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은 노무현에 관한 영화이되, 노무현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노무현이란 말을 통해서 환기되고 복기되는 영화인 것 같다. 이 시대의 첨예한 갈등 한복판에 <변호인>이란 영화가 놓여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제작 초기부터 그리고 영화가 개봉된 지금까지도 <변호인>에 관한 말의 8할도 여기서 비롯됐다. <변호인>이 ‘노무현에 대한 영화’라고 알려지면서 이 영화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정치적인 영화로서 인식된다. 하지만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인 시절의 영화라기 보단 고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인 시절에 변호를 맡았던 부산 학림 사건, 흔히 말하는 ‘부림사건’에 관한 영화로서 설명할 때 보다 명확해지는 작품이다.
‘부림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평범한 독서모임을 운영하던 대학생들이 빨갱이 조직원으로 몰리면서 강제 연행되어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강제적인 자백을 실토한 뒤 재판에 회부됐고 이미 정해진 각본의 결말을 향하듯 일방적인 분위기로 강행된 재판 속에서 노무현을 비롯한 당시의 변호인단 3인이 조작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불공정한 재판에 항의했지만 부당한 형 집행이 이뤄졌다. 당시 구속된 22인 중에선 부산지역의 대학생을 비롯해서 교사와 직장인들도 포함돼있었는데 개중의 몇몇은 재판 당일에서야 처음 대면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서 활용했던 대국민 빨갱이화 조작 사건, 이른바 용공 조작 사건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바로 이 부림사건이다.
<변호인>이란 영화가 부림사건을 관통하며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국민과 국가의 관계란 일방적으로 충성을 바쳐야 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 “국민이 곧 주권이다.” 그만큼 국가라는 거대한 울타리를 사유화가 가능한 권력으로 인식하고 이를 남용하는 무리의 부조리한 행위에 대한 고발, 그것이 <변호인>의 주제의식에 가깝다. 사실 <변호인>이 공적인 사건을 환기시키는 묘사의 방식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다고 말하긴 조금 망설여진다. 다만 기본적으로 어긋나있지 않으며 명확한 정황을 되짚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선 나름대로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발화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 어쩌면 폭압적이고 몰염치한 권력의 시대에서 선악의 구도가 명백한 탓에 그 균형 자체를 담아낸다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대에 죄를 물을 순 없겠지만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이해도 필요한 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제대로 작동시키는 건 송강호라는 배우 자체의 존재감이다. 아마 <변호인>은 올해 개봉된 <더 테러 라이브>, <집으로 가는 길>과 함께 배우의 연기력이 영화의 완성도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를 논하기 적절한 사례로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지난 12월 18일에 개봉된 <변호인>은 개봉 첫 주에 약 500여 개의 스크린을 확보했고 관객 170만 명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개봉 전부터 개봉관 확보에 대한 걱정을 비롯해서 흉흉한 소문이 돌았던 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영화에 관해서 할말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포털사이트의 평점에선 양극화된 싸움이 한창이었다. 1점 아니면 10점. 절대적인 지지와 절대적인 반대가 맞서는 극단적인 대치 상황. 영화에 대한 감상과 무관한 자기 선언. 이는 바로 우리 사회의 갈등 국면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바로미터나 다름없다.
<변호인>을 관통한 스크린 밖의 관객들의 감상은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 안에서 영화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보다 단단해지는 인상이다. <변호인>에 대한 감상의 방향이 실화 자체가 지닌 가혹함에 대한 분노 이상으로 작금의 현실에 대한 호소나 공감으로 확장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아닌 하나의 상징으로서 권장하거나 부정해야 될 무언가가 돼버린 인상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 간의 싸움 안에서 <변호인>은 뜨거운 감자가 되는 것 같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변호인>에 대한 관람 여부를 선거 운동하듯 알리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는 건 시대적인 정의 그리고 보편적인 상식에 가깝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영화를 ‘노무현에 관한 찬양’이라며 힐난한다. 한편에선 우리가 꼭 봐야할 영화라며 호소한다. 한편에선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면 종북세력이 된다. 한편에선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몰락에 기여하는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호도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그저 한편의 영화가 아니다. 지금 현실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증명하기 위한 필사적인 도구인 셈이다. 자신의 블로그에 <변호인>에 관한 리뷰를 남긴 영화평론가 이동진을 향해서 비판적인 댓글이 달렸다.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인 입장이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댓글을 남긴 이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란 의미일 테다. 그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그저 영화가 아닌 셈이다.
