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의 찰스타운은 가족사업처럼 범죄가 대물림 되는 도시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더그 맥레이(벤 애플렉)도 은행 강도를 저지르다 검거되어 교도소에 수감된 아버지와 같이 역시 범죄의 길로 발을 들인지 오래다. 선택의 여지 없이 은행강도의 길로 들어선 그는 자신의 삶이 인생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지만 발을 빼고 다른 길을 걷는 것 역시 덫과 같은 관계들 때문에 자칫하다 발목이 날아갈 판이라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순탄치 않은 삶에 특별한 인연이 찾아온다. 은행강도 중 현장에 있던 여자 부지점장 클레어(레베카 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 그 사랑이 맥레이에게 어떤 결심을 도모하게 만든다.
저명한 범죄소설작가 데니스 루헤인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가라, 아이야, 가라>를 연출한 벤 애플렉의 감독 데뷔는 성공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해도 좋을 결과였다. 4살 소녀의 실종을 통해 격발되는 미스터리 범죄물인 이 작품은 사회의 온갖 모순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동시에 이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던지는 원작의 세계관을 인상적으로 포착하며 배우 벤 애플렉의 연출력에 대한 의문을 완전히 집어 던지게 만든 수작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다시 유명한 범죄소설작가 척 호건의 <PRINCE OF THIEVES>를 자신의 두 번째 연출작으로 선택한 벤 애플렉의 하이스트 무비 <타운>은 전작과 일관된 태도가 발견되는 동시에 또 다른 그의 연출적 시도가 동원된 작품이다.
보스턴 출신의 벤 애플렉이 보스턴을 주무대로 삼는 데니스 루헤인과 척 호건의 작품을 차례대로 선택한 건 분명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단 두 편의 영화를 만든 벤 애플렉을 거장의 반열로 올리는 건 성급한 일이겠지만 그가 만든 두 작품은 마치 뉴욕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와 같은 길을 보스턴에서 걷겠다는 신념을 선언하는 야심처럼 보인다. 사회적인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동시에 그 부조리 속에 놓인 어느 개인의 본성을 끌어내는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적 시선은 벤 애플렉이 연출한 두 편의 작품에서 엿보인다. 또한 이 모든 현실적 관점이 휴머니즘을 기초로 한 드라마로 유려하게 풀어낸다는 점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흔적을 의심하게 만든다.
전작과의 우열을 논하자면 <타운>은 <가라, 아이야, 가라>보다 더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꺼려지는 작품이다. 하지만 <타운>은 전작에 비해 보다 생동감이 넘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영화의 초반과 후반부를 장악한 사실적인 총격신의 연출 덕분일 것이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는 총격신은 현장에 위치한 3자의 시선을 빌려 사건을 중계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부여할 정도로 빼어난 연출력을 선사하고 있다. 또한 사건의 중심에 놓인 갱단의 평범한 일상을 정적하게 비추던 카메라가 같은 방식으로 담담하게 범죄 현장을 중계할 때, 하나의 시선에 놓인 정보의 차이로 인해 파격적인 감상이 도모된다. 연속적인 삶의 일상 속에서 분리된 일상을 넘나드는 갱단의 이야기는 이런 연출 방식을 통해 보다 현실적인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타운>은 문제의식을 던지는 전작과 달리 보다 적극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다. 범죄의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인물에 대한 연민을 강요하기 보단 그 인물의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이 빚어내는 파국을 조명하고 아이러니한 심정을 고스란히 객석의 여운으로 승화시킨다. 스토리의 운용면에서 인위적인 장치적 설정들이 드러나긴 하지만 <타운>은 무리 없이 흐르는 인과를 설득시키는 작품이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스토리 라인 속에서 드라마틱한 감정적 여운과 공정한 사회적 현실에 대한 의식을 남긴다는 점에서 <타운>은 좋은 각색물의 수준을 넘어선 수작이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에서 또 한번 자신의 재능을 입증해낸 벤 애플렉은 자신이 연출한 전작이 결코 우연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해내는데 성공했다.
