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링 위에서는 더 이상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는 복서들의 혈전이 펼쳐지지 않는다. 대신 윤활유와 불꽃이 튀는 로봇들의 철(鐵)전이 벌어진다. 로봇들은 원격 조종에 의해서 링 위에서 주먹의 방향을 정한다. 과거 링에 올라 챔피언을 꿈꿨던 찰리 켄튼(휴 잭맨)은 이제 링 밖에서 로봇을 조종하며 새로운 삶을 꾸린다. 하지만 링 위에서보다도 링 밖에서 그의 챔피언 벨트는 더욱 요원해 보인다. 그리고 전전긍긍하던 그에게 이혼한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맥스(다코다 고요)가 나타난다.
로봇들의 복싱 경기가 열리는 2020년의 미래, 하지만 <리얼 스틸>은 로봇들의 복싱 경기가 존재할 뿐, 10여 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세상이다. <리얼 스틸>은 미래라는 시제가 중요한 SF물이 아니다. 로봇이 인간의 복싱 경기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된 미래의 풍경도 중요한 게 아니다. <리얼 스틸>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취향과 장기가 버무려진 영화다. 포기하지 않는 소년의 꿈, 로봇이나 외계인 같이 인간이 아닌 대상으로부터 전달되는 휴머니즘, 발달된 문명의 이기 속에서 발견되는 아날로그적인 감수성. <리얼 스틸>은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숀 레비가 연출한 작품이기 이전에 스필버그가 잘 하는 것들, 즉 스필버그의 영향력과 취향으로 무장된 작품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리얼 스틸>은 반목하는 부자의 회복을 그린, 퇴물 복서가 자신의 아들이 그린 꿈을 통해서 이루는 삶의 성취를 그린, 고철더미 속에 묻혀있던 낡은 로봇의 육체를 빌려서 재기의 도전을 그린 스포츠 액션물이자 휴머니즘 성장드라마다. 로봇은 거들 뿐, 중요한 건 결국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어느 부자의 성장과 성취라는 가족적인 체온과 그리고 도전적인 의지와 삶의 회복이라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리얼 스틸>의 본체에 가깝다. <리얼 스틸>을 통해서 연상할 수 있는 작품이 <트랜스포머>와 같은 전시적인 로봇영화가 아니라 <록키>와 같은 고전적인 복싱영화의 쾌감이나 스필버그의 감수성으로 무장된 휴머니즘 SF <A. I.>를 연상시키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물론 <리얼 스틸>은 CG기술의 발달 덕분에 로봇의 미장센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트랜스포머>의 성취 이후 처음으로 스크린에 로봇을 세운 영화란 점에서도 주목할만하다. 하지만 <리얼 스틸>은 실물 모형 로봇을 제작해 구동시킨 뒤, CG로 디테일을 채워 넣은 작품이다. 물론 로봇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이와 같은 방식의 촬영이 적용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이러한 제작 방식은 이 영화의 태도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CG로 채워질 허상 대신 실질적인 형체를 지닌 실물의 목격을 통해서 얻어질 생생한 리액션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리얼 스틸>은 보다 고전적인 영화들의 감성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며 이런 아날로그적인 제작 방식은 영화의 드라마틱한 체온으로 고스란히 승화됐다. 새롭고 획기적인 오락물은 아니지만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방식의 완성을 통해서 얻어지는 미덕이 <리얼 스틸>에 존재한다.
반목하던 부자가 화해와 용서를 통해서 하나의 소망을 품게 되고, 퇴물 복서가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는 과정은 결국 고철이라 여겨지던 로봇 아톰의 육체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과 같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나 다름없는 후반부의 로봇 복싱 시퀀스가 단순히 조종당하는 로봇 간의 격돌이라는 사실성을 넘어서 강자에게 맞서는 약자의 투지라는 감정을 덧입게 되는 것도 이런 맥락 덕분이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캐릭터들의 꿈을 함께 희망하게 만들고, 그 희망의 키가 되는 로봇의 승리를 염원하게 만들며, 이런 과정은 결국 로봇이라는 비인간적인 대상의 행위가 인간적인 제스처로 인식될 때, 기적을 꿈꾸게 만든다.
<리얼 스틸>은 단단한 철갑 로봇의 비주얼에 스토리텔링의 감정선이 더해진, 체온이 느껴지는 로봇 영화다. 의도된 기획물로서 기승전결의 수순이 차례대로 읽히는 작품이지만 그 작위적인 수순보다도 그 흐름 속에 존재하는 감성의 위력이 보다 깊게 느껴진다. 압도적인 KO승보다도, 7전8기의 역전승이 보다 큰 열광을 부르듯, 실패와 몰락을 겪은 루저들의 드라마는 인간과 로봇 그 어떤 대상도 피해나갈 수 없는 결정타와 같다. <리얼 스틸>은 그 한 방을 제대로 꽂아 넣는, 철권의 피니시 블로우다.
