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을 모티프로 제작된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와 마찬가지로 속편임을 자처하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 2: 신비의 섬> 역시 쥘 베른의 세계관을 토대로 영화적 세계관을 구상했다. <신비의 섬>이 그것. 그리고 <신비의 섬>의 프리퀄에 가까운 <해저 2만리>도 일부 차용됐다. 심지어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와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도 영화적 아이디어에 기여했다. 하지만 전작이 그러했듯이 속편 역시 이 모든 문학적 텍스트를 충실하게 재해석한 작품이라기 보단 쥘 베른을 비롯해서 이 영화에 차용된 고전들의 세계관을 방아쇠로 삼아 3D 롤러코스터를 쏘아 올리는 작품에 가깝다.
전작에서 출연했던 캐릭터의 등장을 통해서 시리즈로서의 연결고리를 잇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 시리즈라는 정체성은 딱히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일단 전작에서 지질학자 삼촌과 함께 우연히 지구 속 여행을 떠났던 숀(조쉬 허처슨)은 조금 더 성장했고, 그는 현재 새로운 아버지 행크(드웨인 존슨)에 대한 거부감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보내진 모종의 신호를 파악하고자 노력하던 숀은 그것이 모스 부호임을 알아챈 행크의 도움으로 그 신호가 오래 전 실종된 할아버지(마이클 케인)로부터 왔으며 할아버지가 신비의 섬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그저 쥘 베른의 세계관을 코스프레한, 할리우드발 3D 롤러코스터다. 쥘 베른 소설의 행간의 의미 따위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으며 그저 쥘 베른의 상상력을 테마파크 디자인 용도로 활용한 상업적 기획물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영화가 차용한 고전의 제목들은 사실상 잊어도 무방할 정도다. 그만큼 영화에서 언급할 만한 건 3D 입체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롤러코스터 비주얼인데 이런 측면에서 이 영화는 즐길만한 수준의 볼거리는 된다 말할만하다. 거대한 도마뱀의 추격신이나 거대한 꿀벌의 비행신 등, 3D 롤러코스터로서 최적화된 재미를 갖춘 신들이 종종 등장하며 눈요기를 채운다.
각본은 치밀하지 못하나 영화는 딱히 이런 요소들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관객 역시 이성적인 관람 자체에 대한 욕망을 버릴 때 편해질 수 있는 작품처럼 보인다. 그저 영화의 가이드에 따라서 스크린에 구현되는 테마파크 적인 세계를 체험하는 용도로서 이해할 때 편한 영화랄까. 이는 결국 3D 롤러코스터적 체험에 흥미가 없다면 호기심은 일찌감치 접는 편이 낫다는 말이기도 하다. 거대한 공룡과 같은 오락적 스케일을 그리고 있지만 정작 상상력은 공룡 두뇌만큼 빈곤하다. <달나라 탐험>을 제시하는 예고적인 결말 역시 무리수처럼 보인다.
<땡땡의 모험>을 잘 몰라도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이하, <틴틴>)을 즐기는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퍼포먼스 캡처를 동원한 <틴틴>은 원작 코믹 스트립을 영화화하겠다는 목적 이상의 성취를 얻어냈다. 언캐니 밸리의 한계가 간혹 목격되긴 하나, <틴틴>은 퍼포먼스 캡처가 실사 촬영으로 구현할 수 없는 스펙터클의 영역의 현실화와 비사실적인 프레임의 사실적인 구현을 가능케 하는, 표현력의 도구로서 얼마나 유용한가를 드러내는 현재의 척도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원작에 대한 호기심을 동하게 만드는 <틴틴>의 오락적 완성도 또한 탁월하다. 피터 잭슨과 스티븐 스필버그는 두 대가의 만남이란 카피가 단순한 홍보용 문구가 아님을 증명하는 동시에 시리즈로서의 미래를 밝힌다는 점에서도 만족스럽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관람 후, 자신의 애완견에 대한 기대치가 불필요하게 높아질 수 있다는 것. 틴틴 없이는 스노위도 없다.
미네소타의 작은 마을 무스레이크를 지나던 트럭에서 나무 상자 하나가 눈 쌓인 길에 떨어진다. 길을 지나던 소녀 린다가 호기심에 상자를 열어보곤 그 안에 있던 파란 앵무새 한 마리를 발견한다. 추위 탓인지, 두려움 탓인지, 몸을 웅크리던 앵무새가 소녀의 손길 앞에서 평정을 되찾는다. 블루라는 이름을 얻게 된 앵무새는 그 소녀가 어른이 되기까지 그 곁에 자리하며 편안하고 안락한 애완용 새로 길들여진지 오래다. 하지만 블루는 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루에 있다는 암컷 마코 앵무새 쥬엘과 함께 지구상에 단 한 종 밖에 남지 않은 희귀종 마코 앵무새라는 사실. 이를 전해 듣게 된 린다는 고심 끝에 마코 앵무새의 멸종을 막고자 블루를 데리고 브라질 행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블루가 만나는 건 블루와 한 쌍을 이룰 쥬엘만이 아니다.
픽사와 드림웍스의 양강 체제로 이뤄진 오늘날의 애니메이션 월드에서 호시탐탐 틈새공략을 노리고 머리를 드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이 있다. 지난 해 <슈퍼배드>를 내세우며 평단의 호평과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낸 유니버셜 스튜디오도 그 중 하나. 하지만 이에 앞서서 20세기 폭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아이스 에이지>시리즈를 성공시킨 블루 스카이 스튜디오가 있었다. 그리고 <리오>는 바로 그 블루스카이 스튜디오가 꺼내든 새로운 카드다. <리오>의 기획 전략은 <아이스 에이지>와 흡사하다. 고대 빙하기 시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 풍경 안에 특유의 개성이 넘치는 동물 캐릭터들의 활약상을 그린 <아이스 에이지>와 마찬가지로 <리오>는 축제 활기로 가득한 리오 데 자네이루의 분위기 속에서 생동감 넘치는 동물 캐릭터들의 활약상을 채워 넣는다.
