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 없이 말했다. 언뜻 가볍게 들렸다. 하나 곱씹을수록 명확했다. 주지훈은 똑부러지게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알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종영된 미니시리즈 <밀회>는 <도쿄타워>를 원안으로 기획된 작품이다. 사실 2009년에 안판석 PD가 <도쿄타워> 원안으로 기획했던 미니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던 것으로 안다.
잘 알겠지만 그때 내가 사고를 쳐서 다 무산됐다. 이제 당당해졌다는 건 아니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니까 숨겨서 뭐하겠나 싶은 거지. 법적으로 죗값을 치렀지만 여전히 책임감을 느낀다. 괜히 나 때문에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될 사람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내 일을 하려고 한다.
연기로 용서를 빌겠다는 말인가?
배우가 하는 일이란 연기로서 관객에게 다양한 감정을 전달하는 일이다. 간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일종의 대리만족을 줄 수도 있고 때론 상처를 치유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내가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미안하지만 내 연기가 그런 불편함조차 잊을 수 있도록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면 지난 과오도 조금이나마 희석될 순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숨기려고 하기 보단 잘못을 인정하고 맞을 건 맞더라도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긍정적이다.
죽을 순 없으니까, 계속 살아가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좋은 친구들>의 이도윤 감독님도 그러더라.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어쩌면 그런 일을 거쳤기 때문에 우리가 만난 거라고.” 내 잘못을 반석으로 삼아서 그 위에 쌓인 교훈들을 활용하며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친구의 권유로 하게 된 일이라고 들었다. 원망스럽진 않나?
사실 그 친구를 이제 더 이상 보진 않는다. 원망해서가 아니다. 내 선택이었으니까 내가 책임지는 게 맞다. 다만 다시 그 친구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겐 기분 나쁜 일이 될 수 있겠더라. 아무래도 그 일로 손해를 입은 사람들이 생겼으니까. 서로에게도 좋을 일은 아닐 거 같고.
사람들 시선이 신경 쓰이진 않나?
원래부터 특별히 불편함을 느끼는 편은 아니었다. 나는 동네 술집이나 편의점 앞에서도 잘 앉아있는 편이다. 작품을 하지 않을 땐 살도 많이 찌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있어서 알아보는 사람이 드문 거 같다. 옷도 막 입고 다니니까. 실제로 보면 내가 너무 까맣다더라(웃음).
주당이라던데.
먹으면 많이 먹는 편이다. 요즘은 운동 때문에 한 달 가까이 못 먹었는데 앞으로도 두 달 정도는 못할 거 같다. 그런데 조만간 개봉을 앞둔 <좋은 친구들> 제작보고회도 있고, 시사회도 있을 거라 뒤풀이가 좀 걱정이다. 다들 ‘네가 견딜 수 있을 거 같아?’라고 저주를 퍼붓는데, 절대 안 먹을 거다(웃음).
운동을 열심히 하는 이유라도?
지금 준비하는 차기작 때문에 몸을 만들어야 한다. 개인적으론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힘들다. 어릴 때 술만 먹지 말고 운동 좀 해놓을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웃음).
개봉을 앞둔 영화 <좋은 친구들>은 흔히 말하는 ‘남자영화’다. 이렇게 단순히 ‘남자영화’라고 할만한 작품엔 처음 출연하는 거 같은데.
<좋은 친구들>은 내게 잘 맞는 옷이었다. 그만큼 진짜 내 모습을 많이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정말 친한 친구들하곤 서로에게 욕도 많이 한다. 낄낄거리면서 헛소리도 많이 하고. 원래 남자들이 좀 그런 거 있잖아. 서로 까면서 친해지는 거. 그리고 쉬는 동안엔 술을 좋아하다 보니 살도 많이 찌는 편이라서 실제로 한 10kg 정도 체중을 늘렸다. 일상적인 내 모습을 담고 싶었다.
현장 분위기는 어땠을까?