인간의 육체를 대신하는 첨단 로봇의 시대. <써로게이트 Surrogate>는 본래 단어의 의미처럼 ‘대리자’로서 기능하는 로봇을 일컫는 고유명사다. 인간을 대신한 로봇의 육체가 주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동안 인간은 자신의 집에 누운 채 두뇌활동만으로 로봇을 조종한다. 덕분에 인간이 자취를 감춘 거리엔 주름 하나 없이 탱탱한 인공피부를 두른 로봇들로 가득하다. 성형수술을 하지 않아도 얼짱이 될 수 있고, 다이어트와 운동에 신경 쓰지 않아도 몸짱이 될 수 있다. 심지어 단순히 대리적 행위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감정적 교감마저 주인과 공유할 수 있는 써로게이트는 자신을 조종하는 주체의 삶을 완벽하게 대신하는 대리인이다.
취재와 인터뷰 영상을 거칠게 편집해 서사적으로 배열한 도입부는 <써로게이트>가 주창한 세계관에 대한 객관성을 위장하기 위한 수단과 같다. 써로게이트를 혁신이라 일컫는 생산자와 몇몇 과학자, 그리고 써로게이트의 반대편에 놓인 세력들이 교차적으로 등장하는 영상은 <써로게이트>에 내포된 문제의식을 심각하게 부각시킨다. 써로게이트가 개발되어 인류의 범죄율이 완벽히 사라졌다는 17년 간의 서사를 간략히 정리하는 도입부를 넘어 현재에 다다르며 본격적인 서사를 밀고 나가는 <써로게이트>는 정체불명의 살인사건을 묘사하며 의문스럽게 본론으로 들어선다.
주인과 교감하되 피로나 충격을 전달하지 않는 로봇의 형태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만약 이 기술이 현존한다면 인류의 삶은 질적으로 풍요로워질 가능성이 높다. 사상 가능성이 높은 고난이도 작업에 인간 대신 써로게이트를 조종시킨다면 일의 정밀도는 높아지고 인간이 위험에 노출될 확률도 현저히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써로게이트>에서의 써로게이트는 특정한 기능적 작동을 위해 마련된 수단으로 활용되지 않는다. 온전히 인간의 삶을 대신하다 못해 장악해버린 로봇의 도시에서 집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일상을 영위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써로게이트>는 고의적으로 비관적인 감상을 도모하는 작품이다.
자신의 행동범위를 온전히 기계에게 양도해버린 인간들의 삶은 편리라기 보단 일종의 포기처럼 보일 정도로 기계에 예속된 삶을 산다. 그건 어쩌면 기계라는 숙주에게 육체를 강탈당한 채 에너지 공급원으로 사육되는 인간들의 비관적 미래를 그린 <매트릭스>를 응용한 버전처럼 보일 정도다. 궁극적으로 써로게이트는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문명에 의해 점령당한 인간들의 미래를 그리는 SF묵시록과 궤가 다르다. 타의적으로 삶을 빼앗긴 인류의 양상과 달리 자의적으로 삶을 양도한 인간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대리적 삶을 향유한다. 이는 직접적인 육체적 행위를 배제한 채 온전히 정신적 활동에 기댄 인간의 삶이 과연 완전한 만족을 이룰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낳는다.
‘써로게이트’는 그 상상력에 제기되는 현실성의 의문을 집요하게 따져 묻지만 않는다면 흥미로운 문제제기를 이루는 소재라 할만하다. 혈색 없는 표정으로 인간의 움직임과 감정마저 대신하는 기계적 육체는 그로테스크한 감상을 도모하는 동시에 그 존재적 형태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긴다. 인간의 뇌파를 통해 전달되는 전기적 신호로 작동하는 써로게이트가 인간의 모든 대리적 행위를 가능케 한다는 <써로게이트>의 설정은 개인적 범위와 사회적 범위에서의 접촉과 고립을 통해 다양한 감정적 양상을 발전시켜나가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들 만한 것이다. 다만 그 자질을 <써로게이트>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건널 수 있다면 말이다.
인간의 일상을 대리적으로 수행하는 써로게이트에 대한 기술적 가능성에 품을 만한 의심을 묵과한다 해도 그 기술이 완벽하게 보편화된 인류의 풍경은 지나친 허풍에 가깝다. 현실적 여건에 대한 물음도 그렇거니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유행적 풍토가 현상을 넘어 보편적인 삶의 풍경으로 뿌리를 내렸다는 영화적 설명에 수긍하기란 쉽지 않다. 설정에 대한 의문은 스토리의 진전에 대한 불신으로 확산될만한 것이다. 범죄수사물의 형태에서 음모론의 양상으로 발전해나가는 스토리는 적절한 설득력을 등에 업고 진전된다. 결국 기이하게 통용돼버린 기이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개인, 그리어(브루스 윌리스)의 감정적 자각과 충동은 정착된 세계관의 질서를 무너뜨릴 정도로 강건한 것이라지만 실상 그 감정을 세계관의 전복으로 활용하는 영화적 태도가 지나치게 안이한 탓에 특별한 의미 자체를 무마시킨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부서 버리는 광경을 설득력 있는 것처럼 관람하길 강요하는 느낌이다.
