장 전위적인 활동을 펼쳤지만 중반부터 세력이 약화됐다. 일제가 무서워했던 단체였던 만큼 집중적으로 와해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밀정>은 1923년도를 배경에 두고 있지만 정확한 시간 연대에 일치시켜 영화를 만들면 영화적 소재가 무력해질 수 있기 때문에 1920년대의 시대적 배경을 큰 덩어리 삼아 시간을 해체하고 재조합했다. 그래서 사실 각색 과정에서 "와해된 의열단을 재조직하는 걸 보면 정채산(이병헌)이 대단한 인물이다"라는 히가시(츠루미 신고)가의 대사가 있었는데 꼭 필요할 거 같진 않아서 삭제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이정출이 김장옥(박희순)에게 자수를 권유할 때 그가 공적을 쌓기 위해 회유한다기보단 진심을 다해 살아남으라고 호소하는 인상이라 이정출의 진짜 감정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진심인 거 같지만 그것이 김장옥의 편에 선 진심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된 친구를 적으로 만나 눈 앞에서 자결하는 모습을 본 뒤 그의 인명부를 들여다 보는 이정출의 표정에선 복잡한 감정이 읽힌다. 그것만으로도 이정출의 감정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이 됐다고 생각했고, 거기서부터 이정출의 내면에 겹겹이 쌓인 층위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히가시를 통해서 김장옥과의 친구 관계가 환기되고, 의열단에 침투하기 위해 김우진(공유)에게 접근했는데 거기서도 김장옥 이야기가 나온다. 결국 이정출이 의열단을 돕게 되는 건 자신을 둘러싼 상황의 모순과 혼란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빚'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회색주의자로서의 경계는 여전한 거다. 그러니까 생존에 대한 철학을 진심으로 피력하지만 결국 변절자의 회유일 수밖에 없는, 이중성에 갇히는 셈이다. 결국 윤리적인 관점에서 이정출을 보자면 그가 면죄부를 받을 만한 인물은 아닌 것 같다.
이정출은 결국 의열단의 조력자 노릇을 한다. 하지만 그가 김우진을 비롯한 의열단원처럼 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극 초반에 이정출은 김장옥에게 "너는 이 나라가 독립될 거 같냐?"고 묻는다. 그리고 극 말미에 김황섭(남문철)에게 "이 나라가 독립될 거 같소?"라고 묻는다. 결국 이정출은 끝까지 회색주의자로, 허무주의자로 남아있는 거다. 그는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는 길을 선택한 게 아니다. 다만 자신의 감정을 변화시킨 사람과의 약속을 완수하는 것뿐이지. 어떤 경험을 통해 마음을 편하게 둘 수 있는 쪽을 선택했고, 어느 역사에 이름을 올릴지 결정한 거다. 그렇게 정채산의 말처럼 '마음이 움직이는 게 가장 무서운 것'이 된다. 결과적으로 이는 자신의 감정에 손상을 입힌 히가시에 대한 복수극이기도 하다. 그래서 폭탄을 터트리는 장면에서 제의적인 의미를 지닌 음악인 'Bolero'를 사용했다. 대의적인 임무를 수행한다기보단 스스로를 위해 축배를 드는 이정출의 심리를 음악으로서 설명해주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우진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의 단호한 신념이 두드러지는 것 같다. 덕분에 그들의 희생이 상대적으로 숭고해지는 인상이기도 하고. 사실 희망은 누구나 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를 내던져서 희망을 찾고 세상을 전진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은 아무나 할 수 없다. 나 자신부터 조국을 되찾겠다고 목숨을 던지고, 모진 고문을 견딜 자신이 있는지 모르겠더라. 결국 뒤늦게야 이 사람들이 굉장한 로맨티스트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들이 선택한 것에 스스로까지 내던질 수 있는 불나방인 거다. 그러니 결국 뜨거운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밀정>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아무래도 이정출과 김우진과 정채산의 삼자대면 신이었다. 적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란 게 진심을 바탕에 둔 호소라는 점은 어떤 의미로는 너무 뜻밖이라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정채산이 김우진과 이정출의 이야기를 몰래 귀담아 듣다가 이정출을 사람으로서 만나는 게 가장 좋은 전략이라 판단한 셈이다. 그리고 술은 남자들의 세계를 잇는 최선의 매개니까 자연스럽게 선택한 것이다. 그런 선택을 본 관객 입장에선 정채산이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존재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 내가 신뢰하는 배우들의 연기가 관객을 설득시킬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송강호와 이병헌의 카리스마와 그 사이에서 무너지지 않는 공유의 존재감이 삼위일체를 이루니 인물들의 관계 변화가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질 거라 생각했다.