감독님과 말이 너무 잘 통해서 대부분의 신이 두 테이크 안에서 오케이 됐다. 그래서 우리끼리 너무 잘 맞아서 너무 잘 찍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최근에 ADR(후시 녹음)을 하면서 편집된 영상을 보면서 둘 다 대가리 박고 반성했다(웃음). ‘너무 우리끼리 으쌰으쌰 했나?’ 싶더라. 아까 말했듯이 운동을 시작하면서 한 달간 술을 안마셨는데 그날 딱 한번 마셨다.
뭐가 아쉬웠나.
화면으로 보니까 희한할 정도로 멀끔해 보이더라. 그게 좀 아쉬웠다. 물론 나중에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병신 같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웃음).
사실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라 너무 과묵할까 봐 걱정했다.
그런 얘긴 많이 듣는다. 그런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겐 그 이미지보다 더 차갑게 대한다. 처음 만났는데 말을 툭툭 던지거나 인사도 하지 않는 사람들 있잖아. 서로 그래도 상관없다면 페어 플레이니까 괜찮다. 하지만 내가 하면 괜찮은데 네가 그러면 안 된다는 듯이 구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연기는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 저 혼자 잘나면 된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보통 초보 배우 시절엔 본인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언제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을까?
<마왕> 촬영 중에 어떤 신을 앞두고 많은 연습을 했다. 그래서 굉장히 자신 있었지. 그런데 상대 연기를 하는 선배님 앞에서 준비한 걸 하나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리액션을 맞추다가 그대로 끝나버렸지. 그런데 모니터를 보니까 내가 준비했던 것보다 그게 훨씬 좋아 보였다. 한 수 배웠지.
자신의 단점을 쉽게 인정하는 편인가?
스스로 무엇이 잘못됐는지 모르면 발전할 수 없다. 인정해야 고칠 수 있지. 그러니 남 탓하면 바꿀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다. 잘하는 사람을 만나야 잘나오고, 못하는 사람을 만나면 잘 안 나오는 건 당연한 게 아니다. 일단 나부터 잘하는 사람이 돼야지.
스스로에게 엄격한 면이 있는 거 같다.
스스로에게 제약을 줘야 노력이란 걸 하게 된다고 믿는다. 아니면 나태해지니까.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부럽다. 물론 그런 사람은 드물다. 예를 들면 현장에서 대본만 열심히 보면서 농담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준비하는 만큼 잘해내는 선배가 있고, 항상 술 먹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잘해내는 선배가 있다. 스타일이 다른 거지. 하지만 결국 정진하면 정점을 찍는 거다. 하지만 그 선배를 보고 현장에선 저렇게 다 놓아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는 후배들이 있다. 그 선배는 이미 기본이 돼있으니까 그게 되는 거다. 무대에서 10년씩 해왔던 사람들이니까. 날 것이 좋다고 하는데 잘 알겠지만 함부로 날 거 먹으면 장염 걸린다(웃음).
선배들이 꼭 연기적인 교훈만 주는 존재는 아닐 거다.
옛날엔 연기 잘하는 배우들은 사무실에 앉아서 자기한테 들어온 작품들만 고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잘 나가는 좋은 배우들도 직접 작품을 찾아 다닌다는 얘길 듣고 멍해졌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엔 내게 너무나 큰 사람들이었으니까. 요즘은 “이 작품 재미있는데 나 주면 안돼?” 이런 얘기 잘 한다. 예전엔 그런 부탁을 하려고 만나자고 한 거 같아서 쉽게 못했는데 지금은 편해졌다.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넉살이 생겼다고 할까?
먹고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웃음).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일지도 모르지.
나이가 들면서 경험이 늘어가고 그만큼 이해하게 되는 것들이 생긴다. 한번은 내가 아무렇지 않게 자주 찾던 동네 술집으로 친해진 동료 배우를 불렀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 한 아저씨가 오시더니 반갑다고 툭 치면서 ‘오, 누구 씨!’ 이러는 거다. 그런 상황을 목격하니까 이해가 되더라. 그 친구는 항상 룸이 있는 곳에서만 술을 마셨는데 내가 항상 그럴 필요 없다고 잔소리를 했거든. 나는 한번도 그런 일을 당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남자 나이 서른 셋이면 애도 아니고 그날 따라 기분이라도 안 좋아서 욱해버리면 술 기운에 싸움이 날 수도 있다. 그러다 안 좋은 기사라도 나면 큰일이고. 여배우들은 오죽할까 싶더라. 직접 겪어봐야 보이는 것들이 있더라.
