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은 노무현에 관한 영화이되, 노무현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노무현이란 말을 통해서 환기되고 복기되는 영화인 것 같다. 이 시대의 첨예한 갈등 한복판에 <변호인>이란 영화가 놓여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제작 초기부터 그리고 영화가 개봉된 지금까지도 <변호인>에 관한 말의 8할도 여기서 비롯됐다. <변호인>이 ‘노무현에 대한 영화’라고 알려지면서 이 영화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정치적인 영화로서 인식된다. 하지만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인 시절의 영화라기 보단 고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인 시절에 변호를 맡았던 부산 학림 사건, 흔히 말하는 ‘부림사건’에 관한 영화로서 설명할 때 보다 명확해지는 작품이다.
‘부림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평범한 독서모임을 운영하던 대학생들이 빨갱이 조직원으로 몰리면서 강제 연행되어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강제적인 자백을 실토한 뒤 재판에 회부됐고 이미 정해진 각본의 결말을 향하듯 일방적인 분위기로 강행된 재판 속에서 노무현을 비롯한 당시의 변호인단 3인이 조작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불공정한 재판에 항의했지만 부당한 형 집행이 이뤄졌다. 당시 구속된 22인 중에선 부산지역의 대학생을 비롯해서 교사와 직장인들도 포함돼있었는데 개중의 몇몇은 재판 당일에서야 처음 대면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서 활용했던 대국민 빨갱이화 조작 사건, 이른바 용공 조작 사건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바로 이 부림사건이다.
<변호인>이란 영화가 부림사건을 관통하며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국민과 국가의 관계란 일방적으로 충성을 바쳐야 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 “국민이 곧 주권이다.” 그만큼 국가라는 거대한 울타리를 사유화가 가능한 권력으로 인식하고 이를 남용하는 무리의 부조리한 행위에 대한 고발, 그것이 <변호인>의 주제의식에 가깝다. 사실 <변호인>이 공적인 사건을 환기시키는 묘사의 방식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다고 말하긴 조금 망설여진다. 다만 기본적으로 어긋나있지 않으며 명확한 정황을 되짚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선 나름대로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발화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 어쩌면 폭압적이고 몰염치한 권력의 시대에서 선악의 구도가 명백한 탓에 그 균형 자체를 담아낸다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대에 죄를 물을 순 없겠지만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이해도 필요한 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제대로 작동시키는 건 송강호라는 배우 자체의 존재감이다. 아마 <변호인>은 올해 개봉된 <더 테러 라이브>, <집으로 가는 길>과 함께 배우의 연기력이 영화의 완성도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를 논하기 적절한 사례로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지난 12월 18일에 개봉된 <변호인>은 개봉 첫 주에 약 500여 개의 스크린을 확보했고 관객 170만 명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개봉 전부터 개봉관 확보에 대한 걱정을 비롯해서 흉흉한 소문이 돌았던 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영화에 관해서 할말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포털사이트의 평점에선 양극화된 싸움이 한창이었다. 1점 아니면 10점. 절대적인 지지와 절대적인 반대가 맞서는 극단적인 대치 상황. 영화에 대한 감상과 무관한 자기 선언. 이는 바로 우리 사회의 갈등 국면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바로미터나 다름없다.
<변호인>을 관통한 스크린 밖의 관객들의 감상은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 안에서 영화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보다 단단해지는 인상이다. <변호인>에 대한 감상의 방향이 실화 자체가 지닌 가혹함에 대한 분노 이상으로 작금의 현실에 대한 호소나 공감으로 확장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아닌 하나의 상징으로서 권장하거나 부정해야 될 무언가가 돼버린 인상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 간의 싸움 안에서 <변호인>은 뜨거운 감자가 되는 것 같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변호인>에 대한 관람 여부를 선거 운동하듯 알리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는 건 시대적인 정의 그리고 보편적인 상식에 가깝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영화를 ‘노무현에 관한 찬양’이라며 힐난한다. 한편에선 우리가 꼭 봐야할 영화라며 호소한다. 한편에선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면 종북세력이 된다. 한편에선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몰락에 기여하는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호도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그저 한편의 영화가 아니다. 지금 현실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증명하기 위한 필사적인 도구인 셈이다. 자신의 블로그에 <변호인>에 관한 리뷰를 남긴 영화평론가 이동진을 향해서 비판적인 댓글이 달렸다.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인 입장이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댓글을 남긴 이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란 의미일 테다. 그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그저 영화가 아닌 셈이다.
심지어 다른 한편에선 영화를 관람하지 않고도 싸지를 수 있는 촌평이 쏟아진다. 심지어 ‘공산주의 혁명을 기도했던 반국가 범죄사건’에 대한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위인도 등장했다. 시절이 하수상한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하수상하지 않았던 시절이나 있었는지 눈과 귀를 의심할만한 작태들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커밍아웃하는 시대에서 <변호인>과 같은 영화가 돋보이지 않고 배길 수나 있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변호인>을 돋보이게 만드는 건 여전히 스스로 불신의 탑을 쌓고 자신만의 국민을 보호하는 공권력이고 그 공권력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과 수익을 보장받는 보신주의자들의 파렴치한 행태에 있다. <변호인>과 그 주변반응을 ‘노무현의 영화’를 두고 벌어지는 갑론을박에 대해서 친노와 일베의 갈등으로 일반화시키는 것 역시 그리 적절한 태도인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를 둘러싼 공기는 생각 이상으로 포괄적이고 상징적이다. 그냥 이 시대 자체의 양상처럼 보인다.