심지어 다른 한편에선 영화를 관람하지 않고도 싸지를 수 있는 촌평이 쏟아진다. 심지어 ‘공산주의 혁명을 기도했던 반국가 범죄사건’에 대한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위인도 등장했다. 시절이 하수상한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하수상하지 않았던 시절이나 있었는지 눈과 귀를 의심할만한 작태들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커밍아웃하는 시대에서 <변호인>과 같은 영화가 돋보이지 않고 배길 수나 있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변호인>을 돋보이게 만드는 건 여전히 스스로 불신의 탑을 쌓고 자신만의 국민을 보호하는 공권력이고 그 공권력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과 수익을 보장받는 보신주의자들의 파렴치한 행태에 있다. <변호인>과 그 주변반응을 ‘노무현의 영화’를 두고 벌어지는 갑론을박에 대해서 친노와 일베의 갈등으로 일반화시키는 것 역시 그리 적절한 태도인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를 둘러싼 공기는 생각 이상으로 포괄적이고 상징적이다. 그냥 이 시대 자체의 양상처럼 보인다.
<변호인>은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시대를 잘 만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하수상하다 못해서 보고 듣고도 의심할만한 일들이 시시때때로 눈과 귀를 바늘처럼 찌르고 들어온다. 하지만 <변호인>이 잘 만날 시대가 하루 이틀이었나. 아마 한반도에 대한민국이라 칭하는 국가가 세워진 이래로 <변호인> 같은 영화가 개봉하지 못할 만큼 무기력한 시대만 아니라면 이 영화를 흥행시킬 시대는 적지 않았다. 다만 그런 시대가 21세기를 넘어선 지금에서도 머리를 들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놀라울 뿐이다. 민주주의를 천년왕국 정도로 해석했던 이들에겐, 정치라는 것이 대단히 불쾌한 술자리 대화 소재로 인식했던 이들에게도 충격과 각성을 준다고 말하는 시대에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정말 대단한 흥행 요건을 갖춘 상업영화일수밖에 없다. 이 영화가 시대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시대가 이 영화를 떠받들게 만든다. 시대는 보다 우울해지고 있다. 그만큼 관객은 더 들 것이다. 이것도 다 ‘놈현 탓인가?’ 무서워서 대통령 욕도 하기 힘들어진 작금의 시대 탓이라고 여겨지는 건 그저 오해인가?
‘그래, 네가 보고 싶은 게 이런 거지?’란 식으로 시작해서 결국 ‘자, 이래도 네가 보고 싶은 게 맞아?’란 식으로 끝난다. 그리고 결론은 결국 다음 기회로. 어쨌든 지난 ‘서’와 ‘파’가 <에반게리온>을 리빌딩한다는 목표 안에서 기존 세계관을 분리하고 재배열하는 작업이었다면 <에반게리온:Q>는 새로운 리빌딩 소스를 장착하는 작업에 가깝다. 다만 기존의 세계관 말미에서 드러났던 안도 히데아키의 분열과 자폐 증세는 막바지로 치닫는 이번 작품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다만 기존 시리즈와 같이 자폭으로 치닫기 보단 확실한 이미지로서 세계관의 종말 혹은 구원을 그려내겠다는 완결적인 의지가 보인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메카닉 떡밥을 줄줄이 날려대면서도 소통의 벽을 쌓은 팬덤에 대한 멸시적인 시선도 엿보인다. 기본 작품과의 궤에서 대단히 벗어나고 있음에도 평행우주와 같은 맥락임을 주장하고 싶게 만들 떡밥도 대거 등장한다. 기존 작품의 세계관을 초월하는 동시에 그 세계관의 관성을 고스란히 품었다. 어쩌면 이번 리빌딩 시리즈에 대한 안도 히데아키의 의지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참고로 Q는 Quickening, ‘되살아나게 하는’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결국 안도 히데아키의 ‘완결보완계획’은 성사될 수 있을까. 결말편이라 알려진 <에반게리온: | |>를기다리는수밖에. 그놈의, 서비스! 서비스!
