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제목을 봤을 때 무엇이 맞고 틀리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맞고'와 '틀리다'보단 '지금'과 '그때'가 보다 중요하게 느껴졌다.
두 개의 지금 혹은 두 개의 그때. 결국 지금이라서 맞고,
그때라서 틀린 것. 이것은 결국 옳고 그름의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옳고 그른
것으로 판명해주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언제나 지금은 맞지만 언젠가 그때는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시간이라는 마술적 흐름에 관한, 굉장히 사소한
발견의 깊이.
완전히 분절된 데칼코마니 형태의 출발점에서 제각각 시작되는 두 개의 이야기. 홍상수
감독 특유의 대구 구조를 개별화시킨 두 영화는 하나의 시작을 품었으나 두 개의 우주로 분리된다. 아마
홍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새로운 전형으로 구별될만한 작품일지도. 개인적으론 <옥희의 영화> 이후로 또 한번의 전환점이라 생각했다. 하나의 시점으로 분리시킨 두 가지 삶의 체험. 정말 놀라운 영화적
경험. 사소한 일상의 톤으로 길어 올린 마술적 리얼리즘. 나는
이 영화에 어떤 찬사도 아끼고 싶지 않다. 놀랍다는 말도 부족하다.
정재영은 두 사람 몫을 하며 영화의 너비를 확장하고, 김민희는 한
사람으로서 영화의 경계를 만든다. 두 개의 정재영과 하나의 김민희가 이 영화의 대구를 완성한다. 두 방향으로서 완전한 하나의 영화. 이 영화가 놀라운 건 영화라는
체험이 삶을 어떻게 예언하는가, 삶을 어떻게 반추하는가, 정반대의
방향성을 지닌 두 가지 질문에 합당한 답을 모두 해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현재는 언제나 옳게 합리화되고, 과거는 언젠가 틀려서 부끄러워진다. 그래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하지만 우린 언제나 지금을 사는 인간이다. 부끄럽지 않고 배길 수가
없다. 그게 당연하다.
<탐정: 더 비기닝>은 버디무비로서의 장점이 강한 작품이다. 권상우와 성동일의 케미가 나쁘지 않다. 덕분에 웃음을 유발할만한 코미디로서의 장점이 발휘된다. 능력 없는 민폐 남편이자 구박덩어리로 전락한 권상우의 찌질한 연기를 보는 재미도 있다. 성동일 역시 사회와 가정에서의 이중적인 위세를 지닌 인물이란 점에서 코믹한 극적 장치가 된다. 물론 이게 남성편향적으로 설계된 코미디란 점은 좀 지적하고 싶어지지만.
문제는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추리물이란 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탐정>이라는 제목을 지우고 싶을 정도로 형편 없는 만듦새를 전시한다. 전설적인 강력계 베테랑 형사와 아마추어 추리광이 함께 사건을 풀어나간다는 골자는 흥미롭지만 베테랑 형사는 그 경력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능하고, 아마추어는 그야말로 민폐 덩어리다. 추리를 한다기 보단 완성된 시나리오를 토대로 추리를 끼워맞춘다는 인상이랄까. 추리물이란 장르 안에서 도무지 신뢰가 안 간다. 기이할 정도의 자신감이 묘할 정도.
의외로 이 영화에서 재미있게 여겨지는 건 사건현장이 아니라 각자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부부끼리의 사연이다. 밥벌이에 무능하든, 유능하든 아내보다 약한 남편들의 고충을 나누는 광경이나 밥벌이 제쳐두고 탐정질에 환장한 남편 때문에 힘들어 하는 아내 연기를 하는 서영희의 연기는 <탐정>에서 쓸만한 서브 플롯 노릇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최소한 납득이 가는 추리물로서의 구색을 맞췄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관람을 권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어설픈 슬랩스틱 따위로 범벅된 쌍팔년도 명절 코미디가 아니라 캐릭터의 특성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코미디를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점은 평가해주고 싶다. 그런 면에선 팝콘무비로서 가볍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관객들에겐 미덕이 없는 영화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개인적으로 추천하지 못하겠단 거지.
영화가 흥행한다면 누가 봐도 속편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결말이다. 이미 제목부터 '더 비기닝'이란 부제를 품고 있으니 당연히 결말에 대한 야심이 팽배한 것 같은데, 과연 어떨지. 전통적인 관점에서 추석에 먹힐 영화처럼 보이긴 한다만.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는 알다시피 <어벤져스>의 속편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자 마블 히어로 무비의 절정이다.
최근의 슈퍼히어로 무비들은 액션 롤러코스터의 수준을 넘어서 동시대의 고민이 담긴 철학을 껴안은 현대적 신화로 진화하고 있다.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이하, <윈터 솔져>)는 그 최전선에 놓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윈터 솔져>의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는 <어벤져스>(2012) 이후로 각개 전투를 펼치기 시작한 세 번째 마블 히어로다. 지난해에 성공적인 결과를 보여준 <아이언맨 3>와 <토르: 다크 월드>만큼 혹은 그 이상의 만족감을 부여할만한 작품이다.
