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이란 성공과 실패라는 단어로 손쉽게 구분된다. 하지만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영화들은 괴롭고 비루한 일상을 통해서도 이어지는 생을 그린다. 쉽게 꺾이지 않는 생의 가능성을 응시한다.
멕시코 시티에서 태어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 건 17세 무렵이었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무역선의 물류 창고에서 자고 바닥을 청소하며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처음으로 다다른 곳이 바로 바르셀로나였다. 바르셀로나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남다른 시각을 제공했다. “바르셀로나는 정말 대단했다. 어떤 모험심을 가진, 매우 어린 시절이었다. 수많은 이웃들을 소개해주는 친구가 생겼고, 끝내주는 경험을 했다.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하는 다양한 인종들로 구성된 모임을 보면서 감탄했다. 탐험을 하는 내게 있어서 정말 쿨한 일이었다.” 직접적으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연출한 <비우티풀>(2010)은 이 당시에 목격했던 바르셀로나에서의 경험이 반영된 작품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다양한 출신 성분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진 광경을 목격하고 체험했던 여정이야말로 그의 영화관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 같다.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장편 연출 데뷔작인 <아모레스 페로스>(2000)는 이 세계의 너비를 되새기게 만드는 작품이다.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고향인 멕시코 시티를 배경으로 둔 이 영화는 각자 다른 영역에서 살아가는 세 인물의 생을 세 개의 시점으로 나열하는 옴니버스 형식을 취하고 있다. 칸국제영화제의 비평가주간에 초청돼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이 작품은 찌든 때처럼 거리에 눌러 붙은 폭력성을 묘사하고 퍼즐 같은 서사 구조를 지닌 덕분에 쿠엔틴 타란티노의 작품을 연상시킨다는 평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곤잘레스 이냐리투에게 폭력은 허구적인 소품이 아닌 현실의 언어였다. “나처럼 매일같이 거리에서 폭력이 발생하고 사람이 죽는 도시에서 산다면, 폭력과 죽음은 더 이상 재미있는 일이 아닐 거다. 폭력에는 그에 응당한 결과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만약 당신이 폭력을 구사한다면, 그 폭력의 결과는 당신에게 돌아올 거다.”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초기작인 <아모레스 페로스>와 <21그램>(2003), <바벨>(2006)은 서사적으로 유사한 형식성을 취하고 있다. 세 부류로 나뉜 개별적인 삶과 그 일상이 부득이한 이유로 타인의 삶과 충돌하고 끝내 이 세계를 에워싸는 사건으로 확장된다. 세 작품은 동일하게 서사를 파편처럼 나열하고 퍼즐 구조의 서사로 진전된다. 다중적인 시점을 통해 서사의 확대와 증축을 꾀하며 입체적 감상을 유도한다. 이처럼 유사한 서사적 형태를 지닌 세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건 우연과 필연을 통해 진전되는 관계의 층위와 현실적인 생의 너비를 체감하게 만드는 관성이다. 어느 개인의 경험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에게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의 가능성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이 세계라는 물리적 너비를 포괄할 수 있는 생의 무게감을 실감하게 만든다.
<비우티풀>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라는 감독의 새로운 영역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다중적인 시점으로 구성된 옴니버스식 서사를 지닌 전작들과 달리 <비우티풀>은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첫 번째 정극이라고 해도 좋을 작품이다. 수미상관의 구조로 이뤄진 이 작품은 생과 죽음의 양면성을 유려한 슬픔과 환희로 승화시키며 시적인 아름다움을 전달한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런 감상에 대해서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왜냐면 사실 <비우티풀>은 굉장히 참담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전세계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바르셀로나의 빈민가에서 힘겹게 두 자식을 키워나가는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둔 이 영화는 그 누구보다도 죽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남자가 자신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나가는 이야기다. 가난과 고통 그리고 배신과 죽음이라는 어둡고 험난한 단어들로 점철된 이 영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여운을 남긴다 말할 수 있는 건 죽음으로도 부서지지 않는 생의 가치를 시적인 정서로 담아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말처럼, “<비우티풀>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관한 영화다. 삶을 향한 찬가다.” 그 비극적인 생의 마감을 지켜보면서도 그토록 평화로운 감상을 얻을 수 있는 건 결국 그 생이 어떤 종착만은 아닐 것이란 믿음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마치 영적인 기적을 목격하는 듯한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이 그 영화에 담겨있다.