<킬링 소프틀리>는 오바마의 연설로부터 시작된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아니라 2008년 부시 정권 말기에 공화당의 대선 후보 존 맥케인과 경합을 벌이던 민주당 대선 후보 오바마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이어지는 내내 조지 부시 미국 전대통령이나 오바마, 미국 전 재무부 장관 헨리 폴슨과 같은 정치인들의 연설이나 발언이 심심찮게 귀를 파고 든다. 만약 당신이 브래드 피트가 출연하는 하드보일드한 킬러물 정도를 예상하고 상영관을 찾은 관객이라면 이미 예사롭지 않은 오프닝 시퀀스만으로도 기대가 빗나갔다는 예감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
브래드 피트의 베니스 남우주연상 수상작인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을 연출한 감독 앤드류 도미닉은 조지 히긴스의 1974년작 범죄 소설 <코건의 거래 Cogan’s Trade>을 모티프로 <킬링 소프틀리>를 구상했다고 한다. <코건의 거래>와 <킬링 소프틀리>의 이야기 줄기는 유사하다. 보스턴의 도박장에 들이닥친 강도로 인해서 얻은 손실의 책임자를 가리기 위해서 갱단은 전문적인 해결사 즉 킬러를 고용한다. 문제는 이미 한차례 그 강도질을 벌였다가 용서받았던 이가 갱단 내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해결사로 고용된 킬러 잭키 코건(브래드 피트)의 논리는 이렇다. 도박장을 턴 강도에게 책임을 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사태가 반복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이가 있다는 것.
<킬링 소프틀리>의 서사는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경제가 붕괴된 부시 정권 말기의 미국 사회다. <코건의 거래>가 발표된 시기는 미국 경제 공황의 여파가 한창이던 1974년이다. <코건의 거래>가 <킬링 소프틀리>만큼이나 경제적인 위기 상황을 직설적으로 가리키는 작품처럼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원작과 영화는 킬러물이란 장르적 속성을 공정한 거래와 자본주의적인 계급 사회를 은유하는 그릇으로 삼고 있다. 무엇보다도 <킬링 소프틀리>는 확실히 그렇다. 코건은 도박장을 턴 범인만큼이나 그 범죄 행위를 따라 하게 만든 주범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한다. 경제 위기 발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경제범들이 제대로 된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평가됐던 지난 서브 프라임 사태가 연상되지 않나?
오바마와 부시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연설이나 발언들은 영화의 극적인 상황을 입체적으로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처음으로 인물이 등장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미국인의 비전을 웅변하는 오바마의 대선 출마 캠페인 연설이 오버랩되는 것부터 영화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형태나 인물의 행위와 맞물릴만한 음성이 마치 주석처럼 따라붙는다. 이는 은유인 동시에 장치적인 위트다. 킬러들의 행위가 자본주의 국가의 행태와 유사하게 어울려 보이도록 설계된 은유인 동시에 인물의 행위를 반어적으로 설명하는 위트의 장착에 가깝다. 이를 테면 카페에서 코건이 남겨놓은 팁을 가로채려는 뚱뚱한 하수인에게 “팁을 내려놔. 이 멍청하고 무능력한 돼지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TV 속의 부시는 말한다. “미국의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유능합니다.”
물론 <킬링 소프틀리>는 하드보일드한 영화다. 도박장 강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레이 피오타가 연기한 마키가 갱단에게 떡이 되도록 맞는 신에서 1인칭과 3인칭을 오가는 시점숏을 통해 사실감 있는 구타 장면을 감상하게 만드는 등 생생한 폭력성을 체감할 수 있는 신이 더러 존재한다. 반면 고속촬영을 통해서 그 폭력성에 극단적으로 반할 정도로 우아하게 완성된 코건의 총격 암살 신은 아이러니할 정도로 우아하다. 흥미로운 건 이 폭력적인 장면의 대립적인 체감이 코건의 의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암살을 생각했을 뿐, 린치를 가하며 책임을 규명하길 원하지 않았던 마키의 구타 신이나 직접 암살을 시도할 의사가 없었던 최후반부의 살인 신의 사실적인 폭력성과 반대로 그가 스스로 계획하고 주도한 중반부의 총격 살인 신은 그야말로 ‘소프틀리’하게 묘사된다. 그가 킬러로서 추구하는 타이틀처럼 말이다. 영화 곳곳에서 들려지는 반어적인 BGM도 흥미롭다. 조니 캐쉬, 케니 레스터 등 평온한 감성이 깃든 고전 팝들이 극의 분위기와 대비될 때 발생하는 아이러니는 지독한 농담 같기도 하다.