대부분의 성공적인 애니메이션들이 그러하듯이, <리오> 역시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활약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리고 동물 캐릭터가 주를 이룬 어느 애니메이션들과 같이 <리오>는 저마다의 동물들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캐릭터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도 의인화된 행위와 언어를 이식하며 어드벤처의 활기를 구현해낸다. 비행하지 못하는 마코 앵무새 블루가 짝짓기를 위해서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제 짝을 찾아 리오 데 자네이루에 도착해 벌이는 모험은 사실상 블루의 혼자 날기, 즉 홀로서기를 위한 필연적 여정과 같다. 그 과정에서 병풍이 되는 리오 데 자네이루의 풍경은 그 자체로 볼거리를 이루는 동시에, 위트 있는 활력을 채우기 위해서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것 또한 다채롭게 영화를 장식한다. 특히 극 중반부에 쥬엘과 함께 비행( 아닌 비행)을 하는 블루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 거대 그리스도상을 비껴가며 리오 데 자네이루의 풍경을 부감으로 펼쳐 보이는 모습은 장관의 엔터테인먼트다.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완성도라 치켜세울 수는 없지만 <리오>는 자신이 지닌 최고의 장점을 최대로 극화시킬 줄 아는 이들의 최상품이라 할만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고대 빙하시대의 설원을 현대적인 감각의 애니메이션 소재로 차용한 <아이스 에이지>가 그러했듯이, <리오> 역시 세심하게 창작된 캐릭터들이 저마다 충실하게 제 역할을 해내며 엔터테인먼트적인 흥미와 활기를 배가시킨다는 하나의 영화적 목표로 도달해나간다. 무엇보다도 소소한 뒷골목부터 화창한 해변까지 리오 데 자네이루의 곳곳을 그려낸 <리오>의 풍광은 여행 욕구마저 자극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너무 착해서 합의적인 혐의마저 느껴지는 결말은 조금 아쉽지만 신나게 이륙해서 감동적으로 착륙하는 <리오>가 기술적으로나 감성적으로 보는 이의 안구를 정화시키고, 마음을 풍요롭게 채우는 애니메이션이란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게다가 등장 자체만으로도 눈에 띄는 ‘앵그리 버드’의 출연은 이를 눈치채는 이들을 위한 반가운 서비스 노릇을 톡톡히 해낸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기시감은 대부분 <에일리언>의 그것이다. 미지의 우주가 심해로, 폐쇄적 공포를 야기시키는 우주선을 해양 한가운데의 섬과 같은 석유 시추 기지로, 심지어 시고니 위버는 하지원으로. 우리도 여전사가 등장하는 그럴싸한 괴수물 하나 있으면 어떤가. 문제는 역시 완성도다. 나름대로 웰메이드 블록버스터를 지향했겠지만 현실은 LA빌딩을 감싸고 올라가던 이무기 등장하던 어떤 영화와 그 영화 감독의 야심이 떠올랐다. 즐길만한 서스펜스가 발견되는 몇몇 시퀀스는 존재하나,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낭비적인 드라마, 중구난방으로 머리를 든 캐릭터들의 부조화까지, <7광구>에서는 날뛰는 괴물보다도 정신 사나운 내러티브의 무절제가 성가시게 눈에 띈다. 심지어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이나, 날뛰다가 공격을 받고 죽을 듯 살아나서 또 날뛰는 과정을 반복하는 괴물이나, 노동하듯 피곤해 보인다. <7광구>의 3D는 입체영상이 아니라 노동의 3D를 의미하는 것이었던가. 비꼬는 말이 아니다. 보는 내내 이상했다. 안경은 왜 준걸까. 분명 3D영화라 했는데, 안경 없이도 대부분의 장면을 볼 수 있는 3D영화라니. 안경을 끼는 수고스러움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더냐. 시도는 필요한 일이다. 그 가치는 인정받아 마땅하다. 여기서 시도가 인정받는다는 것은 단지 그 시도를 고무시키기 위한 칭찬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시도 그 자체의 순기능으로서 인정받는다는 건 보다 나은 원숙함과 단단함을 요구하는 비판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7광구>는 지금 칭찬보다 비판을 견뎌내야 할 시점의 영화인 것 같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기 직전인 한 행성에서 부모의 기지로 우주선에 탑승한 한 아이가 탈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바로 옆 행성에서 탈출한 또 다른 아이와 평행선을 그리며 우주를 비행하다 함께 지구에 불시착한다. 비슷한 운명을 타고난 두 아이는 판이한 외모만큼이나 대립적인 성장기를 보내고 결국 최고의 적수로 자라난다. 초능력을 통해 온갖 사랑을 독점하며 자란 ‘훈남’ 아이는 메트로시티의 영웅 ‘메트로맨’이 되고 ‘비호감’이었던 아이는 메트로시티의 악당 ‘메가마인드’가 되어 끊임없이 맞선다.
영웅질도 딴지를 거는 악당이 있어야 인정 받을 수 있듯, 악당질도 가로 막는 영웅이 있어야 할만한 법이다. <메가마인드>는 영웅이 사라진 도시에서 활개치다 스스로 심심해졌음을 깨닫게 된 악당의 딜레마를 그린다. 관심 받고 싶어서 악명을 떨쳤지만 그 관심을 부각시켜줄 영웅질이 없으니 악당은 자연스레 초조해진다는 것이 <메가마인드> 속 악당의 면모다. 분명 순진한 이야기다. 진짜 악당이 아닌, 관심을 얻기 위해 악당을 흉내 내는 법을 익힌 이의 사연이 결국 <메가마인드>의 본체인 것이다. 이는 교육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교훈적 메시지로 연결된다. 칭찬 받고 자라지 못한 아이는 어떻게 비뚤어지는가에 관한, 장난끼 가득한 우화라고 할까.
