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 소프틀리>는 오바마의 연설로부터 시작된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아니라 2008년 부시 정권 말기에 공화당의 대선 후보 존 맥케인과 경합을 벌이던 민주당 대선 후보 오바마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이어지는 내내 조지 부시 미국 전대통령이나 오바마, 미국 전 재무부 장관 헨리 폴슨과 같은 정치인들의 연설이나 발언이 심심찮게 귀를 파고 든다. 만약 당신이 브래드 피트가 출연하는 하드보일드한 킬러물 정도를 예상하고 상영관을 찾은 관객이라면 이미 예사롭지 않은 오프닝 시퀀스만으로도 기대가 빗나갔다는 예감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
브래드 피트의 베니스 남우주연상 수상작인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을 연출한 감독 앤드류 도미닉은 조지 히긴스의 1974년작 범죄 소설 <코건의 거래 Cogan’s Trade>을 모티프로 <킬링 소프틀리>를 구상했다고 한다. <코건의 거래>와 <킬링 소프틀리>의 이야기 줄기는 유사하다. 보스턴의 도박장에 들이닥친 강도로 인해서 얻은 손실의 책임자를 가리기 위해서 갱단은 전문적인 해결사 즉 킬러를 고용한다. 문제는 이미 한차례 그 강도질을 벌였다가 용서받았던 이가 갱단 내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해결사로 고용된 킬러 잭키 코건(브래드 피트)의 논리는 이렇다. 도박장을 턴 강도에게 책임을 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사태가 반복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이가 있다는 것.
<킬링 소프틀리>의 서사는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경제가 붕괴된 부시 정권 말기의 미국 사회다. <코건의 거래>가 발표된 시기는 미국 경제 공황의 여파가 한창이던 1974년이다. <코건의 거래>가 <킬링 소프틀리>만큼이나 경제적인 위기 상황을 직설적으로 가리키는 작품처럼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원작과 영화는 킬러물이란 장르적 속성을 공정한 거래와 자본주의적인 계급 사회를 은유하는 그릇으로 삼고 있다. 무엇보다도 <킬링 소프틀리>는 확실히 그렇다. 코건은 도박장을 턴 범인만큼이나 그 범죄 행위를 따라 하게 만든 주범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한다. 경제 위기 발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경제범들이 제대로 된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평가됐던 지난 서브 프라임 사태가 연상되지 않나?
오바마와 부시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연설이나 발언들은 영화의 극적인 상황을 입체적으로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처음으로 인물이 등장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미국인의 비전을 웅변하는 오바마의 대선 출마 캠페인 연설이 오버랩되는 것부터 영화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형태나 인물의 행위와 맞물릴만한 음성이 마치 주석처럼 따라붙는다. 이는 은유인 동시에 장치적인 위트다. 킬러들의 행위가 자본주의 국가의 행태와 유사하게 어울려 보이도록 설계된 은유인 동시에 인물의 행위를 반어적으로 설명하는 위트의 장착에 가깝다. 이를 테면 카페에서 코건이 남겨놓은 팁을 가로채려는 뚱뚱한 하수인에게 “팁을 내려놔. 이 멍청하고 무능력한 돼지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TV 속의 부시는 말한다. “미국의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유능합니다.”
물론 <킬링 소프틀리>는 하드보일드한 영화다. 도박장 강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레이 피오타가 연기한 마키가 갱단에게 떡이 되도록 맞는 신에서 1인칭과 3인칭을 오가는 시점숏을 통해 사실감 있는 구타 장면을 감상하게 만드는 등 생생한 폭력성을 체감할 수 있는 신이 더러 존재한다. 반면 고속촬영을 통해서 그 폭력성에 극단적으로 반할 정도로 우아하게 완성된 코건의 총격 암살 신은 아이러니할 정도로 우아하다. 흥미로운 건 이 폭력적인 장면의 대립적인 체감이 코건의 의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암살을 생각했을 뿐, 린치를 가하며 책임을 규명하길 원하지 않았던 마키의 구타 신이나 직접 암살을 시도할 의사가 없었던 최후반부의 살인 신의 사실적인 폭력성과 반대로 그가 스스로 계획하고 주도한 중반부의 총격 살인 신은 그야말로 ‘소프틀리’하게 묘사된다. 그가 킬러로서 추구하는 타이틀처럼 말이다. 영화 곳곳에서 들려지는 반어적인 BGM도 흥미롭다. 조니 캐쉬, 케니 레스터 등 평온한 감성이 깃든 고전 팝들이 극의 분위기와 대비될 때 발생하는 아이러니는 지독한 농담 같기도 하다.
