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적인 동성애 영화로 알려진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그 어떤 멜로보다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러브스토리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지독한 멜로물입니다. ‘이별을 통한 소녀의 성장통’이란 식으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건 영화가 끝날 무렵까지 그 이별이 성장으로 해소되기 보단 통증으로 내려앉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은 길에서 마주쳤던 엠마(레아 세이두)와의 우연한 재회를 통해서 예상하지 못했던 체험들을 거듭해나갑니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은 물론 아티스트로서의 미래로 나아가는 엠마와 그 주변부의 삶에 종속되기 시작하면서 삶이 예상 밖의 궤도를 돌게 되는 셈이죠.
단순히 성정체성을 깨닫는다는 것 이상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저편으로 나아가버리는 셈이에요. 결과적으로 아델에게 있어서 엠마와의 이별이란 감정적인 단절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기회와의 단절로도 이해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죠. 그만큼 이별이라는 진통은 아델의 삶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절망이자 비통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신이 보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저편까지 나아가 그 일상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 원점으로 튕겨져 추방돼버린 셈이니까요.
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히 좋습니다. 특히 아델 역을 맡은 아델 엑사르코풀로스는 전반적으로 영화의 서사와 함께 인상이 변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인데 이별 이후의 감정적 진폭을 드러내는 후반부의 연기는 정말 연기가 아니라 실제라고 믿어질 만큼의 감정적 몰입도를 보여줍니다. 충동적인 계기로 맞닥뜨린 이별에 의한 심적인 고통이 스크린 밖으로도 절절하게 전이되는 기분이죠. 게다가 그 반대편에 선 엠마 역을 맡은 레아 세이두는 거대한 감정적 파고를 형성하는 매개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이별 이후에 남게 되는 애틋함 같은 감정의 끈을 놓지 않음으로써 극적인 페이소스를 극한으로 끌어올립니다. 두 배우의 화학작용 자체가 이 영화의 감정을 입체적인 구조로 이끌어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 영화가 화제가 된 건 대단히 수위가 높은 여성간의 섹스신이 긴 분량으로 등장한다는 점이었죠. 그런데 대단히 적나라해서 한편으론 담담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은밀하고 농염한 연출을 위한 카메라 앵글이 동원되기 보단 사물을 관찰하듯 평범한 프레임 안에서 행위가 목격되는 인상입니다. 오히려 저는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무언가를 먹을 때 보는 이의 욕구를 건드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토마토 파스타를 너무나 맛있게 먹는 장면에선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느낌이기도 했죠. 색욕보다도 식욕이 강렬하게 느껴진다니 좀 묘하지 않습니까? 그건 아마 이 영화가 섹스신을 특별한 영화적 체험처럼 위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동성애라는 소재는 이 영화의 주요한 키워드가 될 뿐,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사안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결말부에서 묘사되는 찰나의 엇갈림을 보면서 ‘운명’이란 단어에 설득 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뒤바꿀 수 없는 결과를 등 뒤에 두고 터벅터벅 걸어가야 하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끄덕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델의 뒷모습을 비추는 엔딩시퀀스의 롱테이크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건 그래서입니다. 그 너머의 삶에 대해서 염려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걸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죠. 그렇게 그 너머를 살아가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요. 사실 저는 원작의 비극적인 결말보다도 영화의 결말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죽음에 대한 연민보다도 이면의 생에 대한 호기심이 지워지지 않는 여운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한편 영화에선 프랑스의 전인적인 교육 환경을 목격할 수 있는데 학생들이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는 가두 시위를 하는 신에서 '민영화를 반대한다!'는 대사가 나올 땐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물론 불법시위라는 목적을 앞세운 과격한 진압 장면 같은 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건 비단 저뿐만이 아닐 것이라고, 문득 생각하게 되네요.
젊은 남녀가 만났다. 우연한, 하지만 필연적인 만남이었다. 몸을 섞었다. 남자는 그것이 일발적인 우연이라 여겼지만 여자는 운명을 원했다. 여자는 상처 입었고, 남자는 미안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둘은 만났다. 서로 닮아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보다 절실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만남은 마냥 설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어떤 선을 넘어섰고, 그것이 자신을 해칠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문제는 여자였다. 여자 자신에게도, 남자에게도 그 만남은 독이 든 성배였다. 하지만 이미 세상의 끝까지 내몰린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는 그 만남을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이상일 감독의 <악인>은 너무도 담담하여 되레 끔찍하게 처연해지는 영화다. 제목 그대로 어떤 악인을 그리는 이 작품은 오히려 극명하게 악인으로 내몰린 이가 몸담고 있던 세계를 조명함으로써 명료하게 가로지를 수 없는 선악의 경계를 묻고 답한다. 쭈뼛하게 선 머리칼처럼 예민한 소설의 문체는 의뭉스럽고 건조한 낯빛의 영상 기법으로 변주되어 스크린에 투영된다. 소설에 내재된 장르적인 서스펜스나 냉소적인 태도보다는 좀 더 진지한 관찰자로서의 시선이 견지된 영화는 원작에 비해서 감성적인 여운이 깊게 확보됐다.
스릴러나 추리물에 걸맞은 소재를 지니고 있으며 극초반의 전개 방식 또한 그러한 의문을 발생시키는 형식으로 진전되고 있지만 <악인>은 서스펜스를 위한 무대가 아닌, 멜로적인 감수성이 보다 짙게 드리운 작품이다. 세상의 끝에 내몰린 듯한 두 남녀가 만나 서로에 대한 절실함으로 진짜 세상의 끝에 다다를 때, <악인>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그 흔한 논리로도 어찌할 수 없는 로맨스의 깊고 너른 영역을 대변해낸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악인’이라고 규정된 인물이 그 ‘악인’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정황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인물들을 비추는 과정을 통해서 진짜 악인의 실체를 드러내고 그 악인을 둘러싼 세계의 참상을 비춰낸다.
<악인>에서의 피해자들은 동시에 가해자들이고, 가해자들은 결국 피해자들이다. 그들은 누군가로 인해 삶이 망가진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삶을 망쳐버린 가해자이기도 하다. 무언가에 대한 소중함이나 절실함이 사라진 상실의 시대, 그 속에서 무언가를 아끼고 바라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이 내던진 말 한마디에 내몰리다 때때로 악인이 되어 그 세계로부터 달아난다. <악인>은 그 상실의 시대 속을 살아가던 어느 남녀가 만나 이루는 처연한 로맨스다. 서사적 흐름, 소재의 착상, 주제의식 등, 전형적인 멜로의 문법과 동떨어진 이 작품은 그런 여건을 통해서 보다 신선한 흥미를 자아내지만 끝에 다다라 결국 어느 멜로보다도 짙고 아득한 여운을 드리워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악인>은 그런 감정의 깊이를 통해서 선악의 경계를 보다 강렬하게 사유해낸다. 이 작품의 결말에서 드러나는 직설적인 강변은 <악인>이 다다르고자 했던 궁극적인 끝일 것이다. 세상의 끝에 다다라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던 두 남녀의 감정을 허물고 붕괴시킨 단초의 씨앗을 향해 영화는 경고하고 또 질타한다. 너무나도 순진한 명제라서 되레 잊거나 무시하는 이들에게 요구하는 극렬한 고찰, <악인>은 그러한 진지함이 마땅하고 옳은 일임을 설득시키는 명징한 영화다. 타인의 진심을 비웃지 말 것. 그것이 이 세계의 악을 몰아내고, 선을 보존하는 최선의 인간적 선택이자 방도이므로,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가치이므로, 그렇다.
