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은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다. 그래서 누구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간다. 하지만 요즘 극장은 영화만
상영하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은 영화 이상의 체험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영화를 한편 보기로 했다. 극장부터 골랐다. 코엑스 메가박스에 새로 단장한 프리미엄 상영관 ‘부티크 M’을 찾기로 했다. 스마트폰으로 예매사이트에 접속해서 영화를 고르고, 두 좌석을 선택한 후 결제를 했다. 5만원이 결제됐다. 그러니까 영화 티켓 두 장의 가격이 무려 5만원이다. 티켓을 금으로 만들었나? 종이였다.
상영관 이름이 스위트룸이라고 했다. 흔한 극장 상영관처럼
1관이라고 부르는 대신 101호라고 했다. 상영관이
아니라 호텔룸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호텔식 서비스를 지향했다.
넓고 편안한 리클라이너 체어에서 다리를 쭉 뻗고 거의 눕다시피 앉아서 영화를 볼 수 있다. 게다가
에비앙 생수를 웰컴 드링크로 제공한다. 입구에서 무릎담요를 나눠주고 자리엔 슬리퍼도 놓여있다. 룸서비스도 가능하다. 영화 시작 전에 좌석 측면에 있는 벨을 누르면
직원이 와서 주문을 받는다. 팝콘이나 나초 대신 피자를 주문했다. 화덕에서
구운 조각피자로 유명한 ‘피자리움’이 입점해있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와인도 판다. 그뿐만이 아니다. 홍대 부근의 유명한 커피 전문점인 앤트러사이트를 비롯해 타발론 티, 오설록
아이스크림도 상시 판매한다. 어쨌든 2시간 30분에 달하는 영화를 보면서 리클라이너 체어의 안락함을 실감했지만 동시에 영화가 재미없다면 숙면을 취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도 나는 흥미로운 영화를 보고 있었고,
잠들 일은 없었다.
부티크 M과 같은 상영관이 낯설게 느껴진 것은 아니다. 이미 유사한 형태의 프리미엄 상영관은 존재해 있었으니까. CGV 골드클래스가
대표적인 모델이다. CGV에선 일찍이 식사와 영화관람을 연동해서 즐길 수 있는 ‘시네 드 셰프’와 같은 시스템을 운영하기도 했다. 롯데시네마 역시 샤롯데라는 프리미엄 상영관을 운영하고 있다. 메가박스
부티크 M은 후발주자다. 이미 존재하는 프리미엄 상영관 시장에
뛰어든 건 지금의 시장에서 유효한 기획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메가박스에선 지난해부터
다양한 형태의 상영관을 기획해왔다. 과거의 자동차 극장을 연상시키는 드라이브 M과 건물의 옥상에 설치된 텐트와 캠핑 의자에 앉아 야외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글램핑 상영관인 오픈 M이 눈에 띈다. 둘 다 영화 관람 외적인 경험을 서비스한다는 공통점이
눈에 띈다. 특히 가족 단위 관객들을 위한 배려가 눈에 띄는데 어린 유아가 있는 부부가 쉽게 극장을
찾지 못하는 환경을 생각하면 상당히 유용한 서비스처럼 보인다. 바비큐나 와인, 맥주와 함께 영화를 즐길 수도 있다. 전통적인 영화관의 관습에서
벗어나 영화 관람과 동반할 수 있는 체험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는
21세기에서 영화를 본다는 행위의 의미가 조금 달라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입맛을 돋우는
음악처럼, 영화 또한 감각적 소품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의미다.
CGV에선 멀티플렉스 대신 컬처플렉스란 언어를 동원하며 새로운 방향성을
정립했다. 컬쳐플렉스는 영화뿐만 아니라 외식이나 쇼핑, 문화체험
등 영화 외적인 다양한 경험과 연계된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는 공간성의 연계나 확장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CGV청담시네시티엔 다양한 식당과 커피 전문점,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이
층층마다 자리해있다. 기존의 골드클래스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더
프라이빗 시네마’와 오페라 극장의 박스석 형태로 제작된 커플석만으로 상영관 좌석을 채운 ‘스윗박스 프리미엄’과 같은 상영관은 영화 관람에서 서비스의 형태가
중요한 기준이 되는 관객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대변한다. 롯데시네마 역시 새롭게 문을 연 롯데월드몰의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에 ‘시네
파크’라는 광장 형태의 공간을 마련했는데 이는 영화 이외의 문화적 체험을 전달하려는 다른 극장들의 정책과
유사하다. 그러니까 결국 이런 체험적 다양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흐름은 극장산업의 화두인 셈이다.
물론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볼 것인가라는 선택권이 넓어졌고, 관객들은 기꺼이 고민하고 선택하며 기다린다. 이를 테면 최근에 화제가 된 <인터스텔라>의 아이맥스 열풍이 그렇다. <인터스텔라>나 <그래비티>를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보길 고집하는 배경엔 ‘좀 더 큰 화면에서 보고 싶어서’라는 단순한 욕망을 넘어서 ‘두 영화를 관람하는 최적의 관람 방식이
아이맥스 상영관이기 때문’이라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에 따른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는 영화가 주는 감각적 체험을 최대한 극대화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영화관람이란 행위를 엔터테인먼트적인 체험으로서
보다 확실하게 소비하길 원하는 이들이 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D 상영 방식의 일반화 또한 궤를 같이
하는 사례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의 전세계적인 흥행 이후로 디지털 상영관이 확대되고 3D 상영이
영화 상영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정착해 버린 건 어떤 체험을 계기로 관객들의 감각적 경험이 확장되고 정착된 덕분이다. 그리고 이런 체험 감각에 대한 수요는 새로운 체험적 방향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체험의 확장을 통해 훈련된 감각을 고스란히 체감하길 바라는 관객의 정착이 극장 상영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입체적인 사운드로 청각적 체험을 극대화시킨 돌비 애트모스 음향 시스템도 장착된 상영관을 선호하는 관객이 늘어나고, 개인 좌석마다 설치된 헤드셋을 통해서 영화 사운드를 홀로 독점하는 상영관이 출현한 것도 새로운 감각적 체험을
통한 학습효과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음향에 따라서 좌석의 진동을 체감하도록 하는 비트박스관과 오감을
자극하는 4D 상영관의 공감각적 체험 또한 다르지 않다. 특히
4D는 기존의 영화관람 형태를 롤러코스터적인 감각적 엔터테인먼트로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가장 극단적인
방식의 영화적 체험이라 할 수 있다. 관객들은 시각적 체험을 넘어서 다양한 감각적 체험이 가능하다는
학습효과를 얻었고, 그런 시장의 수요를 파악한 극장은 진화하고 있다.
