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으로 한걸음 들어갔다. 그러나 돌아 나와야 할 때 그 길은 끝이 없는 길이 돼있었다.' 우민(송승헌)의 독백과 함께 미끄러져 나가는 <숙명>은 시작부터 파국을 예감하게 만든다. 돌아나올 수 없는 어둠으로 들어간 수컷들의 이야기, 이쯤 되면 우리가 종종 느와르라고 정의하는 장르적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숙명>은 의리와 우정이란 남자들의 비범한 가오를 알량한 허세로 전복시키는 느와르의 세계관을 선포하며 말문을 연다.
전사를 과감히 중략한 채 한 차례의 액션 시퀀스로부터 튕겨져 나가듯 시작되는 <숙명>은 전반부에 이미 관계의 엇갈림을 드러내며 갈 길을 명확히 둔다. 배신과 복수의 상관성은 <숙명>이 필연적으로 몸을 내던질 숙명적인 마찰이다. 조폭성이란 껍데기를 뒤집어 쓴 의리라는 집합의 원소로서 남성성의 교열을 맞춰나가는 수컷들은 피비린내를 동반한 배신의 필터를 거쳐 파국의 내리막길로 뒤엉켜 구른다. <파이란> 등과 같은 작품의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연출하기도 했던 김해곤 감독은 그의 지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숙명>에서도 촌철살인의 대사를 통해 진창 같은 영화적 현실을 환기시킨다.
빠르게 돌진하던 초반부와 달리 <숙명>은 시간의 공백을 두고 다시 시작되는 사연을 통해 이야기의 리듬을 한차례 느슨하게 조율한다. 배신으로 인해 파국을 맞이한 얄궂은 의리는 돌아온 탕아로 인해 피비린내 나는 복수로 이어질 법한데 <숙명>은 그로부터 잠시 숨을 돌린다. 단순한 복수 신화로 대책 없이 승천하기 보단 현실적인 국면으로 천착한 드라마적 선을 살리려는 것인지 영화는 혈기를 누르고 흩어진 관계의 복원에 힘쓰는 우민의 고군분투를 조명한다. 물론 그 중간에 우민과 대립선에 선 철중(권상우)과의 마찰이 삽입되고 약물 중독에 빠진 도완(김인권)은 인물들의 심리적 혼란을 야기시킨다. 그리고 우민과 과거 연인 관계였던 은영(박한별)의 사연이 주변을 맴돌며 속내를 알 수 없는 영환(지성)이 전반적인 관계를 유일하게 오간다.
중첩되고 혼밀한 캐릭터의 상관성을 이루는 <숙명>은 개별적인 캐릭터의 사연을 이야기에 엮어내려다 오히려 본래 이야기의 선을 지워버린다. <숙명>에는 분명 일관된 이야기의 선이 있으나 군웅할거하듯 제 각각의 개성을 드러내려는 캐릭터들은 중구난방하듯 난립하여 이야기를 부질없이 헤매게 만든다. 물론 애초에 <숙명>은 차라리 캐릭터 영화였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사연의 밑바닥을 드러내지 못해도 적당한 유추가 가능할 정도로 가공된 캐릭터들은 이를 반증한다. 하지만 마치 제 목소리를 내는 캐릭터들의 사연은 비중에 따른 목소리 차이만이 있을 뿐, 저마다 딴소리를 내다가 일관된 이야기의 밀도를 훼손한다. 장르도 있고, 드라마도 있고, 캐릭터도 있지만 <숙명>은 이를 녹여낼 발화점을 찾지 못하고 불씨를 찾아 헤맨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캐릭터가 지닌 사연은 좀처럼 간극을 좁히지 못하다 감춰둔 필살기로 승부를 끝내듯 캐릭터의 이면에 감춰둔 비수 같은 반전을 통해 비극적 결말을 내던지곤 황급히 상황을 종식시켜버린다.
