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밴드 ‘못’의 프론트맨 이이언이 홀로 돌아왔다. 우주를 홀로 유영하듯 외로운 여정을 건넜다는 그가 감내했던 고독들이 나직이 내뱉어졌다.
예사롭지 않은 음표들이 귀에 꽂혔다. 밴드 이름이 ‘못’이라 했다. 벽에 박는 그 뾰족한 못? 그럴싸하다 생각했다. 그렇게 듣고 보니 우울함이 대못처럼 가슴에 푹푹 박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오해였다. 내 마음은 호수, 아니 연못이오. 일렉트로니카 특유의 기계적인 사운드가 기타 리프에 걸려 심연으로 묵직하게 침전해가는 느낌, 마음을 크게 흔들기 보단 무겁게 잡아 깊이 내려앉는 감성의 음표들. 그것이 바로 ‘못’의 음악이었다. ‘라디오헤드, 포티쉐드, 스매싱 펌킨스를 좋아하고 록, 일렉트로니카 재즈, 트립합을 재료로 스타일리시한 음악을 할 사람을 찾는다.’ 못은 멤버를 구하는 이이언의 공고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지이가 찾아왔다. 이이언이 만든 음표에 지이가 기타를 치니 이이언이 노래했다. 그렇게 못의 1집 <비선형>과 2집 <이상한 계절>이 완성됐다. 파열하는 기타음의 뜨거움과 일렉트로니카 사운드의 기계적인 차가움이 공명하는 못의 음악은 인디음악계를 넘어서 한국음악계의 특수한 이정표가 됐다.
2007년에 발표한 <이상한 계절> 이후로 못의 노래가 멈췄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서 소리 소문 없이 메워버린 것마냥 못이 사라졌다. 그리고 2012년, 이이언이 돌아왔다. 더 이상 못이 아니었다. 이이언의 음악은 못의 그것이거니와, 한편으로 못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 그는 왜 못에서 나와 혼자가 되길 결심했을까. 스튜디오에서는 김영하 작가의 내레이션이 담긴 이이언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가 담담하게 울리고 읊어지는 동안, 이이언은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 들고, 뜨거운 증기를 흡입했으며, 이내 말했다. “이전까지는 무리를 해서라도 내 고집과 의지로 내 욕심을 채워내곤 했어요. 그런데 이건 제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되게 무력해지더라고요. 제가 컨트롤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체념도 빨랐던 거 같아요.” 성대 폴립의 발생, 못의 두 번째 유영은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이언의 상황과 함께 잠겨버렸다. 일종의 ‘무력감’이 이이언을 멈춰 세웠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 앞에서 머뭇거리며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한달 반 정도의 휴가, 음악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이이언에게 그렇게 긴 휴가가 주어진 건 처음이었다. “친한 친구가 미국에 살아요. 동생과 함께 가서 한달 반 동안 낚시를 했죠.” 낚시라니, 추구하는 음악만큼이나 역시 정적인 취미를 즐기는 편이었던 건가. 그가 대답했다. “액티브한 편은 아니에요.” 그의 음표들이 만들어낸 선입견 중 하나가 들어맞았다. 반도체처럼 섬세하게 한 음 한 음을 회로처럼 설계해 넣은 듯한 그의 솔로 앨범 프로젝트 <길트-프리(Guilt-Free)>는 그의 편집증적인 음악 스타일이 더욱 구체화된 결과물이었다. 그만큼 예민한 성격이리라 예감했다. “예민하죠. 다만 혼자 예민한 것과 사람들에게 예민하게 구는 건 또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노력하는 편이에요. 근본적으로 인생이 비극이라 생각하기에 열심히 반대로 노를 젓는 거죠. 가만히 있으면 거기에 휩쓸리고 말 테니까.” 그가 말하는 비극이란 단어가 삶에 대한 비관처럼 들리겠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그것은 인생에서 수반되는 고통 그 자체에 대해서 쿨하게 인정하는 태도에 가깝다. “모든 삶이 저절로 행복해지도록 고안된 것이 아니잖아요. 기본적으로 세상은 제가 원하는 게 있을 때, 그것을 바로 갖지 못하도록 막는 성질이 있어요. 음식을 먹고 싶다면 돈을 지불해야 하듯, 즉각적으로 채우고 싶은 욕구가 있을 때 세상은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니까요.” 그는 그것이 욕구와 충족 사이의 ‘균형’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해하기에 세상은 단순한 낙관이나 밑 빠진 긍정으로 돌파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라는 파울로 코엘류의 <연금술사> 식의 감언이설을 싫어해요. 이를 테면 김태희는 세상에 단 한 명이죠. 모든 사람이 김태희가 여자친구가 되길 바란다 해도 결코 김태희의 애인이 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누구나 간절히 원한다 해서 김태희를 다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결국 정말 간절히 원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갖춰야 하는 것들이 있고, 사실 대부분은 이룰 수 없는 것들이죠. 돈이 부족하거나, 능력이 부족하거나, 외모가 부족하거나.”
균형은 이이언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화두다. 음표들을 기계적으로 찍어대면서도 음의 간극마다 감정을 불어넣어야 했던 <길티-프리>를 작업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끊임없는 균형잡기 싸움이었다. “다시 못으로 복귀하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고, 일단 워밍업이 필요하겠다 싶었어요. 처음에는 편한 마음으로 작업하고 싶어서 이 솔로 프로젝트를 구상했죠. 일관성이 없거나 중구난방이라 해도 솔로 프로젝트니까 알아서 감안하고 들어주리라 생각했고요.” 사실 이이언이 계획했던 솔로 앨범 발매 시점은 2년 전이었다. 그때 즈음에는 대부분의 곡도 나와있었다. 그러나 작업을 시작하며 그는 점차 스스로를 압박했다. “정제돼 있지 않고, 일관성이 부족한 걸 견딜 수 없었죠. 점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2년 동안 다시 균형을 찾아서 미세하게 조정해나갔어요.”
<길티-프리>라는 타이틀의 의미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만약 2년 전에 앨범을 냈다면 나는 죄책감(guilt)을 느꼈을 거에요. 이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는 길트에 대해서 이처럼 정의했다. “자신의 내면적 가치에 반하는 행위를 할 때, 길트가 생긴다고 해요. 그러니까 창피함(shame)은 사회문화적인 가치에 반하는 행위를 할 때, 즉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짓을 할 때 느끼는 것이지만 죄책감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죄책감을 많이 느낀다는 건 그만큼 그 기준이 높다는 거죠.” 완벽하지 않은 결과물이 죄의식처럼 느껴진다는 비장함, 이이언이라는 뮤지션에 대한 신뢰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둘이었던 ‘못’에서 ‘이이언’이라는 하나가 되는 건 고독한 여정이었다. “혼자 작업하면서 마무리 단계로 갈수록 홀로 우주로 유영하는 기분이 느껴졌어요. 우주복을 입고 산소호흡기 하나를 매달고서 아무도 없는 우주를 헤쳐나가며 간신히 무선 교신 정도만 가능한 그런 정도의 느낌.” 한때 그는 완벽해지기 위해서라면 일생을 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이 달라졌다. “ <이상한 계절>을 발표한 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만약 100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이 앨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100년 동안 작업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번 작업 중에 저는 스스로 저의 고갈된 바닥을 봤어요. 그런 바닥을 보고 나니까 이제 그런 호언장담은 못하겠어요. 이런 작업도 다시 못할 거에요. 제가 지닌 마지막 한 방울까지 총동원해서 정리하는 느낌이었죠.” 결국 그는 한달 간의 휴가를 요청했고, 그 바닥에서 벗어났다.
자신의 바닥까지 내려간 이이언의 앨범에서 주목할 수 있는 건 그가 만들어낸 사운드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그의 앨범을 통해서 눈에 띄는 몇몇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앨범의 마지막 트랙에서 발견되는 김영하 작가의 내레이션은 실로 이색적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라는 제목은 김영하 작가의 동명 단편집의 제목을 빌린 것으로 이이언은 원작의 북트레일러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김영하 작가의 전위적인 음성이 다시 한번 스튜디오를 채울 때 즈음 두 사람의 인연을 물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트위터를 통해서 서로 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대화가 잘 통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열려 있는 편이며 언제나 새로운 감각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분이셨어요.” 김영하 작가가 직접 소설집의 절반 가까이를 낭독하고 녹음해서 이이언에게 전달했고 이이언은 그 일부분을 선택해서 작업한 결과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다. “약간 공격적이면서도 리듬감이 있고, 음악적인 느낌이 좋아서 저 부분을 썼어요.” 속물적인 삶에 대한 냉소적인 조소에 가까운 가사, 이이언의 선택은 짙은 감수성에 가려졌던 그의 감춰진 취향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니컬한 것도 재미있어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아주 못된 농담들, 이를테면 <사우스파크> 같은 애니메이션도 좋아해요.”
이번 솔로 앨범에는 그가 리메이크한 두 개의 커버곡이 담겨 있다. 하나는 지금은 해체한 미국의 밴드 짜르의 ‘드럭’과 현진영의 ‘슬픈 마네킹’이 바로 그것. 그런데 잠깐, 이이언과 현진영이라니 이 어마어마한 간극이 메워질 수 있는가? 물론 이이언이 토끼춤을 추리라고 기대하지 않은 이상 걱정도 마시라. “정작 노래를 들었을 때 슬프단 생각을 못했는데 문득문득 가사를 곱씹을 수록 정말 슬프고 쓸쓸한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감성과도 맞는 부분이 있었죠.” 이이언의 ‘슬픈 마네킹’은 현진영의 원곡에 대한 재발견이라 불러도 좋을 또 다른 ‘슬픈 마네킹’이다. 그의 오래된 블로그 주소는 그가 창조한 ‘애시크래프트(ashcraft)’라는 단어를 입력할 때 열린다. 일명 재(ash)의 기술(craft). “재라면 타고 남은 것이죠. 재처럼 타고 남은 어떤 대상이 어쩌면 지나가버린 시간일 수도 있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일 수도 있다면 그것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기술이 바로 재의 기술이에요. 제겐 음악이 그래요.” 그의 리메이크는 바로 그가 말하는 궁극의 ‘재의 기술’이 아닐까. 그는 실제로 리메이크에 관심이 많다. “예전에 못 공연 당시에도 항상 리메이크 커버곡들을 못 스타일로 연주했어요. 심지어 지금 리메이크 앨범도 구상 중이에요. 단지 노래만 새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재로부터 다시 만들어내는 그런 리메이크.”
록 사운드를 밑그림 삼아서 일렉트로니카 계열의 트립합 사운드를 채색한 ‘못’의 음악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기계적인 사운드 속으로 파고든 그의 솔로 앨범 역시 국내 음악계의 현실 안에서는 지극히 실험적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불가능한 방식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정립된 못의 사운드가 있기에 굳이 못이라는 이름으로 큰 변화를 시도하고 싶진 않아요. 못으로서 할 수 없는 스타일을 솔로 앨범으로 해보고 싶었죠.” 그리고 못을 시작할 때도 그러했듯이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에 대한 의심이 없었다. “어딘가 균형의 중심이 있을 것이기에 그 균형을 찾아가다 보면 될 것이란 확신이 있었어요.” ‘못’이 아닌 ‘이이언’으로서 가능했던 시도들은 이제 새로운 가능성을 밝히고 있다. 가수 박정현으로부터 작곡 제의를 받기도 했다. 그렇다. <나는 가수다>의 박정현 말이다. 박정현과 이이언의 결합이 상상이나 되는가.
본래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꿈꾸던 그가 뮤지션의 길로 선회한 건 대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주어진 목표를 만족시키는 솔루션을 만들어내는 직업이잖아요. 그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주어진 시간 내에 얼마나 효율적인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느냐라는 차이가 있을 뿐, 크리에이티브한 작업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나니 결과물의 만족도를 떠나서 나만의 유익한 결과물을 내는 일이 보였어요.” 그의 솔로 앨범을 공연하기 위해서 풀셋업을 하자면 무대에 올라가야 하는 랩탑만 세 대가 된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통한 기계적인 사운드를 추구하는 만큼 컴퓨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면 불가능한 음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꿈꾸던 두 가지 꿈을 모두다 이룬 셈일지도 모른다.
