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서 발견한 사운드, 이이언
Across the electronica
인디밴드 ‘못’의 프론트맨 이이언이 홀로 돌아왔다. 우주를 홀로 유영하듯 외로운 여정을 건넜다는 그가 감내했던 고독들이 나직이 내뱉어졌다.
예사롭지 않은 음표들이 귀에 꽂혔다. 밴드 이름이 ‘못’이라 했다. 벽에 박는 그 뾰족한 못? 그럴싸하다 생각했다. 그렇게 듣고 보니 우울함이 대못처럼 가슴에 푹푹 박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오해였다. 내 마음은 호수, 아니 연못이오. 일렉트로니카 특유의 기계적인 사운드가 기타 리프에 걸려 심연으로 묵직하게 침전해가는 느낌, 마음을 크게 흔들기 보단 무겁게 잡아 깊이 내려앉는 감성의 음표들. 그것이 바로 ‘못’의 음악이었다. ‘라디오헤드, 포티쉐드, 스매싱 펌킨스를 좋아하고 록, 일렉트로니카 재즈, 트립합을 재료로 스타일리시한 음악을 할 사람을 찾는다.’ 못은 멤버를 구하는 이이언의 공고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지이가 찾아왔다. 이이언이 만든 음표에 지이가 기타를 치니 이이언이 노래했다. 그렇게 못의 1집 <비선형>과 2집 <이상한 계절>이 완성됐다. 파열하는 기타음의 뜨거움과 일렉트로니카 사운드의 기계적인 차가움이 공명하는 못의 음악은 인디음악계를 넘어서 한국음악계의 특수한 이정표가 됐다.
한달 반 정도의 휴가, 음악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이이언에게 그렇게 긴 휴가가 주어진 건 처음이었다. “친한 친구가 미국에 살아요. 동생과 함께 가서 한달 반 동안 낚시를 했죠.” 낚시라니, 추구하는 음악만큼이나 역시 정적인 취미를 즐기는 편이었던 건가. 그가 대답했다. “액티브한 편은 아니에요.” 그의 음표들이 만들어낸 선입견 중 하나가 들어맞았다. 반도체처럼 섬세하게 한 음 한 음을 회로처럼 설계해 넣은 듯한 그의 솔로 앨범 프로젝트 <길트-프리(Guilt-Free)>는 그의 편집증적인 음악 스타일이 더욱 구체화된 결과물이었다. 그만큼 예민한 성격이리라 예감했다. “예민하죠. 다만 혼자 예민한 것과 사람들에게 예민하게 구는 건 또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노력하는 편이에요. 근본적으로 인생이 비극이라 생각하기에 열심히 반대로 노를 젓는 거죠. 가만히 있으면 거기에 휩쓸리고 말 테니까.” 그가 말하는 비극이란 단어가 삶에 대한 비관처럼 들리겠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인생에서 수반되는 고통 그 자체에 대해서 쿨하게 인정하는 태도에 가깝다. “모든 삶이 저절로 행복해지도록 고안된 것이 아니잖아요. 기본적으로 세상은 제가 원하는 게 있을 때, 그것을 바로 갖지 못하도록 막는 성질이 있어요. 음식을 먹고 싶다면 돈을 지불해야 하듯, 즉각적으로 채우고 싶은 욕구가 있을 때 세상은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니까요.” 그는 그것이 욕구와 충족 사이의 ‘균형’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해하기에 세상은 단순한 낙관이나 밑 빠진 긍정으로 돌파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라는 파울로 코엘류의 <연금술사> 식의 감언이설을 싫어해요. 이를 테면 김태희는 세상에 단 한 명이죠. 모든 사람이 김태희가 여자친구가 되길 바란다 해도 결코 김태희의 애인이 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누구나 간절히 원한다 해서 김태희를 다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결국 정말 간절히 원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갖춰야 하는 것들이 있고, 사실 대부분은 이룰 수 없는 것들이죠. 돈이 부족하거나, 능력이 부족하거나, 외모가 부족하거나.”