21세기의 극장들은 영화의 관람방식을 다양하게 세분화하고, 영화 관람 외적인 서비스의 확장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통적으로
극장은 쉽게 찾을 수 있는 문화적 공간으로서 역할을 견인해왔다. 동일한 티켓 가격으로 각기 제작비가
다른 영화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문화적 경험을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콘텐츠이기도 했다. 그만큼
극장 산업이란 대중의 기호에 민감한 공간이기도 하다. 지금 극장문화의 변화란 결국 대중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다. 과거와 달리 이제 영화는 손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됐다. 또한 IPTV를 통해서 한동안 부재했던 영화의 2차 판권 그러니까 홈 씨어터 시장이 순식간에 정착됐다. 영화란 언제든
쉽게 볼 수 있는 무언가가 됐다. 그만큼 극장이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해야 하는 건 필연적이다. 커다란 스크린만으로 극장의 경쟁력을 논한다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관객들은
이제 보다 다양한 경험을 원한다. 영화 그 이상의 영화관을.
디즈니 특유의 동화적인 낭만을 품은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은 사랑스럽다는 단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시킨다.
<겨울왕국>은 동화적인 세계관을 빌려서 특유의 낭만적인 해피엔딩을 구축하는데 능한 디즈니의 장기가 여실히 반영된 애니메이션입니다.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모티프로 둔 작품이죠. 하지만 원작과 기본적인 설정 자체가 다르며 이야기 양상도 완전히 판이한 작품입니다. 일종의 ‘참고작’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겨울왕국>에선 사악한 ‘눈의 여왕’이 등장하지도 않고, 남매에 가까운 소년과 소녀 대신 자매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어둡고 우울한 원작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죠. 디즈니 특유의 낙관적인 낭만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입니다.
사실 선악의 구별이 뚜렷하고 결말에 대한 예감이 명확하다는 점에서 이야기적인 흥미가 뛰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습니다. 하지만 캐릭터의 개성이 뚜렷하고 스크린을 채우는 이미지의 완성도가 그런 결점을 보완해주고 있죠. 특히 살아있는 눈사람 캐릭터인 올라프의 등장은 <겨울왕국>이란 작품을 보다 훌륭하게 이끌어내는
. 개인적으론 최근작 중에선 <겨울왕국>보다 <라푼젤>이 보다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라푼젤>보다 <겨울왕국>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훌륭한 뮤지컬 넘버를 만들어내는데 일가견이 있었던 디즈니의 저력을 보여주는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말이죠. <겨울왕국>의 OST는 역대 디즈니 클래식의 사운드트랙 가운데서도 손에 꼽을 만한 수작으로 회자될 겁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키드>에서 초록 마녀 역을 맡은 이디나 멘젤의 킬링 넘버 ‘ Let It Go’는 이 작품이 지닌 최고의 자산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이 들 정도이지요.
무엇보다도 <겨울왕국>에서 흥미로웠던 건 디즈니가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공주와 개구리>(2009)부터 <라푼젤>(2011) 그리고 <겨울왕국>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성공적인 결과물을 연이어 내놓고 있는 지난 몇 년간의 디즈니는 낙천적인 해피엔딩의 강박을 넘어서 ‘지금’이라는 시제에 어울리는 감각과 철학을 반영한 작품들을 거듭 발표하고 있죠. 어쩌면 디즈니가 인수한 픽사의 브레인이었던 존 래세터를 디즈니의 총괄 책임자로 임명한 것이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동력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겨울왕국>은 익히 예상되는 왕자와 공주의 러브스토리로 극을 밀고 가지 않습니다. 특히 눈에 빤히 보인다고 믿었던 결말을 아주 살짝 비틀면서 대단히 참신한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죠. 디즈니 특유의 낭만적인 정서를 배반하지도 않고요. 자신의 세계를 참신하게 보존해냅니다. 그래서 <겨울왕국>의 결말은 정말 좋은 작법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공주와 개구리> 이후로 디즈니에선 대단히 운명에 함몰되지 않는 진취적인 여성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 역시 흥미롭습니다. 21세기의 디즈니가 찾은 마법의 비결은 여성이 아닐까 싶어요. 공주가 아니라 말이죠.