이이언은 언젠가 다시 못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다. “이미 곡을 써놓은 것도 좀 있어서 EP로 정리해서 발매하면 지금도 가능해요. 다만 멤버 구성도 재정비해야 하니 빠르면 내년 정도?” 기존 멤버였던 지이가 개인적인 사유로 팀을 탈퇴한 지금, 못의 여백을 채우는 건 이이언의 몫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라디오헤드, 포티쉐드, 스매싱 펌킨스를 좋아하고 록, 일렉트로니카 재즈, 트립합을 재료로 스타일리시한 음악을 할 사람’을 찾을 것인가. 이이언의 대답은 단호하다. “못 1,2집을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야죠.” 어쩌면 당장은 그토록 힘겨운 앨범 작업을 끝냈으니 다시 한번 휴가를 떠나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지 않을까. “지금도 쉬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가끔 일정 없는 날은 집에서 쉬어요. 하지만 나란 인간은 어떻게 돼먹었는지, 그런 날이 더 우울해요.” 감성을 쪼개는 남자, 이이언과의 대화가 끝날 때 즈음 다시 한번 김영하 작가의 내레이션 중 마지막 문장이 귓가를 스치고 흩어졌다. “그것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지난 15년간 이석원은 뮤지션으로 살아왔다. ‘언니네 이발관’의 리드보컬이자 기타리스트로서 다섯 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하지만 2009년은 이석원이란
이름 석자에서 뮤지션이란 존재가 아닌 또 다른 존재로서의 이력을 알린 한 해다. ‘시네마디지털서울(CinDi) 2009’의 트레일러를 연출했고, <보통의 존재>란 제목의 에세이를 출간했다. 동시에 지난해 발표한 ‘언니네 이발관’ 5집 <가장
보통의 존재>는 3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동시에 한국대중음악상에서
3관상을 수상하며 평단과 대중의 너른 지지마저 얻었다. 음악가로서의
깊이를 채우는 동시에 새로운 영역으로 존재를 확장해갔다.
이와 같은 이석원의 행보를 지켜본 누군가는 그를 아주 특별한 존재라 인식할지도 모르겠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동떨어진 세계의 일처럼 여겨지는
기회를 차례로 성취해 나가는 이의 삶이란 특별하게 여겨져야 마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석원 스스로는
자기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이 남들과 다를 것 없는 아주 보통의 존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가 남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건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철저한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연을 앞둔 시점에서는 목을 보호하기 위해 며칠간 입도 열지 않는다는 예민함은 완벽한
무대를 연출하고 말겠다는 최선의 집념이다. 동시에 그 완벽한 무대는 관객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완벽한 무대를 이루지 않고서는 성이 차지 않는 특유의 기질로서 쟁취해야만 하는 그만의 이상향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이석원의,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은 분명 꿈의 팝송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 음악을
하면서 즐거운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이석원의 말은 의외의 사실이다. 그에게 음악이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자 스스로를 투과하는 창이었다. 단지 그것으로 족했다. 이석원에게
음악이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표현하고자 했던 수단에 가까웠다. 그리고
자신을 완벽하게 표현해냈다고 믿을 수 있을 때 만족할 수 있는 가치도 존재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는
아주 보통의 완벽주의자일지도 모르겠다.
이 인터뷰는 두 번에 걸쳐 만남을 거듭한 이석원과의 두 번째 대화를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다. 첫 번째 인터뷰로부터 정확히 이틀 만에 이석원은 메일을 보냈다. 인터뷰를
다시 하자는 것이었다. 지난 인터뷰에 첨언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온전히 다시 하자는 제안이었다. ‘인터뷰가 중간에 끊긴 것 같아서 마음에 걸린다’는 그는 ‘인터뷰에 기록된 자신의 발언을 스스로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상대와의 인터뷰가 분명 까다로운
일이었지만 시종일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발음하는 이와의 대화를 한 차례 더 이어갈 수 있다는 건 분명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 인터뷰가 이석원의 마음을 온전히 대변하는 결과물로 완성됐다고 장담할 순 없겠지만 자신의 작품에 자신을 온전히
담아내고자 했던 이석원의 노력처럼 이 기록 역시 이석원이란 인물을 담아내고자 노력했다는 진심 정도는 전해지길 바란다. 아주 보통의 완벽주의자를 위한 아주 보통의 인터뷰로서 말이다.
왜 인터뷰를 다시 하자고 했나?
그날 시간적인 문제로 영화제 직원 분이 인터뷰를 중간에 자르지 않았나. 그리고 나도 공연을 앞두고 힘든 상황이었고, 사실 영화 관련 인터뷰로만 생각했다가 예기치 않게 음악적인 질문을 많이 받게 되니 급작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라.
원래 인터뷰에 호의적인 편인가? 아니면 자신의 발언에 대한 책임감 때문인가?
솔직히 나는 인터뷰를 힘들어하는 편이다. 내 일기를 본다니까 하는 말이지만 일기에 여러 차례 썼던 것처럼 인터뷰에서 내가 한 답변들을 나 스스로 거의 인정하지 않는다. 내 음악을 듣고, 일기를 보고, 방송이나 공연을 통해서 나를 접하고, 나를 볼 수 있는 여러 경로가 있지 않나. 그 중에서 라디오에 나와서 떠드는 것과 인터뷰에서 말하는 건 내가 한 말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거짓말했다거나 이런 말이 아니다. 뭐라 해야 할까. 사람 마음은 시시때때로 변하는데 그 순간 내가 했던 말이 활자로 남고 기록이 돼버리니까 그게 내 영원한 진심으로 남게 되는 것 같아서 그게 싫다. 항상 인터뷰 끝내고 돌아서는 순간 다 후회한다. ‘내가 그 말을 왜 했지?’ 이런 게 너무 많아서. 이건 같은 맥락인데 나는 작업할 때도 수정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걸 굉장히 힘들어한다. 앨범이나 글은 내 맘대로 끝없이 수정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기꺼이 할 수 있지만 인터뷰는 수정하기가 힘들지 않나. 그래서 다시 할 수 있을까 겸사겸사 물은 거다. 아마 지난 번 인터뷰와 같은 질문을 해도 전혀 다른 대답이 많을 거다. 감안해서 들어달라.
‘지산 락 밸리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 올해 처음으로 개최된 페스티벌이었는데 어땠나?
좋았다. 내가 볼 땐 페스티벌 가운데 주최측에서 이렇게 잘 준비한 경우는 드물다. 공간도, 사운드도 좋았다. 무엇보다 우리가 완벽하게 준비해갔기 때문에 더 좋았다. 여기서 완벽이라는 의미는 이렇다. 사실 본인들이 완벽하게 라이브를 준비해도 사운드 쪽에서 받쳐주지 않으면 공연은 엉망진창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전속 엔지니어를 항상 대동하고 간다. 일단 소리가 완벽하게 보장되니까 우리가 가진 걸 100% 보여줄 수 있었다. 여러 면에서 좋았다.
외국의 뮤지션들과 함께 참여하는 페스티벌이란 점에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오아시스(Oasis)’와 같은 날 공연했는데, 기라성 같은 외국 뮤지션과 한 무대에 서거나 그들의 공연을 관람하는 것 자체로부터 어떤 자극을 느껴보진 않았나?
일단 오아시스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런데 오아시스의 셋 리스트가 사실 친절한 편은 아니다. 변동도 별로 없고. 물론 내가 좋아하거나 아는 노래가 많이 나오면 좋지만 이미 여러 차례 봤기 때문에 특별하진 않았다. 그보다 우리 앞에 공연했던 ‘프리실라 안(Priscilla Ahn)’이 굉장히 사랑스럽더라.
전국 투어를 마친 뒤 첫 공연이었다. 밴드 단독 콘서트와 페스티벌의 라이브에서 느껴지는 차이는 어떤가?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거의 7달씩 콘서트를 할 정도로 공연을 많이 하는 편인데 표현이 좀 그럴지 모르지만 용도별 공연을 많이 한다. 우리 단독 콘서트, 그 중에서도 극장 콘서트, 그리고 우리 콘서트 브랜드인 ‘월요병 콘서트’라는 것도 있다. 월요병 콘서트냐, 아니면 일반 극장 콘서트냐, 이에 따라서 분위기는 완전 달라진다. 같은 행사라도 일반적인 대학 축제냐, 지역 행사냐, 에 따라 다르듯 행사마다 종류가 다르고, 공연을 준비하는 의도에 따라서 분위기도 굉장히 달라진다. 페스티벌 같은 경우는 비싼 돈을 주고 먼 데까지 놀려고 작정하고 온 사람들이 모인 날이니 만큼 우리도 작정하고 달려줘야 된다. 그러니 만약 이번 공연에서 우리를 처음 봤거나 앨범만 들어봤던 사람이라면 좀 놀랐을 거다. 말랑말랑한 그룹인 줄 알았는데 라이브에서는 굉장히 파워풀하더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그럴 땐 우리도 다 막 미쳐서 노니까. 그러다가 그런 페스티벌이 아닌 다른 공연에서 우리를 보면 또 다른 모습이 보일 거다.
2004년도에 김C와 함께 OCN에서 방영하는 <오씨네 영화잡기>에 출연했다. 16mm 카메라로 영화를 제작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무한도전>과 비슷한 부류의 프로그램이었다. 나랑 김c, 용이 감독, 이렇게 셋이 묶어서 출연했는데 매주 영화에 대한 다양한 체험을 하거나, 게스트들을 모시고 토크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김태용 감독, 만화가 강풀 외에도 다양한 게스트가 나왔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막판에 셋이서 영화 만들기에 도전한다는 컨셉으로 진행했는데 사실 그땐 영화 만든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방송을 워낙 모를 때였고 그냥 좀 웃기면 된다고 생각했지. 그냥 제작진들이 짜주는 대로 갔던 프로그램이랄까.
김C는 요즘 <1박 2일>과 같은 버라이어티에서 왕성하게 방송활동 중이다.
재미있더라. (웃음)
그런 오락방송과 전혀 매치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오히려 정말 독특한 매력을 지닌 캐릭터를 구축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선 어땠나?
나는 처음부터 김C가 방송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방송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자리잡고 적응할 수 없다. <1박2일>에서 김C는 웬만하면 뒤에 있는 편인데 그것도 오히려 자기 자리를 알기 때문에 똑똑하게 적응하는 방식인 거다. 처음부터 나는 김C가 방송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방금 말한 김C와 마찬가지로 방송을 통해 활발히 모습을 드러내는 지인이 몇 명 있다. 근래에 <유희열의 스케치북>에도 출연했었는데 방송에 대한 욕심은 없나?
<오씨네 영화잡기>이후로 TV에 나가는 것에 대한 결론을 얻었다. 하고 싶다, 하고 싶지 않다, 를 떠나서 내가 TV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게 스스로의 결론이었다. 당시 그 프로가 ‘투니버스’를 제외한 케이블TV 시청률 1등을 기록하기도 했다. 내가 웃기는 건 좀 하거든. (웃음) 그런데 나를 굉장히 소모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 기본적으로 나는 카메라가 돌아간다는 걸 굉장히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냥 체질이 아닌 거지. TV에서 라이브하는 것도 굉장히 싫어한다. TV카메라가 있으면 그 자체로 내가 편하지 않아서 내가 가진 백(100)을 보여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무대에서 우리가 가진 백을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병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에 TV카메라 앞에선 웬만하면 공연도 하지 않는다. 결국 그 때 얻은 결론은, ‘TV에 다시 나가지 말아야겠다’. 사실 그때 돈은 많이 받았지.
짭짤했겠다.
괜찮았지. 거기다가 ‘언니네 이발관’ 수입까지 더하니 갑자기 재벌 된 거다. (웃음) 그렇게 돈벌이는 좀 됐을지 몰라도 돈 때문에 나를 소모하는 느낌을 견디기 어려웠다. 요즘도 김C랑 연락하고 지내는데, 김c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저렇게 방송을 아는 사람은 방송하면서 음악도 할 수 있지만 확실히 나와는 다른 길인 것 같다고.
사실 방송을 어려워하는 것 같진 않던데, 그런 불편함을 연출적으로 가리는 건가?
기본적으로 나는 연출이 가능한 인간이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을 잘 컨트롤하지 못한다. 그게 가능한 건 그 상황이 나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대나 방송, 아니면 사석에서마다 내 모습들은 상당히 다르다. 예를 들어서 유년시절 친구를 대하는 것과 회사 동료를 대할 때 완전히 달라지지 않나. 여기선 되게 까불까불 한데 여기선 의젓하게 오피셜한 모습을 보이고, 이런 경우 같은 거다. 그게 ‘난 얘네들 만나면 이렇게 해야지.’ 이렇게 연출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 그런 내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처럼 무대 올라가면 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방송에 나가면 그 상황이 날 그렇게 만드는 거다. 아무래도 방송은 긴장되고 불편하다. 방송이 내게 요구하는 모습은 오직 하나니까. 재미있거나 웃겨야 한다. 그래서 갖은 헛소리 다 해야 되고. 그런 내 모습을 보다가 내 일기를 보면 또 뭔가 다른 사람 같고. 저 사람은 도대체 뭐가 진짜일까, 싶어질지도 모르지. 그건 내 성격이 분열적이거나 다중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씬디 2009(디지털시네마서울 2009)’에서 본인이 연출한 트레일러는 지난 두 개의 씬디 트레일러와 완전히 다른 형식으로 완성됐다. 김영하 작가나 이상은 씨가 만든 트레일러가 단순히 풍경을 담은 영상에 가깝다면 당신의 트레일러는 온전히 연출된 것이다. 보다 영화적 방식에 가깝게 접근했다 할까. 일기에서 밝힌 연출의 변에 따르면 ‘1분짜리 영화를 만들겠다’고 했던데 그래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나로서는 일단 트레일러 자체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일단 그 두 분이 만든 트레일러 밖에 샘플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말해야 될 것 같은데, 앞선 두 분들의 작품이 그 분들의 선택이었다면 난 좀 더 거창하게 찍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러면 안 되는지 물어보기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러프하게 찍어야 되는 거야?”물어봤더니 괜찮다고 하더라.
