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권 인터뷰

interview 2008. 5. 31.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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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데뷔한지 10년이 넘었다. 스스로 뭔가 달라졌다는 게 느껴지나?
아무래도 영화에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뭔지 좀 더 잘 보이는 거 같다. 내가 해야 될 부분과 하지 말아야 될 부분도 보이고. 예전 같으면 그걸 잘 몰라서 무조건 플러스 알파를 더 얹어서 하거나, 더 해야 될 부분이 있는데도 멍청하게 안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이젠 그에 조금 더 맞추게 된 거 같다. 물론 아직도 멀었지만! (웃음)

캐릭터에 접근하는 게 좀 더 수월해졌다는 말처럼 들린다.
기술적으로는 조금. 그래도 매번 역할을 만날 때마다 절대 호락호락하진 않지. 작품마다 감독님도 매번 다르고.

작년 한해는 정말 바빴을 거 같다.
2년 동안 쉬었던 걸 몰아서 했으니까. (웃음)

제대하자마자 바쁘게 출연하더라. 그래도 한동안 공백이 있었는데 캐스팅 제의가 꾸준히 들어왔나 보다. 어떤 면에서는 스스로 걱정되는 일이었을 법한데.
죄다 거절하지 못해서 많이 하게 된 것도 있지. 거의 시간되는 대로 출연했다. 근데 나도 많이 바랬다. 군대 있을 동안 나가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굉장히 컸으니까. 고마운 일이지.

연예사병을 한번쯤 염두에 두진 않았나?
군대에 있을 때는 자기 생각이 있을 수 없지 않나. 하나마나, 까라면 까야 되니까.(웃음) 나도 전투경찰로 가라니까 간 거지. 아니요. 저 연예사병갈래요. 이럴 수는 없는 거고. 병장 말년, 전경 식으로 말하자면 수경이나 되야 자기 의사표현이나 하고 말 좀 하지. 훈련소에서는 뭘 알았겠어.(웃음) 단지 내게 군대 2년은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기 때문에 빨리 덜어낸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사실 좀 더 일찍 가려고 했지만 그 때마다 캐스팅 제의가 들어와서 결국 애초 생각보다 늦게 가게 된 걸로 알고 있다.
사실 난 입대영장 받고 배우를 시작했다. 영장 받고 이제 군대가야지 했던 게 이제 스물 한 살 때, 98년도니까 10년 전이다. 그래서 군대 가기 전에 재미난일 없을까 하다가 학교 조교로 있었던 매형 권유로 오디션 봤다가 결국 그로 인해 배우생활을 하게 됐다.

그게 바로 <송어>?
그렇지. 그렇게 <송어>로 시작해 군대라는 짐을 계속 어깨에 얹고 배우 생활을 하다가 결국 <신부수업>까지 끝나고서야 이제 겨우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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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가면 그만큼 고생인데.
나이 먹어서 가면 안 좋다.(웃음) 군대는 아무것도 모를 때 일찍 갔다 와야겠더라. 그냥 고등학교 끝나고 대학에서 자유를 조금 맛봤다 싶을 때쯤이나. 자유가 완전히 몸에 배어버린 뒤에 가면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군대 가기 직전에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공연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학 시절 이후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알고 있다. 혹시 더 있는데 내가 모르는 건가?
아니. 없다. 사실 내가 연극영화과 나오긴 했지만 전공은 영화연출이다. 동국대학교 연영과는 입학하면 2년 동안 커리큘럼이 같다. 영화로 들어왔어도 일단 무대 작업부터 먼저 해야 하고, 선배들 연기할 때 못질부터 먼저 해야 된다. 4학년이었던 이성재 선배님이나 김주혁 선배님이 무대에 오를 때 난 밤새도록 못질해서 세트 만들고, 의상 만들고 그랬다. 하지만 솔직히 난 연출 전공이라 연극에 뿌리를 둔 배우라고 말하긴 빈약한 게 사실이다.

예전에 농담처럼 주인공 친구 전문배우라고 스스로 말했다. 아무래도 조연배우로 인식된 자신의 상황에 대한 우회적 발언이 아닌가 싶다.
내가 인터뷰할 때마다 김인권씨는 조연인데 주연하고 싶지 않느냐, 주연배우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질문을 상당히 많이 듣게 된다. 그에 대해 내 마음을 솔직히 말하자면 주연은 하고 싶다. 하지만 그건 마치 하늘을 날고 싶다는 것과 마찬가지처럼 느껴진다.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고 싶다는 게 누구나 지닌 생각이듯, 내가 주연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그것과 비슷한 거 같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하늘을 못 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주연에 대한 생각은 당연히 갖고 있지만 단지 현실적으로 이에 대한 복잡한 문제들이 있고, 내가 아직 갖추지 못한 부분도 스스로 알고 있다 보니까 그건 아직은 안되겠다고 생각한다. 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은 조금 깊이 생각해야겠지. 하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엔 김인권 씨가 주연을 해줘야 되겠다, 이런 날이 올 수도 있겠지. 물론 주연이 아닌 조연이라도 굳이 김인권 씨 아니면 안되겠다고 하면 그것도 어디겠냐.