<변호인>은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시대를 잘 만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하수상하다 못해서 보고 듣고도 의심할만한 일들이 시시때때로 눈과 귀를 바늘처럼 찌르고 들어온다. 하지만 <변호인>이 잘 만날 시대가 하루 이틀이었나. 아마 한반도에 대한민국이라 칭하는 국가가 세워진 이래로 <변호인> 같은 영화가 개봉하지 못할 만큼 무기력한 시대만 아니라면 이 영화를 흥행시킬 시대는 적지 않았다. 다만 그런 시대가 21세기를 넘어선 지금에서도 머리를 들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놀라울 뿐이다. 민주주의를 천년왕국 정도로 해석했던 이들에겐, 정치라는 것이 대단히 불쾌한 술자리 대화 소재로 인식했던 이들에게도 충격과 각성을 준다고 말하는 시대에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정말 대단한 흥행 요건을 갖춘 상업영화일수밖에 없다. 이 영화가 시대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시대가 이 영화를 떠받들게 만든다. 시대는 보다 우울해지고 있다. 그만큼 관객은 더 들 것이다. 이것도 다 ‘놈현 탓인가?’ 무서워서 대통령 욕도 하기 힘들어진 작금의 시대 탓이라고 여겨지는 건 그저 오해인가?
편모 아래 자란 딸은 어려서부터 제 어미 속을 썩이는데 이골이 났다. 남다른 글솜씨로 작가를 지망하는 애자(최강희)는 공부도 잘하지만 땡땡이도 잘 치는, 고무공처럼 튀는 아이다. 비만 오면 학교는 나 몰라라 부산 앞바다로 뛰쳐나간다. 출석일수가 모자라 졸업을 할 수 없다는 선생님의 경고에 엄마(김영애) 속만 까맣게 탄다. 애자 역시 저보다 제 오빠에게 극진한 정성을 쏟는 어머니가 야속하기만 하다. 공부도 못하는 제 오빠는 유학까지 보내주면서 유학 가고 싶다고 보채는 자신에겐 되레 역성인 엄마가 미덥기만 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성년이 돼서도 애자는 여전히 엄마 속을 태운다. 시집갈 나이가 지났는데도 좀처럼 시집갈 생각은 없고 작가가 되겠다며 허송세월만 보내는 것 같은 딸래미를 보는 엄마는 속이 탄다.
예나 지금이나 애자는 엄마에게 ‘눈엣가시 같은 년’이다. 하지만 눈엣가시 같아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자식’을 나 몰라라 할 순 없다. 평행선과 같은 거리감을 두고 좀처럼 다가서지 못하는 모녀는 특별한 계기와 함께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여나간다. 서울에 홀로 사는 애자가 잠결에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다 엄마의 앓는 소리를 듣게 된 후, 득달 같이 엄마가 사는 부산으로 내려가게 될 때, 애자의 마음에 침잠(沈潛)해있던 진심이 동요를 일으킨다.
<애자>는 좀처럼 서로의 본심에 접근하지 못하던 모자의 오랜 갈등 속에 잠재돼있던 애틋한 속내를 드러내고 이로써 심금을 울리는 가족 신파다. 서로에게 모진 말을 던지며 뒤돌아 서다가도 다시 서로를 향해 뒤돌아보게 되는 가족의 진심을 비춘다. 모정을 연출하고 죽음으로 방점을 찍는 <애자>는 분명 강력한 파토스를 전달하고 마는 영화다. 비극적 피날레를 예감하게 만드는 중반부부터 페이소스를 축적해나가다 그 끝에 다다라 어김없이 강력한 신파적 에너지를 분출한다. <애자>는 분명 모정과 죽음을 가로지르며 눈물로서 방점을 찍는 영화다. 켜켜이 쌓아나간 감정의 둑을 무너뜨린 뒤 눈물의 방류를 요구한다.
그렇지만 <애자>는 주체할 수 없는 페이소스를 넘쳐내며 관객을 비극적 심상으로 밀어 넣는 최루성 신파와 거리를 둔 작품이다. 애자의 학창시절을 발랄하게 묘사하는 도입부처럼 <애자>는 심심찮게 캐릭터의 개성을 적극 활용한 가족적 코미디를 연출하며 신파를 가늠하기 어려운 생기를 감지하게 만든다. <애자>는 가족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이어 붙인 영화처럼 전후반부의 양상이 다른 작품이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온도차는 신파적 형태로 귀결되는 <애자>의 전반적인 감정이 절제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 동시에 전후반부의 감정적 대비 속에서 결과적인 감정을 더욱 짙게 물들이는 보색적 효과를 낳는다. 물론 때때로 상황에서 지나치게 엇나가는 코미디가 안일하게 동원되어 감정의 수순을 방해하는 경우가 눈에 띄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애자>가 연출하는 웃음과 눈물의 수위는 안정적인 편이다. 무엇보다도 색채가 다른 두 정서의 융화를 통해 결정을 이루는 클라이맥스가 감정적 자극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상황적 이해를 더한다는 점에서도 탁월하다.
<애자>에서 중요한 건 비극의 주체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그 연민을 깨닫는 이의 변화다. 고통을 맞이하는 자에 대한 동정만큼이나 이를 지켜보는 자가 뒤돌아 흘리는 눈물의 심정이 마음을 울린다. 엄마와 원수처럼 지내던 딸이 엄마의 죽음을 직감하고 그 삶을 좀 더 연장하려 할 때, 모녀는 자신의 마음 속에 묵혀둔 진심을 일거에 방출한다. 무엇보다도 결말부에서 죽음을 묘사하는 형태는 <애자>에서 가장 인상적인 면모다. 죽음을 통해 궁극적인 감정적 고양을 이루는 <애자>는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을 통해 비범한 면모를 드러낸다. 감정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과감한 선택을 이행한다. 누군가의 생을 이어나가기 위해 애쓰는 자는 그 삶이 계속되는 동안 끝을 체감할 수 밖에 없다. <애자>는 죽음에서 모든 감정을 방출하기 보다 그 순간을 이겨내고 그 너머의 삶을 비춘다. 엄마의 빈 자리에서 슬픔을 이겨내고 제 삶을 채워나가는 딸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다.