단순히 히어로 액션물이라는 오락적인 기대감 안에서 보자면 전반적인 액션 연출은 탁월하다. 빠른 속도감과 생생한 타격감을 전달하는 극 초반부의 해상 작전신을 비롯해서 중반부의 리드미컬한 카체이싱 신, 극 후반부의 거대한 공중 액션신 등 전반적인 액션의 스케일을 조절하는 방식과 그 안에서 보여지는 역동적인 액션 연출이 잘 조율된 인상이다. 물론 극초반부터 핸드 헬드 기법을 활용하며 지나치게 화면을 흔들어 대는 탓에 시각적으로 피로해지는 경향도 없진 않지만 현장감을 살린다는 측면에선 필요악처럼 여겨지는 선택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윈터 솔져>에선 저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신구 캐릭터들이 눈에 띄는데 특히 새로운 캐릭터들의 활약상이 극의 전반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개별적인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더한다. 특히 로버트 레드포드의 등장은 이번 작품을 위한 화룡점정에 가깝다. <윈터 솔져>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내부의 적을 찾아내고 맞서 싸우는 과정을 그린다. 완벽한 우리 편이 완전한 적이 되는 상황 속에서 갖은 위기를 건너는 가운데서도 위선의 가면을 쓴 거대악의 진면목을 추적하고 폭로해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과정이 주된 맥락을 차지하고 있다. 덕분에 슈퍼 히어로 블록버스터의 외피만큼이나 정치 스릴러의 내면이 크게 와 닿는 작품인데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존재감 자체가 장르적인 중량감을 설득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를 통해서 <윈터 솔져>는 단순한 흥미를 쥐어주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영화의 이례적인 방향성을 탁월하게 제시하고 완결짓는다.
한편 주변부의 캐릭터인 닉 퓨리(사무엘 L. 잭슨)와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 또한 이번 작품을 통해서 보다 뚜렷한 자기 내면을 드러내는데 이를 통해서 극의 심리가 보다 입체적으로 확장되면서도 세계관의 정체성을 강력하게 확립해내고 있다는 인상이 느껴진다. 이는 앞으로 이어질 <어벤져스>까지의 여정을 고려한다면 대단히 흥미로운 예감을 부추긴다. 또한 그 밖에도 캡틴 아메리카의 사이드킥이라 할 수 있는 팔콘(안소니 마킨)과 관계적인 변화가 예상되는 ‘윈터 솔져’ 버키 반즈(세바스찬 스텐)의 등장 역시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를 보다 입체적으로 수식한다. 전반적으로 크고 작은 역할을 하는 캐릭터들이 단지 제 역할을 하는 수준 이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극 안에서 명확하게 세워 넣는다는 점에서 캐릭터의 존재감을 통해서 자기 생명력을 얻는 이 작품으로선 대단히 성공적인 결과물을 낳았다고 평할만하다.
사실 캡틴 아메리카는 <퍼스트 어벤져>(2011)를 통해서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었지만 인지도가 낮은 캐릭터였고, 그만큼 캐릭터에 대한 흥미도 떨어지는 인상이 강했다. 심지어 ‘캡틴 아메리카(Captain America)’라는 캐릭터명이 포함된 원제 <Captain America: First Avenger>가 <퍼스트 어벤져>라는 정식 국내 개봉명으로 확정된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아메리카’라는, 국적성이 뚜렷한 이름을 지닌 탓에 국가적 이데올로기에 대변하는 미국적 영웅의 선전도구라는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경향도 없지 않다.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는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힘을 대변하는 ‘영웅질’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라기 보단 미국이라는 강대국이 지닌 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영웅성’의 기준을 제시하는 캐릭터다. 게다가 캡틴 아메리카는 <어벤져스>의 세계관의 근본이 되는, ‘쉴드’의 뿌리가 된 캐릭터나 다름이 없다.
캡틴 아메리카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의 선친인 과학자 하워드 스타크가 참여했던 프로젝트를 통해서 개발된 ‘슈퍼 솔저’였고, 하루 아침에 빈약한 청년에서 벗어나 건장하고 강력한 육체를 지닌 최종병기가 된 남자였다. (슈퍼 솔져 프로젝트는 훗날 헐크로 변신하는 과학자 브루스 배너가 연구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수트를 입고 미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선전 도구처럼 전선을 배회하던 그는 본래 국가에 공헌하고자 했던 자신의 의지에 대한 회의감을 느낀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힘을 발휘할 기회를 얻고 위기로부터 자국의 군인들을 지켜낸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그 이름처럼 정말 ‘캡틴’이 된다. 미국적인 영웅상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영웅상을 제시한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의 순수하고 강직한 신념은 영웅으로서의 가치 그 자체를 대변한다. 게다가 그 본질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둔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통해서 본질적인 가치관을 훼손하지 않는, <어벤져스>라는 히어로 세계관이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할 본질적인 답변을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캡틴 아메리카라는 캐릭터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세우는 작업이란 이 세계관의 전반적인 균형을 맞추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윈터 솔져>는 캡틴 아메리카라는 개별적인 캐릭터 스핀오프로서의 완결성은 물론 <어벤저스>를 향한 다리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한 작품이라 할만하다. <어벤져스> 이후로 <아이언맨 3>와 <토르: 다크 월드> 그리고 <윈터 솔져>로 이어진 마블 유니버스의 각개 전투가 성공적인 행보를 잇고 있는 만큼 이 시너지가 내년에 개봉될 <어벤져스>의 속편에서 어떻게 폭발할 것인지 사뭇 궁금하다.