주최측에?
아니. 내 주변에 영화 하는 분들에게. 나는 음악보다 영화에 관련된 친구들이 더 많다. 어쨌든 내 맘대로 찍으면 된다고 하더라. 그리고 지난 두 분은 직접 촬영까지 했다. 뭐가 됐든 나는 내 연출의도에 맞게 기술자들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지, 내가 기술적인 부분까지 담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기술적인 부분을 담당하면서 그 안에 매몰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내가 촬영을 하지 않으면 더 자유롭게 구상하고 연출이 가능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내가 감독이 돼서 판을 좀 벌려보자 싶어졌다. 촬영감독도 구하고, 프로듀서, 조감독, 주연배우까지 쫙 구해서 진행하게 됐다. 언제 또 이런 일을 해볼 수 있을까, 싶기도 했고.
연출 경험은 전무했을 텐데.
우리 홈페이지에‘녹음 스케치’라는 섹션에 제작동영상이 있다. 사실 그게 영화하는 분들에게 약간 화제가 됐었다. 신선하다, 재미있다, 이런 반응이 있었다. 그런 경험 정도?
다 떠나서 영화 현장이라는 걸 구성하는 것 자체는 완전히 처음이었으니까.
완전 처음이었지.
그 현장을 구성하는 것에서부터 트레일러 제작이 시작된 셈이다. 난관은 없었나?
일단 처음엔 막막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도 무슨 일이건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만 확실하면 그 뒷부분들은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물어보고, 알아나가면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차라리 구상하는 게 힘들었지. 실제로 판을 벌려나가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주변의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기도 했고.
제작비는 어떻게 조달받았나?
일단 제작진행비용으로 사무국에서 돈 100만원 정도가 나왔다. 나 혼자 찍었다면 다 먹었겠지? (웃음) 사실 무보수로 도와주신 분들도 많고, 촬영감독님께는 차비 정도만 드렸다. 어쨌든 공짜로 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지 않나. 조명이나 세트는 실비를 들여야 하니까 그런데 돈을 좀 썼지.
홍상수 감독의 신작 <하하하>에 참여한 박흥렬 촬영감독을 섭외했다. 어떻게 접촉했나?
<싸움의 기술>시나리오를 쓴 민도현 감독이 소개시켜줘서 촬영 전에 홍대에서 미팅을 했다. 그 분이 당시 바로 몇 일 뒤에 홍상수 감독 차기작 크랭크인에 들어갈 상황이라 굉장히 바빴다. 중요한 건 페이도 줄 수 없었고, 사실 나를 도와줄 이유가 하나도 없었지. 그래서 그 분을 뵙고 내가 이런 걸 찍고 싶다고 확실히 얘기하고 그 사람에게 흥미를 느끼게 만들어야 촬영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던 거다. 결국 그 분께서 그렇게 느끼셨으니까 촬영을 하셨겠지.
차승우 씨를 배우로 섭외했는데 처음부터 생각했던 캐스팅이었나?
처음부터 승우를 생각한 측면이 크다. 그런데 승우가 앨범 녹음 중이었기 때문에 만약 차승우가 못하게 되면 차선책으로 내 주변의 누구로 해야겠다 정도의 생각은 있었다. 주인공은 영화배우처럼 멋있는 놈이어야 했기 때문에 내 주변에 멋있는 놈 원, 투, 쓰리를 뽑아서 이 놈이 안되면, 이 놈으로 가자 싶었지.
차선으로 생각했던 건 누구였을까?
<비바소울>의 성룡이하고 이지형.
아무래도 남성성이 물씬 느끼는 느낌으로 보자면 차승우가 최선책처럼 보이긴 한다.
그렇지. 지형이도 비주얼은 괜찮지만 걔가 마초적인 느낌은 또 아니거든. 그래서 만약 지형이로 가면 지형이가 자주 쓰는 카우보이 모자를 씌워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성룡이로 가면 어떻게 가야 할지 생각했고. 성룡이는 차승우랑 또 다르게 남성적으로 생겨서 만약 그 친구로 갔다면 그 친구에 맞게 뭔가가 또 됐겠지.
결과물은 마음에 드나?
나는 대만족이다. 내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그림이 딱 그대로 나와서 만족한다.
영화 쪽에 지인이 많은 것 같다.
사실 나는 음악하는 친구들과 교류하는 일이 거의 없다. 뭐라 해야 될까. 나는 음악을 음악적인 행위로써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괴리감 같은것을 느낀다. 그러니까 음악적인 음악이라는 건 음악하는 사람 특유의 어떤 관성이라던가 음악하는 사람의 관습적인 판단들이랄까.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을 울리지 못하는데 단지 어떤 음악적인 이유에서 좋다고 판단하는 부분들에서 대해서 알러지가 있다. 그래서 음악하는 애들보단 영화하는 사람이나 방송작가, 출판 쪽 사람들과 있을 때 오히려 할 얘기가 많아진다.
그 음악적인 음악이란 기능적인 기교에 천착하는 것을 의미하나?
기술적인 테크닉은 굉장히 중요하다. 나도 스튜디오 녹음 경험만 수십 번이고, 녹음이나 앨범 만드는 작업에 대해서는 테크니션이 됐다고 봐야 된다. 중요한 건 테크닉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단 단순한 이야기다. 예를 들어서 음악이건 영화건 책이건 본질이 무엇인가의 문제다. 울림을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 랄까. 우리는 앨범을 만들거나 라이브를 할 때 이 바닥에서 최고의 엔지니어들을 동원해서 작업한다. 음악적으로 최고의 지식과 기술이 동원된다는 말이다. 그건 울림을 제대로 내기 위한 종을 만드는 작업인데 내가 아까 말한 부류들은 종을 만들되, 그 종의 알멩이가 비어있다. 즉, 기자에겐 독자가 중요하고, 정치인에겐 유권자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게 핵심이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음악은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나에게 음악을 만든다는 건 좀 특별한 일이다. 물론 글을 쓰거나 어떠한 행위를 하는 것과 같이 기본적으로 나라는 사람을 표현한다는 공통적 행위로서 별로 다를 건 없다. 단지 외피가 다른 거겠지. 처음 음악을 할 때부터 줄곧 생각했던 건 내가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거다. ‘어떻게’라는 건 결국 ‘무엇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에 집중하다가 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어서 단지 음악하는 게 좋기 때문에 음악공부를 하고, 유학도 다녀오고 해도 정작 표현하고 싶은 것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음악을 들어보면 공허하다. '어떻게'만 죽어라고 팠는데 정작 '무엇을'이 없다는 거다. 불행한 일이지. 갖고 있는 컨텐츠 자체가 빈곤하니까 방법론을 아무리 연마해도 공염불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가 만들어낸 앨범에 대한 성취감은 어느 정도인가? 자신을 음악으로 표현해낸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이 있기 때문에 15년 동안 음악을 해왔을 텐데.
오히려 나는 음악하는 자체를 굉장히 괴로워하는 타입이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그대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뒤따를 ‘어떻게’라는 작업이 굉장히 고통스럽다. 최근에 만든 5집엔 억대의 돈이 들어갔다. 우리가 앨범을 3만장 넘게 파니까 손익분기가 될랑 말랑하더라. 일반적인 밴드의 녹음비 치고는 아주 많은 돈이 들어갔다. 그러면 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사운드에 이렇게 많은 돈이 들어가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다. 몇 년간 뛰어난 테크니션들이 투입돼서 작업해야 되고, 엄청난 돈도 들어가야 되고, 그래야 최고의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이런 계산이 서면 이미 힘들어질 수 밖에 없는 거다. 처음에 우리에게 배정된 작업비가 1억이었다. 그런데 1억 5천이 되고, 2억이 넘어갔다. 기간도 1년이 넘어가버렸다. 그러니까 회사를 상대로 설득해야 하고, 협상해야 되고, 이해를 이끌어내야 되고, 이런 과정 안에서도 전문적인 기술에 대한 고민을 끝없이 가져가고, 끊임없이 자평도 해야 하고, 그 안에서 내 몸과 마음이 완전히 거덜나더라. 그럴 정도로 해보니까 이제 나에겐 그 ‘어떻게’라는 게 즐거울 수 없는 거다. 나에겐 음악이 좋아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음악이 좋아서 하고 싶어 미치겠다. ‘뮤직 메이스 미 하이(Music makes me high).’ 이런 애들하고 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류의 사람이란 거다. 이제 와서 나는 음악전문가가 됐고, 이 바닥에서 인정도 받게 됐지만 그런 음악적인 사람과 나 사이엔 굉장히 괴리가 있다.
그 괴로움을 참는 건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일 거다.
원래 트레일러 편집에 할애되는 시간을 이틀로 나눠서 12시간 정도로 잡았다. 그런데 2시간 만에 끝내버렸다. 나를 도와주겠다고 아는 감독님들이 와서 쫙 앉아있었는데 내 힘으로 그냥 편집해버렸지. 나는 음악에 대해서 음악적으로 접근했다기 보단 어떤 분야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범용적인 접근을 했다. 그러니까 내 머리 속에 있는 걸 끄집어 내서 현실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15년간 음악을 통해서 단련돼 온 거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내가 직접 기술자가 되는 것에는 관심 없다. 기술자들과의 파트너십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그렇게 작업해왔다. 만약 내가 음악만 하던 사람이라면 이렇게 영화현장에서 판을 벌리고 프로 촬영기사랑 작업할 수 없었을 거다. 완전 휘둘렸겠지. 나는 내 가게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거나 책을 쓰거나 할 때도 내가 머리 속으로 원하는 걸 끄집어 내기 위해 그 분야의 전문가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경험적 노하우를 터득해왔다. 음악이라는 협의에 매몰돼 있는 게 아니라 결론적으로 나라는 사람은 음악이건, 영화건, 책이건, 표현이 가능한 작업 자체에 중심을 두고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에 천착해온 거다.
결국 당신에게 음악이나 연출, 그리고 글은 자신의 세계관을 소통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셈이다. 자신을 담아낸 결과물에서 값어치를 느끼나 보다.
아무래도 나한테는 그런 측면이 크다. 대신 방금 말한 부분에서 소통이라는 단어만 표현으로 바꾸면 적절하겠다. 나는 기본적으로 타자와의 소통이 완벽하게 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소통이란 단어는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표현이나 발산이라는 말은 좋아한다. 소통은 되면 좋고, 안 되더라도 그 사람이 제 나름대로 받아들이거나 느낄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면 좋겠다. 단지 작품의 창조자로서 내 머릿속에 있는 걸 그대로 끄집어낸다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입맛대로 그걸 보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 건 경험에서 기반된 결론이 아닐까?
그건 절대적이지.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와도 사소한 대화조차 안 된다. 이번에 작업하는 내 책에 들어가는 내용 중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는데, 이를 테면 이런 거다. 어머니께서 들어오셔서 나한테 막 화를 내신다. 어제 냉장고에 넣어놓은 가지 나물을 왜 안 먹냐고, 그래서 자기가 지금 먹고 있지 않냐고, 화를 내시는 거다. 그럼 나는 이해가 안 가지. 그래서 가지 나물을 해놓으면 오늘 먹어도 되고, 내일 먹어도 되는데, 왜 하루가 지나도록 먹지 않는다고 화내시고 그걸 왜 엄마가 먹어 치우는 거냐, 하고 물으면 상하니까 그렇지, 답하신다. 아니, 냉장고에 들어가 있는데 그게 하루 만에 왜 상해요, 그러면 덥잖아, 그러시고. 그러니까 이건 그냥 대화가 안 되는 거다. 엄마 머릿속엔 대화에 필요한 논리나 상식보단 내 아들은 내가 해주는 반찬을 잘 먹지 않는다는 믿음이나 단정이 중요했기 때문에 대화가 될 수 없는 거다.
자식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경험해봤을 만한 사연이 아닐까. (웃음) 어쨌든 가장 가까운 가족과의 소통불가를 민감하게 느끼는 만큼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선 더욱 민감해질 수도 있겠다.
너무 많지. 오늘 이 인터뷰도 ‘내 앞에 앉은 기자가 내 이야길 충분히 이해했을 거다. 그리고 녹음까지 돼 있었고 분위기도 좋았으니까 내가 이야기한 내용 그대로 나오겠지.’ 이렇게 생각했더라도 나중에 기사를 보면 ‘이거 내가 말한 의미랑 다른데’ 라고 실망하게 된다. 토시 하나 틀려지면 의미가 완전 달라지잖아. 예전에 인터뷰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 ‘5집 앨범에 엄청나게 많은 제작비가 들어갔다’고 답변했는데 나중에 기사를 보니까 ‘제작비도 엄청 들어갔을 거에요.’ 이렇게 적혀있더라. 나는 그런 말한 적 없거든. 나는 전체적인 디렉터이기 때문에 우리 앨범 제작비가 얼마나 들어가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다.