브래드 피트의 레더 재킷과 대비될만한 수트 착장으로 일관된 리처드 젠킨스를 비롯해서 제임스 갠돌피니와 레이 피오타 등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은 물론 극 초반을 이끄는 스쿳 맥네어리와 벤 멘델슨 콤비 등 배우들의 열연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그 끝에 다다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는 브래드 피트와 리처드 젠킨스의 관계는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사회를 채운 화이트 칼라와 블루 칼라의 대비적 상징으로 읽히는데 결말부에 다다라 명확하게 정리되는 브래드 피트의 대사를 통해서 이 영화에 첨언된 정치적 코멘트들의 역할이 명징하게 와닿는다.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사가 울려 퍼지는 바에서 펼쳐지는 엔딩신은 인상적이다. “저 자식은 우리가 한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지. 하지만 난 미국에서 살고 있어. 미국에선 저마다 자기 앞가림을 해야 한다고. 미국은 국가가 아니라 그냥 비즈니스지. 그러니까 내 돈을 뱉어내!” 그러니까 이 영화는 미국 영화다. 미국을 까는 것도, 지지하는 것도 아닌, 미국이란 비즈니스 브랜드 그 자체에 관한.
브라이언 드 팔마가 <미션 임파서블>을 발표한 것이 1996년의 일이었다.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이하, <미션 임파서블 4>)은 15년 만에 발표된 네 번째 속편이다. <미션 임파서블>시리즈는 분명 이단 헌트의, 좀 더 정확하게 이를 연기하는 톰 크루즈의 존재감으로 굴러가는 영화다. 다만 이번 속편에서는 지난 세편의 전작들과 다른 조짐이 발견된다. 전과 달리 전편과의 서사적 연결성이 뚜렷하게 발견되는 이번 작품에서 가장 극명하게 눈에 띄는 건 이단 헌트의 원맨쇼에 가까운 활약상을 전시하던 전작들과 달리 이단 헌트를 위시한 IMF 팀원들의 조직력이 적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모스크바의 크렘린궁과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를 비롯해서 프라하와 뭄바이 등 세계 각지의 풍경을 미장센으로 삼은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은 그만큼 거대한 스케일을 지닌 블록버스터의 위용을 자랑한다. 반대로 서사 구조는 간결하다. 인류의 멸망을 야기시킴으로써 전세계적인 단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천재 과학자가 핵전쟁을 조장하려 하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단 헌트는 이를 막고자 동분서주한다. 선악이라는 양진영으로 대립하며 뚜렷한 자기 역할을 얻은 캐릭터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명확한 미션을 수행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안에서 각자 자기 진영의 역할을 코스프레한 배우들이 대단한 물량공세를 등에 업고 스턴트 액션을 전시해나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네 번째 속편은 시리즈 안에서 가장 위력적인 액션 시퀀스를 선보이는 작품이다. 극 초반부, 크렘린궁 폭파신으로 파괴적인 스펙터클을 전시하는 이번 작품은 부르즈 칼리파 스턴트신과 이를 잇는 모래폭풍 추격신, 그리고 엘리베이터식 주차장에서 벌어지는 격투신까지, 위력적인 볼거리들을 우월하게 디자인해낸다. 무엇보다도 만화적인 창의력으로 설계된 몇몇 시퀀스가 대단히 인상적인데, 이를 테면 이번 영화에서 가장 화제가 된 부르즈 칼리파 등반 스턴트신의 반중력적인 액션과 거대한 모래폭풍이 밀려오는 한가운데서 보이지 않는 적을 추격하는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그리고 엘리베이터식 주차장에서 뒤엉켜 구르며 펼치는 격투신은 단지 그 위력뿐만 아니라 그 전반적인 액션 시퀀스의 디자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인크레더블’한 인상이다. 