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적인 동성애 영화로 알려진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그 어떤 멜로보다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러브스토리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지독한 멜로물입니다. ‘이별을 통한 소녀의 성장통’이란 식으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건 영화가 끝날 무렵까지 그 이별이 성장으로 해소되기 보단 통증으로 내려앉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은 길에서 마주쳤던 엠마(레아 세이두)와의 우연한 재회를 통해서 예상하지 못했던 체험들을 거듭해나갑니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은 물론 아티스트로서의 미래로 나아가는 엠마와 그 주변부의 삶에 종속되기 시작하면서 삶이 예상 밖의 궤도를 돌게 되는 셈이죠.
단순히 성정체성을 깨닫는다는 것 이상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저편으로 나아가버리는 셈이에요. 결과적으로 아델에게 있어서 엠마와의 이별이란 감정적인 단절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기회와의 단절로도 이해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죠. 그만큼 이별이라는 진통은 아델의 삶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절망이자 비통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신이 보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저편까지 나아가 그 일상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 원점으로 튕겨져 추방돼버린 셈이니까요.
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히 좋습니다. 특히 아델 역을 맡은 아델 엑사르코풀로스는 전반적으로 영화의 서사와 함께 인상이 변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인데 이별 이후의 감정적 진폭을 드러내는 후반부의 연기는 정말 연기가 아니라 실제라고 믿어질 만큼의 감정적 몰입도를 보여줍니다. 충동적인 계기로 맞닥뜨린 이별에 의한 심적인 고통이 스크린 밖으로도 절절하게 전이되는 기분이죠. 게다가 그 반대편에 선 엠마 역을 맡은 레아 세이두는 거대한 감정적 파고를 형성하는 매개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이별 이후에 남게 되는 애틋함 같은 감정의 끈을 놓지 않음으로써 극적인 페이소스를 극한으로 끌어올립니다. 두 배우의 화학작용 자체가 이 영화의 감정을 입체적인 구조로 이끌어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 영화가 화제가 된 건 대단히 수위가 높은 여성간의 섹스신이 긴 분량으로 등장한다는 점이었죠. 그런데 대단히 적나라해서 한편으론 담담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은밀하고 농염한 연출을 위한 카메라 앵글이 동원되기 보단 사물을 관찰하듯 평범한 프레임 안에서 행위가 목격되는 인상입니다. 오히려 저는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무언가를 먹을 때 보는 이의 욕구를 건드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토마토 파스타를 너무나 맛있게 먹는 장면에선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느낌이기도 했죠. 색욕보다도 식욕이 강렬하게 느껴진다니 좀 묘하지 않습니까? 그건 아마 이 영화가 섹스신을 특별한 영화적 체험처럼 위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동성애라는 소재는 이 영화의 주요한 키워드가 될 뿐,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사안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결말부에서 묘사되는 찰나의 엇갈림을 보면서 ‘운명’이란 단어에 설득 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뒤바꿀 수 없는 결과를 등 뒤에 두고 터벅터벅 걸어가야 하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끄덕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델의 뒷모습을 비추는 엔딩시퀀스의 롱테이크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건 그래서입니다. 그 너머의 삶에 대해서 염려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걸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죠. 그렇게 그 너머를 살아가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요. 사실 저는 원작의 비극적인 결말보다도 영화의 결말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죽음에 대한 연민보다도 이면의 생에 대한 호기심이 지워지지 않는 여운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한편 영화에선 프랑스의 전인적인 교육 환경을 목격할 수 있는데 학생들이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는 가두 시위를 하는 신에서 '민영화를 반대한다!'는 대사가 나올 땐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물론 불법시위라는 목적을 앞세운 과격한 진압 장면 같은 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건 비단 저뿐만이 아닐 것이라고, 문득 생각하게 되네요.
<춘향전>은 언어에서 시작되어 문장으로 옮겨진 작자, 연대 미상의 구비문학이다. 대부분의 구비문학들은 다양한 근원설화로부터 그 명맥이 이어져온 것이라 추정되며 <춘향전>역시 <도미설화>나 <박색설화>와 같이 그 근본을 짐작하게 만드는 다양한 근원설화를 지닌 판소리 문학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아는 그 <춘향전>은 입과 입을 거쳐나가며 다양한 형태로서 변주되고 오늘날의 형태로서 정착된 결과물인 셈이다. 무엇보다도 그 종래적 형태를 결정짓는 요인은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다. 정절과 정조의 아이콘이라 불려도 좋을 춘향의 일편단심을 그리는 <춘향전>은 당대 사대부 양반들이 중시하던 유교적인 풍속을 대변하는 결과물로서 종착된 작품이다.
‘장안 건달 세계의 1인자 이서방’이라 불리는 방자(김주혁)가 ‘통속소설의 1인자’ 색안경(공형진)을 만나 춘향(조여정)과 몽룡(류승범) 사이에 놓인 자신의 과거를 소설화시켜줄 것을 제안하는 오프닝으로 출발되는 김대우 감독의 신작 <방자전>은 <음란서생>의 그것처럼 입을 빌어 전달되는 구비문학의 뉘앙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음란선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방자전>은 조선이라는 신분제 사회의 폐쇄적 풍속의 외관 안에 담겨있을 법한 ‘비공식 야사’를 조명한다. 이는 조선이라는 당대 시대에 대한 전형적 이미지 안에서 도발에 가까운 시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로 다양한 서민 문화가 향유됐던 당시 시대상을 떠올린다면 보다 자연스러운 묘사로서 이해될 만하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건 <방자전>이 지금 현재 이 시대 안에서 유효한 시도라는 점이다.
<방자전>은 한국영화가 사극을 다루는 근 몇년 사이의 경향을 대변하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상한 시대를 바탕으로 둔 풍기문란한 상상, 즉 체통을 중시하는 계급시대를 배경으로 둔 섹스어필한 야사는 근래 사극을 표방한 한국영화들의 어떠한 전형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거듭 시도되고 시행되는 이야기적 방법론에 가깝다. 또한 <춘향전>을 비롯한 다양한 구비문학들이 그 시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주되어 전승되고 명맥을 유지했던 것처럼 <방자전>은 오늘날에 있어서 <춘향전>의 유효성을 상기시키는 새로운 변주적 형태가 될 수 있음을 어필할만한 작품이다. 이는 근래 개봉됐던 <전우치>와 함께 한국 고전 소설의 현대적 쓰임새로서 비견될만한 이야깃거리로서 유용하다.
춘향과 몽룡의 서사를 중심으로 둔 <춘향전>과 달리, 그 제목처럼 방자를 중심에 둔 <방자전>은 기본적으로 <음란서생>과 유사한 서사적 리듬을 두르고 있는 작품이다. 섹스어필한 코미디를 골자로 풍자와 해학의 골계미로 치장된 전반부의 서사는 후반부에 다다라 비극적인 분위기를 두른 진지한 멜로드라마로서의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방자전>은 그 제목 자체만으로도 감지되듯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설정에 대한 변주적 묘미를 즐길만한 작품이다. 원작이 품고 있던 열녀 춘향의 절개를 적절히 뭉개고 덧댄 뒤, 절대적 규약에 가까운 계급사회의 풍토를 비틀며 적절한 도발과 풍자의 미덕을 채워나간다. 전작에 비해 과감해진 노출 수위는 파격적이라기 보단 적절한 감상적 자극을 야기시킬 만한 전시적 효과를 거둔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다. 다만 <음란서생>과 마찬가지로 애틋한 감상을 강박적으로 얹혀놓은 것처럼 멜로적 취향을 한껏 들어올리는 결말의 감정선은 조금 민망하다. <춘향전>의 기원에 대한 풍자적인 발상으로부터 자아나는 위트가 짙은 멜로적 뉘앙스 안에서 침전되는 기분이랄까.
무엇보다도 <방자전>은 캐스팅의 조합으로부터 숙성시키는 맛이 괜찮은 영화다. 캐스팅부터 묘한 감상을 부르는 주연배우들이 기본적인 음식맛을 유지하는 식재료 역할을 한다면 조연배우들은 특별한 맛과 향을 더하는 양념으로서 탁월하게 영화에 배어든다. 언제나 인상적인 캐릭터를 선사하는 오달수의 연기는 백문이불여일견이며, 그 누구보다도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송새벽은 영화의 히든카드로서 인상적인 방점을 찍는다. 아름다운 색감을 자랑하는 미장센은 덤이다.
가명의 셀프메이드(self-made) 작가가 된 감독. 그 전업엔 사연이 있다. 감독은 눈이 멀었고, 빛이 없는 세상에서 연출이란 불가능의 영역이기에 눈이 보이지 않아도 가능한 이야기꾼으로 삶을 전가했다. 감독은 어쩌다 눈이 멀었을까. 그게 다 이 죽일 놈의 사랑 때문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부서진 포옹’이라는 의미처럼 어긋난 단추를 채우듯 균열적인 만남을 거듭하며 사랑을 나누던 남녀의 삶이 파편처럼 부서져 내리던 시절을 수집해 다시 삶을 복원해나가는 작업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잔잔한 심해에서 거친 수면으로 나아가듯 로맨스의 파국을 심상찮게 묘사해내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전작들과 궤를 달리하지 않지만 특유의 멜로적 파토스에서 새어 나오는 긴장감과 성격이 다른 스릴러적 서스펜스가 별도로 구성된 작품이란 점에서 특별하다. 풍부한 정서적 감흥을 자아내는 유려한 영상은 여전히 대단한 감상을 부여하면서도 서사적 흥미를 자아내고자 하는 노력이 전작들에 비해 두드러진다. 덕분에 기존의 알모도바르 영화로부터 감지되던 자극적 심상의 깊이가 얕아진 듯한 인상이 들지만 텍스트적인 재미는 좀 더 보충된 느낌이다. 동시에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알모도바르의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98)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마치 자전적 고백이 담긴 것만 같은 입체적 감상마저 도모한다. 무엇보다도 알모도바르는 <브로큰 임브레이스>를 통해서 자신의 영화적 경력에 대한 새로운 전기를 선언하는 것만 같다. <귀향>이나 <그녀에게>만큼의 감정적 진동에 다다르진 못하더라도 페드로 알모도바르라는 이름 안에서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결코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페넬로페 크루즈를 선택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안목은 이번에도 또 한번 여실히 증명된다. 그것만으로도 일단은 만족스럽다.
