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이하, <다찌마와 리>)란 영화가 이 사무실의 벽면과도 같은 형태가 아닐까 싶다.
설마 저 트뤼포 같은? (웃음)
당신이 지닌 취향들의 콜라주(collage)같은 영화다.
그렇다! 이건 미술로 따지면 콜라주고, 문학으로 따지면 인덱스(index)지. 내 취향이 많이 들어간 거지.
순제가 어느 정도인가?
순제는 28억 5천, 마케팅비를 포함한 전체제작비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겉보기보다 제작비가 많이 들진 않은 것 같다. 대작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다.
많이들 그러더라. 그래서 순제를 말하면 다들 놀라지.
30회차라고 들었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도 36회차로 알고 있는데.
내가 지금까지 찍은 영화 중 회차가 제일 짧다.
노사단체 협약이 이뤄진 이후에 당신이 처음으로 찍은 영화다.
그런가? 벌써 그렇게 됐구나.
30회차로 타이트하게 찍었다 해서 혹시 그 부분에 대해서 염두한 바가 있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반응을 보니 그건 아닌가 보다.
전혀 상관없다. 내가 <아라한 장풍대작전>(이하, <아라한>) 이전까지만 해도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24시간 동안 촬영하고 그런 적이 많았다. 그런데 <아라한>때부터 정말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이상 12시간 촬영시간은 지키려고 노력했다. <아라한>이후부터는 현장에서 시간을 운용하는 것에 대한 노하우가 생겼다. 그런데 그 이전에 내 영화 현장은 강도가 세다. 일단 찍어야 될 컷들도 많고, 준비해야 하는 것들도 많다.
철저하게 촬영 스케줄을 짜고 움직였어야 했을 텐데.
태도 자체를 영화의 기본 컨셉에 맞춰보고자 했다. 아예 옛날 방식의 영화 만들기 스타일을 추구했다라고 할까. 제한된 예산환경과 빠듯한 스케줄, 그걸 스스로 절제한 게 좀 있다. 이런 한계를 돌파해나갈 때 나타나는 것이 이 영화엔 진짜라는 생각을 했다. 다른 영화 만들 때처럼 하나하나 세심하게 가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도 있었겠지. 훨씬 더 세련된 방식으로. 그런데 그건 이 영화의 방향과 잘 맞지 않다고 느껴졌다. 직선으로 내지르는 현장, 전체적으로 그런 분위기 안에서 모두가 다 흉내 내고 어물쩡거리는 B무비 말고 진짜 B무비를 만들어보자 싶었다.
요즘은 워낙 어떤 영화를 만들어도 현장 규모가 크고 그렇지 않나. 그런 건 사실 돈으로 이뤄지는 것들이다. 그래서 정말 최소한의 순수한 형태의 것들을 가지고 영화를 완성시켜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우리 영화 현장이 되게 가난하고 궁색해 보이는 현장이었단 말은 아니고. (웃음) 정신과 태도의 문제겠지. 진짜를 체험하는 것. 그건 사실 관객들에겐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만드는 사람으로서 지금 이런 한계지점을 돌파해봤을 때 뭔가 얻어지는 게 많을 거란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실제로 얻은 게 많았다. 108회 차 촬영도 해본 내가 이제 30회차 촬영도 해보니까 정말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더라.
<다찌마와 리>는 한국 영화의 전통과 오늘날 관객 사이의 괴리감을 느낄 수 있는 지표가 아닐까 싶다. 단순히 뻔뻔한 유머를 즐기는 관객도 있겠지만 개중엔 의도적으로 차용된 한국고전의 장면들을 즐기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러나 후자보단 전자의 태도로 이 영화를 즐기는 사람이 월등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고전영화들의 명맥이 그만큼 현대 관객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란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만드는 여지다.
그건 지금 우리 영화문화의 현실일 수도 있겠지. 분명 아는 만큼 <다찌마와 리>를 더 즐길 수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볼 때 많은 사람들이 같은 영화를 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극장 안의 같은 프린트를 보는 것뿐이지, 보고 나올 때는 전부 다 다른 영화를 보고 나왔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지점에서 갈리는 문제가 생긴다. 난 관객들의 반응을 보자면 이 영화가 희한하게 일종의 게임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야 말로 어쩌면 인터랙티브(interactive) 영화다. 이 쪽에서 뭔가 던져졌을 때, 반대쪽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다음 상황이 다르게 읽혀진다. 지금 말한 한국고전들, 그리고 아시아의 유치한 6~70년대의 활극영화들, 그리고 더 멀리 나아가서는 007시리즈까지, 이런 것과의 연결고리가 있는 관객일수록 이 영화와 더 잘 맞아떨어지긴 할거다. 하지만 다른 맥락에서 볼 수도 있다. 내게도 처음으로 이런 류의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순간이 있었을 것 아닌가. 저런 식으로 연기를 하다니, 저런 대사를 쓰다니, 지금으로서는 말도 안 되게 여겨지는 그런 것들이 흥미로웠고, 그 자체로 낄낄거릴 수 있었다. 그런 정보가 단절됐더라도 즐길 수 있는 방식이 있다. 그래서 이 영화로 그런 유희를 즐기면서 역으로 과거를 찾아갈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그런 시선은 내겐 부담스럽다. 사실 이 영화가 과거의 영화들에 대한 존경만 담아낸 영화는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역사를 잇는다는 엄청난 사명을 띠고 만든 것도 아니고. (웃음) 하지만 이런 류의 영화가 오늘날엔 워낙 드물다 보니까 접근이 어렵다. 그래도 최근 영상자료원에서 활발히 프로그래밍 하고, 영화제 회고전를 통해서 소개되기도 하니까 어쩌면 다행이다. 지금보다 이런 상황이 더 나빠지기야 하겠나.