이런 이미지의 설계는 ‘픽사’ 출신의 브래드 버드가 연출한 애니메이션 전작들을 연상시킨다. 특히 초반부에 등장하는 공중전화의 변신 광경을 비롯한 몇몇 소품에서 발견되는 위트는 전적으로 그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물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번 작품에서 가장 이질적인 건 바로 역대 시리즈 중 최고의 팀워크를 이룬다는 점이다. 여전히 톰 크루즈의 이단 헌트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전작들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 팀원들은 그의 소품처럼 자리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내는 조직원들의 탄탄하고 유기적인 팀워크를 통해서 미션을 해결해나가는 양상은 시리즈의 쇄신을 예감하게 만들 만큼 신선한 변화에 가깝다. 덕분에 개개인의 조직원 캐릭터들이 극 안에서 발생시키는 영향력 또한 증가했다. 이런 특성 덕분에 이번 작품은 전작들과 차별적인 감정을 얻어내기도 했는데 시종일관 진중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일관되던 전작들과 달리 극 중에서 심심찮게 유머가 발생한다는 것. 이는 사이몬 페그 덕분인데, 긴박한 순간에도 정색하듯 장난스러운 상황이 연출되는 광경 안에서는 대부분 그가 연기한 벤지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단 헌트 못지 않은 가능성을 드러내는 브란트(제레미 레네)와 함께 새로운 팀원으로 확실하게 자리잡은 제인(폴라 패튼)은 시리즈의 차기작을 예고하는 징후나 다름없다. 결국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은 시리즈의 새로운 전환점에 가깝다. 이단 헌트의 원맨쇼 대신 팀워크가 강조된 이번 시리즈는 눈길을 끄는 캐릭터들의 개성을 밑천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다만 여전히 톰 크루즈의 이단 헌트가 차지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그의 체력적 안배가 이 시리즈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한계도 여전하다. 그만큼 새로운 캐릭터들의 활약상을 전시하는 이번 작품이 앞으로 이 시리즈의 미래를 새롭게 제시하는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 물론 드 팔마의 냉소적인 첫 작품을 그리워하는 팬덤 앞에서 이번 작품은 여러 모로 이질적인 결과처럼 인식될 수 있겠지만 스펙터클한 스케일과 다이나믹한 디테일이 공존하는 이번 작품은 시리즈 안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기획으로 인정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은 전작에서 얻어낸 가능성을 보다 확실하게 구체화하는데 성공한 인상이다. 셜록 홈즈의 숙적으로 알려진 모리아티 교수가 등장하는 이번 속편은 전편에 비해서 그럴 듯한 긴장감이 조성된다. 가이 리치가 벌려 놓은 영화 속 세계관의 스케일에 비해서 홈즈가 상대하는 악의 위압감이 부족해 보였던 전작에 비하면 이번 작품에서 홈즈가 대적하는 모리아티는 보다 확장된 음모론적 세계관을 메우고도 남을 존재감을 드러낸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셜록 홈즈와 주드 로의 왓슨 듀오가 발생시키는 버디무비의 위트는 여전히 활력적이고, 가이 리치 특유의 스타일리시로 치장된 액션 시퀀스는 인상적인 순간을 포착해낸다. 이성적인 추리물의 세계관을 감각적인 액션 블록버스터로 변주한 이 시리즈는 보다 공고해진 세계관을 마련한 이번 속편을 통해서 본격적인 프랜차이즈로서의 진정한 출발 동력을 얻어냈다.