의문스런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사건에 연루된 소년과 소녀. 용의자의 자살로 수사는 종결되고 사건은 마무리된다. 그리고 18년 후,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사사가키가 성인으로 성장한 소년과 소녀, 료지와 유키호의 행방을 쫓는다.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으로 꼽히는 ‘백야행(白夜行)’은 밀폐된 인물의 심리와 퍼즐 같은 서사적 진행을 통해 추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이다. 미스터리한 장르적 구조 속에 내재된 멜로적 감수성은 ‘백야행’의 특이점이라 할만한 지점이다. 은밀하게 감지되는 두 남녀의 감정적 교류가 평행적 거리감을 유지한 채 조각처럼 나열된다. 칠흑의 아스팔트를 얇게 가린 흰 눈처럼 멜로적 감수성을 가린 장르적 연막, ‘백야행’은 추리극의 베일로 감싼 멜로나 다름없다.
원작소설과 동명의 제목을 지닌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이하, <백야행>)는 이런 원작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리메이크에 반영했다. 무엇보다도 <백야행>의 관건은 각색의 완성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870페이지에 달하는 단행본 3권 분량의 서사를 2시간 여의 러닝타임으로 변환해낸 결과물은 원작을 접한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지점이다. 20여 년의 세월을 밀어내는 서사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과 두 남녀의 주변부를 채우는 다양한 인물들까지, ‘백야행’은 한 편의 영화로 변주하기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지닌 소설임에 틀림없다. 일본에서도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된 바 있는 ‘백야행’의 영화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건 소설의 원형을 온전히 영상으로 변환하기 위해선 긴 호흡이 필요하다는 제약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원작과 달리 영화가 서사의 너비를 14년으로 압축한 것도 어쩌면 서사적 너비를 덜어내기 위한 방편은 아니었을까 추측할만한 단서로서 유효해 보인다.
일단 <백야행>은 인물과 서사를 적절히 생략하거나 도치시킴으로써 원작의 부피를 줄여나간다. 서사적 방아쇠가 되는 살인사건으로부터 격발되듯 순차적으로 나아가는 원작의 순행적 서사와 달리 현재와 과거를 적절히 섞어가는 서사적 구성은 적절한 선택이라 할만하다. 섹스신과 살인신을 교차한 도입부의 영상도 나름의 흥미를 당긴다. 서사를 재배열하는 각색의 측면에서 <백야행>은 어느 정도 성공적인 선택을 이뤘다는 감상을 준다. 다만 서사적 변주와 함께 원작과 다른 뉘앙스가 발생한다.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원작이 차분하게 진전될 수 있는 건 긴 서사적 호흡 속에서 세밀한 묘사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러닝타임의 제약을 염두에 두고 축약과 변주의 과정을 거친 <백야행>은 서사적 부피가 줄어든 반면 정서적 질량은 보다 넘친다. 그만큼 밀도가 높아졌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나열의 방식에서 성과를 거뒀지만 감정을 넘쳐내는 방식이 지나치게 성급하다. <백야행>이 원작과 명확히 달라지는 건 후반부의 감정적 표현에서 비롯된다. 결코 마주서지도, 마주치지도 않는 남녀의 거리감이 명확히 묘사되는 가운데서도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멜로적 감수성을 독자에게 인식시키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멜로적 감정을 끝내 직설적으로 호소하고 만다. 구체적으로 후반부에 다다라 두 남녀의 마주침을 묘사하는 몇 번의 과정은 그 자체로 실패적이다. 얇은 비닐에 담긴 물처럼 쉽게 터져서 넘쳐흐를 것 같지만 좀처럼 새어나가지 않는 감정의 내밀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원작의 매력이라 한다면 <백야행>은 이를 거부하듯 정반대의 선택을 감행함으로써 신파적 비극성을 과감히 전시한다. 마치 원작에서 가려진 단면을 발굴하듯 두 남녀의 접촉을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선택은 영화의 몫이다. 그리고 선택에 따른 효과적 책임 역시 영화의 몫이다. <백야행>은 후반부에 다다라 온전히 신파적 눈물을 강요하는 멜로로서 스스로를 가둔다. 감정이 차고 넘친다. 연막과 같은 신비감과 모호한 흥미는 온전히 휘발되고 증발된다. 원작과 다른 형태를 지닌다는 건 리메이크로서 가능한 선택이다. 하지만 원작과 차별화된 장점을 선사하지 못했을 때 그 선택은 오판이 된다.
전체적인 분량도 길다. 137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원작의 부피를 염두에 둔다면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백야행>은 사건의 개연성을 확보하는데 실패한 드라마다. 서사를 직조하는데 급급할 뿐, 인물의 심리를 매만지는데 소홀하고 불필요한 감정을 덧씌워 감상의 사족을 벌려나간다. 사사가키의 대역이라 할만한 동수(한석규)는 원작에서 일종의 중계자 역할을 하던 캐릭터다. 원작으로 치자면 평행적인 거리감을 둔 묘연한 관계 속에 놓인 미호(손예진)와 요한(고수)의 접점을 설명하는 캐릭터다. 이와 달리 영화는 동수를 두 남녀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계자 캐릭터가 아닌, 또 다른 감정적 이입의 대상으로서 극에 활용한다. 역시나 다른 선택을 했다는 건 문제가 아니다. 다만 역시나 그 선택이 얼마나 효과적인가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동수가 자아내는 감정은 불필요한 확장이다. 딱히 그 확장된 쓰임새엔 설득력이 없다. 덕분에 감정적으로 집중돼야 할 두 남녀, 미호와 요한의 심리 묘사와 이를 보좌하는 배경적 묘사가 구체화될 너비를 상실하고 낭비적인 감정적 처리만 추가된다. 결말부에 다다라 두 남녀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일종의 강박처럼 보일 정도다. 앞서 해결하지 못한 감정적 충만을 뒤늦게나마 한방에 터트려야 한다는 강박이랄까. 결과적으로 후반부에 다다라 서로에 대한 연민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두 남녀의 태도는 극적인 일관성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형세에 가깝다.
<백야행>은 마치 전반과 후반이 다른 영화 같다. 이성적 형태로 나아가던 영화는 끝으로 다다를수록 눈물을 조장하는데 바빠 보인다. 결말부에 다다라 희미한 신파적 여운을 남기는 원작과 전혀 다른 감상을 부여한다. 원작과 유사한 형태적 결말을 선보이면서 전혀 상반된 감상적 차이를 남기는 건 이 때문이다. 시대적 분위기마저 적극 활용하는 텍스트의 방대한 부피를 이미지에 축약하기 위한 고민은 적당했지만 그 안에서 유지해야 할 감정의 질량적 보존에 무신경하다. 덕분에 전반적인 영화적 밀도마저 느슨해진다. 감정의 선이 불분명한 영화의 태도는 캐릭터들마저 그 감정 안에서 헤매게 만드는 것만 같다. 덕분에 배우들마저도 그 캐릭터의 늪에 빠진 것처럼 기능적인 묘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마냥 보인다.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선사하던 인물의 매력도 온데간데 없어진다.
백열등과 같이 미열한 밝기를 유지하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형광등처럼 깜빡 거리다 이내 환해진다. 덕분에 감정은 숨을 곳을 잃은 채 지나치게 명확히 노출된다. 감정적 명암의 안배에 실패했다. 감춰야 할 것과 드러내야 할 것에 대한 변별력이 온전히 상실된 것만 같다. ‘블랙 앤 화이트’의 대비적 미장센을 부각시키는 것도 좋지만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백야행>은 내밀하게 보존된 감정적 여운을 놓쳐버린 채 구질구질하게 감정적 호소에만 집착한다. 원작과 차별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원작의 장점을 놓쳐버린 셈이다. 결국 감상적 명암만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명확한 감상이란 분명 긍정적인 쪽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파주>는 <질투는 나의 힘>이후로 7년 만에 내놓는 작품이다.
내가 참 오랜만에 영화를 찍긴 찍었나 보다. (웃음) 이런 생각이 제일 크게 남는다. 그리고 그게 이상해. 내가 7년 만에 영화를 찍는다는 건 나도 잘 아는 사실인데 그걸 남들이 막 말해주니까 오히려 나중에 내가 너무 오랜만에 찍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게 이상하다. (웃음) 나는 그냥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거든. 요즘 감독하겠다는 사람도 많고, 기회가 금새 오지 않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오랜만에 영화를 찍느냐고 그러니까. (웃음) 그게 신기하더라.