예전에 일기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일기의 사소한 문장조차도 여러 번 반복해서 보게 된다고 했더라.
내가 일기를 9년 정도 쓰고 있는데 옛날엔 안 그랬다. 아마 작년부터 그랬을 거다. 솔직히 자기가 써놓을 걸 남 보는 자리에서 고치면 초라하잖아. 자기가 써놓고 구리게 느끼니까 지웠나 보다 이럴 수도 있고. 5집을 작업하면서 느낀 바가 있다. 내가 원하는 만큼 후속 작업을 해보는 게 내 평생 소원이었는데 그걸 지난 4집까지는 못했지만 5집 때 그게 정말 최대치까지 허용되는 여건을 얻었다. 내가 100만 번 고치고 싶었다면 99만 번까진 됐다는 말이다. 그랬더니 내가 원하는 퀄리티에 근접한 결과가 나오더란 거다. 거기서 내 강점이 수정에 있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천만 번을 고치더라도 고칠 수 있으면 고치자고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쪽팔리다는 생각을 버리고 열 번, 스무 번도 고친다. 그러니까 보는 사람들도 언제부턴가 얘는 원래 고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게 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렇게 서로간에 이해되는 부분이 생기니까 편하더라.
9년 간 웹상에 일기를 써온 것도 어쩌면 아까 말한 것과 비슷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의 일환이라 여겨서 가능했던 게 아니었을까. 동시에 그 일기가 개인의 일상사를 기록하는 사적인 영역이면서도 공적인 게시판 역할을 하는 것 같더라. 일기를 오픈된 공간에 전시하기로 마음 먹게 된 계기도 궁금하다.
아마 뮤지션이 그런 공간에 일기를 쓴 것 자체는 내가 거의 최초일 거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굉장한 전략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뭐든 단순한 계기로 시작한다. 2001년도에 홈페이지를 개설할 때가 2집을 내고 망해서 3년 동안 음악을 못하고 다시 출발해야 할 시점이었다. 내 생각엔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때이기도 했고. 왜냐면 망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우리를 표현할 수 있는 길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는데 일기 밖에 없더라. 예전에 PC통신 시절부터 글 쓰는 걸 되게 좋아했다. 그 때 썼던 글에 내 사변적인 이야기도 많았고, 그 자체가 나에게 좋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시판처럼 보이기도 하는 건 거의 최근에 와서 이뤄진 일이다. 어떻게 보면 그냥 일기라기 보단 더 솔직한 내면의 글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자주 묻는다. 어떻게 그런 밑바닥에 있는 속마음까지 다 쓸 수 있냐고, 괜찮냐고. 나는 진짜 괜찮다. 완전히 속까지 끄집어내서 보여주는 게 내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작년부터 형식적인 부분에서 자유로워졌다. 예를 들어서 일기인데도 일기처럼 쓰는 게 아니라 서간문처럼, 누구한테 보내는 편지처럼 쓸 때도 있고, 아니면 말한 대로 사람들 보라고 게시판처럼 쓰는 글도 있고, 아니면 누구 한 사람만 보라는 식으로 쓸 때도 있고.
9년 동안 그 포맷을 유지하는 게 마냥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
한때는 일기란 것에 대해서 고민도 많았다. 아무래도 남이 보는 일기이기 때문에 정말 쓰기 싫을 때도 많았지. 이게 정말 내 솔직한 글인지, 쓰기 싫은데 쓰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되는 순간도 있었다. 일기에 대한 피드백도 워낙 광범위하다 보니까 이런저런 갈등들이 생기기도 했고. 다만 지금에 와서는 그런 부담이나 갈등들이 사라지고 편해졌다. 그래서 정말 100%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쓴다. 반말로 썼다가, 존대로 썼다가, 욕을 썼다가, 그냥 내 맘대로지. 만약 지금 와서 내 일기를 읽으면서 이건 다른 누군가에게 남 보라고 의식적으로 쓴 거 같다? 그것조차도 제 솔직한 개인적인 심경, 의도가 있다 해도 의도조차도 나의 자연스런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지.
타인의 반응을 의식했던 시점이 있었나 보다.
의식할 수 밖에 없지. 사람이라면 당연한 거 아닌가.
어쩌면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과정이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내가 가진 무기가 솔직함 밖에 없기 때문에. (웃음)
그런 의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라도 있었나?
9년간 갈등했는데 해방되지 않으면 안될 거 같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오랜 시간 고민하게 되면 받아들이게 되는 때가 있지 않나. 그야말로 정말 그렇게 받아들이게 됐다. 최근에 와서는 거의 의식하지 않게 됐지만 남들이 보는 거니까 때론 의식하게 되도 어쩔 수 없고, 그런 내 모습이 자연스러운 거라고 긍정하게 됐다. 그리고 옛날에는 일기가 재미가 없어졌네, 뭐가 어쩌네, 그런 피드백이 오면 재미있게 써야 되나, 고민스럽기도 했다. (웃음) 지금은 그런 건 없다. 그냥 잘못된 건 지우면 되니까. (웃음)
사실 일기를 쓴다는 것 자체가 간단한 일 같지만 그것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그것도 무시할 수 없는 훈련이 된다.
훈련? 무엇에 대한 훈련?
글쓰기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일기와 고등학교 시절 일기가 다르듯 글을 쓰다 보면 점차 문법을 신경 쓰게 되고, 형식에 공을 들이게 된다. 일기를 써오면서 글쓰기 자체에 대한 욕심이 발전하진 않던가?
나는 반반인 거 같다. 일기를 쓴다는 게 글쓰기라는 면에서 훈련이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일기 안에 다른 글을 쓸 때 말이다. 일기는 아무래도 일기이기 때문에 패턴화되고 고착화되는 면이 있다. 내 일기엔 특정한 분량이 있다. 한 이 정도 스크롤이면 끝난다고 할만한 분량이 항상 정해져 있다. 만약 그런 내가 장편소설 분량의 글을 써야 된다고 하면 망하는 거다. 9년 동안 이만큼 밖에 안 써봤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다른 영역의 글을 쓸 땐 굉장한 방해요소가 되기도 한다.
가을에 출판될 책을 작업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 책인가?
그냥 에세이다. 산문집이라 하기도 하는 수필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글쓴이가 살아온 이야기나 신변 잡기, 결국 자기 생각을 쓰는 거잖아. 나도 똑같다.
얼마 전, ‘델리스파이스’의 김민규 씨도 여행기를 냈다. 이상은 씨도 여행기 책을 낸 적이 있고, 근래에 주변의 뮤지션들의 출판사례가 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고무되는 느낌은 없나?
아니, 나는 오히려 그럴 수록 쓰기 싫어졌다. 나는 남들이 하는 건 무조건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거든. 요즘에 왜 그렇게 책들을 많이 내나 싶어서 나는 내기 싫어지더라. 그런데 내가 책을 내게 된 건 ‘페이퍼’의 황경신 편집장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 5집을 내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출판 제의를 많이 받았다. 7군데 이상에서 제의를 했다. 돈을 대줄 테니까 런던에 다녀와서 ‘언니네 이발관 런던 정복기’ 이런 걸 원하는 대로 써봐라, 별별 제의가 많았다. 그걸 다 고사했다. 그런데 막판에 황경신 편집장이 와서 얘기하는데 그 분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 출판 제의를 비롯해서 트레일러 제작 의뢰도 그렇고,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제의를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나.
내 음악하는 동료들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부탁들은 음악적인 분야로 한정된다. 물론 나한테도 피처링 좀 해달라, 가사를 써달라, 이런 부탁도 들어오지만 말한 것처럼 책을 내자, 영화를 만들자, 방송을 찍어보자, 이런 식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제의가 많이 들어온다. 사실 이게 흔한 케이스는 아니지. 왜 그럴까, 나도 생각해봤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내 주변의 가까운 분들도 많이 얘기하는데 그 사람들 말로는 내 음악도 음악이지만 나라는 사람 자체가 호기심을 주는 경향이 있단다. 그래서 그런 일들이 자꾸 나에게 생기는 게 아닌가 싶다더라. 최근에도 출판 제의를 받았었는데 1년 동안 세계일주를 다녀와서 책을 써보란다. 나는 태어나서 일에 관련되지 않은 개인적인 여행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왜 이런 제안을 나한테 하냐고 물어보면 의례적인 답변만 온다. 이석원이라는 사람에 주목했다, 어쩌고 저쩌고. 어쩌면 이석원이란 사람에 주목했다는 표현에서 내 주변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대목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음악을 하는 자세도 음악을 음악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삶으로서의 음악, 사람으로서의 음악에 당위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결국 내 음악이 사람들에게 들려질 때 음악으로 가기보단 사람으로서 전달되는 측면이 있는 거 같다. 결국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책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한다는 게 달가울 것 같진 않다. 어떤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는 셈이니까.
그건 좋던데. (웃음) 난 원래 집 떠나면 못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은 여행을 너무 가고 싶다. 지금 나이가 마흔 가까이 됐는데 작년부터 사는 것에 대한 욕구가 너무 강해졌다. 그래서 결국 책도 하게 됐고. 나이 먹으면 사람이 그러잖아. 갑자기 안 하던 걸 한다고, 나도 그런 것 같다. 죽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봐야겠더라. 그래서 여행에 대한 욕구가 너무 강해졌다. 작년 연말에 콘서트 끝나면 가야지, 그랬다가 올해 5월까지 콘서트하는 바람에 못 가고, 이번 여름엔 책 써야 되니까 못 가고, 가을을 넘기면 이제 가야겠다고 지금 생각하지만 또 일이 생겨서 가지 못할 수도 있겠지. 어차피 나란 사람은 책을 내기 위해 가게 됐건, 내 자의대로 가게 됐건 마찬가지다. 내가 일기에서 밑바닥까지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듯이 여행을 갔다 와서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여행기를 쓰기 보단 어차피 나를 위한 사변적인 여행기를 쓸 거다. 책 내줄 테니까 돈 받고 여행가라, 해서 다녀왔다 해도 다는 그에 대해 완전히 다 쌩까고, 내 의도에만 자유롭게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 수많은 사람들이 본다는 전제로부터 자유롭게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인 거다. 그러니까 일단 보내주면 나야 좋지. (웃음) 핑계 삼아 갈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고. 그런데 당장 오케이하진 않았다.
지금 와서 글이 큰 의미를 준다는 말처럼 뭔가 지금에 와서 새롭게 흥미를 끄는 요소들이 생기나 보다.
15년 동안 음악을 하면서 여기까지 정말 힘들게 온 대신 글을 통해 구원받았다. 음악은 아무리 노력하고 공부해도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5집도 내가 15년 동안 쌓아왔던 경험과 지식, 노력을 한계치까지 꺼내서 죄다 쏟아 부었는데 결국 100을 채우지 못했다. 결국 그게 고통이 되고 아쉬움이 된다. 그런데 이 글쓰기라는 건 단 한 줄로도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글쓰기가 쉽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표현에 대해 내가 만족스럽다는 건 내 마음이 지금 있는 그대로 드러났다고 느낄 때다. 나에겐 그런 게 너무 좋다. 음악을 하는 것과는 별개의 경험을 주더라.
5집은 개인적인 앨범이라고 말해왔다. 그 이전까지의 앨범이라고 해서 개인적인 범위와 무관한 작품들이 아니었을 텐데 특별히 5집을 개인적인 앨범이라고 밝힌 까닭이 궁금하다.
기본적으로 이발관을 알고 나를 아는 분들은 기본적으로 내가 하는 음악이나 글이 모두 나라는 사람에게서 비롯됐다는 걸 알 거다. 다만 5집이 개인적이라는 건 다른 의미다. 지난 4집 같은 경우엔 이야기가 없다. 굉장히 통속적인 가사이기도 하고. ‘그대 지금 어디 있나요. 나 알고 싶어요.’ 이런 건 이야기가 아니다. 일반적인 감정을 가사를 담은 거지. 이번 5집에서는 그게 아니라 정말 깊은 내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대단히 개인적이라 말할 수 밖에 없는 거다.
5집의 가사가 개인적이란 말을 자전적인 일기라 이해해선 안되겠다.
일기라, 내 가사가 앞으로 어떨지 몰라도 지금까지는 거의 그랬던 거 같다. 단지 5집에서는 이발관이 가지고 있던 것들이 극대화된 거 같다. 내가 어떤 새로운 걸 했다기 보단 계속 내 개인적인 것들을 쓰다가 5집을 통해서 개인적인 표현이 폭발해버렸다고 할까? 언제 내가 개인적인 걸 쓰지 않았던 건 아니니까.
5집은 레코딩 과정에서 수 차례 수정을 거쳤고, 그만큼 예정 발매일도 늦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견을 자주 피력했다. 하지만 5집은 명반이라는 평까지 얻었고 신에서도 상당히 호의적인 반응이 뒤따랐다. 자신이 느끼는 불만족에 비해 외부의 반응은 극단적으로 대치되는 느낌이다. 아이러니하지 않던가?
