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이 되는 해리 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를 맞이하는 건 죽음조차 불사해야 하는 고난이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사람’, 볼드모트(랄프 파인즈)를 상대할 희망이라 믿었던 호그와트의 교장 덤블도어(마이클 갬본)는 죽었고, 호그와트는 볼드모트를 추종하는 ‘죽음을 먹는 자들’의 수중에 넘어갔다. 마법부의 존립마저 장담할 수 없는 마법세계로 언론과 권력을 장악한 볼드모트의 공포가 짙게 드리워져만 간다. 그리고 해리포터와 론(루퍼트 그린트), 헤르미온느(엠마 왓슨)는 볼드모트를 제거하기 위해 덤블도어가 남긴 표식을 따라 볼드모트의 영혼이 담긴 ‘호크룩스’를 파괴하는 여정에 나선다.
J.K 롤링이 집필한 판타지소설 <해리 포터>시리즈의 완결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역대 시리즈 가운데 가장 어둡고 암울한 기운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마법세계를 어드벤처처럼 즐기던 호그와트의 소년, 소녀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고난에 대한 갈등에 맞서며 세계를 구하기 위한 막중한 임무를 짊어진 채 세상의 눈을 피해서 고립된 신세다. 볼드모트의 등장과 해리포터의 주변인의 죽음을 묘사하는 <해리포터와 불의 잔>의 결말부터 서서히 시리즈 위로 드리워지던 암울한 기운은 이번 마지막 시리즈를 통해 절정과 대단원의 클라이맥스로 승화된다.
결말의 전초전이라 할만한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1>(이하, <죽음의 성물 1>)은 덤블도어의 유지를 이어나가는 해리와 론, 헤르미온느의 위험천만한 여정을 담고 있다. 지난 6편의 전작에서 나름대로 천진난만한 마법 세계의 병풍이 되던 호그와트의 보호막이 사라진 <죽음의 성물 1>은 그만큼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로 일관된, 심정적인 진통이 거듭 이어질 뿐이다. 이 시리즈와 함께 성장하며 자신의 캐릭터의 역사를 몸소 증명하는 배우들의 외모와 같이 결말에 이르러 확실하게 시리즈의 성숙을 증명해내는 이번 편은 그만큼 이 시리즈에 대한 애정의 여부를 시험에 들게 만드는 최종관문이 될 것임에도 틀림없다.
일단 역대 시리즈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의 시리즈를 두 편의 영화로 나누어 제작했다는 점에서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은 서사적으로 보다 탄탄한 주행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고 할만한 작품이다. 그만큼 이번 영화는 지난 전작들에 비해서, 특히 <죽음의 성물>과 유사한 텍스트량을 지니고 있었던 몇몇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스토리의 집중과 선택이란 측면에서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된다는 혜택을 얻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말에 다다른 이야기라는 건 곧 이 시리즈가 쌓아온 모든 역사와 정보가 총집결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전작의 스토리와 캐릭터들을 얼마나 잘 기억해내는지에 따라서 재미는 그만큼 늘어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무엇보다도 전작들에서 설명됐던 어떤 장면들이 단순히 보는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말부의 서사를 수식하기 위한 복선의 요소로서 일찍이 장치된 것들이었음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번 마지막 시리즈는 전작들에 대한 기억력에 따라 보다 많은 재미를 누릴 수 있는 팬서비스의 기능성을 품고 있다. 수많은 인물들이 언급되거나 등장하고 이내 사라진다는 점에서도 이는 보다 중요한 지점일 것이다. 동시에 내년에 후속편의 개봉을 예고하고 있는 이 불완전한 작품이 끝까지 고통과 번민으로 일관하고 있음은 (이미 원작을 예습한 독자들이라면 잘 알고 있겠지만) 곧 이어질 후속편의 클라이맥스에서 선사할 반전의 롤러코스터를 위해 마련된 ‘골고타의 언덕’임을 명심해야 한다.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과 <해리 포터와 혼혈 왕자>를 연출한 데이빗 예이츠는 지난 전작이 얻었던 호불호와 무관하게 나름대로 이 세계관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한 일관성을 확보한 듯한 인상이 든다. 또한 결말로 치닫는 시리즈의 연출을 한 감독에게 연속적으로 맡긴 것이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수순을 밟고 있다는 판단을 내리게끔 만든다. <죽음의 성물 1>은 전체적으로 암울해지는 마법 세계의 절정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 안에서 이 세계를 주시해온 팬들의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고 있으며 시리즈 자체의 흐름 안에서도 원숙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할만한 위치에 놓여 있다.
