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마라톤 출전 선발전에서 1등을 한 조선인 준식(장동건)이 일본의 마라톤 유망주로 촉망 받던 하세가와(오다기리 조)를 제치고 결승 테이프를 끊는다. 하지만 1등으로 호명되는 건 하세가와였다. 분노한 조선인 관중들은 일본인과 뒤엉켜 싸우고 그 결과, 준식을 포함한 조선인들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군으로 징용된다. 그곳에서 전쟁을 수행하던 준식은 새로운 부대장으로 임명된 하세가와를 마주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마라톤 금메달을 꿈꾸며 경쟁하던 준식과 하세가와의 인연이 전장에서 새로운 악연으로 거듭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독일군 포로들을 검사하던 연합군은 동양인을 발견하고 호기심을 느꼈다. 독일군 군복을 입은 동양인은 자신을 ‘꼬레아’라고 소개했다. <마이웨이>는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힌 일제 치하 한국인에 관한 사진 한 장이 모티프가 된 소설을 각색한 결과물이다.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 프랑스 노르망디까지 오게 된 한국인의 감춰진 사연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명 호기심을 당기고 상상력을 부추긴다. 결국 <마이웨이>는 사진 한 장, 즉 파편과 같은 소재를 뼈대 삼아 그려낸 작품이란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로 전쟁신 촬영의 테크닉을 뽐낸 바 있는 강제규 감독은 <마이웨이>에서도 자신의 장기를 마음껏 발휘한다. 빠른 속도로 컷과 컷을 쪼개며 스피디하게 다각도의 이미지 정보량을 소나기처럼 쏟아 넣고 핸드헬드로 현장감을 주입한다. 결과적으로 <마이웨이>의 주인공은 어떤 인물이라기 보단 그 전쟁신 자체의 이미지인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마이웨이>는 강제규 감독의 전쟁신 촬영의 테크닉을 전시하기 위해 마련된 그릇 같다. 일제 치하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꿈꾸며 경쟁하고 반목하던 조선인과 일본인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쟁터에 서게 되고, 핏덩어리가 되어 뒹굴기를 몇 차례 반복하면서도 끝내 서로 살아남아 노르망디 해안에서 해후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은 사실상 네 차례 정도 전시되는 전쟁 시퀀스를 조성하기 위한 연결고리처럼 보인다.
저마다 압도적인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전쟁신이지만 반복적으로 비슷한 것을 보고 있다는 감상 안에서 그 위력이 무마된다. 그 간극을 차지하는 건 야만적인 시대성 안에서 탈이데올로기적 경험을 차례로 경험하는 두 남자의 여정이다. 조선에서 몽골로, 러시아로, 독일로, 그리고 노르망디 해변으로, <마이웨이>는 영화의 감정적 체온으로 보자면 악연에서 인연으로, 지독한 갈등에서 극적인 화해로 나아가는 멜로적인 로드무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로드무비적인 여정도, 이 모든 사연을 비극적인 멜로로 봉합하는 스토리텔링의 감정도, 전쟁신을 끼워 넣기 위한 액자처럼 보인다. 페이소스를 자극하는 여정이 분명 효과적으로 감정을 툭툭 치는 찰나가 있지만 그 감정적인 총합이 끝내 클라이맥스의 파고로 넘치는 느낌을 얻을 수 없다.
스펙터클의 눈요기가 익숙해질 무렵, 예상 범위 안에서 딱 떨어지는 서사에 대한 흥미도 반감된다. 결국 거대한 스펙터클의 전시를 위해서 페이소스가 소모되는 양상이다. 특히 스펙터클의 풍경 안에 선 중심 캐릭터의 감정선이 지나치게 작위적인 합에서 구르는 탓에 이입하기가 어렵다. 농담처럼 말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 투어를 하는 기분이랄까. 150여분에 다다르는 러닝타임을 이런 식으로 견디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은 노릇이다.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다. 어머니에게도 ‘소녀시대’가 있었고, 철없는 시절에 함께 하면 무서울 것이 없었던 친구들과의 추억도 있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어린 나이에 할 수 없는 무언가를 거듭 겪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 시절에만 가능했던 어떤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시절에서만 가능했던 무엇들을 더 이상 체험할 수 없다는 상실을 체감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써니>는 우리의 지난 날, 80년대를 지나쳐 보낸 어떤 어른들을 위한 송가다. <써니>는 주부로서,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삶에 치이고 부대끼며 살아가던 여인 임나미(유호정)가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지난 날을 돌아보고 회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데뷔작 <과속스캔들>로 기록적인 흥행 성공을 얻어낸 강형철 감독은 <써니>를 통해서 자신의 취향을 보다 확실하게 어필한다. 미혼모 문제를 대안가족적인 온기와 화합적인 낭만으로 끌어올린 <과속스캔들>의 드라마틱한 정서는 혈기왕성한 젊은 날의 꿈으로부터 멀어진 중년 여인들의 의기투합과 낭만적인 해피엔딩을 지닌 <써니>로 거듭난다. 자잘한 소품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도 유효하다. 세심하게 풍경의 근접한 양태들을 유유히 포착해내는 오프닝 시퀀스의 리듬은 <과속스캔들>과 동일한 접근방식이라 할만하다. 또한 윤리적인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낭만성, 즉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털어내고 그 시대에서 발견되던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이를 재현의 도구로서 활용하는 방식 역시 그렇다. 물론 이는 시대적인 공기를 단순히 가볍게 간과한다거나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느 개인이 지니고 있던 시공간의 개념이 중요할 뿐, 그 시대의 공기를 재현하고자 하는 의욕은 <써니>의 의도와 무관하다.