브래드 피트의 레더 재킷과 대비될만한 수트 착장으로 일관된 리처드 젠킨스를 비롯해서 제임스 갠돌피니와 레이 피오타 등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은 물론 극 초반을 이끄는 스쿳 맥네어리와 벤 멘델슨 콤비 등 배우들의 열연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그 끝에 다다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는 브래드 피트와 리처드 젠킨스의 관계는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사회를 채운 화이트 칼라와 블루 칼라의 대비적 상징으로 읽히는데 결말부에 다다라 명확하게 정리되는 브래드 피트의 대사를 통해서 이 영화에 첨언된 정치적 코멘트들의 역할이 명징하게 와닿는다.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사가 울려 퍼지는 바에서 펼쳐지는 엔딩신은 인상적이다. “저 자식은 우리가 한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지. 하지만 난 미국에서 살고 있어. 미국에선 저마다 자기 앞가림을 해야 한다고. 미국은 국가가 아니라 그냥 비즈니스지. 그러니까 내 돈을 뱉어내!” 그러니까 이 영화는 미국 영화다. 미국을 까는 것도, 지지하는 것도 아닌, 미국이란 비즈니스 브랜드 그 자체에 관한.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패이보릿 미드로 알려진 <홈랜드>는 이라크 파병 중에 실종되어 사망 처리된 미군 병사 니콜라스 브로디 하사(데미안 루이스)가 이라크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미군들에게 발견되어 8년 만에 고국에 귀환하며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사건은 세 개의 축으로 나뉜다. 갑작스럽게 구조된 브로디의 정체를 의심하는 CIA의 정보원 캐리 매티슨(클레어 데인즈)이 그를 감시하기 시작하며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가 큰 줄기를 이루는 가운데, 브로디가 자신의 죽음에 익숙한 삶을 살아오게 된 아내와 자녀들과 겪게 되는 충돌과 갈등,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온 브로디 자신의 혼란이 주변부의 줄기를 이룬다.
무엇보다도 <홈랜드>에서 가장 큰 흥미를 유발하는 건 브로디의 정체다. 알 카에다 조직의 수장 아부 나지르를 추적하는 캐리는 테러리스트 조직인 알 카에다에게 납치된 뒤, 8년 만에 생환하며 미국의 자랑스러운 영웅으로 추앙 받는 그의 기적적인 생환을 기이한 징후로 지목하며 불법적인 도청과 감시 행위까지 불사한다. <홈랜드>의 묘미는 거기 있다. 캐리의 의심스러운 시선과 함께 에피소드를 거듭할수록 선명해지다가도 흐릿해지길 반복하는 브로디의 정체로 인해서 혼선을 거듭하는 상황이 흥미를 자아낸다. 가장 큰 백미는 캐리와 브로디의 관계에 있다. 완벽하게 괴리돼 있던 두 인물의 관계가 우연한 접점을 통해서 급속하게 근접해지는 과정을 통해서 <홈랜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떠밀려간다.
<홈랜드>로 인해서 <제로 다크 서티>를 떠올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군사 작전을 수행하기 가장 좋은 자정 이후 즉 ‘00시 30분’을 지칭한다는 의미의 <제로 다크 서티>는 네이비 씰이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을 펼쳐지기까지의 과정을 다루는 팩션이다. 사실 빈 라덴의 사살 이전에 픽션으로 기획됐다가 제작 도중 빈 라덴이 실제로 사살당하자 시나리오를 수정해야 했던 <제로 다크 서티>는 러닝 타임의 팔 할을 빈 라덴을 찾아내기 위한 CIA 요원들의 분투와 고뇌에 할애한다. <제로 다크 서티>의 하이라이트인 결말부의 빈 라덴 사살작전 신을 보기 위해선 2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물론 보이지 않는 유령과도 같은 적의 몸통을 찾고자 불법적인 고문까지 자행하는 CIA 요원들과 끊임없이 꼬리를 끊고 몸통을 감추는 빈 라덴의 숨바꼭질을 지켜보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실패의 연속 안에서도 끝까지 빈 라덴의 실체를 쫓는 마야(제시카 차스테인)의 피로감과 좌절감은 되레 병적인 집착으로 이어진다.
9.11은 미국인에겐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공포처럼 보인다. 아론 소킨의 각본으로 유명했던 미국 케이블 채널 뉴스 보도국의 뉴스 제작기를 그린 미드 <뉴스룸>은 7번째 에피소드에서 빈 라덴 사살 작전에 관한 첩보를 보도하는 과정을 다룬다. 흥미로운 건 그 끝무렵이다. 결국 그 첩보가 팩트로 확인되자 그 이성적인 보도국 일원 전체가 환호하는 광경에서 확인되는 건 뼛속까지 깊게 서린 9.11에 대한 체증이다. 빈 라덴의 사살은 그야말로 미국인 전체를 위한 살풀이였던 셈이다. 포스트 9.11에 관한 이야기가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도 그런 현실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것이 단순히 어떤 소재거리 이상의 현실성을 환기시키는 것도 그것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심리를 품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홈랜드>와 <제로 다크 서티>는 미국인들에게 최고의 안전지대라고 여겨졌던 미국의 심장부가 타격 당한 이후로 겪은 공황을 다룬다. 세계인들에겐 영화를 뛰어넘는 현실이었던 9.11 테러의 이미지는 미국인들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 이상의 질환이 됐다. 두 작품은 바로 현재 미국의 심리를 대변하는 바로미터에 가깝다.