물론 이 방대한 정보량을 품은 결말 시리즈를 고스란히 묘사하기 위해 140여분의 러닝타임을 지닌 두 편의 시리즈를 마련했다는 것마저도 완전한 만족감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러닝타임의 한계에서 보다 여유로워진 만큼 서사의 운용력은 확실히 나아진 인상이며 서사에 대한 이해도 한층 간결해진 인상이다. 특히 호그와트의 대전투를 그릴 최종 클라이맥스를 앞둔 이번 작품이 묘사하는 몇 번의 대결신은 적절한 서스펜스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역대 시리즈 가운데 핸드헬드와 클로즈업을 가장 많이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캐릭터와 함께 성장한 어린 배우들은 아픈 만큼 성숙해진 캐릭터의 내면을 대변하고 있다 할만한 표정을 선보이고 있으며 이런 정서에 밀착하듯 표정을 잡아내는 영화는 그 자체만으로 이 시리즈의 성숙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소년은 성장했고, 운명에 다다랐다. 달아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끝없이 고뇌하고 갈등하는 소년은 비로소 자신의 기구한 팔자가 비범한 숙명 안에 놓여 있음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씩 잃어가면서도 멈출 수 없는 여정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소년의 숙명과 그 숙명을 둘러싼 환경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먹구름과 같이 세계 위로 악은 쉽게 드리운다. 그 아래서 고군분투하는 작은 선이 서서히 빛을 밝힌다. 악에 잠식당한 세계가 불안에 떨 때, 작은 선이 서서히 불을 밝힌다. 어두운 세상에서 소년은 홀로 빛을 옮긴다. 이미 소년의 운명은 자명하다. 우리가 기대하는 바로 그 대단원으로 이야기는 옮겨가고 있다.
바야흐로 6번째 시리즈, 해리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주문을 외우고 마법을 배우며 모험을 거듭하다 호그와트 6학년 상급생이 된 해리포터는 이제 시리즈의 졸업 관문까지 나아간다. <해리포터와 혼혈왕자>(이하, <혼혈왕자>)는 결전을 향한 전초전이나 다름없다. ‘트리위저드’ 대회라는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했던 <해리포터와 불의 잔>의 비극적 엔딩 이후로 급격하게 다크 판타지로 선회하기 시작하던 시리즈는 <해리포터와 불사조기사단>과 <혼혈왕자>에 이르러 더욱 어둡고 예민해진 낯빛을 드리운다.
사실 <해리포터>시리즈를 영화화한다는 건 까다로운 일이다. 150여분의 긴 러닝타임을 투자한다 해도 따라잡기 어려운 스토리의 절대량을 줄여나가면서도 긴밀한 흐름을 유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해리포터>가 큰 사건의 맥락 외에도 아기자기한 소품적 에피소드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한 시리즈란 점에서도 서사의 여백 자체가 영화적 손실이 될 수 있다는 건 영화화 작업의 난관 중 하나에 가깝다. 역대 시리즈 가운데 가장 짧은(!) 137분의 러닝타임을 투여했던 <불사조기사단>이 원작의 하이라이트 영상 편집본에 불과하다는 비아냥을 얻었던 전례를 떠올린다면 전작에 이어 다시 한번 <혼혈왕자>의 연출자로 낙점된 데이빗 예이츠가 메가폰이 아닌 마법 지팡이라도 쥐고 있기를 바라는 심정마저 드는 게 사실이다.