누군가의 자식이자 누군가의 부모가 될 모두에게, 좀 더 범위를 좁히자면 누군가의 딸이자 누군가의 엄마가 될 여자들에게, 엄마란 이름은 쉽게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마음에 없는 말을 던지고, 뒤돌아 후회하는 건 대부분의 부모와 자식 사이를 채우는 관성적인 버릇과 같다. 특히 가족을 위해 헌신하면서도 정작 당신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한국적 모정을 공유하고 있을 이 땅의 대부분은 <애자>와 같이 모성애를 담은 영화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당할 수 밖에 없다. 엄마는 신파다. <애자>는 그런 현실적 감정을 스크린에 옮겨 담는다.
무엇보다도 두 배우의 어울림은 <애자>를 빛내는 가장 큰 수훈이다. 추와 같은 무게를 얹는 김영애와 풍선처럼 분위기를 띄우곤 하는 최강희는 <애자>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룬다. 갈등과 화해로 나아가는 모녀의 감정적 소통은 두 배우의 앙상블을 통해 진심을 확보한다.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감정의 진전 역시 예상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애자>에서 중요한 건 그 뻔한 이야기에 얼마나 진한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캐릭터의 관계변화를 통해 현실성을 얻고 진정성마저 확보하는 <애자>에서 두 배우는 확실하게 제 임무를 수행했다.
방금 홍보사 직원분과 대화하는 걸 듣게 됐는데 예능프로에 출연하셨다는 거 같더군요.
예. <야심만만>. 내가 그런 데도 다 출연하고, 이런 일도 있네요. (웃음) 나이 얘기가 나오길래 나는 몇 년 있으면 연금 나온다 그러니까 다들 넘어가더라고요. (웃음) 사실 저는 쇼크를 줄이기 위해서 계속 스스로 입력시켜요. 곧 60이다, 이렇게.
예능프로에 출연하는 모습은 뵌 적이 없었던 거 같은데요.
처음이에요, 처음. 만약 제가 일기라도 썼다면 일기장에 적어둘 텐데 일기를 안 써서. (웃음)
시사회 무대인사 때 많이 긴장돼 보이시던데요.
너무너무 긴장됐어요. (웃음) 제가 요즘 청바지를 많이 입고 다녀서 굽이 낮은 신발을 많이 신어요. 그런데 오랜만에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걷는데 막 넘어질 거 같더라고요. 그리고 원래 잘 떨어요. 사람 있는 곳에 갈 때 좀 많이 긴장해요. 카메라는 안 무섭지만 사람은 좀 무서워해요. 시사회 무대에 나가는 것도 처음이었고, 그렇게 많은 기자 분들 앞에 서보는 것도 처음이었거든요. 그리고 3년 만에 연기를 하는 거잖아요. 3년 만에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떨렸는데 그 많은 기자 분들 앞에서 시험치고 시험점수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거 같아서 너무 무섭더라고요. “쟤 연기 왜 저래?” 이런 소리 들을까 봐.
선생님 정도의 오랜 경력이면 그런 자리에 서는 것쯤은 대수로운 문제가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본인에겐 떨리는 순간이었나 보네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나 봐요. 그런데 안 그래요. 아이 낳을 때마다 힘든 건 마찬가지에요. 작품도 똑같아요. 그 인물이 나한테 들어올 때까지, 내게 익숙해질 때까진 굉장히 많이 고통스러워요. 다른 욕심은 없어도 이건 있어요. 내 자존심. 김영애 그러면 “그래, 연기 잘 하지.” 이런 칭찬을 듣고 싶어요. 예를 들어서 <애자>에서도, “그래, 엄마는 김영애니까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 이런 칭찬 듣고 싶은 거죠. 적어도 제가 하는 역할만큼은 제가 최고라는 소릴 듣고 싶어요. 그리고 그걸 제 자신도 인정할 수 있어야 되고 남한테도 인정받고 싶죠. 그게 좀 강해요.
홍기선 감독님께서 그러셨죠. <애자>의 어머니 역할은 처음부터 김영애 씨 몫이었다고요.
그건 아니었어요. (웃음) 찍다 보니까 저한테 정들어서 그렇게 마음이 바뀐 거지 처음엔 아니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찍으면서 그러더라고요. “야, 엄마 아니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 그런 거죠. 지금 와서 보니까 김영애가 아니고선 생각이 안 된다는 거죠. 모든 사람들에게 바로 그런 말을 듣고 싶어요. “그래, 김영애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 칭찬을 들어야 비로소 만족할 수 있는 건가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족하긴 쉽지 않죠. 어려워요. 저는 모니터 잘 하지 않아요. 모니터 잘 하지 않는 배우로 알려졌거든요. 모니터 하기 싫어요. 제 연기가 만족스럽지 않으니까. 왜 얼굴이 저렇게 밖에 안돼. 저 정도 깊이 밖에 없어. 자꾸 이렇게 되요. <애자>도 1차 편집본 봤을 때 굉장히 실망했어요. 좀 더 폭넓고 깊이 있는 표현이 나올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까 한심했죠. ‘야, 여태 60여 년을 살아오고서도 너한테 나타나는 게 그것밖에 안되니’ 싶더라고요.
<애자>에서도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많았나 보네요.
그럼요. 만족스러운 부분이 얼마나 되겠어요. 단지 내가 어떻게 했던 지간에 칭찬이 듣고 싶은 거죠. (웃음) 그래도 그게 제 능력이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그 다음은 능력 밖이니까 포기해야죠. 그래서 그렇게 떨리는 거고, 평가 받는다는 게 무서워지는 거에요.