한편 장기적으론 <윈터 솔져>는 <어벤져스>의 영웅들이 맞이할 파국이라 할 수 있는 <시빌 워>의 복선이라 해도 좋은 작품이다. 마블 엔터테인먼트에서 그리는 큰 그림을 명확히 알 순 없지만 ‘어벤져스’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구한 영웅들이 활약할수록 그 세계와의 갈등은 보다 거세질 것이다. 그만큼 고뇌도 심각해질 것이며 갈등의 불도 커질 것이다.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의 신념이 향할 길은 명확하다. 세계를 구원하는 영웅들이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고 서로를 파괴하는 파국의 종주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언제나 인형 놀이를 하듯이 영화를 만들어왔던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놀랍도록 비범한 걸작이었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를 거듭해서 보면 볼수록 그가 대단히 고집스러운 감독이라는 생각을 확신하게 됩니다. 한치의 흔들림 없이 상하좌우로 정갈하게 이동하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여지없이 딱 떨어지는 좌우대칭의공간 구도, 카메라가 비추는 공간 곳곳을 채운 소품들 하나하나가 모여 이루는 인위적인 완결성, 그 인위적인 풍경 안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캐릭터들의 도드라진 설정과 과장된 연극적인 연기를 펼치며캐릭터 역시 하나의 무대 장치처럼 자리잡게 만드는 배우들, 유아적인 낙천성을 끌어안은 동화적인 세계관.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이 지닌 이 모든 일관성은 그의 영화들을 특별한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특수한 개성이라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론 귀여운 소품 이상의 무언가로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한계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영화 자체가 지닌 특이한 개성에 동감하면서도 사적인 취향으로 점철된 소유물 취급을 당하기 쉽다는 말이죠. 대중적인 공감대를 얻기 쉬운 영화는 아닐 거라는 말입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기존의 웨스 앤더슨의 세계관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동원되는 모든 요소들 또한 감독의 취향과 의도에 완벽하게 복무하고 있고, 철저히통제되고 있습니다. 물론웨스 앤더슨의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그의 인형 놀이에 동참하면서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그 놀이를 즐길 것임에 분명합니다. 배우들 입장에선 이런 방식의 기회가 많지 않을뿐더러 믿을만한 감독이 쥐어준 일탈과도 같은 연기적 경험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보세요.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놀라운 캐스팅입니다. 개중 몇몇은 정말 두 신 안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 영화에 출연하는 건 그만큼 이 놀이를 즐기고 싶어한다는 방증이겠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란 감독에 대한 배우들의 선호도를 대변하는 척도가 될만한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영화는 동유럽에 위치한 가상의 국가 주브로스카의 산 꼭대기에 위치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시작됩니다. 한때 세계 최고급 호텔로 꼽히던 이 호텔의 흥망에 대해서 간략하게 브리핑하며 그 간극의 사연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기던 영화는 직접 인물의 입을 통해서 그 사연에 대해서 상세하게 구술, 정확하게는 재현하기 시작합니다. 궁극적으로<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이야기꾼의 영화입니다. 웨스 앤더슨이 지어낸 허구의 세계를 영화 속 화자의 입을 빌어서 사실적 재현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셈이죠. 언제나 그렇듯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역시 웨스 앤더슨의 전작들처럼 허무맹랑하지만 귀엽고 순진한 어드벤처의 형식을 통해서 이야기를 밀고 나갑니다.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다양한 공간들이 등장하고 그 공간과 공간의 연계는 세트를 부순 자리에 새로운 세트를 바로 지어세우듯이 동선의 연계성을 의심한다는 것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손쉽고 간편하게 이뤄집니다. 그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흥미로운 영화임에 틀림없으며 그 공간의 변화와 함께 등장하고 퇴장하는 배우들의 이름을 수집하는 것 역시 특별한 재미를 주는 작품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기존의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처럼천진난만한 낙관성으로 점철되는 영화가 아닙니다. 인물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통해서 형성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어드벤처는 웨스 앤더슨의 세계관 안에선 이례적인 폭력성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활기가 넘치고 냉소적인 유머와 개성 있는 캐릭터의 향연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 가운데서도 대단히 동적이며 과장돼 있고,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결말부에 다다르면 기존의 웨스 앤더슨표 영화들과다른, 놀라울 정도로 생소한 감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 비극성을 감정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리듯 환기시키는데 생각 이상으로 큰 울림이 남습니다. 개인적으론 웨스 앤더슨의 데뷔작인 <바틀 로켓>부터 최근작이었던 <문라이즈 킹덤>까지 단 한번도 체감해보지 못했던 상심과 애수에 가깝습니다.