비키(레베카 홀)와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는 지금 막 미국에서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서로를 잘 이해하는 친구 사이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사람은 특히 남자에 대한 견해가 판이하다. 조건을 꼼꼼히 따지며 신중하게 접근하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지닌 약혼자가 있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최근 새 남자친구와 이별을 겪었다.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바르셀로나에 왔지만 두 사람의 기대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Vicky Christina Barcelona>(이하, <내 남자>)는 심플한 원제처럼 ‘비키’와 ‘크리스티나’가 ‘바르셀로나’에서 겪은 이야기다. 건축학 석사논문에 도움이 될만한 가우디 건축물을 기대하는 비키와 달리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새로운 경험과 상대를 원한다. 비키와 크리스티나의 전혀 다른 꿍꿍이는 두 사람의 휴가를 사소함으로부터 밀어낸다. 물론 그 계기는 엉뚱하게 찾아온다. 우연히 미술관에서 마주친 화가 안토니오(하비에르 바르뎀)에게 반한 크리스티나는 비키와의 식사 테이블로 찾아와 여행에 초청하겠다는 안토니오의 뻔뻔한 청을 받아들인다. 비키는 이에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결국 그 여행에 합류하게 되고 그 여행은 두 사람의 휴가를 사소함으로부터 이탈시킬 만한 비밀을 선물한다.
크리스티나의 위궤양으로 인해 예기치 않은 비밀을 얻게 된 비키는 이로 인해 자신의 일생을 뒤흔들릴만한 충동을 겪게 된다. 한편 여행을 병석에서 보낸 크리스티나는 다시 바르셀로나에 돌아와 안토니오와 연인이 된다. 하지만 안토니오의 유명한(!) 전처 마리아(페넬로페 크루즈)가 나타나고 기묘한 삼각관계가 이뤄진다. <내 남자>는 두 개의 삼각관계를 중첩하는 세 여자와 한 남자 사이에 놓인 기묘한 사연을 펼쳐놓은 영화다. 한 쪽은 비밀에 휩싸여 있으며 한 쪽은 기묘하게 얽혀있다. 누군가에게 익히 비정상이라 불릴 만한 관계 속에서도 로맨스는 이뤄지고 일상은 반복된다.
특별한, 혹은 기이한 사연을 담담하게, 혹은 유쾌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 그 사연을 대하는 영화의 관점이 한없이 사소한 까닭이다. 동시에 리드미컬한 내레이션과 경쾌한 배경음이 불미스러움으로부터 그 인물들의 행위를 구출하는 덕분이기도 하다. 두드러지지 않지만 소소하게 묻어나는 유머 감각이 산재한 이 막장 스토리를 조율하는 우디 알렌의 감각적 리듬이 영화의 중심에 있다. 저마다의 감정을 이루고 동선을 펼치는 캐릭터들의 조합은 어떤 약속도 없는 이야기를 펼쳐내듯 흥미롭게 사연을 구성한다. 우연적인 감정과 필연적인 본능에 휩싸일 때 사연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튄다. 그러나 그 예기치 못한 사연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주체들을 결심하거나 체념하게 만든다.
비키와 크리스티나는 바르셀로나에서 각각 예상 밖의 경험을 얻는다. 안토니오와 그의 전처 마리아는 그 경험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그 경험을 통해 비키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가치관의 진동을 느끼고, 크리스티나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가능성을 발굴한다. 자신과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일상을 체험하거나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성을 발견한다. 타인과의 관계는 비키와 크리스티나에게 불가능한 영역을 선사하거나 선물한다. 물론 대단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하나의 경험담을 관통할 뿐이다. 그렇다고 <내 남자>가 그저 그래서 허무할 것 같은 이야기 따위는 아니다. 형태적으로 비키와 크리스티나는 바르셀로나에서 휴가를 보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비키는 자신의 약혼자와 결혼한 채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크리스티나는 여전히 또 다른 충동을 꿈꾼다. 하지만 그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두 사람의 인생에 미묘한 변화를 부르는 첫 번째 도미노가 된다. 약혼자와의 잠자리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거나, 아무런 재능도 없다고 믿어지는 삶에서 뷰파인더의 가능성을 찾는다. 또한 서로 사랑하지만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믿는 안토니오와 마리아 역시 크리스티나를 통해 완전한 삼각관계(!)를 이루고 만족스런 일상을 보낸다.