아무래도 그렇지. 나는 4집 앨범이 나왔을 때 사운드적으로 완전히 정점을 쳤기 때문에 다 끝날 줄 알았다. 그리고 5집을 내면서 이 앨범을 내면 우린 망한다, 까진 아니었지만 어디로 숨고 싶었다. 앨범에 대한 스스로의 자신감과 반응이 반대로 가니까 아이러니를 많이 느끼지.
사실 4집까지는 자신의 앨범을 피력할 때 상당한 자신감을 어필하곤 했다.
그건 사실 창작하는 사람이 갖추고 있어야 할 덕목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본인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어떻게 듣는 사람을 만족시키겠나. 그런 모습이 4집까진 있었다. 그랬는데 5집부터는 많이 사라졌지.
‘가장 보통의 존재’라는 타이틀부터 심경의 변화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이야기 컨셉의 앨범이라고 했는데 어쩌면 서사적인 형태에 기획적으로 접근한 앨범이라 봐도 될 것 같다. 그런 형태를 기획하게 된 이유가 뭔가?
5집을 만들면서부터 창작자로서의 나에게 닥친 가장 큰 변화인데, 그 모든 게 이야기라는 세 글자로 귀결된다.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돼야 할까, 창작자로서 고민하다 얻은 건, 나는 이야기꾼이 돼야겠다, 이야기를 만들고 들려주는 사람이 돼야겠다, 이런 결론이었다. 그래서 5집도 그렇게 만든 거다. 굉장히 개인적인 내 이야기를 갖고 픽션을 만들어낸 거거든. 다른 무엇을 해도 결국 다른 무엇을 하더라도 나한테는 이야기 자체가 굉장히 중요해진 거다. 아마 앞으로 당분간 그럴 것 같다.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
음악을 시작한 경위는 사실 만들어낸 이야기처럼 드라마틱했다.
좀 만화 같지. (웃음)
가상의 밴드 이름을 내걸고 PC통신 게시판에 글을 쓰고, 이를 통해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다시 한번 그 거짓 밴드 이름을 언급했고, 결국 그 거짓 이름이 진짜 밴드의 이름이 됐다. 그 당시 밴드 이름을 내걸었을 때 진짜 밴드를 할 것이란 생각이나 했나?
전혀, 상상도 못했다. 시작하고서도 얼떨떨했다. 앨범을 낼 거란 상상도 못했고. 내 인생이 좀 만화 같다. 팔자인가 보다.
결과적으로 그게 지금의 당신을 좌우해버린 거짓말이었던 셈이다.
그게 발단이 됐지.
만약 요즘 같았다면 거짓말 했다고 인터넷에서 난리가 났을지도 모른다. (웃음) 그 당시를 종종 되새겨볼 때가 있나?
15년 전인데,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고 여기까지 워낙 정신 없이 왔으니까. 확실한 건 내가 아까 말한 음악적인 음악가들과 나는 유리되어 있다고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이런 까닭이다. 음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음악을 좋아서 한다. 음악을 하지 않으면 죽을 거 같이 음악이 너무 좋아서 음악을 시작한다. 너무 좋아서 기타를 배우고, 건반도 배우고, 곡도 만들어보고, 그런데 그 곡을 사람들이 좋아해주다 보니까 프로가 되고, 이런 거잖아. 그런데 내 시작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음악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음악이 고통이었다. 음악을 하다 보니까 음악을 기술적으로 들어야 되더라. 난 음악을 어렸을 때부터 너무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그걸 직업으로 삼고 나니까 그 즐거움이 사라지더란 말이다. 그래서 음악을 처음 시작했을 때, 이걸 내가 왜 했나 싶을 만큼 너무 괴로웠다. 이런 점에서 나는 항상 스테레오 타입화된 음악가들의 모습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거다. 내가 음악을 시작할 때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지만 확실한 건 내가 음악을, 밴드를 하고 싶어서 미치겠다 싶어서 시작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다. 항상 그런 괴리감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음악 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벽을 느낀다.
정말 음악을 위해서 자신을 매진하는 태도에 어울리긴 힘들다는 말 같다.
그게 그 사람들이 음악을 대하는 대다수의 방식이니까 내가 특이하다고 봐야겠지.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누구나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한다. “그럼 왜 하냐?” (웃음) 그렇게 고통스럽고 싫은데 왜 하냐고. 그럼 정말 할말이 없지. 이번에 트레일러할 때도 사람들이 계속 즐기면서 하라는데 난 작업할 때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정말 내가 즐겁다고 생각하는 작업은 글쓰기 밖에 없다. 정말 특이하지.
어째서 글쓰기만큼은 즐길 수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스스로도 뭔가 즐길 수 있는 작업이 있다는 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을까.
정말 놀라운 경험이지. 완전 쏘 해피다. 아무리 힘들어도 행복할 수 있는 작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그래서 음악을 생각하면 너무 우울해진다. 이제 6집에 들어가야 되는데 두려운 거다. 만약 더 이상 곡이 안 떠오르면 어떻게 하지? 사실 이런 두려움은 2집 때부터 갖고 있었다. 나는 15년 동안 내가 음악하는 사람이란 자각을 거의 못하면서 음악을 했기 때문에 항상 음악한다는 사람들과 있으면 괴리를 느꼈다. 어느 순간, 내일부터, 어쩌면 지금부터 더 이상 악상이 떠오르지 않을 것만 같은 거다. 그리고 내가 만든 앨범들을 봐도 내가 만든 것 같지 않다.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다. 그래서 6집은 잘 만들고 싶지. 정말 끝내주게 만들고 싶다.
언니네 이발관이란 밴드의 역사가 시작하는 출발점이 된 첫 앨범은 국내 앨범 역사에서 명반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그 정도 평가를 받을 거란 생각을 했나? 의외의 사실이 아니었을까.
너무 명반, 명반하니까 민망한데. (웃음) 1집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만들었다. 하지만 뜻밖은 아니었다. 나는 1집과 2집이 나왔을 땐 난리가 날 줄 알았다. 막 100만장 팔리고 뒤집어질 줄 알았지. 그런데 너무 안 팔려서 완전히 실망했다. 오히려 5집은 한 삼천 명이나 살까 생각했는데 3만 명이 넘게 사버렸으니까 오히려 지금 더 희한하지. 왜냐면 데뷔앨범을 만들거나 2집 정도 된 아티스트들은 자신감이 이빠이 올라있는 상태다. 누구나 자기 앨범에 다 죽을 거라 생각한다. 나도 그와 다를 바 없었던 거지.
오랫동안 악기를 다뤘던 사람도 아니고, 밴드조차 급조한 당신이,
(말을 끊고) 아, 질문이 뭔지 알 것 같다. 그런데도 왜 자신감이 있었냐 하면 나는 그때 우리나라에 진짜 프로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거든. 카피밴드도 그렇고, 프로라 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내가 하면 저렇진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내 밴드 경험이 일천하고 경험적인 소스가 많지 않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탱하게 해줄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자기 중심이 확고하다는 것이었고 좋은 음악이 무엇이다라는 확신이 내게 있었다. 어렸을 대부터 음악을 들어왔기 때문에 이미 누구보다 프로였고, 그걸 그대로 보여주면 난리가 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쟤네들은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에만 집착하는 애들이야, 이런 판단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나로선 걔네들을 굉장히 무시하면서 시작하기도 했지.
언니네 이발관의 데뷔앨범이 나온 당시는 홍대 인디밴드라는 개념이 정립되던 시점이었다. ‘델리 스파이스’도 1집을 냈고, ‘크라잉 넛’과 ‘코코어’ 같은 밴드도 막 데뷔했던 시점이었다. 당시는 홍대 인디밴드가 센세이션을 일으키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니네 이발관도 그 한 축을 담당했다. 당시에 그런 분위기가 이뤄진 배경이나 여건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나?
나는 그런 여건이 조성됐다기 보단 어떤 자연스러운 흐름이 폭발했던 거 같다. 그 계기는 ‘너바나(Nirvana)의 ‘커트 코베인’이 사망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커트 코베인이 죽으면서 사람들에게 오함마로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충격이 전해졌고, 자연스럽게 그런 충격이 응집된 게 아닐까. 여건이 충족됐다기 보단 어떤 흐름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서 우리가 여건을 만들어갔다고 할까?
커트 코베인의 죽음을 듣고 나니까 문득 마이클 잭슨의 사망을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하다.
마이클 잭슨이 죽은 건 슬프고 안타깝지. 사실 우리 음악에는, 특히 5집엔 흑인음악적인 부분이 많이 가미돼있다. 마이클 잭슨이 엔터테이너네, 이런 애들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음악 자체가 굉장한 음악 아닌가. 지금까지 음악적인 영향을 받아왔고, 앞으로도 받지 않을 거란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겠지.
자살이란 점에서는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이 문득 떠오른다. 일기에 그에 관한 글을 남기기도 했던데 뒤늦게 그 죽음으로부터 어떤 단상을 얻었나?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많은 각성을 얻었다. 조금이라도 세상에 기여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돼야겠다는 결심을 많이 했다. 그분의 죽음을 접하면서.
특별히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줬다고 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나?
단순하게 영향을 잘 받는 타입이 있고, 안 받는 타입이 있지 않나. 나는 후자다. 내 주변에 어떤 형 때문에 자기 인생이 바뀌었네, 누군가가 하는 걸 쫓아서 했네, 이런 애들이 많은데 나는 그런 게 거의 없는 사람이다. 태어나서 생전에 누구 말 듣고 내 인생이 바뀌었다 할만한 적은 없었다.
커트 코베인은 아니었을까? (웃음)
내가 봤을 때 커트 코베인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건 누구나 받은 정도의 영향일 거다. 그래서 커트 코베인을 특별히 꼽을 수는 없지. 특정한 인물은 정말 없는 거 같다. 어떤 자잘한 의미에서 나에게 이런 저런 긍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있는지 몰라도 결정적으로 큰 의미를 남긴 사람은 없다.
올해 했던 인터뷰에서 6집이 마지막 앨범이 될 거라고 공언했더라. 정말 다음 앨범이 마지막이 될 거란 확신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그 의중이 궁금하다.
그건 내 두려움이자 막연한 예상 같다.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가 앨범 내는 추세를 봤을 때, 내가 마흔한 살이나 두 살쯤 6집이 나온다 하면 7집은 40대 중반에 나온다는 얘기거든. 그랬을 때 나처럼 음악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내가 생각하는 선에 도달하지 않은 앨범을 만들어낸다는 걸 견딜 수 없을 것이고 아마 그렇다면 더 이상 음반을 내지 않을 거다. 생물학적으로 40대 넘어서 자기 페이스를 제대로 내는 작곡가가 얼마나 있냐고 봤을 때 가능성은 더 희박해진다. 그러니까 아마 6집이 마지막이 되지 않겠나 싶다. 사실 지금 생각으론 6집이 나올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건가?
물론 지금 우리 언니네 이발관에서 이능룡이란 친구의 존재가 많이 가려져 있다. 사실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을 걔가 다 만든다고 보면 된다. 어떤 물리적인 영역의 음악, 소리는 그 친구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이제 내가 외면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다 보니까 사람들에게 많이 가려져 있지.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은 이능룡에서 시작해서 이석원이 마무리 짓는다는 공식으로 보면 된다. 그래서 이런 두려움이 생기지. 능룡이가 끝내주는 걸 만들어도 나머지 50을 내가 만들어야 되는데 내가 제대로 못 만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되거든. 능룡이는 이제 한참 정점에 있을 나이인데 내가 그 선을 맞출 수 있을까 두려움이 있다. 음악은 하면 할수록 되게 힘든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로서는 어떤 결의를 다진다고 할까. 그렇기 때문에 내 평생 마지막 앨범이라고 생각하고 내 모든 걸 쏟아 붓게 될 거다. 그런 선언적인 의미에 가깝다. 내 평생 해왔던 일을 이 이후로 죽을 때까지 영원히 못 본다는 생각을 갖고 6집 앨범을 만든다는 거다. 실제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고.
멤버와도 그런 의견을 공유하나?
늘 한다.
주변의 지인들은 그런 발언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던가.
그 기사가 나가고 나서 너무 많은 질문을 받았다. (웃음) ‘정말 마지막이냐? 왜 그러냐?’ 물어보는 거지. 내 대답은 이렇다. 막말로 6집이 마지막이라고 했다가 7집을 낸다 해서 사람들이 욕할 건 아니지 않나. ‘6집이 마지막이다’라는 것에 대해 의식하는 사람들은 이발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만큼 기다리는 사람들일 거란 말이다. 그랬는데 내가 6집이 마지막이라고 했다가 7집을 내면 ‘어, 이 새끼, 그렇게 말해놓고 7집을 왜 내?’ 이러면서 싫어할 것도 아니고. (웃음) 만약 7집이 좋게 나오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겠지. 다만 나는 일단 이 앨범 이상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지금으로선 없다.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주면 좋을 거 같다. 나도 7집까지 내고 싶다. 정말 늙어서까지도 내가 가진 베스트로 활동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그런데 여러 가지 면에서 그게 쉽지 않을 걸 아니까 두려움을 표현한 거지.