예전 영화들에 대한 존경만이 담겨있는 영화가 아니란 말은 애증처럼 들린다. 결국 <다찌마와 리>엔 자신의 소스가 된 고전에 대한 조롱 섞인 위트가 포함된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조롱의 태도는 B급 영화를 즐기는 방식과도 상통되는 게 아닐까.
그렇지. 지금 현대 관객들에겐.
사실 그것이 본래 일반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유희였던 것과 달리 오늘날엔 일부의 특별한 취향이 되어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다찌마와 리>도 실상 매니악한 범주의 영화에 더 근접해 보인다.
지금 난 과연 순수한 형태의 매니아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모두가 다 인터넷 뒤로 숨어버린 것 같고. 만약 이 영화가 한 10년 전에 나왔다면 B무비 말고 컬트란 용어를 쉽게 갖다 붙이기 쉬웠을 거다. 근데 컬트는 장르의 개념이 아니라 현상이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지구상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순수하고 열광적인 지지자들이 끊임없이 재관람하고 그런 행위 자체가 독특한 하위문화를 형성한 뒤, 그것이 주류문화에까지 강렬하게 영향을 미치는 현상.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들이 빠른 속도로 바뀌고, 심지어 특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엔 A와 B의 경계가 사라진 지 오래됐지. 산업구조자체가 A와 B를 용납할 수 있는 산업구조가 아니다. 모두가 그냥 메인 게임을 뛰어야 되고, 패자부활전이 불가능한 시장에서 영화를 만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이 B무비를 만든다고 생각하진 않을 거다. 예전에 비디오 시장이 있을 때는 진짜 그런 게 있었지. 하지만 소수의 취향만을 노리고 가는 건 이제 너무나 무모한 시도다. 물론 내가 <다찌마와 리>가 온 국민이 좋아할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 건 명백하다. (웃음) 당연히 취향을 타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다만 한국인이 더 많이 즐길 수 있는 강점이 확실히 있다고 봤다. 약간 모자라 보이는 영웅, 그리고 우리가 공통적으로 무의식 중에 지닌 과거에 대한 기억, 그리고 주류 영화에서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패턴들, 이런 것들을 조합해서 만들어냈기 때문에 분명 소위 매니아라고 지칭되는 소수집단보단 훨씬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쿠엔틴 타란티노’를 비롯해서 영화를 만들 때마다 어떤 감독과 비교되곤 했다.
매번 그랬지.
종종 그에 대한 반박을 피력하기도 했다.
사실 그런 상투적인 표현들과 비교가 좀 지겨웠다. 물론 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인 만큼 어떤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다. 다만 영화에 대한 오해가 생길 때, 그런 지겨움이 가중된다. 얘는 그런 쪽이야, 라는 판단으로 접근해서 영화를 완전히 다르게 파악해버린다. 심지어 영화를 좀 봤다는 사람조차도 그럴 땐 이건 좀 어리석은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류승완 감독의 팬이라고 자처하는 관객들 사이에서도 매 영화마다 반응이 갈리는 것 같더라.
팬이라기 보단 일종의 지지층이라고 해두자. 그런데 그 지지층이란 것도 재미있는 거다. 사람들이 내가 비슷한 류의 영화를 만들어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영화 사이의 간극이 크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피도 눈물도 없이>가 비슷한 거 같지만 장르적으로나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상당히 다르다. 그리고 <아라한>과 <주먹이 운다>, <주먹이 운다>와 <짝패>, <짝패>와 <다찌마와 리>. 서로 많이 떨어진 영화 아닌가.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내가 같은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왔다고 착각한다. 게다가 그 영화마다 지지하는 층이 다르다. 내가 만든 영화 중에 <아라한>을 제일 좋아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만 제외한 나머지를 좋아한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사실 난 류승완에 대한 팬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다만 관심을 가져주는 건 있겠지. 개별 영화의 지지자들이 존재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영화에서 장르영화의 형태를 보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만큼 당신의 영화를 장르영화의 포맷을 규정하고 싶은 욕구들도 때론 강한 탓일 수도 있다.
그게 편하니까 그렇겠지.
아까 언급한 것처럼 어떤 외국 감독들과 종종 비교되는 것도 국내에서 장르영화감독으로서 선례를 보여준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외국에서 비교군이 될만한 대상을 찾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90년대 후반 이후, 한국에서 장르영화라는 게 어느 정도 정착기에 접어들고 있지 않나? 명백하게 한국형 공포영화의 형식이 존재하고, 한국형 범죄 영화들이나 필름 누아르, 활극 액션영화, 여러 범주로 한국화된 영화들이 존재한다고 본다. 심지어 올 여름에 웨스턴까지 나온 판에 한국에서 장르는 이제 일상적이다. 이전에 멜로드라마는 워낙 강했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나는 오히려 특별한 거 같진 않다. 동세대 감독들이 다들 장르의 자장 안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으니까.