우디 알렌은 항상 인물들의 작은 사연들을 관망하듯 수집한 뒤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그 세계엔 윤리적 태도보다도 결과적인 이야기의 형태만이 끝내 자리잡는다. <내 남자>도 그 과정 끝에 남는 어떤 결과만이 존재할 뿐이다. 스토리텔링은 어떤 훈계를 위해 복무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저 스토리텔링으로서 순기능에 충실하며 인물들은 저마다의 삶을 산다. <내 남자>는 그 사연이 부르는 후일담이 대단하다기 보단 순간을 채우는 관계와 사건들을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한 이야기다. 누군가의 흥미로운 경험담을 듣는 즐거움에 가깝다. 결국 그 이야기 속에서 한 차례 경험담을 거친 인물들은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간다. 뭔가 대단한 형태의 결과를 기대한다면 한편으로 허무에 시달릴지 모를 일이나 그저 그 과정 자체를 즐긴다면 충분한 만족감을 얻을 만하다. 훌륭한 재담꾼의 이야기는 그저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만족감을 부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도 간과할 수 없는 감상포인트가 된다. 특히 페넬로페 크루즈는 남미의 태양처럼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뿜어낸다. 물론 한 가지 애석한 점은 심플하고 도도한 원제를 천박한 막장 드라마 반열에 올린 한국개봉명이랄까. 좀처럼 적응하기 힘든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제목은 영화에 대한 기대감도, 만족감도, 하나 같이 깎아 내릴만한 작명 센스다.
1972년 6월 17일오전 2시반, 워싱턴 민주당사를 도청하려던 5명의 용의자가 검거됐다. 워싱턴 포스트지의 두 기자는 그 배후를 추적했고, 그 끝자락에 닉슨 대통령이 관련됐음이 기사를 통해 폭로됐다. 차기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던 닉슨 대통령의 불명예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닉슨은 이를 적극 부인했지만 결국 여론의 압박이 대단했다. 결국 1974년 8월, 국회의 탄핵의결을 거쳐 대통령직을 사임하며 닉슨은 자신의 혐의를 인정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Watergate)’ 사건이다. 여기서 워터게이트는 워싱턴 민주당사가 있던 건물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대부분의 정치 스캔들 명칭에 ‘게이트(gate)’란 어미가 붙게 된 것도 이 덕분이다. 어쨌든 닉슨 대통령은 대단한 정치적 영향력을 남긴 셈이다.
<프로스트 vs 닉슨>(이하, <프로스트>)는 기록적인 영상과 언어를 동원해 워터게이트와 닉슨 대통령의 사임까지의 서사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정리하며 시작된다. 묵직한 실화를 현장감 있게 드러내는 도입부는 영화의 야심을 위한 포석과 같다. <프로스트>는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 이후에 벌어진 또 다른 실화, 정계에서 은퇴한 닉슨(프랑크 란젤라)과 영국 출신의 토크쇼 MC 프로스트(마이클 쉰)의 인터뷰를 다루는 영화다. 그 실제적인 사건이 어디서 출발하는가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건 그 후에 벌어지는 사건의 현장감을 얼마나 비중 있게 전달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과 맞닿아 있다. 기록적인 영상은 도입부 이후로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건 극화된 장면이다. 희곡을 바탕으로 둔 연극 원작엔 문학적 자질을 염두에 둔 허구적 재능이 가미됐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무대의 연출과 달리 영화는 좀 더 실제에 가깝게 묘사될 때 탄력을 얻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록적인 사실을 뇌리에 각인시키는 도입부는 허구를 가리기 위한 방법론에 가깝다.