<질투는 나의 힘>에는 장난끼가 배어든 듯한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파주>는 시종일관 털이 곤두선 듯한 긴장감이 지속된다. 캐릭터의 내밀함은 두 영화의 유사한 지점이라 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옛날 영화들 보면 배우들이 진지하게 말한다. 그런데 요즘 영화를 보면 배우들이 약간 낄낄거리듯 말한다. 좀 더 풀어진 듯 보여져야 자연스러운 걸로 인식된다. 옛날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다 정중하지 않나. 그런데 요즘 영화들에선 꼭 그렇지 않다. 그런데 난 그냥 요즘에 만든 영화지만 정중하게 꼭 할말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파주가 영화의 배경이 된 건가?
파주는 안개가 많이 핀다. 어떤 한정된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고, 그 곳의 정서를 대변하는 자연적 풍광이 이미지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파주에 안개가 많이 피는 걸 보고 파주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개는 <파주>의 심리적 밀폐성을 대변하는 미장센이자 전체적으로 내밀한 분위기를 느끼게 만드는 장치다. 그 안개로부터 어떤 감흥을 받았나?
그렇게 짙은 안개는 생애 20여 년 만에 파주에서 처음 봤다. 지금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안개를 경험해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나도 20여 년 만에 파주에서 처음 경험해봤으니까. 그런 안개를 화면에 담으면 마치 사막에 살던 사람이 영화를 통해서 눈이라는 걸 처음 보듯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짙은 안개를 처음 보겠구나 싶어졌다. 그러니 꽤 담을만한 게 아니었을까. (웃음)
그 물리적인 형태 자체로서 감흥을 얻은 건가, 아니면 그 형태를 통해 표현적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감흥을 얻은 건가.
내가 경험했을 때 그것이 내게 정서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에게 정서적으로 작용했듯이 영화 안에 그걸 끌어왔을 때 보는 사람도 그렇게 작용 받길 기대하는 게 있었다. 다만 거기에 어떤 상징이나 의미를 내 스스로 붙여본 적은 없다. <파고>(1997)를 보면 눈이 아주 많이 나오는 것처럼. (웃음) 그냥 그 장소에서 부각시키고 싶은 인상이랄까? 그런 거지.
멜로적 복선이 정서적으로 밑바탕에 놓여있지만 꽤나 미스터리적인 분위기가 영화를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꽤나 흥미로운 서브 플롯들이 가지를 치고 있기도 하고 서사의 이동이 잦다. 그 덕분에 이야기를 쫓아가는 긴장감도 발생하는 것 같다. 단순히 멜로영화라고 생각했을 땐 상당히 독특한 지점의 구성이다.
멜로영화라는 게 두 남녀가 사랑하는데 장애가 있고, 그 장애를 어떻게 넘어서기도 하고, 못 넘어서기도 하는 그런 것 아닌가. 이 영화에서도 장애가 등장하고, 역시 장애를 못 넘어서는 그런 멜로영화 범주 안에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대부분의 멜로영화는 그런 장애를 하나 정도만 설정해놓지만 <파주>에선 그렇지 않다. 서브 플롯도 두 개 정도 되는 것 같다. 메인 플롯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라면 서브는 언니가 어떻게 죽었나, 와 철거 현장에 관한 플롯이다. 결국 결말에서 두 남녀가 어떤 식으로든 잘 살 수 있도록 뭔가 해결되고 풀어내야 할 부분이 잘 풀려지지 않는 건 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남자는 절대 말할 생각이 없고, 여자는 일단 그걸 알아야만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개발 철거를 놓고 벌어지는 갈등이 꽤나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재개발 철거에 관한 서브플롯이 원래 구상된 소재였던 것인가, 아니면 후발적으로 끌어들이게 된 소재였나.
결말을 원래 이렇게 상정했다. 남자가 다 같이 하는 일의 핵심 인물인데, 여자가 다 같이 하는 그 일을 망쳐놓는다. 그래서 이 남자가 다 같이 하는 일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이 여자와 관련된 개인적인 일을 선택할 것인지, 의 갈래에서 다 같이 하는 일을 망쳐놓더라도 개인적인 일을 선택한다. 이게 이 시나리오를 쓸 때 가장 큰 구상이었다. 철거 투쟁도 그래서 들어온 거다. 둘의 관계에서 이 남자가 자기가 해왔던 커다란 대의적 일도 포기할 만큼 개인적인 선택을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 철거 투쟁 자체가 둘의 관계를 명료하게 드러내주는 수단이다. 그 남자가 어떤 사회적인 지탄을 받거나 사회적인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커진다 해도 결국 그 여자를 위한 선택을 먼저 염두에 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건 멜로드라마 범주 안에 있는 거니까.
<파주>에선 구체적인 연도나 연원을 알리는 근거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초반부 TV에서 흘러나오는 범민족대회 연대사태에 관한 뉴스 보도를 제외하면 그 시대성을 가늠할 방편이 부재하다. 단지 서사를 감지하게 만드는 자막과 짧은 대사가 몇 번 등장할 뿐이다. 처음에는 편집본에 자막으로 연도를 넣었다. 그 버전으로 모니터를 했더니 더 헷갈려 하고 혼란스러워하더라. 처음 등장하는 게 1994년인데 그 다음에 ‘몇 년 후’ 자막이 나오니까 자꾸 계산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냥 현재 시제를 기준으로 8년 전, 7년 전, 3년 전, 해주는 게 이해하기 편하겠다는 결론이 났다.
시대상에 대한 적확한 적시가 등장하지 않는 덕분에 몇몇 장면은 되레 현대적이란 느낌을 준다. 범민족대회 장면은 얼마 전 촛불시위 같고 철거위 장면은 얼마 전 용산 사태를 보는 기분이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은 그 뉴스 장면 보고 촛불시위 때문인지 알았다 하더라. (웃음)
구시대적인 지표를 영화에 반영했을 뿐인데 그것이 되레 현대적인 감상을 부른다니 시대 자체에 대한 아이러니가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보시는 분들이 원래 설정한 연도보다 더 최근으로 봐도 상관없고, 심지어 그걸 촛불시위라고 보더라도 상관은 없다. 나에겐 단지 아까 말했던 다 같이 하는 일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가 중요했을 뿐이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다가 철거 투쟁을 설정하게 됐다. 내 생각엔 한국에서는 늘 짓고 부수기 때문에 그런 게 계속 진행되는 일이고, 앞으로도 한참 계속될 거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시나리오 쓸 당시에 사람들은 너무 옛날 얘기라고 생각하더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에 용산에서 불행했던 그 사건이 있고 나서야 사람들이 지금도 이런 일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조금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파주>를 후일담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후일담이라 생각하지 않고 지금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플래쉬백과 점프컷이 자주 활용되는데 그 안에서 인물의 오해를 그려나가고 그 오해를 객석의 감상적 오해로 전이시킨다. 서사적 배열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서사가 긴 영화는 그렇게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게 할 수 밖에 없다. 서사에 단절을 시켜줄 수 있어야 어떤 이야기를 점프시킬 수 있는 건데 서사가 단선적으로 흐를 때는 점프시키기가 상당히 곤란하다. 그러니까 긴 시간대를 다룬 이야기에서 현재와 과거가 넘나드는 건 불가피한 방식 같다. 일종의 추리극 같은 경우가 아니고서야 그 방식 안에서 조금 다른 형태를 보여주는 건 어렵다.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결과가 있고 그 결과를 추적해가는 거니까. 하지만 내가 무슨 추리극을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니까. 그리스 비극 중에 오이디푸스 왕에 관한 이야기처럼 현대에서 과거의 일을 추적해나가고 분석하면서 조합하는 형태가 나에겐 재미있고 흥미로운 방식이라 생각되더라. 물론 그게 흥미롭지 않은 어떤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웃음)
서사적 이동이 잦기 때문에 플롯을 쫓아가는 감상 자체에서부터 묘한 긴장감이 유발되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런 긴장감 자체가 멜로라는 장르 안에서 특이점을 부여하게 되는 것 같다.
보통 어떤 남녀의 사랑에 장애가 있으면 보통 부모의 반대거나 주변의 역경인데, <파주>는 그보단 언니의 죽음에 대한 의혹에 대한 이해적 차이가 장애가 된다. 언니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남자는 밝히려 하지 않고, 여자는 그걸 알아야겠다고 하는 심리가 장애로서 결말까지 이어지는 거다. 그냥 내 생각엔 평범한 거 같다. (웃음)
<질투는 나의 힘>에서 이원상(박해일)의 전 애인이 한윤식(문성근)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밝히겠다고 협박하다 실제로 그것을 행했을 때 그 이후로 뭔가 엄청난 파국이 벌어질 것 같지만 정작 상황은 담담하다. <파주>에서도 은모가 중식의 속내를 알게 된 순간 뭔가 파격적인 상황이 펼쳐질 것 같지만 오히려 상황이 무마되는 동시에 시퀀스 자체가 종료된다. 어떤 면에서는 관객이 품고 있던 상상이나 기대할만한 긴장감을 무마시킴으로써 파격적인 감상을 부르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당신을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었지만 말은 못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말을 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둘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달라지진 않는다. (웃음) 현실은 원래 그렇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것이 대단한 비밀처럼 그려지고 그것이 밝혀지는 순간 커다란 일이 벌어질 것 같도록 보는 사람에게 훈련이 돼있다고 할까? 만약 비밀이 밝혀지면 복수를 해야 하거나 아니면, 너도 사랑했니, 나도 사랑했다, 이러면서 울고 불고 좋아해야 하거나, 꼭 그래야 하나. (웃음)
최은모의 캐릭터가 <파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단지 비중의 문제가 아니라 내밀하게 감정을 이끌어가면서 전체적인 영화적 분위기를 조율하는 인물이랄까. 그런데 서우에게 그 캐릭터를 맡길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어디서 얻은 것인가?