지금까지 만든 6편의 영화들은 액션이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하지만 각각 장르적 분자들이 다른 영화다. 범죄스릴러나 느와르, 활극, 등 저마다의 추임새는 확실히 구분돼야 마땅하다. 다만 그 영화에서 보여지는 액션들이 어디선가 봤다 싶은 흡사한 이미지처럼 느껴지는 게 장르적 착시를 부르는 게 아닐까. 사실 그건 독창성의 문제가 아니라 클리셰의 영역이다. 그런 이미지를 희귀하게 인식시키는 희소성이 당신을 특수한 영역으로 구별 짓게 만드는 요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마도 내 영화에서 액션으로 펼쳐내는 장면이 눈에 띄니까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그 액션을 둘러싼 방식에 말이 많아지는 것 같다. 이를 테면 <짝패>에서 마지막 세트의 미장센 때문에 <킬빌>과의 비교가 굉장히 많았다. 영화의 내용이나 전체적인 형식에 담긴 모든 것들이 굉장히 동떨어져 있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시감을 갖게 되는 거다. 물론 그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고 싶지 않다. 내 의도와 다르지만 그렇게 자꾸 받아들여진다면 나조차도 뭔가 오해 받을 짓을 한 것일 테니까.
<다찌마와 리>의 드라마는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는다. 내러티브가 아니라 씬의 드라마처럼 보인다.
난 이 영화의 드라마가 가장 마음에 든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드라마의 구성과 구조가 다른 지점인데도 그걸 착각한다. 이를테면 <다찌마와 리>엔 어떤 목적을 가진 주인공이 있다. 임무를 수여 받아서 어디로 떠났지만 거기서 기억을 잃고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가 다시 기억을 되찾아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그래서 원래의 임무를 다시 수행하다 보니 앞서 깔아놨던 사건들이 뒤에서 함께 작용하면서 앞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으로 맞부딪히게 된다. 그러니까 사실 이영화가 내가 만든 영화 중 그런 복선 구조에 가장 충실한 영화다. 좀 덧붙이자면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볼 때 유의점은 말투를 쫓다가 말뜻을 놓치게 되면 실패하게 된다는 거다. 이 게임에서 지는 거지. 이 영화에서 대사들의 스타일은 쉽게 얘기해서 사투리라고 보면 된다. 이 세계에서 이뤄지고 있는 말투가 그냥 이런 거다. 이 게임의 룰을 인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결과적으론 이야기에 집중해야 극장을 나오면서 승리의 깃발을 들고 나올 수 있는 거다. 거기에 실패하면 간장게장 집에 가서 간장에 밥만 비벼먹고 게의 속살 맛을 놓치고 나오는 거다.
하지만 이야기에만 집중하기엔 그것을 방해하는 유혹이 많다. 장치들이 좀 현란하다고 할까.
과잉된 이미지로 이뤄졌으니까 그런 것에 헷갈리다 보면 길 잃어버리는 거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는 거지. (웃음) 깔려있는 카드도 봐야 되고, 이 골목의 구조도 봐야 되고, 언뜻언뜻 나타나는 엉뚱한 존재들에게도 신경 써야 하고, 그렇게 노닥거리다 보면 자기가 오던 길을 잃어버리는 거지. 나도 몰랐는데 반응을 보니까 양념 맛이 너무 세서 사람들이 그 맛에 넘어가는 거 같다. 사실 그 모든 상황은 얽히고 얽힌 관계를 읽으면서 진행돼야 하는 건데 사람들은 표면 위로 흘러가는 것들을 쫓아가다가 딴 데로 가버리는 거다. 이 영화가 좀 정신 놓은 영화 같지만 사실 관객들은 빡세게 봐야 하는 영화다. 정신 바짝 차려야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
인터넷 버전인 <다찌마와 LEE>보단 매뉴얼이 복잡해진 거 같다.
난 이 영화의 오리지널 역할을 하는 인터넷 버전도 있었으니까 관객들이 지금까지 내가 만든 그 어떤 영화들보다 더 준비된 상태에서 극장에 올 거라 생각했다. 이럴 땐 기대치가 너무나 명확한 관객들이 너무 위험하다. 각자 머릿속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영화들을 보려 오기 때문에 자기 생각과 조금만 달라도 거부감을 느끼게 되니까. 그 영화가 원래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다른 것인데도 그걸 인정하지 않고 이 영화가 틀렸다고, 나쁜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다찌마와 LEE>가 <다찌마와 리>의 원류임은 확실하지만 그 원래의 소스만으로 이 영화를 채워내기란 무리이기도 하다. 그 첨가된 새로운 소스를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
이런 식의 센 유머와 설정만으로 3~40분 이상을 끌고 가기 힘들다는 건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거다. 그래서 나는 한편의 영화 안에서 장르를 이동시키면서 세 편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이 느껴지게끔 하는 전략을 택한 거다. 사실 만주 장면에서 희한한 음악을 깔거나 썰렁하게 갔으면 그 장면의 대사들이 여전히 웃긴 대사들이 됐을 거다. 그런데 진지한 음악을 깐 이유는 그냥 앞에서 봤던 것과 이건 아예 다른 거라고 강조하고 싶었던 거다. 사실 이 영화의 가장 이상적인 관객은 능동적인 관객들이다. 팔짱 끼고 앉아서 어디 한번 웃겨보라고 하는 사람들은 절대 이 영화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없을 거다. 류승완이 무릎팍도사에 나왔는데 쟤 좀 웃길 거 같다더라, 혹은 자기가 영화 좀 봤으니까 류승완 영화도 내가 한번 봐주지, 이러면 100% 실패다. 그냥 이 영화의 텍스처(texture)만을 보고 들어와서 메인 타이틀 시퀀스가 뜨기 전까지 게임 설명 안내를 숙지하고 타이틀이 뜨면 그 타이틀을 좀 즐긴 다음에 본편에 들어와서 좀 적극적으로 반응을 하면서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수수한 미장센들이나 ‘설마’와 같은 말장난들을 하나하나씩 보고 즐길 때, 그리고 그게 뒤에서 하나하나씩 어떻게 바뀌어가는지를 볼 때, 관객들이 이 영화를 이기는 거다.