저는 지금까지도 초등학교 시절에 극장에서 <라이온 킹>을 봤던 기억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제 손을 잡고 직접 극장에 데려가셨죠. 아마도 어린 아들에게 보여줄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셨나 보죠. 그래서 만약 지금 저에게 어린 아들이나 딸이 있었다면 그 아이들의 손을 잡고 <겨울왕국>을 보러 갔을 겁니다. 좋은 작품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지만 분명 좋은 추억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면 착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니까요. <겨울왕국>만큼 사랑스러운 결정을 지닌 작품을 아이들과 함께 볼 기회도 드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래비티>를 보고 난 사람들은 마치 우주에 다녀온 것 같았다. 우주를 그린 영화는 많았지만 <그래비티> 같은 우주 영화는 없었다. 하지만 당신이 다녀온 그 우주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지난 10월 17일 <그래비티>가 개봉된 이후로 지금까지 세상은 <그래비티>를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는 것 같다. 혹은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그래비티>를 본 사람과 그럴 수 없었던 사람으로. <그래비티>의 감독 알폰소 쿠아론이 입체적인 사운드 시스템을 갖춘 돌비 아트모스(Dolby Atmos) 상영관에서 <그래비티>를 관람하길 적극 추천한 덕분에 서울에 단 두 개밖에 없다는, 돌비 아트모스 시스템이 완비된 상영관의 예매율이 천정부지로 치솟기도 했다. 영화를 즐기는데 있어서 보다 나은 영사 방식이나 사운드 시스템을 찾아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래비티>의 경우엔 그와 유사하나 다른 욕망이 읽힌다. <그래비티>를 정의할 때 한결 같이 동원하는 단어는 ‘체험’이다. 그러니까 아이맥스 상영관이나 돌비 아트모스 상영관이 <그래비티>를 좀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선택적 방법이 아니라 <그래비티>를 ‘제대로 볼 수 있는’ 필수적인 방법, 즉 최적화된 시스템이라고 인정한다는 것. 사실 모든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체험의 산물이다. 여기서 체험은 두 종류로 나뉜다. 현실에서 결코 할 수 없는 비현실에 대한 체험과 현실에서 경험할 기회를 얻지 못한 현실적인 행위나 감정에 관한 체험. 그렇다면 우리는 <그래비티>를 통해서 무엇을 체험했을까?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비티>를 대단히 사실적인 영화로 인식하는 것 같다. 실제로 알폰소 쿠아론은 <그래비티>를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하이퍼 리얼리즘의 영화를 추구했다는 것. <그래비티>는 프리프로덕션(Pre-production) 단계에서 100% 프리비즈(Pre-visualization)’을 거쳤다. 프리비즈란 전반적인 영화의 비주얼을 계획하고 그 실현 방법을 디테일하게 구성하는 방식인데 비주얼 전반의 연출 계획을 세세하게 설계하는 사전 작업에 가깝다. 일종의 도면 작업인 셈. 하지만 ‘당장 애니메이션으로 발표해도 상관없을’ 결과물을 원했던 알폰소 쿠아론의 요구에 의해서 <그래비티>의 프리비즈는 집을 짓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프리비즈 단계에서 100%에 가까운 CG 작업으로 완벽한 비주얼을 구축한 것. 그리고 배우들은 집에 들어가듯, 완벽하게 구축된 이미지 안에서 철저하게 동선이 통제된 채 연기했다. 그렇게 연기한 배우들의 이미지를 화룡점정처럼 찍어 넣는 방식으로서 <그래비티>는 완성됐다. <그래비티>의 주인공이 우주라고 일컫는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알폰소 쿠아론의 구상에서 <그래비티>의 우주는 관객들에게 그저 밤하늘을 바라보듯 멀게 느껴져선 안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자신이 놓여 있다고 느껴지는 공간이어야 했다. 실제로 산드라 블록은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매일 같이 10시간 정도의 시간을 수많은 LED 패널로 둘러싸인 ‘라이트 박스(Light Box)’라는 특수한 세트에서 갇히듯 연기해야 했는데 이를 두고 제작진은 라이트 박스가 마치 산드라 블록의 새장 같다며 ‘샌디의 새장(Sandi’s cag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주에서 고립된, 그리고 끝내 홀로 남겨진 스톤 박사의 외로움은 실제 배우의 감정이 이입된 결과인 셈이다. 그리고 라이트 박스 안에서 세트의 벽에 지구나 국제우주정거장(ISS) 등 배우가 바라보는 시야에 해당되는 우주의 이미지를 투사함으로서 배우에게 우주라는 공간성을 인식시키고자 했다. 배우의 시점을 관객과 동일하게 만들었다. 이는 곧 배우들의 시점을 관객의 시야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이나 다름없다. <그래비티>는 이런 인물이 바라보는 시점을 대변하는 시점숏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객석의 중력을 무력화시킨다. 스크린 밖이 아니라 안에서, 영화에 동참하고 있다는 착시와 착각을 부추긴다. 게다가 진동과 저주파음 그리고 기습적인 묵음 효과를 교차시킨 사운드 전략을 통해서 공기가 없어서 음파의 전달이 불가능한 우주에서의 청각적 체험을 극대화시킨다. 시각과 청각이라는 공감각적인 체험은 <그래비티>를 지극히 현실적인 영화로 둔갑시켰다.
하지만 <그래비티>는 몇 가지 사실을 왜곡시킨 영화다. 일단 영화 속에서 조지 클루니가 연기한 코왈스키는 우주에서 우주배낭 추진체(MMU)를 타고 자유 자재로 유영한다. 그는 그 추진체를 타고 우주미아가 될뻔한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를 구출하며 국제우주정거장까지 그녀를 끌고 간다. 이는 모두 허구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KARI)의 김해동 박사에 따르면, 나사(NASA)의 우주인들이 착용하는 우주복엔 모두 추진장치가 달려있다. 다만 잠깐 동안의 이동이 가능한 소량의 연료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만한 장거리 유영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견해다. 물론 코왈스키가 타고 다니는 배낭식 추진장치가 영화를 위한 설정이었다면 이야긴 달라진다. 하지만 허블망원경 주변부에서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 그리고 중국 우주정거장 텐궁까지 다다르는 여정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추진장치나 소유즈만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엔 세 지점의 자전 궤도가 지나치게 멀고 궤도의 접점에서 마주칠 확률도 희박하다. 이 영화의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중요한 설정들이 모두 허구인 것이다.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영화적 오류들에 대한 예시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비티>는 나사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영화다. 실제로 촬영 현장엔 나사와 연결되는 직통전화가 있었고, 산드라 블록은 촬영 중 의문이 생기면 시간을 가리지 않고 수화기를 들었다. 결국 세계 최고의 우주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은 우주 영화가 사실(fact)대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건 그 비사실적인 결과물이 고의라는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그래비티>의 거짓말을 통해서 놀라운 사실(reality)적인 체험을 할 수 있게 됐다. 결국 영화의 사실성에 대한 전제 조건은 현실의 복제가 아니란 말이다. <그래비티>라는 영화적 체험이 위대한 건 이 영화가 주는 체험적인 쾌감이 숭고한 감동으로의 착지를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테크놀로지의 생존 방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 우선시돼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이 영화가 하고 있다고 본다.” 김지운 감독의 말처럼 진화한 테크놀로지의 과시도 중요하지만 테크놀로지의 진화가 어떤 영화적인 감동을 더해줄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더욱 중요하다. <그래비티>는 ‘놀라운 거짓말’로 ‘믿을 수 없는 감동’을 전한다. 무중력의 우주를 체험하게 만들지만 결국 두 발 딛고 살아야 하는 현실의 의지를 고취시킨다. 용기를 준다. 결국 <그래비티>가 증명하는 건 기술의 진보가 영화의 발전을 촉매할 순 있지만 영화의 발전의 절대적 조건일 수 없다는 교훈이다. 한편 미국의 라이브쇼 <SNL>에서 <그래비티>의 오류 하나를 지적했는데 내용인즉슨, 조지 클루니가 저렇게 오랜 시간 동안 동년배의 여성과 대화를 나눌 리 없다는 것. 이야말로 정말 날카로운 지적 아닌가?