3년 정도 연기를 중단하셨던 공백이 끼치는 영향이 있던가요?
처음에는 집중력이나 순발력이 많이 떨어지고 예전 같지 않아서 굉장히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한달 동안 굉장히 많이 힘들었죠. 눈 혈관도 터지고, 체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원체 힘들었던 시간이기도 했고. 그 감각을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영화적인 시스템이 과거에 왕성하게 활동하시던 때와 많이 달라졌잖아요. 이번 <애자>현장에서도 많은 차이를 느끼셨을 것 같은데요.
요즘 젊은 주연 배우들이 영화를 하고 나면 텔레비전을 많이 기피하죠. 왜 그런지 이해가 갔어요. 일단 영화는 작품이 완전히 나와있는 상태에서 제작되지만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같은 경우는 쪽대본 들고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잖아요. 한국영화가 모든 시스템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한국영화가 하는 영화들마다 손님이 많이 들어서 계속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한 만큼 현장 분위기를 느끼는 것도 오랜만이었을 것 같은데요. 어쩌면 그 새로운 분위기를 통해 신선한 자극을 느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예. 그랬어요. 그래서 행복했고요. 난 우리 감독님을 참 잘 만난 것 같아요. 자칫하면 제가 구닥다리 배우처럼 될 수 있었던 부분을 참 많이 다듬어줬죠. 신인 감독이지만 많은 걸 집어줬어요. 제가 감각을 찾는데 굉장한 도움이 됐죠. 강희처럼 마음이 통할 수 있는 후배를 만나서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던 거 같고요.
최강희 씨처럼 김영애 씨도 젊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이 얼마나 돌이켜지실진 모르겠지만 그런 젊은 배우들을 보면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이켜보는 경우는 없나요?
그런데 환경이 너무 다르니까. 저는 몇 십 년 동안 혼자서 대본보고, 의상 구하고, 현장 가고, 메이크업까지 다 했어요. 그 당시엔 누구나 다 그럴 수 밖에 없었고. 지금은 제작 분위기가 너무 좋아졌잖아요. 나 혼자 옛날 생각이나 한다고 뭐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 세상이 변하면 변하는 대로 세상을 따라가면 되죠. 가끔 과거 얘기하는 분들 많잖아요. 그런데 사실 저는 제 성격 탓이기도 하겠지만 옛날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아요. 지나간 얘기 별로 안 해요. 이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으로 내 인생에 어떤 일들이 있을 건가가 궁금하지,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심지어 전 제 작품을 하나도 소장하고 있지 않아요. 심지어 사진도 별로 정리해놓은 게 없어요. 그런 건 흥미가 생기지 않아요.
1971년에 데뷔한 이후로 지난 38년간,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수많은 족적을 남겨오셨는데요. 특히 7~80년대엔 정말 많은 영화에 출연하셨잖아요. 1년에 4~5편씩 나온 경우도 있고요. 엄청난 다작배우였던 시절이 있습니다.
제가요? 전 기억 잘 못해요. (웃음) 제가 주인공을 무지 많이 하긴 했죠. 그런데 기억나는 건 몇 작품 밖에 없어요. <설국>하고 <겨울로 가는 마차>?
임권택 감독님 작품에도 3편이나 출연하셨죠.
<왕십리>도 했고, 그랬었어요. 그랬네.
고영남 감독님 영화에도 여러 번 출연하셨더군요.
고영남 감독님은 특히 절 예뻐하셨어요. (웃음)
78년도에 개봉된 <절정>으로 영화기자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맞아요. 너무 오래 전 일이지만 그때 영화에서 갈비뼈가 다 드러나게 몸을 있는 대로 웅크렸던 기억이 나네요. 가슴 보이는 게 뭐 그리 부끄럽다고 힘들어했는지 몰라. 사실 제 가슴이 좀 약한 편이거든요. (웃음) 물론 그때는 그런 게 굉장히 큰일이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 외에 좀 야한 영화도 꽤 했었어요. 베드신 있는 거. 그러다 아이를 낳았고 아이가 크면서 비디오샵이 한참 유행했죠. 아이가 2~3살 때, 걔 손을 잡고 만화영화를 빌리러 다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얘가 커서 엄마가 야하게 나오는 그런 영화를 보면 어떻게 하지?’ 사실 그런 생각 때문에 그때부터 갑자기 영화를 끊은 거에요.
아무래도 어머니 입장에서는 걱정이 될만한 일이겠죠.
지금 생각해보면 별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데 말이에요. 작품에 대한 자신만 있다면 대단한 일은 아니죠. 이건 예술에 속하는 분야고, 엄마 일이라고, 이렇게 설명하면 되는데 그때는 거기까지 생각이 갈 수 없었죠. 하여튼 아이가 이 영화를 보면 안되겠단 생각만 들었어요. (웃음)
세월을 보내고 나니 지난 시절에 느꼈던 어려움이 작게 느껴질 때가 있으시나 봅니다.
지금은 이제 그렇게 대단한 일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에요. 모르겠어요. 폭풍을 헤치고 나오면 웬만한 작은 파도는 무섭지 않잖아요.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사실 작년 동안 개인적인 신변에 큰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경험들도 힘들었던 당시를 지나 지금에 이르게 되니 다르게 보이는 지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전 작품을 할 때마다 힘들다고 느끼는 건 매번 똑같아요. 그리고 굳이 연기를 떠나서라도 사람이 살아가며 겪는 어려움이나 힘든 시간들을 헤치고 나오면 그게 다 나를 키우는, 나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 내 폭을 넓혀주는 거름이 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해요. 젊어 고생은 돈으로 사서라도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 믿음이 있어요. 힘든 결혼을 해서 오랜 시간 힘들게 살았고, 또 한번의 결혼을 했죠. 그리고 최근 2년 동안 두 번의 큰 일을 겪으면서 정말 힘들었어요. 지옥 같았죠. 지옥이 다른 게 아니고 이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넘겼지만 그런 것들이 지금 와서 보면 좀 더 나를 겸손하게 하고, 더 너그럽게 만든 게 아닌가 싶어요. 나를 둥글게 만들고, 또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이 더욱 감사하고 행복하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라는.