동시에 긴장감이 폭발할 법한 상황에서 오히려 가장 극적인 유머가 발생한다는 점에서도 탁월하다. 처음으로 이정출을 의열단 쪽으로 기울게 만드는 신이란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굉장히 과감한 연출 방식을 선택했다고 평할 수 있다. 그 신의 목표는 세 사람 사이에 형성된 냉기가 급속도로 해빙되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고도의 수싸움을 펼치는 장면이란 점을 이해시키고 그런 관계를 설득력 있게 납득시켜야 하지만 논리적인 방식으로 보단 직관적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아이러니한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하고 세 사람이 자리한 그 공간이 따뜻하게 느껴지길 바랐다.
이병헌은 특별출연으로 이름을 올렸음에도 두 주연배우 못지 않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실 <밀정>에서 마지막에 캐스팅된 배우가 이병헌이었다. 심지어 상해에서 촬영을 시작했을 때까지도 캐스팅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웃음) 불안하지 않았나? 굉장히 불안했다. 그래도 믿음이 있어서 기다렸는데 결국 그 믿음이 중요했던 것 같다. 정채산도 결국 이정출을 믿어서 성공하지 않았나.(웃음) 나 역시 믿고 기다린 덕분에 그 효력을 봤다.
하시모토(엄태구)가 처음 등장해 일본어로 말을 할 땐 당연히 일본인 경찰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정출과 조선말로 대사를 하는 걸 보고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인지 궁금해졌다. 사실 영화상에서 이 부분을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사실 편집 과정에서 히가시와 하시모토의 대화 장면이 하나 삭제됐다. 히가시가 하시모토에게 이정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면서 "아, 자네도 조선인 출신이지?"라고 긁으니까 하시모토가 자신의 출신성분을 부정하는 답변을 하는 장면이었다. 자신이 의주 출신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일본에서 살았고, 자신은 완벽한 일본인이라는 식으로. 아무래도 그 장면이 삭제돼서 그의 출신 성분을 명확히 대변하는 신이 사라진 셈이다.
하시모토의 출신 성분을 아는 게 꼭 중요한 건 아니다. 다만 그가 조선인 출신의 일본 경찰이라면 상대적으로 동일한 신분인 이정출이 친일파로서 정체성조차 얼마나 얕은가를 대비적으로 드러내는 역할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하시모토를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로 설정했다. 같은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임에도 성질이 다르고, 세대가 다르고, 의지와 신념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게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차이가 이정출을 밀어내는 동력으로 작동되기도 한다.
하시모토 역을 맡은 배우 엄태구는 <밀정>의 발견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주로 과묵한 역할을 맡아온 배우였는데 <밀정>에서의 하시모토는 대사량이 상당한 캐릭터다. 그래서 그를 캐스팅한 배경이 궁금했다. 사실 엄태구는 내가 생각했던 하시모토의 이미지에 가까운 배우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봤을 때 나를 전율시키는 에너지가 있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 온전한 기운 덩어리처럼 느껴졌다고 할까. 그런 기운이 하시모토에게 더 적합해 보여서 결국 엄태구를 선택했다. 그런데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이 있더라. 한번은 촬영장 스튜디오 구석에서 감정에 몰입하면서 의식을 치르듯이 혼자 대사를 하는 모습을 멀리서 본 적이 있는데 진짜 배우를 만난 기분이었다.
엄태구를 만나기 이전에 구상했던 하시모토는 어떤 이미지였을까? 건장한 육체와 말끔한 인상을 가진 인물을 떠올렸는데 기존 배우로 예를 들자면 주지훈 같은 이미지였다. 상대적으로 엄태구는 마르고 빈약한 느낌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기이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예상하기 힘든 악질의 느낌이랄까. 그러다 보니 내가 연상했던 기존의 이미지는 너무 전형적인 것 아니었나 싶기도 하더라.
<밀정>은 배우 송강호와 함께한 네 번째 영화다. 연출 데뷔작인 <조용한 가족>과 두 번째 연출작인 <반칙왕>에 출연했다는 점에서 감독 김지운과 배우 송강호는 함께 성장한 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아무래도 한국영화가 활발해질 무렵에 함께 머리가 컸으니까. 사실 내가 연출한 전작들을 자주 보진 않지만 간혹 볼 기회가 생기면 저럴 때도 있었구나 싶긴 하다. 아무래도 그때는 눈높이와 역량의 차이가 더욱 컸기 때문에 훨씬 더 절망적이었을 거다.(웃음)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송강호라는 배우는 일관성 있는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항상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결 같다. 프로로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지민이 연기한 연계순은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제 역량을 가장 잘 드러낸 여자 캐릭터란 점에서 특별해 보인다. <밀정>은 기본적으로 두 남자의 이야기이고, 어쩌면 한 남자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연계순은 두 남자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역할로 봤다. 처음에는 신인 배우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시나리오가 확장되면서 신뢰감을 줄만한 배우가 필요했다. 개인적으로 <밀정>에서 압권이라 여기는 부분은 연계순의 기차역 액션 신이다. 기차역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연계순을 중심으로 흩어지는 모습에서 고립감과 외로움이 전해지지만 흔들리지 않는 위엄이 느껴지는 동시에 맵시도 산다. 결국 그 장면에서의 연계순이 의열단 그 자체를 보여준다. 내겐 더없이 만족스러운 장면이다.