기존의 웨스 앤더슨 영화들이 외부의 사건을 감독 개인의내적인 세계관에 집약시키는 방식에 가까웠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영화의 모티프가 됐을 법한 외부적인 사건을 내적인 세계관에 반영해서 인테리어했을 뿐, 그 외적인 모티프의 너비를 보존한 가운데서 보다 폭넓게 외부적인 영역으로 확장해 낸듯한 인상입니다. 영화는 여러 모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파시즘이나 나치즘이 부른 살풍경들을 연상시키는데 이런 비극성의 요소들을 극적인 소품으로 활용하지 않고정면으로 마주보며 그 의미 안으로돌진해버립니다. 결국 그 비극성을 우회하지 않고 돌파해버리는 것이죠. 결국 객석의 관객들 역시 영화와 함께 그 비극성의 통증을 고스란히 관통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 드러낸 최초의 비범함이자 거장으로서의 면모라고도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부연할 필요도 없는 걸작입니다. 게다가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가운데서도 이런 감정적인 여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웨스 앤더슨이란 창작자가품고 있었던 새로운 너비를 선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아마 웨스 앤더슨의 작품 가운데서 가장 오랫동안 회자될 작품일 거라고 확신합니다. 개인적으론 영화의 결말부를 지나며 가슴 속에서 종이 울리는 기분마저 느꼈습니다끼기도 했습니다. 마음의 울림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서 상영관을 벗어난 뒤에도 한동안 멍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기분이었죠.
웨스 앤더슨의 영화답게 음악의 완성도가 뛰어납니다. 명 음악감독인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와 랜달 포스터가 함께 완성한 이번 OST는 러시안 포크를 비롯해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동유럽의 악기들을 최대한 활용한 음악들로 채워져 있는데 덕분에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선율에도 영화의 특이성이 적극적으로 반영됐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것이 한편으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리는 세계관의 특이성을 보다 도드라지게 반영하고 있다는 감상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화면 비율이 거듭 바뀌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1960년대에 유행했던 2.35:1의 와이드 스크린 비율을 비롯해서 1930년대에 유행했던 1.37:1, 그리고 오늘날에 자주 활용되는 1.85:1의 비율로 화면이 변하는데 이는 각각 그 시대에 유행했던 화면비를 적용한 결과라고 합니다. 화면비의 적용이란 곧 이 영화가 보여주는 엄격한 완벽주의적인 성향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그 시대의 시선을 대변하겠다는 야심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 적극적으로 반영한 최초의 현실적인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결과적인 상심이나 애수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지금 웨스 앤더슨과 같은 창작자 역시도 간과할 수 없는 폭력의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환기시키는 사실 아닐까요. 영화의 배경이 된 동유럽에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현실입니다.
파격적인 동성애 영화로 알려진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그 어떤 멜로보다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러브스토리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지독한 멜로물입니다. ‘이별을 통한 소녀의 성장통’이란 식으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건 영화가 끝날 무렵까지 그 이별이 성장으로 해소되기 보단 통증으로 내려앉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은 길에서 마주쳤던 엠마(레아 세이두)와의 우연한 재회를 통해서 예상하지 못했던 체험들을 거듭해나갑니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은 물론 아티스트로서의 미래로 나아가는 엠마와 그 주변부의 삶에 종속되기 시작하면서 삶이 예상 밖의 궤도를 돌게 되는 셈이죠.
단순히 성정체성을 깨닫는다는 것 이상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저편으로 나아가버리는 셈이에요. 결과적으로 아델에게 있어서 엠마와의 이별이란 감정적인 단절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기회와의 단절로도 이해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죠. 그만큼 이별이라는 진통은 아델의 삶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절망이자 비통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신이 보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저편까지 나아가 그 일상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 원점으로 튕겨져 추방돼버린 셈이니까요.
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히 좋습니다. 특히 아델 역을 맡은 아델 엑사르코풀로스는 전반적으로 영화의 서사와 함께 인상이 변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인데 이별 이후의 감정적 진폭을 드러내는 후반부의 연기는 정말 연기가 아니라 실제라고 믿어질 만큼의 감정적 몰입도를 보여줍니다. 충동적인 계기로 맞닥뜨린 이별에 의한 심적인 고통이 스크린 밖으로도 절절하게 전이되는 기분이죠. 게다가 그 반대편에 선 엠마 역을 맡은 레아 세이두는 거대한 감정적 파고를 형성하는 매개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이별 이후에 남게 되는 애틋함 같은 감정의 끈을 놓지 않음으로써 극적인 페이소스를 극한으로 끌어올립니다. 두 배우의 화학작용 자체가 이 영화의 감정을 입체적인 구조로 이끌어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 영화가 화제가 된 건 대단히 수위가 높은 여성간의 섹스신이 긴 분량으로 등장한다는 점이었죠. 그런데 대단히 적나라해서 한편으론 담담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은밀하고 농염한 연출을 위한 카메라 앵글이 동원되기 보단 사물을 관찰하듯 평범한 프레임 안에서 행위가 목격되는 인상입니다. 오히려 저는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무언가를 먹을 때 보는 이의 욕구를 건드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토마토 파스타를 너무나 맛있게 먹는 장면에선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느낌이기도 했죠. 색욕보다도 식욕이 강렬하게 느껴진다니 좀 묘하지 않습니까? 그건 아마 이 영화가 섹스신을 특별한 영화적 체험처럼 위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동성애라는 소재는 이 영화의 주요한 키워드가 될 뿐,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사안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결말부에서 묘사되는 찰나의 엇갈림을 보면서 ‘운명’이란 단어에 설득 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뒤바꿀 수 없는 결과를 등 뒤에 두고 터벅터벅 걸어가야 하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끄덕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델의 뒷모습을 비추는 엔딩시퀀스의 롱테이크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건 그래서입니다. 그 너머의 삶에 대해서 염려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걸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죠. 그렇게 그 너머를 살아가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요. 사실 저는 원작의 비극적인 결말보다도 영화의 결말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죽음에 대한 연민보다도 이면의 생에 대한 호기심이 지워지지 않는 여운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한편 영화에선 프랑스의 전인적인 교육 환경을 목격할 수 있는데 학생들이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는 가두 시위를 하는 신에서 '민영화를 반대한다!'는 대사가 나올 땐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물론 불법시위라는 목적을 앞세운 과격한 진압 장면 같은 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건 비단 저뿐만이 아닐 것이라고, 문득 생각하게 되네요.