<숙명>은 불균형한 영화다. 마치 발화점이 다른 연료들을 연소시키기 위해서 무리하듯 온도를 높인 것만 같다. 물론 캐릭터를 뒤집어 쓴 배우들은 모두 다 하나같이 안간힘을 다하곤 있다. 그러나 원래 타고난 이미지에 갇혀서 외모를 전시하는 수순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누구의 캐릭터와 전체적인 극의 무게감 안에서 홀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듯한 기이한 캐릭터로 정리된 누구의 캐릭터를 보고 있자면 <숙명>의 가장 큰 적은 캐스팅이 만들어낸 배우와 캐릭터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회의감이 든다. 그렇다고 배우의 연기력을 탓하기엔 마녀사냥 같고, 감독의 연출력을 꼬집기엔 부적절해 보인다. 이는 전체적인 조율의 문제다. 송승헌과 권상우, 그리고 우정출연이라는 형식으로 끼워 맞춘 지성까지, 꽃미남들을 비열한 거리로 내몬 <숙명>은 적어도 그들에게 진정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거리에서 그들이 소모될 수 밖에 없는 설득력 있는 인상을 부여했어야 했다. 하지만 <숙명>은 스크린을 빛나는 외모의 한류스타를 전시한 쇼윈도처럼 행세하고 있다. 그 와중에도 캐릭터의 날을 세우는 김인권은 산만하게 매장된 캐릭터의 전시관에서 연기적 구색을 맞추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허망하게 소모된다.
<숙명>이 의리를 참을 수 없는 저열함으로 몰락시키는 건 수컷들의 본능적인 책임감에서 비롯된 성공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숙명>은 남성성의 신화처럼 호명되곤 하던 의리의 저열함을 한시적으로 드러낸다. 하나같이 가족이라는 자신들의 원천적 기반 앞에서 약해지거나 소신을 굽히는 남성들은 자신의 울타리를 지키고자 하는 본능 앞에서 강인해짐과 동시에 비굴해진다. 철중이 친구들을 배신했던 것도, 우민이 복수라는 날을 세우기보단 삶을 바라보는 것도, 하나같이 그 귀속적 본능을 모른 척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느와르라는 장르적 감수성에도 부합할 수 있는 내면적 가능성이 <숙명>에 분명히 잠재되어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마저도 <숙명>은 소품처럼 활용한다. 자신의 울타리를 지키고자 하는 남성의 막중한 본능적 책임감보다도 의리를 앞세운 지독한 오지랖을 확인시키는 <숙명>은 결국 자신의 본심이 무엇인지도 헤아리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를 폼생폼사의 소모품으로 전락시킨다.
(무비스트)
전사를 과감히 중략한 채 한 차례의 액션 시퀀스로부터 튕겨져 나가듯 시작되는 <숙명>은 전반부에 이미 관계의 엇갈림을 드러내며 갈 길을 명확히 둔다. 배신과 복수의 상관성은 <숙명>이 필연적으로 몸을 내던질 숙명적인 마찰이다. 조폭성이란 껍데기를 뒤집어 쓴 의리라는 집합의 원소로서 남성성의 교열을 맞춰나가는 수컷들은 피비린내를 동반한 배신의 필터를 거쳐 파국의 내리막길로 뒤엉켜 구른다. <파이란> 등과 같은 작품의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연출하기도 했던 김해곤 감독은 그의 지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숙명>에서도 촌철살인의 대사를 통해 진창 같은 영화적 현실을 환기시킨다.
빠르게 돌진하던 초반부와 달리 <숙명>은 시간의 공백을 두고 다시 시작되는 사연을 통해 이야기의 리듬을 한차례 느슨하게 조율한다. 배신으로 인해 파국을 맞이한 얄궂은 의리는 돌아온 탕아로 인해 피비린내 나는 복수로 이어질 법한데 <숙명>은 그로부터 잠시 숨을 돌린다. 단순한 복수 신화로 대책 없이 승천하기 보단 현실적인 국면으로 천착한 드라마적 선을 살리려는 것인지 영화는 혈기를 누르고 흩어진 관계의 복원에 힘쓰는 우민의 고군분투를 조명한다. 물론 그 중간에 우민과 대립선에 선 철중(권상우)과의 마찰이 삽입되고 약물 중독에 빠진 도완(김인권)은 인물들의 심리적 혼란을 야기시킨다. 그리고 우민과 과거 연인 관계였던 은영(박한별)의 사연이 주변을 맴돌며 속내를 알 수 없는 영환(지성)이 전반적인 관계를 유일하게 오간다.