<불사조기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혼혈왕자>에도 150여분 이상의 러닝타임이 할애됐지만 분명 원작이 지닌 미니멀한 장점들은 텍스트를 이미지로 선별하는 과정에서 일차적인 희생양이 된 것임에 틀림없다. <혼혈왕자> 역시 <해리포터>의 영화화 작업의 난관을 극복하지 못한 선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혼혈왕자>는 서사의 선별이란 측면에서 좀 더 과감한 선택이 뚜렷한 작품이다. 부분 3D로 제작된 <혼혈왕자>는 도입부부터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선사하며 원작의 서사를 의식하지 않은 듯 호기롭게 출발한다. 물론 <혼혈왕자>은 온전히 원작소설을 밑그림으로 두고 완성된 결과물이다. 하지만 단지 원작의 서사를 따라가며 작은 맥락들을 절제하는 단순 작업방식에서 벗어나 필요에 따라 서사의 생략과 도치, 혹은 접합을 통한 재구성의 방식으로서 영화를 원작의 동의어가 아닌 유의어 수준으로 격상시킨다. 지금까지 시리즈가 소모해왔던 마법적 세계관의 눈요기가 더 이상 <혼혈왕자>의 장기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듯 이미지의 과장을 절제하고 세계관의 진전에 주력한다.
8년 동안 여섯 번의 시리즈를 거듭한 만큼 <해리포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몰라보게 성장한 아이들이다. 성숙하고 농밀한 로맨스까지 연출이 가능해졌을 정도로 <해리포터>는 아동들의 모험담에서 2차 성징 판타지로 무르익었다. 더 이상 풋풋한 성장판타지가 아닌, 다크 판타지의 색채를 자랑한다. 그만큼 채도가 낮아진 <혼혈왕자>는 (지금까지 영화화된) 역대 시리즈 가운데 가장 불길하고 암담한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상 마지막 관문으로 가기 위한 전초전이나 다름없는 <혼혈왕자>는 궁극적으로 서사적 연결고리의 기능적 목적에 충실한 작품이다. 이를 테면 어느 정도 전작들을 복습하고,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을 염두에 둔 감상자로서 상영관을 찾을 때 만족도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란 의미다. 그만큼 원작의 흐름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감상적 호의를 베풀 공산이 크다. 원작의 흐름을 잘 이해한 이들에게 <혼혈왕자>는 이유 있는 여운이 되겠지만 그와 동떨어진 관객에겐 어지러운 미로가 될 것 같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와 맞서야 하는 해리포터의 운명은 현재진행형에서 완료형으로 달린다. 해리포터도, 론(루퍼트 그린트)도, 헤르미온느(엠마 왓슨)도 자랐다. <혼혈왕자>는 성숙한 아이들의 2차 성징을 노골적으로 활용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혼혈왕자>의 볼거리는 속도감을 자랑하는 ‘퀴디치’경기도, 번쩍거리는 신비한 마법지팡이도, 기억을 재생하는 ‘펜시브’도, 심지어 ‘어둠을 먹는 자’들과의 긴박한 결투도 아니다. 마법부의 기억상실 주문에 걸리는 ‘머글’이 아닌 <해리포터>의 충직한 관객들에게 <해리포터>의 세계는 더 이상 낯선 볼거리가 아니다. 이는 분명 <해리포터>가 선사하는 이미지가 그만큼 놀라운 볼거리로서 위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혼혈왕자>의 관건은 로맨스다. 더 이상 애들이 아닌 호그와트의 상급생들은 마음껏 키스하고 부둥켜 안으며 연애를 즐긴다. <혼혈왕자>에서 스펙터클의 공백을 대체하는 건 농밀한 로맨스의 예감이다. 성장한 아이들은 암울해지는 세계 속에서도 성징(性徵)의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며 나름의 생기를 확보한다.
책 한 권 분량의 절반 가량을 덜어내며 비극적 의미를 강화한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질풍노도의 운명론은 더욱 비장해질 가능성이 크다. 2편으로 나눠질 마지막 스크린 시리즈는 사실상 <혼혈왕자>를 포함한 트릴로지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혼혈왕자>는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기 위한 서사의 서막으로서 제 기능에 충실한 작품이다. 적절한 변주를 통해 서사를 훼손하지 않는 수준에서 나름대로의 몫을 해낸다. 다만 시각적 묘미의 감소를 감당할 수 없는 이들에게 2시간 30분은 지루한 여정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긴 어렵다. 결국 감상의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대한 문제는 애정과 관심의 무게를 얼마나 얹어놓을 수 있는가에 달렸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이제 <해리포터>가 애들이 보기엔 어둡고 무거운 시리즈가 됐다는 것. 더 이상 어리다고 놀릴 수 있는 성장 판타지가 아니란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