물론 <메가마인드>는 그리 심각하지도, 진지해질 생각도 없는,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위트적인 작품이다. 다양한 히어로 무비의 메타포들을 잔뜩 끌어들인 뒤, 그 평면적인 이미지들을 전시하고 그 안에 담긴 패러다임들을 가볍게 조리한다. 또한 <슈퍼배드>와 같이, 영웅의 활약상을 묘사하고 숙명에 가까운 고독한 심리를 포착해내는데 초점을 맞춘 슈퍼히어로 무비의 최근 경향을 위트 있게 패러디하는, 안티-안티히어로물에 가깝다. ‘모태 영웅’ 슈퍼맨과 ‘스킨헤드’ 악당 렉스 루터를 연상시키는 <메가마인드>의 메트로맨과 메가마인드는 히어로 무비의 컨벤션이나 다름 없는 이미지를 입고서 히어로 무비의 패러다임을 전복시킨다.
천부적으로 영웅 기질을 타고난 아이와 반대로 강력한 비호감의 기운을 풍기는 아이는 영웅과 악당으로 자라나 각자 유명세를 떨친다. 셀리브리티와 같은 만인의 영웅 메트로맨의 인기와 자신이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님을 깨닫고 인생 방향을 악당으로 전향한 메가마인드의 악명은 대조적인 동시에 협조적이다. 영웅과 악당이라는 이분법적 관계의 교묘한 공존 체제를 풍자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이를 유머로서 승화시키는데 주력한다는 점에서 유쾌하다. 동시에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몰라도 사랑 받고 태어난 아이가 세상의 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단순하지만 명확한 교훈을 전달한다. 특유의 과장된 연출로 익살스러운 위트를 던지는 동시에 넘치지 않는 감동을 수확해내는 드림웍스의 방법론이 또 한번 통했다.
추억이 애틋한 건 그 지나간 기억으로부터 여전히 느껴지는 체온 때문일 게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당연스럽게 흘러가고, 그 시간 안에서 우린 스스로 모른 채 많은 것들을 흘리고 뒤돌아 줍지 못한 채 떠밀려 나간다. <토이 스토리 3>는 바로 그 잃어버린 시간에 관한, 즉 추억들에 대한 애틋한 드라마다. 세 번째 속편에 다다른 이 시리즈는 언제나 그렇듯 주인에게 버려질까 전전긍긍하는 장난감들의 좌충우돌 활극을 그린다. 1999년, 그러니까 21세기 전에 나온 전편과 10년이 넘는 격차를 두고 거듭된 세 번째 속편이지만 <토이 스토리 3>는 어느 속편들처럼 새삼스럽거나 안이한 기획물이 아니다.
지난 두 편과 마찬가지로 <토이 스토리 3>에서도 스토리텔링의 요건을 이루는 건 버려지길 두려워하는 장난감들의 활극이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건 다른 장난감에 밀려나거나, 부서져서 버려지는 신세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영원히 폐기되는 것. 이유는 바로 자신들의 주인인 앤디가 더 이상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는 나이로 자라버렸기 때문이다. <토이 스토리 3>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대단한 극적 몰입도를 발생시킨다. 픽사가 제작했던 지난 작품 <업>이 극 초반부에서 젊은 남녀가 만나 함께 늙어가다 사별하기까지의 과정을 대사 한 마디 없는 몽타주 신으로 탁월하게 재생시켰던 것과 같이 <토이 스토리 3>의 오프닝 시퀀스는 몽타주를 활용하며 앤디의 성장과 그 성장을 함께 했던 장난감들의 추억을 환기시킨다. 이는 전편들을 경험하지 못했던 관객들을 위한 배려로서 손색이 없는 동시에 지난 전작을 추억하는 관객들에게는 훌륭한 선물이나 다름없다.
<토이 스토리 3>에서도 탁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이야기다. 언제나 그렇듯, 혹은 최근 들어 더욱 대단한 성과를 자랑하는 것처럼 픽사는 또 한 번 올해의 이야기를 완성했다. <토이 스토리 3>는 또 한 번 픽사의 장기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우연의 연속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또 한 편의 완전한 스토리를 창작해냈다. 픽사가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링에 대단한 극찬을 부여할 수 있는 건 단지 뛰어난 내러티브를 완성할 줄 아는 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픽사의 스토리는 체온을 품고 있다. 넉살스러운 캐릭터들은 능수능란한 유머를 구사하며 활기를 더하다가도 끝내 눈시울을 붉히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찰나를 발견하게 만든다. 진짜 ‘감동’의 결정을 아로새긴다. 그리고 <토이 스토리 3>는 픽사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결정이다.
우디와 버즈를 비롯한,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그 장난감들의 모험담에는 인간의 희노애락이 모두 담겨 있는 동시에 실로 형형하게 구현된 그 감정들을 응집시켜 이룬 압도적인 클라이맥스가 존재한다. <토이 스토리 3>에서 내러티브의 흐름은 결코 안주하거나 자만하는 법이 없다. 유머 감각이 뛰어난 캐릭터들은 때때로 만만찮은 서스펜스로 관객을 일순간 끌어들이고 결국 좀처럼 외면할 수 없는 페이소스로 관객을 빠뜨린다. 두 번째도 아닌, 세 번째 시리즈인 <토이 스토리 3>는 ‘전편보다 나은 속편이 없다’는 속설을 실로 무색하게 만드는 문제작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영역을 넘어서 감히 영화사 안에서도 가장 훌륭한 트릴로지로서 손꼽힐만한 시리즈랄까. 심지어 <토이 스토리 3>는 픽사의 창작 비결이 마법이 아닐까 호들갑 떨고 싶게 만들 정도로 보는 이를 벅차오르게 만드는 감동의 진경으로 인도한다. 감동의 결정을 품은 이야기의 정수를 선사한다.
