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민지혜는 옆에 있었다. 연기자를 동경하던 소녀는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우연찮게 매니저의 눈에 띄어 길거리 캐스팅된 후 구체적인 꿈에 한발을 들이민다. 01년도 모 통신사의 극장판 광고를 통해 데뷔한 후, 몇 번의 CF와 드라마 단역을 맡으며 서서히 활동반경을 넓혀갔다. TV 단편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를 각인시키기엔 터없이 모자랐다. 물론 그 시절이 그녀에게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사소한 단역조차도 그녀에겐 소중했다.
“KBS 드라마시티 <계룡산 부용이>때 액션 씬이 많았기 때문에 준비를 힘들게 했어요. 솔직히 딱 한번 연습하다 도망갔어요.(웃음) 그래서인지 나중에 완성된 작품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죠. <구미호 가족> 보셨나요? 거기서 매점에서 라면 먹던 여자가 저에요. 사람들은 그게 저인지도 모르지만 저는 나름대로 고심했다고요. 어떻게 먹어야 실감나게 보일까. 알아주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론 상당히 신경 쓰고 노력한 씬이에요.” 하지만 학교조차도 휴학한 1년여의 시간동안 연기를 등진 채 살아간다는 건 그녀에게 민지혜의 존재를 절실히 각인시키는 여정이었다. “사실 1년 동안 느슨하게 지냈던 것 같아요. 중국 드라마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연기와 동떨어져 생활했죠. 그러다 보니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싶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민지혜는 <뷰티풀 선데이>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이상 그 뒤로 남은 건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끌어내느냐의 문제였다. 오랜만에 맡은 역할이자 지금까지 했던 자신의 연기 중 가장 비중이 두드러지는 역할이었다. 욕심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로 만만찮은 일이었다. “사실 부담이 컸죠. 첫 영화인데 일단 꽤 무겁고 심각하잖아요. 시나리오에 대한 이해도 쉽지 않았어요. 물론 대략 이해는 되는데 세부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지금도 내가 작품을 잘 이해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성폭행이라는 부분도 맘에 걸렸고. 그래도 해야 된다는 생각말고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었었죠.” 자신의 배역에 대한 이해가 절실했고 영화에 대한 몰입도 중요했다. 현장에서 많은 것을 체득하고 익히는 수밖에 없었다. 온몸으로 부딪치고 생각을 정리하고 빠르게 받아들여야 했다. 노력이란 단어 외의 대안은 없었다.
“성폭행 피해자 여성들에 대한 시사 프로그램까지 찾아봤어요. 사실 저는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면 자포자기하듯 암담히 살아가리라 생각했죠. 하지만 실제론 대부분이 그렇지 않았어요. 왜냐면 일단 사는 게 중요하니까. 물론 과거의 상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겠죠. 하지만 결국 자신의 삶을 살더라고요. 그런 현실적인 부분이 와 닿았죠. 수연의 상황도 마찬가지였을 거라 생각하니 이해가 되었어요.” 경험이 적은 그녀에게 그 순간순간의 경험은 큰 재산들이 되었다. 그건 그녀의 주변에 서 있던 조력자들 덕분이었다. 그녀는 홀로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영화는 혼자 찍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저는 제 역할만 신경 쓰고, 대본대로만 대사하고, 기계적으로 연기를 했었죠. 그런데 남궁민 씨가 ‘그런 식으로 자기 배역만 생각하고 연기를 하면 함께 호흡을 맞춰야 하는 연기자와 조화가 될 수 없다. 자신의 배역만 보지 말고 주변의 배우들의 배역도 함께 살피고 조화롭게 연기하는 게 좋다.’라고 조언해줬죠. 항상 주변 사람을 배려해서 저도 촬영동안 많이 의지할 수 있었어요. 박용우 씨는 촬영 내내 강형사였죠. 저와 맞닥뜨리는 씬이 거의 없어서 항상 멀찌감치 에서 지켜보기만 했지만 집중력이 정말 대단했어요. 좋은 배우가 어떤 배우라고 감히 말할 순 없지만 박용우 씨는 분명 좋은 배우라 생각해요. 두 분 에게 크게 한 수 배웠죠.”