여인과 소녀의 과도기에 자리한 듯한 한 여자가 어느 저택을 뒤로 한 채 덧없이 걸음을 옮겨 나간다. 어디론가 바쁜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한 언덕에 멈춰선 뒤, 황망한 얼굴로 세상을 응시하다 이내 영문을 알 수 없는 울음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이윽고 한껏 습기를 빨아들인 먹구름으로부터 매서운 비가 쏟아지고, 그녀는 ‘폭풍의 언덕’을 벗어나 비를 피해 어디론가 걸음을 옮긴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대신 정처 없이 나아가던 그녀는 외딴 집의 불빛을 발견하고 대문 앞에 다다라 문을 두들긴다. 이를 발견한 한 남자는 그 여자를 집 안으로 들이고 두 여동생과 함께 그녀의 기운을 북돋아준 뒤, 이름을 묻는다. 그리고 그녀는 답한다. “제인 에어” 그녀가 제인 에어다.
<제인 에어>는 여동생인 에밀리 브론테와 함께 영국의 고전적인 여류 소설가로 꼽히는 샬롯 브론테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이 투영된, 기독교와 남성성으로 무장한 세태 속에서 여성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며 성장한 한 여성의 진보적인 삶을 다룬 이 작품은 수세기를 걸쳐서 숱하게 출판됐으며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통해서 여러 판본으로 재생된 바 있다. 이는 곧 캐리 후쿠나가가 연출한 <제인 에어>가 그 가운데서 가장 근래에 제작된 판본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단지 또 한 번의 재현을 뛰어 넘는 <제인 에어>의 새로운 현시에 가깝다.
전체적으로 원작의 서사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 작품은 사실 원작소설의 서사적 줄기를 추출해서 최대한 잔가지를 쳐내버린 상태로서 스토리텔링을 다듬어낸 축약판에 가깝다. 하지만 원작과 영화의 부피차를 염두에 둘 때 이것이 불가피한 선택임을 감안한다면 영화가 성공적인 결과물을 완성해냈다고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순행적인 원작과 달리 서사의 중후반부 즈음을 먼저 재생시킨 뒤, 플래시백의 시동을 거는 이 영화의 서사적 선택은 결국 사연의 전후를 완전하게 가리고 그에 따르는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감상을 유도하는데 적합하다. 이는 단지 모두가 알거나 익숙한 원작의 서사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형태적 의미만을 염두에 둔 결과가 아니다. 이러한 서사적 호기심은 영화가 연출하는, 미스터리한 연출과 연결되어 영화에 묘한 서스펜스를 불어넣는다.
이는 <제인 에어>의 본질적인 줄기가 되는 로맨스를 언급하는 방식 안에서도 효과를 발휘한다.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에 대한 호감과 열정만으로 다가서는 남녀, 제인 에어(미아 와시코우스카)와 로체스터(마이클 파스벤더)의 관계적 긴장은 이러한 외부적인 서스펜스를 화려한 장식처럼 걸치며 진실한 감정의 응축에 일조하고 이는 로맨스라는 감정적 덩어리를 보다 쉽게 인식시키는 촉매로서 작동한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낭만적인 로맨스에 예기치 못한 반전적인 진실에 가 닿는 광경에서 이런 효과는 보다 극대화된다. 이는 원작이 지닌 고딕 로맨스의 형태에 가장 잘 근접한 형태라 이해되며 원작이 품고 있던 절실한 로맨스의 감정을 역시 보다 탁월하게 살려낸 영화적 해석이라 할만하다. 시대로부터 풍겨져 나오는 부조리한 광기를 세심하게 포착하고 인물의 감정과 행위에 섬세하게 이입시킨 뒤, 미스터리한 상황 속에 밀어 넣어진 인물의 혼란과 착시적인 시행착오들을 유려한 기승전결의 멜로드라마로 담백하게 풀어낸다. <제인 에어>는 조 라이트의 <오만과 편견>과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영국 고전 로맨스의 새로운 판본이자 효과적이면서도 독창적인 패기가 자리한 고전 각색물이라 할만한 수작이다.
풍요로운 광량을 입은 자연친화적인 풍광으로 생동감 있는 숨결을 불어 넣고 고전적인 품위를 걸친 인물들의 행위로서 품격을 전시하는 <제인 에어>는 이런 기반을 무대로 밟고 선 인물들을 통해 가장 본질적인 드라마의 감정선에 주목해 나간다. 무엇보다도 미아 와시코우스카가 연기하는 제인 에어는 이 영화의 핵심이자 주축이다. 유년시절부터 삶의 부침을 견디며 성장해야 했던 제인 에어가 희망과 절망의 질곡을 건너 진정한 사랑의 결실을 맺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대변하는 그녀는 또렷한 자태와 투명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롤타이틀을 확고하게 구축해낸다. 또한 낭만과 비극 사이에 선 ‘차가운 도시 남자, 하지만 내 여자에게 따뜻한’ 로체스터를 연기하는 마이클 파스벤더는 캐릭터의 특성과 함께 자신의 매력까지 어필하는데 성공한 인상이다. 그 성공적인 성장세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감상을 부르는 제이미 벨도 눈여겨볼만하다. 이러한 자질의 융화를 이끌어낸 캐리 후쿠나가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새로운 계기를 다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 라이트의 인상적인 데뷔작 <오만과 편견>을 연상시키듯 그는 <제인 에어>를 통해 고전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마음껏 과시해냈다.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나간 여인의 초상처럼 당돌하지만 선명하게, 이 오래된 연인들의 사연을 현대에 복원해내는 수준을 넘어서 탁월하게 재증명해낸 것이다.
터벅터벅,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는 여인의 시선이 공허하다. 두서 없이 움직이는 발걸음은 본능적으로 여인을 어디론가 밀어내고 있다. 멀리 달아나야 한다. 하지만 곧 여인의 눈에 어떤 깨달음이 맺힌다. 뒤를 돌아보고 다시 돌아서서 길을 돌아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곧 현실을 체감한다. 숨기고, 그 와중에 무언가를 먹는다. 살기 위해서 그렇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인의 귀 속으로 사이렌 소리들이 들어찬다. 그리고 떠오른다. 묵묵하게 아무런 기척도 없이, 만추, Late Autumn. 그렇게 영화는 관객 앞에 떠오른다.