<써로게이트>는 세계관에 대한 디자인에 심취해 그럴듯한 이미지를 구사할 뿐, 그 구동방식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아이디어에 숨결을 불어넣는 건 표면적인 설정에 대한 강요만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기본적인 설정에 적절한 설득력을 내장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껍데기를 만끽하는 권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동시에 인류와 대비되는 대리 로봇의 존재를 통해 휴머니즘적 성찰까지 경유하고 액션영화로서의 묘미까지 내달리곤 하는 <써로게이트>의 재원적 야심은 부실한 설계도 덕분에 일거에 무마된다. 설득력이 부족한 세계관 덕분에 기초적인 아이디어로부터 얻어지는 흥미는 손쉽게 휘발된다. 특히나 상투적인 결말은 <써로게이트>가 지극히 안일한 영화임을 인증하는 태도나 다름없다. 주름이 선명한 브루스 윌리스의 얼굴만이 추억을 자극할 뿐이다.
<트랜스포머>가 이룬 시각적 성취는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다. 로봇의 철판을 CG로 구현하는 건 크리쳐나 생물의 피부를 재현하는 것보단 손쉬운 작업이다. <트랜스포머>의 성취는 사실상 이미지의 구현 자체에 있다기 보단 그 이미지가 정신적 편견에 가까운 심리적 장벽을 무너뜨렸다는 지점에 있다. 테크놀로지의 혁명이라는 흔해빠진 수사보다도 중요한 건 거대변신로봇들이 실사적인 캐릭터로서 존재하는 오락영화가 시장성을 얻었다는 사실 자체다. 그러니까, ‘아마, 우린 안될 거야’를 ‘꿈은 이루어진다’로 변화시킨 저력이랄까. 이는 디스토피아적 예감을 등에 업고 스릴러적 감각을 바탕으로 두른 액션 시퀀스를 선사하던 <터미네이터>의 인간형 로봇과 전혀 다른 재질의 쾌감을 두른 본격 로봇 블록버스터의 출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이하, <트랜스포머2>)은 전작의 성공에 힘입은 속편이다. <트랜스포머2>도 상업적인 성공을 밑천으로 컨텐츠의 자가증식을 거듭 반복하는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의 전략을 고스란히 차용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트랜스포머2>가 선택한 세일즈 포인트는 양적 팽창이다. 어느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속편들이 그렇듯 <트랜스포머2>에서도 물량공세적 팽창이 단연 눈에 띈다. 일단 로봇의 개체수가 현저히 늘었다. 그리고 액션 스펙터클의 규모도 전작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너비를 확장했다. 심지어 2시간 30여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은 <트랜스포머2>의 덩치를 가늠하기 좋은 요건이다. 러닝타임의 확대는 서사보단 묘사에 대한 팽배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LA도심을 비롯해 미국을 무대로 벌어지던 로봇들의 활약상은 속편에 이르러 상하이와 이집트 등 전세계적인 랜드마크를 점령하듯 펼쳐지고 나열된다.
로봇의 개체수가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전작보다 눈에 들어오는 로봇 캐릭터는 현저히 줄었다. ‘옵티머스 프라임’과 ‘범블비’를 제외한 나머지 로봇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소모적이다. 쉽게 말하자면 매력이 없다. 물론 ‘스타스크림’이나 ‘메가트론’과 같이 악의 축에 선 로봇들도 비등한 자태로 그 맞은 편에 온전히 존재감을 알리지만 무채색의 디자인으로 통일성이 두드러진 ‘디셉티콘’로봇들은 하나같이 몰개성적이다. 심지어 컬러풀한 색채감으로 개성을 자아내는 ‘오토봇’로봇들도 딱히 명확한 개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새롭게 가미된 트윈스 로봇, ‘스키즈&머드플랩’은 인상적이라기 보단 눈에 밟히다 마는 수준이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구닥다리 로봇 ‘제트파이어’정도를 제외하면 새롭게 등장하는 캐릭터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매력을 전달하는 로봇 캐릭터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개체수가 증가했을 뿐, 하나같이 일회용에 가깝다. 물론 그만큼 질적으로 풍성한 느낌을 얻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만 그만큼 소모적인 감상을 부추긴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물론 후반부에 등장하는 초대형 합체로봇 ‘디베스테이터’나 ‘옵티머스 프라임’의 합체버전은 새롭게 ‘득템’했다 할만한 볼거리를 추가한다. 게다가 중반부에 다다를 즈음엔 <터미네이터>를 직설적으로 겨냥한 듯한 인간형 로봇조차 등장한다. <그렘린>을 모방한 듯 방정맞게 움직이는 소형 로봇들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캐릭터로서의 활용도가 낮아보인다. 늘어난 숫자만큼 출연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하는 로봇이 많아 보인다.
