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 차게 시작한 베이커리 사업은 씁쓸한 과거의 실패담이 돼버렸고, 비호감이 철철 넘치는 룸메이트는 상의 한마디 없이 역시 비호감인 여동생을 집에 모셔놓고도 기고만장으로 일관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애인에게는 그저 수많은 섹스 파트너 가운데 하나로 취급 당할 뿐인, 그 혐오스러운 일상의 주인공은 바로 애니(크리스틴 위그). 그리고 어느 날, 그녀의 절친한 친구 릴리언(마야 루돌프)이 그녀에게 기쁜 한편으로는 우울한 소식을 전한다. 함께 늙어가는 노처녀 친구가 자신의 결혼 소식을 전한 것 그리고 들러리 대표로 서주기를 부탁 받은 것. 둘도 없는 친구의 일생일대의 이벤트를 위해서 애니는 그 요청을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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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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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시리즈와 한 편의 스핀오프에 이은 프리퀄.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낡은 시리즈의 심장을 되살리는 할리우드의 심폐소생술 공식을 충실히 따른 결과물이다. 하지만 어떠한 기획 의도와 무관하게 이 작품은 시리즈의 갱생을 위한 성공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의 성장 과정, 그들의 만남, 그리고 결국 그들이 갈라서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창세기적인 서사의 흥미만큼이나 엑스맨이라는 유닛의 개성과 이 시리즈의 장점이 어디 있는가를 잘 아는 작품이다. ‘페이스오프되거나 업데이트된 돌연변이 캐릭터들의 신선한 활약상을 전시하는 것만으로도 감각이 짜릿해진다. 유머와 서스펜스, 드라마와 액션이 탁월하게 배합된 이 영화의 감각은 매튜 본이 브라이언 싱어 못지 않게 재능 있는 연출가임을 설득시키고도 남는다. 무엇보다도 이 매력적인 돌연변이들의 근원을 소개하는 근사한 기회가 마련됐다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뚜렷한 성과일 것이다. 시리즈를 위한 단단한 뿌리가 생긴 셈이다.

 

(무비스트)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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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의 숫자가 빼곡히 적힌 종이엔 인류의 운명이 걸려있다. 그 숫자들은 인류에게 찾아올 재앙을 예언하는 암호와 같다. 1959년 메사추세츠의 초등학교에서 개교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묻었던 타임캡슐로부터 50년 만에 발견된 종이엔 지난 50여 년간 전세계에서 발생한 모든 재앙을 예언한 숫자들로 채워져 있다. 문제는 그 외의 숫자들이다. 지난 50년 간 발생했던 재앙을 지목하는 숫자들 외에 다가올 재앙을 가리키는 숫자들이 있다는 것. 다가올 재앙의 정체를 반신반의하는 사이 끔찍한 예감은 실재가 된다. 재앙이 발생하고 사람들이 죽는다. 예언이 작동한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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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잉> 단평

cinemania 2009. 4. 11. 10:45

모든 것은 이미 의도된 순서대로 이뤄진다. 모든 것은 의미나 의도가 없는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대비적인 두 주장은 인과관계에 대한 근본적 탐구로 맞닿아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을 근거로 둔다 해도 그 결과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건 매한가지다. <노잉>은 그 결과값에 대한 이야기다. 예상되는 결과를 안다는 것이 무력해지는 순간이란 단지 안다는 것만으로 어떤 변화를 이룰 수 없는 거대한 재앙 앞에 섰을 때에 해당된다. <노잉>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대재앙 앞에 선 인간이 그 무력함을 어떤 방식으로 수긍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음모론에서 출발하는 영화는 종말론으로 종착하며, 지식을 동원하던 추리는 성찰을 도모하는 영험으로 나아간다. 극복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길길이 날뛰기 보단 어떤 방식으로 그 운명을 수긍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전해진다.

 

다소 당황스럽겠지만 <노잉>은 어느 재난 블록버스터와 다른 방식으로 숭고함을 묘사한다. 극복이 아닌 체념으로, 그리고 삶이 아닌 죽음을 각오하는 자들의 운명을 그린다. 유희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비명이 선연한 재난은 <노잉>을 온전히 실존적인 문제제기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결말부에 다다르면 그 모든 것이 비단 스크린 너머의 결과물로서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다. 그 즈음에서 어쩌면 생각해야 한다.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사과 나무 한 그루를 심을 수 있을까? <노잉>은 블록버스터의 탈을 쓴 철학입문서처럼 깊은 사유를 부른다. 물론 압도적인 영상은 끔찍할 정도의 스펙터클을 부여한다. 하지만 그 광경을 마냥 체험하기란 어렵다. 짜릿하기 보단 끔찍하다. 그 너머에서 우린 새로운 세계를 목도한다. 자신의 멸망을 통해서 희망을 얻을 수 있다면 그 희망을 긍정할 수 있나? 역시나 어려운 물음이다. 하지만 이는 분명 오늘날에 있어서 현명한 물음이기도 하다. <노잉>은 보기 드물게 현명한 블록버스터인 것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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