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혜성처럼 등장한 캐리 멀리건은 일찍부터 배우를 꿈꾸고 있었다. 한때 조바심을 냈던 것도 그만큼 열정이 뜨거웠던 탓이다. 그리고 이제 때가 왔다. 꽃이 피어 오르듯, 재능이 만개한다.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화두는 2009년 작인 <아바타>와 <허트 로커>가 벌이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배우 관련 부문만큼은 두 영화의 세력 다툼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특히 만년 여우주연상 수상 후보인 메릴 스트립과 헬렌 미렌을 제치고 오스카 트로피를 차지한 산드라 블록은 수많은 말을 몰고 다녔다. 그리고 시상식 이전부터 ‘미친 존재감’을 자랑하던 배우가 있었다. “캐리 멀리건, 스타가 탄생했다.” 첫 주연작 <언 애듀케이션>(2009)으로 생애 첫 아카데미 노미네이트를 얻어낸 캐리 멀리건은 <타임>매거진의 헤드라인처럼 놀라운 발견이었다.
1985년생, 그러니까 이제 20대 중반을 통과한 멀리건의 이력이 시작된 것도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오만과 편견>(2005)에서 키티 베넷 역으로 스크린에 데뷔할 당시만 해도 멀리건은 딱히 대중의 눈길을 끄는 존재는 아니었다. <언 애듀케이션>을 연출한 론 쉐르픽의 말처럼, “그와 같은 속도로 대단히 유명해질 수 있다는 건 특이한 일이다”. 하지만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쉐르픽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그녀가 평범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음을 인정하게 만든” 덕분이었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에서 태어난 멀리건은 인터컨티넨탈 호텔의 매니저로 근무한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풍요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세 살의 멀리건은 독일의 뒤셀도르프로 발령을 받은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도버해협을 건넌다. 독일 서부에 위치한 뒤셀도르프는 전세계의 사람이 모여 드는 국제적인 공업도시였다. 그녀가 네 살에 입학한 뒤셀도르프 국제학교(International School of Dusseldorf E.V.)는 서로 다른 50개국에서 모인 천여 명의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그곳은 그녀가 배우로서의 오늘에 다다르는 시작점이었다. 2년 뒤, 멀리건은 교내 연극무대에서 같은 학교를 다니던 그녀의 오빠 오웬이 출연한 <왕과 나>에 참여하길 원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너무 어렸던 그녀에게 허락된 건 코러스 석뿐이었고 어린 그녀는 화를 삼킨 채 그 자리에서 무대를 지켜봤다. 그녀는 훗날 고백했다. “그게 내가 연기를 원하게 된 전부였다.”
여섯 살짜리 꼬마의 다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사연이 필요했다. 후에 다시 가족과 함께 런던의 하이드 파크로 돌아온 멀리건은 자녀에게 훌륭한 교육을 제공하길 원했던 부모의 뜻에 따라 영국의 명문 가톨릭 여자사립학교인 올딩엄 스쿨(Woldingham School)에 입학한다. 호텔 매니저로서, 대학 강사로서, 바쁜 일상을 보낸 탓에 멀리건의 일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부모에게 기숙사 제도를 지닌 이 학교는 더욱 매력적이었다. 결과적으로 비비안 리나 모린 오하라와 같은 여배우를 배출하기도 한 이 학교에는 훌륭한 드라마 부서가 있었고 멀리건은 이를 통해 배우로서의 자양분을 마음껏 쌓아나갔다. 다른 수업을 무시하듯 오로지 연기에 몰두해 나간 그녀는 <크루서블>이나 <스위트 채러티> 등과 같은 고전 연극 무대에서도 점차 두각을 드러냈다. 당시 멀리건을 지도한 주디스 브라운(Judith Brown)은 그녀에 대해 이처럼 말했다. “그녀는 대단한 재능을 타고 났을 뿐만 아니라 옳은 기질과 성공을 향한 투지도 지니고 있었다.”
멀리건의 부모는 그녀가 명문대에 진학해서 학구적인 직업을 얻길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부모의 바람과 달리 연기자로서의 미래를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성공이 멀지 않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연기 전공을 꿈꾸던 그녀는 부모 몰래 선술집에서 돈을 벌며 연기 전공이 가능한 대학에 지원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세 번의 불합격 통보였다. 그리고 더욱 암담한 것은 그런 그녀의 비밀을 어머니가 알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간절한 희망이 묘비에 새겨진 유언처럼 허망해지듯 그녀에게는 절망스러운 사건이었다.