조연이라고 같은 조연은 아니다. <숙명>에서도 캐릭터의 선은 상당히 굵은 편이었으니까.
시나리오에 세 번째 주인공이라 명시되어 있는 만큼 주연급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비중은 된다. 하지만 난 주연이 확실히 있는 상황에서 도와주는 게 조연이라고 본다. 이번 영화에서 송승헌 씨가 연기한 우민이 확실한 주연 역할이고, 난 주인공 친구 역할로서 모든 사건에 동기부여를 해주는 거니까 말하자면 도와주는 역할로서 조연이 맞지. 우민 역할이 더 동기를 가질 수 있도록, 우민이가 더 불쌍하고 더 피폐해지는 모습을 보일 수 있게 그가 처한 상황을 더 암담하게 만드는, 그래야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 우민이가 끌고 가는 힘이 더 강해지지 않을까,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했으니까.

도완은 작년에 연기했던 캐릭터들보다 입체적인 성향을 지녔다. 데뷔작이었던 <송어>의 태주나 <플라스틱 트리>의 수처럼 어떤 트라우마가 보이기도 하고.
일단 그 트라우마가 상처, 결함의 의미로 이해하면 될까?

상처를 지니게 된 근본적 이유라고 할까, 단순히 말하자면 응어리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 연기를 할 땐 내가 배우로서 풀어볼 수 있는, 정확히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내공을 끌어내는 어떤 주머니가 있는 거 같다. 그런 트라우마가 나도 모르게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그러다가 인물과 가까워지면서 그게 나왔을 수도 있고. <송어>에서도 정신 없게 굉장히 열심히 했는데 그때와 느낌이 비슷했다. 뭐랄까, 연기를 통제한다기 보단 그 통제를 벗어나 어느 순간 극단적 흐름을 타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런 데서 인간의 본 모습이 보이기도 하잖아. 나도 트라우마가 있긴 있는 거 같다. 사람은 누구나 다 비슷하니까.

그런 극단의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자신과 소통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인간도 동물이다. 사회에서 묻혀 살면서 도덕에 대한 교육, 학습을 거치고 그것이 몸에 배면서 동물적이고 야생적인 면은 거세당하는 거지. 게다가 요즘 시대가 남성성을 최대한 거세하려는 시대니까. <숙명>도 시대적으로 보자면 가위 들고 잘라버리기 위해 덤벼들만한 것이다. 그건 이 시대에 있어서는 안될 만한 것이거든. 여배우도 마찬가지지만 남자배우라면 자신의 야생성이나 동물적인 무의식과 의사소통을 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걸 못하면 연기를 할 때 난해해진다. 연기를 해도 자기 안에 있는 그런 부분과 연결을 못하면 재미없어진다. 근데 김해곤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 자기 속에 있는 남성성, 야생성하고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배우 출신 감독으로서 배우로서의 직업병이 작용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런 동물성과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멜 깁슨 감독이 만든 <아포칼립토>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도 짐승처럼 잔인한 인간의 동물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래서 종종 (송)승헌이 형이나 (권)상우 형한테도 멀쩡하게 좋은 역할 다 놔두고 왜 지저분하고 망가진 역할 하냐, 이러는데 사실상 그분들도 자신의 야생성을 끌어내주는 걸 보면 거기에 매혹되고 매료 당하는 거겠지.

사실 <숙명>의 캐릭터 중 도완이 가장 잔인하게 느껴진다.
나 같은 경우는 피가 나오니까. 도완은 자기 몸을 막 그어버리고 그러기도 하고, 솔직히 푹 찌르는 거 보단 쪼잔하게 살짝 그어버리는 게 더 잔인해 보인다. 그렇다 보니까 지저분해 보이는 것도 있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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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칼로 미진의 얼굴을 긋는 장면은 섬뜩했다.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섬찟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그렇게 한다는 게 그 자체로 상당히 끔찍한 거니까. 물론 그게 감독님이 이야기하는 방식이고 그걸 통해서 감독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뭔가가 있었으니까 이해했다. 미진을 놓고 봤을 때, 이 여자도 도완이 못지 않게 밑바닥이다. 술집 나가서 맨날 담배나 뻑뻑 피고, 술이나 마시고, 그 와중에 남자친구라고 하나 사귀는 게 약쟁이지. 그런 상황에서 도완이는 자기도 밑바닥이지만 도완이는 너무 좋으니까 자기 입장에서는, 너 그렇게 살 바에는 내가 네 얼굴 긋고 내가 보살피고 살겠다. 차라리 네가 다른 남자 만나면서 지저분하게 살지 않게 하겠다. 나랑 있자, 는 진심이 포함된 거지. 아무 생각 없이 그걸 행동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진실됐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여자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진짜 동물적인 남성의 마지막 결단이니까.