빠른 속도감을 자랑하는 컷의 흐름은 전작만큼이나, 혹은 전작보다 더 현란하다. <트랜스포머2>는 마치 눈에서 뇌로 시각적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와 경쟁하듯 컷을 구겨 넣은 이미지의 속도감이 대단하다. 그 와중에 고속촬영을 모방한 슬로모션으로 거대한 속도감 사이에 작은 심호흡을 마련하기도 한다.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밀고 들어오는 시각적 정보는 두뇌적 판단을 흐린다. 정신 없음 자체를 만족의 요건으로 유도하는 양상이다. 사실상 <트랜스포머>의 로봇들은 활유적이며 의인화된 강철피부의 유기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트랜스포머>의 인정할만한 성과는 스크린에 구현된 로봇의 육중한 자태에도 있지만 그보다 더 나아가 로봇의 육체에 인간적 감수성을 투영했다는 지점에 있다. <트랜스포머2>는 이런 감수성을 더욱 노골적으로 부각시킨다. 로봇간의 격돌 과정에서 파편이 떨어져나가고 윤활유를 내뿜는 옵티머스 프라임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마치 인간의 피부조직과 피로 대입해도 좋을 것 같다는 인상마저 든다. 로봇의 파괴가 아닌 살해처럼 인식된다. 그것은 엄연히 아시모프의 로봇3원칙 따위와 무관한 별나라 생명체들이다. 인간이 창조한 유사 생체가 아닌 인간과 동등한 하나의 종족인 셈이다. 인간 캐릭터, 즉 샘 윗위키(샤이아 라보프)나 미카엘라(메간 폭스)의 매력이 전작에 비해 반감됐음에도 별다른 불만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 로봇 캐릭터들이 그 공백을 대신할만한 자질을 지닌 덕분이다. 엄밀히 말해서 <트랜스포머2>의 주인공은 로봇이다. 오히려 인간이 조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CG로 구현된 가상의 존재가 인간의 연기를 압도한다. 이는 호불호의 영향력을 떠나 흥미로운 지점이다.
중량감이 늘어난 액션신은 시각적 정보가 층위를 형성할수록 지독한 기시감을 부른다. 변신과 난투의 동어반복 속에서 그 특별한 매력이 점차 반감되는 느낌이다. 2시간 3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에서 로봇의 육박전이 차지하는 비율은 드라마의 밀도보다도 광활하다. 항공모함을 부수고,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파괴하고, 로봇들이 몸을 던진 주변이 쑥대밭으로 변하는 사이, 한낱 손바닥만한 인간들은 발에 땀나게 뛰고 달릴 뿐이다. 명확히 의미를 전달하자면 늘어난 부피에 비해 질량은 축소된 느낌이다. 오락적 밀도가 감소됐다. 로봇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적극 활용했던 전작의 유머는 좀처럼 활용되지 않는 반면 입담도 느슨해졌다. 전작보다도 비범한 역할을 자처하지만 오히려 전작에 비해 활용도가 낮아 보인다. 그만큼 캐릭터의 대비를 통한 시너지가 약해진 느낌이다. 인간과 로봇의 캐릭터의 관계를 통해 활성화되어야 할 입체적 구조가 헐겁다. 그만큼 감흥의 유효시간도 짧아진다. <트랜스포머2>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현란한 영상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블록버스터다. 이는 분명 유효하다. 하지만 그 유효함이 끝없이 지속되지 않는다. 동어반복적인 액션신, 몰개성적인 캐릭터로 구축된 장시간의 러닝타임은 결말에 임박할수록 과감한 물량공세를 아끼지 않음에도 지켜보는 이를 지치게 만든다. 단순한 시각적 감흥에 기댄 너비의 확장만을 앞세워 2시간 30여분을 채우려는 시도는 무모해 보인다. 물론 전작에 비해 좀 더 암담해진 분위기는 비범한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완구로봇 엔터테인먼트의 수준에 가깝던 <트랜스포머>를 성인 취향의 오락물로 끌어올렸다 할만한 변화다. 때때로 그것은 만화적 취향의 로봇 대전이 아니라 장르적 서스펜스가 가미된 잔인한 혈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옵티머스 프라임과 디셉티콘 3종 로봇이 펼치는 중반부의 전투신은 <트랜스포머2>의 액션신 가운데 백미라 꼽을 수 있는 장면이다.
마치 현실에 존재하는 것마냥 생생한 질감으로 스크린에 투사된 로봇의 현란한 움직임을 지켜본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대단한 엔터테인먼트다. 망막을 피로하게 만드는 컷의 속도감을 따라잡는다는 건 마치 마약에 중독된 것마냥 포기할 수 없는 유흥일지도 모른다. 말초신경이 마비될 것 같은 시각적 압도감을 감상한다는 건 분명 흔한 기회는 아니다. 주체할 수 없는 시각적 욕망에 비해 느슨한 농담과 육중한 액션의 동어반복 가운데 사족이 남발되는 스토리를 긴 시간 동안 감내할 수 있다는 것도 그것을 충만 시켜줄 것이라 믿어지는 시각적 자극이 존재한다는 전제 덕분일지 모를 일이다. 어지럽고 산만하게 돌아가는 과잉적 이미지 가운데 로봇이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리고 그것이 선명하게 판별되진 않아도 변신을 거듭한다는 것에 현혹된다면 <트랜스포머2>는 충분히 만족할만한 오락영화라 추켜세울만한 요건을 갖춘 셈이다. 빈 깡통임에 틀림없지만 깡통 디자인이 압도적인 건 사실이므로, 그 디자인 자체에 의미를 둔다면 결코 무시하기 힘든 결과물이다. 하지만 <트랜스포머2>는 분명 적정수준의 역치를 넘어선 과잉의 자극을 내보내는 중독적 엔터테인먼트다. 즐기고 있다기 보단 홀리고 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과다한 자극적 세기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내실은 긴축되고 자극은 증폭됐다. <트랜스포머2>의 장기적인 흥행성패도 그 지점에 대한 호불호를 통해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시에 그 결과는 어쩌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자극적 세기를 조율할만한 새로운 지표로서 참고될 가능성도 농후해 보인다. 