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을 견딘 예술품은 보존적 가치를 발생시키고 개인의 소유욕을 자극한다. 예술품에 물질적 단위의 가격을 매기게 된 건 그 소유욕 때문이다. 희귀성이 인정될수록 책정되는 화폐 단위가 올라간다. 본질적인 아름다움보다도 금전적인 저울질을 통한 소유욕이 예술을 장악한다. 예술이 금전적 가치로 규정될 때 예술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변질시키는 굴절된 욕망이 파생된다. 진품을 베낀 위작들이 눈먼 소유욕을 등에 업고 시장에 유통되고 진가를 해독할 수 있는 감정가의 판단이 예술적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 변수는 그 모든 과정에 개입하는 사람의 속내가 투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술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붓도, 예술적 가치를 판명하는 혀도, 예술적 가치를 구입하는 돈도, 사람에 의해 움직인다. 결국 사람이 변수가 된다.
<인사동 스캔들>은 예술을 거래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붓을, 혀를, 돈을 재능처럼 부리는 자들이 각축전을 펼치는 판이다. 그 재능은 누군가를 찌르는 칼이거나 반대로 스스로를 찌르는 칼이 된다. 이는 도박처럼 위험하다. 그 재능을 걸고 ‘몰빵’하면 그 판 안에서 영생을 누리기도 하지만 무덤처럼 갇히기도 하는 탓이다. 그 성패는 자신의 재능이 상대를 압도할만한 그릇이 되는가에 달려있다. 자신이 들고 있는 패를 어떻게 던질 수 있는가의 배짱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어떤 패를 들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인사동 스캔들>은 붓과, 혀와, 돈을 자신의 패로 들거나 감춘 이들이 벌이는 판세의 경과를 지켜보는 영화다.
미술품 경매 현장에서 위작 논란에 빠진 작품을 감정하는 이강준(김래원)은 최고 실력을 자랑하는 미술복원가다. 좋은 실력과 두둑한 배짱을 지니고 있지만 과거 불미스런 사건에 휘말린 이후로 복원가로 활동하지 않은 그는 도벽으로 인해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신세다. 미술계의 큰 손인 중개업자 배태진(엄정화)은 이강준의 특별한 처지를 이용해 안견의 ‘벽안도’복원작업에 끌어들이려 한다. 이강준은 ‘벽안도’에 흥미를 보이고 제안을 수락하지만 그에겐 다른 구상이 있다. <인사동 스캔들>은 ‘벽안도’복원이라는 사건의 기능적 관찰보다도 그 사안을 둘러싼 인물들의 각축전에 주력하는 영화다. ‘벽안도’복원에 착수하는 배태진과 이강준의 심리적 대립구도가 영화의 밑그림이 된다면 그 주변부에 산재한 다양한 캐릭터들은 채색을 돕는 다양한 염료와 같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대사와 이미지에 담긴 대용량의 정보들이 출력된다. ‘매치컷(match cut)’을 비롯한 다양한 장면전환 방식을 활용하며 극의 속도감을 높이고 사연의 줄기를 이루는 사건에 관련된 정보들을 끊임없이 출력하며 정보적 포만감을 발생시킨다. 복원과 복제가 의미를 달리하는 것처럼 합법적인 미술경매와 암거래 경매장이 교차하는 대비적 풍경은 <인사동 스캔들>의 장기에 가깝다. 미술품을 둘러싼 담합과 밀거래 등, 예술품이 유통되는 암투적 과정을 묘사하는 <인사동 스캔들>은 일련의 과정에 대한 사실성을 따지기 힘들 정도로 생소한 덕분에 특별한 풍경으로서 값어치가 있다. 특히 오래된 종이에 먹일 풀을 구하는 ‘세초’작업, ‘원접’과 ‘배접’을 나누는 ‘상박’, 선명한 색감을 재현하기 위한 ‘회음수’등, 동양미술을 복원하는 과정은 <타짜>의 ‘밑장빼기’만큼 이색적인 구경거리가 된다.
