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챙이 앞뒤로 달린 디어스토커를 쓰고, 어깨를 덮은 긴 케이프가 인상적인 인버네스 코트 안에 단정한 라운드 슈트를 갖춰 입은 채 중후한 파이프 담배를 물고 한 손엔 지팡이를 쥔, 우리가 생각하는 셜록홈즈의 모습. 1887년 아서 코난 도일의 ‘주홍색 연구’에 처음 등장한 이래로 세기를 초월해 고전적인 추리문학의 아이콘이 된 셜록홈즈는 19세기와 20세기 사이 영국을 배경으로 활약하는 셜록홈즈는 아서 코난 도일의 고전추리소설 ‘셜록홈즈’시리즈의 셜록홈즈란 분명 그런 남자다. 세련되고 지적인 이 영국탐정은 그가 등장하는 원작소설을 굳이 접하지 않은 이에게조차 그 이미지를 어필할 정도로 시대를 뛰어넘어 장르적인 아이콘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구축했다.
가이 리치가 연출한 <셜록홈즈>는 우리가 잘 알거나, 혹은 잘 알지 못해도 그럴 것이다 생각하는 셜록홈즈의 이미지와 거리를 둔 작품이다. 아서 코난 도일의 원작소설과 함께 리오넬 위그램의 코믹스북을 참고해 제작했다는 가이 리치의 <셜록홈즈>에서 셜록홈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활발한 두뇌활동 못지 않게 근육을 움직이길 즐기는 사내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추리력을 통해 이성적으로 사건의 꼬리를 좇는 아서 도난 코일의 셜록홈즈와 달리 <셜록홈즈>의 셜록홈즈는 주먹질도 불사할 정도로 다혈질이며 호전적인 본능을 감추지 못하는 마초적 사내다. 물론 아서 도난 코일은 일찍이 그의 셜록홈즈 시리즈 초기작에서 그가 검도나 권투에 능하다고 기록한 바 있다. 하지만 <셜록홈즈>에서 셜록홈즈는 분명 원작의 그것을 통해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한 움직임을 선사한다.
궁극적으로 <셜록홈즈>는 신사적인 영국의 탐정 아이콘을 고전적 세계관의 히어로 캐릭터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이다. 이를 테면 고전 소설의 캐릭터 자체를 영화적으로 리메이크해버린다고 할까. 원작 팬이라면 그것이 불순하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셜록홈즈>는 신사적인 영국의 고전아이콘의 많은 부분을 새롭게 인식시킨다. 사실상 <셜록홈즈>는 셜록홈즈를 셜록홈즈라 쓰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 읽는다. 셜록홈즈의 이름을 빌렸을 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배우의 특성이 적극적으로 캐릭터의 기반을 이룬다. 심지어 원작에서 등장하지 않는 기괴한 악당 블랙우드(마크 스트롱)를 등장시키는 것에서부터 원작의 재현이 아니라 원작의 영화적 차용이라 불려도 좋을 자질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셜록홈즈의 단짝인 왓슨(주드 로)과의 관계를 그리는 방식에서도 다를 바 없다.
<셜록홈즈>는 추리극이라기 보단 액션활극에 가까운 버디무비로 완성됐다. 셜록홈즈와 왓슨과의 관계를 그려나가는데 러닝타임의 절반 가량을 할애하는 <셜록홈즈>는 사건의 해결과정에 주목하는 추리적 묘미보다도 인물의 관계를 그려내는 드라마적 감정이 돋보이는 영화다. 동시에 셜록홈즈의 유일한 연인이라 추측되곤 했던 아이린 애들러(레이첼 맥아담스)를 등장시키며 그의 순애보적 감정마저 묘사하는 <셜록홈즈>는 간접적으로 유추되던 캐릭터의 감정적 단서마저도 적극적인 사건의 형태로서 구체화시킨다. <셜록홈즈>의 셜록홈즈는 현장에 자리한 미세한 단서들을 통해 사건을 따라 걷는 영민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사건보다 앞서 달리는 행동파 탐정이다.