물론 테스트베드 대한민국의 이상기후적인 열광이 보편적인 기초사례로 평가될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과학기술의 진화 속도는 나날이 빨라진다. 그와 함께 과거엔 공상과학의 소재가 되던 이미지들이 현재에선 일상적 산물이 된다. 테크놀로지의 변화와 함께 자연스레 인터페이스도 변한다. 이미지의 변화는 중요하다. 화상전화나 터치스크린 따위가 더 이상 생소한 허구가 아니라는 건 구시대에서 SF적 이미지로 활용되던 산물들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반증이다. 단지 인간을 위협하는 로봇의 등장만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킬 시대는 지났다. LA도심에 뒤엉켜 나뒹구는 변신 로봇의 시대에서 터미네이터의 존재는 희미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남았다는 사실이다. 우려먹든, 개조하든, 프랜차이즈의 수명이 유효하다고 판단될 때 한번이라도 시도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젠 주지사로 활동 중인 아놀드 슈왈츠네거의 왕림이란 점에서 기대를 모았으나 실질적으로 시리즈의 커다란 구멍이란 오명을 남긴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이하, <터미네이터3>)이후로 시리즈 자체가 무색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리즈는 다시 한번 전진을 선언한다.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Terminator salvation>(이하, <터미네이터4>)은 본래 원제에 포함된 ‘salvation’이라는 단어처럼 시리즈의 구원을 명령 받은 새로운 적자다. 미래의 예언적 영웅을 보존하기 위한 현재의 사투를 그려 온 지난 세 편의 시리즈는 비로소 시간을 지나 그 미래에 도달했다. 사실상 어떤 설정을 만들어내기 위한 껍데기 구실을 하던 본질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맞이했다는 이야기다. 결코 버릴 수 없는 아이템이다.
<터미네이터3>가 역대 작품 중 가장 형편없는 만듦새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 역할을 간과할 수 없는 건 바로 그 위치에 있다. 말로만 듣던 ‘심판의 날(judgement day)’을 실시간의 상태에서 묘사하고 있다는 건 시리즈의 미래를 여는 교두보 역할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터미네이터4>는 그 이미지를 밟고 선다. 2018년, 심판의 날을 지휘하던 슈퍼컴퓨터 스카이넷이 만들어낸 인간들의 지옥 속에서 기계와 인간의 전쟁이 실시간으로 묘사된다. 더 이상 과거의 존 코너를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 전쟁을 이끄는 진짜 영웅 존 코너를 볼 수 있다. 물론 <터미네이터>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었던 아놀드 주지사 님의 순간이동 누드신을 추억으로 떠밀려 보내야겠지만.
서사의 완성 방향은 반대지만 <터미네이터4>는 흡사 <스타워즈>와 비슷한 노선을 걷는 시리즈라 할만하다. 하나의 트릴로지를 완성한 이후로 서사적 공백을 채우는 트릴로지를 계획한다. 다만 트릴로지의 시간적 격차가 크다는 점에서 트릴로지 사이의 영상적 괴리감이 발생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면 이득을 보는 쪽은 <스타워즈>보다 <터미네이터>쪽이다. <스타워즈>가 프리퀄 형식의 서사를 뒤늦게 기획한 탓에 오히려 과거보다 영상기술적 성과가 낮은 미래의 이미지를 보유하게 된 것과 달리 <터미네이터>는 순차적인 서사의 흐름에 놓여있는 덕분에 이미지의 진화 방향에 따른 거부감에서 보다 자유롭다. 게다가 추격의 형태로서 액션장면을 연출하던 전자들과 달리 새로운 시리즈는 거대한 전투씬과 전쟁의 이미지를 그려 넣는다는 점에서 블록버스터로서의 너비가 과거에 비해 광활하다. 과거엔 묘사할 수 없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게 가능해졌다. 시리즈의 탄생 배경은 이런 기술 제반 조건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이미지는 압도적이다. <트랜스포머>가 변신로봇 풀세트를 완비하며 로봇영화의 정점을 찍었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아동 취향의 꿈을 대리 만족시키는 완구로봇의 실사적 성취감에 가까운 성과다. <터미네이터>의 로봇들은 이미지만으로도 인간에게 위협적인 디자인을 갖춘 살상병기란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보존한다. <터미네이터>는 단순한 액션블록버스터에 불과하지 않은, <에이리언>만큼이나 불길한 서스펜스를 발생시키는 스릴러적 취향의 SF영화다. 과거 아놀드 주지사님이 열연하던 시절, 반토막난 T-800 로봇에 추격당하던 사라 코너의 포복 장면이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야기한 건 제임스 카메론의 연출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금속로봇의 날카로운 손이 주는 위협적 디자인도 중요한 원인이라 할만하다. 이번 시리즈에서도 유사한 기시감이 발생한다. 존 코너(크리스찬 베일)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는 ‘T-800’의 등장신은 앞선 전례만큼이나 위협적이다.