그 애정의 근거가 더 필요할 것 같다.
이렇게 하기 전에 했던 도완은 이미 자기가 죽으려고 했지 않나. 그럼 그건 아마 도완이에게 자기가 죽는 것보다 더 하기 힘든 행동이었을 거다. 만약에 그게 더 쉬웠다면 먼저 여자의 얼굴을 그었겠지. 그리고 그래도 안되면 죽었을 테고. 근데 자기 배를 찔렀는데도 우민이가 와서 살려놓으니까, 안되겠다. 내가 살아있는 이상 미진이가 없으면 안 된다. 미진이를 저렇게 지저분하게 살게 하는 것도 안되고. 난 도완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느꼈다.

김해곤 감독은 상당히 거칠고 센 입담을 구사하는 편으로 유명하다. 그런 성격에 적응하는 것부터가 중요했을 것 같은데 어땠나?
겁나는 개가 짖기도 잘 한다고, 속으로는 알몸이라 여린 사람이 약점을 가리기 위해 겉으로 화를 잘 내고 욕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욕하는 것만 봤다면 저 사람 무서운 인간이다, 이렇게 단정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서 감독님 욕은 그렇게 지저분하게 들리지가 않는다. 굉장히 동정심이 가는 욕이다. 그래서 난 감독님이 굉장히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숙명>에서도 부분부분 느껴지지 않나? 진짜 밑바닥에서 살아온 사람들만의 어떤 끈끈한 인간애라던가, 삶에 대한 집착이라던가, 이런 게 욕에 묻어나니까. 사실 예전부터 김해곤이라는 배우 때부터 감독님을 좋아했고, 덕분에 현장에서 만났을 때는 매료가 됐지. 지금 어떤 영화평을 떠나서 김해곤이란 사람이 써내는 대사만 봐도 그냥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본다.

사실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다작하는 경우가 많다. 작년에도 그랬던 것 같고. 그런 경우에는 캐릭터의 다양성을 극복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배우가 캐릭터와의 관계를 놔버리면 영화에 도움이 되게끔 연기가 나오긴 나온다. 그러나 그런 연기는 그 배우를 잊혀져 버리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조연을 하더라도 그 캐릭터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필요하다. 연기하는 배우가 그걸 이화(異化)시켜 버리면 비호감이 된다. 그저 이 캐릭터가 이런 거 아니겠어?, 이렇게 대충 보여주게 되면 배우로서 생명력이 짧아지는 길이 될 수 밖에 없다. 그게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가벼워진다, 망가진다, 란 것이 될 수 있는데 사실 그렇더라도 그걸 자신과 동화시켜서 끌고 가면 그건 배우로서 발전적인 연기라고 본다. 근데 그걸 자기로부터 이화시켜버리니까, 놔버리니까, 그럼 결국 관객이 똑같이 느끼는 거지. 저 사람에게 어떤 인생이나 인간미가 느껴져야 되는데 그냥 주연을 위해 도와준답시고 자신을 젖혀놓게 되면 그 배우도 젖혀져버린다. 다양한 역할을 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건 이 캐릭터에 내 자신을 동화시켜서 현장에 가져가야 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자신을 캐릭터와 동화시킨다는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묻고 싶다.
내가 모르는 연기를 하면 안 된다는 거다. 내가 아는 것 내에서 연기해야지, 내 연기가 아니라 나 이외의 것을 끌어다가 연기해버리면 그건 그 캐릭터를 사랑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다. 정말 그 캐릭터를 사랑한다면 이 캐릭터가 보여주는 것 중 나에게 있는 것만 남겨놓고 나머지 제 성격을 버리는 거다. 그런 식으로 연기하면 그건 내 모습이지. 내 어딘가에 있는 내 모습이 되는 거거든. 그럼 관객도 그렇게 느낄 테고, 결국 저 배우가 보이는 거다. 내가 그 캐릭터를 놔버리면 애정과 이해를 놓아버리는 것과 다를 게 없고 그 순간, 위험해진다고 봐야지. 어쩌면 그에 비해 조연보다 주연이 편할 수도 있겠다. 시나리오 책 한 권에 캐릭터의 역사가 다 나오잖아. 물론 그대신 그만큼 책임이 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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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은 어떤 전사를 배제하는 것처럼 어느 지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래서 그 흐름에 대해서 유추해내는 게 중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도완이란 역할에 대해서도 스스로 포인트를 잡아가야 했을 것 같은데.
도완이 같은 경우에는 내게 없는 부분을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있었다. 사실 도완이는 객관적으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70%를 내게서 가져갔지만 한 30%는 놔버린 게 있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안타까울 때가 있고 종종 감독님이 원망스러운 부분도 있다. 물론 내가 감독님을 너무 좋아하지만 날 좀 잡아주지, 하는. 현장에서 내가 너무 힘에 부쳐서 힘들어 하니까 아예 그냥 놔버리고 가게 될 때가 있었다. 그런 게 이제 나는 보였지. 그리고 관객들도 분명히 그걸 느낄 거다. 물론 거기서는 이제 100% 다 내게서 가져가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기도 했지만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내게 없는 걸 가져다 놓고 스스로, 그냥 이런 거 아니겠어?, 했던 것도 없진 않았었다는 거지. 그래도 한편으로 많이 가져갈 수 있었던 건 감독님이 잡아준 덕분이기도 하다. 만약 내가 내 멋대로 했으면 더 많이 가져갈 수 없었을 텐데 감독님이, 그건 아니다. 도완이는 이거다, 라면서 현장에서 많이 교정해줬거든. 만약에 나대로 했다면 그 캐릭터를 내 맘대로 가져갔을지 몰라도 감독님이 원하는 도완이가 아니었겠지. 하지만 감독님을 내가 이해한다고 해도 서로 완전히 100% 같을 수는 없는 거다. 그걸 끝까지 물고 늘어질걸,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못한 부분도 있지. 만약 그럼 너는 뭐했냐고 하면 나도 나름대로 하긴 했지만 나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거다.