중첩되고 혼밀한 캐릭터의 상관성을 이루는 <숙명>은 개별적인 캐릭터의 사연을 이야기에 엮어내려다 오히려 본래 이야기의 선을 지워버린다. <숙명>에는 분명 일관된 이야기의 선이 있으나 군웅할거하듯 제 각각의 개성을 드러내려는 캐릭터들은 중구난방하듯 난립하여 이야기를 부질없이 헤매게 만든다. 물론 애초에 <숙명>은 차라리 캐릭터 영화였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사연의 밑바닥을 드러내지 못해도 적당한 유추가 가능할 정도로 가공된 캐릭터들은 이를 반증한다. 하지만 마치 제 목소리를 내는 캐릭터들의 사연은 비중에 따른 목소리 차이만이 있을 뿐, 저마다 딴소리를 내다가 일관된 이야기의 밀도를 훼손한다. 장르도 있고, 드라마도 있고, 캐릭터도 있지만 <숙명>은 이를 녹여낼 발화점을 찾지 못하고 불씨를 찾아 헤맨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캐릭터가 지닌 사연은 좀처럼 간극을 좁히지 못하다 감춰둔 필살기로 승부를 끝내듯 캐릭터의 이면에 감춰둔 비수 같은 반전을 통해 비극적 결말을 내던지곤 황급히 상황을 종식시켜버린다.
<숙명>은 불균형한 영화다. 마치 발화점이 다른 연료들을 연소시키기 위해서 무리하듯 온도를 높인 것만 같다. 물론 캐릭터를 뒤집어 쓴 배우들은 모두 다 하나같이 안간힘을 다하곤 있다. 그러나 원래 타고난 이미지에 갇혀서 외모를 전시하는 수순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누구의 캐릭터와 전체적인 극의 무게감 안에서 홀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듯한 기이한 캐릭터로 정리된 누구의 캐릭터를 보고 있자면 <숙명>의 가장 큰 적은 캐스팅이 만들어낸 배우와 캐릭터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회의감이 든다. 그렇다고 배우의 연기력을 탓하기엔 마녀사냥 같고, 감독의 연출력을 꼬집기엔 부적절해 보인다. 이는 전체적인 조율의 문제다. 송승헌과 권상우, 그리고 우정출연이라는 형식으로 끼워 맞춘 지성까지, 꽃미남들을 비열한 거리로 내몬 <숙명>은 적어도 그들에게 진정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거리에서 그들이 소모될 수 밖에 없는 설득력 있는 인상을 부여했어야 했다. 하지만 <숙명>은 스크린을 빛나는 외모의 한류스타를 전시한 쇼윈도처럼 행세하고 있다. 그 와중에도 캐릭터의 날을 세우는 김인권은 산만하게 매장된 캐릭터의 전시관에서 연기적 구색을 맞추기 위한 장치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허망하게 소모된다.
<숙명>이 의리를 참을 수 없는 저열함으로 몰락시키는 건 수컷들의 본능적인 책임감에서 비롯된 성공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숙명>은 남성성의 신화처럼 호명되곤 하던 의리의 저열함을 한시적으로 드러낸다. 하나같이 가족이라는 자신들의 원천적 기반 앞에서 약해지거나 소신을 굽히는 남성들은 자신의 울타리를 지키고자 하는 본능 앞에서 강인해짐과 동시에 비굴해진다. 철중이 친구들을 배신했던 것도, 우민이 복수라는 날을 세우기보단 삶을 바라보는 것도, 하나같이 그 귀속적 본능을 모른 척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느와르라는 장르적 감수성에도 부합할 수 있는 내면적 가능성이 <숙명>에 분명히 잠재되어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마저도 <숙명>은 소품처럼 활용한다. 자신의 울타리를 지키고자 하는 남성의 막중한 본능적 책임감보다도 의리를 앞세운 지독한 오지랖을 확인시키는 <숙명>은 결국 자신의 본심이 무엇인지도 헤아리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를 폼생폼사의 소모품으로 전락시킨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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