균형은 이이언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화두다. 음표들을 기계적으로 찍어대면서도 음의 간극마다 감정을 불어넣어야 했던 <길티-프리>를 작업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끊임없는 균형잡기 싸움이었다. “다시 못으로 복귀하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고, 일단 워밍업이 필요하겠다 싶었어요. 처음에는 편한 마음으로 작업하고 싶어서 이 솔로 프로젝트를 구상했죠. 일관성이 없거나 중구난방이라 해도 솔로 프로젝트니까 알아서 감안하고 들어주리라 생각했고요.” 사실 이이언이 계획했던 솔로 앨범 발매 시점은 2년 전이었다. 그때 즈음에는 대부분의 곡도 나와있었다. 그러나 작업을 시작하며 그는 점차 스스로를 압박했다. “정제돼 있지 않고, 일관성이 부족한 걸 견딜 수 없었죠. 점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2년 동안 다시 균형을 찾아서 미세하게 조정해나갔어요.”
<길티-프리>라는 타이틀의 의미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만약 2년 전에 앨범을 냈다면 나는 죄책감(guilt)을 느꼈을 거에요. 이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는 길트에 대해서 이처럼 정의했다. “자신의 내면적 가치에 반하는 행위를 할 때, 길트가 생긴다고 해요. 그러니까 창피함(shame)은 사회문화적인 가치에 반하는 행위를 할 때, 즉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짓을 할 때 느끼는 것이지만 죄책감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죄책감을 많이 느낀다는 건 그만큼 그 기준이 높다는 거죠.” 완벽하지 않은 결과물이 죄의식처럼 느껴진다는 비장함, 이이언이라는 뮤지션에 대한 신뢰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둘이었던 ‘못’에서 ‘이이언’이라는 하나가 되는 건 고독한 여정이었다. “혼자 작업하면서 마무리 단계로 갈수록 홀로 우주로 유영하는 기분이 느껴졌어요. 우주복을 입고 산소호흡기 하나를 매달고서 아무도 없는 우주를 헤쳐나가며 간신히 무선 교신 정도만 가능한 그런 정도의 느낌.” 한때 그는 완벽해지기 위해서라면 일생을 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이 달라졌다. “ <이상한 계절>을 발표한 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만약 100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이 앨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100년 동안 작업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번 작업 중에 저는 스스로 저의 고갈된 바닥을 봤어요. 그런 바닥을 보고 나니까 이제 그런 호언장담은 못하겠어요. 이런 작업도 다시 못할 거에요. 제가 지닌 마지막 한 방울까지 총동원해서 정리하는 느낌이었죠.” 결국 그는 한달 간의 휴가를 요청했고, 그 바닥에서 벗어났다.
자신의 바닥까지 내려간 이이언의 앨범에서 주목할 수 있는 건 그가 만들어낸 사운드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그의 앨범을 통해서 눈에 띄는 몇몇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앨범의 마지막 트랙에서 발견되는 김영하 작가의 내레이션은 실로 이색적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라는 제목은 김영하 작가의 동명 단편집의 제목을 빌린 것으로 이이언은 원작의 북트레일러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김영하 작가의 전위적인 음성이 다시 한번 스튜디오를 채울 때 즈음 두 사람의 인연을 물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트위터를 통해서 서로 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대화가 잘 통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열려 있는 편이며 언제나 새로운 감각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분이셨어요.” 김영하 작가가 직접 소설집의 절반 가까이를 낭독하고 녹음해서 이이언에게 전달했고 이이언은 그 일부분을 선택해서 작업한 결과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다. “약간 공격적이면서도 리듬감이 있고, 음악적인 느낌이 좋아서 저 부분을 썼어요.” 속물적인 삶에 대한 냉소적인 조소에 가까운 가사, 이이언의 선택은 짙은 감수성에 가려졌던 그의 감춰진 취향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니컬한 것도 재미있어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아주 못된 농담들, 이를테면 <사우스파크> 같은 애니메이션도 좋아해요.”