(필름 원본이 유실됐다고 알려진) 이만희 감독의 동명 원작을 김수용 감독이 한차례 동명의 리메이크작으로 완성한 바 있는 <만추>는 바닥으로 나뒹구는 낙엽이 되기 전, 혼신의 힘을 다해 제 몸을 빨갛게 물들이며 강렬하게 마지막 삶을 치장하는 단풍과 같은 멜로다. <만추>는 살인죄로 체포돼 수감된 여인이 어머니의 부음으로 7년 만에 3일 동안의 외출을 얻게 되고, 그 짧은 외출 중에 우연히 만나게 된 남자가 서서히 자신을 사랑으로 물들인다는 것을 직감하고 한 순간 강렬한 열애에 빠져든다는 로맨스물이다. 이미 같은 제목으로 두 번의 반복을 거친, 이 작품을 다시 한번 동명의 로맨스물로 리메이크한 김태용 감독의 <만추>는 이 묵은 감정의 허물을 벗기듯 오랜 신파의 유효기간을 다시 한번 연장한다.
(동명의 제목을 지닌) 이만희와 김수용의 <만추>가 시대상의 변화와 연출 형식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결과물이라면 시애틀의 이국적인 풍경으로 리모델링된 김태용의 동명 리메이크물은 그 상대적인 이미지만으로도 차별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시애틀의 풍경 속에 놓인 동양의 남녀는 자신들이 밟고 선 그 이국에서 온전한 타인으로 대비되며 유령처럼 도시를 배회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잉태하지 않았던 이국의 풍광 속에 머무는 두 남녀의 몽타주는 그 단적인 풍경만으로도 두 사람의 외로움을 한껏 드러낸다. 복역 중인 수감자 신분으로서 3일만의 외출을 허락 받은 여자와 자신의 육체를 이국에서의 새로운 생을 위한 밑천으로 삼은 남자의 만남은 그리하여 운명적일 수 밖에 없다.
<만추>는 시작부터 끝까지 감정을 증발시켜버리듯 적막한 감상 속으로 관객의 시선을 묵묵하게 걷게 만든다. 대사 하나 없이 탕웨이의 초췌한 표정만을 스크린에 가득 채운 오프닝부터 모든 서사의 뒤에 홀로 남겨진 채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기약할 수 없는 미래를 응시하는 탕웨이의 설렘을 여운처럼 남긴 채 새로운 시작을 기원하는 엔딩까지, <만추>는 무언가를 짐작하게 만드는 시작에서 염원하고 싶은 현실에 대한 기도로 끝을 맺으며 관객을 점차 갈망하게 만든다. 뿌연 안개가 걷히듯 러닝타임의 흐름과 함께 서서히 기승전결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서사는 감정적 자극을 최대한 차단하며 훈(현빈)과 애나(탕웨이)의 개인적 서사를 유추할 수 있도록, 그리고 두 인물의 관계가 어떻게 진전돼 나가는지 찬찬히 관찰할 수 있도록 강물처럼 서서히 극을 떠내려 보낸다.
범상치 않은 전력을 지닌 두 남녀가 시애틀에서 우연히 만나 단 3일 동안 애틋한 감정을 나누고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을 경험한다. 서서히 서로에게 진한 감정을 물들이는 두 남녀의 거짓말 같은 러브스토리가 담긴 <만추>는 두 인물의 화학작용에서 발생하는 감정적 온도차로 관객의 감상을 지배하는 멜로물의 특성에 발을 들이기 보단, 되레 감정을 증발시키고 저온으로 숙성된 감정을 결말에 다다라 여운으로 휘발시킨다. 고즈넉한 가을로 접어든 시애틀은 적막하고도 고요하며 그 속에서 방랑하다 조우하듯 마주친 두 동양 남녀의 사연은 저마다 처연한 짐작을 부르며 그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그만큼 숙연하게 무르익는다. 김태용의 <만추>는 마치 두 사람의 관계적 진전이 동시간대에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두 사람의 경험적 교감으로서 설득해낸다. 외로운 두 인물의 감정이 자연히 공감대를 이루고, 이런 감정적 교감의 가능성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넘어 점차 감정적인 깊이를 형성하게 된다.
백지와 같이 다양한 감정을 그려 넣기 좋은 표정을 지닌 탕웨이는 <만추>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평가될만한 자원이다. 그녀는 현빈의 들뜬 연기를 상대적으로 보완하는 동시에 극적인 흐름 안에서 분위기의 편차가 큰 <만추>의 균형을 잡아주는 추와 같이 자리한다. 현빈 역시 자신의 역할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듯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캐릭터와의 궁합도 적절하다. 현빈과 탕웨이의 이례적인 조합도 김태용 감독이 포착한 수려한 풍경 속에 잘 녹아 드는 인상이다. 이국의 낯선 풍경 속을 떠도는 외로운 타인들의 짧고 강렬한 러브스토리, <만추>는 생의 끝을 예감하듯 빨갛게 제 몸을 태운 단풍이 낙엽으로 떨어져 나뒹굴기 직전의, 애잔하고 서글픈 설렘을 전하는 가을의 끝과 같은 멜로다.
이만희의 동명 원작을 김수용이 한차례 동명의 리메이크작으로 완성한 바 있는 <만추>의 김태용 감독 버전은 전작들이 시대상의 변화와 연출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결과물이란 점에서 상대적으로 보다 차별적인 리메이크 영화라 할 수 있다. 시애틀에서 만난 동양의 남녀는 마치 유령처럼 관계 속에 파묻힌 채 말을 걸고, 우연히 재회한 뒤, 애틋한 감정의 교류를 느끼기 시작한다. 대사 한마디 없이 탕웨이의 초췌한 표정에 다가서며 스산한 감상을 일깨우는 인상적인 도입부부터 적막한 풍경 속에 아련한 여운을 남기는 결말부까지, <만추>는 시작부터 끝까지 감정이 증발된 인상을 유지하면서도 그 너머에 다다라서야 피어 오른 애수를 절감하게 만드는 멜로다. 현빈과 탕웨이의 이례적인 조합도 김태용 감독이 포착한 수려한 풍경 속에 잘 녹아 든다. 이국의 낯선 풍경 속을 떠도는 외로운 타인들의 짧고 강렬한 러브스토리, <만추>는 빨갛게 피어 오른 단풍이 곧 떨어져 나뒹구는 낙엽과 같이, 애잔하고 서글픈 설렘을 전하는 가을의 끝과 같은, 인상적인 멜로다.
<춘향전>은 언어에서 시작되어 문장으로 옮겨진 작자, 연대 미상의 구비문학이다. 대부분의 구비문학들은 다양한 근원설화로부터 그 명맥이 이어져온 것이라 추정되며 <춘향전>역시 <도미설화>나 <박색설화>와 같이 그 근본을 짐작하게 만드는 다양한 근원설화를 지닌 판소리 문학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아는 그 <춘향전>은 입과 입을 거쳐나가며 다양한 형태로서 변주되고 오늘날의 형태로서 정착된 결과물인 셈이다. 무엇보다도 그 종래적 형태를 결정짓는 요인은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다. 정절과 정조의 아이콘이라 불려도 좋을 춘향의 일편단심을 그리는 <춘향전>은 당대 사대부 양반들이 중시하던 유교적인 풍속을 대변하는 결과물로서 종착된 작품이다.