아까 말씀하신 대로 90년대 이후로는 영화 출연 편수가 현저하게 급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영화는 안 한다고 소문이 났대요. 사실 그건 아니거든요. 단지 제가 너무 바빠서 영화까지 눈을 돌리기엔 시간이 없었을 뿐이에요.
영화제작 환경변화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예전 영화 풍토는 제작 시스템을 비롯해서 모든 것들이 지금하고 많이 달랐죠.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제 성격하고도 잘 안 맞았나 봐요. 제가 굉장히 낯을 가려서 사람을 잘 못 사귀거든요. 40년 가까이 이 일을 하면서도 이쪽에서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은 별로 없어요. 5사람도 안 되니까요. 제가 얼마나 폐쇄적인지 아시겠죠? 그래서 만났다가 몇 달 있다 헤어지고, 또 새로운 사람 만나고, 이런 환경에 적응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영화를 멀리 하게 됐고 텔레비전을 바쁘게 하게 되니까 영화까지 넘볼 여유가 없더라고요.
연기적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배우라는 일도 사람과 부딪히는 일이니까요. 그 환경에 익숙하지 않으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그만큼 그걸 극복하는 게 중요했을 것 같고요.
저는 드라마도 하는 사람하고만 많이 해왔어요. 제가 좀 틀에 매이거나 구속당하기 싫어하는 편이기도 하고 굉장히 폐쇄적이라 사람을 사귀기 어렵거든요. 제가 상처를 워낙 많이 받기 때문에 남한테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아예 사람 만날 생각을 안 해요. 그러니까 카메라 렌즈 안에선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연기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실제 자신의 모습과 차이를 느낀 적이 있나요?
그런데 모든 인물은 김영애에서 출발해요. 다른 배우들도 그렇겠지만 제가 하는 모든 역할엔 제가 들어있어요. 다만 그게 얼마만큼의 부분을 차지하느냐의 문제겠죠. 그래서 배우들마다의 색깔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고두심 씨가 임백무를 연기했다면 저와 또 다르게 표현됐을 거에요. 김자옥 씨가 했으면 또 달랐을 거고요.
일단 <애자>를 보는 어떤 관객이라도 자식으로써 어머니를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른이 된 후에도 엄마 앞에서는 어리광을 부리게 되는 것 같아요. 결국 엄마 앞에서는 다 애인 거죠. (웃음)
누구나 다 누군가의 자식이고 여자라면 누군가의 딸이거나 엄마니까요. 그리고 우리 감독님이 시나리오부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부분들을 예리하게 잘 집어냈어요. 사실 저는 VIP시사회 때 영화를 처음 봤거든요. 그런데 제대로 볼 수가 없었어요. 편집순서를 바꿨다던지, 속으로 ‘어머, 왜 저건 잘려나갔지? 원래 다음 대사는 뭔데’ 이런 생각만 하다 보니 몰입할 수 없었죠. (웃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감독님이 누구보다 예뻤어요. 사랑스럽고. (웃음)
최종 편집본은 그때 처음으로 보신 건가 보죠?
예. 그 전엔 편집 방향도 정해지지 않았을 때 1차 편집된 미완성본을 40인치 모니터로 봤죠. 기술 시사는 전날 새벽 2시에 했대요. 그날 오전부터 계속 스케줄이 있었으니까 그건 볼 수도 없었죠.
아무래도 시나리오가 만족스러웠으니까 영화를 선택하신 거겠죠?
시나리오를 받았을 땐 제가 굉장히 힘들었던 시간이었어요. 그때는 그걸 벗어나지 못했었죠. 이혼 사실도 알려지지 않았을 때 선뜻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그저 그 시나리오가 너무 재미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거죠.
어쩌면 어머니로서의 공감대도 작품 선택에 일조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너무나 잘 알 수 있고, 그만큼 쉽지만 내 이야기 같았어요. 제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작품성도 있어야 하지만 재미도 있는 이야기에요. 이 시나리오는 그 두 가지 면에서 모두 저한테 괜찮다고 생각하게 해줬어요. 이걸 제대로 표현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좋은 영화가 나올 거라 판단했죠.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라고 느꼈던 장면이 있습니다. 부산에 내려온 애자와 어머니가 TV를 보고 같이 앉아있다가 티격태격하게 되고 결국 애자가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가버리잖아요. 그때 짐 싸서 방을 나가는 애자에게 어머니가 한마디 하죠. “김치 가져가, 이년아!” (웃음)
그게 우리가 너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잖아요. 저희 어머니도 그러셨고. 그런데 어떻게 남자가 그런 걸 쓸 수 있었나 몰라요.
남자라서 모녀간의 정에 대해 완전히 이해한다 말할 수 없지만 <애자>는 모녀 간의 정서를 잘 표현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일 가깝고 닮아있으면서도 원수 같은 관계죠. (웃음)
아무래도 아들보단 딸이 어머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나이 들면 딸하고 엄마가 더 친해져요. 동질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실 작품 속에서 어머니라는 캐릭터를 연기하시기 이전에 이미 실생활에서 어머니로서 살아가고 계시죠. 그래서 아무래도 어머니로서 느끼는 감정이 캐릭터의 감정으로 이입되는 느낌을 얻은 경우는 없으셨을지 궁금하네요.