한편으로는 여성 캐릭터로서 대상화되고 있다는 인상이 남기도 했다. 사실 뒤늦게 반성한 지점이 있다. 기차에서 하시모토를 발견한 연계순이 옷을 풀어헤쳐 가슴골을 드러내고 담배를 피우는 건 약국에서 하시모토를 마주쳤을 때의 단정한 차림새와 정반대의 분위기를 연출해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다. 일종의 장르적 클리셰인데 뒤늦게 그것이 여성 캐릭터에 대한 고정관념에 갇힌 설정이라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서 너무 성찰 없는 인용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반성하게 됐다.
<밀정>의 의열단 단원들은 자기 신념을 뜨겁게 발화하고 웅변하는 인물들이다. 사실 지금까지 연출한 작품들의 인물들은 명확한 신념을 따르는 인물들이라기보단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행동 방침을 정하는 인물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밀정>은 김지운이라는 감독의 영화 안에서 새로운 태도를 발견하게 된 작품이기도 했다. 사실 <밀정> 이전까지 내가 영화를 대하던 태도는 '세상이 이렇게 흉측하고 힘들고 어두운데 뭐가 저렇게 밝고 즐겁니?'라는 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현실이 영화보다 더 어둡고, 끔찍하다 보니 영화에서까지 실패한 역사를 말하고 다루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다루는 인물의 태도까지 크게 바뀌는 건 아니지만 실패한 역사라 해도 그걸 딛고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 <밀정>과 관련은 없지만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을 겪게 되는 현실이니까. 어떤 식으로든 전진해 왔다고 믿었던 세대로서 처음으로 시대가 퇴보한다는 기분을 느꼈을 때의 충격이 내게도 있었던 것 같다.
클로즈업 신이 상당히 많다. 인물들의 얼굴과 표정이 <밀정>의 주요한 미장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아무래도 표정의 서사로 읽혀지길 바란 영화였던 만큼 인물을 타이트하게 촬영한 신들이 많다. 인물의 표정을 통해 극의 무드가 전달되지 않으면 서사도 무너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작은 모니터로 볼 때는 완급조절이 잘 되고 있는 건지 판단하기 힘들어서 후반작업으로 사이즈를 조절할 수 있도록 카메라를 좀 더 뒤로 빼서 거리를 두고 찍기도 했다. 그래서 편집과정에서 컷의 사이즈를 조절해 표정을 좀 더 채운 부분들도 있다. 다행히도 배우들의 표정이 좋아서 의도를 잘 살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일본경찰에 의해 의열단원들이 하나씩 척살당하는 신이야말로 <밀정>에서 가장 뜨겁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인데 그 순간에 루이 암스트롱의 넘버 'When You're Smiling'이 흐르면서 찬물을 쫙 끼얹듯 감정의 온도를 확 가라앉히는 느낌이었다. 극후반부의 'Bolero' 역시 극적인 상황과 역설적인 감상을 준다는 점에서 유사한 장치적 역할을 하는 느낌이고. 일종의 온도 조절기 같은 역할이었다. 사실 영화를 만들 때마다 사진과 음악에서 많은 도움을 받는 편인데 루이 암스트롱의 넘버 'When You're Smiling'을 비롯해 <밀정>에서 등장하는 음악들은 모두 영화를 제작하면서 수집했던 플레이리스트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그리고 모두 다 비슷한 시기에 유행한 음악들이었다. 슬라브 무곡은 1900년도에 유행하던 음악이었고, 'Bolero'도 1920년대 초에 발표됐고, 스윙재즈도 1920년대 중후반에 등장해 193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감미로운 스윙재즈 넘버가 동시대 지구 반대편에서 식민지배를 받는 이들에겐 향유할 수 없는 박탈감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그래서 의열단이 척살당하는 신에 루이 암스트롱의 넘버를 얹었을 때 비극성이 더욱 명징해진다고 느껴졌다. 이정출의 고문 신에서부터 넘버가 흐르기 시작해 경성에 잠입한 의열단이 소탕되는 과정으로 이어지는데 만약 그 넘버가 없었다면 감정이 넘쳐서 신파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을 거다.