‘장안 건달 세계의 1인자 이서방’이라 불리는 방자(김주혁)가 ‘통속소설의 1인자’ 색안경(공형진)을 만나 춘향(조여정)과 몽룡(류승범) 사이에 놓인 자신의 과거를 소설화시켜줄 것을 제안하는 오프닝으로 출발되는 김대우 감독의 신작 <방자전>은 <음란서생>의 그것처럼 입을 빌어 전달되는 구비문학의 뉘앙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음란선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방자전>은 조선이라는 신분제 사회의 폐쇄적 풍속의 외관 안에 담겨있을 법한 ‘비공식 야사’를 조명한다. 이는 조선이라는 당대 시대에 대한 전형적 이미지 안에서 도발에 가까운 시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로 다양한 서민 문화가 향유됐던 당시 시대상을 떠올린다면 보다 자연스러운 묘사로서 이해될 만하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건 <방자전>이 지금 현재 이 시대 안에서 유효한 시도라는 점이다.
<방자전>은 한국영화가 사극을 다루는 근 몇년 사이의 경향을 대변하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상한 시대를 바탕으로 둔 풍기문란한 상상, 즉 체통을 중시하는 계급시대를 배경으로 둔 섹스어필한 야사는 근래 사극을 표방한 한국영화들의 어떠한 전형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거듭 시도되고 시행되는 이야기적 방법론에 가깝다. 또한 <춘향전>을 비롯한 다양한 구비문학들이 그 시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주되어 전승되고 명맥을 유지했던 것처럼 <방자전>은 오늘날에 있어서 <춘향전>의 유효성을 상기시키는 새로운 변주적 형태가 될 수 있음을 어필할만한 작품이다. 이는 근래 개봉됐던 <전우치>와 함께 한국 고전 소설의 현대적 쓰임새로서 비견될만한 이야깃거리로서 유용하다.
춘향과 몽룡의 서사를 중심으로 둔 <춘향전>과 달리, 그 제목처럼 방자를 중심에 둔 <방자전>은 기본적으로 <음란서생>과 유사한 서사적 리듬을 두르고 있는 작품이다. 섹스어필한 코미디를 골자로 풍자와 해학의 골계미로 치장된 전반부의 서사는 후반부에 다다라 비극적인 분위기를 두른 진지한 멜로드라마로서의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방자전>은 그 제목 자체만으로도 감지되듯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설정에 대한 변주적 묘미를 즐길만한 작품이다. 원작이 품고 있던 열녀 춘향의 절개를 적절히 뭉개고 덧댄 뒤, 절대적 규약에 가까운 계급사회의 풍토를 비틀며 적절한 도발과 풍자의 미덕을 채워나간다. 전작에 비해 과감해진 노출 수위는 파격적이라기 보단 적절한 감상적 자극을 야기시킬 만한 전시적 효과를 거둔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다. 다만 <음란서생>과 마찬가지로 애틋한 감상을 강박적으로 얹혀놓은 것처럼 멜로적 취향을 한껏 들어올리는 결말의 감정선은 조금 민망하다. <춘향전>의 기원에 대한 풍자적인 발상으로부터 자아나는 위트가 짙은 멜로적 뉘앙스 안에서 침전되는 기분이랄까.
무엇보다도 <방자전>은 캐스팅의 조합으로부터 숙성시키는 맛이 괜찮은 영화다. 캐스팅부터 묘한 감상을 부르는 주연배우들이 기본적인 음식맛을 유지하는 식재료 역할을 한다면 조연배우들은 특별한 맛과 향을 더하는 양념으로서 탁월하게 영화에 배어든다. 언제나 인상적인 캐릭터를 선사하는 오달수의 연기는 백문이불여일견이며, 그 누구보다도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송새벽은 영화의 히든카드로서 인상적인 방점을 찍는다. 아름다운 색감을 자랑하는 미장센은 덤이다.
모든 사람은 성장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성숙해지는 건 아니다. 성장이 신체적인 발육과 성징을 통해 이뤄지는 선천적 변이라면 성숙이란 사회적인 체계를 통한 교육과 학습으로서 완성되는 후천적 변화다. 아이들은 어른을 동경한다. 성장이 자신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고, 스스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 성장 너머로 자신의 꿈이 자연스레 안착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어른들은 시간을 뒤돌아본다. 때때로 아이였던 지난 날을, 좀 더 명확하게는 그 시절의 꿈을 그리워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유년 시절 꿈꾸던 미래의 청사진과 자신의 현실 사이의 거리를 체감하게 되는 일이다. 성장만으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지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되레 그 성장과 함께 그 꿈들이 그 시절에 머물러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길이라며 현실을 합리화시킨다.
성장이 개인적 영역에서의 완성이라면 성숙은 그 개인과 연관된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완성에 가깝다. 개개인의 성숙은 사회를, 그리고 세계를 성숙시킨다. 성숙은 개인의 자질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 주변의 도움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관계적 변화다. 성장이 성숙을 동반할 때 진짜 어른이 된다. 성숙한 어른들의 틈바구니에서 아이들은 보다 성숙해진다. 그리고 성숙한 교육이 이뤄진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유산처럼 물려주는 어른들의 아집이나 자신이 타협한 현실을 당연한 것이라 충고하는 어른들의 편견은 때로 교육적이란 말로 남용된다. 성숙한 교육은 성숙한 개인과 사회와 세계를 이룬다.
17세 소녀 제니(캐리 멀리건)는 명민하다. 아버지로부터 ‘옥스포드’ 진학을 강요당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학교에서도 옥스포드 진학을 기대할 만큼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다. 하지만 제니는 우등생이기 이전에 호기심 많은 소녀다. 옥스포드 진학의 유일한 걸림돌인 라틴어 공부보다도 첼로 연주와 샹송에 관심이 많으며 후에 프랑스 파리에 꼭 가보리라 다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시시하다 느껴질 만큼 평범한 일상을 흔드는 계기가 생긴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던 날, 첼로를 든 채 비를 맞고 서 있던 제니에게 낯선 중년 남자가 호의를 베푼다. 데이빗(피터 사스가드)의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온 제니는 그에게 미묘한 호감을 느끼고 그와 재회한 뒤, 자신이 꿈꿔왔던 혹은 예감하지 못했던 짜릿한 경험을 거듭해 나간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삶 가운데서 느끼지 못했던 희열을 만끽하고, 점차 지난 일상들이 시시하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린 바버가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썼다는 12페이지 분량의 회고록을 각색한 닉 혼비의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한 <언 애듀케이션>은 재기발랄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언 애듀케이션>은 17세 소녀가 우연히 찾아온 중년 남자와의 로맨스를 거치며 보다 성숙해지는 성장담을 그린다. 제 삶에 만족할 수 없었던 소녀는 우연히 찾아온 인연을 통해 자신의 테두리 내에서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낭만과 자유의 일탈을 겪어 나가고 그 특별한 경험과 짜릿한 감정에 도취되어 그것이 자신의 이상이라 믿게 된다. 하지만 뒤늦게 그것이 가혹한 착각이자 환상이었음을 깨닫는 소녀는이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졌던 기회의 가치가 얼마나 큰 가능성을 이뤄줄 수 있는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언 애듀케이션>은 ‘교육’이라는 본질을 관통하면서도 전형적인 교육관에서 벗어난 영화다. 경험을 통해 얻어진 성찰을 중시하면서도 본질적인 교육적 제도의 가치를 보다 돋보이게 설득한다. 일탈은 소녀에게 잊을 수 없는 감정적 생채기를 안겨주지만 이는 보다 단단하게 아물어 소녀의 성장을 수식하고 성숙으로 인도한다.