<터미네이터4>에서 두드러지는 건 새로운 로봇들의 등장이다. 비행기 로봇인 ‘헌터킬러’, 바이크 형태의 로봇 ‘모터 터미네이터’, 물뱀형태의 수중로봇인 ‘하이드로봇’을 비롯해 거대한 ‘하베스터’까지, T시리즈의 인간모델로봇이 아닌 기계적 로봇들이 대거 등장하며 제각각의 쓰임새에 걸맞은 액션을 연출하고 긴장감을 발생시키며 이미지의 가능성을 확대시킨다. 게다가 분리와 합체의 기능마저 전시하는 모습은 마치 <트랜스포머>의 성과가 남긴 유물처럼 인식될 정도다. 무엇보다도 과거 첫 번째 시리즈에서 사라 코너를 구하기 위해 미래에서 날아온 카일 리스의 꿈을 통해 짧게 보여지던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의 이미지가 온전히 펼쳐진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올드팬과 새로운 팬층 모두에게 흥미를 부를만한 지점이다. 육중한 전투씬과 거대한 폭파 장면, 그리고 스피디한 카체이싱과 공중전까지, <터미네이터4>는 전쟁 영화나 재난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파괴적인 이미지를 과감하게 전시한다. 물론 단순히 스크린이 스펙타클을 담보로 한 전시관 역할로 기능성이 제한되는 건 아니다. 뛰어난 건 단지 영상을 만들어내는 기술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영상을 구현하는 연출력에 놓여 있다. 특히 일반적인 핸드헬드를 선택하지 않고 고정된 샷 안에서 존 코너의 상하가 역전되는 구도를 묘사하는 헬기추락신의 앵글은 이 영화의 탁월한 장면 연출력을 대변하는 이미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액션 장면들은 훌륭한 연출과 구성을 통해 하나같이 빛을 발한다.
물론 <터미네이터4>에서 중요한 건 액션만큼이나 스토리다. <터미네이터4>는 ‘T-600’이 T-800’으로 진화하는 2018년을 배경으로 둔다. 기존의 시리즈에서 등장했던 ‘T-1000’ 그리고 ‘T-X’와 같은 첨단로봇의 진화는 좀 더 뒤의 일이다. 이는 곧 <터미네이터4>가 어떤 시작점에 있는 이야기이며 시리즈의 가능성을 새롭게 재단해도 좋은 위치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시리즈는 자신의 지난 발자취를 배려해야 한다. 저항군을 이끄는 존 코너와 마찬가지로 존 코너의 존재를 완성하는 카일 리스(안톤 옐친)의 존재는 시리즈의 숙명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마커스 라이트(샘 워싱턴)의 등장은 <터미네이터4>의 선택이다. 존 코너만큼이나 <터미네이터4>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마커스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존엄성이 어디서 발생하는가라는 물음에 도달하기 위한 말과 같다. 동시에 마커스는 과거 <터미네이터>가 지속시켰던 규칙적인 관계를 지속시키는 중요한 캐릭터다. 표적이 되는 인간과 표적을 쫓는 로봇, 그리고 표적을 지키는 로봇이라는 삼각 구도의 유지는 새로운 시리즈를 통해서도 가능해진다. 또한 마커스는 인간보단 로봇에 가까웠던 기존의 인간형 로봇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인간적인 고뇌가 뒤섞인 표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다 매력적인 캐릭터다. 다만 <터미네이터4>의 야심이 관건이다.
<터미네이터4>는 분명 서사의 활용도에 있어서 운명론을 배제할 수 없는 영화다. 과거와 미래의 중간단계에 착륙한 <터미네이터4>에게 선택의 여지란 많지 않다. 다만 어느 정도로 과감해질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마커스는 그 돌파구를 위한 일종의 열쇠다. 개봉 전 세간에 유출됐던 파격적 결말도 그런 가능성에서 출발한 하나의 결과적 형태였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영화는 안정을 추구한다.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기존의 인과율을 흔들만한 시도를 감행하느니 적절한 선에서 파격을 선사한 뒤 암묵적 룰을 따른다. 이는 기존 시리즈의 규칙을 위반하지 않는 방식이다. 구원자의 위치에 선 로봇의 퇴장은 시리즈마다 반복된 형태이므로 <터미네이터4>가 선택한 방식 또한 규칙을 준수한 시리즈라 할만하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터미네이터4>를 어떤 가능성 안에 가두는 태도처럼 보인다.
결국 <터미네이터4>는 마커스의 활용을 일회적인 수위에서 멈춤으로써 자신의 운명론을 공고히 다지지만 반대로 그 운명론에 철저하게 갇혀버렸다고 말해도 상관없는 형태로 완성됐다. 이대로라면 결국 카일은 언젠가 과거로 보내질 운명이고, 존 코너는 미래에서 끝없이 진화하는 기계와 맞서야 한다. 정해진 운명론에 속박된 서사의 흐름이 경직될 수 밖에 없다. 물론 기존에 완성된 이야기 구도를 존중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마치 예언을 증명하기 보단 현실을 예언에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다. 덕분에 시리즈 자체의 가능성이 얕아진 인상이다. 게다가 개별적인 작품 자체로서의 스토리도 조금씩 빈틈을 드러낸다. 인과관계를 배려하는 디테일이 부족하다. 심지어 중요한 설정을 설득할만한 배경 자체가 누락된 경우도 적잖게 눈에 띈다. 스토리텔링 자체가 완벽한 수준은 아니다. 지난 시리즈를 숙지하지 못한 새로운 젊은 관객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맥락이 존재한다는 건 오랜 세월의 공백을 둔 시리즈의 인과율에서 비롯된 급소다 .