사실 모든 창작자가 매번 베스트라고 불릴만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건 아니지 않나. 사실 5집은 끝까지 마음을 놓지 못했고 지금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말을 종종 해왔는데 그 이전까지의 앨범들은 이제 와서 생각하면 어떤가?
아까도 말했지만 수정을 해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게 항상 제작 기간이나 돈 문제 때문에 스톱이 된다. 2, 3, 4집이 다 그랬지. 그게 내겐 한이 됐다. 나는 수정할 게 이만큼 남았는데 회사에서 중간에 앨범을 강제로 내버린단 말이다. 3집 때도 마스터링 끝내고 나서 내가, “마스터링 더하자. 이 앨범 나가면 우린 망한다.” 했더니 제작자가 정신병원에 신고한다 그래서 그냥 앨범이 나가버렸다. 나는 정말 3집이 나가면 우리는 망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5집 때는 회사와 담판을 지었지. 아무리 시간이 많이 들고, 돈이 많이 들더라도, 내가 하자고 하는 데까지 해주소.
3집은 지금까지의 앨범 중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다.
당시로선 많이 팔렸지. 하지만 정말 나는 그 앨범을 지금도 못 듣는다.
그 앨범도 기회가 되면 다시 수정하고 싶나?
아니, 그러기엔 너무나 과거가 돼서. (웃음)
예전에 운영했던 ‘살롱 드 언니네이발관’에 가면 시네마테크 전단지가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있어 보여서 가져다 놨다. (웃음)
그런데 왜 시네마테크 전단지였나?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영화 쪽 사람들을 많이 안다. 한번 살롱에 아는 분들이 시네마테크 쪽 사람들을 모시고 왔었다. 그래서 그 분들과 이야기하고 대답하다가 자기네 ‘시네마테크 친구들’이 되면 뭐가 어쩌고 저쩌고 하길래 그럼 갖다 놓으시라고 했다. 나도 그런 문화적인 표현이나 활동이 뽀다구나는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지원이라면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고.
살롱 드 언니네이발관의 내부 인테리어에 관여했다고 하던데 직접 그 인테리어를 했다는 말인가?
인테리어 회사에 맡겼지. 다만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인테리어 회사에 디자인을 일임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거다. 상당한 디렉션이 들어가는거다.
그 당시 일기에서 재미있는 글을 봤던 기억도 난다. 종업원을 뽑아서 ‘사장님’이란 말을 듣는 게 처음으로 애인으로부터 ‘사랑해’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충격적인 일이었다라는. (웃음)
소름이 쫙 끼치더라. (웃음)
가게를 영업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는 뭐였나?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음악을 하는 자체에서 뮤지션이란 자각이나 미련 자체가 아예 없었다. 당시가 음악을 한지 10년 이상 된 2006년이었는데 음악하는 게 너무 힘들고 지쳐서 가게를 차린 거다. 장사해야겠다. 돈이나 벌자.
그런데 이제 살롱 드 언니네이발관 영업을 그만하게 된 이유가 뭔가?
나로선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작업이란 것에 미련이 없으니까 가게를 차렸던 것인데 이제 목숨 걸고 작업해야 되는 상황이니까 작업에 걸림돌이 되는 건 가차없어지는 거다. 아무리 돈이 많이 들더라도 나는 무조건 그걸 날렸어야 됐다. 나는 그 가게 때문에 작업이 방해 받는 걸 (손가락을 작게 벌리면서) 요만큼도 용납할 수 없다. 그 가게에 애정을 갖게 된 이발관 팬들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 소중한 공간이 됐을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이 세상에 작업보다 더 중요한 건 없기 때문에 그게 작업에 방해된다고 생각되는 순간 무조건 날렸다.
가게 운영까지 포기하면서 음악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바로 다음 앨범을 마지막이 될 거라고 말하는 뮤지션의 심정은 대체 뭔가?
다음 앨범을 목숨 걸고 만들지만 그 앨범이 마지막이니까 그 다음의 노후대책을 위해서 지금 일단 장사를 계속해야 한다, 그럴 순 없지 않나. 그렇게 미래를 보면서 지금 작업에 올인할 순 없을 거 같다. 내일을 생각하면서 오늘에 올인할 수 없다. 무조건 사생결단하고 지금 이 작업을 어떻게든 잘 해내야지.
언니네이발관이란 밴드를 하게 된 것이나 집필 작업, 트레일러 제작까지, 어쩌면 이석원이란 사람의 오늘을 이루고 있는 모든 서사는 우연에서 시작해서 필연으로 굳어진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그만큼 계획적인 인생에 대해 염두에 둘 것 같진 않다.
나는 너무 계획적인 사람이다. 매일 계획을 짠다. 다만 그 계획이 맨날 바뀐다. 그래서 지금의 계획을 짜는 거다. 오늘의 계획, 한 달의 계획, 일 년의 계획을 짜지.
긴 미래를 염두에 둔 계획을 세운 적은 없나?
사실 몇 십 년 뒤의 일까지 계획을 짠다고 되는 일은 아니니까.
지난 해,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음반상을 비롯해서 3관왕을 수상했다. 작년에 한국대중음악상이 무산될 뻔한 위기도 있었는데 겨우내 시상식이 거행됐다. 어쩌면 그 사태가 한국음악신의 현실을 대변하는 사례가 아닐까. 인디밴드라는 정체성 안에서 이런 신의 어려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인데,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언니네 이발관은 1집부터 지금까지 그 어떤밴드보다도 유복한 환경에서 음악을 해왔다. 우리는 불평을 할 자격도 실감도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씬의 어려움 같은 질문을 받을때면 사실 난감하다. 물론 언제나 일이천명을 놓고 콘서트를 하다가 괜객이 몇십명 들어차 있는 클럽으로 동료의 공연을 구경갈때면 아찔한 기분이 들때가 있다.
사실 인디밴드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열악한 느낌이 일반적으로 적용될 것 같은 관성이 생긴다. 언니네 이발관도 인디밴드의 범주로서 이해되는 만큼 그런 선입견을 적용해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거다.
대부분 그렇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 거다. 공연해도 페이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렇다더라. 우리도 사실 그렇게 너무도 힘든 걸 아니까 주변에서 누가 음악한다고 못하게 한다. 나는 무대에서 감사하다는 말을 누가 말릴 정도로 굉장히 많이 하는 편인데, 왜 그러냐 하면 진짜 너무 감사하거든. 음악한지 15년이 됐고, 대한민국에 밴드가 수천 팀이 되는데 왜 이 많은 돈을 주면서 우리를 아직도 헤드라이너로 세워주는지, 그게 너무 신기하고 고맙다. 그런 처지에 있는 우리가 대한민국 음악에 어떤 문제가 있고, 너무 힘들고, 이럴 수가 없는 거잖아.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건 그거지.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999개의 팀은 너무나 고생할 거란 말이다. 그러니까 음악한다 하면 못하게 말리면서도 우리도 피해자란 식으로 대한민국 음악계의 문제가 뭐니 이런 생각을 해볼 일이 별로 없었다는 거다.
신의 열악함을 경험적으로 느낀 바가 없으니까 그걸 대변할 입장이 안 된다는 말이겠지.
그렇지. 지금 전속 엔지니어를 데리고 다니는 밴드는 메이저 통틀어서도 몇 팀 안 된다. 외국 페스티벌 할 때도 그렇고, 펜타포트 2006년 때도 그랬다. 국내밴드들은 사운드 개판이거든. 그런데 외국밴드들이 나오면 좋다. 왜냐하면 전속엔지니어들이 와서 전날부터 리허설하니까. 그때 내가 그걸 보면서 생각한 게 ‘씨발, 아니, 우리는 왜 전속 엔지니어를 쓰지 못할까.’ 물론 여러 이유가 있지. 돈이 엄청나게 들거든. 심지어 이번 지산 락 밸리 때는 내 전용 모니터 스피커까지 가져갔다. 돈이 많이 들지만 그만한 여력이 되면 돈을 아끼지 말고 때려 붓자는 거다. 그렇게 해서 우리 수입이 줄더라도 결국 최고의 퀄리티를 지닌 사운드를 내는 게 중요하니까. 물론 사람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간 공연을 즐기고 있는지 모르겠지.
일반적이지 않았던 시작만큼이나 그 이후의 행보도 일반적인 케이스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전형적인 인디밴드의 바로미터나 샘플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이렇다고 해서 대체로 그럴 것이다라는 것도 말이 안되고.
사실 첫 앨범이 백만 장 넘게 팔릴 거란 생각을 했으니 애초에 언니네이발관을 인디가 아닌 메인스트림으로 생각하고 신에 접근했나 보다.
정확하다. 인디에 관심 없었다. 그냥 우린 무조건 상식적으로 판 많이 팔고, 예쁜 여자 사귀고, 부모님한테 인정받고, 이거였지. 근데 갑자기 인디밴드라면서 몇 만장 팔리고 땡이니까 완전 혼란스러웠다. 이게 뭐야 싶었지. 그러다 일평생 인디가 돼버렸다. (웃음)
결국 의도와 다른 삶을 살아왔던 것처럼 그 안에서도 의도와 다른 결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경험을 겪다 보면 차라리 무언가 기대를 하거나 특별한 예측을 한다는 것에 대한 무력감을 느낄 때가 생기지 않나?
그건 아니지. 왜냐면 나는 어차피 우연히 좋은 일이 많이 생긴 놈이니까 그냥 가만히 있자, 이럴 수는 없잖아. 남들은 할 수 없는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는 팔자를 갖고 있다 해도 그게 나한테 왔을 때엔 분명한 계획이 필요하다. 책도 그렇다. 내가 책을 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런데 막상 내게 된다고 했을 때는 계획적으로 간다. 트레일러 작업도 마찬가지고. 예를 들어서 지산 락 밸리에서의 그 하루를 준비할 때도 얼마나 계획적이었냐 하면 집에서 눈뜨면서부터 공연장으로 출발하기 전까지의 시간들을 분 단위, 시간 단위로 일일이 다 적고 그대로 체크해 나간다. 몇 시에 운동하고, 몇 시에 씻고, 옷은 뭐를 입고 나가고, 준비해야 할 건 뭐고, 피크는 몇 개를 챙겨서 어느 가방에 넣고, 이런 것 하나하나까지 절대 빠뜨리는 것 없게 완벽히 준비해서 회사로 가고, 회사 차를 타고 공연장까지 가서 리허설은 몇 시니까 그때까진 무엇을 하고 몇 분을 쉬고 몇 시에 밥을 먹을지, 이런 것까지 명확하게 있어야 한다. 그런 계획이 회사랑 공유돼서 이석원 씨는 몇 시에 밥을 먹어야 된다, 물은 몇 분마다 갈아줘야 된다, 이렇게 매뉴얼화되면 기계처럼 움직인다. 그럴 정도로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간다.
말 그대로 완벽주의자다.
내 입으로 말하긴 남세스럽지만 좀 심하게 그렇다.
그게 때때로 스트레스가 되진 않나?
지금은 괜찮다. 완벽하게 가니까. 전속 엔지니어가 없을 때는 공연할 때마다 지옥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완벽하게 준비해도 개판인 엔지니어를 만나면 우리 소리가 나올 수 없거든. 예를 들어서 투 기타로 가는데 내 기타 소리밖에 안 나온다면 그 노래는 병신 되는 거다. 사실 그건 우리랑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보는 사람들은 어떤가. 이발관 역시 병신이구나, 이거지. (웃음) 라이브라는 게 그렇다. 그래서 음악하는 게 내게 고통이었다. 내 의지와 능력으로 완벽하게 제어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엔지니어를 둘이나 데리고 다닌다. 모니터 엔지니어를 전속 엔지니어로 박아 놓고, 완벽한 내 소리를 얻기 위해 무대에 내 전용 장비로 싹 갈아버린다. 그리고 바깥 하우스에선 우리 엔지니어가 가서 다 컨트롤한다. 여기서 밸런스 이렇게 잡으면 안 된다, 어떻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렇게 다 완벽하게 가면 하는 나도 완벽할 수 밖에 없고, 듣는 사람들도 좋아할 수 밖에 없다.
결국 그만큼 완벽한 환경이 꾸려질 때 그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
그런데도 음악이 힘든 건 완벽할 수 없는 작업이니까. 특히 앨범을 만드는 작업은.
사실 5집이 3만 장이나 팔렸다는 사실은 최근 국내 음반소비 추세로 봤을 땐 상당한 성과다.
많이 팔렸다고 봐야지.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음반 판매의 절대량이 급감했기 때문에 더더욱 눈에 띄는 결과가 아닐까 싶다.
거의 망했다고 봐야지.