그 성장담은 <언 애듀케이션 An Education>이라는 제목이 직시하는 것처럼, ‘교육’이라는 명제에 대한 철학을 이끌어내는 은유적 구실을 하고 있다. 제니에게 주변인의 기대가 짐이 되는 건 옥스포드 진학의 가치를 설득해줘야 할 어른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탓이다. 기대는 버겁고 강요는 거세다. 제니에게 옥스포드 진학이란 드넓은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지 못할 현실로부터 달아날 기회를 마련해주는 기회일 뿐이다. 제니에게 얹혀진 어른들의 기대감은 제니가 품은 가능성에서 기인한다. 부모의 기대도, 선생님의 충고도, 그녀의 기대할만한 가능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태도나 다름없다. 문제는 그 가능성을 제대로 설득시켜 줄 어른의 충고가 부재하다는 것. 그 역할을 대신하는 건 경험이다. 경험은 좋은 교훈이 된다. 제니는 자신에게 찾아온 달콤한 경험을 만끽하고 안주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스스로 이뤄내야 한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을 손쉽게 포기한다. 하지만 이면의 진실을 마주한 뒤, 자신의 선택이 이룬 비참한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을 깨닫는 제니에게 다시 기회를 부여하는 건 교육이다. 학교를 떠나 옥스포드에 진학하지 않고도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혹은 그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제니는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뒤늦게 깨닫는다. 미성숙한 제자의 얕은 확신을 걱정하던 스승은 제자의 절망을 책망하지 않으며 그 경험이 남긴 교훈을 쓰다듬는다. <언 애듀케이션>은 교육이란 제 가치를 스스로 깨닫게 만들고, 그 대열에서 이탈한 이들의 시행착오마저 돌볼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인생에 지름길은 없다는 걸 알았다”는 제니는 자신이 멸시하던 스승에게 뒤늦게 도움을 청하고, 스승은 “그 말을 기다렸다”며 제자를 맞이한다. 달콤했던 일탈의 경험은 끝내 절망적인 파국으로 갈무리되지만 어린 소녀의 인생은 파국으로 멈추지 않는다. 제니의 말처럼 인생에 지름길은 없다. 막다른 길도 없다. 다만 자신의 인생이 지름길을 내달리고 있다고, 혹은 막다른 길로 내몰렸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필요한 건 설득의 힘이다. 성공을 위해 매달려야 할 가치가 아니라, 보다 폭넓은 인생의 가능성을 꽃피우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의 시행착오마저도 헛되지 않았다는 것. 교육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가명의 셀프메이드(self-made) 작가가 된 감독. 그 전업엔 사연이 있다. 감독은 눈이 멀었고, 빛이 없는 세상에서 연출이란 불가능의 영역이기에 눈이 보이지 않아도 가능한 이야기꾼으로 삶을 전가했다. 감독은 어쩌다 눈이 멀었을까. 그게 다 이 죽일 놈의 사랑 때문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부서진 포옹’이라는 의미처럼 어긋난 단추를 채우듯 균열적인 만남을 거듭하며 사랑을 나누던 남녀의 삶이 파편처럼 부서져 내리던 시절을 수집해 다시 삶을 복원해나가는 작업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잔잔한 심해에서 거친 수면으로 나아가듯 로맨스의 파국을 심상찮게 묘사해내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전작들과 궤를 달리하지 않지만 특유의 멜로적 파토스에서 새어 나오는 긴장감과 성격이 다른 스릴러적 서스펜스가 별도로 구성된 작품이란 점에서 특별하다. 풍부한 정서적 감흥을 자아내는 유려한 영상은 여전히 대단한 감상을 부여하면서도 서사적 흥미를 자아내고자 하는 노력이 전작들에 비해 두드러진다. 덕분에 기존의 알모도바르 영화로부터 감지되던 자극적 심상의 깊이가 얕아진 듯한 인상이 들지만 텍스트적인 재미는 좀 더 보충된 느낌이다. 동시에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알모도바르의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98)를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마치 자전적 고백이 담긴 것만 같은 입체적 감상마저 도모한다. 무엇보다도 알모도바르는 <브로큰 임브레이스>를 통해서 자신의 영화적 경력에 대한 새로운 전기를 선언하는 것만 같다. <귀향>이나 <그녀에게>만큼의 감정적 진동에 다다르진 못하더라도 페드로 알모도바르라는 이름 안에서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결코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페넬로페 크루즈를 선택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안목은 이번에도 또 한번 여실히 증명된다. 그것만으로도 일단은 만족스럽다.
의문스런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사건에 연루된 소년과 소녀. 용의자의 자살로 수사는 종결되고 사건은 마무리된다. 그리고 18년 후,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사사가키가 성인으로 성장한 소년과 소녀, 료지와 유키호의 행방을 쫓는다.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으로 꼽히는 ‘백야행(白夜行)’은 밀폐된 인물의 심리와 퍼즐 같은 서사적 진행을 통해 추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이다. 미스터리한 장르적 구조 속에 내재된 멜로적 감수성은 ‘백야행’의 특이점이라 할만한 지점이다. 은밀하게 감지되는 두 남녀의 감정적 교류가 평행적 거리감을 유지한 채 조각처럼 나열된다. 칠흑의 아스팔트를 얇게 가린 흰 눈처럼 멜로적 감수성을 가린 장르적 연막, ‘백야행’은 추리극의 베일로 감싼 멜로나 다름없다.
원작소설과 동명의 제목을 지닌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이하, <백야행>)는 이런 원작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리메이크에 반영했다. 무엇보다도 <백야행>의 관건은 각색의 완성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870페이지에 달하는 단행본 3권 분량의 서사를 2시간 여의 러닝타임으로 변환해낸 결과물은 원작을 접한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지점이다. 20여 년의 세월을 밀어내는 서사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과 두 남녀의 주변부를 채우는 다양한 인물들까지, ‘백야행’은 한 편의 영화로 변주하기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지닌 소설임에 틀림없다. 일본에서도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된 바 있는 ‘백야행’의 영화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건 소설의 원형을 온전히 영상으로 변환하기 위해선 긴 호흡이 필요하다는 제약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원작과 달리 영화가 서사의 너비를 14년으로 압축한 것도 어쩌면 서사적 너비를 덜어내기 위한 방편은 아니었을까 추측할만한 단서로서 유효해 보인다.