뱀파이어들이 등장하는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좀처럼 목을 물지 않는다. 매혹적인 이미지로 이빨을 드러낼 뿐이다.
‘영원히 산다’라는 말을 뒤집어 봅시다. ‘영원히 죽지 못한다’라고 생각해봅시다. 영원히 산다는 건 그만큼 권태롭고 지겨운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두 존재가 있습니다. 사람이란 단어를 굳이 수정한 건 두 존재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단히 오래된 존재처럼 말하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1세기 남짓의 경험만이 가능한 인간과 달리 그들은 수 세기 동안 인류의 역사를 살피며 살아왔습니다. 아니, 살아남았습니다. 언제, 어떤 연유로 뱀파이어가 됐는지 몰라도 태초부터 그들의 삶엔 낮이 없었던 것만 같습니다. 매우 평온하지만 은밀하고 때때로 아슬아슬한 그들만의 밤을 수 세기 동안 버텨왔습니다.
일단 뱀파이어라는 소재가 주는 장르적인 기대감을 품고 상영관을 찾았다면 대단히 곤란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짐 자무쉬가 연출한 영화라는 사실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애초에 그런 종류의 기대감을 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단히 서정적인 리듬감과 시적인 묘사로 특유의 미학적인 시선을 견지해온 짐 자무쉬의 뱀파이어물에서 장르적인 공포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낯선 것이니까요. 그리고 짐 자무쉬 특유의 미학적인 방식은 이 영화가 주목하는 뱀파이어들의 영속성과 맞아떨어지는 측면도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나른한 분위기 속에서 고상하고 우아하게 소모되는 뱀파이어들의 평범한 일상은 때때로 대단한 블랙코미디의 자질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고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Only Lovers Left Alive>라는 시적인 문장은 생각보다 절박하고 짓궂은 제목입니다. 특히 느슨하게 풀려있던 영화의 흐름을 강하게 확 당기는 듯한 결말부 덕분에 이 영화 자체가 대단히 악랄하고 재기발랄한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살아남는다’라는 절박한 감정과 직접적인 행위의 중의성을 한번에 깨닫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한편으론 뱀파이어들이 ‘인간 따위가’란 식으로 계급적인 우월성을 드러낼 때 그들이 지닌 고매한 정신이 느껴지지만 인간 세계에 기대서 자신의 삶을 연명해나가는 일상을 거듭 목격하다 보면 멸종을 앞둔 동물의 자존심을 보는 것과도 같은 아이러니가 느껴집니다.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낡아 버린 귀족 가문의 풍경 같기도 하고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됐다고 할법한 존재들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가 대단한 아이러니이기도 하죠.
나이트신으로만 점철되어 낮은 조도의 색채감으로 채워진 영화의 풍경은 그만큼 정적입니다. 어둠과 어둠을 밀어내는 조명들로 채워진 영화의 몽환적인 풍경과 비현실적인 색감 자체에서 시간의 흐름을 지워버린 듯한 근사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물들만큼이나 영속성을 지닌 듯한 소품들로부터 반시대적인 낭만 같은 것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백미는 캐스팅입니다. 틸다 스윈튼은 그냥 뱀파이어를 섭외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아요. 특유의 신비감과 중성적인 매력이 더해져서 영화의 비현실성을 강화하는 도구적인 역할도 해내고 있다는 인상도 들고요. 반대로 톰 히들스턴은 뱀파이어로서 ‘생존’과 ‘생활’이라는 현실적 화두를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캐릭터의 조합이 영화 자체의 시공간에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하도록 이끄는 것도 같고요. 서사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미아 바시코브스카와 안톤 옐친은 캐릭터의 쓰임새나 표현력이 적절합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비장한 페이소스와 역설적인 냉소를 품게 만드는 존 허트의 존재감도 탁월하고요. 완벽하다고 칭송해도 모자랍니다. 기꺼이 목을 내주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랄까요.
조셉 고든 레빗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고, 주연까지 맡은 <돈 존>은 보통 물건이 아니다.