최근 몇 년 사이 픽사가 만들어낸 작품들은 하나 같이 걸작이었다. <라따뚜이> <월-E> <업>까지, 매년 1편씩 걸작을 만들어내겠다는 각오라도 품은 것인양 대단한 이야기와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을 완성해 왔다. 사실 <토이 스토리 3>는 픽사의 아이디어 뱅크라 할 수 있는 존 라세터, 앤드류 스탠튼, 피트 닥터 등 지난 시리즈를 완성해낸 주역들이 한 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만든 야심작이기도 하다. 마치 자신들의 지난 추억을 꺼내들듯이, 그리고 자신들에게 지금의 영광에 다다르게 한 일등공신과도 같은 작품을 새롭게 닦아 내듯 정성스럽게 이야기를 직조하고 캐릭터를 어루만졌다. 대부분의 속편들이 창작자들의 무신경한 태도 속에서 흉물스럽게 망가지는 것과 달리 픽사의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보물 위에 쌓인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내고 닦아내듯 정성을 다해 완벽한 속편을 완성했다. 장담하건대, 적어도 당신이 <토이 스토리 3>를 보게 된다면 그 사연의 끝에서 적어도 두 번은 울컥할 것이다.
사랑스럽다는 말을 부끄럽지 않게 만드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작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건 그저 고맙다는 말이다. 픽사의 작품이, <토이 스토리 3>가 바로 그렇다.
‘픽사(PIXAR)’가 늘 수준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는 모범생이라면 ‘드림웍스(Dreamworks)’는 머리는 뛰어나지만 때때로 노력이 부족해서 열등한 모습을 드러내곤 하는, 게으른 우등생 같다. 마치 ‘좋은 예’와 ‘나쁜 예’가 뚜렷하다고 할까.드림웍스의 신작 <드래곤 길들이기>는 그 중에서도 좋은 예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버크섬은 바이킹 부족의 고향이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자신들의 가축을 약탈하고 목숨을 노리는 용과 맞서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강인하고 용맹한 전사가 되는 건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꿈이자 업이었다. 부족 내에서 가장 용맹한 전사로 통하는 바이킹 족장 스토이크는 용을 괴멸시키기 위해 그들의 거주지를 찾아내길 원한다. 하지만 그 전에 더욱 더 큰 고민은 그의 아들 히컵이다. 도무지 전사와는 거리가 먼 체격과 성격을 지녔음에도 아들은 용과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하며 번번이 사고만 치니 말이다. 하지만 어느 날, 스토이크의 고민은 말끔히 해결된다. 약골이라 용과 맞서기 어려울 것이라 믿었던 아들이 그 누구보다도 용을 다루는 재능이 대단하다는 것. 하지만 덕분에 히컵에게는 아버지가 모르는 고민이 하나 생긴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드림웍스라는 브랜드의 네임밸류 안에서 잉태된 기존의 작품들과 다른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슈렉>시리즈의 성공 이후로 드림웍스 애니메이션들은 의인화된 캐릭터들의 활약상에 초점을 맞춰 왔다. 동물의 탈을 썼을 뿐, 인간이나 다름없는 캐릭터들의 활동을 통해 위트를 건져내는 방식으로서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은 유효했다. 하지만 <드래곤 길들이기>는 명확하게 인간과 자연의 대비를 그리는 작품이다. 용과 대립하는 인간들의 세계관을 통해 두 대상 간의 교감을 그린다는 점에서 자연과 인류의 경계가 중첩적이던 전작과 뚜렷하게 다른 지향점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드래곤 길들이기>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아바타>의 대단한 흥행 이후로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확산되고 있는 3D영상의 구현이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아바타>이후로 스크린에 가장 탁월한 3D영상을 구현하는 작품이라 자부할만한 작품이다. 물론 두 작품 사이에 간극은 있다. 실사를 바탕으로 구현한 <아바타>의 3D영상과 달리 <드래곤 길들이기>는 기본적으로 CG애니메이션의 툴을 바탕으로 제작된 3D영상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두 작품의 완성도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드래곤 길들이기>는 분명 <아바타>이후로 3D영화라는 포맷 안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좋을 작품임에 틀림없다. 3D기술을 볼거리로서 충분히 활용하는 동시에 단순하고 명료한 스토리에 적절한 감동적 요소를 삽입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작품 자체에 대한 감상적 몰입도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드림웍스의 전작인 <몬스터 vs 에이리언>이 습작과 같은 3D애니메이션이었다면 <드래곤 길들이기>는 완성형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드래곤 길들이기>는 드림웍스의 메인 프랜차이즈였던 <슈렉>시리즈의 뒤를 잇는 포스트 드림웍스 시리즈로서 빈자리를 채울만한 작품이라 단언해도 좋다. 이미 새로운 시리즈 제작에 착수한 <쿵푸팬더>처럼 <드래곤 길들이기>의 시리즈 기획 역시 이미 공표된 상태다.다만 그 동안 드림웍스가 시리즈를 거듭하며 작품의 완성도를 유지하지 못했던 전례들을 생각해본다면 불안한 예감이 동반되는 것도 사실이다. 데뷔에 성공한 캐릭터를 밑천으로 삼아 방향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무작정 서사적 레일만 깔고 전진해나가듯 시리즈를 거듭하는 방식은 <쿵푸팬더>와 <드래곤 길들이기>를 통해 새로운 국면 전환에 성공한 드림웍스가 고민해야 할 지점이라 할만하다.