일단 <백야행>은 인물과 서사를 적절히 생략하거나 도치시킴으로써 원작의 부피를 줄여나간다. 서사적 방아쇠가 되는 살인사건으로부터 격발되듯 순차적으로 나아가는 원작의 순행적 서사와 달리 현재와 과거를 적절히 섞어가는 서사적 구성은 적절한 선택이라 할만하다. 섹스신과 살인신을 교차한 도입부의 영상도 나름의 흥미를 당긴다. 서사를 재배열하는 각색의 측면에서 <백야행>은 어느 정도 성공적인 선택을 이뤘다는 감상을 준다. 다만 서사적 변주와 함께 원작과 다른 뉘앙스가 발생한다.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원작이 차분하게 진전될 수 있는 건 긴 서사적 호흡 속에서 세밀한 묘사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러닝타임의 제약을 염두에 두고 축약과 변주의 과정을 거친 <백야행>은 서사적 부피가 줄어든 반면 정서적 질량은 보다 넘친다. 그만큼 밀도가 높아졌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나열의 방식에서 성과를 거뒀지만 감정을 넘쳐내는 방식이 지나치게 성급하다. <백야행>이 원작과 명확히 달라지는 건 후반부의 감정적 표현에서 비롯된다. 결코 마주서지도, 마주치지도 않는 남녀의 거리감이 명확히 묘사되는 가운데서도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멜로적 감수성을 독자에게 인식시키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멜로적 감정을 끝내 직설적으로 호소하고 만다. 구체적으로 후반부에 다다라 두 남녀의 마주침을 묘사하는 몇 번의 과정은 그 자체로 실패적이다. 얇은 비닐에 담긴 물처럼 쉽게 터져서 넘쳐흐를 것 같지만 좀처럼 새어나가지 않는 감정의 내밀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원작의 매력이라 한다면 <백야행>은 이를 거부하듯 정반대의 선택을 감행함으로써 신파적 비극성을 과감히 전시한다. 마치 원작에서 가려진 단면을 발굴하듯 두 남녀의 접촉을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선택은 영화의 몫이다. 그리고 선택에 따른 효과적 책임 역시 영화의 몫이다. <백야행>은 후반부에 다다라 온전히 신파적 눈물을 강요하는 멜로로서 스스로를 가둔다. 감정이 차고 넘친다. 연막과 같은 신비감과 모호한 흥미는 온전히 휘발되고 증발된다. 원작과 다른 형태를 지닌다는 건 리메이크로서 가능한 선택이다. 하지만 원작과 차별화된 장점을 선사하지 못했을 때 그 선택은 오판이 된다.
전체적인 분량도 길다. 137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원작의 부피를 염두에 둔다면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백야행>은 사건의 개연성을 확보하는데 실패한 드라마다. 서사를 직조하는데 급급할 뿐, 인물의 심리를 매만지는데 소홀하고 불필요한 감정을 덧씌워 감상의 사족을 벌려나간다. 사사가키의 대역이라 할만한 동수(한석규)는 원작에서 일종의 중계자 역할을 하던 캐릭터다. 원작으로 치자면 평행적인 거리감을 둔 묘연한 관계 속에 놓인 미호(손예진)와 요한(고수)의 접점을 설명하는 캐릭터다. 이와 달리 영화는 동수를 두 남녀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계자 캐릭터가 아닌, 또 다른 감정적 이입의 대상으로서 극에 활용한다. 역시나 다른 선택을 했다는 건 문제가 아니다. 다만 역시나 그 선택이 얼마나 효과적인가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동수가 자아내는 감정은 불필요한 확장이다. 딱히 그 확장된 쓰임새엔 설득력이 없다. 덕분에 감정적으로 집중돼야 할 두 남녀, 미호와 요한의 심리 묘사와 이를 보좌하는 배경적 묘사가 구체화될 너비를 상실하고 낭비적인 감정적 처리만 추가된다. 결말부에 다다라 두 남녀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일종의 강박처럼 보일 정도다. 앞서 해결하지 못한 감정적 충만을 뒤늦게나마 한방에 터트려야 한다는 강박이랄까. 결과적으로 후반부에 다다라 서로에 대한 연민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두 남녀의 태도는 극적인 일관성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형세에 가깝다.
<백야행>은 마치 전반과 후반이 다른 영화 같다. 이성적 형태로 나아가던 영화는 끝으로 다다를수록 눈물을 조장하는데 바빠 보인다. 결말부에 다다라 희미한 신파적 여운을 남기는 원작과 전혀 다른 감상을 부여한다. 원작과 유사한 형태적 결말을 선보이면서 전혀 상반된 감상적 차이를 남기는 건 이 때문이다. 시대적 분위기마저 적극 활용하는 텍스트의 방대한 부피를 이미지에 축약하기 위한 고민은 적당했지만 그 안에서 유지해야 할 감정의 질량적 보존에 무신경하다. 덕분에 전반적인 영화적 밀도마저 느슨해진다. 감정의 선이 불분명한 영화의 태도는 캐릭터들마저 그 감정 안에서 헤매게 만드는 것만 같다. 덕분에 배우들마저도 그 캐릭터의 늪에 빠진 것처럼 기능적인 묘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마냥 보인다.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선사하던 인물의 매력도 온데간데 없어진다.
백열등과 같이 미열한 밝기를 유지하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형광등처럼 깜빡 거리다 이내 환해진다. 덕분에 감정은 숨을 곳을 잃은 채 지나치게 명확히 노출된다. 감정적 명암의 안배에 실패했다. 감춰야 할 것과 드러내야 할 것에 대한 변별력이 온전히 상실된 것만 같다. ‘블랙 앤 화이트’의 대비적 미장센을 부각시키는 것도 좋지만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백야행>은 내밀하게 보존된 감정적 여운을 놓쳐버린 채 구질구질하게 감정적 호소에만 집착한다. 원작과 차별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원작의 장점을 놓쳐버린 셈이다. 결국 감상적 명암만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명확한 감상이란 분명 긍정적인 쪽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파주>는 <질투는 나의 힘>이후로 7년 만에 내놓는 작품이다.
내가 참 오랜만에 영화를 찍긴 찍었나 보다. (웃음) 이런 생각이 제일 크게 남는다. 그리고 그게 이상해. 내가 7년 만에 영화를 찍는다는 건 나도 잘 아는 사실인데 그걸 남들이 막 말해주니까 오히려 나중에 내가 너무 오랜만에 찍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게 이상하다. (웃음) 나는 그냥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거든. 요즘 감독하겠다는 사람도 많고, 기회가 금새 오지 않는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이렇게 오랜만에 영화를 찍느냐고 그러니까. (웃음) 그게 신기하더라.
<질투는 나의 힘>에는 장난끼가 배어든 듯한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파주>는 시종일관 털이 곤두선 듯한 긴장감이 지속된다. 캐릭터의 내밀함은 두 영화의 유사한 지점이라 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옛날 영화들 보면 배우들이 진지하게 말한다. 그런데 요즘 영화를 보면 배우들이 약간 낄낄거리듯 말한다. 좀 더 풀어진 듯 보여져야 자연스러운 걸로 인식된다. 옛날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다 정중하지 않나. 그런데 요즘 영화들에선 꼭 그렇지 않다. 그런데 난 그냥 요즘에 만든 영화지만 정중하게 꼭 할말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파주가 영화의 배경이 된 건가?