약물 중독에 대한 연기를 위한 구체적인 준비 과정도 있었을 것 같다.
구체적으로 약이 나오는 영화는 죄다 봤다. 다른 배우들은 약 먹은 연기를 어떻게 하는지, 심지어 약을 해본 경험자하고도 만나려 하니까 안 만나 주더라. 그래서 전화통화라도 해봤다. 일단 중독된다는 게 또 사람마다 다르더라. 약의 종류에 따라서도 다르고. 그걸 외형적으로 어떻게 표현하느냐, 의 문제 때문에 영화를 굉장히 많이 봤지. 한 40편 봤나? <레퀴엠>이나 <트레인스포팅>이라던가. <사생결단>에서 추자연 씨가 연기를 정말 잘 했더라. 그래서 상도 받았겠지만, 약에 취해서 씨익 웃는 게 정말 뭔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잘 했다. 약을 먹었을 때의 어떤 흥분이 이런 느낌이구나, 라는 걸 디테일 하게 알아야 했거든. 막 약하고 자지러지게 웃는 모습이 정말 최고조의 기쁨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하니까. 그리고 그게 끝난 뒤 찾아오는 금단 현상도 마찬가지였지. <친구>의 유오성 씨처럼 추워서 몸을 떠는 식이기도 하고, 장이 뒤틀리듯 속이 쓰린 사람도 있고. 도완이 같은 경우는 장도 아프고, 뼈도 쑤시고, 그래서 밥도 안 넘어가고, 그런 걸 이제 내가 다 가지고 가는 거지.

도완은 칼을 잘 다루는 캐릭터로 묘사되기도 한다.
도완이는 자기 배도 가르고, 여자친구 얼굴도 가른다. 내가 생각하기에 도완이는 상처를 입는다던가, 몸에 피가 난다는 거에 대해 굉장히 익숙한 애다. 우리는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있잖아. 주사바늘 하나 들어가는 게 무서워서 병원에 안가는 사람도 많으니까. 근데 도완이는 그게 아니거든. 도완이는 그 공포를 이미 스스로 넘어선 놈인 거지. 그리고 일단 도완이는 송승헌 씨나 권상우 씨처럼 키도 크지 않고, 근육도 좋지 않다. 그래서 면도칼로 쓱 그어보고 피 나는 걸 찍어 먹어보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거지. 쟤는 함부로 건들면 안되겠다는, 당장은 저놈을 두들겨 팰 수 있다 해도 언제 내 뒤통수에 저놈이 뭘 들이댈지 모르겠구나, 라는 걸 인식시키는 거다.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 극복한 거지. 한편으론 잃을 게 없는 거다. 그래서 남들이 봤을 때는 도완이를 잔인하고, 미친놈이고, 꼴통이라고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도완이는 그런 행위를 스스로 합리화시키고 있다고 본다. 내가 죽이기를 했어, 목을 따기를 했어, 동맥을 끊었어, 살짝 얼굴에 그냥 몇 바늘 꿰매면 그만인데, 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도완이는 면도칼이 방패였을까?
걔는 사실 그거 말곤 방패가 없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측은하다. 그 작은 면도칼을 방패 삼아 살아가는 인간처럼 비루한 인생도 없을 테니까.
우리도 마찬가지다. 내가 뭐 특별한 게 있어서 배우 하는 것도 아니고, 몸뚱어리 하나로 연기하는 거니까. 당신도 펜으로 사는 거고. 다들 자기가 가진 재주 하나로 사는 거지. 그게 도완이는 면도칼이었던 거지. 하지만 남한테 피해가 가니까 다수에게 통용되기 힘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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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에서 네 남자의 공통점은 자신의 가족에 대한 애착이 있다는 거다. 결국 남자의 숙명이란 자신의 가족을 위해 비루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 싶더라.
나도 그렇지만 남자는 대부분 가족을 위해서 산다. 가족을 위해서 돈 벌어오는 거 아닌가. 자기 꿈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두 돈하고 연계될 수 밖에 없으니까 나가서 돈을 획득해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24시간 자유가 주어진 인생을 다 털어서 돈 벌기 위해 열심히 사는 거지. 물론 하고 싶은 일 하는 사람은 그나마 행운이지만 하기 싫은 일 하는 사람은 처자식을 위해서 여자와 어린이들을 위해서 참고 사는 거겠지.