어차피 20대 중학생 배역이랑 성인 배역을 같은 배우로 할 생각이었다. 같은 배역으로 한다고 치면 그 배우의 나이는 20대 초반이어야 할 텐데 내가 생각할 때 지금 20대 초반의 배우들은 누구랑 해도 아직 다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모험을 하더라도 서우 씨와 하는 게 제일 좋겠다 생각했다. 내 개인적인 느낌에 서우 씨 얼굴을 보면 되게 강인하다 느껴지는 면이 있다. 사실 이런 말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성형을 하면 그 사람의 개성이 없어지고 어디서 많이 본듯한 보편적인 미인이 된다. 하지만 서우 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게 있다. 워낙 자기 개인성이 강렬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서우 씨를 보면 마치 들짐승과 같은 본능이 떠오른다.
동물적이지.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압도당하지 않는 눈빛을 지녔다. 단순히 겁을 내기보단 마치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경계하는 것 같다고 할까.
음, 맞아. 되게 에너지가 높다. 기가 아주 높은 친구다. 어차피 어떤 20대 초반의 배우랑 해도 그 분들의 경험이나 경력은 다 시작점에 있기 때문에 피차일반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서우 씨가 원래 가진 에너지가 다른 배우보다 더 커 보인다는 느낌이 막연히 들었다.
<파주>를 통해 서우라는 젊은 배우의 잠재력이 많이 발견됐다고 해도 좋을 거 같다. 그 동안 서우가 보여준 외향적인 캐릭터와 달리 <파주>에서 연기한 최은모는 은밀하고 내향적인 캐릭터다. 그만큼 디렉션의 역할도 중요했을 것 같다. 특별한 스트레스는 없었나.
서우 씨 연기는 깨끗하고 순간적이다. 순간적으로 되게 큰 에너지가 나온다. (손가락으로 책상 가운데를 짚으면서) 가끔 서우 씨가 이 정도 지점에서 표현을 하면, (손가락을 오른쪽으로 옮겨서) 여기서 조금 이쪽으로 갔으면 좋겠다며 그 방향에 대한 코멘트를 해야 한다. 그러면 이만큼 간 게 아니라 (더 오른쪽으로 손가락을 옮기면서) 이만큼 갈까 봐. (웃음) 어떤 배우의 유동성이 좁으면 내 말이 잘못 들어가도 이렇게 더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밀어낼 수 있는 폭이 있는데 차라리 서우 씨는 말을 해도 안 해도 불안한 거다. 워낙 순간적으로 강하게 뛰쳐나오는 에너지가 커서 어떻게 말해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은 됐다. 잘못 말하면 확 튀어 올라서 말하지 않는 것만 못한 느낌이 될 것 같은 느낌. 그런데 딱 상태가 좋게 잡히면 그 지점이 너무나 좋으니까.
<질투는 나의 힘>이나 <파주>나 보편적인 형태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는 아니다. 어쩌면 보편적인 형태의 사랑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 흥미가 없어서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런 형태의 사랑을 통해 드러낼 수 있는 인물의 심리가 보다 흥미롭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사랑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경험이 많거나 깊은 감정을 잘 보여주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영화에선 왜 그런 형태를 끌고 오는가 생각해보면 평범한 사람들도 다 해보는 연애니까, 누구나 다 해보는 일로서 그 형태를 갖고 오기가 쉽기 때문인 거 같다. 그냥 편의적으로 갖고 올 수 있는 소재를 다른 형태로 가져가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투는 나의 힘>이나 <파주>의 결말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희비에 대한 해석이 엇갈릴 만한 장면이다. 결과적인 형태 안에서는 비극 같지만 궁극적으로 점지되지 않은 미래적 상황에선 희망을 예감해도 무관할 것 같다. 어쨌든 김중식을 가둔 최은모는 파주를 떠난다. 과연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진 것일까?
아마 여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라고 생각할 거 같다. 물론 일을 보러 언젠가 오겠지. 예를 들어서 부모님 집을 팔러 온다던가, 뒷수습을 하러 임시로 오는 경우는 있겠지만 인도에서 돌아올 때처럼 다시 파주에서 살아야지, 라는 마음으로 돌아오진 못할 거 같다. 그리고 모르겠다. 어차피 누구라도 모를 일이지. 그냥 떠날 때 심정이 그랬을 것 같다. 김중식 얼굴도 다시는 보지 않아야겠다 생각했을 것 같고. 그 사람이 찾기 전에 내가 먼저 찾을 명목을 지워야겠다 마음먹지 않았을까.
간담회 때 보니까 긴장하듯 주변을 돌아보는 모습이 경계심 강한 들고양이 같다고 생각했어요. (웃음) 쉽게 겁을 내지만 막상 그 겁에 눌리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다고 할까요. 그런 모습에서 <파주>의 최은모가 겹치는 지점도 있고요.
전 이런 말 듣게 되면, ‘아, 그렇구나.’ 생각하게 돼요. (웃음)
스크린을 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서 색다른 감상을 얻지 않을까 궁금하네요.
<파주>는 스크린으로 봐도 화질이 선명하지 않고 뿌옇잖아요. 현장에서 봤던 모니터가 굉장히 작아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감정적 표현들로만 오케이라 느끼고 갔죠. 배우들도 스크린을 통해 처음으로 모니터한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가끔씩 불쌍해 보이려고 한 말이 아닌데도 어떤 대사를 할 때 너무 불쌍해 보인다는 느낌이 든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있었어요. 들고양이 같다는 말씀이 최은모에겐 굉장히 잘 어울리는 표현 같아요. 항상 눈동자에 누군가를 경계하는 게 드러나고, 조금은 불안해하기도 하잖아요. 어쩌면 은모가 불완전한 인간형, 불안정한 사람이란 생각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눈빛을 통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표현하고, 그렇게 해야 했던 것 같아요.
최근 방영된 드라마 <탐나는도다>를 비롯해서 <미쓰 홍당무>와 <파주>에서 연기적으로 좋은 평가를 얻었어요. 일단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겠죠. 하지만 그만큼 약간의 긴장감이 어깨에 지워진다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약간이라기 보단 너무! (웃음) 그런 칭찬 자체가 저한테 큰 응원이 되지만 사실 무섭기도 하고, 굉장히 큰 짐이 되기도 하니까요. 저는 아직 영화를 두 작품 밖에 못했고 이제 조금씩 뭔가를 보여드리면서 아직은 좀 혼나도 괜찮다고, 지금은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그런 얘기들을 듣게 되면 겁이 나요. 칭찬을 못 받아도 속상하겠지만 칭찬을 받아도 그런 생각이 들죠. 나중에 분명 큰 질책을 받을 때도 올 거라고 보거든요. 너무 큰 기대를 얻다가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면 어쩌나, 벌써부터 이런 걱정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주연을 많이 맡으셨던 선배님들이 작품을 선택하기 어려우실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많은 분들에게 받은 연기적인 믿음과 신뢰를 저버릴 수 없는 입장일 테니까요.
시나리오를 보고 캐릭터를 접했을 때도 욕심과 갈등이 교차했을 것 같습니다.
<파주>를 선택할 때도, 아직 연륜이나 경험이 부족한 내가 이렇게 좋은 작품을 해낼 수 있을까 걱정됐어요. 만약 제가 못하면 7년 동안 써왔다는 이 시나리오가 망가지는 거고, 많은 분들에게 죄송한 일이 될 거 같아서 주저했죠. 이거 놓치면 후회야, 라는 욕심으로 염치불구하고 뛰어들었던 작품이죠. 아직 난 조금씩 공부하면서 가도 되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며 용기를 내기도 했고요. <파주>덕분에 많은 분들에게 또 다른 용기도 얻을 수 있었죠.
처음 연기 제의를 받고 시나리오를 통해 은모라는 인물을 살펴볼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일단 운명적인 타이밍이었던 거 같아요. 시나리오를 받은 게 <탐나는 도다>찍고 있을 때였고 촬영이 중단되기 직전 상황이었거든요. 만약 <탐나는 도다> 촬영이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면 <파주>를 찍지 못했을 거에요. 그리고 <파주>를 찍으면서 <탐나는 도다>를 병행했다면 굉장한 영향을 받기도 했겠죠. 그런데 <파주>를 찍고 나서 다시 <탐나는 도다>에 복귀했기 때문에 저에게 <파주>는 서우라는 사람에게 들어온 운명 같았어요. 그때 제가 육체적으로도 마음으로도 고생하고 있었던 때이기도 했고요. 전 원래 미친 듯이 밝은 성격이거든요. (웃음) 힘들어도 겉으로 표현하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 마음을 잘 모르기도 하고요.
박찬옥 감독님은 서우 씨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봤을까요? 혹시나 그런 부분에 대해서 묻거나 추측해본 적은 없었나요?
