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은 시대적 변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들며 저항하기 보단 생존의 가능성을 먼저 본능처럼 익힌다. 1930년대 일제 치하 경성에서 살아가는 패망한 나라의 후손들 역시 그 환경에 천착해 살아가는 이가 대다수였을 것이다. 시대적 배경과 무관해질 수 없는 이분법의 운명론에 밀착한 인물들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기록되지만 실상 대부분의 이름없는 민중은 옷을 갈아입듯 자연스레 그 시대적 변화에 편입됐을 것이다. 다만 그 사이에 일제 치하의 권력에 밀착해 풍요로운 삶을 타전하는 이들이 존재했거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고자 시대에 극렬하게 저항하는 두 부류의 극점 같은 존재들이 일부로서 존재했을 것이다. <모던보이>는 그 시대에 대한, 혹은 그 시대에 함몰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이지형의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를 원작으로 한 정지우 감독의 <모던보이>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되 인물에게 좀 더 복잡한 감정적 갈등을 부여함으로써 결말부를 철저하게 변주했다. 원작과는 판이한 양상으로 변주된 결말부를 위해 캐릭터도 재단됐다. 특히 원작과 전혀 무관하게 보이는 신스케(김남길)나 원작에 비해 내면적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조난실(김혜수)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패망한 조국의 역사에 심드렁하듯 조선총독부 1급서기의 직책을 수행하는 경성의 모던보이 이해명(박해일)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로맨스를 향해 사력을 다하지만 원작과 달리 마지막까지 적극적인 태도로 감정선을 고수한다. 오로지 낭만 그 자체를 추구하는 개인주의자가 아니라 로맨스에 취해 인생 전반을 소모하는 열혈순정파로 묘사된다.
경성 최고의 미남이자 낭만의 화신이라 스스로 자처하는 이해명(박해일)과 그의 마음을 뜨겁게 달군 묘연의 여인 조난실(김혜수)은 1930년 경성이란 시대상 속에서 개인과 시대라는 대립각을 이루면서도 서로를 탐닉한다. 오로지 로맨스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이해명과 자신이 완수해야 할 시대적 과업을 위해 자신을 연모하는 남자의 순정마저 악용하는 조난실 사이엔 분명 시대라는 거대한 간극이 서로를 경계하듯 자리하고 있다. <모던보이>는 원작과 달리 냉소주의가 아닌 온정주의로서 개인을 조명한다. 조난실을 사모하던 이해명은 자신의 순정을 완성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소모하려 하고 개인의 숨겨진 욕구를 은밀히 드러내는 조난실은 끝내 자신이 이뤄내야 할 대의를 위해 개인의 삶을 폭파시킨다. 엄밀히 말하자면 <모던보이>는 이뤄지지 못한 로맨스에 대한 짙은 비애로 보호색을 띤 시대적 애도다. 단지 그것이 어느 한 쪽에 무게중심을 두지 않고 상호적인 시선으로 평형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텍스트를 이미지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캐릭터를 변모시키거나 보완하기도 했지만 이 모든 건 스토리의 폭을 증축하기 위한 것이다. 영화는 이야기의 출발점을 원작에서 묘사되지 않는 과거에 두고 이해명과 조난실의 인연이 어디로부터 시작되는지를 명백하게 밝힌다. 이는 문장의 형식을 기반으로 하는 소설보다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영화가 독자의 상상력을 활용하기에 불리하단 점에서 어느 정도 수긍할만한 해법을 찾았다고 할만한 대목이다. 다만 그 이후 기본적으로 소설의 플롯을 골격으로 둔 사연의 전환 과정이 종종 불완전한 문장처럼 단절된 맥락의 어색함을 드러내 보이곤 한다. 이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시키는 과정에서 잠재된 텍스트의 여백을 이미지가 갈무리하지 못한 까닭이다. 덕분에 <모던보이>는 전체적으로 원작이 그리는 굵직한 이미지를 연결하며 내러티브의 선을 이어가지만 종종 매끄럽지 못한 개연성을 드러낸다.
<모던보이>에서 크게 눈에 띠는 건 구시대적 바탕 위로 근대화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1930년대 경성의 기이한 풍경이다. 일제가 주도한 근대화 속에서 자주적인 풍속이 촌스러움으로 몰락하던 경성의 모더니티엔 이미지가 존재할 뿐 사상이 없다. 근대화로 위장한 제국주의적 정복의 야욕이 1930년대 경성을 기이한 풍경으로 재건한다. <모던보이>는 고증에 입각해 그 시대를 충실히 재현한다. 명동성당, 숭례문과 같은 1930년대 경성의 랜드마크를 전시함은 물론 CG와 세트를 동원해 스크린에 옮겨 담은 1930년대 경성의 아기자기한 풍경들은 그 자체만으로 괜찮은 볼거리다.
