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자가 판곤과 비슷한 제스처를 주문하니 완강하게 거절하더라.
그 인물을 지금 느닷없이 하라면 안돼. 인물을 잡은 상태에서 시작했다면 아무리 지치더라도 갈 수 있는데 이렇게 지친 상태에서는 갑자기 들어갈 수 없지.
아무래도 인물에 몰입하기 위한 충분한 과정이 필요하니까.
그런 것도 있고,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느닷없이 그게 되는 게 아닌 거지. 그리고 사실 지금 들어가고 싶지도 않아. 영화 끝났는데 왜 그 인물을 다시 경험해. 지옥인데.
판곤은 완전한 악인이다. 그 악랄함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부담이 많았지. 일단 범인을 미화하는 영화들이 많잖아. 멋있게 포장한다거나, 반역설적인 비장미를 풍기기도 하고, 최소한의 자기 합리성을 부여하기도 하지. 이를테면 <비상구는 없다>는 남창을 하다가 성불구가 된 남자가 성적으로 방탕한 여자들을 응징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런 경우엔 내적 동기라도 있잖아. 그런데 <실종>은 그런 걸 다 없애고 무시하는 거지. 처음 대본엔 약간이나마 과거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서 이 사람이 이래서 저렇게 됐구나, 라는 느낌을 줄 수 있었지. 그런데 다 걷어냈어. 그냥 날것으로 들이밀자고.
상당히 불쾌한 캐릭터였다. 연기하는 당사자에 대한 이미지가 걱정될 정도로.
결국 그 부담은 배우한테 오는 거지. 이렇게 해도 될까, 생각하기 마련이잖아. 그래도 내가 그 동안 참 다양한 역할을 해온 만큼 이제 와서 ‘저 사람 진짜 나쁜 사람 아냐?’라고 느낄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관객에 대한 믿음이랄까. 한번 해보자, 싶더라고.
작년 즈음에 했던 인터뷰에서 판곤이란 역할에 대한 감이 안 잡혀서 불안하다고 했더라.
그랬을 거다. 아마. 초반에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내가 고발한 적은 있어도 내가 반대의 입장이 된 적이 없는데 그 입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연기할 수 있을까 싶더라. <수>(2007)에서 연기했던 구양원을 다시 떠올려 보기도 했고.
잠깐 <수>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흥행에 실패했지만 연기적으로는 꽤나 인상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까운 영화라고 생각한다. 우선 연기자로서는 참 만족스럽게 했던 영화였으니까. 처음 가성을 써봤고, 인물을 살아있게 만들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영화가 흥행이 안되니까 그냥 쉽게 넘어가버렸지. 개인적으로 같은 동포이자 민족으로서 최양일이란 인물에 대한 애정도 있었다. <피와 뼈>를 보면 참담하잖아. 양석일이라는 재일동포 작가가 쓴 소설이 원작인데 양씨는 제주도 성씨야. 원래 제주도 인구가 30만 명이었는데 ‘4.3항쟁’당시 6만 명이 죽었지. 그 때 좌우에서 죄다 죽이니까 제주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밀항도 많이 했거든. 그래서 다 어디로 갔겠어. 일본 하부로 밀려들어간 거지. 야쿠자 행동대원 중에 제주도 사람이 그렇게 많았다잖아. 그런데 최양일 그 양반이 ‘4.3항쟁’을 영화로 꼭 찍어보고 싶다는 거야. 재일교포 사회에서는 ‘4.3항쟁’이 80년대 광주나 똑같거든. 그런데 <수>가 웬만큼 됐어야 그것도 가능한 거지. 게다가 일본과 한국의 영화 현장은 경우가 달라서 어려운 점도 있고.