대부분의 스코어 넘버들은 짧고 간결한 음을 초시계처럼 빠르고 일정하게 반복함으로써 서서히 긴장감을 조성한다. 반면 컷의 호흡에는 대체로 여유가 있어서 컷 전환의 속도는 스코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긋한 인상이라 역설적이란 느낌을 받았다. 컷의 긴박감보단 공기의 긴박감을 통해 감상을 조여보고 싶었다. 그래서 배우들에게도 '스몰 액팅'을 요구했는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도록 다른 속셈을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표정을 주문했다. 그리고 마주앉은 상대방이 모르게 타인의 시선을 포착하고 은밀하게 눈빛을 주고 받는 시선 처리 등을 보여주기 위해 컷의 호흡을 최대한 안배했다. 대신 음악을 통해 긴장감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음에 가까운 사운드를 내는 성질의 악기들을 활용한, 인더스트리얼한 음악을 만들고자 했다. 외부에서 유입된 소음이 오히려 집중력을 높여주듯이, 그런 성질의 음악이 영화적 상황을 보다 몰입하도록 만들 테니까.
타이틀 시퀀스와 극의 최후반부를 제외하면 페이드 아웃을 통해 신을 전환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특히 디졸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신을 전환할 때조차 프레임 공백을 없애고자 애쓴 느낌마저 든다. 전통적으로 디졸브를 활용할 땐 이전 신의 긴장감을 해소하고 다음 신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밀정>에서는 앞선 신의 긴장감을 다음 신까지 끌고 가고 싶었다. 그래서 옵티컬 디졸브보다 CG 디졸브를 많이 썼다. 예를 들면 김우진의 얼굴에서 정채산의 뒷모습으로 카메라가 패닝할 때 그 위로 이정출이 탄 기차 이미지가 밀고 들어오고, 이정출이 하시모토와 하일수가 나간 방 안의 창문으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상념에 잠길 때 그 뒤로 자동차 불빛이 쭉 들어온다. 이게 다 CG로 작업한 디졸브인데 이렇게 그림들이 매끄럽게 이어지면서 긴장감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고전적인 느낌을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구현했다는 성취감도 있었다.
열차 신은 <밀정>에서 최상의 스펙터클과 최고조의 긴장감을 제공하는 신이다. 그런데 원래 시나리오에선 없는 장면이었다고 들었다. 각색 전 시나리오에서의 열차는 상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싣고 가는 운송수단에 불과하다. 의열단원들은 압록강을 건넌 뒤 열차에서 내려 기생으로 변장해 인력거로 옮겨 탄다. 신의주의 부유층들이 기생들을 불러 연회를 열곤 해서 기생으로 변장하면 검문을 통과하는 게 용이했다고 한다. 실제로 독립단체가 국내에 잠입할 때 활용한 방식이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그 지점에서 영화적 긴장감이 뚝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열차를 운송수단 이상의 극적인 무대로 만들고 싶었고 각색을 통해 지금의 열차 신을 만들었다.
비좁은 열차의 제한된 동선을 통해 극적인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비좁은 공간에서 전개되는 신을 설계하는 걸 좋아한다. 내가 잘하는 부분 중 하나라 생각하기도 하고. 그래서 인물의 동선이 제한되는 열차에 모든 상황을 때려 부어서 두 인물의 감정선을 극대화시켰다. 김우진과 이정출을 부조리한 상황으로 끊임없이 몰아붙이고 예상치 못한 결과로 내달리는 열차가 예측하기 힘든 시대성을 대변하는 공간이란 인상을 주고 싶었다. 사실상 영화의 하이라이트도, 주제도 다 거기 있다. 그 모든 것을 부어 넣고 가열시켜서 끓는 점이 됐을 때 튀어나오는 인물들의 형태를 통해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열차 신으로 촬영된 분량은 40여분이지만 신의 절반 정도를 편집해 지금의 분량이 남았다.
그렇다면 감독판을 추가 개봉해도 좋겠다. 그러기엔 편집할 시간이 없다. 너무 오랫동안 <인랑>을 미뤄왔는데 이젠 정말 빨리 해야만 한다.
오래 전부터 연출작으로 언급됐던 <인랑>이 드디어 <밀정>의 차기작으로 언급되고 있다. 사실 원작이 있는 작품을 영화화하는 건 처음일 텐데 워낙 유명한 원작이니 부담될 것 같다. 그래서인지 너무 안 풀려서 힘들다.(웃음) <인랑>은 일본의 '전공투' 세대가 공유한 허무주의적인 정서로 점철된 세계관이라 원작의 무드를 최대한 살려서 영화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원작을 대변하는 주요한 요소들만 남기고 완전히 뒤집어볼까 고민 중이다.
<인랑>에서 보존하고자 하는 주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강화복의 형태나 인랑이라는 비밀 스파이들의 암투 그리고 짐승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시대성 같은 것이다. 정말 뻔뻔하게 이것만 가지고 가볼까라는 고민도 있다. 사실 너무 오래 끌어온 프로젝트인데 이젠 정말 해야 한다. 지금 생각으론 내년 3~4월쯤 크랭크인에 들어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