박찬옥 감독님을 처음 뵙는 미팅 자리에서 힘든 넋두리를 했어요. (웃음) 그때 마음 고생이 너무 심했거든요. 물론 그땐 제가 최은모에 대해서 분석을 했다거나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을 때였죠. 박찬옥 감독님이 그런 제 모습을 보고 김중식처럼 저를 보살펴주고 싶은 동정심을 발견하셨던 것 같아요.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보단 제 이야기만 했거든요. (술에 취한 듯 혀가 꼬인 목소리로) “제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몰라요. 언니는 몰라.” 막 이러면서. (웃음)
이선균 씨가 간담회에서 그런 말을 했죠. 카메라만 돌아가면 사람이 변한다고.
(웃음) 제가 평상시에는 장난도 많이 치는데 은모는 워낙 저와 많이 다른 캐릭터다 보니까 카메라 돌아가면 은모가 돼있어야 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어쩌면 제 이중성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선균 오빠인 거 같아요. 사실 버진이할 때는 제 일상이 워낙 버진이스러워서 카메라가 안돌 때나 돌 때나 다를 게 없었을 거에요. 예전에 처음 연기 시작할 때 한번 웃음이 터졌다가 슛 들어가도 제가 그걸 못 참아서 크게 혼난 적 있어요. “서우 집중 안 해?” 그렇게 따끔하게 혼난 덕분에 슛 들어갈 때 집중력이 커졌나 봐요.
방금 말씀하신 <탐나는도다>의 버진은 서우 씨와 가장 닮아있는 캐릭터처럼 보입니다.
제일 가깝죠. 그렇지만 서종희도, 버진이도, 은모도 다 저로부터 시작한 캐릭터에요. 셋 다 저와 따로 있는 게 아닌 거죠. 감독님과 제가 같이 만들어나간 가상 인물이지만 어차피 다 저에요. 서우란 사람이 세 명 있다는 건 아니지만 어느 하나를 뺀 나머지는 제가 아니라고 말할 순 없는 거죠. 버진이가 저와 좀 많이 가까웠을 뿐이고, 저와 많이 달라 보이는 은모 또한 저의 한 모습인 거에요.
본인에게서 가장 쉽게 드러날 수 있는 캐릭터인지, 아니면 쉽게 드러날 수 없는 캐릭터인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겠죠. 은모는 단지 후자 쪽 캐릭터였나 봐요. 그런데 <탐나는도다>가 조기 종영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많이 표했더군요.
감독님께서 그러셨어요. “야, 우리 조기 종영돼서 이렇게 매니아층도 생겼으니까 좋게 생각해.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래도 좀……(웃음)
흥행적 지표와 무관하게 끊임없이 회자되는 작품이 있죠. 어쩌면 <탐나는도다>도 그런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미쓰 홍당무>나 <파주>역시 두고두고 이야기될 작품이 될 거라 생각하고요. 어쩌면 그런 작품에 출연했다는 것이 언젠가 배우로선 좋은 기회였다 말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 역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행운이 맞을 거라 믿어요. 그런데 한번 더 생각해보면 그런 작품에서 중요한 인물로 출연했지만 그때도 사실 저는 연기의 ‘연’자도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연기할 때마다 현장에서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너무나 창피할 정도로 부서지듯이 혼나고 눈물도 많이 흘렸거든요.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닌 거죠. <파주>에서도 스크린에 있는 최은모는 너무나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 뒤에서 연기했던 서우라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많이 배워가면서 찍었고, 많은 부족함을 느꼈죠. 그래서 그런 힘든 시간들을 끝까지 이겨냈고, 작품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힘이 나요. 뒤늦게 행운이라 생각하지만 그 행운을 갖기 위해서 많이 힘들었어요. (웃음)
<미쓰 홍당무>나 <탐나는도다>는 캐릭터나 작품 자체의 기질만으로도 두드러지는 인상의 작품이었어요. 그러나 <파주>는 사실 캐릭터나 작품 자체의 기질이 두드러지는 영화는 아니죠. 적막하게 멜로적 복선을 깔고 가지만 미스테러 스릴러적인 요소가 많기도 하고요.
사실 저희는 찍을 때 그런 느낌을 굉장히 많이 배제한 느낌으로 갔다고 생각했어요. 은모가 언니의 죽음을 의식하는 건 중식을 밀어내기 위한 방편이라 생각했고, 방패막처럼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묻으려는 심리가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또 한가지는 언니 죽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계속 얘기해주는데도 그걸 믿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말조차 배제한다고 할까요? 감독님께서 선악을 왔다 갔다 하는 최은모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최은모라는 캐릭터의 모호함이 그런 정서에 일조하는 부분도 있었겠죠.
굉장히 모호하죠. 저는 솔직히 약간 음흉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제가 이전에 했던 다른 캐릭터들은 연기적으로 굉장히 세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 그런 게 독특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최은모가 오히려 더 독특한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너무나 모순적이고 반어적인 복잡미묘한 점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이니까, 이게 독특하지 않다면 무엇이 독특하겠어요. (웃음) 최은모는 사회적으로 이질적인 사람이고 소위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캐릭터보다 독특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최은모를 연기하는 기분은 어땠나요?
연기를 하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죠. 평생 살면서 이런 캐릭터를 또 맡을 수 있을까? 박찬옥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쓰지 않는 이상 그게 가능할까? (웃음) 은모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사실 많지 않을 거에요. 감독님께서 누구보다도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주셨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었고 그만큼 어려운 캐릭터였던 것 같고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까 정말 똑똑하게 얘기하는 거 같아요! 와, 내가 되게 이런 생각을 했나? (웃음)
말씀 잘 하시는데요. (웃음) <미쓰 홍당무>나 <탐나는도다>에서 연기한 서종희와 캐릭터는 뭔가를 밖으로 드러내고 만들어가는 캐릭터였다면 <파주>의 최은모는 뭔가를 안으로 자꾸 삼켜야 하는 캐릭터였던 것 같습니다. 서사적 흐름도 궁극적인 것을 감춘 채 의심을 갖게 만들고요. 그러니 아무래도 앞선 두 캐릭터를 연기할 때와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겠죠.
연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감독님께서 주신 디렉션이 많은 공부가 됐고요. 능동적으로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되라고 하셨거든요. “그냥 연기하지 않으면 돼. 네가 그냥 최은모여야 해. 그걸 보는 관객들이 네 연기를 단면적으로 받아들이더라도 그 가운데서 우리가 목표한대로 감정적인 요동치는 감정만 느끼게 만든다면 그게 맞는 거야. 네가 진짜 느끼면 그게 오케이야.” 이런 얘기를 하셨죠. 중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고, 너무 아프고, 그 사람 얼굴만 봐도 주체가 안 되는, 그런 은모의 감정을 제가 느꼈어요. <파주>에서 그걸 배웠죠. 그래서 그런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그걸 보는 관객들이 느꼈을 거라고 생각해요. 만약 정말 못 느낀다면 제 연기에 문제가 있는 거겠죠?
아무래도 그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 없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답답함을 많이 느끼지 않았을까 싶어요.
어쩌면 최대한 표현하지 않는다기 보단 표현을 못 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표현하지 못하는 인물을 제가 그냥 맡았던 것뿐이에요. 은모는 슬퍼도 슬픈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인간인 거 같아요. 언니 무덤에 갔을 때도 은모는 슬퍼하고 있었고, 가슴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거 같은데 울지 않잖아요. 너무 담담하게, “그만 내려가요.” 하고 내려가는데 전 그 때 너무 짠했어요.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어떤 톤으로 말을 해야 할까, 이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게 꼭 명확하게 전달되는 것 같지 않더라도요.
최은모 이전에 앞서서 연기한 서종희와 버진이는 뭔가를 밖으로 끌어내고 드러낸다는 점에서 안으로 누르고 삭혀야 하는 최은모보단 감정적 어려움을 덜 겪지 않았을까 싶어요.
종희나 버진이는 톡톡 튄다고 할까요? 굴곡이 굉장히 심한 캐릭터였어요. 좋은 연출과 스토리 덕을 본 것도 있지만 캐릭터를 오고 가면서 컨트롤해야 할 숙제들이 있었죠. 은모를 생각하면 그와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중고등학생에서 스물 세 살까지 성장하는 과정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더해지는 나이 대마다의 과정을 표현해야 했죠.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는 점에선 말을 하지 않고 표현하는 법을 생각해볼 필요성을 느꼈어요. 그래서 말수도 없어지고 밥도 잘 못 먹었어요. 제가 그런 사랑을 하고 있다 생각하니 밥이 넘어가지 않더라고요. 한번은 3일 동안 거의 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 많은 스태프 분들 걱정을 끼치면서 촬영했던 적도 있었어요. 선균 오빠도 식사를 많이 못하시더라고요. 정말 가슴 아픈 사랑을 하는 은모처럼 제 모습도 그렇게 돼가고 있었나 봐요. 감정적으로 화가 났을 때, ‘악!’하고 소리 지를 수도 있겠지만 (담담하게) ‘알았어.’하고 말 때도 사실 화난 게 느껴지잖아요. 표현의 차이랄까? 이번에는 그걸 배웠고, 표현했던 거 같아요.
<미쓰 홍당무>에 이어서 <파주>에서도 교복을 입었네요.
심지어 광고에서도 입었어요. (웃음)
아까 말한 대로 <파주>에선 10대에서 20대까지의 나이 대를 표현해야 했으니까 교복을 입어야 했죠. 물론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사이에 외모적으로 큰 변화가 필요하지 않은 시기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될 문제였을지 몰라도 정작 연기하는 당사자로선 어떤 특별한 구분을 보여줘야 할 거란 의무감을 느꼈을지 모를 일이죠.