이번 솔로 앨범에는 그가 리메이크한 두 개의 커버곡이 담겨 있다. 하나는 지금은 해체한 미국의 밴드 짜르의 ‘드럭’과 현진영의 ‘슬픈 마네킹’이 바로 그것. 그런데 잠깐, 이이언과 현진영이라니 이 어마어마한 간극이 메워질 수 있는가? 물론 이이언이 토끼춤을 추리라고 기대하지 않은 이상 걱정도 마시라. “정작 노래를 들었을 때 슬프단 생각을 못했는데 문득문득 가사를 곱씹을 수록 정말 슬프고 쓸쓸한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감성과도 맞는 부분이 있었죠.” 이이언의 ‘슬픈 마네킹’은 현진영의 원곡에 대한 재발견이라 불러도 좋을 또 다른 ‘슬픈 마네킹’이다. 그의 오래된 블로그 주소는 그가 창조한 ‘애시크래프트(ashcraft)’라는 단어를 입력할 때 열린다. 일명 재(ash)의 기술(craft). “재라면 타고 남은 것이죠. 재처럼 타고 남은 어떤 대상이 어쩌면 지나가버린 시간일 수도 있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일 수도 있다면 그것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기술이 바로 재의 기술이에요. 제겐 음악이 그래요.” 그의 리메이크는 바로 그가 말하는 궁극의 ‘재의 기술’이 아닐까. 그는 실제로 리메이크에 관심이 많다. “예전에 못 공연 당시에도 항상 리메이크 커버곡들을 못 스타일로 연주했어요. 심지어 지금 리메이크 앨범도 구상 중이에요. 단지 노래만 새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재로부터 다시 만들어내는 그런 리메이크.”
록 사운드를 밑그림 삼아서 일렉트로니카 계열의 트립합 사운드를 채색한 ‘못’의 음악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기계적인 사운드 속으로 파고든 그의 솔로 앨범 역시 국내 음악계의 현실 안에서는 지극히 실험적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불가능한 방식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정립된 못의 사운드가 있기에 굳이 못이라는 이름으로 큰 변화를 시도하고 싶진 않아요. 못으로서 할 수 없는 스타일을 솔로 앨범으로 해보고 싶었죠.” 그리고 못을 시작할 때도 그러했듯이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에 대한 의심이 없었다. “어딘가 균형의 중심이 있을 것이기에 그 균형을 찾아가다 보면 될 것이란 확신이 있었어요.” ‘못’이 아닌 ‘이이언’으로서 가능했던 시도들은 이제 새로운 가능성을 밝히고 있다. 가수 박정현으로부터 작곡 제의를 받기도 했다. 그렇다. <나는 가수다>의 박정현 말이다. 박정현과 이이언의 결합이 상상이나 되는가.
본래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꿈꾸던 그가 뮤지션의 길로 선회한 건 대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주어진 목표를 만족시키는 솔루션을 만들어내는 직업이잖아요. 그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주어진 시간 내에 얼마나 효율적인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느냐라는 차이가 있을 뿐,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나니 결과물의 만족도를 떠나서 나만의 유익한 결과물을 내는 일이 보였어요.” 그의 솔로 앨범을 공연하기 위해서 풀셋업을 하자면 무대에 올라가야 하는 랩탑만 세 대가 된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통한 기계적인 사운드를 추구하는 만큼 컴퓨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면 불가능한 음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꿈꾸던 두 가지 꿈을 모두다 이룬 셈일지도 모른다.
이이언은 언젠가 다시 못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다. “이미 곡을 써놓은 것도 좀 있어서 EP로 정리해서 발매하면 지금도 가능해요. 다만 멤버 구성도 재정비해야 하니 빠르면 내년 정도?” 기존 멤버였던 지이가 개인적인 사유로 팀을 탈퇴한 지금, 못의 여백을 채우는 건 이이언의 몫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라디오헤드, 포티쉐드, 스매싱 펌킨스를 좋아하고 록, 일렉트로니카 재즈, 트립합을 재료로 스타일리시한 음악을 할 사람’을 찾을 것인가. 이이언의 대답은 단호하다. “못 1,2집을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야죠.” 어쩌면 당장은 그토록 힘겨운 앨범 작업을 끝냈으니 다시 한번 휴가를 떠나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지 않을까. “지금도 쉬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가끔 일정 없는 날은 집에서 쉬어요. 하지만 나란 인간은 어떻게 돼먹었는지, 그런 날이 더 우울해요.” 감성을 쪼개는 남자, 이이언과의 대화가 끝날 때 즈음 다시 한번 김영하 작가의 내레이션 중 마지막 문장이 귓가를 스치고 흩어졌다. “그것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ELLE KOREA APRIL No.234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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