아무래도 악인을 연기할 때 임팩트가 크다. 예전에도 악인을 연기한 적은 없지 않았지만 <수>의 구양원은 악인이라는 본질 자체에 대한 세계관을 스스로 구축한 상태에서 그 자체를 드러내는 느낌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지식인을 많이 연기했는데 사실 지식인을 연기하는 건 쉽다. 다들 비슷하니까 조금씩만 바꾸면 돼. 조금 비굴해지거나, 조금 더 섹스를 밝히면 된다. 별 거 아니다.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런데 <수>를 하면서 느꼈던 건 악인은 굉장히 어렵더라는 거다. 왜 악한지를 모르니까. 난 악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난 싸움도 안 하는데 내가 왜 사람을 죽여. 난 논쟁도 싫어하고 싸움도 싫어한다. 중학교 때 이후로 여태까지 싸움이란 걸 해본 적이 없어. 그런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접근이 잘 안 되니까 이래선 안 되겠다 싶더라. 이 인간을 관통하는 게 뭘까 생각했다. 구양원은 자기 조직원에 대해서는 의사 가족주의로 가족애처럼 같이 간다. 그런데 그 바깥에 대해서만큼은 굉장히 깊은 적개심을 갖는 거지. 까닭 없는 적개심을 갖고 해보면 되겠다 싶었지. 그리고 이미 배태곤(<초록물고기>)을 통해 내적으로 충분히 합리적인 적개심을 갖는 방식을 경험했기 때문에 적개심을 가지고 캐릭터를 들여다보는 건 어렵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이 한없이 잔인해지더라. 그래서 그때 덕분에 굉장히 즐겁게 영화를 찍었다. 만족스러웠지. 그걸 <실종>에서도 다시 한번 적용시켜보려 했지.
판곤을 연기하는 과정에서도 그런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이 있었을 텐데.
판곤은 싸이코패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어렸을 때 굉장히 큰 정신적 충격이나 사건이 있었던 거야. 자기가 아버지를 돼지 우리에 밀어 떨어뜨려서 뇌진탕으로 죽었다는데 그게 얼마나 아프겠어. 살의를 가졌던 건 아니지만 아버지를 죽였으니까. 그래서 엄마랑 옆에서 울다가 시체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그냥 무서워서 떠났을 거 아냐. 그런데 다음 날 가보니까 돼지가 시체를 뜯어먹은 거야. 그리고 마음에 엄청난 비밀이 남는 거지. 그런데 이제 그 고통을 어떻게 감내해. 자기 합리화인 거지. 아버지가 어머니를 폭행했으니까, 등등. 그렇게 시간이 가면서 이미 아버지를 죽인 죄책감은 없어지고 나밖에 안 남는 거지. 난 괜찮은 놈인데, 똑똑한 놈인데, 예술가인데, 자신만의 나르시스만 보면서 자신만의 기준이 생기기 시작하는 거야. 그러니까 윤리나 도덕, 규율이고 뭐고 없고, 가족도 없고, 아무 것도 없이 나밖에 없는 자. 이걸로 키를 잡고 대본을 들여다 보니까 그대로 관통이 되는 느낌이더라. 그래서 그걸 핵심으로 삼고 들어가서 디테일을 붙였다.
구양원이 자신의 상황을 통해서 악인으로서의 운명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판곤은 그냥 무의식 중에 자신의 악행 자체를 합리화시켜버리는 질환적 인물이다. 판곤은 그 심성 자체를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운 역할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런데 키를 잡고 들어가면 어렵지 않다. 사실 연기할 때 디테일을 많이 찾아서 구축하고 캐릭터를 만들면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그런데 이건 다 필요 없는 거야. 다 필요 없고 오로지 나밖에 없어. 모든 걸 다 무시한다는 방식으로 키를 잡으면 그냥 들어가게 된다. 그런 다음에 상황에 던져지는 거지. 상황에 던져지면 그냥 그 때부터 그 자체로 살면 되는 거고.
그럼 촬영이 시작되면서부터 그 캐릭터에 완전히 동화될 수 있었던 건가.