물론 차후의 고민을 떠나서 현재의 성과, 즉 <드래곤 길들이기>는 상당히 인정받을만한 성과에 가깝다. 명확한 기승전결로 이야기의 줄기를 뚜렷하게 세우고, 교감과 성장이라는 테마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통해 명료한 감동마저 거둔다. 또한 다양한 디자인과 개성을 캐릭터와 순발력 있는 위트를 통해 탁월한 오락적 재미를 더한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오락영화로서의 평형감각과 기술과 연출의 균형감각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대한 큰 스크린을, 3D상영관을 찾길 권한다. 지갑을 열수록 재미는 극대화될 것이다.
지난 해 11월, AFM(American Film Market)에 한국VFX업체들의 공동 부스가 차려졌다. AFM은 칸 국제영화제 필름마켓(Marche du Film), 밀라노 필름마켓(MIFED)와 함께 세계 3대 필름마켓으로 꼽히는 행사다. 문화체육관광부(문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한콘진)의 주최로 이뤄진 이번 마켓 진출에 참여한 국내 7개 업체, 인사이트비주얼, 모팩 스튜디오, EON디지털필름스, DTI픽쳐스 등은 해외영화관계자들과의 미팅을 통해 활발한 홍보활동을 펼쳤다. 이 자리에서 문광부와 한콘진은 할리우드의 바이어를 초청한 비즈니스 미팅을 추진하는 등 국내업체들의 홍보를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일임했다. “영세한 국내 업체가 국제행사에 참여해 부스를 내는 건 예산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공동부스라는 개념으로 국내업체들에게 기회를 열어준 셈이다.” 한콘진 미래융합콘텐츠단 조하섭 차장의 말이다.
“전체적인 그림에서 AFM은 지원정책의 일부다.메인은 국내외 영화나 방송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CG업체에게 제작지원을 일부 지원해주는 정책이다. 업체의 가격경쟁력과 제작 품질을 높일 수 있도록 직접 지원하자는 취지다. 그런 차원에서 AFM참여는 마케팅까지 부가적으로 지원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문광부 융합콘텐츠팀 박상욱 대리의 설명이다. 업계는 이에 대해 고무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할리우드는 검증이 된 업체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초기 진입은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조건을 이루며 시작될 수 없겠지만 정부 지원을 통해 한 작품을 잘 끝낸다면 지속적인 거래를 이어나갈 수 있을 거라 본다.” 인사이트 비주얼 손승현 제작 이사의 의견이다. 결국 정부의 지원은 개별 업체들의 자생적 토양을 마련하기 위한 비료로서 분명 유용한 것이다.
문광부는 지난 1월 14일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한 CG산업 육성계획’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유인촌 문화부 장관은 “CG산업의 육성을 위해 오는 2013년까지 약 2천억 원의 예산을 투입할 계획”이라 밝혔다. 문광부가 전달한 자료에 따르면 2013년까지 산업육성을 위해 5대 중점과제에 2천억 원의 예산을 투입한다. 5백억 원대에 이르는 CG전문 펀드를 조성하고, 국내 업체들에 대한 제작비 환급 등의 세제 지원 사업을 펼치는 동시에 영세한 업체들의 기술력 확보를 위해 고가의 제작장비와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실효적 방안을 마련한다. 또한 그 동안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업체가 개별적으로 실행하기 어려웠던 기술투자계발을 지원한다. 이를 통해 국내 VFX업체들의 기술적 발전을 꾀하고 동시에 전세계적으로 대두되는 3D기술을 확보해나간다는 방침이다. 그리고 글로벌 시장 개척을 위해 국내업체들의 해외프로젝트 참여를 이끌고 칸영화제나 AFM등의 마켓에서 비즈매칭(Business Matching)과 같은 자리를 마련하는 등, 마케팅 중계를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이런 밑그림을 토대로 국내업체의 해외진출을 성사시킴으로써 2013년까지 1조 1천억원의 시장 확보와 약 3만 명의 고용창출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문광부의 움직임은 현재 영상산업 전반의 변화적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 <아바타>의 전세계적 돌풍은 그동안 막연한 예언처럼 떠돌던 3D영상의 비전을 보다 확실한 증언이 됐다. 이는 단지 영화와 같은 영상예술의 방향성 뿐만 아니라 디스플레이를 비롯한 모든 영상산업 전반의 움직임을 가속화시키는 실정이다. 현재 문광부의 CG산업 지원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아시아 최대의 CG제작기지 구축’이라는 거대한 밑그림도 전세계 시장의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정부의 태도를 보다 확고히 대변한다. 하지만 단지 시장의 규모와 기술적 접근성만으로 산업적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계산에는 위험한 구석이 있다. “할리우드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영화 컨텐츠를 팔기 때문에 <아바타>와 같은 5천 억 규모의 제작비를 투입할 수 있다.” <아바타>의 VFX를 담당한 웨타 디지털에서 텍스처 아티스트와 라이팅 테크니컬 디렉터를 맡았던 정병건의 말이다. 시장의 스케일을 확장하는데서 힌트를 얻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도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을 동반했을 때 보다 발전적인 해답이 가능하다. “단순히 기술적으로만 놓고 보자면 우리가 할리우드의 7~80% 수준은 된다고 본다. 문제는 아무리 기술력이 발전해도 그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거다. 기술력을 과시할만한 컨텐츠가 부재하다.” DTI픽쳐스 양석일 실장의 말이다.