개인적으로 내추럴 본 킬러 스타일의 캐릭터들이 프로페셔널하게 자기 영역을 구축하고 보전하는 액션물을 좋아하는데, 이 영화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호감이 간다. 국제 정세에 관한 음모론적 실화가 바탕이 된 영화란 점에서 때때로 똥폼을 잡지만 순정마초 제이슨 스타뎀의 폭풍간지를 비롯해서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구심점을 잡는 가운데, 제 기능에 충실한 액션 신이 제대로 된 밑천을 마련한다. 취향을 탈 가능성은 있지만, 자신에게 꽂힐 기대감을 충족시킬만한 액션물로서의 자력을 갖춘 영화.
도시를 메운 빌딩숲으로 형성된 스카이 라인을 부감으로 비추던 카메라는 서서히 미끄러져 강을 건너고 그 위로 달리는 기차에 다가선다. 그리고 그 기차 속에서 잠에 들었던 듯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한 남자가 갑작스럽게 놀라며 깨어난다. 그 건너편에 앉아 있던 한 여자가 그의 일행인 듯 친근하게 말을 건넨다. 하지만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여자의 정체를 묻는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헬기를 조종하는 콜터 대위(제이크 질렌할)라고 신분을 밝힌 남자는 자신이 거기에 왜 있는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여인은 누구인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한다. 그러나 곧 끔찍한 찰나를 경험한 뒤, 또 한번 좀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끌려오듯 정신을 차린 남자는 반복되는 8분 간의 동일한 경험을 거듭 체험하며, 그리고 그것이 가상적 체험을 넘어서 실물적인 경험으로서 자신에게 반복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며 자신의 존재와 상황의 진실을 추적해 나간다.
<소스 코드>라는 제목은 원래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프로그래밍 정보가 저장된 파일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인간의 두뇌를 컴퓨터의 메인보드에 대비시킨 듯한 상상력을 통해 구상된 작품처럼 보인다. <소스 코드>는 인간의 두뇌 속에 보관된 8분 간의 기억적 정보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자면 백업된 8분 간의 기억 속으로 침투하여 그 기억에 담긴 정보를 탐색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셈이다. 여기서 8분은 보관될 수 있는 기억의 한계량이며 이를 재생하는 방식에 대해 영화는 고난도의 양자역학의 원리를 통해서라고 설명한다. 중요한 건 이런 논리가 어느 정도의 설득력으로 관객을 현혹시키느냐의 문제다. 어떤 식으로든 고난도 과학 원리를 빌려서 거짓말 같은 상황의 재현이 가능하고, 그것이 과학의 힘을 빌린 사실적인 상황임을 설득한다면 영화의 원리에서 발생하는 오류의 편차는 중요하지 않다. 죽은 이의 두뇌에 보관된 기억 속에 삽입되어 8분간 재현되는 그 과거 속에서 모든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관객이 믿게 만든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소스 코드>는 성공사례에 가깝다.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가상의 경계 속을 넘나드는 인물의 존재론에 관한 고찰과 리얼리티와 버추얼 사이를 오가는 인물의 선택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소스 코드>는 <인셉션>이나 <매트릭스>와 같은 작품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소스 코드>는 전자들처럼 시공간에 관한 특별한 발상을 설득력 있게 포장해낸다. 평행우주론에 입각한 시간여행 이론에 가까운 <소스 코드>의 시공간 개념은 인간의 의식 속에 잠재된 무의식의 양태를 하나의 의식적 세계로 확장해서 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론적인 확신이 불가능하나 흥미로운 결과인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의심되는 오류는 있다. 사실 타인이 경험했던 1인칭 시점의 과거로 잠입해서 그 기억을 토대로 둔 시점을 대신 시뮬레이션하고, 그 기억이 펼쳐진 모든 환경들을 롤플레잉으로 운용한다는 영화적 설정에는 분명 의심할 만한 오류가 잠재돼 있는 것이다. 경험자의 경험이 미치지 못한 시공간의 영역까지 대체자가 대신 경험할 수 있다는 설정이란 그렇다. 하지만 <소스 코드>는 이런 설정의 무리수에 대한 고민을 지워버릴 만한 매력적인 자질이 농후하다.