1. 왕십리 아이맥스 3D로 <그래비티>를 봤다. 우주에 다녀온 기분. 우주 혹은 무중력 그 자체가 이길 수 없는 괴물 같다.
2.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광활한 시점숏과 적막함이 아이맥스 스크린을 가득 메우며 시작되는 오프닝 시퀀스는 경이로운 무중력 세계의 신비를 순식간에 공포로 둔갑시켜버리는데 정말 숨이 막히고 어지러운 기분을 체험했다. 그 이후로 그 우주에 함께 떠 있는 듯한 기분.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대단한 서스펜스와 스릴을 부여하는데 이리와, 이런 건 처음이지, 라고 손짓하는 느낌이랄까.
3. <더 문>이 잠깐씩 생각나긴 했다. 모노드라마에 가까운, 광활한 우주에서의 고립감. 하지만 <그래비티>는 우주라는 공간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생생하게 이입시킨다. 덕분에 우주에 가보고 싶다는 기분이 짜게 식는 기분도. 결국 집 나가면 고생이다. 블록버스터급 '홈 스위트 홈' 교훈극이랄까.
4. <피라냐>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게 무슨 쌩뚱맞은 소리냐 싶겠지만 보면 안다.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미친듯이 달려들어서 온갖 것들을 해체하는데 딱 그런 공포심이 느껴진다.
5. 이만큼이나 광활한 시점숏은 본적이 없다. 이 영화는 직접적인 배우들의 시점숏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지만 그 배우들을 향한 카메라의 시선마저도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지극히 '생물 같은' 시점숏이 활용된다. 실제로 가끔씩 배우들이 카메라를 고의적으로 의식하는 인상을 주는 컷도 등장한다. 어쨌든 덕분에 우주라는 광활한 공간에 '갇혀 있다'는 긴장감이 배가되는 느낌. 실제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거대한 우주를 표류한다는 건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공간에 갇히는 것이라고 느낄 수 밖에 없는데 것인데 지금까지 경험하고 보고 들었던 그 어떤 공포스러움보다도 공포스러운 기분을 체험한 기분.
6.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통해서만 가능한 영화들은 때가 되면 더러 등장하는데 그 발전을 영화적 표현력의 진화로 승화시키는 영화들은 아주 가끔 등장한다. <그래비티>가 그런 영화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그래비티>의 전후로 나뉠 것이다. 기술적으로도 표현적으로도 훗날 <그래비티>를 연상시킨다라고 할만한 영화들이 나올 것이다. 물론 아이맥스 상영 방식이 아닌 일반 상영관에서도 이런 관점이 유효할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오히려 일반 상영관에서 <그래비티>를 한번 체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7. <그래비티>를 통해서 경이로운 기술적 체험을 우선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말 지극히 영화적이라 더욱 놀라운 작품. 우주라는 거대한 괴물로부터의 탈출극이 장르적인 카타르시스를 책임지는 가운데서도 전형적인 휴머니즘과 멜로적인 감수성의 결정을 선사하며 영화적인 중력을 선사한다. 기술적 체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진보를 영화적 표현력의 진화로 끌어올린다.
8. 사운드 전략이 대단하다. 도입부에서 설명하듯 음파를 전달할 공기가 없는 우주의 특수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적막함과 웅장함의 극단적인 음의 이동과 전개가 서스펜스를 촉진시키고 극대화시킨다.
9. <프로포즈>(2009)로 재기에 성공하며 그 해에 <블라인드 사이드>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했을 때, 정말 산드라 블록이 좋아졌는데 <그래비티>를 보면서 아, 정말 좋은 배우로 자리잡았구나 생각했다. <그래비티>의 조지 클루니를 보면서 <밀양>의 송강호가 생각났다. 산드라 블록을 지지하는 조연이자 영화적 장치로서의 임무에 완벽하게 복무한다. 실제 등장 배우가 온전히 둘에 불과한 이 영화에서 조지 클루니는 생각보다 일찍 퇴장함에도 불구하고 천연덕스럽게 복선을 세우고, 광활한 우주를 메울만한 감정선의 스케일을 넓히고, 방점까지 찍어낸다. 정말 훌륭한 배우다. 멋있다.
10.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3번 정도는 더 보고 싶다. 아니, 목격하고 싶은 것일지도. 지금이어야만 가능한 일은 해도 해도 아깝지 않다.는 기분이 짜게 식는 기분도. 결국 집 나가면 고생이다. 블록버스터급 '홈 스위트 홈' 교훈극이랄까.
그러니까 1997년이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이 전세계 최고 흥행영화 순위의 첨탑에 오른 것이 말이다. 그런 <타이타닉>을 비로소 정상에서 끌어내린 건 <아바타>(2009)였다. 또 한번 제임스 카메론이었다. 하지만 그 흥행 이전부터 <아바타>는 도마 위에 있었다. 제임스 카메론의 복귀작,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소요된 3D영화 등, 기대와 의심을 가로질러 모든 언어가 <아바타> 앞에 정렬하듯 모여드는 것마냥 그랬다. 어쨌든 뚜껑이 열렸다.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은 거대한 가상의 세계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그건 완벽하게 3D영화라는 세계관에 복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맞춤형 세계였다. 광대한 대자연의 장관이 그 자체로 스케일 있는 원근감을 마련하고, 실사와 CG애니메이션 기법이 혼재된 캐릭터 전환으로 CG애니메이션에서 보다 탁월하게 구현되는 3D영상의 장점을 끌어올린다. 특히 LED에 가까운 높은 조도로 밝혀진 판도라의 야경은 장관의 레이져쇼다. <아바타>는 3D영화를 위해 마련한 총아였다.