결과적으로 뮤지션의 음악을 소비하는 절대량이 그만큼 낮아졌다는 건 당사자로서 좋은 일은 아니지 않나. 특히나 고액의 제작비를 들여서 완벽한 음악을 추구하는 뮤지션 입장에서는 더욱 힘 빠지는 일이 아닐까.
정말 우리가 환경적으로 좋지 않으면 그런 생각을 했을 텐데 사실 우리 환경이 나쁜 게 아니니까. 앨범도 절대적 판매량은 적지만 상대적으론 많이 팔았고, 특히 공연에 사람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우린 상당히 풍족한 편이다.
하지만 좀 더 좋은 환경이라면 그만큼 보다 여유롭게 음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성격적으로 환경 탓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정말 컨텐츠가 좋으면 어떤 식으로든 대중이 소비해준다는 믿음이 있다.
언니네 이발관이란 이름으로 5장의 앨범을 냈다. 만약 다음 앨범이 본인의 말대로 언니네 이발관의 마지막 앨범이 된다는 건 더 이상 음악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봐야 하나?
더 이상 좋은 곡이 나오지 않게 되면 앨범은 못 내겠지. 하지만 공연은 할 수 있다. 다만 더 이상 노래마저 할 수 없게 될 때 공연도 못 하겠지. 내가 음악을 못하게 되는 건 그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에 지산에서 보니까 ‘페티 스미스’도 그렇고, 김창완 씨도 그 나이에 정력적인 라이브를 하시지 않나. 빌리 조엘을 봐도 그렇고. 그러니까 이런 거다. 작곡가로서의 정점은 젊은 날에 치지만 라이브는 정말 늙어서까지 할 수 있다. 그런 생명력이 있는 가수가 돼야지. 그리고 나는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을 거 같다. 우리를 좋아해주는 분들이 우리는 정말 과분할 정도로 밀어준다. 우리가 공연을 많이 하는데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올 수 없다. 그걸 보면 사람들이 언니네 이발관을 정말 많이 아껴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더 이상 좋은 앨범이 나오지 않는 것과 음악 생활이 접힌다는 건 별개의 이야기다.
혹시나 마지막 앨범이란 발언이 음악적 은퇴를 의미하는 건지 궁금했다.
그 놈의 마지막 앨범 이슈를 사람들이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더라. 그래서 확실한 결론으로 말하자면 마지막 앨범으로 만들겠습니다, 라는 각오 정도로 정리가 됐으면 좋겠다. (웃음) 사람들이 너무 민감하게 나한테 뭐라고 해서.
팬으로선 민감할 수 밖에 없는 발언이겠지. 마지막 앨범이라니.
짜증나지. 자기가 좋아하는데 그만 두겠다고 설레발이나 치고 이러니까. (웃음) 그런데 그만큼 힘들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소니 EX1, EX3로 트레일러를 제작했다. 이제 영화를 디지털로 찍게 되면서 예전보다 손쉽게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아날로그 적인 레코드 방식에서 벗어나 신디사이저나 오토튠 같은 전자기기를 동원하고 샘플링 음원만으로도 음악을 만든다. 아무래도 문화적인 형태가 달라진 시대다. 글도 펜이 아닌 컴퓨터로 자판을 쳐서 입력한다. 어쩌면 언니네 이발관도 15년 동안 많은 변화를 겪어왔지만 어쨌든 언니네 이발관은 유지됐다. 그런 일관성이 지금의 당신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로 해석되는 바가 있나?
매 순간 무대에 오를 때마다 생각한다. 그건 감사와 행운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 거 같다. 정말 신기하다. 그리고 너무 고마운 일이다. 방금 15년을 얘기했는데 정말 그 세월을 생각하게 된다. 15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내가 이 자리에 또 서있을 수 있을까. 이건 감사한 일이고 기적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무대에 올라가서 그냥 내 자신을 불태워버리는 게 내 일이다. 언제 다시 서게 될지 모르니까.
5집은 당신의 음악적 각오에 대한 전환점이 됐다. 운영하던 가게도 그만 두고 다음 앨범을 준비할 만큼 음악작업에 대한 비장함이 드러난다. 5집 앨범을 내기까지의 어려웠던 과정만큼 6집에서도 만만찮은 과정이 이어질 수 있다. 5집을 서사적 형태의 앨범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6집에 대한 막연한 기획이라도 잡히는 건 없나?
6집은 지금 전혀 제로 상태다. 아무 것도 없다.
트레일러도 만들었는데 영화 연출에 대한 관심은 없나? 설마 제의 받은 적은 없겠지?
(한참 생각하다가) 근래에 트레일러 작업하고 그런 제의가 있었다. 연출에 대한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아니고.
반쯤 농담처럼 물었는데 정말 제의가 있었다니 내가 되레 놀랐다. (웃음)
원래 내 인생이 좀 만화 같다. (웃음)
크랭크업 이후로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영화가 개봉됐는데 기다려지지 않았나?
촬영하는 동안 감독님께서 모니터를 많이 못 보게 하셨다. 그래서 나 스스로도 너무 궁금증이 커진 상태에서 영화를 봤기 때문인지 새로운 면도 보이고 저 때는 내가 저런 감정으로 연기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선하더라.
제목부터 의미에 대한 호기심을 부르는 작품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어떤 감상을 얻었는지 궁금하다.
일단 색다른 이야기라 이걸 감독님이 과연 어떻게 표현해내실지, 그리고 만약 내가 메이를 연기한다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궁금증으로 시작했다. 항상 내게 들어왔던 시나리오와 너무 다른 류의 영화였고 기존에 내가 해왔던 캐릭터와 상반된 면도 있어서 그런 호기심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주지홍 감독은 연기적인 요구가 많은 편이었나?
시나리오 상에는 디테일한 설정이 많았지만 일단 현장에 나오시면 어떤 게 편하냐고 물어보시곤 했다. 배우들에게 가장 편안한 현장에서 가장 솔직한 감정을 끌어낼 수 있다고 하셨다.
한국에 온 메이는 고모에게 자신을 왜 미국으로 보냈냐며 따진다. 단순히 메이가 미국으로 보내진 것에 대한 불만을 고모에게 토로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미국 생활에서 겪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런 억울함이 발생한 게 아닌가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선 메이의 미국 생활에 관해서 결코 묘사하지 않는다. 배우로선 조금 답답할 수도 있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시나리오 읽으면서 감독님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부분이 그 고모와의 대화였다. 일단 감독님은 메이 스스로 그게 고모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단지 고모에 대한 원망의 표출이 아니라 그 동안 쌓여왔던 아픔을 세상에 표출하는 것이라 하시더라. 그게 고모에 대한 원망으로 그려져선 안되니까 뻔한 오열 같은 신파적 표현이 동원돼서도 안됐다. 그런 감정을 잘 절제해서 보여주는 게 내 숙제였지. 그래서 이 신을 찍고 나서 다시 찍어보고 싶다고 얘길 드리니까 감독님은 이게 좋다고, 100%라고 하시는 거다. 그때 조금 아쉬웠는데 나중에 편집된 걸 보니까 감독님께서 만족하신 그 선이 맞았다는 걸 느꼈다. 메이가 미국에서 겪은 삶이나 양부모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감독님께 여쭤봤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아닐지라도 학대나 홀대를 받고 자란 아이가 아닌, 보통 가정의 평범한 유년을 보낸 아이지만 항상 버림받았다는 아픔을 지닌 채 한국에 살아있을 부모를 생각하는 아이라고 말씀해주시더라. 남들과 다른 아픔 때문에 항상 스스로가 벽을 만들고 스스로 자신을 소외시키는 감정을 보여줘야 한다고.
메이는 상당히 히스테릭한 캐릭터다. 단순히 기능적으로 캐릭터의 성격을 만들어나간다 해도 그 정서에 스스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그렇게 히스테릭한 부분도 그렇지만 메이가 항상 가지고 있는 답답함이 나를 힘들게 했다. 메이가 어린 시절부터 느꼈던 답답함을 한국에 오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막상 와보니까 어떤 해결책이나 돌파구가 없다는 답답한 느낌이 연기를 하면서 점점 더 나에게도 전이된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가끔씩은 촬영이 끝나고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워도 그 기분이 해소되지 않아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나름의 노력도 있었을 텐데.
3일 동안 세트장에서 대사가 한마디도 없어서 말 한마디 안하고 계속 답답한 기분으로 연기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 너무 답답하더라. 어둡고 침침한 세트장에 있다 보니 밖은 햇살이 비치는 낮이라는 걸 망각할 정도로 메이의 감정에 빠져 있다 보니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졌다. 그래서 세트장 문을 박차고 햇빛 아래에서 30분 정도 앉아서 마음을 다스린 적이 있다. (웃음)
큰 사건들이 펼쳐지기 보단 두 남녀의 감정적 충돌과 교감이 중요한 영화였으니까 장혁 씨와의 호흡이 중요했을 것 같다.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는 아니지 않았나? 나름대로 친밀감을 형성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 같다.
회사가 같아서 오고 가면서 인사하는 사이이긴 했지만 그 전에 내게 약간의 선입견이 있었던 거 같다. 감성적인 부분보단 이성적인 부분이 강할 것 같다는 느낌? 마초적인 느낌도 강하다 생각했고. 그런데 실제로 함께 연기를 해보니까 감수성이 예민하고 작품에 대한 열의도 강하시더라. 초반엔 감독님이 장혁 씨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얘기해서, (웃음) 처음엔 되게 어색한 사이였다. 그런데 영화의 흐름처럼 점점 더 친해지다 보니까 내가 몰랐던 매력들이 하나씩 발견됐다. 개인적으론 장혁 씨의 재발견?
스스로가 장혁 씨에 대한 선입견을 지녔다 말한 것처럼 당신의 선입견을 지닌 누군가도 있을 거다. 특히 아이돌 가수 출신 연기자들에게 대중들은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최근 <무릎팍도사>에서 눈물을 보인 것도 그런 배경에서 얻은 상처란 생각이 든다. 대중들의 손가락질이 거셀수록 스스로 연기를 잘해나가야 한다는 책임이나 강박도 커질 거다.
예전엔 나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연기가 정말 좋아지고 내가 연기를 할 수 있는 환경 자체에 감사를 느끼게 됐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날 보시는 분들도 약간 변화된 느낌이 보인다고 하시는 것 같다. 그 동안 내가 놓치고 있었던 부분이 이런 마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방영했던 <태양을 삼켜라>가 본인의 8번째 드라마 출연작이었다. 주연 캐릭터를 거듭 맡아오고 있는데 작품의 얼굴로서 전면에 부각되는 게 부담될 때는 없었나?
처음엔 처음이기 때문에 봐주는 게 있지만 한 작품씩 해나가면서부터 대중들의 비판도 더 날카롭고 냉정해지는 게 느껴진다. 그만큼 책임감도 커지는 것 같다. 특히 작품마다 6~70명 정도 인원들의 노고가 담기는데 나 하나 때문에 그 노고가 퇴색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책임감을 느낀다.
그 동안 브라운관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엔 익숙해졌겠지만 스크린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라 생소할 수도 있었을 거다.
일단 감독님께서 미묘한 감정선을 원하셨는데 아무래도 브라운관 연기에 익숙해지다 보니까 그런 연기는 뭔가 부족하거나 심심한 거 같고, 이 정도 표현으로 관객들이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도 약간 들었다. TV같은 경우 마음에 안 들면 채널을 돌릴 수도 있고 이런 저런 다른 일을 하면서 볼 수도 있지만 영화는 일단 스크린 크기도 그렇고 모든 관객들이 스크린에 집착할 수 있는 환경이 되잖아. 그래서 그런 미묘한 감정선도 캐치가 되고 느껴지는 것 같더라. 감독님께서 왜 나에게 저런 밋밋하다 느낄만한 감정선을 요구하셨는지 스크린을 보니까 알게 됐다.
드라마로 배우 경력을 쌓아왔으니 영화 현장은 처음이었다. 준비기간을 비롯해서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었을 텐데 어땠나?
일단 드라마는 엔딩을 모르고, 심지어 다음 회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 채 찍어야 되는 경우가 많아서 놓치고 가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게다가 대중들의 반응은 즉각적이라 배우입장에선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영화는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하고 계산한 상태에서 들어갈 수 있어서 배우에겐 보다 친절한 작업 현장이 되는 것 같다. 덕분에 내 스스로도 자신감이나 안정감이 있었던 거 같고, 다음 그림을 그리면서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더 좋았다.
드라마는 현장 분위기가 상당히 타이트하다. 반면 영화는 좀 더 여유롭게 진행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좀 더 안정된 느낌이 있었을 것 같다.
일단 스태프 분들의 마인드 자체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드라마 같은 경우는 어쩔 수 없는 환경이라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 배우가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 주는 건 의무적이라기 보단 당연시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마인드 자체가 달랐다. 스태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일에 대한 프로의식과 열정을 지닌 것 같다. 그런 부분은 존경하고 본받을만한 점이라 느꼈다.