궁극적으로 <모던보이>의 야심은 그 변주된 결말에 자리잡고 있다. <모던보이>는 민족주의와 개인주의를 사이에 둔 줄타기에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 소설의 비정치적인 냉소주의를 결단력 있게 비튼다. 어린 시절 일본인을 꿈이라 말했던 이해명은 결국 천황폐하신민이 될수 없는 꼭두각시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시대에서이탈한다. 그 과정만으로도 유쾌함과 처연함이 공존한다. 누가 모던보이를 시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나. 그건 사랑마저도냉소하게 만드는시대라는 운명이다. 마지막까지 낭만에 목숨을 건 모던보이의 비정치적 태도는 마지막 로맨스의 가시는 길을 더욱 처연하게 물들인다. 실로 의미 있는 결말이다. 조센징이거나 친일파거나. 시대가 그랬다. 어찌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나.
(씨네서울)
입에서 한기가 새어 나오는 한겨울 동대문 새벽상가에서 지방으로 내려갈 물류정리 관리일로 하루 벌이를 하는 할아버지(신구)는 손녀 다성이(김향기)와 함께 집과 일터를 오가며 살아간다. 그러던 중, 교도소에서 복역했던 그의 아들(김영호)이 찾아와 자신의 딸 다성에게 작은 방울토마토 화분 하나를 선물하지만 다음날, 제 아버지가 푼돈을 아껴 모아둔 통장을 들고 황망하게 사라져버린다. 게다가 할아버지와 다성이가 살아가는 비좁은 집마저도 재개발 지역이란 명목으로 철거당할 상황이다.
<방울토마토>는 가난을 짊어진 하층민의 고단한 일상을 비참할 정도로 끔찍하게 묘사한다. 지저분한 얼굴과 옷차림의 아이, 심술로 발화된 삶의 체증을 한 가득 질어진 할아버지의 표정, 어떤 설명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그들은 사회적 최하층민의 삶을 이미지로 대변한다. 말 그대로 <방울토마토>에서 등장하는 할아버지와 손녀의 삶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삶이 거짓이라고 부연할 수는 없다. 분명 그런 참혹한 일상을 두르고 살아가는 이는 이 땅에 드물지 않게 존재하는 법이므로. 허나 <방울토마토>는 이를 통해 보편적인 슬픔을 끌어내고 관객에게 심적 통증을 권고한다. 진창 같은 비극적 삶을 전시함으로써 이를 통해 비통한 감정을 양산한다.
굽이굽이 돌아서라도 돌아오겠다는 할아버지의 아들이자 손녀의 아버지는 통장을 들고 도망간 후행적조차 알 수 없고, 그 와중에 입에 풀칠하게 해주던 일자리도 사라졌다. 게다가 비좁은 집구석마저 강제 철거당하며 길바닥에 내앉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있을까, 라는 순간마다 더욱 잔혹한 현실로 그들은 내던져진다. 결말은 지독할 정도다. 한치에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 그 곳은 빈부의 격차가 영락없이 인간의 삶을 쥐고 흔드는 자본주의적 패악의 세계다. 이를 통해 <방울토마토>는 자본주의 제도하에서 양산된 양극단의 계급을 묘사한다. 호화로운 대저택에서 살아가는 어떤 이는 기르는 개조차 한우를 먹이고, 어떤 이는 밥 한끼 사먹을 돈 없어 남이 먹다 남긴 국그릇을 몰래 훔쳐 마시다가 그 안에 버린 쓰레기까지 입에 담는다. <방울토마토>엔 비판의 수위를 넘겨버린 자본주의적 적대감이 넘실거린다.
전체적으로 중심인물들의 사연은 일관적인 흐름과 인과관계를 지니고 있지만 관계가 불확실한 몇몇 캐릭터들이 시간을 소모시키듯 불편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이야기의 얼개는 듬성듬성 불안함을 드러낸다. 물론 할아버지와 다성이의 주거침입(?) 에피소드는 나름의 묘미를 지닌 창의적인 플롯이라 평가할만한 부분이다. 하지만 전반적인 이음새가 부실하고, 다소 극단적인 양상의 비극적 내러티브는 시종일관 어떤 혐의를 야기시키는 것이라 다소 불편하다. 극단적인 빈부격차를 대립적 관계로 배치시킴으로써 관객이 빈곤한 노인과 손녀를 그 비극적 알레고리의 피해자로 쉽게 인식하게끔 유도당할 여지가 충분하다.
이는 결국 가난을 비극적 볼모로 삼아 관객의 눈물을 소비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지독하게 비극적인 양상 속에서 허덕이는 할아버지와 손녀가 끝끝내 비극을 맞이하는 이 무지막지한 영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건 과연 무엇인지 의문이 남는다.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는 것? 아니면, 빈자의 지독한 현실적 슬픔?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비극이 몰아친 뒤, 황폐한 땅 위에 홀로 남은 노인의 곁에 방울토마토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다. 이 영화가 희망을 말하는 방식은 이리도 얄팍하다. 제작의도는 고결했을지 몰라도, 가난한 이들의 비극적 에피소드를 적극 활용해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시키기에 용이한 결과물은 지독하게 황폐하고, 간악하다. 이는 연륜만큼이나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는 신구의 열연과 어린 나이에도 또박또박 제 연기를 하는 김향기의 호연을 제물 삼아 이뤄진 것이라 더더욱 악취미처럼 느껴진다. 그나마 이 영화가 지닌 일말의 미덕은 희망을 결코 무책임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만든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