역시 남자라서 가족에게 약해질 수 밖에 없는 건가.
처자식은 끝까지 지켜야 된다. 남자가 밖에서는 아무리 칼 들고, 발 들고 해도 부모님과 처자식은 지켜야지.

결혼이라는 건 남자에게 안정감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떤 책임감을 부여하기도 하는 거 같다.
가장이 되는 것도 모 아니면 도로 가야 한다.(웃음) 가족한테 끌려가면서 허덕이면서 살던가, 확실하게 벌어서 가장으로서 당당히 끌고 가던가. 하지만 애매하게 일 핑계로 가장 못하고, 가장 핑계로 때문에 일 못하고, 이러면 안 되지.

아내를 두고 입대한다는 건 부담이었겠다.
(한숨을 쉬고) 부담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았다. 군대 있을 동안 아기까지 태어났고,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 2년 동안 마음은 집에 있었다. 그러니 군생활이 어땠겠어.

제대 이후, 오랜만에 현장에 복귀한만큼 다시 연기의 감을 찾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을 것 같은데.
<외과의사 봉달희>(이하, <봉달희>)로 다시 시작해서 다행이었지. 드라마는 바로 반응이 보이니까, 내 연기를 바로 체크할 수 있었다. 만약 일주일에 몇 커트가 있는 영화였다면 익숙해진 연기로 감을 찾는 게 오래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봉달희>처럼 빠른 리듬으로 막 흘러가는 드라마의 호흡을 내가 쫓아가다 보니까 어느 순간 이렇게 빨리 됐나 싶더라.

<봉달희>를 통해서 드라마의 대중적 파급력을 실감했을 것 같다.
일단 지명도가 높아지니까 도움이 될 수 밖에 없다. 드라마를 사람들이 좋아하게 되니까 나도 함께 유명해지고 호감을 얻게 되고. <봉달희>의 김형식 감독님은 내겐 은인이다. 내가 제대하자마자 그 역할을 주셨으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굉장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요즘처럼 영화시장이 어려울 때는 드라마가 나름대로 기회의 연장일 수도 있는데.
하지만 일단 지금은 영화를 하고 싶다. 드라마가 싫다는 건 아니고, 캐릭터를 따라가고 싶어서. 물론 대본을 봤을 때 진짜 하고 싶은 캐릭터가 있다면 그걸 연기하게 되겠지. 안성기 선배님 말씀대로 인기나 돈을 쫓아가기 보단 일을 쫓는 배우가 되고 싶다. 쉽게 말해서 이거 된다고 하는 말을 쫓기 보단 일을 쫓는 배우 본연으로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드라마보다 영화에 대한 애정이 강한 덕분이기도 하겠지.
아무래도 난 영화를 되게 좋아하나 보다. 영화가 스크린을 통해서 나를 관객과 이어준다는 걸 사랑한다. 영화라는 공정이 내가 해왔던 일이기도 하고, 시나리오도 써보고, 연출도 해봤고, 그래서 그런지 이 매체를 굉장히 사랑할 수 밖에 없겠지. 깜깜한 극장에서 나 혼자 즐길 수 있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깜깜하니까 나 혼자 즐기는 듯한 즐거움이 있지 않나. 편안하게 발 뻗고 온 가족이 보는 것도 좋지만 아무한테도 말걸 수 없는 깜깜한 곳에서 스크린을 보면서 꾸는 꿈이 좋다. 물론 악몽이 될 수도 있지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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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드라마보다 영화에 친숙한 탓이기도 할 것 같다.
내가 추구하는 캐릭터도 스크린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것에 가깝다. 그게 때로 TV를 통해서는 방영불가 될지 모를만한 것이기도 하다.(웃음) 그리고 TV가 선호하는 배우는 잘 생기거나 예뻐야 하는 경우도 많고, 재미난 이야기를 그만큼 건전하고 밝게 전달해줄 수 있는 캐릭터도 많으니까, 거기에서 오히려 난 돋보이기 힘든 탓도 있지. 그래서 여러 가지로 영화가 좋다. 영화라는 매체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배우가 될 수 있었고, 영화가 없었으면 오히려 배우를 할 수 없었겠지. 내 감성을 이용해서 연기를 보여줄 수 있어서 영화가 좋다. 그리고 지금 영화가 힘들다고 쉬운 길 찾아가면 말 그대로 내가 내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는 거지. 난 내가 영화를 사랑한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다. 사실 한국영화가 가장 흥행했던 2년 동안 난 군대에 있었으니까 그 혜택도 못 누린 거다. 그런데 만약 지금 내가 드라마에 치중하면 오히려 나도 같이 거품이었다고 말하게 될 수 있는 상황이니까, 내가 거품이 아니란 걸 증명하고 싶다. 당분간은 군대에서 벼려왔던 2년이 아까워서라도 남아있어야지.