사실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영화는 하나 같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이 세계의 단면들을 수집해 오면서도 생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이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음을 역설한다. 마치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삶이여, 다시!”라고 외쳤던 니체의 격언처럼 그렇다. 다만 이 거대한 비극의 도가니 속으로 내몰리는 인간들의 군상이 어떤 구조 속에 놓여있는가를 통해서 이 삶을 비극으로 내모는 인과와 심리를 제시한다.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영화로부터 괴로운 심정을 얻는다는 건 그만큼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괴로운 서사의 끝에서 되레 감상적 치유를 길어 올릴 수 있는 건 결국 그의 영화가 서로의 통증을 분담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이 세계에 대한 영적인 믿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버드맨>(2014)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확실한 증언과도 같다.
대략 5년 전, 자신이 구상했던 어떤 이야기의 조연 캐릭터를 모티프로 개발된 <버드맨>은 한때 ’버드맨’이란 슈퍼히어로로서 전성기를 누렸던 어떤 배우의 재기를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버드맨>은 단순히 어떤 배우의 연기적 재기에 관한 드라마가 아니다. 곤잘레스 이냐리투도 “솔직히 그런 주제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인간의 자아가 우리를 끌어올려줄 수 있지만 순식간에 우리를 해칠 수도 있는, 위험한 것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것에 힘을 내주고 휘둘리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버드맨>은 한 퇴물 배우가 자신을 파괴하는 망상과 세간의 비웃음으로부터 삶을 회복해나가려는 과정을 그린다. 그 과정은 때때로 우스꽝스럽다 못해 신랄한 블랙코미디 형태로 묘사되는데 이는 기존에 곤잘레스 이냐리투 영화와 이질적인 감상적 온도를 전달한다. 동시에 명배우들이 시종일관 장대비처럼 쏟아내는 대사량과 그 대사에 세찬 리듬감을 가미하는 드럼 솔로, 그리고 중력으로부터 해방된 듯한 카메라 워크 등 전작들에 비해 보다 화려해진 테크닉들로 영화의 기교적인 밀도가 한층 높아진 인상이다.
무엇보다도 <버드맨>은 보기 드물게 유머러스하고 신랄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첫 번째 블랙코미디이지만 어느 생에 대한 경의를 품은, 그의 다섯 번째 찬가다. 어떠한 예측도 뛰어넘는 이 영화의 결말은 타인들에 의해 손쉽게 실패라고 손가락질 받는 누군가의 삶이 결코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라는,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응시하는 생의 철학으로 비상한다. “내 영화들은 내 자신의 연장선이다. 일종의 내 생명과 직결된 경험의 증거들, 매우 드문 선행과 매우 많은 한계들과 함께.” 비참한 삶의 형태 속에서도 결코 죽일 수 없는 생의 가능성.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응시하는 건 결국 이 세계의 너머가 아닌 자기 자신과 우리 생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그것이다.
<버드맨>의 결말에 대하여
아마도 <버드맨>을 보게 된다면 그 결말에 대해서 어떤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엠마 스톤의 ‘빅 아이즈’를 통해서 짐작할 수밖에 없는 그 결말은 원래 예정됐던 결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영화의 촬영이 중반에 다다랐을 즈음 그 결말이 정말 최악이라고 느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결국 각색가들과 함께 새로운 결말에 골몰했고, 결국 지금 형태의 결말을 완성했다. 그는 지금 형태의 결말에 대해서 굉장히 만족했고, 타당한 결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본래의 결말을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도 극도로 말을 아낀다. “원래의 결말에 대해선 결코 말하지 않을 거다. 매우 황당한 것이니까. 정말 나쁜 것이었다.” 물론 지금의 결말 또한 황당하다고 느낄 관객은 존재할 거다. 이쯤 되면 어떤 결말인지 정말 궁금하지 않나? 보면 안다.
(beyond March 2015 Vol.102 'DIRECTOR'S 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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