처음부터 키를 잡았고, 이렇게 가면 된다는 걸 알았던 거지. 그래서 대본을 충분히 숙지하고 갈 수 있었다. 물론 찍는 도중에 좀 더 디테일을 붙이면서 간 건 있다. 장면 속 상황에 직접 들어가면 대본에 쓰여져 있는 것보다 훨씬 디테일이 느껴질 때가 있거든. 예를 들면 분쇄기 앞에서, “통째로 가는 건 처음인데, 기계가 괜찮을라나.” 이 대사는 내가 현장에서 하자고 한 거다. 그런 느낌이 드는 거야. 개 장수에게, 내가 목숨을 끊을 테니까 시체만 같이 옮기자고 협상한 뒤 도끼나 톱을 챙기잖아. 그 전까진 그렇게 쪼개서 갈아왔다는 이야기지. 그런데 이 경우는 그럴 시간이 없었던 거야. 언니가 자꾸 찾아오고 불안하니까 일단 묶어서 입만 막고 분쇄기에 넣어둔 거지. 그런데 그 여자를 다시 꺼내기 귀찮은 거지. 무거우니까. 그래서 그냥 갈기로 한 거야. 그런데 이 기계가 괜찮을까, 그런 걱정이 되더라니까! (웃음)
그 끔찍한 대사의 출처가 본인이었단 말인가. (웃음)
내가 감독한테 이렇게 하자고 그랬지. 그랬더니 “(머리를 감싸면서)우리 괜찮을까요, 이렇게 찍어서? (옆을 보면서)이거 정말 괜찮은 거냐?” 하더라. 그런데 연출부 애들한테 물어보면 걔네들이 말을 하겠어. 결국 하세요, 하고 이렇게 한 거지. (웃음)
마치 판곤과 대화하는 것 같다. (웃음) 결국 그 살인마의 입장에서 모든 상황을 생각하게 될 정도로 그 역할에 몰입했다는 것처럼 들린다.
바깥에서 볼 땐 살인마지만 내 입장에서는 살인마가 아닌 거지. 사람을 죽이기는 하는데 죄의식이 없잖아. 판곤인 나는 즐겁게 살자고 동생을 잘 잡아놨는데 언니가 나타났으니 언니 잘못이지. (웃음) 그래서 나중에 네 탓이라고 하잖아. 너 때문에 동생이 죽은 거라고. 이빨은 다 뽑아놓고. (웃음)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잖아. 논리는 정확한 거지.
그런 캐릭터를 그런 식으로 연기하고 나면 배우 본연에게도 어떤 영향력이 남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드는데.
어떤 영향?
그런 캐릭터의 정신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게 어쩌면 개인적으로 심리적인 손상을 감내하는 행위가 아닐까.
이런 정도의 인물을 연기했을 때 오히려 상처가 남을 거 같진 않다. 쉽게 말해서 흉물인데, 워낙 나와 다른 사람이고, 참 드문 사람이잖아. 도리어 난 <경마장 가는 길>이나 <오! 수정>같은 영화에서의 연기가 배우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은주가 했던 <주홍글씨>같은 경우는 상처가 될 수 있는 거지. 더군다나 은주는 어렸으니까. 그런 연기를 자주 하다 보면 평상시에도 그런 비슷한 감정에 쉽게 이입돼버리기도 하고.
오히려 본래 자신과 캐릭터 사이의 격차가 클 때 오히려 캐릭터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맞다. 그리고 사실 나는 <실종>같은 영화를 별로 보지 않았다. 김성홍 감독이 <쏘우>라는 영화를 봤냐고 했는데 본 적이 없었다. <올가미>나 <손톱>은 봤지. 그건 국내 영화였고 그 당시 한국영화는 서로 다 봐줄 때였으니까. <양들의 침묵>은 워낙 유명하니까 봤고. 그런데 <쏘우>라는 영화는 처음 들었어. 솔직히 관심이 없었지. 그래서 그걸 찾아봤는데 그냥 '공포 영화는 저렇구나'라고 생각했다. 다만 판곤을 연기하는데 있어서 참고 삼을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어느 순간 어떻게 맥을 잡고 나니까 더 이상 연구가 필요 없더라. 그냥 하면 되는데 뭘 자꾸 연구해. 공포스럽게 찍는 건 감독의 몫이고, 나는 그냥 판곤만 하면 되니까.
혹시 캐릭터에 대한 의견 충돌은 없었나?
배우가 그 인물로서 자유롭게 살고 있다면 감독은 알아서 구성을 이끌고 가는 거다. 전적으로 감독을 신뢰하고 가야 한다. 경험으로 봐서 촬영 중간에 감독하고 의견이 달라져서 충돌하는 경우는 대개 감독이 옳아. 배우는 자기 인물 관점에서만 보지만 감독은 여러 인물을 충돌시켜서 정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훨씬 더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거든. 처음 대본을 받고 이에 관한 토론을 하는 과정은 얼마든지 길어도 상관없고, 토론을 좋아하는 감독도 많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그 대본대로 찍겠다고 한 다음엔 전적으로 믿는 게 맞다. 괜히 중간에 끼어봐야 망가진다. 막상 한 4~5회 들어가보고 나서야 ‘아차’ 싶을 때도 있지만 그땐 이미 늦은 일이다. 그땐 교정하려고 해도 이미 관성이 붙어서 가니까 교정되지 않는다. 대본 논의 과정에서 충실히 손봐야지, 나중에 다툰다고 될 일이 아니다.