그동안 정부의 문화지원 정책은 항상 자본의 결과적 성과만을 염두에 두고 이뤄졌다. 게임 산업과 만화 산업은 좋은 전례다. 기존에 산업적 인프라가 존재했던 게임 산업은 정부의 지원을 통해 보다 확고한 산업적 가치를 창출했다. 하지만 만화 산업은 반대로 정부의 지원이 독이 됐다. 자본의 투자에는 인내심이 없다. 만화 산업의 열악한 인프라는 단지 산업적 기반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닌, 창작적 기반의 틀이 확고하지 않다는 데서 비롯된 문제였다. 하지만 정책은 확실한 실물적인 결과물을 원했고, 그 결과 졸속으로 완성된 지원적 결과물들이 되레 창의적 욕구를 감퇴시키며 산업적 가능성에 찬물을 끼얹었다. 현재 정부의 CG산업 육성은 3D영상산업의 비전까지 내다보고 있다. 문제는 그 정책의 태도다. 장기적인 인프라의 확충과 기술력의 확보를 염두에 둔 정책의 발효는 열악한 토양 위에서 발전을 거듭해온 국내 업체들을 고무시킬 만한 사안이다. 하지만 산업의 육성에 대한 장기적인 플랜과 당장의 손실을 감수할만한 인내력이 있는가라는 사안에 대해서 고심한 흔적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아바타>의 흥행이 남긴 자본적 가치를 선망하기 이전에 <아바타>라는 작품이 만들어진 산업적 배경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할리우드가 만들어내는 흥행작들은 단지 기술력의 발전만으로 이룩한 결과물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 기술력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창작자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사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국내CG산업의 발전을 단순히 해외시장의 자본가치만으로 한정짓는 태도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이다.
사실 정부의 정책적 주도는 국내 업체들의 요구를 통해 이뤄졌다. 사실 오래 전부터 영세한 국내 업체들은 정부의 지원에 대해 개별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가 전달될 통로를 찾지 못했다. 지난 해 CG산업협의회의 설립은 이런 요구를 통합할 필요성을 느낀 업체들의 합의에 따른 것이다. 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서울예술대학 디지털 아트과 김재하 교수는 말한다. “기술발전에도 불구하고 영세한 규모를 벗어나지 못하는 업체들의 목소리가 모아졌다. 글로벌 프로젝트를 위한 얼라이언스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등장했고 이를 전달할 창구가 절실해졌다.” 2008년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협의회는 지난 해 8월에 설립됐고, 정부의 정책적 자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AFM참여와 이번 육성계획 발표는 그 첫 번째 결과물이다. EON디지털필름스의 정성진 실장은 이와 같이 말한다. “일단 협회의 설립은 큰 의미를 지닌다. 기존의 정통부 시절부터 애니메이션 분야를 키우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다. 시장을 키우는 게 목적이었지만 실패한 셈이다. 업체들이 바쁘게 일해도 잘못된 목소리를 듣고 그들만의 잔치를 치른다면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협회를 만들어서 한 목소리를 낼 때 정부 쪽에서 그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건 발전적이다.” 결국 정책의 성패는 실무자들이 시장과 현장의 실정에 얼마나 귀를 기울일 수 있는가에 달린 셈이다. 의미 있는 첫걸음이 마지막까지 큰 족적을 이룰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유년 시절부터 플린트는 남달랐다. 그 아이는 남들이 떠올리지 못하는 것들을 생각해냈고, 그것들을 직접 만들어내는 재능이 있었다. 문제는 그 재능이었다. 그 재능은 일종의 불운처럼 주변사람들을 비롯해 자신에게마저도 끝없는 민폐를 끼쳤다. 자신의 발명이 세상에 유익한 재능이 되길 바라던 소년은 결국 마을의 골칫거리로 소문이 자자한 성인으로 자랐다. 그리고 성인이 된 플린트는 발명가로서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마을에 끝없는 민폐를 이어나간다. 그런 어느 날, 그 삶에 반전이 찾아온다. 먹을 거라곤 정어리밖에 없는 마을에서 살아가던 플린트는 물을 음식으로 바꾸는 기계를 발명하고 우연히 기계를 하늘로 띄워보낸 플린트는 이를 통해 마을에 무전취식의 행운을 가져다준다. 말썽의 원흉이라 손가락질 당하고 모든 이들의 무시를 한 몸에 받았던 플린트는 이로 인해 마을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사실상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이 취하는 기본적인 설정, 예를 들자면 하늘에서 음식이 떨어진다는 상황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 자체가 이미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인지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음식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그 자체가 이미 끝없는 재앙이 될 것이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갖가지 음식 세례를 맞은 몸은 소스로 범벅이 될 것이며 길거리는 부패한 음식의 악취가 들끓을 것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은 현실적인 세계관을 두르고 있되, 그 현실성을 풍자의 수단으로 치장한 작품이다. 영화가 연출하는 갖가지 상황들은 고의적인 농담에 가깝다. 사실적 증명에 실패한다기 보단 고의적인 비틀기에 가깝다. 그리고 그 유머가 겨냥하는 팔할의 과녁은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가 차용하던 패러다임의 전복적인 패러디에 가깝다. 농담에 가까운 상황을 마구잡이로 건너뛰는 캐릭터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농담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단순하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던 아들을, 그리고 마을의 사고뭉치를 모든 이들의 영웅으로 등극시키는 과정은 할리우드 영웅스토리의 진부함을 그대로 차용한 결과물에 가깝다. 다만 진지한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크고 작은 농담들로 이뤄진 코미디의 틀거리로서 이해할 때 이는 유용한 방식이 된다.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은 드라마로서의 내러티브를 통해 이야기로서의 뼈대를 세우되, 본질적으로 자신의 목적이 양념처럼 쏟아지는 유머의 향연에 있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작품이다. 만화적인 과장성을 노골적으로 내세우면서 그것의 활용도를 극대화시키는, 장르적 허용을 능수능란하게 이용해내고 있다. 진부한 성장드라마의 약점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유머와 재치로서 극복해냈다. 그리고 그 유머와 재치가 즐길만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얻어맞을지 모른다는 현실적 두려움보단 그 상황이 주는 놀라운 재미를 만끽하게 만든다. 관습적인 사연에서 벗어나지 않는 드라마의 진부한 가뭄은 지속적인 강우량을 자랑하는 번뜩이는 유머로 극복된다.