일단 최은모를 연기하면서 뭘 보여주려고 부담 갖지 말자, 뭘 하려고 하지 말자, 라 생각해서 어떤 특별한 고민은 옆에 놔두고 연기했던 거 같아요. 하지만 꼭 해야 할 숙제가 있었죠.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스물세 살까지의 성장배경을 보여줘야 하는데 사실 그 시기가 사람이 가장 많이 변할 때잖아요. 그리고 제가 중학교 때 찍었던 영상을 보면 지금 제가 말하는 것과 완전히 달라요. 고등학교 때도 또 다르고, 또 스물 세 살 때도 다르고, 너무나 많이 다른 거에요. 외형적으로 보기에도 전혀 다른 모습이 발견되기도 하고요. 사람은 똑같아도 조금씩 다른 느낌이 나야 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파주>는 리얼리티가 중요한 영화였기 때문에 그런 걸 외부적인 효과를 빌려서 과하게 표현할 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분장 팀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분장팀의 황현규 선생님께서 그런 제 고민을 인정해주셨던 부분이기도 하고요. 점점 머리가 커진다고 하잖아요. 중학교 때 별 생각 없던 아이가 점점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사물에 감정을 담기도 하는 거죠.
<파주>는 두 인물의 오해와 착오를 통해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전되는 사건을 그린 영화에요. 사랑이란 감정의 이타적인 영역과 이기적인 영역이 잔인할 정도로 발가벗겨지는 느낌도 들고요. 어쩌면 그만큼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것도 중요한 과제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사실 서우 씨는 경험적으로 사랑을 이해하기엔 아직 부족한 나이라서 그런 경험적 깊이에 대한 갈망이 생기지 않았을까 궁금합니다.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한번이라도 제가 누군가를 죽을 만큼 사랑해봤다면 좋았을 걸 싶더라고요. 누군가가 나를 떠나갈 때 내 팔다리가 찢겨나가는 것 같이 가슴 아프고 뼈저리다고 하잖아요. 배우는 그런 게 연륜인가 봐요. 나이가 많아서 연륜이라기보단 그런 경험이 많이 필요한 건가 봐요. 그런데 저는 그런 경험이 한번도 없는 거죠. 그게 너무 속상했어요. 그래서 영화 끝나면 정말 그런 사랑을 꼭 해볼 거야, 마음 먹었어요. 물론 금지된 사랑은 하고 싶지 않지만, (웃음) 누군가를 정말 뜨겁게 사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사람을 오랫동안 가슴 속 깊이 담아둘 수 있을까,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 이렇게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지금 이게 사랑인 건 맞는 것일까, 확인하고 싶어졌거든요. 그래도 어쩌면 미성숙한 감정이 최은모를 연기하는데 있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이기 때문에 가족을 배신하거나 양심을 어기는 사랑을 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아직 최은모 안에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미완성적인 순수성이 남겨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게 가능한 거죠. 그런 제 모습이 최은모에게서 보이는 거 같아요.
후반부에 중식이 은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되레 은모는 그 상황으로부터 달아납니다. 사실상 가장 갈망하던 순간이었을 수도 있는데 되레 그 상황에서 도망가는 셈이죠. 은모의 그런 감정을 어떻게 이해했나요?
그 신을 찍을 때 정말 고생했어요. 원래 달아나기 전에 “형부를 잘 모르겠어요. 형부, 누구세요?” 이런 대사가 있었는데 감독님께서 그 대사를 쓰면서 닭살이 돋아서 빼셨다고 하셨죠. (웃음) 그냥 그 신에서 이미 은모의 마음이 정리된 거 같아요. 형부 앞에서 뛰쳐나가서 거리를 걸어갈 때, 형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걸 느끼면서 ‘사랑하지 않을 거야. 너를 미워하는 방법을 찾아낼 거야. 널 밀어낼 거야.’ 그런 단호한 다짐을 하고 있고, 입술을 꽉 다물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그런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 다음 신에서 언니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건 ‘난 너를 사랑할 수 없다’는 암시적 질문이기도 하고요. 나한테 말해달라면서 울부짖는데 그렇게 중식을 대하는 은모의 모습은 한편으로 초라해 보였어요. 어쩌면 중식에게 매달린 은모의 모습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컷이었던 거 같아요. 은모는 평생 중식에게 의지하면서 위만 쳐다보고 있었던 아이였고, 지금도 스물세 살이 됐지만 아직도 예전에 그렇게 살아왔던 은모를 벗어나지 못한 흔적이 보이고요. 일단 9년 동안 몰랐던 중식의 감정을 뒤늦게 알게 됐다는 게 은모에겐 막상 나쁘지만은 않았을 거 같아요.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게 단순히 기쁨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그런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니까요. 그렇지만 형부라는 사람이 처제에게 키스했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언니에 대한 배신적 행동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중식을 밀어내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 거죠. 그런 많은 감정들이 공중전화 박스로 가기까지의 과정에서 조금 드러나는 것 같아요. 원래 키스신에서 은모의 감정을 보다 친절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지만 편집으로 잘랐어요. 수치심을 느꼈다거나 정말 이 사람을 떨쳐버리기로 마음 먹은 듯 보이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사실 <파주>가 설명적이거나 친절한 영화는 아니잖아요. 많은 분들이 상상하시기 나름이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많은 감정들이 돋보일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해요.
사실 그 이전까진 은모 혼자 중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철저하게 감정을 숨긴 중식과 달리 은모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갈등하는 감정을 노출하니까요.
은모를 얘기할 때 의심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사실 은모는 다 알면서 듣고 있죠. 보험회사 직원이 직접 얘기해줘도 그걸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밀어내는 거 같아요. 그래서 중식을 의심하고, 그러면서도 그 사람 얼굴을 보면 자기가 사랑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고 그런 현실이 너무 미운 거에요. 그러면서 언니의 죽음을 다시 느끼게 되니까 언니 죽었을 때 얘기해달라고 말하는 거죠. 어쩌면 중식 입으로 “너 때문에 죽었다.”라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 물어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약간 의심하는 감정이 들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다음에도 누군가는 분명히 얘기해주지만 은모는 그걸 듣지도, 믿지도 않죠. 끝까지 은모를 그게 사실이 아닐 거라 생각하고 떠나버리는 거에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이 현실이 너무 미운 거에요.
끝없는 자기 부정 같은 것 말이죠. 감정을 통해 선악을 구별 짓는 건 불필요하겠지만 그로 인한 가해와 피해의 상황은 발생합니다. 결국 오해나 착오로부터 발생하는 상황들도 그로 인한 피해가 되겠죠.
제가 어제 영화를 다시 보고 생각난 건데, 은모가 중식을 그렇게 만든 건 사실 중식이 감옥에 갇히지 않을 거란 확신 때문이 아닐까요? 중식이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걸 은모는 알고 있으니까요. 은모가 중식을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떠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타적인 행위인 거죠. 그리고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에 그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하게 된 행위일 뿐이고요.
유배이자 보호에 가까운 거죠. 자신의 마음에서 밀어낼 수 없으니 물리적으로 가두는 동시에 철대위의 책임을 중식이 혼자 떠맡지 못하게 하는 기능까지 염두에 둔 행위랄까요.
철대위에서 중식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할 때, 은모는 ‘절대 그렇게 돼선 안돼.’라는 표정을 짓고 있어요. 제 가족이 너무 미워도 그 가족이 만약 경찰서에 있다고 하면 마음이 불편하잖아요. 은모에게 중식은 사랑하는 남자인 걸 떠나서 형부와 처제라는 가족이기도 하고요. 적합한 관계는 아니지만 그걸 내버려둘 최은모는 아닌 거 같아요.
적은 필모그래피만으로도 나름대로 인상적인 평가를 얻고 있어요. 앞으로 예상치 못한 굴곡을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과정은 스스로를 고무시키고 긴장시키는 결과라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런 기대들이 달갑지 않게 느껴지는 제가 미워요. (웃음) 스스로 능력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이런 과정을 노련하게 이겨내고 거쳐내면서 또 다른 모습으로 극복해나갈 수 있을 만큼 똑똑하고 강한 사람이 아닌 거에요. 그래서 서우라는 사람이 묵묵히 연기를 잘 해나갈 수 있는 배우다운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여기 이렇게 변한 지 오래 됐어.”들뜬 어조로 무례하면서도 심드렁하게 말을 뱉는 택시기사, 그리고 옆에 앉은 여자. 그녀가 바라보는 창 밖의 파주는 예전에 그녀가 자리하던 그곳이 아니다. 그건 그곳이 변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그곳에서 보낸 시절로부터 멀리 돌아오는 길이기 때문이다. 자욱하게 길을 메운 안개로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풍경에 내밀한 긴장감이 차오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사연과 속내를 점치기 어려운 인물의 표정으로부터 호기심이 예민하게 출렁인다. <파주>는 시종일관 털이 곤두서듯 서늘한 적막을 유지하다가도 날카롭게 찌르고 거칠게 흔드는 찰나가 뒤늦게 고개를 들어올리는 작품이다.
