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정이 무섭다. 대립적 관계에 놓여있던 남녀가 필연적인 계기를 통해 운명적 공동체를 계약하고 이로 인해 끊임없이 부딪히고 갈등하다 이내 정들어 로맨스를 낳는다. 대부분 로맨틱코미디라고 불리는 영화들은 이토록 닳고 닳은 관계적 갈등을 기본적 골조로 삼아 로맨스를 축조한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닳아 없어지지 않고 끝없이 재생산되는 건 낡고 낡아서 앙상할 것만 같은 로맨스의 골조를 풍성하게 치장하는 코미디 덕분이다. 로맨스의 진심을 훼손하지 않는 동시에 적절한 기능성을 갖춘 코미디는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를 풍요롭게 만드는 자질이다.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의 형식으로 대변되는 <프로포즈>도 마찬가지다.
마가렛(산드라 블록)은 사내에서 마녀라 불릴 만큼 악명이 자자하지만 업무적인 능력을 인정받는 뉴욕의 출판사 중역이다. 그녀의 손에 출판사의 주요 업무가 결정되거나 누락된다. 게다가 웬만한 실수는 용납하지 않는 그녀 덕분에 보좌관 앤드류(라이언 레이놀즈)는 출근길부터 분주하다. 마녀는 스타벅스를 마신다. 마가렛이 출근하기 전까지 저지방 두유 라떼를 책상에 올려놔야 한다. 커피를 엎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자신의 커피도 같은 것으로 통일한다. 마가렛의 완벽주의에 앤드류의 회사생활은 엣지있게 돌아간다. 그런 어느 날, 마가렛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 벌어진다. 캐나다 출신인 마가렛의 비자 발급이 중지됐으며 이에 따라 출국명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이 사장으로부터 통보된 것. 그러나 불통은 앤드류에게 튄다. 강제출국을 막기 위해 앤드류와의 혼인 사실을 밝힌 마가렛 덕분에 앤드류는 위장 약혼의 공모자가 된다.
<프로포즈>는 스토리의 개연성이 떨어지는 작품이다. 급작스럽고 돌발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진전되는 사연엔 두서가 없다. 지나친 우연성에 기대어 직조된 스토리는 전형적인 로맨틱코미디의 방식이라기 전에 내러티브의 열악함에 가깝게 이해될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프로포즈>는 즐길만한 매력이 다분한 로맨틱코미디다. <프로포즈>를 휘청거리게 만들 구조적 결점을 단단하게 다지는 건 온전히 캐릭터의 매력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심캐릭터부터 주변부에 산재된 다양한 캐릭터들이 발생시키는 매력이 작위적인 우연을 연출하고 전형적인 공식에 기대는 스토리에 활력을 발생시킨다. 뛰어난 순발력으로 우연에 기대어 굴러가는 사연에 필연성의 생기를 불어넣는다.
생애 처음으로 누드를 선보였다는 사실까지 일례로 들 필요도 없이 산드라 블록은 <프로포즈>의 일등공신이나 다름없다 할만한 공헌도를 드러낸다. 과감한 슬랩스틱과 디테일한 제스처, 풍부한 표정을 통해 캐릭터의 감정변화를 설득시키는 산드라 블록은 매력적인 웃음을 밑천으로 로맨스의 자질을 구축한다. 상대역을 맡은 라이언 레이놀즈 역시 적절한 리액션으로 산드라 블록을 보좌하며 빼어난 앙상블을 이룬다. 두 남녀 캐릭터의 아기자기한 신경전은 돌발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이뤄진 <프로포즈>에서 단단한 이음새 역할을 하는 동시에 탁월한 웃음을 발생시키는 코미디의 속성에 어울린다. 암묵적 합의 속에서 혼인 빙자 사기 연극을 펼치는 두 남녀의 주변부에 자리한 다양한 조연들은 저마다 제 역할에 걸맞은 코미디적 긴장감을 발생시키며 웃음을 숙성시킨다.