시간여행과 평행우주라는 초자연적 과학원리에 대한 이론적 체험은 재난과 로맨스, 미스터리라는 다양한 장르적 묘미와 확대된다. 반복되는 시공간의 이동 속에서 한 꺼풀씩 벗겨지는 미스터리의 묘미는 시공간의 한계를 되레 탁월한 스토리텔링의 무대로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소스 코드>의 시간여행 원리는 하드디스크에 파일을 복사하는 복제의 특성에 가깝지만 이를 자가적으로 진화시키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동시에 던칸 존스의 전작인 <더 문>과의 연관성도 발견된다. 자아를 잃어버린 복제 자아가 진짜 자아의 꿈을 대신 실현해내듯 복원이 불가능한 현실을 벗어나 가상의 리얼리티 속에서 삶을 회복시키는 인물의 태도, 이는 현실보다 나은 이상적인 가상을 추구한다는 리얼리즘의 역설을 겨냥하고 있다. 이는 마치 <인셉션>의 결론, 즉 팽이가 멈추었는가를 두고 벌어지는 분분한 의견에 대한 진보적인 의견처럼도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자질의 성과는 데이빗 보위의 아들이자 <더 문>을 통해서 발견된 던칸 존스는 ‘시공간의 새로운 지배자’로 거듭나며 재능을 확신시킨다. 또한 그가 <소스 코드>의 메가폰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제이크 질렌할은 매력적인 배우로서의 성장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또한 어느 영화보다도 매력적인 웃음을 선보이는 미셸 모나한과 특유의 연기력으로 극의 감정선을 고취시키는 베라 파미가도 탁월한 연기를 선보인다.
어느 기차 속에서 잠을 자듯 창에 기대어 있던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난다. 건너편 자리에 앉은 여자는 일행인 듯 친근하게 그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남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헬기를 조종하는 콜터 대위(제이크 질렌할)라고 신분을 밝힌 남자는 자신이 거기에 왜 있는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여인은 누구인지, 감을 잡지 못한다. 그러나 곧 끔찍한 찰나를 경험한 남자는 반복되는 8분 간의 동일한 경험을 거듭하며 자신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며 자신의 존재에 관한 진실을 추적해 나간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을 위한 프로그래밍 정보가 저장된 파일을 의미하는 <소스 코드>는 인간의 두뇌를 컴퓨터의 메인보드에 대비시킨 듯한 작품이다. <소스 코드>는 인간의 두뇌 속에 보관된, 다시 말하자면 백업된 8분 간의 기억 속으로 침투하여 그 기억에 담긴 정보를 탐색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여기서 8분은 보관될 수 있는 기억의 한계량이며 이를 재생하는 방식에 대해 영화는 고난도의 양자역학의 원리를 통해서라고 설명한다. 어쨌든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과학의 힘을 통해서 죽은 이의 두뇌에 보관된 기억 속에 삽입되어 8분간 재현되는 그 과거 속에서 모든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
<소스 코드>는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가상의 경계 속을 넘나드는 인물의 존재론에 관한 고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인셉션>이나 <매트릭스>와 같은 작품을 연상시킨다. 중요한 건 <소스 코드>가 전자들처럼 시공간에 관한 특별한 발상을 설득력 있게 포장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평행우주론에 입각한 시간여행 이론에 가까운 <소스 코드>의 시공간 개념은 인간의 의식 속에 잠재된 무의식의 양태를 하나의 의식적 세계로 확장해서 응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이론적이나 한편으로는 흥미롭다. 사실 타인이 경험했던 1인칭 시점의 과거로 잠입해서 그 기억을 토대로 둔 시점을 대신 시뮬레이션하고, 그 기억이 펼쳐진 모든 환경들을 롤플레잉으로 운용한다는 영화적 설정에는 분명 의심할 만한 오류가 잠재돼 있다. 이를테면 경험자의 경험이 미치지 못한 시공간의 영역까지 대체자가 대신 경험할 수 있다는 설정이 그렇다. 하지만 <소스 코드>는 이런 설정의 무리수에 대한 고민을 지워버릴 만한 매력적인 자질이 농후한 작품이다.