그런 현실 속에서 미국에 뿌리 깊은 공포를 주입한 테러리즘의 수장을 잡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는 마야와 캐리는 실체가 보이지 않는 공포와 그로 인해 축적된 피로에 시달린 미국 사회의 잠재된 심리를 대변하는 육체에 가깝다. 흥미로운 건 두 작품이 그 심리의 그릇으로 여성의 육체를 빌리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두 여성은 각자 알 카에다의 수장인 빈 라덴과 아부 나지르를 쫓으며 병리학적인 강박 증세를 드러낸다. 그리고 강인하고 단단한 남성적인 심리보단 섬세하고 예민한 심리로 보다 첨예하게 날을 세운 심리를 묘사하는데 더욱 효과적인 여성의 육체는 첨예해진 미국의 심리를 담아내기 좋은 그릇으로서 손색이 없다.
캐리가 쫓는 아부 나지르는 포스트 ‘빈 라덴’에 가깝게 설정된 알 카에다의 수장이다. <홈랜드>는 완전한 픽션이고, <제로 다크 서티>는 현실에 기반한 팩션이란 말이다. 하지만 엄밀히 두 작품의 현실성은 거의 흡사해 보인다. 9.11 테러 장면에서 시작되어 빈 라덴을 추적하는 <제로 다크 서티>만큼이나 아부 나지르를 쫓는 <홈랜드> 역시 여전히 테러에 대한 공포와 피로가 적지 않은, 현재진행형인 미국 사회의 포스트 9.11 증후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까닭이다. 브로디의 정체를 의심하는 캐리가 상부의 허가도 받지 않고 독자적인 판단으로 그의 신변을 감시하는 과정은 점차 그녀를 궁지로 몰아간다. 그 과정은 시청자의 입장에서도 의심스럽게 비춰지기 마련인데 그녀의 추측이 대단히 얕은 단서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는 9.11 테러 이후로 미국인들의 심리에 깊게 내려앉은 공포와 방어적인 심리를 극단적으로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점차 그 실체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그 불안한 심리에 대한 어떤 비판 의식도 수용할 수 없게 만든다. 마치 좀처럼 빠져 나오기 힘든 미궁에 갇힌 것처럼 그렇다.
<제로 다크 서티>는 허무에 가까운 물음을 남긴 채 마무리된다. 결국 빈 라덴을 잡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마야는 그 성과 앞에서 환호를 지르기 보단 길 잃은 표정을 짓고 끝내 눈물을 흘린다. <홈랜드>는 <제로 다크 서티>가 주지 않은 답변 혹은 닿을 수 없었던 결론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끝내 아부 나지르를 찾아내고 사살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위협은 끝나지 않았다. 빈 라덴은 죽었지만 미국의 전쟁은 여전히 도처에서 펼쳐지고 있다. 위협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은 여전히 공격받고 있다. 공격받을 것만 같다. 불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결코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그 복잡한 미로를 헤쳐 나왔던 캐리는 다시 출구라고 믿었던 곳이 입구임을 깨달았고, 브로디의 여정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들어섰거나 어쩌면 다시 원점으로 끌려온 것만 같다.
미국의 전쟁은 이제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돼버렸다. 미국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이 누가 시작한 전쟁인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어찌됐건 막아야 하고, 멈출 수 없는 싸움이 된 것이다. 빈 라덴의 주검을 확인한 마야는 사실 누구보다 명확하게 자신이 돌아갈 곳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지난한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았을 것이다. 그 허무가 지난 날의 고통을 되레 명징하게 되살렸을 것이다. 그녀의 눈물은 여전히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포스트 9.11 시대의 나침반과 같다. 그리고 <홈랜드>는 올해 9월에 시즌 3로 되돌아온다. 이 피로와 공포는 보다 오래갈 것이다. 앞으로도 현실의 브라운관이나 영화 속 스크린으로 그들의 전쟁을 계속 지켜볼 가능성이 여전히 다분하다는 이야기다. 혹은 그 전쟁으로 세상이 멸망하거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때가 되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처럼 따져 묻지 않는다. 그건 마치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이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 대항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이 공명정대하고 명확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따져 물어야 한다. 하지만 역시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바로잡겠다고 나설 때엔 그만한 각오가 필요한 법이다. 어쨌든 아나키스트, 즉 무정부주의자란 말은 있어도 무정부인, 비국가인이란 말은 없지 않은가.