아이템을 수집하듯 봐야 한다는 말 같다.
일종의 보물찾기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
장철의 <독비도>나 <서극의 칼>, 그리고 주성치 영화를 비롯한 몇몇 영화들의 특정 장면이나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차용한 장면들도 눈에 띤다. 아무래도 그런 장면들을 선별하고 배열하는 과정도 중요했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일단 ‘007’의 패턴 안에서 생각했다. 그건 옛날 한국에서 만들어졌던 일종의 첩보영화들이 기본적으로 007이 되고자 하는 전원일기 팀의 욕망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사나 행동들은 기본적으로 예전 한국영화에서 많은 것을 차용했지만 그런 스파이 영화들을 참조했다. 부분적인 액션 장면들은 당신이 언급한 영화를 비롯한 어떤 다른 영화들의 영향이 있었고. 다만 더 넣고 싶지만 넣을 수 없었다거나 이런 건 특별히 없었다. 사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갔던 거니까.
사실 ‘다찌마와 리’처럼 호환이 수월한 캐릭터도 없다. 이 작품이 그걸 증명하는 셈이고.
난 그래서 이렇게 위험한 캐릭터도 없는 거 같다. 대표적으로 이런 캐릭터 시리즈가 실패한 케이스가 ‘어니스트’ 시리즈다. 뭔가가 더 재미있는 게 나올 거 같았는데 점점 이상해졌으니까.
2000년도에 인터넷 버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 당시에 그걸 극장판으로 만들어봐야겠단 생각을 해보진 않았나?
그 땐 다른 영화들이 더 당겼으니까. 예전에 무비스트에서 했던 장문의 인터뷰에 실린 적도 있지만 사실 <다찌마와 리>는 다른 영화를 준비하는데 중간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바람에 갑자기 시간이 붕 떠서 가게 된 거다. 사실 생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뭔가를 해야 하니까, 지금 당장 시나리오를 써내려 갈 수 있는 게 뭘지 고민했다. 그러다가 작년 추석 연휴 때 이거나 한번 써볼까 해서 쓰기 시작했는데 그 연휴 3일 동안 초고를 다 썼다. 그리고 사무실 나와서 돌려보니까 사람들이 낄낄대고 보길래 이거다 싶었지. 그래서 숟가락 빨고 있을 순 없지 않느냐, 이걸 하자, 이렇게 된 거였다. 먹고 살려고 찍은 거지. (웃음)
인터넷 버전을 찍게 됐을 때처럼 돌발적인 기획이란 점에서 맥락이 비슷하다.
그렇지. 2000년도에도 사실은 느닷없이 제안 받고 맘대로 알아서 해보라고 했으니까.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의 만주 씬과 <다찌마와 리>의 만주 씬은 안드로메다급의 간격이 존재하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비교하고 싶어진다. (웃음)
그러게. 사람들이 다들 그러더라.
<놈놈놈>은 만주에 직접 가서 찍었지만 <다찌마와 리>는,
영종도에서 찍었지. 만주 가는 비행기를 타러 가기 전에 지나치는 땅에서. (웃음)
솔직히 그냥 만주라고 잡아뗐으면 영종도인지 몰랐을 거다.
우리가 찍은 장소는 사실 지평선이 뻥하고 뚫린 곳이 아니었다. 좀 넓은 공간이긴 했지만 나중에 촬영하고 나서 걸리는 장면들을 CG로 닦아내고 지운 거다. 사실 만들어진 이미지다.
만주에 가지 않고서도 만주를 찍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어느 정도 있었던 건가?
갈 돈이 없으니까 못 간 거지. 거기에 무슨 자신감이 있겠어. (웃음) 지금 <놈놈놈>이후에 얘기되고 있는 만주 웨스턴 영화들을 보면 과거 개발되기 전의 한강 둔치를 만주라고 찍어놓은 노골적인 장면들과 비슷한 거다. 그러니까 옛날엔 그런 것이 영화와 관객과의 일종의 규칙이었던 거 같다. 만든 사람들이 그냥 이런 거라 하면 관객은 그냥 알았다고 끄덕이는 암묵적인 동의지. 가짜 외국어의 사용도 사실 그런 거고.
자막처리는 정말 파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설정도 스스로 착상한 건가?
그렇다. 난 요즘 현대미디어에서 활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이미 과거와 다른 형태로 변질됐다고 생각한다. 사실 저래도 되나 싶지만 사람들은 어느 순간 이미 영상매체에서 활자를 하나의 미장센으로 즐기고 있다. 정보를 전달하는 단순한 활자로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활자 자체의 디자인을 즐기기 시작한 거다.
최근 버라이어티 프로에서 보여지는 자막이 좋은 사례가 아닐까 싶다.