<아바타>의 성공 이후, 불과 2년여 만에 상영관의 풍경뿐만 아니라 영상 산업의 패러다임이 변했다. 3D안경을 끼고 눈의 수평을 조절하며 스크린을 응시하는 것이 어느 새 영화를 보는 하나의 방식이 됐다. 영상 디스플레이 시장에서는 3D제품 출시가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다. <아바타>의 엄청난 성공은 3D라는 플랫폼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던 영화계뿐만 아니라 영상 디스플레이 업계를 위한 복음이 됐다. 21세기 대부분을 3D영화 제작에 매진해온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이런 급진적인 변화에 충격을 받고 알코올 중독자가 돼서 할리우드 길바닥을 뒹굴고 있다더라 한들 이상하지 않을 만한 혁신이었다.
<아바타>에 이은 드림웍스의 야심작 <드래곤 길들이기>(2010)가 큰 호평을 받을 때만 해도 3D영화는 기꺼이 지갑을 열만한 물건처럼 여겨졌다. 문제는 그 이후다. 그 성공에 고무되어 생산된 3D영화들이 대부분 그러한 기대감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3D영화는 두 눈을 지닌 사람처럼 두 개의 렌즈를 지닌 특수 카메라를 이용해서 촬영된다. 고가의 특수 장비와 정교한 촬영술이 요구되는 만큼 많은 시간과 대자본이 요구된다. 이런 수고와 투자를 덜고자 일반적인 카메라로 촬영한 뒤, 기계적인 방식으로 상을 분리시킨 3D 컨버팅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반상영관보다 비싼 티켓값을 치르고 안경까지 끼는 수고를 감안하면서 시각적 피로도를 견뎌냈음에도 ‘무늬만 3D영화’들은 배신감만 안겨줬다. 특히 2011년, <그린 호넷> <걸리버 여행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 등 3D영화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평면적인 블록버스터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며 티켓가만 올려대고 있다는 비아냥을 얻었다. 카메론마저도 이 ‘짝퉁’들의 득세에 불만을 토로할 지경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3D영화에 주목하는 스티븐 스필버그나 마틴 스콜세지와 같은 할리우드의 장인 감독들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에르제의 고전 만화를 퍼포먼스 캡처 기술을 동원한 3D 애니메이션으로 완성한 스필버그의 <틴틴: 유니콘호의 모험>(2011)은 3D영화라는 플랫폼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킨 사례다. 영화의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롱테이크 추격신은 단연 백미다. 실사 촬영으로 따라잡기 힘든 동선을 인물의 표정까지 생생하게 포착하는 퍼포먼스 캡처의 디테일과 CG로 구현된 가상적인 스케일로 포착해내고, 3D를 통해 생생한 현장감을 입혔다. 스필버그는 말한다. “모든 영화가 3D일 필요는 없다. 3D로 촬영될 이유가 없는 이야기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3D 안에서 완벽해지는 영화들이 있다.” 브라이언 셀즈닉의 인기 동화 <위고 카브레>를 각색한 3D영화 <휴고>(2011)로 큰 호평을 얻은 스콜세지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스필버그에게 동의한다. 항상 나는 3D에 관심이 있었고, 그것이 <휴고>를 위한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할리우드의 두 거장의 말에는 뼈가 있다. 3D는 개척할만한 영화적 기법이라는 것, 하지만 3D가 모든 영화를 위한 대안은 아니라는 것. CG의 발달이 장르의 발전으로 통했듯이 3D영상의 발전 또한 새로운 표현력의 가능성을 여는 문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하나의 표현 기법으로서 정착될 때 보다 긴 생명력을 얻어낼 수 있다.
최근 조지 루카스 감독의 <스타워즈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협>이 3D영화로 재개봉됐다. 이 스페이스 오페라가 3D의 가면을 쓰고 부활하는 광경은 최근 3D영화를 둘러싼 어떤 경향을 대변한다. <타이타닉> <탑 건>과 같은 할리우드 고전 블록버스터나 <라이온 킹> <미녀와 야수>와 같은 디즈니 클래식 애니메이션들이 3D로 변환되어 개봉되는 중이다. 클래식의 입체적 발굴이라 할만한 이런 경향은 앞으로 3D영화의 향방을 가늠할만한 새로운 화두다. 현대적인 기술이 과거의 영광을 재조명한다니, 3D영화의 진로 개척은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이다.
한국에서도 3D영화에 대한 관심은 뜨겁다. <아바타>의 흥행은 한국산 3D영화 제작이라는 열망을 부추겼다. 하지만 제작 의사를 밝힌 몇 편의 3D영화가 증발되거나 답보적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지난 해 국내 최초 3D 블록버스터라는 수사 아래 <7광구>가 공개됐다. 이는 뼈저린 교훈을 남겼다. 시행착오의 한 단면이라 이해할 수도 있지만 무모하게 전세계적인 유행에 편승한 악수는 산업적인 재앙으로 축적됐다. 중요한 건 결국 ‘3D영화’가 아니었다. 비싼 티켓을 결제하고 안경까지 걸치며 눈의 피로까지 감당해야 하는 관객들은 점차 ‘3D’가 아닌 ‘영화’를 주목하기 시작한다.
과거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반짝했던 3D영화 붐과 달리 지금의 유행은 일시적인 현상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3D영화를 위한 디스플레이가 개발되고, 보다 진일보한 영상 기술이 그 진화를 뒷받침하고 있는 산업적 논의 안에서 3D영화는 더 이상 미래의 영화가 아닌 현재의 영화다. 심지어 3D라는 시각적 극치를 넘어서 오감을 자극하는 4D까지 등장한 지금, 영화는 단지 숨죽이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중요한 건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이다. 관객들은 영화가 보여줄 그 무엇을 기대하며 상영관에 들어선다.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달리는 기차 영상을 본 대중의 열광이 동력이 되어 여기까지 왔다. 영화의 역사란 결국 움직이는 영상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라는 고민을 연료처럼 태우며 달려온 것이다. 관객이 보고 싶어하는 혹은 열망할만한 것, 3D영화의 미래 역시 그 고민을 태우며 달려가야 한다.