저는 연기할 때 그렇지 않아요. 오직 그 상황만 생각하죠. 지금까지도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에요. 제 개인적인 감정을 연기에 담지 않아요. 단지 김영애가 표현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죠. 물론 촬영하는 기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우리 엄마한테 나는 이렇게 했다고, 강희하고 수다를 참 많이 떨었죠. 마음은 그런데 실제론 잘 안 된다고. 강희도 저한테 하는 것처럼만 하면 자기 엄마도 좋아하실 거래요. 하지만 잘 못하잖아요. 강희뿐만 아니라 다 그래요. 그런 얘기는 많이 했죠. 하지만 연기할 때 저는 오직 최영희로 돌아가서 그것만 생각해요. 연기하는 순간엔 그런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없어요.
영화 외적인 감정은 철저히 배제한 상태에서 연기에 몰입한다는 말씀 같습니다. 그만큼 쉬운 일은 아닐 거란 생각도 드는데요.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투영될 수 있는 감정을 가려낸다는 건 그만큼 냉철한 감각이 요구되는 일일 테니까요.
제가 다른 사람 앞에서 제 실제 이미지보다 훨씬 단단해 보이거나 강해 보이는 건 제가 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제가 연기를 제쳐두고 비로소 김영애로 돌아가는 건 오직 저 혼자 있을 때니까요. 정말 힘든 시간에 새벽 2~3시쯤 잠도 못 자고 서럽게 울었던 적이 몇 번 있었어요.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혼자 있을 때는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해요. 그때 비로소 나로 돌아온 거죠. 그 외에는 제 속을 잘 안 들어내고 잘 안 들켜요. 그러니까 생각보다 단단해 보이나 봐요. 그리고 제가 좀 이지적인 이미지로 보인다면서요. (웃음) 사실 전 자식을 걱정시키는 철없는 엄마 쪽에 가까워요. 많이 사랑 받길 원하고, 보호받길 원하고, 굉장히 여리고 상처도 잘 받죠. 그런 저를 잘 내놓지도 않고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기 어려운 편이신가 봐요.
예. 그래서 어리광도 잘 안 부리죠.
갑자기 <황진이>에서 연기하셨던 임백무가 생각나네요. 임백무는 겉으로 독하고 강한 이미지의 캐릭터지만 실은 아픈 사연을 홀로 감당해내는 처연한 캐릭터니까요.
상처가 쌓인, 말하자면 딱지가 두껍게 앉은 사람이잖아요. 예술에 대한 고집도 강하죠, 일에 있어서 완벽함을 추구한다는 점은 저와 많이 닮았어요. 사실 저는 그 인물이 참 싫었어요. 연기하면서 정말 지긋지긋하다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우리 아들이 그 여자가 엄마하고 제일 많이 닮았다고 해서 좀 놀랐죠. 저는 제가 완벽해지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한테도 그걸 요구해요. 예를 들자면 우리 아들한테도 그래요. 그렇게 하기를 원해요. 그렇게 여러 가지 면을 가지고 있는 거 같아요. 제가 사람을 많이 사귀지 못하는 것도 제가 상처받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거에요. 그 상처가 굉장히 오래가고 깊게 가니까요.
1971년에 MBC공채 3기 탤런트로 연기자라는 이름을 얻으셨고, 1973년에 <수사반장>으로 데뷔했습니다. 그런데 연기자라는 직업에 흥미를 갖게 된 경위가 궁금하네요.
(웃음)
?
아니, 갑자기 좀 어이없는 생각이 나서요. 저는 공부가 하기 싫어서 상업학교 원서를 냈고 부산여상을 갔어요. 원래 아버지께선 저한테 사범대학에 가서 선생님이 되라고 하셨죠. 학교 다닐 때 성적은 잘 나왔거든요. 국민학교 때부터 줄곧. 저는 한 2~3일 반짝 공부하면 성적은 상위권에 속할 정도로 잘 나오는 편이었거든요. 10등 밖으로 떨어져 본적은 별로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얼마나 당돌하면 부모 몰래 상업학교 원서를 냈겠어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가라고 하셔서 집에서 쫓겨났고 집에 들어갈 수 없어서 한달 간 이모 집에 있었죠. 고등학교 졸업하고 1년 동안 부산 TBC총무부에서 직장생활을 했는데 너무 재미없고 힘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대학교를 가야겠다 싶어서 재수하려고 하다가 배우가 된 거에요. 탤런트를 뽑는다면서 친척언니가 너 예쁘장하게 생겼으니까 배우 한번 해보라고 원서를 사 오셨고 지원하게 됐는데 정말 돼버렸죠. (웃음) 전 그때까지도 그저 월급 주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연만 들어보면 애자가 생각나는데요.
좀 대책 없었죠. 고집 세고, 멋대로고, 적당히 영리하고. 사실 제가 이마가 넓어서 콤플렉스가 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가 무서워서 항상 단발머리로 이마 싹 올려서 머리에 핀 꽂고 다니고, 그런 부분에서는 어긋나본 적이 없었지만 마음 속은 제 맘대로였죠. 이미 그 때부터 결혼 안하고 애만 낳아서 살면 어떨까 생각도 해보고. (웃음) 전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장래 희망하면, 현모양처. (웃음) 그러면서도 사춘기 때 아버지가 너무 싫어서 야단치면 눈 똑바로 뜨고 앉아서 대들고, 맞아도 도망가지도 않고. 그래서 엄마, 할머니 속을 엄청 썩혔죠. 부모 입장에서 보면 정말 다루기 힘든 아이 있잖아요. 제가 좀 그랬어요.