이런 영화적 설정은 시간여행과 평행우주라는 초자연적 과학원리에 대한 이론적 체험과 함께 재난과 로맨스, 미스터리라는 다양한 장르적 묘미를 전달한다. 반복되는 시공간의 이동 속에서 한 꺼풀씩 벗겨지는 미스터리의 묘미는 시공간의 한계를 되레 탁월한 스토리텔링의 재료로 구축되고 있다는 매력으로 승화됐다. <소스 코드>의 시간여행 원리는 하드디스크에 파일을 복사하는 복제의 특성에 가깝지만 이를 자가적으로 진화시키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연상시킨다. 동시에 던칸 존스의 전작인 <더 문>과의 연관성도 발견된다. 자아를 잃어버린 복제 자아가 진짜 자아의 꿈을 대신 실현해내듯 복원이 불가능한 현실을 벗어나 가상의 리얼리티 속에서 삶을 회복시키는 인물의 태도, 이는 현실보다 나은 이상적인 가상을 추구한다는 리얼리즘의 역설을 겨냥하고 있다. (이는 마치 <인셉션>의 팽이가 멈추었는가, 를 두고 벌어지는 분분한 의견에 대한 진보적인 결론처럼도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자질의 성과는 바로 ‘시공간의 새로운 지배자’, 던칸 존스라는 이름에 대한 확신일 것이다.
신의 세계 ‘아스가르드’를 통치하는 최고신 오딘(안소니 홉킨스)은 군대를 이끌고 난폭한 거인족의 수장 라우페이가 이끄는 ‘요툰하임’의 위협에 맞서 세계를 구한다. 오딘의 통치 아래 오랜 평화를 맞이한 신계는 오딘의 첫째 왕자 토르(크리스 헴스워드)에게 절대무적의 병기 ‘뮬니르’를 하사하는 왕위계승식이 있던 날, 갑작스러운 요툰하임의 침입으로 혼란에 빠진다. 왕위 계승식을 방해 받게 된 토르는 불 같은 성격을 다스리지 못하고 오딘의 명령과 주변의 만류를 어긴 채, 동생 로키(톰 히들스톤)와 동료 전사들을 규합해서 요툰하임을 공격한다. 결국 이에 격분한 오딘은 토르로부터 뮬니르와 힘을 빼앗은 뒤, ‘미스가르드’ 즉 지구로 추방한다.
그리스 신화만큼이나 인간과 닮은 호전적인 신들이 등장하는 북유럽 바이킹 신화에 기초한 슈퍼히어로물 <토르>는 <스파이더맨>이나 <아이언맨>, 그리고 (차후에 <퍼스트 어벤저>라는 제목의 영화로 공개될) <캡틴 아메리카> 등과 함께 마블 코믹스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시리즈로 꼽히는 작품이다. 번개를 다스리는 북유럽 신화의 수장 토르는 그리스 신화에 빗대자면 제우스 격에 가까운 최고신이다. 동시에 마블코믹스의 라이벌격인 DC코믹스의 히어로 캐릭터 중,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닌 슈퍼맨에 대적할 수 있는 마블의 히어로이기도 하다. 사실 코믹스물에서 묘사되는 토르는 본래 호전적인 신화의 양태와 달리 기독교적인 희생으로 인류에게 헌신하는 면모를 드러내기도 하는데 영화 역시 이런 측면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토르는 이국의 오랜 신화의 외형을 빌려서 자기 입맛에 맞게 각색한 사생아 같은 캐릭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화와 원작을 떠나서 <토르> 자체에 집중해 보자면, 이 영화는 토르라는 캐릭터가 겪는 질풍노도의 성장드라마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벤저스>의 전초전 성격에 가까운) <토르>는 토르의 본격적인 활약상을 선보이기 전에 캐릭터의 정체성을 소개하는, 일종의 캐릭터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상 마블 엔터테인먼트가 마블 슈퍼히어로 올림픽이라 해도 좋을 <어벤저스>로 가는 수순으로서 자신들의 모든 캐릭터들을 하나씩 스크린에 소비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토르> 역시 이 캐릭터에 대한 심오한 치장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어벤저스>에 기대를 걸고 있는 매니아들과 캐릭터의 기원조차 알지 못하는 일반적인 관객들 사이에서 감상의 편차가 발견될 수 있는 건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토르>는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라는 엔터테인먼트적 기본기를 갖춘 작품이다. 