특별히 친한 배우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류)덕환이, (김)재욱이 정도? 군대에서 만난 (이)준기도 친해졌다. 사람들이 되게 안 어울린다고 하는데 내가 봐도 그렇다. 사실 스타일이 정반대라 서로 흉보면서 토할 때까지 술 마신다(웃음).
남들이 보면 싸우는 줄 알겠다.
사실 이번에 촬영하면서 (이)광수랑 친해졌다. 그런데 잘 모르는 사람 입장에선 오해할 소지가 많다. 예를 들면 현장에서 광수가 NG를 내면 내가 ‘역시 예능하는 새끼는 안돼’라고 놀린다. 그러면 광수가 욕으로 응수한다. 사실 광수는 예의 바른 동생이다. 그 정도로 우리가 친해졌다는 거지. 그런데 사람들이 항상 우리 관계를 잘 알만큼 곁에 있는 건 아니니까 멀리서 볼 땐 주지훈이 이광수를 엄청 무시한다고 오해할 수 있겠더라.
그런 걸로 기사라도 나면 피곤한 일이고
사실 기자들이 모르고 쓰는 거라면 괜찮다. 그런데 대부분 알면서 일부로 쓰는 거잖아. 사실 배우를 공인이라고 하는데 공인은 사전적인 의미로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이다. 내가 공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라는 건 인정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으로서 책임의식을 지닐 필요는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건 공인으로서의 책임은 아니다. 배우의 사생활이 국민의 알 권리는 아니다. 공무원들은 국민이 낸 세금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사람이니까 주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배우는 자기 능력으로 일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다. 물론 배우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할 순 있다. 하지만 사사건건 기사화하면서 그걸 알 권리라고 포장하는 건 어이없지. 그런 의미에선 기자들이야말로 공인이다. 기자들이 쓰는 기사가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생각하면 굉장한 책임감을 느껴야지.
최근에 가인과의 연애도 폭로되듯이 밝혀졌는데.
특별히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다. 숨어 다니는 편도 아니고. 하지만 먼저 나서서 밝힐 이유도 없는 거지. 어쨌든 누군가 미행하듯이 따라다니면서 감시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을 리 없다.
20대 후반과 30대 사이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군대도 다녀왔고.
군대 다녀오니까 현장 인원의 절반 이상이 나를 형이나 오빠라고 부른다(웃음).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요즘은 20대 초반 같은 기분을 느낀다. 보통 스무살 중반 정도가 돼야 성인이라는 게 느껴지잖아. 아무래도 20대 초반엔 대부분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을 계속 만나고, 돈도 없으니까 하는 짓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거기서 벗어나는 기간이 필요한 거지.
입대 전에도 <돈주앙>이라는 뮤지컬로 공연한바 있는데 군대에서도 뮤지컬 공연을 했다고 들었다. 특별히 뮤지컬에도 흥미가 있었던 건가?
단순히 소리 내서 발성하고 발음하는 연습이 지겨웠다. 그때 뮤지컬 제의가 들어왔는데 문득 뮤지컬 발성이 기교를 부리지 않고 깨끗한 발성을 해야 하는 거라 기본 발성과 동일하다는 말을 들었던 게 생각났다. 원래부터 노래하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지겹지 않게 발성 연습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뮤지컬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결국 뮤지컬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다.
밴드 활동도 하더라. 자작곡도 있던데.
흥얼흥얼하면서 녹음했다가 세션 멤버들한테 들려주면 그들이 악기로 연주해서 곡이 하나 나온다. 물론 어디 가서 음악적으로 어쩌고 저쩌고 하면 창피한 수준이지. 하지만 이렇게 편하게 해선 안될 이유도 없다. 물론 이렇게 편하게 연기하는 건 안 된다. 연기는 내가 돈을 받고 하는 일이니까.
(ELLE KOREA 2014년 7월호 NO.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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