(연원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근미래에 인류는 지구로부터 4.4광년 떨어진 ‘판도라’ 행성에서 대체에너지 ‘언옵타늄’을 채굴해 지구로 공급한다. 소량만으로도 고효율의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자기장 물질 언옵타늄은 지구에서 kg당 2천만 달러에 거래되는 덕분에 기업의 영리적 욕망을 부채질한다. 미해병대 출신이지만 다리가 마비되어 보행이 불가능한 제이크 셜리(샘 워딩턴)는 약 5년여 간의 수면우주비행을 거쳐 판도라 행성에 착륙한다. 그가 판도라 행성에 온 건 언옵타늄의 채굴과 관련해 과학자로서 핵심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중, 죽음을 맞이한 일란성 쌍둥이 형의 과업을 이어받기 위해서다.
그 과업이란 제이크 셜리의 일란성 쌍둥이형의 유전자를 판도라 행성의 원주민인 '나비(Na'vi)'족의 유전자에 결합해 만들었다는 ‘아바타’를 형과 유전자가 일치한 제이크 셜리에게 맡기는 것. 나비족의 주둔지에 매장된 막대한 언옵타늄을 채굴하려는 기업적 야심은 제이크 셜리에게 불구가 된 다리를 고칠 수 있는 수술비를 보장하며 그를 판도라 행성으로 이끌고 그에게 아바타의 육체를 입고 나비족의 본거지를 염탐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아바타에 접속한 제이크 셜리는 자신이 빌린 새로운 육체가 두 발을 땅에 딛게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흥분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발을 디딘 판도라 행성의 밀림에서 거대한 현지야생동물의 습격을 받게 된 그는 일행으로부터 낙오돼 죽을 고비를 맞이하지만 나비족 여성 네이터리(조 샐다나)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한다. 그리고 비로소 ‘생명의 나무’가 있는, 나비족의 본거지로 들어서게 된다.
친자연적인 노스탤지어 이미지
<아바타>는 분명 혁신적인 비주얼만으로도 그 가치에 대한 의심이 불필요한 영화다. 지금까지 '3D'라는 수식어를 걸고 등장한 기존의 작품들이 시도라는 단어 안에서 존중받아 왔던 것과 달리, <아바타>는 비로소 성과라는 단어를 동원해도 좋을만한 값어치를 드러낸다. 특히 오랜 시간 동안 스크린에서 3D비주얼을 실험하며 답보와 약진의 데이터를 구축해온 로버트 저메키스와 달리 제임스 카메론은 장고의 시간을 인내하며 단 하나의 결과물로서 온전히 새로운 토대를 구축해버릴 참이다. <아바타>가 새롭다는 수식어를 얻을 수 있는 근거는 이미지에 놓여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단지 그 이미지의 형태를 지칭하는데 국한되는 건 아닐 것이다. <아바타>의 세계관으로부터 거둬들일 수 있는 특별함은 그 외형적 디자인보다도 판도라의 대자연과 (유사인류 형태를 띤) 나비족의 내면적인 교감방식을 전시하는데서 비롯된다.
<아바타>는 디지털 네트워킹 시스템을 시냅스의 유기적 신호로 호환하며 창의적 소재와 친화적 주제를 동시에 납득시킨다. 판도라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의 나무’는 판도라의 메인보드이자 심장이다. 판도라의 대자연은 생명의 나무와 교감하는 방대한 네트워크 망이자 형광색 혈액이 흐르는 혈관으로 이어진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다. 판도라 행성의 식물과 대지는 마치 센서를 장착한 터치스크린처럼 외부의 접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때마다 LED조명에 가까운 선명한 조도를 밝힌다. 개체들의 반응은 서로를 연결한 네트워크를 통해 거대한 정보망을 구성한다. 형광 색채감을 드러내는 판도라의 야경은 시각적으로 황홀한 결과물이지만 그 조직적 체계를 완성한 아이디어가 보다 놀라운 산물에 가깝다. <아바타>는 창조와 응용이라는 창작적 협주로서 거대한 세계관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는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전율을 이루는 영화적 클라이맥스로 나아가기 위한 밑거름이나 다름없다.
현대적인 감각과 첨단 테크놀로지를 모티브로 디자인된 판도라의 풍요로운 원시림 이미지는 주제의식을 단단하게 매만지는 수단으로서 효과적인 역량을 발휘한다. 디지털 문명에서 비롯된 착상이 자연적 풍경과 접목됐을 때 발생하는 감상적 결과가 단순한 교훈적 주제를 순수의 경지로 이끌어낸다. 오만한 기계적 문명을 동원해 나비족의 자연을 파괴하고 유린하는 인류의 민폐는 판도라 행성의 풍요로운 대자연을 통해 더욱 날카롭게 두드러진다. 동시에 3D비주얼을 위시하는 기능적 이미지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기술적 발전을 과시하는 이미지 기술을 진정한 영화적 표현 방식으로서 영화에 녹여낸다는 점에서 더욱 선명한 성과가 드러난다.