공백이 길었지만 작년에 드라마 하나에 영화 세편에 출연했다. 그리고 사실 <숙명>도 작년부터 촬영했고, 스스로 힘에 부치는 상황도 있었을 것 같다.
역할을 기다리듯 하는 사람, 그러니까 강한 동기가 생겨서 하는 사람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런 거 없이 그저 끌려가듯이 연기하게 되면 에너지가 딸릴 수 밖에 없지. 이건 체력이 딸리는 것과는 다른 거다. 그래서 배우는 갈급함을 모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모아두지도 않은 채 관객이나 대중들, 시청자들 앞에 서면 그건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된다. 요즘 <온에어>에서 송윤아 선배님을 보면 그 연기가 잘했네 못했네 자체를 떠나서 대사 치는 게 바로 그런 거다. 사실 그게 리얼리티 수준을 굉장히 떨어지게 만드는 대사톤이라서 정말 엄청나게 연습하지 않고서는 저렇게 나올 수 없는 대사인데 그걸 끝까지 유지하는 거다. 그게 눈에 보인다. 진심이 보이는 거지. 저분이 이번에 저 캐릭터를 하고자 하는 갈급함이 느껴지는 거다. 그리고 그게 에너지로 느껴지는 거고,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절실함이 있어야 된다는 건가?
그런 게 없으면 강렬한 캐릭터도 소용없다. 뭘 하더라도 관객을 감동시키는데 힘이 부치는 거지.

본인에게 그 갈급함은 얼마나 됐을까.
2년간의 갈급함이었지.(웃음) 그런데 네 작품이나 하니까 이제 많이 떨어지더라. 아직도 남아있는 게 없진 않지만 그걸 몰아서 풀어버리다 보니 오히려 위기감이 올 수도 있겠더라. 그래서 다시 좀 더 모아야 될 것 같다. 게다가 지금 영화판이 힘들다고 해서 냉큼 편한 자리 찾아서 가면 그게 모이지도 않는 거라 다른 생각도 배제하게 되는 거고.

영화가 김인권이라는 배우를 필요로 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 지금쯤이면 과거에 자신이 했던 연기를 돌아보게 되는 순간도 있을 텐데. 특히 군대 있을 때는 생각도 많았을 테고.
저거 진짜 못했네. 왜 저렇게밖에 못했을까. 그런 생각이 많이 들지. 나는 영화든 드라마든 작품을 찍고 내 연기를 관객입장으로 보기까지 한 10년 정도 걸리는 거 같다. 그 정도는 되야 완전히 당시 그 기분이 기억의 용량에 밀려서 갱신되고 잊혀져 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희망이 있지 않나. 앞으로 또 10년 뒤에 도완이가 과연 어땠을까, 하고 다시 보면 왜 저거밖에 못했을까, 이런 생각을 할 테니까. 그렇다면 난 분명 옛날에 했던 거보다 나아졌다는 거 아닐까. 그런 식으로 발전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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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적어도 그 연기가 그 당시 자신에겐 베스트였을 텐데.
그 당시엔 그랬지. 그런데 그때도 비슷하다. 지금 도완이가 한 30%를 대충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때도 최고에 달했다고 생각하지만 최고는 아니었다. 심지어는 초창기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 뒤 뒤돌아서 그걸 생각하지 말자고 되뇐 적도 있다.(웃음) 물론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어느 순간, 이건 됐어, 이렇게 100%만족스러운 경우도 있고, 아쉬울 때는 한번 더 가자, 는 얘기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는 못해놓고, 혼자 속으로 씩씩거리다가 말았지. 모든 배우들 그런 경우 있을걸. 감독이 컷! 오케이!, 하면 (속으로) 오케이 아닌데, 이러는 거.(웃음)