맞다! 사실 최근 버라이어티 쇼에서 활자와 이펙트 사운드(effect sound)를 걷어내면 되게 썰렁한 장면들이 많지만 활자가 개입함으로써 뭔가가 더 강렬하게 증폭되는 면이 있다. <다찌마와 리>를 만들 때 내부에서 그 자막에 대한 찬반양론이 있었는데 난 자신 있었다. 현대 관객들에게 활자는 그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TV나 UCC에서는 가능한 걸 극장에서 못할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만강, 압록강, 흑롱강 씬에 사용하는 활자의 서체를 그런 식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라던가, 다운로드 족들이 사용하는 자막들, 그런 건 남들이 안 하는 것이기도 했고. 물론 내가 <주먹이 운다>를 하면서 이런 걸 할 순 없는 거니까.
사실 압록강, 두만강, 흑룡강 씬이 <다찌마와 리>의 농담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면 만주 씬은 그로부터 극단적으로 떨어진 정반대의 지점이 아닐까 싶다.
만주와 오페라 극장 씬은 좀 정색하고 찍었다. 이 영화에서 내가 무게중심을 둔 고민은 농담과 진담의 수위 조절, 가짜와 진짜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잘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뻥도 한두 번 들어야 재미있지, 시종일관 계속 듣고 있으면 질리지 않나. 어느 순간 정색하면 오히려 집중하게 되고, 그러다 또 풀어지면 그대로 즐기면 되고,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어쨌건 스스로에게 질문은 계속 던졌다. 그런 농담과 진담의 경계를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서 영화 만드는 내내 생각했다.
만주 씬의 스펙터클한 액션 씬은 다소 가볍던 영화에 일순간 비범함을 부여한다.
아무리 가벼운 영화라고 한없이 가벼워지게 하기엔 이 영화를 통해서 움직이는 자본의 크기를 무시할 순 없다. 마음이나 태도는 가볍게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자본을 운영하면서 굴러가는 현장 자체를 놀이터로 만들 수는 없는 거다. 그건 내 일이니까 내 일 자체를 가지고 장난치는 건 철부지 같은 짓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영화 감독으로서 나의 직업윤리랄까. 농담과 진담의 경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도 아마 그런 지점 같다. 핵심을 가져가면서 사람들이 영화를 체험했다고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어떤 장면들을 상상하는 것이 만드는 사람에게 일종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감정적인 배우의 어떤 연기일 수도 있고, 화면의 스펙터클일 수도 있지만 TV쇼 프로그램이나 인터넷의 동영상을 넘어서는 어떤 것, 그러니까 스크린에서만 봐야 할 어떤 것, 그게 중요했다.
<다찌마와 리>를 포함한 지금까지의 영화들은 일종의 데이터 수집과도 비슷해 보인다.
데이터를 수집한다는 게 어떤 의미지?
매 영화마다 장르적 노선을 달리하면서 자신의 간접체험을 직접체험으로 바꿔서 수집한다 할까.
학습의 차원에서? 그런 바가 없진 않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 스스로에게 쌓이는 것도 많은 것이 사실이고. 전작의 성공이나 실패, 그건 부분적인 것부터 영화 전체를 포함한 경우도 있고 결과적으로 그런 것들이 내 다음 작업에 영향을 준다. 성취한 것들은 성취한 것이니까 그걸 다시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내가 아직까지 도달하지 못한 것, 혹은 해보려 했지만 실패했던 것을 치열하게 복기하고 그 다음작업에서 그것을 넘어서려는 성향이 있다. 지금까지 계속 그런 패턴의 연장이었다. 매번 영화마다 성취한 지점도 있지만 놓친 지점도 있고, 그렇게 반복되는 것 같다.
<다찌마와 리>는 어쩌면 당신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쉬어가는 페이지나 일종의 중간결산이 아닐까?
전과에 있는 만화 페이지처럼? (웃음)
한편으론 화가가 아니라 목수가 되고자 한다는 출사표처럼 보인다.
영화를 찍으면서 생각해보니까 나란 사람은 예술가로서보단 기술자로서 영화에 접근할 때 훨씬 더 능동적인 태도가 생기는 거 같더라. 사실 나란 사람은 현장에서 영화를 만드는 노동자란 생각을 하니까 내 영화에서 숭고한 예술적 가치는 잘 모르겠다. 내가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만들려는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다루고, 어떤 세계 안에 있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고, 그 사람들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방식이 어떤 방식일 것인가의 문제다. 이런 고민으로 대본을 쓰고, 배우를 만나고, 영화의 쇼트를 계산해놓고, 그런 자체가 기능적인 방식으로 일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그렇게 기능적으로 만들었던 어떤 영화가 아주 좋은 손재주를 보여준다면 그것이 어떤 예술적 성취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찌마와 리>에서 썰매 씬 같은 경우는 쉽지 않았을 거 같다. 경험치도 없고, 쉽게 제어되는 상황도 아니니까. 임원희 씨 말로는 스노모빌에 끌려 내려간 적도 있다고 하던데.
스노모빌로 끌고 가기도 하고, 보트에 태워서 밀어 넣기도 하고, 사람 따로 모빌 따로 달리기도 하고. 우리도 처음 찍어봤고, 어느 누구도 해본 적이 없어서 노하우가 전혀 없었다. 뭐, 완전 난리통이었다. 사실 국내촬영현장에서 운용되는 장비들 중 한국형으로 개발된 것들이 많다. 야매라고 할 수도 있고. (웃음)
뭔가 능동적인 시도들이 발생한 현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했던 경험적 수치를 얻은 바도 있었을 것 같고.