매일 밤 친구들과 함께 클럽을 찾으며 여자를 찾는 남자가 있다. 최상등품의 고기를 고르듯이 점수를 매기고, 최고등급이라고 생각되는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춤을 추다가 집으로 가서 섹스를 즐긴다. 그에게 이는 일종의 게임이나 다름없다. 1회용품을 소비하듯이 자연스럽고 거리낌 없이 원 나잇 스탠드를 즐기고, 다음날이 되면 새로운 상대를 찾는다. 도돌이표 같은 밤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도 그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를 위한 환상 속의 그녀는 따로 있다. 클릭 몇 번이면 만날 수 있는 포르노 배우들을 보며 자위를 하는 것이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보다도 그를 만족시킨다. 그런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운 여자가 나타났다.
<돈 존>은 할리우드의 미래로 꼽히는 영민한 배우 조셉 고든 레빗의 각본, 연출, 주연작이다. ‘돈 존(Don Jon)’이란 제목의 모티프가 된 건 스페인 귀족 가문의 전설적인 바람둥이 돈 주앙(Don Juan)이라고 한다. 돈 주앙은 카사노바와 달리 자신이 만나는 여자들로부터 혐오를 샀는데 여자를 노골적인 정복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돈 존>의 존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만족할 수도 없는 잠자리를 전전하는 건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자존감의 정복을 위해서다. 그를 충족시켜주는 상대는 인터넷의 포르노 사이트에 널려있다.
‘포르노 중독자’라는 캐릭터의 특성은 인터넷 시대의 폐해를 연상시키지만 <돈 존>은 궁극적으로 관계의 일방성을 지적하고 수긍하게 만드는 영화다. 존에게 있어서 진짜 섹스를 위해 거쳐야 하는 스킨십과 전희의 과정이란 그저 결과를 위한 노동에 가까운 반면,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만족스럽다. 쾌감이란 결과에 닿기까지의 과정이 간편하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가 바바라(스칼렛 요한슨)에게 끌리는 것 또한 쉽게 섹스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점차 존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 변화는 존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방적인 관계에 탐닉하던 남자는 자신을 매료시킨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투신함으로써 일방적인 관계의 허무를 깨닫는다. 간편하고 합리적인 방식의 쾌감이 ‘가짜’임을 깨닫는다.
<돈 존>은 계산된 연출 방식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반복적인 패턴을 지닌 존의 일상을 도돌이표 같은 동선과 공간 묘사, 행위를 통해서 묘사하는데 이 패턴에 미세한 변화를 삽입함으로써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별다른 설명 없이도 효과적으로 이해시킨다. 과감한 인서트컷을 삽입하거나 빠른 컷의 전환으로 두 개의 신을 연결하는 교차 편집 등 편집 방식이 현란하게 느껴지는 신도 더러 있는데 때때로 과장되거나 넘치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재기발랄하고 영리하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킨다. 무엇보다도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에서 소모될만한 소재를 군살 없는 성찰로 승화시킨 성장드라마로 완성해낸 재능이 놀랍다. 과감하면서도 감복할만한 결말로 다다르는 이야기 방식도 탁월하다. 실로 주목할만한 연출 데뷔작이다. 조셉 고든 레빗, 역시 보통 물건이 아니다. 참고로 중반부에 놀라운 카메오가 등장하니 기대할 것.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뛰어난 이야기꾼의 영화다. 물론 흥미로운 이야기밖에 없는 영화라는 말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공항에서 손짓을 이용해서 대화를 나눈다. 여자는 남자를 마중 나간 모양이다. 친밀한 사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차 앞좌석엔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두 사람의 재회가 이혼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끝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같다. 그 끝에서 과연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카메라와 함께 이야기의 문턱을 넘게 되는 순간부터 영화는 예상 밖의 이야기 범위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이야기의 운용 방식만으로도 흥미진진한 영화다. 이혼을 앞둔 부부의 입장을 핵심으로 그와 연관된 주변부의 입장을 끌어들이며 극의 너비를 확장해나간다. 단순명확해 보이던 사안이 점차 복잡한 양상으로 확대된다. 평범해 보이던 사연이 주변 인물들의 내밀한 감정과 충돌하고, 그로 인해서 예기치 않게 불거지고 밝혀지는 진실들로 인해서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된다. 평면적인 일상의 기류에 입체적인 변곡점이 형성되고 점진적으로 이야기의 절정이 형성된다. 감독 아쉬가르 파라하디는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도 명확해 보이는 사연의 끝으로부터 가늠하기 힘든 이야기의 방향성을 살핀 바 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역시 마찬가지다. 끝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영화는 끝을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굴러나간다. 그 예측하기 힘든 방향성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묘미에 가깝다.
부조리극의 양상 자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고, 그 복잡다단한 이야기 흐름만으로도 감정적인 진통이 명확하게 다가온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뛰어난 이야기꾼에게 가능한 화술과 작법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다. 물론 단지 그런 이야기 구조에 대한 흥미만을 안겨주는 작품은 아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영화는 명확한 결말을 묘사하는 대신 카메라를 두고 떠나버리듯 롱테이크 기법의 엔딩 시퀀스를 제공한다. 이는 단순해 보이던 도입부 상황과 대비적인, 어떤 것도 불확실해진 결말부의 상황 자체를 아이러니한 여운으로 각인시킨다.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던 상황들의 내면엔 감당하기 힘든 비밀과 켜켜이 쌓인 오해들이 존재했고 그렇게 방치된 비밀과 오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당사자들의 삶을 휩쓸어 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의 진실을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진실을 알았다는 판단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으로 가닿는다. 인물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않는 엔딩 시퀀스의 이미지는 그래서, 그렇게 마음을 진동시킨다.