브라이언 셀즈닉의 <위고 카브레>를 영화화한 마틴 스콜세지의 <휴고>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영상 수준이었던 영화에 예술적인 숨결을 불어넣은 진정한 영화의 창시자 조르주 멜리에스에 관한 영화다. 3D영화라는 현대적인 매체를 통해서 영화의 기원이 된 뤼미에르 형제의 그 영상을 비롯한 무성영화의 레퍼런스들을 목도하는 건 대단히 놀라운 체험이다. <휴고>는 강요에 가까운 예찬 대신 영화에 대한 애정과 경의를 담아 당신을 영화라는 세계로 인도하려 한다. 3D영화로서 최상의 기술적 완성도를 자랑하고, 텍스트와 삽화로 이뤄진 원작을 영화로서 승화해내는 이 작품이 영화라는 예술 자체에 대한 오랜 역사를 성실하게 기술하는 동시에 그 자체의 의미를 온전히 전달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영화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고전의 발굴과 복원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며 끊어진 영화의 역사를 이어나가는 마틴 스콜세지는 <휴고>를 통해서 영화 그 자체를 오마주한다. 거장의 진심에 경의를 표한다.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을 모티프로 제작된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와 마찬가지로 속편임을 자처하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2: 신비의 섬> 역시 쥘 베른의 세계관을 토대로 영화적 세계관을 구상했다. <신비의 섬>이 그것. 그리고 <신비의 섬>의 프리퀄에 가까운 <해저 2만리>도 일부 차용됐다. 심지어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와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도 영화적 아이디어에 기여했다. 하지만 전작이 그러했듯이 속편 역시 이 모든 문학적 텍스트를 충실하게 재해석한 작품이라기 보단 쥘 베른을 비롯해서 이 영화에 차용된 고전들의 세계관을 방아쇠로 삼아 3D 롤러코스터를 쏘아 올리는 작품에 가깝다.
전작에서 출연했던 캐릭터의 등장을 통해서 시리즈로서의 연결고리를 잇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 시리즈라는 정체성은 딱히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일단 전작에서 지질학자 삼촌과 함께 우연히 지구 속 여행을 떠났던 숀(조쉬 허처슨)은 조금 더 성장했고, 그는 현재 새로운 아버지 행크(드웨인 존슨)에 대한 거부감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보내진 모종의 신호를 파악하고자 노력하던 숀은 그것이 모스 부호임을 알아챈 행크의 도움으로 그 신호가 오래 전 실종된 할아버지(마이클 케인)로부터 왔으며 할아버지가 신비의 섬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그저 쥘 베른의 세계관을 코스프레한, 할리우드발 3D 롤러코스터다. 쥘 베른 소설의 행간의 의미 따위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으며 그저 쥘 베른의 상상력을 테마파크 디자인 용도로 활용한 상업적 기획물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영화가 차용한 고전의 제목들은 사실상 잊어도 무방할 정도다. 그만큼 영화에서 언급할 만한 건 3D 입체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롤러코스터 비주얼인데 이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즐길만한 수준의 볼거리는 된다 말할만하다. 거대한 도마뱀의 추격신이나 거대한 꿀벌의 비행신 등, 3D 롤러코스터로서 최적화된 재미를 갖춘 신들이 종종 등장하며 눈요기를 채운다.
각본은 치밀하지 못하나 영화는 딱히 이런 요소들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관객 역시 이성적인 관람 자체에 대한 욕망을 버릴 때 편해질 수 있는 작품처럼 보인다. 그저 영화의 가이드에 따라서 스크린에 구현되는 테마파크 적인 세계를 체험하는 용도로서 이해할 때 편한 영화랄까. 이는 결국 3D 롤러코스터적 체험에 흥미가 없다면 호기심은 일찌감치 접는 편이 낫다는 말이기도 하다. 거대한 공룡과 같은 오락적 스케일을 그리고 있지만 정작 상상력은 공룡 두뇌만큼 빈곤하다. <달나라 탐험>을 제시하는 예고적인 결말 역시 무리수처럼 보인다.
솔직히 말해서 <라이온 킹>은 오늘날의 정교한 애니메이션의 기획력과 완성도에 비교하자면 떨어지는 물건이다.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의식한 효과와 예상 범위 안에서 머무르는 기승전결, 지나치게 단순해서 부조리한 은유적 세계관, 이는 결국 픽사와 드림웍스가 주도하기 전까지 애니메이션 왕국을 자처했던 디즈니 월드가 시대적 한계에 봉착하기 전까지의 영광과 한계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지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라이온 킹 3D>에서 눈여겨볼만한 건 고전 셀 애니메이션의 레이어가 컨버팅 3D 애니메이션으로 변환됐을 때, 셀 애니메이션의 레이어가 그 입체적인 공간감으로 구현되는 이미지의 목격이다. 3D 입체감과 탁월하게 결부되는 CG 애니메이션의 구현력에 미치지 못하지만 때로 그 레이어의 층위가 때때로 다른 차원의 입체감을 준다는 건 흥미롭다. 하지만 역시 세월무상이랄까. 때때로 호기심은 추억을 죽인다.
픽사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통통 튀는 룩소 주니어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픽사는 수많은 실패를 견뎌내고 얻어낸 이름이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최고, 그 이상이 됐다.
2006년 1월 24일, 디즈니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74억 달러 상당의 금액을 들여서 픽사를 인수하겠다는 것.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디즈니와 픽사의 관계는 1991년에 시작됐다. 디즈니가 픽사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자금을 투자하기로 결정하면서였다. 당시 CG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는 건 일종의 도박처럼 보였다. 하지만 픽사의 CEO인 에드 캣멀과 멤버들은 오래 전부터 그 날만을 고대해오며 모든 채비를 마련해갔다. 처음 두 회사의 관계는 투자사인 디즈니의 일방적인 권한이 중시되는 주종관계에 가까웠다. 하지만 디즈니의 권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토이 스토리>(1995)와 함께 시작된 픽사의 역사는 곧 CG 애니메이션의 개척사가 됐다. 꿈의 왕국이라 불리던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이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처럼 박스오피스에서 사라지는 사이, 픽사의 작품들은 꾸준히 자리를 지켜나갔다. 디즈니는 자사 영화 제작비의 45% 정도를 픽사의 수입으로 충당해내는 상태까지 몰렸다.