<남쪽으로 튀어>는 오쿠다 히데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둔 작품이다. 그리고 원작처럼 어느 아나키스트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소설과 달리 아들의 1인칭 시점 대신 객석의 시점과 동일한 3인칭 시점으로 영화를 목격하게끔 만든다. 국민 같은 거 하지 않겠다며 주민등록증은 찢어버린지 오래이고, 당연히 세금도 내지 않는 최해갑(김윤석)은 <남쪽으로 튀어>의 핵심이다. 그는 이 영화가 존재하도록 이끄는 필요조건 같은 존재다. 무정부주의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연출하는 그는 한량과도 같지만 불의 앞에선 불처럼 뜨겁다. 그럼에도 최해갑 못지 않은 운동권 경력을 자랑하는 그의 아내 안봉희(오연수)는 그의 이상을 응원하는 강력한 아군이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이런 면모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하지만 미워하진 않는다.
<남쪽으로 튀어>는 일종의 계몽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 같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우화다. 최해갑의 삶은 객석을 찾은 관객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생경한 태도에 가까울 게다. 이는 단순히 캐릭터가 지닌 고차원적인 이상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태도로서 드러나는 삶의 방식이 그렇다. 누구나 불만을 가질 수 있지만 결코 실행할 수 없는 행위들을 최해갑은 한다. 불합리한 시스템의 오류를 순응하며 편하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달아난다. 엄밀히 말하자면 최해갑이 선택하는 삶의 방식이란 자립에 가깝다. 투쟁이나 싸움이라기 보단 체제로부터의 독립이자 현대적인 사회제도로부터의 자립을 의미한다.
<남쪽으로 튀어>는 사실 그러한 삶이 행복하다고 설득할 수 있다면 보다 나은 영화다. 하지만 영화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때때로 그러한 삶이 국가관에 길들여진 대부분의 삶보다 나아 보이고 행복하게 다가오는 풍경들이 목격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태도를 제시하고 권유하기 보단 일종의 전시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치열한 현실감보단 현실성을 염두에 두고 그린 이상에 가까워 보인다. <남쪽으로 튀어>가 계몽적인 영화라기 보단 우화에 가깝다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에 밀착하는 대신 현실을 연상시키는 어떤 상황들을 수집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기워 넣는다. 수집된 상황들은 대부분 권력화된 정책과 제도 안에서 발생하는 갖은 불합리들이다. 최해갑은 이에 저항한다. 그 저항은 대부분 통쾌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영화는 웃고 있지만 사실상 씁쓸한 이야기다. 영화는 나름대로 긍정적인 인상을 유지하지만 영화가 전시하는 비극의 강도는 사실상 현실의 파괴력을 따라잡지 못한다. 쉽게 말하자면 <남쪽으로 튀어>는 현실보단 이상으로 기운 영화다.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캐릭터의 결기를 지켜보는 재미는 유쾌하지만 사실상 영화가 제시하는 청사진이란 그리 희망적인 인상이 아니다. 현실에서 얻어지는 무력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감상 또한 영화와 완벽하게 밀착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쪽으로 튀어>는 대한민국 국민 엄밀히 말하자면 서민들의 불만과 분노의 뿌리를 살피는 진단으로서 유효하다. 좀처럼 명확한 출처를 규정하기 어려워서 막연하게 분노를 삭히고 현실에 수긍하듯 살아가는 당신에게 어떤 근거들을 제시한다. 선동하기 보단 자각하게 만든다. 물론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자각해온 이들에겐 빤한 난장처럼 보일 가능성도 농후하지만.
확실히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한 영화다.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지닌 아나키스트 최해갑을 연기하는 김윤석의 캐릭터 소화력과 담담하고도 결연하게 최해갑을 내조하는 안봉희를 소화해내는 오연수의 의외성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역 배우들의 기똥찬 연기는 물론. 이처럼 저마다 살아있는 캐릭터들은 영화가 다루는 날선 소재와 논조를 유쾌하게 중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많이 하지. 내가 몇 년 전에 다신 연기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처럼.” 4년 전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랜 토리노>가 배우로서 출연하는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 말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그런 선언을 거짓말로 둔갑시킨 작품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에서 메가폰을 잡은 건 로버트 로렌즈다. 그의 첫 연출작이다. 로버트 로렌즈는 긴 시간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함께 했다. <블러드 워크>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랜 토리노> 등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을 제작하고 기획하며 파트너로서 긴 시간을 공유해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다시 카메라 앞으로 불러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덕분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평범한 드라마다. 늙어가는 한 남자와 그 주변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비범성의 여부와 무관하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상만으로 유사하게 읽히는 작품이 있다. <그랜 토리노> 말이다. <그랜 토리노>와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늙어감에 관한 영화다. 노인에 관한 영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얼굴을 빌린 두 노인은 완고하다. 자기 고집을 좀처럼 꺾지 않는다. 물론 <그랜 토리노> 쪽의 노인이 보다 그렇다. 어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최근 배우로서 남긴 인상이란 그런 것이다. 두 영화 속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캐릭터와 밀착하는 건, 마치 그의 전기적인 캐릭터처럼 보이는 건 당연하다.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처럼 어차피 그 역시 늙어가는 처지니까.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결국 어떤 퇴물에 관한 영화다. 오랫동안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로 일해온 거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점차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구단주의 주변엔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망주를 발굴하는 스카우트 일을 이어나가기엔 그가 너무 늙었다고 말하는 이가 생겼다. 무엇보다도 그의 방식이 낡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그 일에 매진한다. 노구를 끌고 먼 길을 운전해간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낡아가고 있다.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치명적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딸 미키(에이미 아담스)는 자신의 중요한 커리어를 뒤로 밀어내고 아버지의 길을 따라 나선다. 오랫동안 반목하고 지냈던 부녀는 그 길을 함께 하며 갈등과 화해를 경험한다.