8년 간 직장 생활을 하다가 회사를 그만 두고 극단에 들어가 연기를 시작했다. 원래 연기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뒤늦게 연기에 대한 청운을 품게 된 건지 궁금하다.
갈망 같은 건 없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오페라 연출가 문호근 씨가 큰 형인데 대학교 때 연극을 했었다. 오태석, 정화연 교수나 음악원 이건용 교수 같은 분들과 연극을 하면서 많이 돌아다녔었지. 지금 은행을 다니는 작은 형도 대학교 때 연극을 했다. 내가 중학교 시절부터 그런 걸 보고 컸으니까 난 당연히 대학 가면 그냥 연극하는 줄 알았지. 그래서 대학가서 연극반을 찾았고 1학년 때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영어로 공연했다. 그랬더니 선배들이 배우 하나 들어왔다고 하더라. 사실 이게 꼬드기는 말이었는데 난 낚싯밥인지도 모르고 한때는 내가 정말 잘해서 그러는 줄 알고 연극을 띄엄띄엄 하게 된 거다.
연기를 전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진 못했나.
일단 돈이 없으니까 연극으로 살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없었지. 그래서 취직을 했는데 5~6년 정도 회사에서 지내다 보니까 도저히 못 다니겠더라. 내 인생이 망하더라도 부속품으로 마모되지 말고 내가 좀 결정하고 살자, 그래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가서 할 일이 연극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무역회사를 다니다가 그 조직체가 싫어서 떠나 나왔으면 무역은 수출입에 관계하는 에이전트가 많으니까 독립해서 살았을지도 모르겠는데 난 건설회사에 있었기 때문에 뭐가 있겠어. 연극 밖에 할 게 없는 거지.
하지만 연극과 발이 닿을만한 거리에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나.
회사 다니면서 연우무대 공연은 띄엄띄엄이라도 다 가서 봤다. 다만 내가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니었고, 지금 여의도에서 치과 의사하는 오종우 씨라는 분이 연우무대 창립멤버였는데 표를 팔아달라고 나한테 맡겼던 거다. 큰 형 친구였거든. 20장씩 맡기는데 그게 어디 팔리나. 그래서 결국 회사 친구들 공짜로 보여주기도 하면서 계속 내 돈 내고 20장씩 사준 셈이지. 그 중에 나는 한 장만 쓰는 거고. 그렇게 공연을 쭉 봤다. 그때 무대에 서 있는 박광수도 보게 됐지. 그래서 회사를 나간 뒤 연우무대로 간 거야.
사회 생활을 거친 뒤 연기자로 거듭난 셈인데 그런 과정이 배우로서 사는데 있어서 플러스가 되거나 마이너스가 된 지점이 있나.
굉장히 도움이 안 됐지. 그나마 도움이 됐다고 할 수 있는 건 내가 연우무대에서 극단 살림이나 기획에 관여를 많이 했는데 그건 그런 경험이 나 밖에 없었으니까. 극단에 파일이 없어. 문서 정리가 안돼있더라. 그런 사무적인 정리에선 도움이 됐지만 조직 생활을 오래 한다는 건 그만큼 눈치를 보게 된다는 거라 배우로서의 인생과 상당히 멀어져 있었던 거지.
필모그래피가 한국영화계의 변천사를 대변하는 느낌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사이 영화계의 변화가 보인다. 스스로도 많은 변화를 느낄 것 같다.