역설적이지만 이 영화를 통해 규모가 큰 영화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일단 내가 전체를 장악한 상태에서 세컨 유닛(second unit)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결국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유닛으로 어떻게 현장을 운영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학습이 된다. 그리고 사실 이 영화의 후시 녹음이 독특해 보이지만 지금 헐리웃의 주류영화 대부분인 90%가 후시녹음을 하고 있다. 오히려 이렇게 절박한 환경을 돌파하면서 학습한 것들이 많다. 영화를 만드는 기능적인 측면이랄까.
어쩌다 보니 정두홍 감독과 함께 한국액션의 프랜차이즈가 됐다. 그 상황이 때론 정두홍 감독과 류승완 감독을 한국액션의 마지노선처럼 보이게 만든다. 뭔가 내부적으로 느끼는 희소성의 위기를 두 사람의 이미지로 극복하려고 한다는 인상도 든다.
난 내가 액션영화 감독이란 건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 거니까 좋다. 그런데 그럼으로써 내게 뭔가 막 짊어 지우려고 하는 게 있다. 아니,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싶은 거지. (웃음) 솔직히 나와 정두홍 감독이 함께 작업한 작품은 별로 없다. 난 그게 그냥 붙이기 쉬운 방식이고, 말하기 쉬운 방식이니까 그렇게 끌고 가는 면이 있지 않나 싶다. 유하 감독과 신재명을 붙여서 뭔가 하는 건 이상하니까, 더 따지자면 정두홍은 김영빈 감독과도 묶였었고 장현수 감독과도 묶였었고, 오히려 김성수 감독과 묶였을 때 더 빛났다. 심지어 김지운 감독과 <반칙왕>으로 묶였었다. 그런데 나와 자꾸 묶이는 건 어쨌건 액션이 강하게 등장하는 한 감독의 세편의 영화에서 관련된 무술감독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런 이미지의 결정적 요인은 <짝패>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게 컸겠지. 본질적으로 뭐가 어떤가를 떠나서 그냥 얘네들이 계속 일 저지르고 다니는 거 같으니까. (웃음)
젊은 액션배우를 발굴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나?
내가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우리 애들 키우는 것도 바빠죽겠는데 내가 무슨 배우까지 키우겠어. (웃음) 더 이상 다른 누군가를 책임지고 싶지 않기도 하고. 다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예를 들어서 <스페어>에 출연한 임준일이라는 친구는 굉장한 액션 배우다. <짝패>에서도 나왔지만 뛰어난 기량도 갖고 있고, 연기도 잘할 수 있는 친구다. 다만 내가 부담되는 건 내 영화 찍기도 바빠죽겠는데 그런 것까지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은, 방금 말했던 것처럼 정두홍, 류승완이 액션영화계의 뭐다, 그런 걸 인정하는 순간 그런 의무감이 막 요구된단 말이다. 그 이전에 더 중요한 건 난 엑션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내가 지금까지 액션 장면이 많은 영화를 만들었지만 앞으로 액션이 완전히 빠진 영화가 떠오른다면 그걸 만드는 게 내 임무다. 물론 지금까지의 행위를 보자면 난 액션영화 감독으로 불리는 게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이런 걸 해줘야 되는 게 아니냐는 의무를 짊어질 이유는 없지 않나. (웃음) 물론 좋은 액션배우가 있다면 좋겠지. 지금 정두홍 감독과 주축이 돼서 새로운 액션배우를 뽑은 ‘라이징 액션스타 프로젝트’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그런 배우들이 존재한다면 언제든 내 영화에 기용해서 더 빛나게 만들 수 있다면 좋고, 그런 배우가 내 영화를 빛나게 해준다면 역시 좋은 거니까. 근데 그게 마치 의무사항인 것처럼 오해가 형성되면 부담이 된다.
사실 액션을 비롯한 장르영화 애호가로 많이 알려졌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예전엔 장르 영화를 굉장히 좋아했지만 지금은 장르에 별로 흥미가 없어졌다. 다만 어떤 특정장르들이 몸에 붙는 감은 있지.
<주먹이 운다>의 말미에서 보여준 권투 장면은 고의적으로 시선에 거리를 둠으로써 외부에서 감정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하고 사실적인 움직임을 통해 내부적인 감정을 전달하려는 경향이 있다. 피로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할까.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당신의 영화에서 액션이 어떤 이미지적 목적만을 지닌 것은 아닌 것 같다.
피로감이라는 부분은 굉장히 정확한 표현이다. 액션 장면을 구축할 때, 그 영화를 지배해야 될 정서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된다. 이를 테면 지금 말한 장면에서는 인물의 어떤 피로감이 중요했지만 다른 장면에서는 분노의 폭발이 중요하다거나 혹은 분노한 자가 무너지는 과정을 통해서 겪는 애처로움이 중요하거나, 아니면 <다찌마와 리>처럼 통쾌함과 박력이 중요하다던가, 장면들을 구축할 때 매번 그 장면을 지배하는 정서를 생각하게 된다. 전해들은 말인데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 영화관계자가 홍콩에서 견자단을 만났다가 <주먹이 운다> 얘길 했는데 견자단이 권투장면을 그렇게 찍는 건 처음 봤다는 거다. 그건 잘 찍었다, 못 찍었다, 이런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처음 봤다는 거다. 박진감 넘치는 권투장면을 보여주겠다 했다면 교차편집의 패턴으로 진행했다던지, 좀 더 빠르게 편집해서 카메라를 타이트하게 들이밀고, 머리에 물 좀 묻혀서 주먹이 강타할 때 물방울 좀 흩날리고 그런 테크닉들을 많이 구사했겠지. 그런데 전혀 멋있지도 않게 헛방질이나 하고, 그렇게 인물들의 지쳐가는 느낌이 중요했다. 그 영화와 그 장면을 지배하는 정서가 그래야 할 부분이었으니까.