물론 여자로써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심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여자로서의 욕심보다는 배우로서의 욕심이 더욱 중요했다. “이기영 선배님께서 말했어요. ‘영화의 배역에 어울리는 연기를 하는 것이 배우로써 관객에게 가장 멋있게 보일 수 있는 순간이다.’라고.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죠. 많이 울어서 눈이 퉁퉁 붓기도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영화를 보니 그런 제 모습이 나쁘지 않았어요. 배우는 자기 배역에 충실할 때 정말 멋있는 것 같아요.” 결국 그녀에게 <뷰티풀 선데이>는 특별할 수 밖에 없었다. “기술시사 때 완성된 영화를 보는데 눈물이 났어요. 수연보다도 강형사나 민우에 대한 감정이 마음에 와 닿았죠. 물론 범죄자이지만 슬픔이 절실하잖아요. 특히 민우가 행복해하던 순간들을 생각하니 더더욱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마지막 웨딩장면 볼 땐 정말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신인치고는, 혹은 기대 이상으로. 민지혜에게 붙는 수식어는 사실 이 정도를 벗어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단지 처음 눈에 띄었기 때문에 두드러져 보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녀는 스스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뷰티풀 선데이>에서 드러난 자신의 장점보단 단점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사실 긴장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경직되기도 했었고. 대사를 하면서도 스스로 어색하다고 생각을 많이 했죠. 촬영 후에도 그랬고 지금도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니 못한 것들만 눈에 띄어서 창피해요. 다른 분들 연기와 내 연기를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죠. 일단 나름대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많은 것을 쥐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뒤를 돌아보니 사실 초라했다. 마치 모래알이 흩어지듯, 그녀의 과거는 한 순간 바스러져 날아갔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했던 연기 활동과 잠깐의 공백, 그리고 <뷰티풀 선데이>. 그 순간 안에서 그녀는 민지혜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민지혜로서 무언가를 쥐어보지 못했다. <뷰티풀 선데이>는 민지혜의 손에 쥐어진 하나의 결실이다. “그동안 저는 제가 무언가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런데 알고 보니 해놓은 것이 없더라고요. <뷰티풀 선데이>는 저에게 그래서 각별하죠. 무언가를 했으니까.” 그녀는 올 해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 연기와 학업. 그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 하지만 그건 짐이 아니다. 그녀 스스로에게 원하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갑작스럽게 연예계에 입문해서 학교생활을 잘 못했거든요. 대학에 가서도 그랬던 것 같아요. 나름대로 대학생활의 낭만을 느껴보고 싶기도 한데. 올 해 다시 복학을 할 예정이에요. 그런데 연기생활과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 맘에 걸리긴 해요. 하지만 열심히 할 거예요!”
신인이라는 단어는 위태롭다. 하지만 더불어 창창하다. 앞날은 알 수 없다. 잠시 이름을 드러내다가도 사라지는 경우는 허다하다. 빛나는 스타를 꿈꾸다가 쉽게 빛이 바랜 채 저버리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연기를 꿈꾼다. 민지혜라는 이름이 연기자로 각인되길 원한다. “타이틀롤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황진이나 대장금같은. 한 캐릭터의 존재 자체가 그 작품인 셈이잖아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건 아무래도 배우로서 특별한 경험이자 매력적인 일이 되겠죠. 꼭 나중에 그런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제 이름을 걸고 말이죠. 그렇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을 쌓고 열심히 해야겠죠. 그만큼 노력할거에요.” 그녀는 아직 갈 길이 한참 멀다. 이제야 그녀는 연기자로써의 출발점에 섰음을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 막연함은 필히 그녀에겐 설레는 기대감일지라. 그 설레임에서 그녀는 그렇게 한발을 딛고 있다. “사실 <뷰티풀 선데이>는 제 연기에 전환점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전환점이 아닌 시작이라고.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더라고요. 그래요. 전 이제 시작이에요.”
(무비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