사실 처음 무대에 섰을 때부터 본인도 프로로 대중 앞에 섰다. 그렇지만 바로 프로로서의 자각이 생겼던 건 아니었을 것 같다. 일단 나는 처음부터 대중들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그런 책임감을 가질 순 있었던 거 같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가수가 자신의 무대를 즐기지 못하고 연기자가 자신의 캐릭터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정말 프로답지 못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책임감이 기쁨이나 즐거움보다 앞서 있었던 거 같아서 그 어린 마음을 생각하면 조금 안타깝게 느껴지는 부분 중 하나다.
그 나이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해야 했던 부분도 많다. 뒤늦게 남는 아쉬움은 없나?
그 당시엔 그게 너무 익숙했고 당연했다. 겁도 많았고, 그냥 당연히 지나가는 게 편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놓치고 간 부분이 많다고 느껴져서 마음이 아픈 순간이 있다. 평범한 삶을 조금 더 즐기고 이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싶기도 하고. 연기자로서도 그런 경험을 남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토끼와 리저드>는 운명적 관계를 되새겨 나가는 남녀의 여정을 그린 영화다. 과거 가수로서 데뷔했고 현재 배우로 활동하는 본인의 인생 속에서 뒤늦게 스스로 운명적이었다 느낄 수 있는 계기나 과정의 순간들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이 그 삶에서 얻은 상처를 견딜 수 있는 힘이 됐을지도 모른다.
포스터에 이런 문구가 있다. ‘사랑보단 상처가 익숙했던 그들, 서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연기를 시작한 이후로 연기가 내게 상처가 되기 시작했고 나의 아킬레스건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연기의 참 맛이나 기쁨을 알게 된 과정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여전히 그걸 알아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을 밟아나가면 어느 순간 정점에 이르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은 이런 과정이 힘들다기 보단 오히려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면이 더 많아진 거 같다.
“왜 내가 네 손을 잡았는지 이제 알 것 같다”는 은설의 대사처럼 운명이란 뒤늦게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배우로서 살아가는 것도 결과론적으로 본인의 운명인 셈인데 그 상황 속에서 어떤 목표의식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신에게 연기가 어떤 것이냐, 라는 질문을 받으면 항상 연기는 나에게 운명과도 같은 존재라고 대답했다. 처음엔 정말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 다가왔고 이로 인해 이런 저런 시련을 받았기 때문에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벗어날 수 없게끔 상황이 이어졌다. 이젠 그 어떤 것보다 연기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된 것 같아서 이런 게 운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연기에 대한 기쁨을 알고 내 길이란 확신이 생긴 만큼 내 스스로 연기를 즐기면서 보는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게 목표다.
인기라는 건 마치 때때로 버거워서 버리고 싶지만 결코 버릴 수 없는 메이의 짐과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데뷔 초부터 많은 인기를 누렸던 만큼 그 인기의 허와 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
너무 어린 시절부터,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인기를 얻어서 그런지 그런 인기에 대한 허와 실을 너무 빨리 알게 됐다. 그게 물론 나에게 중요한 건 안다. 다만 그게 삶의 목표가 되면 안 된다. 나한테 따라와주면 좋지만 따라와주지 못해도 너무 낙심할 일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연극영화학과에 진학했는데 원래부터 염두에 둔 선택이었나, 아니면 입시적 진로를 앞두고 결정한 문제였나.
솔직히 그 당시엔 학교에서 그때 내가 하던 것과 다른 부분을 배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너무 다른 분야를 배우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 연극영화과를 선택하게 됐다. 그런데 사실 학교를 갈 수 있는 기회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체계적인 공부도 하지 못했고 그런 부분을 놓치고 가야 했던 건 안타깝게 생각한다.
아무래도 현장에서 얻은 경험이 본인에게 실질적인 연기적 수업이 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만큼의 시행착오도 겪어왔을 텐데,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설 때 기분은 어땠나?
아마 카메라에 대한 공포가 없고 오히려 친밀감이 있다는 게 가수 출신 연기자의 장점이 아닐까. 반대로 우리 식구든, 멤버든, 매니저든, 익숙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해왔던 내가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수십 명의 스태프들과 몇 달간 동거 동락하듯 지내야 하고 그 기간 동안 생기는 다양한 트러블에 적응해야 했기 때문에 낯설고 힘들었다. 게다가 짧은 순간의 무대 공연에 익숙해 있던 내게 긴 호흡의 연기는 낯설고 힘든 일이기도 했다.
무대에선 짧은 순간에 에너지를 폭발시키면 되지만 현장에서는 에너지를 배분해서 끊임없이 방전과 충전을 거듭해야 한다.
가수가 무대에 서는 게 100m 달리기라면 연기는 마라톤 같은 느낌이다. 그땐 에너지를 배분하는 법에 익숙하지도 못했고 서툴렀다. 그래서 연기적으로도 들쑥날쑥 하고 논란의 여지가 생긴 거 같다. 기존에 그런 걸 배우고 어느 정도 인지가 된 상태에서 시작한 게 아니었던 만큼 하나하나 경험하면서 터득해 나가는 과정이다 보니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핑클’ 시절 덕분에 여전히 ‘요정’소리를 많이 들을 것 같다. (웃음) 그런 말이 지금의 당신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게 하나?
그 당시에 우리가 그렇게 불려졌다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련한 추억이 되는 거 같다. 재미있다, 그냥. (웃음)
‘핑클’은 이제 당신의 삶에서 과거형이다. 그럼에도 당신의 현재를 말할 땐 항상 핑클이라는 과거에서 시작된다.
‘핑클’이 큰 존재였구나, 라는 걸 알게 되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사실 예전에는 벗어나고 싶은 굴레였지만 지금은 ‘핑클’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감사한다. 덕분에 이제 ‘핑클’ 때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픈 욕심을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가수 생활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활동을 그만 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나?
핑클 활동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고, 가수 출신 연기자로서 끊임없이 비난을 받을 때마다 그런 고비가 있었다.
대중들의 비난에 항상 대응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심경을 토로하는 것도 간혹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최근에 <무릎팍도사>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는데 어쩌면 본인에게 비난을 던진 불특정다수의 사람들 중 그 영상을 통해 미안함을 품었던 이들도 있을 거다. 일일이 항변하거나 변명할 순 없지만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 때때론 좋은 소통 방식이 될 때가 있는 것 같다.
한 번은 내가 아는 지인 분에게 이런 얘기들에 대해서 다 해명하고 싶다, 그랬더니 그 분이 저에게 말씀해주시더라. “이 직업을 가진 이상,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이슈가 되거나, 오해를 받을 수 있는 환경에 노출돼 살아야 한다. 그런 오해와 구설수와 각종 루머에 대해서 네가 모두 하나하나 해명할 수 있다면 지금부터 시작해라. 그러나 네가 해명하지 못한 그런 루머나 오해들은 사실이 돼버린다. 어떤 것을 선택할 거냐.” 내게 온 국민의 오해와 루머를 하나하나 해명할 능력은 없다. 그래서 때로는 침묵하는 법도 배워야 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진실은 분명 밝혀지는 것 같다. 만약 기회가 돼서 해명할 기회가 되면 해명할 수도 있고. 그리고 이젠 그런 지혜가 약간 생긴 것 같다.
‘핑클’ 시절 함께 활동했던 다른 멤버들도 다양한 분야에서 제각각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함께 활동을 시작했던 시절로부터 10년 정도 세월이 지났는데 지금 어떤 감회라 할만한 게 있을까?
항상 넷이었다가 혼자가 됐을 때는 각자 본인의 분야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치열하게 고군분투했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은 저마다 본인의 분야를 즐길 줄 아는 여유가 보이는 것 같고, 각자 분야에서 다들 인정받고 있는 거 같아서 좋다. 내가 제일 어려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자매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언니들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잘 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요즘 새로운 10대 아이돌 그룹이 많은데 그런 후배들을 보면서 예전 생각을 할 때는 없나?
나는 그 당시에 우리 팬들이 우리 노래나 이미지를 좋아하기 때문에 우리를 좋아한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그 어린 친구들을 보면서 단지 어리다는 것만으로도 신선하고 예쁜 매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각자 개성도 뚜렷하고 재능도 뛰어나지만 그 나이 또래들만 누릴 수 있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어린 시절에 저런 모습이었을까, 생각하게 되면 새롭고 신기하고 그렇다. (웃음)
<토끼와 리저드>는 뒤늦게 찾은 운명적 상대에 대한 멜로다. 이제 데뷔 초에 비해 사랑에 대한 관념도 보다 깊어질 나이로 들어섰는데 운명적인 대상을 찾을 것까진 없겠지만, (웃음) 연애나 결혼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접근해 볼만한 나이가 됐다.
어릴 때부터 너무 특수한 환경 속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평범함을 추구하는 것 같다. 평범하게 사랑하고, 평범하게 만나고, 평범하게 살고 싶은, 그런 소망이 있다.
<황태자의 첫사랑>에서 차태현 씨와 호흡을 맞췄다. <토끼와 리저드>에서도 차태현 씨가 출연하는데 본인과 호흡을 맞추는 신이 없어서 마주칠만한 일도 적었을 것 같다.
사실 포장마차 신에서 같이 나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감독님께서 은설과 메이의 감정에 몰입하고 싶으시다고 편집하셨다. (웃음)
지난 작품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를 새로운 작품에서 만나는 건 본인에게 몇 안 되는 경험이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 만났다는 점도 특별한 감상을 주지 않던가?
20대 중반의 내가 만난 태현 오빠와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의 내가 바라보는 태현 오빠는 참 많이 다른 사람 같더라. 그리고 태현 오빠도 이제 결혼했고 아이도 있는 만큼 보다 성숙한 느낌이 드니까 새롭기도 하고 그만큼 정감도 갔다.
방금 말한 대로 서른을 앞둔 나이인데 그만큼의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할 것 같다.
일단 20대엔 이런 저런 갈등이나 시련이 많았고 내 스스로 내 자신의 중심을 잘 세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게 20대 때 겪어야 할 과정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어떤 목표가 생기고 중심이 잡힌다고 느껴지니까 오히려 30대가 좀 더 기대된다. 그 목표에 얼마나 근접할 수 있을까라는 기대감이랄까.
최근에 한 다른 인터뷰에서 장혁 씨가 성유리 씨를 교양 있는 여자라고 했더라.
(웃음) 워낙 장혁 씨가 교양이 있으셔서 나도 거기 발 맞추어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동적인 부분보단 정적인 부분이 많이 보여서 그런 게 아닐까.
사실 아이돌 가수 출신이라 발랄하고 활발한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거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의외란 말을 많이 듣게 되진 않았을까.
요즘 인터뷰하면서 많이 느끼는 건 내가 되게 발랄하고 활발한 이미지로 많이 생각된다는 점이다. 내 스스로는 내가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드렸다는 점이 새로웠다.
메이의 히스테릭한 모습만 걷어내면 본인과 많이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익숙한 감정이라 오히려 편하게 봤는데 보신 분들은 색다르게 보시더라. 이런 부분이 내겐 강점이 될 수 있겠구나 느꼈다.
<쾌도 홍길동>이나 몇몇 드라마에서 백치미적 캐릭터를 연기했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로 각인된 부분도 많을 거다. 어쩌면 정작 자신과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캐릭터들을 연기한 셈인데 자신과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기분은 어떤가?
그런데 내 안에 분명히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친한 친구들은 그런 캐릭터들이 평소 생각하는 나와 닮았다는 얘기도 하더라. 상대적으로 어떤 성격이 부각되느냐 차이인 거 같다. 이런 저런 역할을 하다 보면 나도 잊고 있었던 성격들이 나온다. 결국 스스로의 재발견이랄까.
때때로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하면서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들을 발견하는 순간도 있을 테고.
어제 영화를 세 번째로 봤는데 눈 모양이 신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오는 게 보였다. 각도에 따라서, 아니면 조명에 따라서 그렇기도 하고, 어떨 땐 조금 올라간 눈이 되거나 반대로 내려간 눈이 되기도 하고. 나도 몰랐던 그런 부분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저럴 땐 이렇게 하는 게 좀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데 쉽겠구나, 이런 것도 알게 되고.
10년여 동안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으며 살아왔다. 어쩌면 그런 관심 속에서 짓눌리지 않고 살아남는 건 말 그대로 그 삶을 즐길 줄 알 때 가능할 것 같다. 그 삶 자체가 일종의 도피처가 되는 거랄까.
예전엔 사생활을 구속 당하는 느낌이 싫다는 막연한 감정이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 사생활이라 할만한 게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일상 속의 내 삶은 딱히 스펙터클하지 않고 재미있다기 보단 지루하다. 그런데 연기를 통해 다른 캐릭터로 살아가는 인생의 기쁨을 느꼈기 때문에 이젠 기꺼이 다른 부분의 희생을 받아들일 의향이 생긴 것 같다. 그리고 이젠 마지막까지 지켜내고 싶은 사생활은 어느 정도 지킬 수 있는 노하우도 생긴 것 같아서 그 일상을 절충하는 게 가능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