몸과 몸이 부딪힌 후에 발생하는 극도의 피로감이 당신의 영화적 정서와 가까운 게 아닐까 싶다.
물론 그건 영화마다 다르다. <다찌마와 리>같은 경우, 내가 다찌마와 리가 피로한 모습은 전혀 보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웃음) 어떤 세계 속에 어떤 인물들이냐, 어떤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느냐, 그걸 지배하는 정서가 어떠해야 되느냐, 그 영화가 요구하는 게 뭐냐가 가장 중요하다. 물론 끝까지 가는 것에 대한 애호는 있다. 그런 인물들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 점도 있고. 그러니까 내 필모그래피에서 그런 장면들이 많은 이유가 그런 까닭이겠지. 하지만 ‘핑크팬더’시리즈를 만들면서 그렇게 할 순 없는 거 아닌가. (웃음)
만약 2000년도의 <다찌마와 LEE>를 접하지 못하고 다른 영화를 통해 당신의 팬이 됐다고 말하는 관객이라면 <다찌마와 리>를 통해 당신에게 엄청난 이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비스트에서 보니까 승완이형은 어쩌고 하면서, 이렇게(엄지손가락을 내리는 시늉으로) 돼 있던데. (웃음) 보는 사람들 생각이니까, 그 생각을 틀렸다고 할 순 없지 않나. 만드는 사람과 다른 입장일 순 있겠지. 그런 것에 일일이 반응하기엔 내가 이젠 너무 나이 들었다. 늙었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진심이 전달되는 게 아니란 걸 이젠 알아버린 거다. 오해나 편견에 대해선 내가 만든 영화로 명확한 해답을 주는 게 가장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그렇지 못한 지점이 있었다는 이야긴가?
오해 받고 그러면 욱하는 건 있었지. 그래서 당신 잘못 본거야, 이러는 마음이 있었다. 사실 다르게 볼 수 있지. 예를 들어서 어떤 영화에서 어떤 인물이 한 대사를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거짓말이라 생각하고 난 진실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건 각자의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른 거다.
어떻게 보면 <다찌마와 리>는 겉으로 헐렁해 보이지만 정교한 계산에 따라 조작된 영화처럼 보인다. 배우들의 애드립이 끼어들 수 없을 정도의 장문의 문어체 대사들이 정해진 합에 맞아떨어져야 의도된 유희가 발생하니까. 결국 그 계산된 재미를 즐기지 못한 관객은 적응하지 못할 가능성도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다.
사실은 이 영화는 온통 진짜와 가짜가 뒤죽박죽으로 섞여있다. 그러니까 지금 말한 대로 정교함의 측면으로 접근하자면 되게 반대의 입장으로 얘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정교함을 가장한 헐렁함이 곳곳에 배치돼있으니까. 어떻게 보면 좀 허세부린다는 말이 정답인 것 같다. 진지한 체하거나 정교한 척하거나 허술한 척하는 영화인 거 같다. 이것이 진짜로 정교하거나 허술한 것이라기 보단 정교한 척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론 허술한 척하는, 그러니까 그런 모든 게 허세인 거다. 호방하다, 잘 생겼다, 온갖 것들이 다 허세니까. 결국 주인공은 데굴데굴 구르면서 사람 살려, 라고 외친다. 허세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대략 난감으로 끝나는 거지. 이 영화의 재미는 그런 지점에 있는 것 같다. 사실 요즘 사람들은 과연 자기 속에 있는 진심을 얼마나 밖으로 표출하면서 살아가는지도 잘 모르겠다. 더군다나 그러니까 영화는 특히 더 그렇고, 또 영화를 둘러싸고 이뤄지는 말들은 더 그렇고.
요즘은 점점 유희적인 형태의 감각적 자극을 요구하는 관객이 많아지는 것 같다. 블록버스터 규모의 스케일에 열광하는 관객들이나 버라이어티의 자막들이 주는 현란한 효과들이 통용되는 시대다. 그런 상황에서 진심으로 소통하길 바라는 감독의 입장이란 실로 고단할 수 밖에 없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영화가 점점 정보가 돼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영화 끝나자마자, 심지어 영화 끝나기도 전에 마지막 컷의 대사를 하고 있는데 문쪽 커튼이 촥 열리면서 직원이 나오고 나가는 문 이쪽이라고 자세를 잡는 순간 불이 탁 켜지면서 관객을 막 내보내지 않나. 사실 지금 극장들이 안 그래도 된다. 예전 단관극장 시절엔 다음상영들이 많이 막힐 수 있고 영사실에서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그랬다지만 지금은 영화와 영화 사이 텀도 기니까 관객들을 내쫓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쫓기듯이 영화를 본다. 영화를 보고 즐기는 태도 자체가 거기서 그냥 시간을 때우는 거다. 엔딩 크레딧이 흘러가는 시간이 소중한 건 한편의 영화를 본 뒤 그 영화를 상징했던 음악들을 다시 한번 들으면서 그 장면들을 머릿속으로 한번 정리함으로써 자기 안에 영화가 쌓이기 때문이다. 내가 여러 나라의 영화제를 다니면서 느낀 건데 대한민국 극장이 세계에서 제일 빨리 극장에서 불을 켜는 것 같다.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의 문화가 그럴 정도인데 다운받아서 보는 사람들을 붙잡고 내 진심을 얘기하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이 됐다. 하지만 입은 열려있으니 말은 해야 되겠고. (웃음)
그렇다면 대중영화라고 하는 것의 실체가 과연 무엇일까?