사실 <인사동 스캔들>은 <타짜>와 비교하기 좋은 영화다. 도박과 미술이란 소재는 세계관 자체만으로도 너비가 벌어지는 느낌이지만 복원가를 ‘떼쟁이’로, 중개업자를 ‘장물쟁이’로 지칭하는 은어가 소통되는 미술계의 뒷면은 도박판만큼이나 거칠고 험한 세계처럼 연출되며 이런 노선이 <타짜>의 기시감을 부른다. 타짜의 손기술은 복제가와 복원가의 그림 재현 솜씨와 대응한다. 복제와 암시장거래가 만연하는 미술품 거래장면은 치열한 기싸움과 암수가 오가는 도박판과 유사한 단상을 부른다. 현란한 전환 기술이 적극 활용되는 이미지와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입체적 구조를 이루는 이야기 형태도 낯이 익다. 캐릭터의 물량 공세가 대단하지만 인물관계의 기본적인 골격만으로 놓고 보자면 비슷한 선이 발견된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타짜>가 활용하기 좋은 규격을 선점한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모든 조건은 <인사동 스캔들>에 위작의 감정가를 매기고 싶게 만든다.
<인사동 스캔들>은 여러모로 공을 많이 들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과욕적이다. 저마다 개성을 뽐내는 다양한 캐릭터들은 영화를 풍요롭게 장식하나 종종 자신의 그릇을 지키기 위해 과한 경쟁을 벌이는 캐릭터들이 발견되고, 현란하게 펼쳐지는 이미지와 대량적으로 생산되는 정보는 포만감을 넘어 폭식에 가까운 부담을 안긴다. 빠르게 돌아가는 이야기 구조 속에서 중요하게 요구되는 건 이해력에 가깝다. 이야기의 총합을 이루는 태도는 물리적인 기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끝내 결과를 이루는 모든 과정이 계산적인 계획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때때로 예언을 가장한 우연을 방치하고 묵인한다. 모든 것이 계획적인 필연 같지만 그것을 보좌하는 우연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방대한 대사량과 이미지로 이뤄진 스토리를 다 따라잡는다 해도 의식 속에 침전된 의문을 느낀다면 이런 까닭과 무관하지 않다.
동시에 모든 상황이 정리되는 결말부에 다다라 얻어질 정서적 감흥이 기본적인 기대치의 수위를 넘어서지 못하는 느낌이다. 이는 캐릭터의 대립항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강준과 배태진의 대립구도는 기세로서 동등하다. 배우가 고민할만한 캐릭터의 디테일은 충분히 완성된 느낌이다. 그러나 기능적인 역할을 묘사하는 데서 균등한 배분이 이뤄지지 않는다. 이는 역할의 보조자, 즉 감독의 배려가 부족하다 탓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강준이 기능적인 능력을 전시해나가는 동안, 배태진을 수식할만한 역할의 기능성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캐릭터의 외모와 대사를 통해 예측되는 잠재력만 발견될 뿐이다. 말미에 다다라서 두 인물은 단순한 선악으로 구분된다. 선의를 바탕으로 복수에 성공하는 자와 악의를 품고 몰락하는 자로 나뉜다. 캐릭터에 접근하는 설정 자체가 상대적인 편애를 발생시키기 좋은 조건이다. 캐릭터의 경쟁을 부추기는 구조 안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건 선의의 승리라기 보단 불합리한 성취를 요구하는 굴절된 욕망의 파괴가 아니었을까. 그런 측면에서 그릇된 욕망을 대변하는 배태진의 배경은 어딘가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는 결국 결말부에서 목적을 이룬 인물로부터 전해질 공감대가 깊게 자리잡을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인사동 스캔들>은 분명 어떤 성과를 드러내는 영화다. <타짜>와 골격이 유사하지만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의 물량공세는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를 벤치마킹한 느낌이고 문화적 국수주의를 어필하는 말미 즈음엔 <식객>보다 세련된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종종 우연까지 계산된 계획처럼 모든 과정을 합리화한다는 게 걸리지만 스토리 자체의 전후관계는 맥락 자체로선 앞뒤가 맞는 형태라 말할 수 있다. 분명 단점만큼이나 장점도 눈에 띄는 영화다. 하지만 역시나 과욕이 문제다. 다양한 색을 입혔지만 저마다 색이 번지는 느낌이다. “서양화는 베끼는 게 어렵고, 동양화는 살리는 게 어렵다.”는 대사처럼, ‘자질은 살리는 게 어렵고, 과욕은 죽이는 게 어렵다’.