분명한 건 기존의 시리즈가 발생시키던 묵시록의 기운이 이번 시리즈를 지탱하는 기반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건 이 시리즈가 가상의 서사로 전제하던 막연한 디스토피아의 운명론을 실시간의 현실적 이미지로 묘사하는 단계까지 나아간 덕분이다. 비로소 존 코너는 미래를 위해 생존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미래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터미네이터4>의 의미는 그 지점에 있다. 언젠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 목적지에 도착했다. 시리즈의 명성을 좌우하던 장기 역시 그와 함께 변한다. 묵시록의 예언은 하이브리드 영상으로 대체된다. 상상이 아닌 이미지가 시리즈를 지탱한다. 더 이상 형태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건 불필요하다. 물론 운명적으로 두 세계는 결착되어 도무지 분리할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리즈는 자신이 설계했던 운명의 영토로 들어섰다. 존 코너는 미래의 불안과 싸우는 것이 아닌 그 미래에서 싸운다. 그 운명적인 단계를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운명을 주체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스스로 운명에 끌려간다. 개별적인 작품 자체의 결말을 지켜보는데 무리는 없겠지만 시리즈의 미래가 위태롭게 느껴진다. 돌파구를 찾아내기 보단 스스로 땅을 파고 들어가는 기분이다. 일시적인 업데이트엔 성공했지만 새롭게 설치된 메인보드의 장기적인 한계가 감지된다. 차후 업그레이드가 관건이다.
낭만적인 선율과 함께 우주의 황홀경을 비추던 스크린이 중력에 이끌리듯 인공위성들의 잔해를 헤치고 지구상으로 돌입한다. 빈 깡통이 된 빌딩 사이사이를 메우는 각종 폐기물. 생명이 말소된 듯 인적이 사라진 그 거리의 쓸쓸함이 보는 이의 마음을 황량하게 물들일 찰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낭만적인 멜로디가 그 쓸쓸한 적막을 밀어낸다. 캐터필러(caterpillar)로 전진하는 작은 로봇 ‘월ㆍE(WallㆍE: Waste Allocation Load Lifter-Earth-class)’는 트랜지스터 오디오 기능을 겸비한 자신의 몸통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도처에 널린 폐기물을 압축해 차곡차곡 쌓는다. 그 모든 것은 <나는 전설이다>에 버금갈만한 썰렁한 대도시의 적막함을 명랑하고 낭만적으로 밀어내는 월ㆍE로부터 그렇게 시작된다.
강아지의 눈망울처럼 호기심이 충만한 두 개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월ㆍE는 유일하게 정을 붙이며 키우는 바퀴벌레 한 마리와 매일같이 아기자기한 일상을 지속해나간다. 그것은 종종 대부분의 사람이 나이가 듦에 따라 상실해버린다는 맑고 순수한 눈빛을 닮은 두 렌즈로 하늘을 올려다보곤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로봇 주제에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는다. 낡은 테이프로 재생되는 오래된 영화를 감상하던 월ㆍE가 ‘사랑이란 그런 것(to be loved a whole life long)’이란 로맨틱한 가사를 품은 감미로운 멜로디 앞에서 납작한 두 손을 모은 채 동그란 렌즈를 글썽거릴 때,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겐 실로 사랑스럽고 가련한 외로움이 전해진다. 먼 우주에서 날아온 미지의 존재 ‘이브’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월ㆍE에게 깃드는 어떤 간절함이 허망해 보이지 않는 건 그 덕분이다. 감정을 품은 로봇, 그것은 흡사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우화적 답변처럼 순진무구하지만 설득력 있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4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동안 변변찮은 언어가 발견되지 않는 <월ㆍE>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를 빽빽하게 채운 웬만한 극영화보다도 풍부하고 깊은 감정을 전달한다. 그건 이 말 못하는 로봇, 월ㆍE의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풍부한 감정이 형성되는 까닭이다. 그저 두 개의 커다란 렌즈로 이뤄진 얼굴과 네모난 몸통, 가늘고 납작한 팔, 다리를 대신한 두 개의 캐터필러, 이토록 단순한 형태를 지닌 월ㆍE가 세심하면서도 완전한 감정을 전달하는 건 그 행동에 대한 진심이 온몸으로 발견되는 덕택이다. 구시대적 아날로그 기능성을 겸비한 로봇 월ㆍE는 그 인공적인 형태를 통해 되려 역설적으로 순수한 낭만을 극대화시킨다.