신계와 인간계, 즉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를 오가는 카메라는 CG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신계의 풍경과 북유럽 신화를 고스란히 차용한 특별한 아이템들을 전시하며 자신만의 볼거리를 과시한다. 또한 신과 인간의 만남, 초자연과 과학의 만남이라는 대비적 특성을 발견하게 만드는 토르와 제인(나탈리 포트만)의 인연을 통해 멜로적인 드라마를 구축하고 이런 감정선을 토대로 성장드라마의 노선을 밟아나간다. 또한 전시 수준에 가까운 선악의 극명한 대비도 오락적 취향의 갈등을 삽입한 의도로 보이며 이 역시도 깊은 수준의 감정을 잉태할만한 자질은 엿보이지 않지만 이 영화가 취하는 태도, 즉 거대한 계획을 염두에 둔 소품적인 태도를 염두에 둔다면 이런 얄팍함이 용인되지 못할 것은 아닌 셈이다. 다만 CG로 완성한 가상적인 이미지의 전시력에 비해서 액션 시퀀스의 파괴력이 미흡해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영화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자질을 충분히 설명해내는 수준을 유지해낸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가장 잘 해석해내는 감독으로 꼽히는 케네스 브레너의 재능이 보다 탁월하게 반영될만한 슈퍼히어로물로 거듭나지 못했다는 건 일면 아쉬운 지점이다.
어쨌든 마블 코믹스가 잉태한 슈퍼히어로 올스타전이라 불려도 좋을 <어벤져스>의 영화화를 계획한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전초전이 하나씩 현실화되고 있는 지금은 바야흐로 슈퍼히어로 무비의 새로운 전환점이 열리는 시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토르: 천둥의 신>(이하, <토르>)은 <아이언맨> 시리즈를 통해 구체화된 마블의 슈퍼히어로 대통합전을 위한 또 한번의 전초전이다. <어벤저스>로 가는 또 하나의 징검다리와도 같은 이 작품이 토르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한다 하여 섭섭하다면 2년여 간의 유예 기간을 기다릴 것. <어벤저스>의 문을 여는 캐릭터가 토르임을 염두에 둔다면 진짜 활약상을 볼 기회는 여전히 유효하다. <토르>는 진정한 토르를 보기 위해 건너야 하는 무지개 다리, 즉 아스가르드의 ‘비프로스트’라는 말이다. (그래도 스크린에서 구출해오고 싶을 정도로 존재감이 미비한 아사노 타다노부가 안쓰러운 건 어쩔 수 없다.)
반짝이는 설원의 적막하고 고요한 풍경을 밟고 선 순록 한 마리, 그리고 이를 응시하는 소녀. 평온한 이 풍경은 소녀의 손 끝에서 퉁겨져 나간 화살 한 촉과 피를 흘리며 달아나는 순록과 이를 따라 질주하는 소녀를 통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나>라는 제목은 바로 그 미스터리한 소녀 한나(시얼샤 로넌)를 위한, 그리고 한나에 의한, 한나에 대한 영화다. 어떠한 지정학적 정보가 등장하지 않는 설원의 한 곳에서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단절되듯 성장한 소녀 한나는 그녀를 인간병기로 길러내는 전투교관이자 매일 같이 책을 읽어주는 헬러(에릭 바나)를 아버지라 부르며 자라났다. 어떤 실체도 드러나지 않는, 동시에 무언가 불확실한 사연이 감지되는, 그 부녀의 사정은 세상에 나아갈 준비가 됐다는 한나의 확신과 짐작이 쉽지 않은 헬러의 결심을 통해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한나>는 <오만과 편견> <어톤먼트> <솔로이스트>까지 창백한 광량을 능숙하게 활용하며 감수성 짙은 드라마를 만들어오던 조 라이트의 액션 스릴러라는 점에서 이례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그의 장점은 이 작품에서도 예외 없이 드러난다. 설원과 사막을 건너 도시 속으로 들어선 한나의 여정은 조 라이트가 수집한 풍요로운 광량을 머금고 빛을 발한다. 또한 전작들에서 엿보인 사운드 감각도 <한나>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케미컬 브라더스가 매만진 강렬한 비트와 노이즈로 무장한 <한나>의 일렉트로닉 사운드는 조 라이트의 비주얼 감각과 융화를 이루며 영화에 공감각적인 시너지를 형성한다.
