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물리적 고향은 서울이다. 고3 말기에 민증을 받고 알았다. 사실 어린 시절엔 고향이 광주인 줄 알았다. 그냥 광주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 서울로 갔다가 다시 광주로 리턴한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민증이 처음 나왔을 때 친구들과 서로의 민증을 돌려보며 '너 얼굴 왜 이따구냐'란 식으로 낄낄대다가 사과를 맞고 중력을 알았다는 뉴턴식 깨달음을 얻었다. 다들 뒤에 일곱 자리 번호 두 번째 숫자가 5인데 나만 0인 거다. 이래저래 알아보니 그 자리가 출생지역에 대한 고유번호라고 했다. 5는 광주, 0은 서울. 출생의 비밀이 궁금해서 어머니께 여쭤봤더니 서울 출생이 맞다고 하셨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내 고향을 물어볼 때 고향이 서울이지만 광주에서 오래 살았다고 말했다. 한번은 누군가가 광주가 고향이라고 말하는 게 창피하냐고 했다. 병신이었다. 그래서 나는 '너는 네가 병신인 줄 아냐'고 되묻는 대신 그 뒤로부터 그냥 고향이 광주라고 했다. 내 유년 시절의 기억도, 그때 만나서 지금까지 좋은 친구들도, 모두 광주의 자장 안에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광주가 그 어느 도시보다도 뜨거운 자부심을 가질만한 도시라고 생각한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시대가 좆 같아서 그걸 몰라주니 그렇지.
2. 2년 만에 광주에 다녀왔다. 다음 주에 결혼할 친구가 있는데 다음 주엔 마감 때문에 바쁠 터이니 한 주 전에 보기 위해서였다. 마침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은 많이 변해있었다. 결혼한 친구도 많았고, 아이가 있는 친구들도 제법 생겼고, 살도 많이 쪘고. 어쨌든 시시껄렁한 농담도 하지만 서로에 대한 의미 있는 격려와 조언도 오가는 자리였다. 오랜만에 반갑게 회포를 풀면서도 어제 만난 듯이 편한 친구가 있다는 건 언제나 살아있어야 할 이유를 깨닫게 만든다. 항상 광주에 내려가면 친구들이 차를 몰고 와서 에스코트해주는 덕분에 정말 편하고 즐겁게 여행하게 된다. 이번에도 그랬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3. 어린 시절의 광주는 내게 좁고, 빤한 곳이었는데 지금의 광주는 내려갈 때마다 새롭다. 익숙한 곳들은 대부분 변한 곳이 됐고, 변한 곳들은 대부분 익숙한 곳에 있다. 그 와중에 변하지 않고 제 자리에 있는 것들을 보고 감회가 새로워질 때마다 내 삶의 물살을 느낀다. 어느덧 많이 밀려왔구나. 그렇다. 그래도 여전히 그 광주에서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부반장이었다는 이유로 아직도 나를 '우리반 부반장'이라 불러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나마 잘 살았다는 위안을 준다. 덕분에 나의 고향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그립다는 감정을 깨닫게 만든다. 그 감정을 안고 잘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다시 되새기게 만든다.
4. 나이가 들어서 광주에 내려가면 새삼스럽게 이 도시가 얼마나 좋은 도시였는지 깨닫게 된다. 번잡하고 변화가 빠른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리고 단순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아름답고 정겨운 구석이 많은 도시라는 걸 느끼고 돌아온다. 다행이다. 나의 고향이 아름답다는 것은,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은. 내 친구들의 터전이 그렇다는 것은. 다행이다. 다시 내려가고 싶은 고향이 있다는 건. 그러니 잘 살 것이다. 나는 광주가 보다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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