사실 자신의 연기를 만족한다고 말하는 배우를 보기란 드물다.
만족하기란 쉽지 않지. 근데 요즘은 어떤 커트를 해놓고 너무 힘들어서 이제 더 이상은 못하겠다, 이런 경우도 있다. 정신 차려야지. 에너지가 없으면 그렇게 되는 거더라. 에너지가 있으면, 감독님, 한번만 더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데 그걸 다 써먹고 채우질 못하니까 힘에 부치는 거다.

도완같은 캐릭터에 몰입하다 보면 심리적으로 힘들어지는 순간도 있었을 거다. 심리적으로 날을 세운 캐릭터에 동화되는 연기를 하다 보면 그게 자신에게 전이되기도 할테니까.
오히려 그렇게 했어야 되는데 도완이가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내가 몰입을 많이 못했다. 내 집에 딸이 있고 걔한테 영향을 미치면 안되니까. 건달도 처자식 생기면 건달 끝이라고, <넘버3>에서 나오는 말이잖아. 배우도 조심해야 된다.

아무리 그래도 몰입하지 않고서야 연기가 가능하나?
컷이 끊어지고 연기가 끝나고 감독님한테 돌아갈 때, 저 어땠어요?(호들갑스럽게), 이런 식으로 바뀌는 버릇을 들이는 거지. 바뀌지 않고 거기에 계속 몰입해서 집까지 가져가면 감당이 안 된다. 얼마 전에 인터넷으로 <추격자>의 하정우 씨 인터뷰를 봤는데 흰자에 핏발이 서 있더라. 그거 조심하셔야 된다.(웃음) 빨리 빠져 나와야 돼. 관상학적으로 핏발이 선 게 사람 죽이는 건데, 걱정되더라.

캐릭터와 일체화되는 메소드 연기를 지양하나?
아니, 지향하지. 사실 더 그렇게 했어야 했다. 배우가 준비기간까지 포함해서 연기하는 동안, 캐릭터에 녹아 들어서 얼굴의 관상이 바뀔 정도가 돼버리면 가장 좋은 거지. 그러니까 <추격자>가 그런 에너지가 생기는 거잖아요. 그게 에너지죠. 그런 갈급함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다만 캐릭터로부터 빨리 빠져 나오는 기술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으면 현장에서 들어가는 게 더 수월한데 그 합일점을 찾는 게 쉽지가 않거든.

대신 입구는 찾기 쉽지만 출구를 찾기가 힘들기 때문에?
출구가 없으면 안 된다. 특히 그런 역할은 출구가 없으면 더욱 안되고. 나도 옛날에 했던 역할의 잔재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게 굉장히 많다. 그때마다 다 빼내지 못해서.

어쩌면 도완이란 역할의 출구를 만들어준 건 가족일 수도 있겠다.
(잠시 생각하다가)그렇네. 가족을 통해서 잊는 방법이 있네. 매일같이 가족을 만나서 잊게 되는 거니까. 근데 그게 기본적으로 적당한 시간도 필요하겠지. 그건 또 문제다. 하여튼 난 그런 합일점을 빨리 찾았으면 좋겠다. 내 연기가 집에 영향을 주면 안되니까.

<추격자>의 흥행은 고무적이지 않나. 인기에 편승하지 않아도 영화적 완성도와 배우들의 연기력이 훌륭하면 관객들에게 어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 아닌가.
그 동안 투자자나 제작자가 인기에 편승해왔는데 그건 아니지. 이젠 나도 그건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다. 물론 영화는 상업예술이기도 하지만 상업을 하는 사람이 감독예술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감독이 작품에 자기 영혼을 담아서 진짜 에너지를 쏟아 붓고, 그 역할에 맞는 캐스팅을 하고, 그렇게 해서 작품의 완성도를 이룰 수 있는 영화만의 신성함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나머지 테두리는 그걸 도구로 해서 돈을 버는 분들이 열 배를 벌던, 백배를 벌던 상관없지만 감독예술이라는 영화자체만큼은 건드리면 안 된다. 물론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으되, 감독이 주도권을 잡아야 되고, 감독이 맞추고자 하는 일관성은 건드리면 안 된다. 그리고 감독님들도 그에 맞는 책임감을 확실히 기르고 그 외의 것을, 이 영화를 어떻게 해서 돈을 번다던가, 그런 걸 생각하시면 안되겠지. 난 배우니까 철저하게 감독님이 원하는 연기를 하면 되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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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위기 상황이란 게 그런 의식의 부재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위기가 감독예술이라는 본연의 의미를 찾아가는 기간이 됐으면 좋겠다. 그걸 찾으면 우리도 할리우드가 부럽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걸 못 찾고 계속 이대로 그냥 살아남겠다고 상업적인 돈의 논리로 인지도 높은 배우 쓰고, 작가 뭐야, 감독 뭐야, 그런 식으로 하면 답이 없겠지만. 하지만 완성도를 찾아갈 거라 믿는다. 만약 그래서 결국 다 떨어져나가고 C급만, D급만, 분야별로 최하급만 남더라도 상관없다. D급 배우에 D급 감독, D급 투자, 이렇게만 모여도 영화에 일관성이 생기니까 거기에 스피릿이 생기고 그 영화의 완성도가 생긴다.