과거부터 생각해보자면, 87년까진 검열이 무지하게 셌다. 내가 그때부터 영화를 하진 않았지만 영화를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고 들었지. (안)성기 형 이야기를 들어보면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같은 경우는 거의 난도질을 당했다 하더라. 그래서 그 이원세 감독은 그 영화 찍고 나서 이민가버렸다. 그 이후로도 금방 완화된 건 아니다. <그들도 우리처럼>(1989)에서 연기한 김기영은 노동운동을 하는 인물인데 광주에서 시위하는 자료화면을 넣었더니 검열에서 들어내라고 그랬다. 그래서 서울시 뒷골목에서 도심불명의 형태로 바꿔서 끼워 넣었지. 그때까지도 검열이 있었단 이야기다. 그래서 박광수 감독이 말하기를 <칠수와 만수>(1988)는 일부로 88올림픽 직전에 검열 넣었다 한다. 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에서 손님들이 오는데 검열문제로 신문에 보도되면 국제적 망신이니까, 그 시점에 넣어야 좀 덜할 거라 예상했다지.
90년부터 영화에 출연했다. 그 당시엔 완화되던 시점 아니었나.
90년 문민정부 이후부터 검열이 거의 없어지기 시작했으니까 실질적으로 완화됐다고 봐야지. 88년부터 90년 사이에 <그들도 우리처럼>이나 <성공시대>처럼(1988) 사회적 발언을 담은 영화가 만들어진 것도 그런 배경이 됐다. 90년대 초에 나를 캐스팅한 감독들도 그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면 나는 7~80년대 억압구조를 경험해본 사람이니까.
상업적 감각을 지닌 영화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메시지 중심이 아니라 오락 중심으로 비중이 변해가는 시점이라 말할 수 있겠지. 그런 분위기에서 로맨틱코미디의 새로운 신호탄이라 할 수 있는 <결혼이야기>(1992)도 나온 거다. 그 영화는 철저하게 시장조사를 하고 찍었다.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그게 성적인 소재를 다룬 스토리라면 누가 연기해야 좋을지, 그런 분위기에서 최민수와 심혜진이 결정된 거지. 주문 생산했다는 의미인데 그런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엄청난 히트를 쳤다는 것도, 그만큼 사회가 연성화된 덕분이겠지.
2000년대 들어서 정책적 발언대에 서게 된 뒤로부터 몇 년간 출연이 뜸했다.
나는 원래 99년도 스크린쿼터 투쟁 당시 개입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거기에 엉켜 들면 일이 안되니까. 난 배우로 살자고 노력했고, 순수하게 연기자 심성을 갖고 싶었거든. 그런데 우연찮게 직접 개입해버리는 계기가 생겼지. 스크린쿼터 1차 투쟁에서 그 문제를 들고 방송에 출연하는 영화계 인사들이 이야기하는 거나 언론에서 얘기하는 게 저렇게 얘기하면 안 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 소위 우린 약하니까, 란 식의 이야긴데 나쁘게 말하자면 앵벌이를 하는 셈이었지. 물론 실제로 한국영화가 약했던 건 사실이었다. 다만 그러니까 할리우드에 어떻게 대항합니까, 이런 식의 얘기들 밖에 없었던 거지. 그런데 난 무역학과 출신이다. 내 생각에 이건 수출입의 문제고 독과점의 문제로 보였다. 그래서 글을 써야겠다 생각을 한 거야. 그런데 내가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다가 쓰려니까 굉장히 오래 걸리더라. 한 일주일 걸렸나. 워드로 쳐서 프린트한 걸 외출하면서 이창동한테 갖다 줬다. 가까운 일산에 살았거든. (웃음) 그렇게 나갔다 와서 밤에 전화해보니까 다 썼다 그러는 거야. 그런데 가서 보니까 너무 잘 써버렸어. (웃음) 물론 내 문체를 가급적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내 문장은 많이 살아있었지만 중간에 몇 가지 사례를 넣었는데 너무 유려해진 거야. 그래서 “내가 이걸 썼다고 하면 누가 믿냐. 못 내겠다” 그랬더니 짐짓 화를 내더라고. 하루 종일 머리 빠개지게 일 시켜놓고 안 낸다고. (웃음) 그래서 결국 보냈지.
‘씨네21’에 기고했던 글 말인가?
그때 지면편집이 다 끝난 상태라서 뒤에 있는 독자란에 깨알 같은 글씨로 넣게 됐지. 그걸 보고 영화계에서 전부 놀란 거야. 이거 말 되는 논리다. 그래서 동화면세점 앞에서 시위할 때 나보고 연단에 올라가서 얘기하라니까 그걸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했지. 그랬더니 언론에서 벌떼같이 달려든 거야. TV카메라 오고, 거기서부터 말린 거지. (웃음)
당시 발언을 주도하는 이들이 있었을 텐데.