타이틀 시퀀스 이후 플래쉬백으로부터 본격적인 서사를 진전시키는 <파주>에서 김중식(이선균)이 보는 TV화면에 비춰진 ‘범민족대회 연대사태’광경을 제외하면 시대적 연원을 유추할 수 있는 근거는 부재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명확한 연도에 대한 표기나 언급이 단 한차례도 등장하지 않는 가운데 서사적 진행과정을 예감할 수 있는 건 과거를 지칭하는 몇 번의 서술적 자막과 대사뿐이다. <파주>는 실제적 서사의 현실적 배경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연출자의 본 의도를 떠나서) 그 형태는 마치 <파주>가 어떤 시공간에 놓여있더라도 상관없다는 듯 방치해버리는 것마냥 보이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20세기 말과 21세기 초를 배경으로 둔 <파주>는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해도 상관없을 것만 같은 영화다. 심지어 서브 플롯에 가까운 철거 신은 근래 재개발 철거 문제로 참상을 빚은 용산의 비극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는 <파주>가 낙후된 지방성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덕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지방성으로 감지되는 풍경의 특성이란 게 도시에 비해 낙후된 발전적 척도로 가늠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쩌면 그만큼 영화의 외부에 놓인 세상의 변화가 부조리한 탓이다.
플래쉬백과 점프컷이 적극 활용되는 <파주>는 플롯의 서사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상적 난이를 유발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단지 서사의 배열과 플롯의 접목을 차례대로 밟아가는 행위 자체가 불친절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흐름이 감정을 명확히 드러내기 보단 되레 내밀하게 감정을 감춰둔 채 그 외면적 상황만으로 관객의 판단과 추리를 도모한다는 것이 궁극적인 까닭이다. 실질적인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스크린으로 묘사되는 상황과 그 이미지와 서사적 추이를 통해 제시되는 근거만으로 조합되고 추리되는 예감과 의심은 결과적으로 <파주>가 뒤늦게 드러내고 공개하는 사연 속에서 오해와 착오로 전복된다. 오해와 착오는 영화 속 캐릭터나 영화 밖 관객에게 쌍방간의 영향력을 미치는 <파주>의 특성적 기질이기도 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속내를 감춘 채 홀로 감정을 삭히다 소통의 불가해가 발생시킨 오해와 착오 속에서 사건을 엉뚱한 구석으로 밀어붙이다 과오적 찰나로 상대마저 밀어내곤 한다. 동시에 서사적 미궁을 만들어 관객의 오해를 유도하고 이를 묵살할만한 근거지를 뒤늦게 밝힘으로써 인물의 밀폐된 심리를 보다 강렬하게 전달하는 동시에 서사적 짜임새를 절묘하게 다지며 극적 흥미를 유도한다.
<파주>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끝까지 유지하고 밀어붙이는 가운데서도 지속적인 멜로적 복선을 밑바탕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의 양면적 기질을 담담하면서도 날카롭게 묘사해내는, 멜로로서 현격한 가치를 드러내는 수작이다. 내밀한 인물의 심리가 과거로부터 전진해 나가다 또 다른 회상으로의 이탈을 반복하곤 하는 서사적 플롯이 서서히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그와 함께 첨예하게 발전해나가는 남녀의 관계는 기민한 오해와 착각을 건너 안도와 불안의 감정에 두 발을 각각 디디고 선 채 파국의 심상을 농밀하게 축적해 나간다. 지속적인 불길함을 자각하게 만드는 외부적 지표들의 환기를 통해 인물의 서사적 전후를 끊임없이 구성해나가고 이를 통해 정보적 차단과 접근을 조율해 진실과 진심의 격차를 벌리다 이내 좁혀버린다. 단순히 은모(서우)와 김중식의 치정으로 위장됐지만, (그리고 물론 그게 가장 중요한 뼈대이기도 하지만,) <파주>는 단순히 파격적인 멜로라 불릴만한 소재의 단순한 외벽에 단단한 서브플롯의 내면을 켜켜이 쌓아 넣으며 거대한 심상을 구축해 냈다는 점에서 보다 인상적이다.
운동권 출신으로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도피 중이던 김중식을 중심에 두고 연이어지는 비극적 연애담을 통해 불길한 뉘앙스를 뻗어나가던 영화는 끝내 파국적 형태를 그려나가되 결코 비관적 선언으로서 사연을 매듭짓지 않고 진전적 여운을 남겨 둔다. 끝내 불길한 기대심리를 미세하게 벌려둔 채 시선을 거둔다. 사랑의 파괴적 본능을 대변하듯 낙관적일 수 없는 멜로적 파국을 징검다리처럼 건너던 영화는 그럼에도 그것이 끝끝내 손에서 놓아버릴 수 없는 속박임을 증명하듯 위태로운 관계를 생의 억겁처럼 끈질기게 이어내려 한다. 은밀한 응시와 묘연한 관찰을 통해 아슬아슬하게 금기를 맴도는 감정적 욕망은 세상의 살풍경 속에서 연약하게 움츠리면서도 덧없이 자라난다. 금기와 욕망이라는 이중성 안에서 갈등과 불안에 휩싸이던 은모가 중식의 확신적 태도를 맞이하는 상황에서 되레 그것을 밀어내는 광경은 그 상황 이전에 영화에서 제시된 사회적 단면들을 거듭 경험한 은모가 그 테두리에 대한 불안감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란 방어적 본능을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파주>는 단순히 감정을 교류하는 쌍방간의 감정적 진폭을 벗어나 사회적 알고리즘 안에서 개개인이 발생시키는 감정적 진동이 초래할 암묵적 파장을 면밀하게 살피고 이를 통해 사연의 범위를 확장시켜 나간다.
재개발 철거를 앞두고 이에 저항하는 철대위 주민과 이를 진압하는 용역깡패의 대립 과정을 그리는 과정에서 과감한 철거 몽타주를 동원하며 감상을 거칠게 압도하고 흔들어대기도 하는 영화는 때때로 서사의 일부를 직설적인 묘사 대신 간접적인 대사나 상황의 연결만으로 짐작하게 만드는 모호한 국면으로서 강렬한 잠상(潛像)을 심어두는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파주>의 주요한 언어는 표정이자, 눈빛이고, 인물 그 자체다. 그만큼 배우들의 호연은 <파주>에서 주요한 장치이자 필수적인 여건으로 기능한다. 칼날을 잡은 것마냥 위태롭지만 그만큼 강인한 심리를 표출하는 은모 역의 서우는 인물의 중의적 표정과 눈빛을 무기로 내밀한 심리를 탁월하게 객석에 전달해낸다. 서우가 연기하는 은모가 쭈뼛하게 선 <파주>의 긴장감을 대변하는 칼 끝이라면 반대로 이선균의 김중식은 단단한 반석이다. 담담한 표정만으로 안정적인 감정으로 속내를 위장한 김중식을 대변하는 이선균은 일관된 표정과 목소리 톤으로 철저히 위장된 삶을 밀어나가다 잠재된 감정을 일거에 방출시키며 강렬한 진동을 발생시킨다. 그 밖에도 극적 감정의 중요한 매개가 되는 최은수 역의 심이영은 헌신과 열연을 통해 영화에 일조하며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조연들이 저마다 적절하게 제 역할로 영화의 토대를 이룬다.
아득하게 잠재된 감정을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리고, 천천히 극적 열기를 높여 감정을 데우던 영화는 그 끝에서 감정의 끓어오름을 묘사하기 보단 결코 끓어오를 수 없게 차디찬 현실과 직면한 감정적 갈등의 진화를 포착한다. 안개가 자욱한 길처럼 앞을 가늠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리던 인물이 일순간 안개가 걷힌 길 위에서 목도한 선명한 풍경에 되레 압도당하듯 미궁과도 같은 감정적 혼란 속에서 짐짓 안도하던 은모는 중식의 고백과 함께 명료해진 감정적 정리 앞에 되레 돌아선다. 파주로 돌아온 은모는 결국 파주에서 등을 돌린 채 다시 길을 나서지만 은모가 발을 딛는 곳은 더 이상 안개가 사라진 또 다른 파주일 것이다. 안개와 같이 불안정한 감정에 미혹되던 소녀는 무례하고 삭막한 세상 속에서 자라난 뒤, 선명해진 감정적 확신을 되레 뿌리치고 달아난다. 연민적 이타와 결핍적 이기로 맞붙어 자란 사랑은 결국 금기를 넘어서지 못한 채 유배되고 한편으로 보존된다. 결국 안개처럼 희뿌옇게 감정을 숨긴 채 주변을 살피던 남녀는 비로소 마주선 뒤에야 자신에 대한 끝없는 부정으로 내달린다. ‘해서는 안 될 말’과 ‘할 수 없는 말’사이에서 방황하는 남녀에게 <파주>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감정의 광야이며 그 안에서 사랑은 속박으로 농익어 서로를 당긴다. 뜨겁게 끓어오르기 보단 차갑게 식어내리는 감정적 여운이 인상적인 <파주>는 그래서 그만큼 더욱 애절하고 절실한 감정을 무겁게 침전시키는 고밀도 멜로다. 마치 안개처럼 피고 지는.
주소가 적힌 메모지 한 장에 의지한 채 감춰진 과거를 찾아 서울공항에 내려선 메이(성유리)는 길가에서 차에 등을 기댄 채 쭈그려 앉은 택시기사 은설(장혁)에게 손을 붙잡힌다. 당혹스런 표정으로 은설의 손을 뿌리치려던 메이는 은설이 심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실 누군지 알 길이 없는 택시기사 은설은 심장이 언제 멈출지도 모를 ‘민히제스틴 증후군’이란 보기 드문 심장질환을 앓고 있다. 죽음과 직면하듯 살아가는 남자와 본의 아니게 상실한 과거를 되찾고픈 여자, 기구한 현실에 놓인 남녀는 운명적으로 손을 잡는다.