<변호인>은 노무현에 관한 영화이되, 노무현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노무현이란 말을 통해서 환기되고 복기되는 영화인 것 같다. 이 시대의 첨예한 갈등 한복판에 <변호인>이란 영화가 놓여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제작 초기부터 그리고 영화가 개봉된 지금까지도 <변호인>에 관한 말의 8할도 여기서 비롯됐다. <변호인>이 ‘노무현에 대한 영화’라고 알려지면서 이 영화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정치적인 영화로서 인식된다. 하지만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인 시절의 영화라기 보단 고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인 시절에 변호를 맡았던 부산 학림 사건, 흔히 말하는 ‘부림사건’에 관한 영화로서 설명할 때 보다 명확해지는 작품이다.
‘부림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평범한 독서모임을 운영하던 대학생들이 빨갱이 조직원으로 몰리면서 강제 연행되어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강제적인 자백을 실토한 뒤 재판에 회부됐고 이미 정해진 각본의 결말을 향하듯 일방적인 분위기로 강행된 재판 속에서 노무현을 비롯한 당시의 변호인단 3인이 조작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불공정한 재판에 항의했지만 부당한 형 집행이 이뤄졌다. 당시 구속된 22인 중에선 부산지역의 대학생을 비롯해서 교사와 직장인들도 포함돼있었는데 개중의 몇몇은 재판 당일에서야 처음 대면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서 활용했던 대국민 빨갱이화 조작 사건, 이른바 용공 조작 사건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바로 이 부림사건이다.
<변호인>이란 영화가 부림사건을 관통하며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국민과 국가의 관계란 일방적으로 충성을 바쳐야 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 “국민이 곧 주권이다.” 그만큼 국가라는 거대한 울타리를 사유화가 가능한 권력으로 인식하고 이를 남용하는 무리의 부조리한 행위에 대한 고발, 그것이 <변호인>의 주제의식에 가깝다. 사실 <변호인>이 공적인 사건을 환기시키는 묘사의 방식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다고 말하긴 조금 망설여진다. 다만 기본적으로 어긋나있지 않으며 명확한 정황을 되짚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선 나름대로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발화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 어쩌면 폭압적이고 몰염치한 권력의 시대에서 선악의 구도가 명백한 탓에 그 균형 자체를 담아낸다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대에 죄를 물을 순 없겠지만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이해도 필요한 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제대로 작동시키는 건 송강호라는 배우 자체의 존재감이다. 아마 <변호인>은 올해 개봉된 <더 테러 라이브>, <집으로 가는 길>과 함께 배우의 연기력이 영화의 완성도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를 논하기 적절한 사례로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지난 12월 18일에 개봉된 <변호인>은 개봉 첫 주에 약 500여 개의 스크린을 확보했고 관객 170만 명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개봉 전부터 개봉관 확보에 대한 걱정을 비롯해서 흉흉한 소문이 돌았던 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영화에 관해서 할말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포털사이트의 평점에선 양극화된 싸움이 한창이었다. 1점 아니면 10점. 절대적인 지지와 절대적인 반대가 맞서는 극단적인 대치 상황. 영화에 대한 감상과 무관한 자기 선언. 이는 바로 우리 사회의 갈등 국면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바로미터나 다름없다.
<변호인>을 관통한 스크린 밖의 관객들의 감상은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 안에서 영화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보다 단단해지는 인상이다. <변호인>에 대한 감상의 방향이 실화 자체가 지닌 가혹함에 대한 분노 이상으로 작금의 현실에 대한 호소나 공감으로 확장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아닌 하나의 상징으로서 권장하거나 부정해야 될 무언가가 돼버린 인상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 간의 싸움 안에서 <변호인>은 뜨거운 감자가 되는 것 같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변호인>에 대한 관람 여부를 선거 운동하듯 알리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는 건 시대적인 정의 그리고 보편적인 상식에 가깝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영화를 ‘노무현에 관한 찬양’이라며 힐난한다. 한편에선 우리가 꼭 봐야할 영화라며 호소한다. 한편에선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면 종북세력이 된다. 한편에선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몰락에 기여하는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호도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그저 한편의 영화가 아니다. 지금 현실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증명하기 위한 필사적인 도구인 셈이다. 자신의 블로그에 <변호인>에 관한 리뷰를 남긴 영화평론가 이동진을 향해서 비판적인 댓글이 달렸다.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인 입장이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댓글을 남긴 이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란 의미일 테다. 그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그저 영화가 아닌 셈이다.