빤한 이야기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나 늙어가고, 퇴물이 된다. 빠른 구속을 자랑하며 자신만만하게 직구를 뿌리던 영건도 어느 순간 정교한 제구와 볼컨트롤에 기대어 맞춰 잡는 노장이 돼야 한다. 새까만 후배가 자신의 마운드에 올라와서 자신을 불펜으로 밀어내는 과정을 언젠가 감내해야 한다. 사람들은 젊다는 것에 투자하길 꺼리지 않는다. 반대로 늙었다는 것에 포기하는 것도 당연하다 믿는다. 관록이나 지혜라는 말은 다 풀려버린 두루마리 휴지의 중심을 지키고 있던 봉처럼 유용하게 느끼질 않는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그런 노인의 지혜와 관록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빤한 선악 구조를 내세운다. 패기만만한 젊은 야심가의 빤한 수를 장외로 날려버린다. 역전타가 선명하게 예상되는 구조다. 그럼에도 이 빤한 경기를 종종 비범하게 지켜보게 만드는 건 타석에 들어선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이글거리는 눈빛과 타 들어가는 듯한 음성, 80세가 넘은 나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정도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박력은 대단하다. 주름 하나마다 박력이 새겨진 기분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우리가 아는 병약한 노인들과 조금 다른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런 인물이 자신의 분야에서 퇴물로 내몰리는 상황을 본다는 건 그래서 더욱 슬픈 일이기도 하다. 육체의 노쇠와 함께 반비례하게 축적되는 경험 속에서 익어가는 지혜를 팔 곳이 없다. 퇴물이 되어 세상으로부터 퇴장한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여겨진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에서의 거스 또한 그런 전철을 밟고 있다. 하지만 그런 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증명해낼 뿐이다. 아직 자신의 지혜는 쓸만한 것이라고. 거스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공을 쳐내는 배트 소리로서 구질과 배트 스피드를 파악해낸다. 거짓말같다.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결국 오랜 세월을 그 현장에서 자리하고 지켜본 전문가의 관록이 만들어낸 유산이다. 거짓말 같은 그 연륜은 결국 세월을 소모하지 않고선 얻을 수 없는 어떤 노인만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 노인은 결국 이를 증명한다. 영화 속에서만큼은.
모든 노인이 깊은 지혜와 연륜을 품고 살지 않는다. 중요한 건 결국 자신의 경험 안에서 인생이 무르익어간다는 사실일 거다. 결국 퇴물이 되어 세상의 뒷방으로 밀려날 때 그런 가치나마 손에 쥐고 있지 못하면 다시 세상으로 떠밀려나올 기회마저 상실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나 <그랜 토리노>는 결국 노인들에 대한 영화라기 보단 어떤 노인에 관한 영화다.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온 이에 관한 이야기다. 단지 늙어간다는 것을 노스탤지어로 치환하지 않는다.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건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그는 결코 초라한 노인의 얼굴로 관객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여전히 박력이 넘치는 인상으로 노인에 대한 일방적인 편견에 마주선다. 퇴물이 되어가는 과정 또한 묵묵하게 살아간다. 마치 원래 알았다는 듯이, 그리고 끝내 퇴물로서 멋지게 살아가는 과정을 제시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와 같이 빤한 드라마에 비범한 인상을 새겨 넣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상엔 노인을 위한 변명은 없다. 그것이 그 지혜와 연륜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여생을 지켜보고 싶게 만든다. 마치 이 빤한 드라마를 신중하게 지켜보게 만드는 것처럼.