87년에 ‘4.13 호헌조치’라는 게 있었다. 당시 국민들은 직선제개헌을 요구했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5공 헌법대로 다음 대통령을 뽑겠다고 강행한 거지. 그때 정지영 감독의 주동으로 영화계가 반대성명을 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정지영 감독이 영화계 일을 쭉 맡아서 했지. 직배반대도 그랬고. 그런데 99년에 느닷없이 내가 거기에 개입되기 시작한 거다. 이창동도, 영상원 교수 심광현도 그 당시 새 멤버였지. 김혜준 사무국장, 양기완 사무처장, 정지영 감독이 원래 있던 멤버들이고. 그 멤버 중심으로 쿼터 투쟁을 했다.
결국 영진위 부위원장까지 맡게 됐다.
2000년에 영화진흥법이 개정돼서 영화진흥원에서 영화진흥위원회로 조직이 개편되는데 정지영 감독이 때려죽여도 위원장을 하지 않겠다는 거야. 연배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그 양반이 그 때 위원장을 해야 될 것 같은데 안 한다니까 그 다음 세대로 바통이 넘어왔고 그럼 내가 맡아야 된다는 거야. 그런데 나는 위원장을 하면 안 돼지. 어리니까. 그렇게 부위원장이 된 건데, 막상 그 당시엔 부위원장을 내가 한다고 확실히 약속된 건 또 아니었거든. 조직개편을 앞두고 백지상태라서 어떻게 될진 모르는 거니까. 그때 원래 이런 저런 영화를 해보자는 제의가 있었는데 내가 영진위 들어가게 되면 그걸 어떻게 하겠어. 당시 보수적인 분들, 중도적인 분들, 개혁적인 분들이 막 섞여있어서 충돌이 생기고 그러는 판국이니 이거부터 어떻게 해보자 싶더라.
노사모에 가입한 뒤, 적극적인 정치적 참여가 있었다.
노사모와의 관계가 2002년 3월 즈음에 시작해서 그 해 말까지 계속됐는데 그때가 영화를 완전히 할 수 없게 된 시점이기도 했다. 관객 입장에서 볼 땐 순수한 배우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린 거지. 영화배우면서 <그것이 알고 싶다>로 인해 강한 인상이 있었던 가운데 참여가 이뤄졌으니까, 상업배우로서의 가치가 확 떨어진 거다. 그러면서 그때 2년 정도 영화를 못했지. 그 다음부턴 내가 대본을 고르는 입장이 아니라 웬만하면 하는 입장으로 변한 거고. 90년대 후반으로 들어가면서 영화 성향이 바뀌기 시작하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난 그 당시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던 거 같다. 그러니까 여전히 메시지가 강한 영화를 하고 싶었던 거지. 그러니까 영화의 흐름이 달라진 거다. 그런 가운데 영진위나 쿼터 문제부터 말려들기 시작했고.
그래도 9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했던 배우 중에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배우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그 때는 배우가 많지 않았으니까. 90년대 초 중반에 활동을 시작한 남녀배우를 다 합쳐도 열명 이내나 될까. 최민수, 이경영, 강수연, 심혜진, 아무튼 생각해보면 그다지 많지 않았어. 이를 테면 이런 배우들이 캐스팅 되야 영화가 투자된다고 말할 수 있었던 배우들이 열명 안짝이었지.
90년대 당시에도 한국영화제작편수는 활발했지만 점유율은 높지 않았다.
스크린 쿼터 감시단은 90년대 초에 만들어졌는데 그 당시는 직배가 이뤄지면서 한국영화계도 궤멸 상태에 빠졌던 시기였다. 그전까진 외화를 30편만 수입하고, 스크린쿼터 146일이 있었지만 외화 30편은 걸면 무조건 대박이 났다. 한국영화는 쿼터 때문에 억지로 만들어서 편수가 대충 채워졌지만 점유율이 현저하게 떨어졌지. 극장이 직접 당일 날 한국영화 상영작을 구청에 신고했는데 신고만 하고 실제론 외국영화 틀고 그랬다. 직배가 정확히 몇 년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88년 시작- 직배 후에 한국영화 점유율이 14%까지 떨어졌던 적도 있다. 스크린쿼터 감시단을 만든 건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투쟁한 셈인 거지.