극장에 걸리는 영화들이 다 대중영화인 거지. <우린 액션배우다>도 대중영화고, <놈놈놈>도 대중영화고. 만드는 사람들이 대중을 대상으로 만드는 영화이기 때문에. 물론 크기의 차이는 있다. 박스오피스에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차이도 있고.
우리나라 관객들의 성향이 많이 변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미 변한 지는 오래됐다. 난 사실 수년 동안 급격한 패턴으로 변했다고 생각한다. 그니까 영상매체를 소비하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바뀐 거 같다. 예를 들면 최근 재개봉 된 <영웅본색>을 20대 여성들이 박장대소하면서 본다더라. 성냥개비를 무는 순간 막 박수치고 웃고. 그 사람들은 우리가 본 <영웅본색>과 다른 걸 보는 거지. 몇 사람이 웃는 게 아니라 박장대소를 한다더라. 강호의 도가 떨어져도 너무 떨어진 거지. (웃음)
사실 <다찌마와 리>가 차용한 영화들도 그 당시엔 비범한 자태를 뽐내던 영화들이다. 그것들이 지금 와서 보니 꽤나 우스운 영화가 된 거랄까. 그런데 당신의 영화도 실상 10년 뒤에 어떤 식으로 비춰지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냥 이런 영화가 있는데 사람들이 괜찮은 거 같다고 보면 성공한 게 아닐까? 사실 요새 남 생각 별로 안 한다. 내가 만드는 영화가 제일 중요하지. 다른 사람을 신경쓰기엔 내 일이 너무 중요하다. 할 일도 너무 많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엔 행동해야 될 것들이 너무 많다. 절박한 것들도 많고.
막연한 미래를 생각할 만큼 현실에서 여유가 없다는 말인가?
막연한 공상하고 있을 시간에 차기작 대본 한 줄이라도 더 치열하게 쓰는 게 낫다. 그러니까 난 지금 현재의 순간이 중요하다. 그리고 내가 다음에 만들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을 쓰는 게 중요하다. 이미 만들어진 영화에 대한 미련이나 애착도 없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완성했으니까 이제 다른 살길을 찾아가는 거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구입한 8mm카메라기 결국 오늘날의 계기가 된 셈인데 그 카메라는 아직 갖고 있나?
있다. 집에 있는데 이젠 안 돌아가지.
어쩌면 그 카메라에서부터 류승완이라는 역사가 시작된 거라 봐도 될 것 같다. 어쨌든 당신도 언젠가 하나의 전통으로 남게 될 텐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나?
예전엔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한다. 내가 방금 말한 것처럼 그런 생각을 하는 시간에 내가 지금 준비하는 영화 대본 한 줄이라도 열심히 쓰고, 내가 만들 영화를 생각한다. 어차피 사람 인생이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내가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은 좀 사치스러운 생각 같다 지금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한 태도 같기도 하고.
그런데 <야차>는 어떻게 된 건가? 정보를 검색해보면 간단한 줄거리와 천호진 씨에 대한 캐스팅 정보만이 확인되던데.
수년 째 그렇다. (웃음) 지금으로서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9월말이 돼야 모든 것이 결정 난다. 지금의 시장 규모에서 적지 않은 예산이 들어갈 영화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해서 기록적인 어마어마한 예산을 쓸 건 아니지만…… 하여간 지금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건 사실 조심스럽다.
차기작은 <야차>가 아닐 수도 있겠다.
차기작에 대해선 조심스럽다. 작년에 <야차>사태를 겪고 나니, (웃음) 되게 조심스럽다. 책임질 수 있는 정도의 선에서 모든 것을 공개하고 싶다 이전에 내가 뱉었던 말들이 나한테 돌아오게 되니까 신중해진다. 책임질 수 있는 만큼 발언을 해야겠구나, 정확하게 발언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다. 예전엔 쉽게 얘기했었지만 지금은 뭐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다만 뭔가는 준비를 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이 비워낸 것을 서서히 다시 채워가야 할 시기가 아닐까 싶다. 일단 어떤 구체적인 작품이나 장르가 아니더라도 뭔가 주시하고 있는 것이 있나?
사람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게 되는 거 같다. 내 취향이 좀 바뀐 거 같다. 그래서 작업 방식이나 접근 방식도 바뀐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세계에서 움직이는 이야기인가가 궁금하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을 때 그 관계 안에서 어떤 드라마가 발생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구체적인 인물, 인물과 인물의 관계, 그들이 사는 세계에서 발생된 사건, 그런 것들을 생각한다. 그에 관해 몇 가지 메모를 해놓은 것이 있다. 사실 내 조감독을 오랫동안 맡았고 작년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액션 스릴러 부분 대상을 받았던 친구가 이번에 데뷔작을 만드는데 그 대본을 내가 써줬다. 그것이 이제 곧 영화로 만들어지는데 내가 작가로서 역할을 해주는 것이 지금 나에게 닥친 것 중 제일 시급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초고만 넘겨놓고선 알아서 쓰라고 했는데, (웃음) 그게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도 중요할 거 같다.
혹시 석환과 상환이 함께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순 없을까?
배우로서는 이미 은퇴했다. (웃음) 난 배우 못하겠어, 너무 힘들어. (웃음)
(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