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은 조바심내지 않았다. 35억 짜리 영화가 언젠가 개봉하겠지. 긍정으로 2년을 견뎠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 누구도 자신의 눈물을 동정해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강해지는 것만이 소년의 유일한 희망이다.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어려움 없이 풍족하게 살아왔다’는 이완은 1953년 서울의 종두에게 어떻게 다가섰을까. “제가 아무리 긍정적이지만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내게 큰 시련이 닥쳐오면 난 견딜 수 있을까. 제 인생은 기복이 없었으니까요.” 배우에게 경험은 중요하다. 하지만 결코 직접 몸을 부대낄 수 없는 일이 있다. 1953년 서울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이완은 유년 시절 방영된 <여명의 눈동자>를 기억한다. 어린 시절 유난히 전쟁에 관심이 많았다. 시대를 몰라도 그 시대의 비극을 이해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런지 몰라도 감성적인 훈련이 돼있었나 봐요. 유년시절 드라마로 쌓은 내공이죠.”
전공은 체육학이다. 특기생은 아니었다. 무작정 운동이 좋아서 체육학을 선택했다. 수학능력 시험도 보고, 기초체육 시험을 통과해서 대학에 붙었다. 그렇다고 삶에 대한 특별한 지표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러던 삶에 변화는 우연처럼 찾아온다. 누나가 지니고 있던 그의 사진을 보고 이장수 PD가 접근했다. 처음엔 거절했다. “앞에 나서서 표현해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그런 성격이 아니라서 거절했어요.”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이완은 드라마광이었다. 때마침 입시의 속박에 벗어나 뭐든 해보고 싶은 자유가 만개하던 대학교 1학년 시절이었다. 그것도 유명한 감독의 설득이었다. 그저 대사만 외워서 하면 어려울 것도 없어 보였다. “장난이 아니었어요. 촬영을 일주일 앞두고 이건 방송사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큰일났다는 생각 뿐이었죠.” 일련의 트레이닝을 받고 나니 되려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감독님한테 엄청 깨져가며 따라가다 보니’ 반응이 좋았다. 차기 드라마 <백설공주>에선 주연을 맡았고, <작은 아씨들>까지 캐스팅이 이어졌다. 그 해 신인상을 2개나 탔다. “신인상을 받았으니 연기를 잘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비로소 생겼어요. 연기에 욕심이 나기 시작했죠.” 운동을 좋아하는 만큼 승부욕도 강했다. 비슷한 또래 배우의 연기를 보면 묘한 경쟁심도 느꼈다. 하지만 자신밖에 할 수 있는 연기를 찾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 하는 게 큰 도움이 된다는 건 <해변으로 가요>에서 비로소 느꼈다. 연기도 공부가 필요한 일임을 비로소 알았다.
어쩌다 보니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통해 일본에서 스크린 신고식을 치렀지만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이완이 국내 관객 앞에 서는 본격적인 첫 영화란 점에서 애착이 크다. “까먹고 있었는데 애정이 많았던 거 같아요. 제작보고회 때 메이킹 필름으로 현장 모습을 보면서 진짜 내가 열정을 가지고 찍었다는 게 다시 느껴졌거든요.”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이완에게 송창의는 현장에서 좋은 형이자 반가운 친구였다. 동시에 ‘마주보고 연기를 하면 대사를 까먹을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치는’ 선배들을 마주보고 연기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다. ‘한 작품을 끝낼 때마다 느껴지는 게 많은’ 이완은 아직 배우로서 소년에 가깝다. “작품 하나를 끝내고 나면 오랜 전생이나 꿈에서 봤던 일처럼 떠오를 때가 있어요.” ‘35억을 들인 영화가 설마 개봉하지 않을까’라는 낙천으로 2년을 기다렸다. 소년은 꿈을 꾼다. 꿈은 소년을 부풀게 만든다. 이완은 영화에 매력을 느꼈다. 연기라는 꿈을 꾸고 있다. “칭찬이건 비판이건 채찍질 같아요.”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