심지어 다른 한편에선 영화를 관람하지 않고도 싸지를 수 있는 촌평이 쏟아진다. 심지어 ‘공산주의 혁명을 기도했던 반국가 범죄사건’에 대한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위인도 등장했다. 시절이 하수상한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하수상하지 않았던 시절이나 있었는지 눈과 귀를 의심할만한 작태들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커밍아웃하는 시대에서 <변호인>과 같은 영화가 돋보이지 않고 배길 수나 있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변호인>을 돋보이게 만드는 건 여전히 스스로 불신의 탑을 쌓고 자신만의 국민을 보호하는 공권력이고 그 공권력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과 수익을 보장받는 보신주의자들의 파렴치한 행태에 있다. <변호인>과 그 주변반응을 ‘노무현의 영화’를 두고 벌어지는 갑론을박에 대해서 친노와 일베의 갈등으로 일반화시키는 것 역시 그리 적절한 태도인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를 둘러싼 공기는 생각 이상으로 포괄적이고 상징적이다. 그냥 이 시대 자체의 양상처럼 보인다.
<변호인>은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시대를 잘 만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하수상하다 못해서 보고 듣고도 의심할만한 일들이 시시때때로 눈과 귀를 바늘처럼 찌르고 들어온다. 하지만 <변호인>이 잘 만날 시대가 하루 이틀이었나. 아마 한반도에 대한민국이라 칭하는 국가가 세워진 이래로 <변호인> 같은 영화가 개봉하지 못할 만큼 무기력한 시대만 아니라면 이 영화를 흥행시킬 시대는 적지 않았다. 다만 그런 시대가 21세기를 넘어선 지금에서도 머리를 들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놀라울 뿐이다. 민주주의를 천년왕국 정도로 해석했던 이들에겐, 정치라는 것이 대단히 불쾌한 술자리 대화 소재로 인식했던 이들에게도 충격과 각성을 준다고 말하는 시대에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정말 대단한 흥행 요건을 갖춘 상업영화일수밖에 없다. 이 영화가 시대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시대가 이 영화를 떠받들게 만든다. 시대는 보다 우울해지고 있다. 그만큼 관객은 더 들 것이다. 이것도 다 ‘놈현 탓인가?’ 무서워서 대통령 욕도 하기 힘들어진 작금의 시대 탓이라고 여겨지는 건 그저 오해인가?
분노를 추스르지 못하는 남자는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스스로 파괴한다. 그로 인해서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 동떨어진다. 그에게 세상은 거대한 쓰레기통과 같다. 패악을 자행하는 이들은 역겹고 그들에게 복무하듯 살아가는 약자들의 무기력도 꼴사납다. 그 분노의 뿌리는 개인적인 사연에 닿아 있다. 그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는 상실의 뿌리가 그의 화를 부추긴다. 메울 길이 없다. 그런 어느 날, 한 여인을 만났다. 울화가 치민 채로 들이닥쳤던 어느 가게의 한 구석에서 무너져있던 그에게 그녀가 말을 걸었다. 조셉(피터 뮬란), 한나(올리비아 콜맨)를 만나다.
서로에게 이방인이었던 두 남녀의 만남은 모든 인연과 마찬가지로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된다. 좀처럼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하던 조셉은 그 모든 화를 스스로 감내하듯 받아들이는 한나를 만나 새롭게 거듭나기 시작한다. 한나에게 마음을 열어나가던 조셉은 그녀의 미소 뒷면의 극악한 현실을 대면하게 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종종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해내야 할 무언가를 생각하게 된다.
<디어 한나>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한 남녀에 관한 사연이다. 자신의 삶을 채우던 절반의 희망을 잃어버린 조셉은 남은 자리에 절망을 한 가득 채우며 살아간다. 자신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폭압으로부터 자유롭길 갈망하는 한나는 매일 같이 그 무기력한 현실을 체감하며 살아간다. 그들에게 삶이란 언제부턴가 요원해진 단어였다. 두 사람은 거칠고 성기게 조우하지만 결국 애틋하고 절실하게 서로를 당긴다. 거대한 결핍으로 자라난 가시를 세우던 남자와 끔찍한 폭력의 공허에 시달려 텅 빈 삶에 움츠려 들던 여자는 서로를 통해서 가시를 꺾고, 몸을 세운다.
두 남녀의 만남, 비극 속에서 샘솟는 희망의 여지, 이는 사실상 암담한 터널 같은 여정을 앞두고 있다. 영화는 어줍잖게 희망이나 긍정을 논하지 않는다. 지독한 비극에 내몰린 이들에게 어쩌면 지극히 당연할 수 밖에 없는 범위의 선택을 담담하게 내민다. 그래서 더욱 충격적이다.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라는 희망만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비극의 질곡으로 인물을 내려 보낸다. <디어 한나>는 비극을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희망을 직시하는 영화다. 운명적인 태도로서 희미한 긍정으로 비극을 덮는 대신, 그 비극을 돌파하는 방식으로서 비극을 극복해낼 수 있음을 직시한다.
어쩌면 충격적인, 허나 지극히 그러할 수 밖에 없는 결말부의 한 대목에 다다른 대부분의 관객들은 무너져 내린 마음을 쓰다듬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비극이라기 보단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디어 한나>는 비극을 뛰어넘기 위해서 맞불 같은 비극을 선택한 여인의 용기와 그 용기를 북돋아준 한 남자의 새로운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끔찍하게 처연하지만 아연하게 아름다운, 마음을 후려갈기는 힐링 무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