가장 열악한 밑바닥까지 내려앉더라도 진정성을 찾으면 된다는 말인가?
A급 배우에, C급 뭐에, D급 뭐에, 이렇게 일관성이 없어지면 오히려 관객이 진정성을 못 느끼지. 그래서 그냥 최하급만 남더라도, 그 일관성 때문에 빛이 난다고 생각하는 거다.

원래 연출을 지망해서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던 만큼 그에 대한 관심도 남다를 것 같다.
연출적 마인드로 연기를 하면 도움은 많이 된다. 감독을 더 이해할 수 있고, 감독이 나를 이해시키기가 굉장히 쉬워지니까. 지금으로서는 그런 정도의 연출적 마인드만 지니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감독이 되겠다고 하기엔 아직 재주가 없는 탓이기도 하고. 시적인 표현이든, 내러티브가 있는 이야기든, 이 시대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작가적인 차원의 재주가. 난 배우로서 내 역할 하나 하기에도 아직도 부족하다.

졸업작품으로 예전에 <쉬바스키>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나름대로 제작환경을 이해하는 좋은 경험이었을 것 같은데.
그냥 맨땅에 헤딩하듯이 내가 제작부터 배우까지 다 했으니까. 그때 같이 했던 재승이라는 친구는 시네마서비스에서 <강철중>PD를 맡고 있는데 가끔 전화할 때면 지금도 그때가 좋았다고 한다. 참 좋은 경험이었지. 가장 순수한 걸 해봤다는 그런 만족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소꿉장난으로 의사놀이를 해봤던 아이가 의사가 되는 것과 칼싸움했던 아이가 살다 보니 의사가 괜찮은 직업인 것 같아서 의사가 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겠지. 어렸을 때 영화가지고 한번 놀아봤다는 게 내겐 남은 거지.

배우 경험이 많은 김해곤 감독과 다른 감독의 차이가 있었나.
다르지. 김해곤 감독님은 현장이나 무대에서도 그러잖아. 우리 배우들만 돋보이면 된다. 욕하려면 나를 욕해라. 굉장히 배우를 중심적으로 캐릭터에 염두를 둔다. 게다가 혹시나 감정 상할까 봐 배우들한테 함부로 하지도 않고. 배우한테는 더 없는 감독이지.

오래 전에 했던 인터뷰에서 종종 자신은 배우가 아니라고 했더라.
사실 배우가 쉽게 되는 게 아니거든. 너무 이상적인 생각인가? 내가 영화에 대해서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배우도 마찬가지다. 배우도 그냥 되는 게 아니지.

여전히 스스로를 배우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건가?
멀었지.

어느 정도의 연기를 해야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을까?
꿈이 이뤄지는 것만큼 허황된 것이 없다. 만약 내가 요절하면 남들에 의해서도 배우로 평가될 수 있겠지만 살아있는 이상, 그냥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밖에 없다. 나도 그냥 살아가는 사람에 불과하고, 일에 대해서 뭔가를 추구할 뿐이지. 언젠가 이뤄질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기 보단 그저 열심히 살려고 한다.

차기작으로 <나쁜 놈이 더 잘 잔다>란 작품에 캐스팅된 걸로 알고 있다.
영진위에서 시나리오 공모전 1위를 한 작품인데 영진위로부터 6억이 투자된 상태다. 캐스팅은 거의 됐고, 시나리오도 고치는 중이다. 감독님이 투자를 더 받아서 영화를 더 풍성하게 만들고 싶어하는데 돈줄이 말라버렸다. 대본이 너무 좋다. 매력이 있더라. 일단 일정이 좀 늘어지면서 기다리는 중이다. 진심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데 잘 안되나 보다. 그래도 진심은 통하니까, 어떻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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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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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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