디스토피아를 정화하는 태생적 임무를 (700여 년간) 홀로 수행한 월ㆍE는 인간이 혐오하는 쓰레기를 자신의 몸에 주워담아 압축한 뒤, 정교하게 쌓아 올린다. 또한 월ㆍE는 인간이 불필요하다고 여긴 쓰레기 더미에서 쓸만한 것들을 발견해내는 재활용의 수집가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작은 로봇은 인간이 불필요하다고 여겨 버려진 것들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셈이다. 향유에 길들여진 인간들의 무분별한 소비 의식과 반대로 인간의 손에 의해 창조되고 소비되는 인공지능의 로봇이 버려진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형태로 쌓아 올린다는 행위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만하다. 그건 단지 명령의 수행에 불과한 행위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월ㆍE가 정사각형 형태로 압축한 폐기물들은 하나의 구조물로서 재탄생한다. 그러나 그것은 건축적 기능성을 지니지 못한다. 결국 그것은 하나의 예술적 행위에 가깝다. 가히 모방적인 창조 행위다. 월ㆍE는 인간과 유사하다. 최대한 그것을 드러내지 않지만 감정을 지닌 것처럼 행동하며 인공지능의 산술적 결과로 부여되는 명령어적 단위의 2차적 행위이기 이전에 1차적인 본능의 움직임을 보인다. 또한 <월ㆍE>에서 등장하는 대다수의 로봇들이 이와 마찬가지다. 이들은 명백히 인간의 행위와 닮았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초라해진다. 월ㆍE를 비롯한 로봇들은 인간 스스로가 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인간의 반대편에서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액시엄(Axiom) 호에 탑승한 인간들은 감정조차 망각하고 판단력마저 상실한 채, 가상 윈도우에 시선을 고정하며 옆도,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기계적 인공지능이 부여하는 삶의 패턴에 수동적 형태로 사육되듯 살아간다. 심지어 책을 넘기는 것조차 잊어버린 선장의 모습은 아날로그 기능성을 상실한 디지털 인간의 퇴보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자신들이 살아가던 지구를 버리고 우주 한복판에 노아의 방주처럼 떠있는 액시엄 호에서 인간들은 비만적 퇴보를 거듭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들의 명령(directive)에 철저히 따르는 기계들은 그들의 편의를 위해 그들을 사육하는 통제관의 임무를 착실히 수행한다. 아날로그 시스템의 명령어가 유명무실해진 디지털 오토매틱 시대의 인간들은 철저한 편의 속에서 자생적 능동 의지를 망각한다. 가스충전소도, 거대한 마트도, 심지어 고속터미널까지도 ‘BnL(Buy N Large)’이라는 통일된 브랜드가 지배하는 획일적인 미래세계의 풍경은 몰락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의미심장하게 드러낸다.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인간의 소비성만이 극대화된 세계는 결국 자생을 위한 비판적 의식마저 망각한 인간의 영토로부터 인간을 몰아낸다.
그 모든 물음에 대한 답변을 작동시키는 건 작고 볼품없는 로봇의 진실된 연정, 즉 로맨스의 태동이다. 미지와의 조우 앞에서 온몸을 덜덜거리고 떨면서도 외로움에서 비롯된 깊은 호기심으로 강아지처럼 ‘이브’의 뒤를 졸졸 쫓던 월ㆍE가 그 뒤를 쫓아 지구를 벗어난 먼 우주로 나아갈 때, 이 여정은 실로 우주적인 감동을 부른다. 기능이 정지된 이브에게 헌신적이던 월ㆍE가 이브를 소환하는 우주선을 쫓아 우주로 나아가게 되고 그 덕분에 월ㆍE는 지구를 벗어나 거대한 우주와 대면한다. 자신을 부여잡던 중력권의 세계를 벗어나 거대한 무중력의 세계를 체감하는 월ㆍE의 탐험은 우주의 황홀경에 감탄하는 월ㆍE의 모험 자체만으로도 진귀한 감동을 안겨준다. 특히 월ㆍE가 토성의 고리를 손으로 스치며 지나가고, 후에 소화기의 출력을 이용해 이브와 함께 우주공간 위를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경은 한 폭의 회화처럼 실로 아름답다.
무엇보다도 <월ㆍE>가 감성을 자극하는 건 그 모든 여정이 월ㆍE의 헌신적인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점일 것이다. 아이의 눈처럼 맑고 투명하며 순수한 눈(?)을 지닌 월ㆍE가 이브를 구하겠다는 신념 하나로 지구에서 우주로 나아가 종래엔 액시엄 호를 지구로 이끌어오는 과정이 실로 감동적인 건 그것이 애초에 의도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의식적 행위가 아니라 헌신적인 배려가 이룩한 거대한 결과였기 때문에 순수한 감동의 진폭과 여진이 더불어 거대해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기 위해서였을 따름이다. 이는 실로 거대한 범우주적인 스케일의 감동을 야기시킨다. 결국 월ㆍE의 로맨스는 공존을 이룬다. 구시대적인 아날로그 형태의 청소로봇과 신세기적인 첨단 로봇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종래엔 그 모든 것이 지구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다시금 합리적인 질서를 되찾고 새로운 인류의 기원을 이룰 것이다. 영화의 에필로그적인 엔딩과 같이.
순수한 창조력을 바탕으로 항상 수준 이상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픽사(Pixar)는 <월ㆍE>만큼은 수준 이상을 넘어 감히 걸작을 완성시켰다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월ㆍE>는 진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로맨스의 경지를 보여준다. 적어도 세 번 이상은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무중력의 신비같이 황홀하면서도 태양처럼 따스하고 우주만큼 거대한, 형용할 수 없는 진경의 감동을 아로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