1977년의 역사적인 TV인터뷰를 스크린에 옮긴 <프로스트>는 역시나 어떤 결과를 재현하기 위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그 결론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가라는 점이다. <프로스트>가 선택한 지점은 그 결론을 위해 과정이 종사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 결론에 다다르기까지의 모든 것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느냐에 가깝다. 프로스트의 결심이 어디서 출발하는가는 닉슨의 결심만큼이나 중요한 지점이다. 프로스트와 닉슨은 같은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인터뷰를 선택한다. 워싱턴 정계로 재진입하기 위한 재기의 발판으로 인터뷰를 선택하는 닉슨과 마찬가지로 프로스트 역시 미국 연예계로 재입성하고자 인터뷰를 기획한다. 두 사람은 그 인터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 그 인터뷰는 두 사람에게 공평한 기회다. 인터뷰를 둘러싼 긴장감 역시 그 지점에서 발효된다. 정의 구현을 바탕으로 둔 훈계엔 관심이 없다. 모든 것을 건만큼 이득을 보지 못하면 손실이 큰 싸움이다. 4번에 걸쳐 이뤄지는 인터뷰까지의 과정 중 마지막 4번째 인터뷰에 에너지가 응집되는 양상 역시 그런 까닭이다. 4쿼터 역전승을 거두듯 닉슨에게 수세에 몰리던 프로스트가 전세를 역전하는 마지막 인터뷰의 묘미는 두 사람의 클로즈업된 표정으로부터 전세가 역전되고 있음이 표현될 때 온전한 전율을 전달한다. 승자와 패자의 만감이 탁월하게 교차된다. 물론 그 표정의 주체가 되는 두 배우마이클 쉰과 프랭크 란젤라의 뛰어난 역량이 언급돼야 마땅하다. 특히 프랭크 란젤라의 얼굴은 <프로스트>로부터 느껴지는 감정 그 자체다. 그의 얼굴은 영화의 정서적 변화를 대변하는 온도계나 다름없다. 그리고 마이클 쉰은 그 온도계를 쥐고 자신의 연기적 체온으로 극적인 변화를 온전히 주도한다.
날카로운 촌철살인의 언어로 두 사람은 진검승부를 펼친다. 인터뷰 직전 상대의 의표를 찔러 심리적 우세를 점령한 뒤 허를 찔린 상대의 조급한 심리에 여유 있게 응대하는 닉슨의 표정엔 우아한 관록이 배어 나온다. 그 너머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심리적인 수세에 몰리던 프로스트는 역공의 전환을 맞이한다. 강력한 맞수 닉슨의 우연한 전화는 공황 상태의 프로스트에게 자극을 전달하고 계기를 마련해준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적의와 호의라는 이분법적 시선으로 자신을 접대하는 것과 달리 프로스트만이 자신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닉슨의 표정엔 자신의 내면을 속이고 외면의 야심을 치장하듯 추구하는 자의 고독이 서려있다. 마지막 인터뷰에서 스스로 고백을 자초하는 닉슨의 표정엔 그 고독에 대한 자각이 담겨있다. 거짓말을 통해 모든 사람을 속일 순 있지만 결국 스스로를 속이지 못함을 이미 깨달았던 자의 뒤늦은 회한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프로스트>는 승패에 관한 이야기다. 승자와 패자의 표정은 확연히 구별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승자보다 패자다. 닉슨은 자신의 도덕적 결함을 파고 드는 물음 앞에서 스스로 무너진다. 서로의 빈틈을 파고 들거나 유연하게 피해서던 촌철살인의 공방 속에서 결정타가 되는 건 스스로조차 감내할 수 없었던 진실의 무게다. 결코 속일 수 없던 자신에 대한 깊은 연민이 끝내 닉슨의 입을 열게 만든다. 타인의 비방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속박에서 자유롭지 못함에서 비롯된 고독은 결국 자존심을 무너뜨린다. 자신의 지난 과오를 인정하는 닉슨의 얼굴엔 피곤이 서려있다. 패배를 감지하는 자의 참담함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거짓을 가리기 위해 거짓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던 자는 결국 뒤늦게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세월의 피로를 감지하고 허망하게 주저앉는다.
결국 닉슨의 패배는 스스로를 지탱하던 거짓의 신화가 붕괴될 때 이뤄진다. 그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야심을 이룬 프로스트와 달리 닉슨은 결국 영원히 야심을 접어야 했다. 그 인터뷰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재회한 프로스트와 닉슨의 대화는 꽤나 인상적이다. 닉슨은 왜 자신도 모르게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욕망을 이루기 위해 전진을 일삼는 자가 적에게 보인 호의는 어떤 의도를 품고 있었을까. 물론 그건 어느 누구도, 심지어 당사자조차 알 수 없는 진실이다. 단지 그 삶이 얼마나 짐작하기 힘든 피로를 짊어지고 있었는가가 체감될 뿐이다. 진실을 숨기며 삶을 지탱하는 자의 삶이란 이토록 피로하다. <프로스트>는 그 거짓된 삶의 패배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설득하는 수려한 웅변이자 품격 있는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