시대적인 풍경을 재현해낸다는 건 그 시대를 지나온 이들과의 교감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써니>가 재현하는 80년대의 풍경들은 바로 그 시대를 지나온 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묵은 말들이 살아있는 풍경으로 재생되고, 그 안에서 지나간 날들이 떠오를 때, 그 시절을 건너온 관객들은 그 시절을 되돌아보는 영화 속의 인물들과 동화될 수 밖에 없다. <써니>가 자아내는 공감대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다만 그 공감대를 보다 깊고 너르게 완성해낼 수 있는 자질은 영화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 셈이다. 그런 의도 안에서 <써니>는 성공한 결과물이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그러니까 영화의 두 시점은 이를 감상하는 이들의 시점을 대변하듯 그 시절의 풍경을 온전히 스크린에 전시하고 있다. 다소 과시적이거나 과잉적인 측면도 없는 건 아니지만 추억을 되새긴다는 건 허기보다는 포만이 더 어울리는 법이다. <써니>는 80년대에 향수를 지닌 오늘날의 중년 세대들을 위한 포만의 장이다. 영화가 쏟아내는 오래된 이미지들은 오늘을 향유하지 못하는 과거 세대들을 위한 성찬과 같다.
물론 이는 반대로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 일종의 체험이다. <써니> 속에서 등장하는 갖은 풍경들은 그 시대를 공유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낯설기 짝이 없는, 희귀한 풍경일 것이다. 이를 하나의 볼거리로 승화시키는 건 그 과거적인 소품들 속을 누비는 어린 소녀들일 것이다. 창고에서 꺼내든 오래된 소품들을 추억으로 공유할 수 없는 세대들이 <써니>에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죽은 시간을 생동감 있게 재생시키는 극 속 인물들인 셈이다. ‘7공주’라고 스스로를 명명하며 시대를 재현하는 소녀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각인시키며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고 사연의 너비를 넓혀나간다. 때때로 감정적인 활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인상도 들지만 <써니>는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어쩌면 언젠가 오늘날의 젊은 날을 뒤돌아보게 될 어린 세대들에게 <써니>는 좋은 지침서 역할을 수행할지도 모른다. 세대 간의 단절된 기억 속에서 지난 세대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이 영화가 지닌 최고의 덕목일지도 모른다.
시대적 소품의 디테일한 활용 능력, 저마다 개성을 확보한 캐릭터들의 표현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써니>는 그러한 재현성을 단지 향수를 건드리는 자극의 촉매로 장치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진짜 감정을 건드리는 간절한 낭만으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눈여겨볼만하다. 이러한 감각은 강형철 감독이 지닌 윤리적 중립성과 도덕적 해탈감에서 비롯된 쿨함 그 자체에 있다. <써니>는 <과속스캔들>과 마찬가지로 쿨한 영화다. 이는 소품을 활용하고 비추는 카메라의 양식을 넘어서서 심각한 인상에서 도피하지 않고 완벽하게 탈출해서 자신만의 쾌감을 불어넣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강형철 감독의 상업적 감각은 스토리텔링의 기승전결을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는 김용화 감독과 비견될만하며 앞으로의 행보도 주목할만하다. 또한 <써니>의 일등공신들, 과거와 현재 속에 놓인 전후의 인상을 책임지는 배우들의 존재감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무엇보다도 심은경은 <써니>가 전달하는 낭만의 팔 할을 책임지는 일등공신이다.
과거와 현재 속에서 놓인 인물들은 우리가 지나친 것들, 즉 돌아갈 수 없는 시대에 대한 추억을 아련하게 환기시키면서 쿨하게 깔깔댄다. 그게 되레 낭만적이다. 낭만이라는 게 결국 슬픈 일이 아니지 않나. 추억이 있기에 오늘을 버틸 수 있다는 것, 이 영화는 그것을 깨닫게 만든다. 오래된 친구가 반가운 것은 그 시절을 환기시키는 유쾌한 수다가 뒤따르는 덕분이지 않던가. 그리고 삶은 그 추억을 먹고 한 뼘 더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