솔직히 촌스럽다. 웃기고 울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찰나가 그런 정황 속으로 끼어들어가도 될 거라 판단한 연출적 감이 기가 막힌다. 말 그대로 그냥 웃기고 울리는 순간을 나열하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촌스러움이 <타워>를 붕괴시키는 한방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와 완성도 높은 CG가 이런 단점을 상쇄시킨다. 거대한 주상복합주택의 화재 안전성은 현재에도 여러 차례 제기되고 있는 문제라 CG의 완성도로 인해서 보다 현실적인 공포로 치환된다. 고의적인 악역의 설정도 눈에 빤하지만 우리네 일상에서 마주치는 파렴치한들의 수준이 그만한 것이라 딱히 뭐라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어쨌든 인재에서 비롯된 거대한 재난의 수순은 인정할만하다. 재난의 이미지는 완벽하고 그 안의 끔찍한 그림도 여럿이라 붕괴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결말부까지의 참혹함은 진짜처럼 와 닿는다. 다만 한강 너머에서 바라보이는 여의도의 타워 스카이는 사실 누가 봐도 9.11의 유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같아서 남의 비극을 상업의 도구로 활용한 것 같다는 일말의 거부감도 든다. 그 이미지를 권유할 마음도 없지만 말릴 마음도 없다.
상대적으로 뼈를 드러내며 시작하는 원작의 서사가 강렬한 건 부인할 수 없다. 서사의 축약을 위해 순행으로 전개를 수정한 건지 모르겠지만 가공할 떡밥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점에서는 아쉽다. 삼각관계에서 빚어지는 심리적 갈등과 충돌로 발생하는 긴장감은 원작에 비해서 사유화되는 인상인데, 이를 테면 원작은 은교에 대한 두 남자의 감정 발화가 서로에 대한 견제와 의식을 통해서 발전되는 인상인 만면, 영화는 그것이 단순히 나이가 다른 수컷들의 롤리타적 욕망으로 제한하듯 그려진다. 형태는 남아있는데 핵심이 떨어져나갔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이적요 역할의 박해일은 열심히 했다. 톤이 나쁘지도 않다. 다만 70대 노인을 연기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깝게 들리는 성대 묘사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김무열의 서지우는 감정을 좀 절제할 필요가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리고 그 어떤 결점과 무관하게 신인 배우 김고은은 지우기 힘든 인상을 남긴다. 동물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신인배우의 출연이란 점에서 귀추가 주목된다.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는 신용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파산을 방조하는 사회의 방치 속에서 파멸하고 유령이 되어버린 어느 개인이 위장을 통해서 삶을 갱신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끝내 괴물이 되어버린 것을 발견하게 되는 미스터리 추리물이다. 이는 단지 일본 내의 문제가 아닌 자본주의 신용 사회로 접어든 한국의 문제이기도 한데, 변영주 감독의 <화차>는 이에 대한 서술을 간결하게 다듬고 미스터리 추리물이라는 장르적 밀도를 높이는데 각색을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캐릭터 설정과 관계에 작은 변주를 가하지만 전반적으로 원작도 살고, 영화도 사는 인상이다. 자욱한 미스터리의 지배력이 느껴지는 가운데, 결말부에 다다라 보다 강도 높은 서스펜스의 정곡을 찔러 넣고 끝내 페이소스의 잔해를 드러낸다. 과감한 각색과 심도 있는 연출이 돋보인다. 끔찍하고, 처참하며, 처연하다.
브라이언 셀즈닉의 <위고 카브레>를 영화화한 마틴 스콜세지의 <휴고>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영상 수준이었던 영화에 예술적인 숨결을 불어넣은 진정한 영화의 창시자 조르주 멜리에스에 관한 영화다. 3D영화라는 현대적인 매체를 통해서 영화의 기원이 된 뤼미에르 형제의 그 영상을 비롯한 무성영화의 레퍼런스들을 목도하는 건 대단히 놀라운 체험이다. <휴고>는 강요에 가까운 예찬 대신 영화에 대한 애정과 경의를 담아 당신을 영화라는 세계로 인도하려 한다. 3D영화로서 최상의 기술적 완성도를 자랑하고, 텍스트와 삽화로 이뤄진 원작을 영화로서 승화해내는 이 작품이 영화라는 예술 자체에 대한 오랜 역사를 성실하게 기술하는 동시에 그 자체의 의미를 온전히 전달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영화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고전의 발굴과 복원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며 끊어진 영화의 역사를 이어나가는 마틴 스콜세지는 <휴고>를 통해서 영화 그 자체를 오마주한다. 거장의 진심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