마치 대각선에서 마주보듯 근접할 수 없을 것마냥 서로를 배척하던 캐릭터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사연을 공유하며 반목을 거듭하던 가운데 좀처럼 알 수 없었던 상대의 속내를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전통적인 장르적 관습 안에서 묘사되는 캐릭터의 심정적 변화가 관계를 재구성하고 영화의 온도를 변모시킨다. 지속적인 활약을 펼쳐는 발군의 코미디 안에서 관성적으로 무르익어가는 로맨스는 적당한 설득력을 획득한다. <프로포즈>가 최소한 제 역할을 하는 로맨틱코미디라 말할 수 있는 건 그 덕분이다. 뛰어난 장악력보단 능숙한 순발력이 인상적이다. 특히 장르적 공식에 기대어 안이하게 진전되는 스토리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배우들의 열연은 <프로포즈>를 위한 특별한 수식어나 다름없다. 마흔을 넘어선 산드라 블록의 앙증맞은 슬랩스틱과 이를 보좌하는 라이언 레이놀즈의 든든한 지원은 어느 누구라도 분명 매력적이라 할만한 것이다.
개성이 강한 돌연변이들이 등장하는 <엑스맨>시리즈는 각자 개별적인 사연의 줄기를 성장시키기 좋은 캐릭터의 금광이다. 집단으로 투척해도, 개인으로 조준해도 맥락은 가능하다. <엑스맨 탄생: 울버린>(이하, <울버린>)은 앞선 세편의 시리즈에서 중심에서 활약했던 울버린(휴 잭맨)의 전사를 다룬다. 캐릭터의 존재만으로 기획을 가능케 한 영화다. 잘 키운 캐릭터 하나 열 이야기 안 부럽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획이다. 물론 이는 앞선 세 편의 시리즈가 나름대로 성공적인 노선을 걸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더욱 설득력이 강해진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 울버린이 무의식을 통해 문득문득 방출하는 그의 과거사와 관련된 조각 같은 이미지들은 <엑스맨>시리즈에서 중요한 호기심으로 작동하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헤매는 울버린의 과거를 추적하는 <울버린>은 호기심을 자극하던 캐릭터의 역사 자체를 드러내는 이벤트라는 점에서 흥미를 부른다. 앞선 시리즈에서 중요한 맥락으로 대우받던 울버린의 감춰진 과거를 들춘다는 점만으로도 <울버린>은 폭넓은 기대를 품게 만드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소년은 돌연변이라는 정체성을 자각하는 동시에 살인을 저지르고 출생의 비밀마저 듣게 된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처럼 소년의 삶이 순탄치 않게 미끄러져 나갈 것임을 암시하는 오프닝 시퀀스 이후로 죽음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불사의 정체성을 거듭 확인해나가는 로건(휴 잭맨)과 빅터(리브 슈라이버)의 서사가 감각적인 이미지를 밀어내며 나열된다. 비범한 삶의 궤도에 들어서는 캐릭터의 유년시절에서 시작해서 성장한 캐릭터의 환경을 명확한 이미지로 흘려 보내는 타이틀 시퀀스는 폭력 가운데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돌연변이의 숙명 그 자체를 짧고 굵게 환기시킨다.
하지만 정확히 거기까지, <울버린>은 울버린의 과거라는 흥미로운 사연의 형태를 전시하는 형태애서 멈춘 영화다. 돌연변이들의 세계관을 통해 깊고 너른 메타포를 제시하던 브라이언 싱어의 성취를 기초로 한 기대 따위는 애초에 구겨버려야 한다. 일단 이전 시리즈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돌연변이가 등장하고 그 가운데 원작 코믹스에서 중하게 다뤄지던 몇몇 캐릭터가 비중 있게 등장한다는 사실은 꽤나 반갑다. 또한 블록버스터의 너비에 걸맞은 스케일과 스펙터클을 장착했다는 점에서 오락영화로서의 야심은 인정할만하다. 그러나 액션과 캐릭터를 채우기 위한 그릇에 불과한 것처럼 손쉽게 굴러가는 스토리텔링은 캐릭터의 사연을 구경거리처럼 전시할 뿐,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다.
이미 앞선 시리즈에서 ‘금문교’를 이동시키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한 마당에 단순히 날고 뛰는 육박전을 전시하는 건 ‘엑스맨’이라는 네임밸류 아래 큰 성과가 아니다. <울버린>은 캐릭터의 기원 그 자체를 공개한다는 점에서 흥미를 발생시키지만 캐릭터의 기원을 묘사하는 이미지를 전시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발생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무색한 영화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서의 자질이 충분한 외관은 오락적 기능성을 어느 정도 배려하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울버린>이 끌어당겨 쓴 사연의 본래 잠재력을 기초로 손익을 계산해보자면 영화적 결과물은 분명 밑지는 장사에 가깝다. 그저 시리즈에 얹혀주는 부록의 가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신화가 될 수 있었던 영웅의 사연을 그저 구경거리로 제한해버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