2004년 초, 디즈니와의 계약 만료일이 다가오자 픽사의 최고경영자였던 스티브 잡스는 계약 연장 협상 중단을 발표했다. 그는 그 해 픽사의 4분기 실적 발표에서 픽사의 작품 배급을 바라는 메이저 배급사가 적어도 네 곳은 된다고 밝혔다. 다음날 픽사의 주식은 3% 올랐고, 디즈니의 주식은 2% 떨어졌다. 디즈니는 내부적인 진통 끝에 당시 잡스와 반목하던 최고경영자를 끌어내리며 신호를 보냈다. 사실 디즈니 내부에서는 픽사가 자신들의 인지도를 넘어섰다는 징후를 곳곳에서 목격하며 심각한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인수 합병 논의는 곧 시작됐다. 그리고 마침내 미키 마우스는 룩소 주니어를 샀다. 사실상 영접이었다. 픽사의 창작적 중추 존 래세터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업부의 최고창작책임자로 임명됐다. 래세터가 기획한 <라푼젤>(2010)은 <알라딘>(1992)과 <라이온 킹>(1994) 이후로 처음 북미 2억 달러 이상의 흥행을 거둔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됐다.
래세터는 원래 디즈니 애니메이터였다. 어려서부터 디즈니 애니메이터를 꿈꾸던 그는 디즈니가 운영하는 칼아츠를 수료한 뒤, 디즈니에 입사했다. 당시는 디즈니의 마법이 급속하게 힘을 잃어가던 시절이었다. 그는 디즈니의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덧없는 상실만을 체감하다 끝내 해고당했다. 과거 래세터는 구상하던 작품의 일부 배경의 CG 구현이 가능한지 자문하고자 캣멀을 찾았다. 캣멀은 래세터가 당시에 보기 드물게 CG에 관심이 많은 애니메이터란 점에서 감명을 받았다. 캣멀은 그를 불러들였다. 캣멀은 자신들에게 부족한 예술적 감각을 래세터가 채워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픽사의 전신은 루카스필름 산하에 있었던 하드웨어 그래픽 부서였다. 보다 명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CG애니메이션 제작을 목표로 그곳에 은둔해 있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캣멀은 일찍이 컴퓨터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에 대해서 심취해있었다. 1970년대 초에 이런 생각은 대단히 앞서나갔거나, 그저 헛소리에 가까웠다. 그러나 자신과 뜻이 맞는 인재들을 규합해 나갔다. 뉴욕 공과대학 컴퓨터 그래픽스 연구소에서 규합된 팀은 조지 루카스의 루카스필름 산하의 그래픽 부서가 됐고, 애플에서 퇴출당한 잡스가 이를 인수하며 픽사라는 이름을 내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들을 지원한 어느 누구도 그들의 최종적인 목적지를 알지 못했다. 픽사의 탄생에 투자했던 잡스 역시도 마냥 관대한 투자자는 아니었다. 다만 끝내 그들의 재능을 이해하고 지원할 수 있는 직관과 인내가 있었을 뿐이다.
후에 픽사라고 불릴 스튜디오의 멤버들은 그 전신이 되는 회사에서 컴퓨터로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최적의 기술을 연구해나가며 자신들의 투자자나 인수자들이 원했던 일들을 수행해나가야 했다. 이를 테면, CG 구현을 위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개발한다던지, CG를 이용한 광고 비주얼을 제작한다던지, 그런 것들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술을 통해서 점차 살아있는 것들을 그려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름의 수익을 내기도 했지만 그들은 분명 매력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었다. 루카스필름 산하에 있었을 당시, 루카스는 쓸모 없는 애니메이터들을 고용하는 것에 끊임없이 이견을 표했고, 캣멀을 비롯한 멤버들은 그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며 가능성의 조각들이 흩어지는 것을 막아야 했다. 후에 이들을 500만 달러에 인수한 잡스는 10년 간 인수비용의 열 배가 넘는 투자금을 쏟아 부으며 때때로 조바심을 드러냈다. 다행인 것은 그가 재능을 보는 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토이 스토리>의 성공가능성을 예견했고,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가 오늘로 이어졌다.
최근 몇 년 사이 픽사 애니메이션들은 장족의 발전을 이뤄냈다. “예술은 기술을 변모시키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 존 래세터의 말처럼, 픽사는 기술과 예술이 맞붙어 이룰 수 있는 최상품들을 대중 앞에 선보이는 혁신적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다. 이는 성공적인 과정의 마련을 통해서 이뤄졌다. ‘브레인트러스트’는 픽사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제도다. 진행 중인 어느 작품의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창작적인 난관에 빠졌을 때, 브레인트러스트를 소집한다. 존 래세터, 앤드류 스탠튼, 브래드 버드 등 픽사의 아이디어 뱅크들이 그 자리에 참여한다. 그리고 토론한다. 그들은 의견을 피력할 뿐, 결정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결정은 결국 소집을 요청한 당사자의 것이다. “
예술은 팀 스포츠다.” 픽사의 캐치프레이즈는 그들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확실한 정의다. 각자의 재능을 더해서 최상의 완성도를 선사하는 것이 바로 픽사가 지닌 최고의 가능성에 가깝다. 누군가 즉흥적으로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내면 그 옆의 누군가는 그 아이디어에 그럴싸한 디테일을 붙이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접목시킨다.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고 자신의 의견을 마음껏 개진할 수 있는 시스템, 이는 픽사가 직책과 직위의 장벽으로 인한 소통의 한계 대신 상대에 대한 무한한 존중과 경의를 기본적인 덕목으로 삼고 있음을 잘 알려준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자신들의 가치를 대변하는 최고의 결과로 나아가는 방향임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감탄한 픽사의 애니메이션들은 이런 방식 안에서 탄생했다.