아버지께서 엄하셨던 만큼 충돌도 잦았겠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꽉 막힌 분이셨어요. 학교 다니기 전까지 저는 소설책만 너무 좋아하고 천자문은 안 읽는다고 종아리를 맞고 다녔었죠. 한글을 떼고 나서부터 동화책을 그렇게 좋아했고요. 옛날엔 집에 책이란 게 없었어요. 제가 51년생인데 50년대에 전쟁 끝나고 무슨 책이 있었겠어요. 문방구에 몇 권 걸려있는 게 다였죠. 그래서 학교 끝나면 맨날 문방구 앞에 가서 조금한 게 턱 치켜들고 그걸 보고 있었어요. 주인 아저씨가 불쌍하게 보셨는지 그냥 올라와서 읽으라고 할 때까지. 그럼 쪼그리고 앉아서 그걸 보는 거에요. 그 정도로 책을 좋아했어요. 아버지께서 항상 우리를 6시 전에 깨우시고 마당에서 보건체조를 시켰어요. 그리고 나서 방에 들어가서 몰래 소설책을 봤죠. 타고 난 것도 있겠지만 어쩌면 저를 배우로 만든 건 제가 20년 동안 읽었던 책이었던 것 같아요. 거의 소설만 읽었어요. 이제 지금에 와서 알게 된 거지만 소설을 많이 읽으면 좀 현실감이 떨어지게 되는 것 같아요. 배우도 월급 주는 직원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웃음)
아버지께서도 부산 출생이셨나요?
예. 저도 스무 살까진 부산에서 살았고요.
부산 남자 분들이 좀 무뚝뚝하잖아요.
무뚝뚝하고 굉장히 권위적이에요.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한번도, “너 이거 한번 먹어라” 소리해보신 적 없어요. 원체 외동아들로 귀하게 자라서 받을 줄만 알았지, 주는 방법을 모르기도 했고. 어쩌면 기질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전 우리 엄마가 불행하게 살다 돌아가셨다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어머니에 대한 뒤늦은 연민이 깊게 자리잡았나 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엄마한테 참 못되게 굴었어요. 나이 들면서 엄마를 많이 걱정하고 제가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말은 늘 퉁명스럽고. 어쩌다 전화오면, “(격양된 어조로) 나 바빠! 빨리 얘기해!” 이랬으니까. 그래서 우리 엄마가 사근사근한 제 친구들을 굉장히 부러워했어요. 저도 제 친구 엄마들한텐 사근사근했죠. 문제는 우리 엄마한테 못했던 거죠.
그런데 그렇게 엄한 아버지 입장에서는 배우를 한다는 것 역시 용납될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말도 안 됐죠! 그런데 저희 고모님께서 저를 아버지께 데려가셔서 말씀해주셨어요.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까 한번 맡겨보시라고, 그랬어요.
친척 분들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군요.
그러게요.
그런데 소설을 좋아하셨다면 혹시 작가를 지망한 적은 없었을까 싶은데요.
그렇진 않았지만 학교에서 몇 번 상은 받았어요. 글짓기 같은 데서.
정말 애자랑 닮은 점이 너무 많은데요. (웃음)
다만 저는 애자처럼 술 먹고 다니거나 그런 건 없었죠. 우리 아버지는 학교 끝난 지 1시간 안에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막 학교에 전화하고 그랬어요. 도서관에서 책 봤다 해도 집에서 공부하면 되지 왜 도서관에서 책을 보냐고 뭐라고 하시고. 전 정말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어쩌다 남학생이 쫓아오면 네가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녔으면 그렇게 틈을 봐서 쫓아오냐고, 저만 욕먹고 맞고 그러다 보니까 우리 아버지가 너무너무 싫었어요.
예쁜 게 죄죠. (웃음) 여전히 젊은 시절의 미모가 곱게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친척 분이 배우를 권했던 것도 그 미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옛날에는 연기력 같은 거 논하지 않고 얼굴이 좀 예쁘장하면 배우 하라는 말 많이 했어요. 어려서부터 전 아이들한테 예쁘단 소리 잘 안 해요. 제가 스스로 예쁘다고 하면 낯 두꺼운 얘기가 되겠지만, (웃음) 사실 제가 그런 소릴 정말 많이 듣고 자랐거든요.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그런 소리를 듣고 자라서 그런지 자만심 같은 게 생기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전 아이들한테 그런 얘기 잘 안 해요.
정말 막연하게 배우가 된 셈인데 막상 연기를 시작하게 된 이후에 현장에서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궁금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학교 다닐 때 영화 본 거라곤 순전히 딱 한 편, <푸른 하늘 은하수>(1986)밖에 없었는데 제가 배우를 하겠다니 얼마나 황당해요. 그런데 저는 장녀라서 책임감이 강해요. 공부를 그렇게 하기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어느 정도 상위권 수준으로 점수를 올려놨던 건 아버지가 무서워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한 탓도 있었죠. 그것도 제가 가진 어떤 책임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일단 뭔지도 모르고 월급 주는 일이라 생각해서 배우가 됐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도로 보따리 싸서 부산에 내려가야 한다면 창피한 일이잖아요. 어떻게든 여기서 붙어있어야 되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했죠. 엑스트라를 하더라도 말이에요. 사실 배우가 뭔지 알고 내가 정말 이걸 해야겠다 했던 건 연기를 시작한지 5년이 지난 뒤였어요. 그때서야 비로소 배우가 어떤 건지 알기 시작한 거죠.
연기를 시작한 이후로 5년 뒤에서야 연기자로서 자각했다고 하셨죠.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냥 하다 보니까 이게 제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일이 재미있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운명을 믿어요. 팔자 같은 걸 믿거든요. 사람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져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단지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죠. 일단 돈은 행복의 척도와 무관하다고 생각해요. 하루 세끼 라면만 먹으면서도 ‘그래. 나는 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럴 수 있고, ‘나는 왜 라면 밖에 못 먹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행복의 척도는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타고난 운명을 믿어요. 아마 태어날 때 제 운명이 이렇게 정해져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죠.