만약 셜록홈즈가 아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배우에 호감을 지닌 관객에게 <셜록홈즈>는 즐길만한 캐릭터적 묘미를 품은 오락영화로서 유용하다. 또한 <셜록홈즈>의 원작을 접하지 못한 관객에게 셜록홈즈의 원형은 딱히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셜록홈즈>는 가이 리치의 스타일보다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공이 팔 할인 작품이다. 첨언하자면 왓슨을 연기하는 주드 로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조합이 이루는 캐릭터적 재미가 큰 맥락을 이루는 작품이다. 그러나 <셜록홈즈>는 캐릭터의 매력을 보좌하는 내러티브의 묘미가 탁월하다 말하기 어려운 영화다. 특히 셜록홈즈가 상대하는 블랙우드는 <셜록홈즈>에서 마치 셜록홈즈의 탐정적 활약을 그리기 위해 단순하게 배치된 소비적 악당처럼 보인다. 동시에 사건의 해결방식에서도 셜록홈즈의 능력은 다소 과장돼있다. 이성적인 방식의 추리를 차분히 따라잡기 보단 본능적인 감각에 의지해 움직이는 셜록홈즈의 모습은 실로 파격적이라기 보단 안이하다. 만약 추리극의 형태로서 <셜록홈즈>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그 이전에 셜록홈즈라는 본래적 이미지에 호감을 느끼고 영화에 접근했을 관객이라면 배신감을 안고 상영관을 나서게 될 정도로 <셜록홈즈>는 분명 셜록홈즈의 이미지를 배반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마치 <배트맨 비긴즈>의 결말이 조커의 등장을 암시하며 끝나는 것처럼 <셜록홈즈>의 결말도 (셜록홈즈의 최대 숙적인) 모리아티 교수의 등장을 암시하며 끝난다. 히어로 캐릭터로 재생산된 셜록홈즈는 자신의 성공을 장담하듯 차기 시리즈의 제작마저도 가시화시킨 셈이다. 고전적인 탐정을 히어로로 탈바꿈한 시도 자체를 불순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아서 도난 코일의 셜록홈즈가 가상의 캐릭터인 이상, 가이 리치의 셜록홈즈가 제시하는 새로운 가상성을 거부할 이유는 없으니까. 다만 그것이 그만큼 효과적인 가치를 품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캐릭터 시리즈를 위한 습작처럼 보이는 <셜록홈즈>가 딱히 성공적이라 말하긴 어렵다. 물론 새로운 시리즈를 통해 이를 만회할 수 있다면 <셜록홈즈>는 그 시리즈의 방아쇠로서 재평가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시리즈를 위한 가장 훌륭한 밑천이란 점에서도 이 가능성은 적지 않은 설득력을 품고 있다.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의 동명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리들리 스콧의 <바디 오브 라이즈>는 실체가 분명치 않은 거짓이 어떻게 세상을 장악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진실은 거짓에 압도당해 쓸모를 잃고 그 빈자리마저 거짓으로 메워진다. 형체가 없는 거짓이 진실의 육체를 장악할 때 선악의 경계도 희미해진다. 중동과 미국의 전쟁은 실체를 가늠할 수 없는 각축장으로 변질되어 끝을 예측할 수 없게 됐다. 포스트 911의 시대에서 악의 축으로 구분된 이라크는 미군의 로켓세례를 얻었지만 그 반작용은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인 테러를 발생시켰다.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은 고도화된 첨단 무기로 무장한 미군에 맞서기 위해 첨단의 반대편에 서는 방식을 터득했다. 도청이나 추적 자체를 막기 위해 휴대폰이나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으며 게릴라적인 대응으로 적의 정보를 분산시킨다. 정보력이 약화되면 적과 아군의 구분은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적의 실체는 모호하고 동지에 대한 신뢰는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거짓과 진실은 백지장 차이로 옷을 갈아입고 소통의 부재는 총구의 방향을 고민하게 만든다. 로저 페리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에드 호프만(러셀 크로)의 갈등도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적진 한가운데를 활보하는 CIA요원 페리스는 지뢰처럼 깔린 도처의 위협을 피해 테러리스트의 본산을 찾아내는 작전을 수행 중이다. 현장에서 활약하는 페리스는 자신과 접촉하는 정보원들과 인간적 신뢰를 갖추려 노력하지만 미국 본토에서 무선으로 지령을 내리는 호프만은 아무도 믿지 말라는 충고를 앞세우며 매번마다 페리스의 의견을 묵살하고 그들을 이용하고 조종하려 들 뿐이다. 작전 과정에서 자신의 절친한 정보원을 잃고, 죽을 고비를 넘긴 페리스와 호프만의 갈등은 점점 심화된다. 중동에서 고군분투하는 페리스가 이혼 수속을 밟고 있는 것과 달리 본국에서 생활하는 호프만은 단란한 가정생활을 유지한다. 이라크와 미국의 거리만큼이나 두 사람은 삶에 대한 이해 자체만으로도 거리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거짓과 진실을 판별하는 건 옳고 그름의 여부가 아니라 증명될 수 있는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삶과 죽음도 그 지점에서 판별된다. 테러리스트의 수장을 끌어내기 위해 평범한 건축가를 거물 테러리스트로 설계해 위장된 테러의 주범으로 조작해 미끼처럼 내모는 과정은 거짓이 실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것과 다름없다. 어떤 수긍할만한 결과를 위해 희생양이 동원되고 모종의 신뢰는 전략적 볼모로 채택된다. <바디 오브 라이즈>는 분명 포스트 911의 텍스트를 이어받은 작품이지만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자장을 초월해 개인적 의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국가와 문화라는 프로파간다의 경계가 부딪히는 사이, 그 아래 머무는 인간은 어느 한편의 실체 없는 명분을 지탱하기 위해 거짓을 품기 위한 실존적 육체로 투하된다. 생사의 기로를 넘으며 그 허상을 목격한 페리스는 결국 스스로의 진실된 육체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허상의 세계에서 탈출한다. 거짓의 빈틈을 채우기 위해 분주히 뛰던 말은 궤도를 이탈한다.
과감한 액션과 세심한 스릴이 거듭되는 <바디 오브 라이즈>는 생생한 현실의 기운을 포착하는 영화다. 하지만 스크린 속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긴박감과 달리 스크린의 표면에선 건조한 기류가 발견된다. 전반적으로 능동적인 움직임이 발생하지만 정적인 무기력이 감지된다. 그건 영화가 묘사하는 그 세계를 향한 무기력과도 같다. 재활의 의지로 몸부림칠수록 진창의 수렁으로 끌려들어가듯 어지러운 중동의 현실은 그 자체를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암담할 따름이다. <바디 오브 라이즈>는 그 익숙한 회의감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리들리 스콧의 탄탄한 연출력과 두 주연배우의 녹록치 않은 연기가 감탄스럽지만 좀처럼 마음이 동하지 않는 건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현실의 무게가 영화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