당시 쿼터 투쟁에 대해서 반발하는 여론도 형성됐다. 어쩌면 투쟁을 통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 아니었을까.
당시 서울극장의 곽정환 회장은 원래 데모를 싫어할 만한 양반인데도 쿼터 투쟁을 독촉할 정도였다. “너희들 데모 열심히 해라. 다만 서울극장에 돌만 던지지 마라.” 그랬으니까. 그리고 <쉬리>가 잘된 것도 쿼터 투쟁의 결과라고 말씀해주셨다. <쉬리>가 완성도 있는 오락영화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당시는 할리우드 직배사들이 죽겠다고 토로하던 시기였다. 마케팅에 돈을 쏟아 부어도 관객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다. 다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쿼터 투쟁의 결과라고 본다. 쿼터 사수 시작 당시 쿼터 지지율이 3:7정도로 불리했다. 그런데 두 달 정도 투쟁을 하니까 6:4로 역전됐다. 지켜야 한다는 쪽으로 기운 거다. 할리우드가 지나친 압박을 하고 있고 이렇게 한국영화가 궤멸될 수 있다는 논리가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진 거야.
결국 쿼터 투쟁이 단순히 스크린 쿼터 사수에 국한된 결과물이 아니란 소리다.
99년에 한국영화 점유율이 24%까지 가 있던 상태였다. 쿼터 투쟁 이후, 영진위가 조직됐고 이를 통해 정부지원이 들어왔다. 그리고 영진위가 투자조합을 만들어서 투자재원도 마련했고, 쿼터까지 단단히 박혔다. 그때부터 국내영화 산업이 확 커지기 시작한 거지. 동시에 능력 있고 상업적인 감각이 있는 감독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한국영화를 걸면 막 터지기 시작했다. 그런 흐름들이 존재했던 거지.
그런 시기에 오히려 자신은 영화배우로서 작품을 하지 못했다.
한국영화들이 되는 시점에서 나는 영진위로 말리고, 노사모로 말렸지. (웃음) 물론 말린다는 말은 그냥 그렇다는 말이고, 지난 <무릎팍도사>에서도 얘기했듯이 난 길게 생각하고 결정한 사안이었다. 상업영화 배우로서 망하는 길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들어갔다.
배우나 연예인의 공적인 코멘트는 때때로 표적이 되기 쉽다. 그런 걸 스스로 그런 바를 몰랐을 것 같진 않다.
분명 깊게 고민했던 사안이었다. 상업배우로서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란 걸 알고 시작했지만 정말 굉장히 심각했다. 사실 내가 노사모를 주도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실질적으로 캠프회의에 간 적도 없었고, 그냥 강연만 다녔다. 조직 운영은 명계남 씨가 주도했지. 그 양반이 정말 잘 했거든. 다만 내 강연 장면이 담긴 <노무현의 눈물>동영상이 인터넷 사상 최대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그렇게 인식된 바가 없지 않다. 아마 그 당시 150만 클릭이었는데 그게 퍼서 옮겨지는 것까지 염두에 두려면 클릭수에 곱하기 4를 해야 얼추 맞아떨어진다고 하더라. 결국 6백만 클릭이 있었던 셈이다. 그때 안약을 넣었다느니, 이런 식의 공격까지 당했던 게 그 동영상을 찾아서 확인하려는 사람이 늘었던 이유 중 하나다. 게다가 뉴스까지 나왔으니까. 심대한 타격을 얻을 거라 생각했는데 치명적이었지. (웃음) 90년대 말에서 2000년 이후부터 활동이 줄고 작품 성향이 바뀌게 된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재물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고 정말 정치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나?
나는 연기자로서 여러 번 말했다. 나는 배우다. 내 직업은 배우이고 그 직업을 정치인이나 행정가로 바꿀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된다 해도 그에 따른 어떤 혜택도 받지 않겠다. 그래서 선거가 끝나자마자 연기를 다시 시작하고 싶었고. 정치분야와 관련된 사람들은 국민들에게 심하게 욕을 먹게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 정치는 아수라장이잖아. 다만 아수라장에서 아수라처럼 노는 사람도 있는 반면 아닌 사람도 있는 거지. 유권자들을 설득하는 행위 자체는 대단히 이성적인 행위거든. 다만 한국의 짧은 민주주의 발전 역사에서 그런 행위를 온전히 납득시키는 건 아직 쉽지 않다.