파주는 안개가 많이 핀다. 어떤 한정된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고, 그 곳의 정서를 대변하는 자연적 풍광이 이미지로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파주에 안개가 많이 피는 걸 보고 파주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개는 <파주>의 심리적 밀폐성을 대변하는 미장센이자 전체적으로 내밀한 분위기를 느끼게 만드는 장치다. 그 안개로부터 어떤 감흥을 받았나?
그렇게 짙은 안개는 생애 20여 년 만에 파주에서 처음 봤다. 지금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안개를 경험해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나도 20여 년 만에 파주에서 처음 경험해봤으니까. 그런 안개를 화면에 담으면 마치 사막에 살던 사람이 영화를 통해서 눈이라는 걸 처음 보듯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짙은 안개를 처음 보겠구나 싶어졌다. 그러니 꽤 담을만한 게 아니었을까. (웃음)
그 물리적인 형태 자체로서 감흥을 얻은 건가, 아니면 그 형태를 통해 표현적 정서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감흥을 얻은 건가.
내가 경험했을 때 그것이 내게 정서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에게 정서적으로 작용했듯이 영화 안에 그걸 끌어왔을 때 보는 사람도 그렇게 작용 받길 기대하는 게 있었다. 다만 거기에 어떤 상징이나 의미를 내 스스로 붙여본 적은 없다. <파고>(1997)를 보면 눈이 아주 많이 나오는 것처럼. (웃음) 그냥 그 장소에서 부각시키고 싶은 인상이랄까? 그런 거지.
멜로적 복선이 정서적으로 밑바탕에 놓여있지만 꽤나 미스터리적인 분위기가 영화를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꽤나 흥미로운 서브 플롯들이 가지를 치고 있기도 하고 서사의 이동이 잦다. 그 덕분에 이야기를 쫓아가는 긴장감도 발생하는 것 같다. 단순히 멜로영화라고 생각했을 땐 상당히 독특한 지점의 구성이다.
멜로영화라는 게 두 남녀가 사랑하는데 장애가 있고, 그 장애를 어떻게 넘어서기도 하고, 못 넘어서기도 하는 그런 것 아닌가. 이 영화에서도 장애가 등장하고, 역시 장애를 못 넘어서는 그런 멜로영화 범주 안에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보통 대부분의 멜로영화는 그런 장애를 하나 정도만 설정해놓지만 <파주>에선 그렇지 않다. 서브 플롯도 두 개 정도 되는 것 같다. 메인 플롯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라면 서브는 언니가 어떻게 죽었나, 와 철거 현장에 관한 플롯이다. 결국 결말에서 두 남녀가 어떤 식으로든 잘 살 수 있도록 뭔가 해결되고 풀어내야 할 부분이 잘 풀려지지 않는 건 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남자는 절대 말할 생각이 없고, 여자는 일단 그걸 알아야만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개발 철거를 놓고 벌어지는 갈등이 꽤나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 재개발 철거에 관한 서브플롯이 원래 구상된 소재였던 것인가, 아니면 후발적으로 끌어들이게 된 소재였나.
결말을 원래 이렇게 상정했다. 남자가 다 같이 하는 일의 핵심 인물인데, 여자가 다 같이 하는 그 일을 망쳐놓는다. 그래서 이 남자가 다 같이 하는 일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이 여자와 관련된 개인적인 일을 선택할 것인지, 의 갈래에서 다 같이 하는 일을 망쳐놓더라도 개인적인 일을 선택한다. 이게 이 시나리오를 쓸 때 가장 큰 구상이었다. 철거 투쟁도 그래서 들어온 거다. 둘의 관계에서 이 남자가 자기가 해왔던 커다란 대의적 일도 포기할 만큼 개인적인 선택을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 철거 투쟁 자체가 둘의 관계를 명료하게 드러내주는 수단이다. 그 남자가 어떤 사회적인 지탄을 받거나 사회적인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커진다 해도 결국 그 여자를 위한 선택을 먼저 염두에 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건 멜로드라마 범주 안에 있는 거니까.
<파주>에선 구체적인 연도나 연원을 알리는 근거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초반부 TV에서 흘러나오는 범민족대회 연대사태에 관한 뉴스 보도를 제외하면 그 시대성을 가늠할 방편이 부재하다. 단지 서사를 감지하게 만드는 자막과 짧은 대사가 몇 번 등장할 뿐이다. 처음에는 편집본에 자막으로 연도를 넣었다. 그 버전으로 모니터를 했더니 더 헷갈려 하고 혼란스러워하더라. 처음 등장하는 게 1994년인데 그 다음에 ‘몇 년 후’ 자막이 나오니까 자꾸 계산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냥 현재 시제를 기준으로 8년 전, 7년 전, 3년 전, 해주는 게 이해하기 편하겠다는 결론이 났다.
시대상에 대한 적확한 적시가 등장하지 않는 덕분에 몇몇 장면은 되레 현대적이란 느낌을 준다. 범민족대회 장면은 얼마 전 촛불시위 같고 철거위 장면은 얼마 전 용산 사태를 보는 기분이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은 그 뉴스 장면 보고 촛불시위 때문인지 알았다 하더라. (웃음)
구시대적인 지표를 영화에 반영했을 뿐인데 그것이 되레 현대적인 감상을 부른다니 시대 자체에 대한 아이러니가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보시는 분들이 원래 설정한 연도보다 더 최근으로 봐도 상관없고, 심지어 그걸 촛불시위라고 보더라도 상관은 없다. 나에겐 단지 아까 말했던 다 같이 하는 일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가 중요했을 뿐이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다가 철거 투쟁을 설정하게 됐다. 내 생각엔 한국에서는 늘 짓고 부수기 때문에 그런 게 계속 진행되는 일이고, 앞으로도 한참 계속될 거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시나리오 쓸 당시에 사람들은 너무 옛날 얘기라고 생각하더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에 용산에서 불행했던 그 사건이 있고 나서야 사람들이 지금도 이런 일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조금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파주>를 후일담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후일담이라 생각하지 않고 지금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플래쉬백과 점프컷이 자주 활용되는데 그 안에서 인물의 오해를 그려나가고 그 오해를 객석의 감상적 오해로 전이시킨다. 서사적 배열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서사가 긴 영화는 그렇게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게 할 수 밖에 없다. 서사에 단절을 시켜줄 수 있어야 어떤 이야기를 점프시킬 수 있는 건데 서사가 단선적으로 흐를 때는 점프시키기가 상당히 곤란하다. 그러니까 긴 시간대를 다룬 이야기에서 현재와 과거가 넘나드는 건 불가피한 방식 같다. 일종의 추리극 같은 경우가 아니고서야 그 방식 안에서 조금 다른 형태를 보여주는 건 어렵다.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결과가 있고 그 결과를 추적해가는 거니까. 하지만 내가 무슨 추리극을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니니까. 그리스 비극 중에 오이디푸스 왕에 관한 이야기처럼 현대에서 과거의 일을 추적해나가고 분석하면서 조합하는 형태가 나에겐 재미있고 흥미로운 방식이라 생각되더라. 물론 그게 흥미롭지 않은 어떤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웃음)
서사적 이동이 잦기 때문에 플롯을 쫓아가는 감상 자체에서부터 묘한 긴장감이 유발되는 느낌이기도 하다. 그런 긴장감 자체가 멜로라는 장르 안에서 특이점을 부여하게 되는 것 같다.