<본>시리즈의 소녀 판본이라도 해도 좋을 <한나>는 복수극의 형태로서 비정한 스릴러의 문체를 뽐내는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소녀의 감수성이 깊게 배인 성장드라마이면서도 곳곳에 매복된 액션 시퀀스를 통해 역동적인 동선을 확보하기도 한다. 액션영화로서 <한나>는 액션 시퀀스의 물리적 중량감이 대단한 영화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본>시리즈와 같이 현장감 있는 액션 시퀀스들을 지니고 있지만 속도감이나 현실감도 상대적으로 새롭다고 평할만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정적이면서도 건조한 정서적 분위기와 영상의 질감 속에서 연출되는 영화의 몇몇 액션 시퀀스는 분명 인상적이다. 특히 초중반부에 등장하는 한나의 탈출 시퀀스에서 보여지는 사운드와 비주얼의 조화는 역동적인 공감각의 리듬을 지니고 있으며 롱테이크 기법으로 촬영된 헬러의 도주 신 역시 대단히 완성적인 리얼리티와 극적인 연출감을 공유하고 있다. 디테일한 액션의 포착은 실패했으나 시퀀스를 두르고 있는 전체적인 요소들의 조화가 흥미롭다.
결과적으로 <한나>에서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바로 캐릭터들의 개성 자체에 있다. 롤타이틀 한나를 비롯해서 그녀의 조력자 헬러와 그 반대편에 선 마리사(케이트 블란쳇)까지, 이 세 명의 캐릭터가 이루는 갈등 구도는 영화가 마련한 내러티브의 말판에 역동적인 에너지를 불어넣는 훌륭한 말의 임무를 수행해낸다. 특히 영화의 근간이나 다름 없는 한나 역의 시얼샤 로넌은 이 영화가 이룬 최고의 성취이자 발견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조 라이트의 <어톤먼트>를 통해서 존재감을 드러낸 바 있으며 근작인 <웨이 백>에서 뚜렷한 육체적 성장을 보여준 시얼샤 로넌은 <한나>를 통해 배우로서 확고한 아이덴티티를 대중에게 어필하고 있으며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기대감을 넘어선 확신까지 부여할 정도로 ‘미친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를 우직하게 떠받드는 에릭 바나와 악랄한 카리스마로 어린 주연의 존재감을 드높이는 케이트 블란쳇의 서포트도 훌륭하다. 재능 있는 신예와 이를 돋보이게 비추는 기성배우들의 관록이 이루는 조합이 근사하다.
액션과 스릴러라는 장르적 문법 안에서 자신만의 존재감을 과시한다고 말하기엔 머뭇거려지지만 <한나>는 분명 인상적인 작품이다. 갇혀 있던 존재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확고한 정체성을 차지하기까지의 과정은 이색적인 성장드라마로서의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사운드와 비주얼을 어루만지고 조합하는 조 라이트의 감각도 한층 더 빛을 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나>는 겉으로 드러난 장르적 외피의 강도보다도 그 내면을 감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부르는 흥미가 보다 탁월한, 주목할만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무엇보다도 좋은 기대감을 부르는 배우의 발견이란 점에서 보다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