결국 2000년대 초반에 배우로서의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제도적인 면도 그렇지만 영화 현장에서의 변화가 큰 시기이기도 했다. 그 공백으로 인한 영향력이 있었나?
노사모 활동 직전인 2002년 3월에 촬영이 끝난 <질투는 나의 힘>(2003)이후로 1년 반 정도 현장에 갈 일이 없었지. 결국 <오로라 공주>(2005)현장에서 예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심성이 완전히 변한 거야. 난 그냥 하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연기자 심성이 아니더라. 기타 줄이 다 끊어진 것 같은 느낌 있잖아. 배우는 몸이 악기인데 내 줄이 다 끊어졌다는 걸 느낀 거야. 어마어마하게 당황했지. 이게 안 되는 일이라는 걸 몰랐지. 그런 경험이 없었으니까. 결국 <오로라 공주> 끝날 때까지 발버둥을 치다가 <한반도>들어갈 때쯤 다시 배우가 되더라. 사실 얼마 전에 방은진이 만나서 미안하다고 그랬어. 내가 진짜 그렇게 연기자 심성이 날아갔을 줄 몰라서 자신 있게 하겠다고 그랬던 건데 찍다 보니까 아니더라고. 그런데 그때는 내가 너한테 말을 못했고, 그게 미안했다고. 지금 와서 다 끝났으니까 얘기하는 거지만 진짜 그때 죽는 줄 알았다, 그랬지.
고작 몇 년 정도의 공백은 극복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을 거다.
그랬을 거야. 연기에 대해서 끝없이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될 거라 생각했으니까. 어쨌든 <오로라 공주>를 지나면서 다시 배우로서 회복을 했단 말이야. 그게 참여정부 중반 즈음이었는데, 그 당시 참여정부를 둘러싼 논란이 무지하게 많았잖아. 참여정부 씹기가 마치 국민 스포츠처럼 돼 버렸고. 그러니까 너무 속상하고 안타깝고, 한편으로 화도 나는 등등, 그러다 보니 내가 없어지자 싶더라. 그 뒤로 5년 동안 정치발언은 하나도 안 했다. 뭐라고 말해도 논란이 되거나 씹힐 수 밖에 없어졌기 때문에, 아예 칩거를 해버리듯 산에만 다녔던 거지. 그러다가 참여정부가 끝나면서 해방감 같은 게 생기더라. 산에 다니면서 느낀 게 많았다. 연기를 잘 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 건 당연한 건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압박을 받아왔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하면서 느낀 사회적 책임도 있었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마음이 변치 않더라도 압박을 털어내야 연기가 잘 된다는 걸, 성취도가 높아진다는 걸 늦게 깨달은 거다.
아무래도 연기자로서의 삶보다도 공적인 발언과 참여자로서의 전사를 묻는 질문들이 많아졌다. 그런 질문들에 답변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나?
참여정부나 MB정부에 대한 평가라던가, 그런 건 할 생각이 없지만 내가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감출 필요가 없다. 물어보는 대로 다 이야기할 수 있지.
온전히 배우로서 평가되기란 힘든 일이 될 수도 있다.
글쎄. 솔직히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선거 국면 때 내가 공개적으로 약속했던 건 지켰다. 그 당시 아무도 안 믿었을지 모르지만 5년이 지나야 입증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5년이 지난 지금은 입증한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난 시민의 정치 참여가 의무라고 생각에 전혀 변함이 없다. 어찌됐건 약속을 지켰고 열심히 내 본업을 하고 있으니까 이제 나를 배우로 봐준다면 참 고맙겠다. 물론 없어지진 않겠지. 그건 내가 살아온 생이니까. 어느 정도 세월은 걸릴 거다. 그러나 적어도 스스로 약속을 지켰다 생각하는 만큼 앞으로 나를 가급적이면 배우라는 이름을 중심으로 봐주신다면 좋겠다. 그런 희망을 갖게 된다.
최근 예년과 달리 스크린이 아니라 브라운관에서도 행보를 거듭하는 건 그런 희망과 무관한 일이 아닐 것 같다.
그런 욕심이 크지. 결국 연기를 계속해야 된다는 거.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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