자연친화적 노스탤지어, <아바타>는 노골적인 주제의식을 2시간 40여분의 러닝타임 동안 단순하고 명확하게 밀고나간다. 문명의 발전 속에서 영리를 추구하는 인류의 어리석은 욕망은 손쉽게 자연을 파괴하고 자신들의 주거지를 무덤으로 만들어나간다. <아바타>에서 인류는 점차 푸른빛을 잃어가는 지구를 떠나 새로운 외계 식민지를 개척하고 그곳에서마저 파괴를 일삼는 비루한 종족으로 묘사된다. 문명과 자연의 대비를 통해 인류의 오만을 지적하는 주제의식을 지닌 영화들은 <아바타>이전에도 차고 넘쳤다. 하지만 그래서 <아바타>가 상투적인 영화라고 확신하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단순하다’와 ‘엉성하다’의 의미는 명확히 다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바타>의 스토리텔링은 단순한 주제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는가라는 형태로서 이야기될 때 더욱 마땅한 평가가 가능해보인다.
휴머니즘을 역설하는 ‘아바타’ 세계관
<아바타>가 전시하는 판도라의 생태계는 사실상 지구의 생태계를 리모델링한 것에 가깝다. 그 이미지의 형태가 익숙한 것이라기 보단 그 이미지의 모티브가 명확히 읽힌다는 것이다. 다른 것을 보고 있지만 새로운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에 다다르진 않을만한 풍경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판도라는 지구의 ‘아바타’ 같은 행성이다. 사실상 <아바타>의 세계관 자체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토대로 구축된 ‘아바타’ 같은 세계관이며 이로서 <아바타>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거대한 우화로서 기능한다. 아바타의 육체를 빌어 가상의 세계로 로그인해 생소한 외계문명에 링크한 뒤 대자연의 정보를 공유하고 그 세계를 체험하는 제이크 셜리는 곧 관객을 위한 ‘아바타’이며 <아바타>라는 영화 자체가 이 세계의 발전적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한 ‘아바타’와 같은 영화인 셈이다.
<아바타>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모티브는 그 외형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기초적인 자의식마저도 이 세계와 연동돼있다. 제국주의 근대사를 비롯해 강자가 약자를 침탈하는 수난의 기록이 역사로서 당당히 자리한 인류의 서사는 <아바타>를 이루는 가장 명확한 근간일 것이다. 오랫동안 지속된 인류의 폐해적 역사를 2시간 40여분의 러닝타임에 반영한 <아바타>는 폭력적인 인류의 욕망을 고발하는 이미지와 그 욕망의 자멸을 그리는 내러티브로서 강한 공분과 희열을 전달한다. 나비족의 본거지를 무참히 파괴하는 인간들의 공세는 그 자체를 보는 관객의 마음을 짓이겨버릴 것이다. 판도라의 대자연이 붕괴되는 광경을 통해 관객은 인류가 저지른 침탈과 파괴의 역사를 환기시킬 것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단순하고 명확하게 의표를 찌른다. 후반부에 (아바타의 육체를 빌린) 제이크 셜리가 이끄는 나비족의 역공이 대단한 쾌감을 부르는 것도 그런 감정으로부터 연동된 상승효과다. 관객들은 자신들의 동족들의 죽음에 대단한 희열을 느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바타>는 인류의 자멸을 통해 인류의 휴머니즘을 역설하는 작품인 셈이다. 이미지의 혁명이란 수사는 실상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아바타>가 영화의 미래라 불릴만한 근거도 이 지점에 있다.
<아바타>의 스크린은 단순히 기술적 진화를 전시하는 윈도우가 아니다. <아바타>에 동원된 기술적 진화는 영화적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효과적 도구로서 제 위치를 확고히 지킨다. 이는 3D비주얼이라는 기술적 대안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 안에서도 발전적인 답변이다. 단순히 전시적 효과로서 위용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수단으로서 기능하는 3D비주얼은 분명 ‘영화적’이란 단어 안에서 충분한 가치를 설득한다. 물론 <아바타>는 단순히 체험적 행위만으로도 가치가 온당한 영화다. <아바타>에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건 그 대단한 수준의 체험이 숭고한 감정적 파고를 이끌어낸다는 점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바타>는 기술적으로도, 표현적으로도, 현존하는 3D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완성을 이뤘다 장담해도 좋은 첫 번째 성과다. 제임스 카메론은 로버트 저메키스가 결코 헤어나지 못한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의 무덤 옆에 자신의 비석을 세우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모션 퍼포먼스 캡쳐’라는 새로운 촬영기술을 도입해 완성했다는 <아바타>의 디지털 캐릭터들은 낯선 이미지를 통해 비현실적인 판타지의 상상력을 두른 채 실사적인 체험을 가능케 한다. <아바타>는 디지털 캐릭터의 눈동자에 감정을 구현했다. 실제 배우의 외모가 서린 동시에 나비족의 외형적 특성이 포장된 <아바타>의 디지털 외계인들은 선명한 눈동자의 자연스런 동공 수축과 근육 이완을 디테일하게 전시하며 이를 통해 관객의 감정을 고양시킨다. 그리고 그 디지털 캐릭터들의 눈망울은 <아바타>의 감정적 깊이를 드러내는 호수나 다름없다. 그 눈은 제임스 카메론을 테크놀로지의 장인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방점인 동시에 <아바타>의 기술적 진보에 진심마저 담아낸 진화의 산물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아바타>를 통해 우리가 두른 세계의 폐해를 진화시키고자 ‘아바타’와 같은 세계를 묘사하고 이를 통해 신인류의 탄생을 촉구한다.
<타이타닉>을 통해 자신을 세계의 왕이라 천명했던 제임스 카메론의 오만한 발언은 <아바타>를 거쳐 진정한 자신감으로 진화했다. <아바타>라는 결과물로서 자신의 왕좌를 증명해냈다. <아바타>는 분명 새로운 세기를 일군 영화적 유산이라 불릴 만한 작품이다. 장담하건대 분명 장차 그렇게 일컬어질, 21세기 고전이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