핸들을 붙잡고 고통에 신음하는 남자의 간절한 표정이 의문을 자아낸다. <토끼와 리저드>는 결말부의 한 조각을 떼어내 전진배치하고 이를 통해 유효해진 물음표의 정답을 찾아가는 멜로적 여정이다. 형태만으로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토끼와 리저드>란 제목은 두 남녀의 트라우마와 연관된 두 마리의 동물을 나열한 것이다. 유년시절 기억에 남겨진 ‘빨간 토끼’를 찾아달라는 은설이나 어깨 뒤에 ‘도마뱀(lizard)’모양의 긴 흉터를 지닌 메이에겐 쉽게 치유되지 못하는 고통이 존재한다. <토끼와 리저드>는 두 남녀의 트라우마에 얽힌 운명론적 인연을 복원하고 이를 통해 그 상처마저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궁극적으로 결말부에 다다라서야 모든 의문을 일거에 해소시키는 <토끼와 리저드>는 결국 숨겨놓은 서사의 한 단면을 드러내기까지 얼마나 지속적인 극적 흥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가 관건이라 해도 좋을 만한 작품이다. 우연한 만남 뒤 필연적인 재회를 거듭하며 서로의 주변을 맴도는 남녀의 인연은 결국 운명적 관계에 대한 각성으로 이어진다. 정체된 듯 미약하게 진전되는 남녀의 관계가 망각된 운명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만드는 결말부는 <토끼와 리저드>가 다다르고자 하는 성취적 결과나 다름없다. <토끼와 리저드>의 관건은 사연의 핵심이 드러날 결말부에 다다르기까지 암시적 상황을 제시하며 극적 흥미를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놓여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토끼와 리저드>는 답보적으로 진전되는 상황을 방치하고 캐릭터들의 감정을 설득시키는데 미숙한 멜로다. 영화는 온전히 캐릭터의 행위나 태도만으로 그 순간의 감정을 곧잘 묘사할 뿐, 캐릭터의 감정에 조언적 역할을 하는 상황을 제시하거나 연출적 뒷받침을 가미하지 못한 채 온전히 캐릭터가 자아내는 순간의 감정들을 방치하고 휘발시켜버린다. 사실 <토끼와 리저드>는 극적 의문을 해결할만한 결정적 서사를 감춰두고 서사적 진전과 함께 공개되는 기억의 너비를 늘려나가고 이를 통해 결말부에 등장할 결정적 순간의 목도까지 기다릴 관객의 인내심을 확보해나가야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대단한 감흥을 부를 만큼 인상적인 사건을 전개하지 못하는 <토끼와 리저드>는 단순히 두 인물간의 감정적 마찰만으로 러닝타임을 채워나가려는 듯 단조롭고 심심한 영화다.
자연광을 적극 활용한 투명한 이미지와 서정적인 음악을 통해 화보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토끼와 리저드>는 종종 희미한 감정에 홀로 도취되는 것처럼 보인다. 운명적이란 수사는 무색하고 사연은 지극히 작위적이며 감정은 얕아서 마음을 담기 어렵다. 제목의 모호함만큼이나 어떤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영화에서 두 남녀 배우는 적절히 제 몫을 다 한다. 다만 두 배우의 기능적인 연기를 좀처럼 감정적으로 보좌해주지 못하는 영화 덕분에 캐릭터마저 겉도는 인상을 준다. <토끼와 리저드>는 서사적 배열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적으로 확장하지 못한 채 그 단편적 찰나에 기댄 채 사연만 늘려나간 형태로서 감상을 느슨하게 만드는 영화다. 궁극적으로 그 지난한 운명적 예감을 실체로서 공개하는 결말부도 딱히 인상적인 수준은 아니다. 좀처럼 설득력 없는 감정들이 느슨하게 전시되다 뒤늦게 정체를 드러낸 실체가 별다른 파장을 형성하지 못한다. 명백히 실패한 멜로드라마다.
중국의 시성 두보의 오언율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절,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에서 제목을 빌린 <호우시절>은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라는 의미를 지닌다. <호우시절>은 곧 ‘호애(愛)시절’이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재회한 과거의 연인은 시간 속에서 낡아가던 기억을 현재에서 되새김질하며 다시 한번 로맨스적 예감을 꿈꾼다. ‘때를 알고 내린 좋은 비’처럼 ‘때를 알고 만난 좋은 인연’을 그린 <호우시절>은 낭만적인 로맨스 멜로다.
건설중장비회사 팀장으로 근무하는 박동하(정우성)는 중국 사천의 청두로 출장을 가게 되고 현지 지사장(김상호)을 만나 ‘두보초당’으로 안내를 받는다. 두보초당을 구경하던 박동하의 시선이 초당을 안내하는 여자 가이드에게 머무른다. 그 시선을 느낀 가이드의 눈빛에 놀라움이 선연하다. 과거 중국유학시절 연인이었던 박동하와 메이(고원원)는 그렇게 우연히 만나 서로를 알아보고 회포를 푼다. 우연한 만남 속에 지난 이별의 아쉬움과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이 감돈다. 엇갈림이 빚어낸 안타까움이 번져 그리움이 되어 앙금과도 같은 추억으로 침전한다. <호우시절>은 그 앙금과도 같은 로맨스적 추억이 현실에서 재생된다는, 판타지적 로맨스다.
수채화처럼 투명한 역광 톤으로 포착된 이국적 풍경 속에서 자리한 선남선녀의 이미지는 <호우시절>을 순정만화처럼 특별하게 치장한다. 특히 우월한 기럭지로 매장면을 특별하게 수놓는 정우성과 싱그러움과 우아함을 동시에 갖춘 고원원의 미소는 <호우시절>을 좀처럼 평범한 러브스토리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특별한 매력을 부여한다. 사실 국적이 다른 두 남녀가 우연히 재회해서 묵은 감정에 생기를 불어넣게 된다는 사연은 보편적이라기보단 특별하다 말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호우시절>은 그 특별한 사연에 담긴 감정의 보편성에 적절한 설득력을 부여하는데 성공했다. 먼지처럼 쌓인 세월을 털어내고 빛 바랜 감정을 다시 숙성시켜나가는 며칠 간의 로맨스를 풋풋하고 아련하게 묘사하며 그 말미에 긍정적 여운을 남기며 극적 낭만을 성숙시킨다.
본래 <호우시절>은 쓰촨성 지진을 추모하기 위해 세 개의 단편 옴니버스로 기획된 <청두, 사랑해>에 참여한 허진호 감독의 작품을 장편으로 리폼된 작품이다. 중국 청두를 배경으로 두 남녀의 짧은 재회와 이별을 그리는 <호우시절>의 단편적인 서사도 어쩌면 그 때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상 허진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유일하게 풋풋한 기운이 산들거리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만한 <호우시절>은 사실상 작가적 욕심보다도 기획적 태도가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해도 좋은 형태로 완성된 결과물이다. 그만큼 <호우시절>은 허진호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소품에 가깝게 이해해도 좋은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쓰촨성 대지진과 개인의 사연을 연동시키는 방식이나 그 현장을 예감하게 만드는 몇몇 이미지는 본래 <호우시절>의 기획의도를 재확인시키는 증거나 다름없다.
현실적 가능성을 담보로 낭만의 존속을 아련하면서도 첨예하게 그려내는 허진호 감독은 <호우시절>을 전작들보다 무던한 멜로로 완성했다. 새로운 로맨스를 맞이하기 위해 남녀는 환절기 감기와 같은 진통을 건너고 삶의 면역력을 높인 뒤 성숙한 계절에 들어선다. <호우시절>은 느낌표라기 보단 쉼표에 가까운 작품이다. 허진호 감독의 한 계절을 이루는 작품이라기 보단적절한 이음새에 가까운, 간절기 멜로다.
중국의 시성 두보의 오언율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첫 구에서 따온 <호우시절>은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란 본래 의미를 ‘때를 알고 만난 좋은 인연’이란 의미로 변용한다. <호우시절>은 곧 ‘호애(愛)시절’이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우연히 재회한 옛 연인이 다시 로맨스에 빠져든다. 엇갈림과 그리움을 매개로 운명적 러브스토리를 연출하고 앙금처럼 내려앉은 추억 속 감정을 현재로 소환한다. 국적이 다른 두 남녀가 재회해 먼지처럼 쌓인 세월을 털어내고 묵은 감정을 다시 숙성시켜나가는 며칠 간의 로맨스를 풋풋하면서도 아련하게 묘사해나간 말미에 발전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긍정적 여운이 아련하게 깃든다. 수채화처럼 투명한 역광 톤으로 포착된 이국적 풍경 속에 놓인 선남선녀의 자태가 마치 순정만화의 한 장면처럼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만 순정적인 로맨스의 보편적 감정을 설득력 있게 진전시켜나간다. 우월한 기럭지로 매장면을 화보처럼 수놓는 정우성과 싱그러운 미소 가운데서도 우아한 깊이가 묻어나는 고원원의 조화도 인상적이다. 현실적 가능성을 담보로 낭만의 존속을 아련하면서도 첨예하게 그려내는 허진호 감독은 <호우시절>을 보다 무던한 멜로로 완성했다. <호우시절>은 허진호 감독의 한 계절을 이루는 작품이라기 보단 적절한 이음새에 가까운 간절기 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