배우가 된 과정도 운명적이란 말에 어울리네요. (웃음)
너무 어이없죠? 그래서 사실 제가 이런 얘기 잘 하지 않아요. (웃음) 왜냐면 정말 죽기 살기로 배우가 되려는 사람에겐 모욕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김영애 씨가 배우로 발탁된 건 김영애 씨의 가능성을 본 사람이 분명 있었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드는데요.
1970년 10월 달에 입사해서 1971년부터 작품을 했으니까 스무 살에 시험을 봤고 스물 한 살부터 연기를 시작한 거죠. 그때는 로션도 바르지 않을 때였죠. 나중에 들었지만 그때 전 사투리도 썼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뽑힌 건 카메라 페이스가 너무 신선했기 때문이래요.
젊은 시절엔 날카롭고 예민해 보이는 인상이라 캐릭터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살도 붙었고 늙어서 얼굴이 쳐지거나 주름이 져서 그 날카로움이 좀 깎였지만 예전엔 더 심했죠. 그래서 예전엔 제 얼굴이 참 싫었어요. 연기를 하면서 충분히 얼굴로 감정이 표현됐을 거라 생각하는데 막상 보면 너무 날카롭고 뾰족해서 만들어 놓은 얼굴 같기만 한 거에요. 그런 느낌이 너무 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결국 그 얼굴을 마음에 들어 했던 분들이 김영애 씨를 자신의 작품에 선택했고, 계속적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90년도까지 정말 많은 영화를 찍었던 것일 테고요.
예전에는 보름 만에 만든 영화도 있었어요. <비련의 홍살문>(1979)같은 영화가 그랬죠. 당시엔 스크린 쿼터가 있어서 우수한 국내영화를 하나 만들면 외화를 수입할 수 있게 허가해줬거든요. 그래서 예산도 많이 들이지 않고 보름 만에 찍고 그랬죠. 제가 3박4일을 한숨도 안자고 영화를 찍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은 밤을 셌던 기간이에요. 저는 굉장히 예민해서 어릴 때부터 방이 바뀌면 잠도 못 잤어요. 낯설면 화장실에 못 가니까 아무 것도 안 먹고 귤 통조림 같은 거나 한두 개 먹고 견뎠죠. 기억나는 게, 한 겨울 산속에서 3박4일간 잠도 안 자고 촬영하다가 밥 먹으러 내려갈 시간이 없어서 밥을 날랐던 때가 있었어요. 구르마 같은 데 앉아서 다 식은 얼음 같은 밥을 먹는데 사람 것인지, 짐승 것인지, 무더기로 쌓인 똥이 아래에 보이는 거에요. 그런데 제가 그걸 보면서도 밥을 먹고 있더라고요. 그냥 ‘저게 여기 있구나’ 그러면서 먹었어요. 저한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잠을 그렇게 3일 이상 못 자니까 그냥 말갛게 된 느낌? 그나마 그때는 젊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몰라요.
<달려라 울엄마>의 방영이 종료되고 연기를 그만 두겠다 선언하셨던 적이 있었죠. 아무래도 사업적 이유가 일차적이었겠지만 젊었을 때 그렇게 힘들게 매진했기 때문에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아닐까요?
그건 아니에요. 그때 제가 연기를 중단한다고 그랬던 건 두 가지 이유였죠. 첫째는 두 가지 일을 병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어요. 두 가지 중 한 가지만 선택해야 했죠. 연기는 저 혼자 그만 두면 돼요. 하지만 그 때 이미 회사직원은 7~80명 정도나 있었던 때였고 김영애 보고 ‘참토원’에 들어온 7~80명의 직원을 제쳐두고 난 이제 힘드니까 그만하겠다 할 수 없었어요. 그때는 그게 너무 힘들고 싫었지만 처음으로 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대한 책임감이나 사명감을 느껴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기도 했고요. 회사가 그렇게 커진 만큼 회사 일에 매달리다 보니까 연기를 제대로 할 수도 없었죠. 제가 제일 싫어하던 짓, 연기를 부업으로 삼는 짓거리를 어느 날부턴가 내가 하고 있더라고요. 게다가 나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스케줄에 피해를 받게 되고, 마음은 콩밭에 놔두고 몸만 와서 대본보고 있고. ‘똥배우’라는 말이 있어요. 우리가 하는 말은 아니고 제작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인데, 어떤 배우를 욕하거나 흉할 때 쓰는 말이죠. 그런데 정말 이러다간 제가 그렇게 불리겠다 싶었죠. ‘쟤 왜 저래’ 소리 들을 거 같더라고요. 또 한 가지는 그때 남편이 제가 배우로 활동하는 걸 너무 싫어했어요. 그래서 연기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어요. 계속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죠.
20대 초반부터 주연급 여배우로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자연스레 어머니 역할을 계속 맡고 계십니다. 어쩌면 그 사이에 스스로가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 때가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상실감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그걸 극복해야 하는 시절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많은 걸 포기해야 되는 일이에요. 그냥 주어진 걸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일이죠. 그러지 못하면 상처받아요. 그게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 우긴다고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결국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리고 기다려야 해요. 그래도 전 운이 좋았던 게 그냥 누구 엄마에 그치지 않고 돋보이는 역할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파도>나, <형제의 강>, <야망의 전설>같이, 누구의 엄마에 그치지 않고 제 목소리를 많이 낸 배우에요. <황진이>도 그렇고, <달려라 울엄마>도 좋았죠.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노력도 많이 했고, 한편으로 감사하죠.
지난 38년 동안 배우로 살았습니다. 여전히 배우로서 얻고자 하는 욕심이 남았나요?
한 가지. 어떤 작품에서건 ‘아, 정말 좋은 배우다’, ‘이건 딱 김영애다’, ‘김영애만이 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듣는 것. 단지 그거에요. 어떤 배역을 하고 싶다는 욕심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