지난 2000년, 인터넷에 유포된(?) 류승완 감독의 중편영화 <다찌마와 LEE>를 보며 방구석에서 낄낄댄 기억이 있는 이라면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이하, <다찌마와 리>)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다찌마와 리>는 모니터에서 스크린으로 주소지를 옮긴 자기 복제작,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품종 개량작이라 명명해도 좋다. 버전업된 ‘일백푸로 후시녹음’과 ‘정통 액숀’, 그리고 상하이와 만주, 스위스, 미국까지 이어지는 다국적 비(非)현지(?) 로케이숀으로 돌아온 <다찌마와 리>는 ‘디지털 푸로젝트’ 액션협객물 <다찌마와 LEE>를 글로발 스케일의 잘빠진 첩보액션물로 확장시킨 또 한번의 문제작이다.
과장된 수사를 남발하던 한국고전액션영화의 문어체 대사를 원형 그대로 영화에 활용한 <다찌마와 LEE>는 구시대적 촌스러움을 복고적 유희로 승화시키는데 전략적으로 성공했다. <다찌마와 리>역시 그 전략을 뻔뻔하면서도 노골적으로 답습한다. 다만 모니터에서 스크린으로 스케일이 넓어진 만큼 그것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음을 간파한 것인지 의도적 규모가 넓어졌다. 자신의 문제작을 다시 한번 매만진 류승완 감독이 추가한 메뉴의 정체는 박노식 감독의 1977년작, <악인이여, 지옥행 열차를 타라>에 ‘급행’의 추임새를 넣어 변주된 긴 부제로부터 음미할 수 있다. 권선징악의 목표가 뚜렷한 6~70년대 한국고전액션물에서 만연했던 수사남발 장문대사를 익살스럽게 배치하던 <다찌마와 LEE>의 전략적 응용사례를 헌사수준으로 격상시키는 한편, 그 영역을 한국고전액션물에서 동아시아 첩보활극까지 확대했다. 게다가 유희적 스킬이 추가됐다. TV에서 종종 개그맨들이 구사하던 엉터리 외국어 음차가 거리낌없이 도입됐고, 그와 함께 무단 배포 형식의 인터넷 영화자막을 활용한 풍자적 개그까지 가미된다. 좀처럼 무시할 수 없는 위력적인 화장실 개그도 종종 눈에 띤다. 극장판은 과거 인터넷판보다 분량이 늘고 스케일이 확대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유희적 너비의 폭을 더욱 발전적으로 확충했다.
<다찌마와 리>는 사실 모든 면에서 아이러니한 영화다. 쌈마이 정체성의 구시대적 B급 유희를 발산하지만 때깔은 최신판 세련미로 충만하다. 어찌 보면 이건 굉장히 실험적이다. 낡아빠진 구시대적 유물에 현대적 회화기법을 채색하는 모험이다. 만약 그 누군가가 이 영화를 보고 자지러진다면 그 의도적인 방식을 수용할 의사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관객이라면 그 의도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암묵적인 이해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시대를 배반하는 언어가 유희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 의도된 쓰임새에 대한 충분한 수긍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찌마와 리>는 모든 것이 헐거워 보이지만 실제론 상당히 계산된 구조로 작동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즉흥적으로 발생한 애드립을 추임새로 넣어도 상관없을 듯한 장문대사들의 희극성은 실제로 치밀하게 직조된 대화의 합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쯤 나사 풀린듯한 자세를 취하지만 실제론 확실한 의도를 품고 조율된 경로로써 진행되는 영화적 구조로 이뤄져 있다. 그만큼 모든 경로를 추적하는 배우들의 역할 몰입이 중요해진다. 그런 점에서 극의 전반을 이끌어가는 임원희의 연기는 애초에 <다찌마와 LEE>로 잉태된 그때만큼이나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셈이다. 또한 국경 살쾡이 역을 맡은 류승범은 <다찌마와 리>에서 가장 큰 파괴력을 자랑하는 웃음을 발생시키는 다크호스라 할 수 있다. 물론 가장 무시무시한(?) 웃음의 희생양은 진상 8호 역의 정석용이 맡았다.-이건 보면 안다. 당사자에게 깊은 위로를.- 게다가 박시연의 일관성있는 후시 연기도 꽤나 눈길을 끈다.
