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너머로 본심을 가린 채 가족을 위협하는 이방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악마적 캐릭터, <오펀: 천사의 비밀>은 기시감을 부르는 영화다. <오멘>과 같은 악마적 아동이 등장하는 오컬트를 비롯해서 <케이프 피어>와 같은 가족지키기 스릴러까지, <오펀>이 흡수한 장르적 전례는 차고 넘친다. <오펀>이 영리한 영화라 말할 수 있는 건 그 덕분이다. <오펀>은 새로운 전형이라기 보단 뛰어난 응용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악한 유아적 캐릭터를 통해 장르적 착시를 발생시킨 뒤, 관객의 호기심과 긴장감을 동시에 유발한다. 무엇보다도 에스터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점차 본심을 드러내는 순간마다 연출되는 긴장감이 서사의 진행과 함께 두텁게 쌓여나간다. 결과적으로 <오펀>이 이룬 장르적 성취의 팔 할은 절대적으로 에스터를 연기하는 이사멜 펄먼의 연기력에 얹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내던져진 반전 역시 호불호의 차이를 발생시킬 가능성은 존재하나 이야기의 흐름 안에서 적절한 흐름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확실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말미에 다다라 난투극으로 변질되는 양상이 영화를 단순화시킨다는 인상도 들지만 역시나 그 순간조차도 절대적인 긴장감이 발생한다. 인상적인 캐릭터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 그리고 효과적인 연출력까지, 수준 이상의 만족감을 부른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 의, 식, 주가 붕괴되면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가치관마저 상실된다. 전쟁의 상흔이 가득한 1953년 서울도 마찬가지다. 도시엔 빈곤의 기운이 가득하다. 애나 어른이나 막론하고 먹고 사는 방법을 궁리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곳은 아이의 울음을 달래줄 정도의 여유도 없다. 기본적인 욕망조차 결핍된 도시에서 비정함이 새어 나온다. 그곳에서 소년은 울어봤자 별수 없다. 그래서 ‘소년은 울지 않는다’.
전쟁 후 고아가 된 종두(이완)와 태호(송창의)를 주인공으로 둔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어느 한 시대에 관한 이야기다. 1953년 서울을 재현한 스크린 너머의 풍경은 그 시대를 직접 경험치 못한 이들에게 일종의 실감을 안겨줄 만한 설득력이 존재한다. 설득력 있는 이미지는 두 소년의 삶을 둘러싼 시대적 정서를 이해하는 통로다. 전쟁이 끝나고 부모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을 받아주기엔 너무도 허기진 그 시대의 정서는 서슬이 퍼렇다. 법도 질서도 자리잡지 못한 시장을 지배하는 건 오로지 힘이다.
태호와 종두는 시장의 주먹인 명수(안길강)의 도움으로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악도 불사하는 냉혈한 도철(이기영)이 두 소년을 바라보는 시선은 편치 않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자신들이 빼돌린 미제 물건을 처분하려는 태호는 계산에 능한 만큼 사업수완을 발휘한다. 반면 강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종두는 명수의 싸움을 목격한 뒤 그를 동경하며 힘을 기른다. 태호가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종두는 감정적인 인간이다. 태호는 합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하여 이익에 따라 움직이려 하지만 종두는 직관적인 판단과 옳고 그름의 신념으로 전진한다.
영화는 대비적인 성격의 캐릭터를 통해 갈등과 화합을 그려내며 이를 통해 비극적인 시대상을 상충시키려 한다. 아이들이 이루는 군집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자치적으로 완성한 유사가족이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부모 역할을 하고 아이들을 돌본다. 성장기를 잃어버린 채 어른 행세를 내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 그 자체가 선명한 비극이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상황 속엔 그 자체로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열악함이 선명하다.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엔 큰 무리가 없다. 간혹 상황이 심화되고 발전되는 과정에서 로맨스를 통한 갈등과 같은 클리셰의 흔적들이 발견되긴 하지만 크게 거슬리는 인상은 아니다. 감정이 개입될만한 어떤 여지가 발생하지 않는 까닭이다. 비정한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아이들의 고군분투는 비관적인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 양식을 그저 바라보게 만들 뿐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지 망설이게 만든다. 이는 <소년은 울지 않는다>가 사실감을 주지 못하는 영화라서가 아니라 그 사실적인 풍경 너머의 정서가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만한 비극적 시대상에 대한 수긍을 이미 전제로 두고 있는 까닭이다. 때때로 아역배우들의 연기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영화는 담담하다.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참여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막연한 관찰이 지속될 따름이다. 시대를 충실히 재현하며 그 내부를 지배할만한 비극적 사연도 전시하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처럼 당연해 보인다. 그 세계가 짊어진 거대한 비극의 굴레가 눈앞에 생생하여 어떤 낙관도 버겁다.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 강자와 약자의 우열관계가 생생한 시대에 기본적인 가치는 생경한 언어처럼 무기력하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비극적인 현실을 운명적으로 수용하며 살아온 전후1세대의 삶을 조명한 휴먼드라마다. 비극 자체를 삶이라 치환하며 버틴 이들의 사연이다. 생계에 목숨을 건 인간들의 아귀다툼 속에서 소년의 눈물 따윈 통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소년은 울지 않는다. 성장기를 박탈당한 소년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어른처럼 비열해지거나 스스로 강해지길 꿈꾼다. 가혹했던 시대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던 소년들은 어른들의 세계에 뛰어들어 비극을 전제로 한 무용담을 기억에 쌓아나간다. 그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그만큼 씁쓸한 일이다. 개입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무력한 수긍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낙관과 비관이 양립한 듯한 극의 말미에서도 의지보단 어떤 체념이 먼저 감지된다. 영화적 재능보다도 시대를 관통하는 관찰자의 야심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