올딩햄 재학시절, 멀리건은 로버트 알트만이 연출한 <고스포드 파크>(2001)의 각본으로 오스카 각본상을 수상한 줄리안 펠로위스와 점심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여교장이었던 다이애나 버논의 친구였던 그는 멀리건과 함께 식사를 하며 그녀가 쏟아내는 대단한 연기적 열의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는 식사 후, 버논을 통해 냉담한 충고를 전했다. 내용인즉, 은행원과 결혼이나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멀리건과 펠로위즈와의 만남은 악연으로 끝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멀리건은 버논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버논은 다시 한번 펠로위즈에게 그녀의 진심을 전달했다. 결국 펠로위즈의 가족식사에 초대받은 멀리건은 자신의 열정을 다시 한번 토로했다. 이는 헛되지 않았다. 펠로위즈의 부인인 레이디 엠마는 그녀를 눈여겨보았다.
<오만과 편견>의 제작 소식을 듣게 된 그녀는 제작진에게 멀리건을 소개했다. 조 라이트는 멀리건에 대한 첫인상을 이처럼 말한다. “그녀가 왔고, 훌륭한 캐스팅 멤버였기에 우리는 그녀에게 자리를 내줬다.” 멀리건의 오랜 집념이 싹을 틔우는 순간이었다. 출연을 확정 지은 멀리건은 로얄 코트 극단에 입단하며 무대 데뷔를 이루고 다양한 작품들을 섭렵하며 연기에 매진할 수 있는 공간을 직접 마련해 나갔다. 같은 해, BBC에서 TV시리즈로 제작한 찰스 디킨스 원작의 <황폐한 집>에 캐스팅될 때까지도 무대에서 거듭 연기를 이어나갔다.
“19살이 되기 전까지 나는 진짜 적절한 관계를 얻지 못했다. 루저 중의 하나였다고 할까.”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이는 그녀가 이 캐스팅을 통해 드디어 자신의 재능을 이해해줄 ‘관계’의 성립에 고무되고 있음을 직감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녀는 재능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갔다. 무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와중에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작은 역할을 거듭하던 그녀는 선댄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더 그레이티스트>(2009)의 출연을 통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다고 기억될만한 기회를 얻게 된다. <언 애듀케이션>의 출연을 성사시키기 위해 제작자와 세 번에 걸친 만남의 시작이 바로 그 선댄스영화제였던 것이다. 결과는 이미 모두가 아는 바대로 성공적이었다. ‘오드리 햅번’에 비유된 그녀의 주가는 올라갈 차례만 남겨두고 있었다. 같은 해 제작됐던 <브라더스>와 <퍼블릭 에너미>에서 작은 역할로 모습을 드러냈던 그녀는 ‘브리티쉬 인베이전’이라 불릴만한 아카데미 노미네이트를 거치며 새로운 발판을 마련했다.
2010년, 올리버 스톤의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와 마크 로마넥의 <네버 렛 미 고>는 멀리건의 새로운 입지를 가늠하게 만든다. 특히 데뷔작 <오만과 편견>에서 주연을 맡았던 키이라 나이틀리와 또 한번 함께 출연한 <네버 렛 미 고>는 불과 5년 사이, 멀리건이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증명하는 대조군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녀에게 보다 중요한 사실은 지금 그녀가 연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놀라운 직업을 얻었고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 이는 매우 멋진 기분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에 즉시 그 느낌에 집중하고자 노력한다.” 그녀에게 연기란 인생을 걸고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이었다. 그녀는 새롭게 피어나는 꽃봉오리처럼 재능이 만개할 그 순간을 인내했다. 바로 지금, 그녀가 꽃을 피우고 있다. 재능이 여전히 만개하는 중이다.
리부트를 결정한 <스파이더맨>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발탁된 건 앤드류 가필드였다. 많은 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새로운 연출자로 선정된 마크 웹은 말한다. "비록 그의 이름이 아직 낯설겠지만 그의 연기를 본 사람들은 그의 탁월한 재능을 이해할 것."2007년, 가필드는 첫 주연작 <보이 A>에 출연한 뒤, <로스트 라이언즈>로 할리우드에 진출하며 <버라이어티>에서 ‘주목해야 할 배우 10인’으로 선정됐다. 이듬해에는 영국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며 자신의 경력에 자랑스러운 초석을 세웠다. “내 모든 목표는 단지 내 스스로 표현하길 허락 받는 것이었다.”그는 대단한 갈망만으로 희망을 이룰 수 없음을 일찍부터 잘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성과는 15살부터 무대에 오르며 연기적 가능성을 닦아온 노력의 산물이었다. 지난 해에 공개된 <소셜 네트워크>와 <네버 렛 미 고>에서 모든 건 확실해졌다. 그가 자신의 재능으로 이름을 닦아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앤드류 가필드는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