픽사는 그 이름을 지닐 수 있을 때까지도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 심지어 하루 아침에 사라질 운명에 처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룹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생경한 것이다. 그저 공통된 꿈을 갈망한 이들이 모여 이룬 그 창작의 연대를 보존하겠다는 의지가 살아남아 이룬 결과에 가깝다. 그들은 예언자가 아니었으며 한때 몽상가로 치부되기도 했다. 결국 성공보다도 중요한 건 실현에 대한 의지였다. “말도 안 되는 무언가가 벌어진다고 생각할 때마다 실제로 일이 생길 것이다.” 캣멀의 말처럼 픽사는 상상의 선을 긋는 대신, 그 선을 항상 뛰어넘음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구축했다. <토이 스토리>의 그 대사처럼.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To infinity, and beyond!)”
벨기에 만화가 에르제의 24부작 어드벤처 시리즈 <땡땡의 모험>은 소년 저널리스트의 전세계적인 모험을 그린 작품이다. 1929년 어린이 신문에서 연재가 시작된 이 코믹 스트립은 1930년 첫 단행본 발간 이후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80개국에 번역 출간됐다. 대장정을 이루는 이 어드벤처 시리즈가 영화화된 건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니다. 두 편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비롯해서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전례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스크린 진입을 지휘하는 것이 스티븐 스필버그와 피터 잭슨이라는 두 대가라면, 게다가 그것이 퍼포먼스 캡처를 통한 CG 애니메이션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게다가 <틴틴: 유니콘호의 모험>(이하, <틴틴>)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첫 애니메이션 연출작이기도 하다.
퍼포먼스 캡처를 이용한 CG 애니메이션의 장점은 세심한 근육의 움직임까지 포착하며 실제적인 캐릭터의 감정을 새겨 넣을 수 있는 동시에 카메라가 쫓기 힘든 앵글의 한계를 뛰어넘는 애니메이팅의 표현력을 함께 얻어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디테일과 스케일을 함께 수확할 수 있다는 것. 평면 위에 그려진 세계 속을 활보하던 땡땡을 비롯한 다수의 캐릭터들을 양감의 세계로 이끌어내는 방식으로서 이는 유용해 보인다. 실사에 가까운 캐릭터를 구현하고 감정을 불어넣는 동시에 전세계를 비롯해서 달까지 착륙하는 땡땡의 모험에 효과적인 스펙터클을 가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원작을 스크린에 구현하겠다는 목적 이상의 성취에 대한 욕망으로 읽힌다.
<틴틴>은 영화화된 시리즈의 출항을 알리는 작품이자 스크린을 통해서 새롭게 재구성된 세계 자체를 안착시키는 시도로서의 야심을 품고 있다. 땡땡으로 알려진 틴틴을 비롯해서 모든 캐릭터의 이름은 영어권 이름으로 통일되거나 변형되고, 원작 시리즈 가운데 세 편의 에피소드를 엮어 넣으며 스토리텔링을 재단했다. 그런 의미에서 <틴틴>은 영화화된 시리즈의 초석을 다지고 본격적인 어드벤처 시리즈의 새로운 출항을 알리는 작품이다. 호기심을 동력으로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저널리스트 틴틴이 우연히 발견한 유니콘호의 모형을 통해서 새로운 호기심을 작동시키고, 모험을 펼쳐나가는 서사, 그 여정 가운데서 만난 선장 하독은 극적인 위트를 추가하고 버디무비의 활력을 부추긴다. 추리물이라는 장르 안에서 인과에 대한 서술적 강박이 때때로 미스터리를 식상하게 무너뜨리는 감은 있지만 어드벤처 장르 안에서 전시되는 비주얼의 쾌감이 그 빈틈을 압도적으로 메운다.
무엇보다도 <틴틴>의 가장 큰 성과는 퍼포먼스 캡처가 실사 촬영을 통해서 구현해내기 어려운 스펙터클의 맹점까지 밝혀낸다. 비사실적인 프레임의 사실적인 구현을 가능케 하는 표현력의 도구로서 퍼포먼스 캡처를 이용한 CG 애니메이션이 지닌 가능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증명하는 현재의 기술적 척도에 가깝다. 물론 <틴틴>은 완벽하게 언캐니밸리를 뛰어넘은 작품은 아니다. 실사와 유사한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주는 이질감의 불쾌가 <틴틴>에서도 발견되는데 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발전 속에 자리한 기술적 결함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균형이 맞지 않는 캐릭터 묘사로부터 기인하는 바도 크다. 이를 테면 실제 사람의 형상에 가깝게 변주된 틴틴의 외양과 달리 하독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은 애니메이션의 과장된 생김새로 구현되고 있는데 이런 묘사의 조합이 때때로 그 세계의 실제적인 풍경에 어울리지 않게 자리하고 있다는 감상을 부여한다. 이는 어쩌면 애니메이션의 양식을 처음으로 시도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의도적인 실험이 묵인하고 있는 고의적인 현상 같기도 하다.
어쨌든 <틴틴>은 어드벤처 장르물로서 극한의 체감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는 원신 원컷 롱테이크 추격신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형으로 회자될만한 성취에 가깝다. 고전코믹스 원작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해냈다는 새로운 의미와 함께 실사 촬영을 통해서 구현하기 어려운 스펙터클을 묘사해내는 기술적 수단을 자신의 것으로 개발해내는 테크니션 장인들의 면모가 반영된 새로운 전형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피터 잭슨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만남이라는 카피가 단순히 홍보용 문구로서 유용한 것이 아닌, 새로운 어드벤처 시리즈의 미래를 밝힌다는 점에서도 만족스럽다. 제작을 맡은 피터 잭슨과 연출을 맡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자리를 바꾼다는 속편을 비롯해서 피터 잭슨과 스티븐 스필버그가 공동 연출을 계획한다는 세 번째 속편까지, 트릴로지가 항해할 지도를 함께 들여다보고 싶게 만든다는 점만으로도 <틴틴>은 분명 탁월한 출항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