하지만 뼈 속까지 유치 찬란해 보이는 이 영화에도 비범함은 있다. 코믹과 액션은 <다찌마와 리>의 양 날개나 다름없다. 전자가 관객과 스크린을 끼워 맞추는 너트라면 후자는 그것을 조이는 볼트나 다름없다. 웃음은 관객을 <다찌마와 리>로 응시하게 만드는 일종의 감상적 매개체라면 액션은 그 감상의 화룡점정을 찍는 결정적 지점이다. 최근 만주벌판을 무대로 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이 실제 만주를 카메라에 온전히 보존하며 호쾌한 활극적 기운을 담아낸 것과 비교했을 때 영종도를 눈 딱 감고 만주로 치환한 <다찌마와 리>의 성과는 더욱 선명해진다. 그것에 실제로 접근하지 않고서도 그것을 전시할 수 있는 대범함은 <다찌마와 리>가 단지 퍼포먼스 위장술에 능통한 혹은 우격다짐이 강한 영화라서가 아니다. 다찌마와 리가 자신을 찾아온 국경 살쾡이와 마적단 일행에 맞서는 일대 다수의 평원 결투씬은 만주 평원에서 말을 타고 내달리던 <놈놈놈>의 그 장면 못지 않게 스펙터클한 감상을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류승완 감독은 세월 너머로 희미해진 한국고전액션영화에 새로운 육체를 대입해 재생하곤 한다. 그 순간만큼은 <다찌마와 리>가 품은 비범한 액숀 로망이 한없이 분출된다.
<다찌마와 리>는 마치 막 꾸며낸 거짓임을 알면서도 그 재미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입담 좋은 이야기꾼의 언변과도 같은 매력이 있다. 물론 그 싸구려 유희의 의도를 체감하지 못하는 관객에게 <다찌마와 리>는 그저 열라 유치한 삼류영화로 몰락해버릴 공산도 있다. 하지만 그 유희는 순간적인 컷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어 만만찮다. 무엇보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뻔뻔함에 기가 차서 감탄할 정도다. 특히 거대한 자막을 패기만만하게 앞세운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흑룡강 씬을 예로 들만하다. 누가 봐도 성수대교임이 분명한 그곳에서 심지어 지나가는 차가 앵글에 포착되고 뒤편으로 아파트까지 적나라하게 보이는데 영화는 그 곳이 압록강이라고 시치미를 떼더니 후에 두만강과 흑룡강까지 재활용하면서도 딱 잡아뗀다. <다찌마와 리>의 다국적 로케이숀은 이렇게 완성됐다. 이 정도면 노골적인 커밍아웃이다. 하지만 그 우격다짐이 실소 대신 폭소를 유발하는 건 실제공간을 대리 출석한 그 짝퉁 공간들의 기능성이 기발하게 발휘되는 덕분이다. 순발력있는 유희를 그 순간에 확실히 소비하되 그것을 토막내지 않음으로서 전체적인 리듬을 해치지 않는다. <다찌마와 리>는 상당히 노련하면서도 민첩하고 성실한 영화다. 류승완 감독의 고군분투를 바탕으로 한 총체적 경험에서 잉태된 의욕적인 시도들이 상당수 엿보인다. <다찌마와 리>의 뻔뻔함을 높게 평가할 수 있는 건 그 의욕이 남기는 잘생긴 호감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