보통 어떤 남녀의 사랑에 장애가 있으면 보통 부모의 반대거나 주변의 역경인데, <파주>는 그보단 언니의 죽음에 대한 의혹에 대한 이해적 차이가 장애가 된다. 언니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남자는 밝히려 하지 않고, 여자는 그걸 알아야겠다고 하는 심리가 장애로서 결말까지 이어지는 거다. 그냥 내 생각엔 평범한 거 같다. (웃음)
<질투는 나의 힘>에서 이원상(박해일)의 전 애인이 한윤식(문성근)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밝히겠다고 협박하다 실제로 그것을 행했을 때 그 이후로 뭔가 엄청난 파국이 벌어질 것 같지만 정작 상황은 담담하다. <파주>에서도 은모가 중식의 속내를 알게 된 순간 뭔가 파격적인 상황이 펼쳐질 것 같지만 오히려 상황이 무마되는 동시에 시퀀스 자체가 종료된다. 어떤 면에서는 관객이 품고 있던 상상이나 기대할만한 긴장감을 무마시킴으로써 파격적인 감상을 부르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내가 당신을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었지만 말은 못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말을 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둘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달라지진 않는다. (웃음) 현실은 원래 그렇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것이 대단한 비밀처럼 그려지고 그것이 밝혀지는 순간 커다란 일이 벌어질 것 같도록 보는 사람에게 훈련이 돼있다고 할까? 만약 비밀이 밝혀지면 복수를 해야 하거나 아니면, 너도 사랑했니, 나도 사랑했다, 이러면서 울고 불고 좋아해야 하거나, 꼭 그래야 하나. (웃음)
최은모의 캐릭터가 <파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단지 비중의 문제가 아니라 내밀하게 감정을 이끌어가면서 전체적인 영화적 분위기를 조율하는 인물이랄까. 그런데 서우에게 그 캐릭터를 맡길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어디서 얻은 것인가?
어차피 20대 중학생 배역이랑 성인 배역을 같은 배우로 할 생각이었다. 같은 배역으로 한다고 치면 그 배우의 나이는 20대 초반이어야 할 텐데 내가 생각할 때 지금 20대 초반의 배우들은 누구랑 해도 아직 다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모험을 하더라도 서우 씨와 하는 게 제일 좋겠다 생각했다. 내 개인적인 느낌에 서우 씨 얼굴을 보면 되게 강인하다 느껴지는 면이 있다. 사실 이런 말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성형을 하면 그 사람의 개성이 없어지고 어디서 많이 본듯한 보편적인 미인이 된다. 하지만 서우 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게 있다. 워낙 자기 개인성이 강렬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서우 씨를 보면 마치 들짐승과 같은 본능이 떠오른다.
동물적이지.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압도당하지 않는 눈빛을 지녔다. 단순히 겁을 내기보단 마치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경계하는 것 같다고 할까.
음, 맞아. 되게 에너지가 높다. 기가 아주 높은 친구다. 어차피 어떤 20대 초반의 배우랑 해도 그 분들의 경험이나 경력은 다 시작점에 있기 때문에 피차일반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서우 씨가 원래 가진 에너지가 다른 배우보다 더 커 보인다는 느낌이 막연히 들었다.
<파주>를 통해 서우라는 젊은 배우의 잠재력이 많이 발견됐다고 해도 좋을 거 같다. 그 동안 서우가 보여준 외향적인 캐릭터와 달리 <파주>에서 연기한 최은모는 은밀하고 내향적인 캐릭터다. 그만큼 디렉션의 역할도 중요했을 것 같다. 특별한 스트레스는 없었나.
서우 씨 연기는 깨끗하고 순간적이다. 순간적으로 되게 큰 에너지가 나온다. (손가락으로 책상 가운데를 짚으면서) 가끔 서우 씨가 이 정도 지점에서 표현을 하면, (손가락을 오른쪽으로 옮겨서) 여기서 조금 이쪽으로 갔으면 좋겠다며 그 방향에 대한 코멘트를 해야 한다. 그러면 이만큼 간 게 아니라 (더 오른쪽으로 손가락을 옮기면서) 이만큼 갈까 봐. (웃음) 어떤 배우의 유동성이 좁으면 내 말이 잘못 들어가도 이렇게 더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밀어낼 수 있는 폭이 있는데 차라리 서우 씨는 말을 해도 안 해도 불안한 거다. 워낙 순간적으로 강하게 뛰쳐나오는 에너지가 커서 어떻게 말해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은 됐다. 잘못 말하면 확 튀어 올라서 말하지 않는 것만 못한 느낌이 될 것 같은 느낌. 그런데 딱 상태가 좋게 잡히면 그 지점이 너무나 좋으니까.
<질투는 나의 힘>이나 <파주>나 보편적인 형태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는 아니다. 어쩌면 보편적인 형태의 사랑을 그리는 것에 대해서 흥미가 없어서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런 형태의 사랑을 통해 드러낼 수 있는 인물의 심리가 보다 흥미롭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사랑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경험이 많거나 깊은 감정을 잘 보여주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영화에선 왜 그런 형태를 끌고 오는가 생각해보면 평범한 사람들도 다 해보는 연애니까, 누구나 다 해보는 일로서 그 형태를 갖고 오기가 쉽기 때문인 거 같다. 그냥 편의적으로 갖고 올 수 있는 소재를 다른 형태로 가져가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투는 나의 힘>이나 <파주>의 결말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희비에 대한 해석이 엇갈릴 만한 장면이다. 결과적인 형태 안에서는 비극 같지만 궁극적으로 점지되지 않은 미래적 상황에선 희망을 예감해도 무관할 것 같다. 어쨌든 김중식을 가둔 최은모는 파주를 떠난다. 과연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진 것일까?
아마 여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라고 생각할 거 같다. 물론 일을 보러 언젠가 오겠지. 예를 들어서 부모님 집을 팔러 온다던가, 뒷수습을 하러 임시로 오는 경우는 있겠지만 인도에서 돌아올 때처럼 다시 파주에서 살아야지, 라는 마음으로 돌아오진 못할 거 같다. 그리고 모르겠다. 어차피 누구라도 모를 일이지. 그냥 떠날 때 심정이 그랬을 것 같다. 김중식 얼굴도 다시는 보지 않아야겠다 생각했을 것 같고. 그 사람이 찾기 전에 내가 먼저 찾을 명목을 지워야겠다 마음먹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