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드는 연쇄아동살해사건이 발생한다. 대통령이 직접 경찰청을 방문해서 범인 검거를 독려할 만큼 국민들의 관심이 지대하다. 덕분에 경찰 조직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총력을 기울이던 중, 유력한 용의자가 검거 현장에서 경찰의 오발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게 전전긍긍하던 수뇌부는 새로운 대안을 마련한다. 진범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범이라 위장시킬 만한 대체자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이 사건의 연출자로 낙점된 건 광역수사대 에이스로 꼽히는 최철기 반장(황정민)이다.
제목 그대로 경찰과 검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의 부당거래와 정경유착을 소재로 둔 범죄영화 <부당거래>는 먹이사슬처럼 얽힌 캐릭터들이 벌이는 첨탑 쟁탈전과 같은 영화다. 광역수사대의 에이스로 꼽힐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펼침에도 경찰대 출신의 동기에게 밀려 번번이 승진 심사에서 탈락하는 최철기를 축으로 진전되는 <부당거래>의 서사는 최철기에게 빌붙어서 불법을 자행하면서도 처벌을 면하는 사업가 장석구(유해진), 뇌물공여를 비롯한 정치적 공작까지 서슴지 않는 비리검사 주양(류승범)을 통해 극적 개연성의 너비를 넓혀나간다. 공생과 적대를 오가는, 겉과 속이 다른 제각각의 인물들은 저마다 몸담고 있는 조직의 직업윤리를 대변하는 인물이란 점에서 공적인 상징성을 환기시킨다.
<부당거래>는 기초적으로 시나리오 자체의 완성도가 예상되는 작품이다. <악마를 보았다>의 원작자인 동시에 자신의 원작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완성한 <혈투>의 연출자인 박훈정의 시나리오에 기초한 <부당거래>는 류승완의 연출력에 앞서서 주목해야 할 <부당거래>의 초석이었을 것이다. <부당거래>는 다층적인 캐릭터 구조와 다단한 플롯을 품고 있음에도 내러티브의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매듭을 묶고 풀어내듯 감정의 결자해지가 확실한 작품이다. 검찰과 경찰, 그리고 기업 스폰서와 언론의 공생관계를 엮어내는 <부당거래>는 그 불미스러운 관계의 이면을 탁월하게 살피며 이야기로서의 흥미를 높이는 동시에 사실적 폭로로서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 성공한다.
액션 연출의 대가로 분류되던 류승완이 탄탄한 시나리오가 예상되는 <부당거래>를 통해 기승전결의 완곡을 조율해내는 연출력을 선보이고 있다는 건 발견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한 사안일 것이다. <부당거래>는 액션이라는 장기에 묶여있는 것처럼 보이던 류승완의 입지를 새롭게 인식시켜줄 대전환과 같은 작품이다. 류승완 특유의 호쾌한 액션 시퀀스를 대체하는 건 우위를 점하려는 캐릭터들의 치열한 공방전이다. 또한 그 치열한 공방을 통해 각축을 거듭하는 관계의 우위는 대회전을 이루는 상황을 연속으로 이어지며 극적인 긴장감을 자아내는 동시에 스토리텔링에 활기를 주입한다. 물론 주연과 조연을 막론한 배우들의 열연은 이 모든 결과물의 배후이자 근본적인 자질로서 유효하다.
무엇보다도 <부당거래>가 흥미로운 건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든 상황이 풍자로서의 기능성을 발휘하는 우화처럼 보이는 동시에 극대화된 리얼리즘의 산물처럼 인식된다는 사실이다. 흉악한 범죄가 벌어지는 사회 속에서 권력의 종용을 이기지 못한 채 진실에 대한 추적을 포기하고 수사의 종결을 위해 사건을 위조하는 경찰, 사회적 정의를 위해 법을 집행하기 보단 법적 해석을 자신의 권력으로 삼아 자본에 결탁한 채 범법을 자행하는 검사, 그리고 이들과 결합해서 사회적 정의를 짓밟고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는 기업가, 그리고 이 일그러진 구조에 기생해서 진실을 왜곡하고 사건을 조장하는 언론까지, <부당거래>는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고 의심될 만)한 거대한 부조리를 통렬하게 겨냥한 폭로극과 같은 작품이다. 만약 <부당거래>를 보고 대한민국 사회 현실의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한 데자뷰를 발견한다면 그건 착시일까. 하지만 당신의 데자뷰에는 죄가 없다. 단지 영화가 현실을 못 따라갈 뿐.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 의, 식, 주가 붕괴되면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가치관마저 상실된다. 전쟁의 상흔이 가득한 1953년 서울도 마찬가지다. 도시엔 빈곤의 기운이 가득하다. 애나 어른이나 막론하고 먹고 사는 방법을 궁리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곳은 아이의 울음을 달래줄 정도의 여유도 없다. 기본적인 욕망조차 결핍된 도시에서 비정함이 새어 나온다. 그곳에서 소년은 울어봤자 별수 없다. 그래서 ‘소년은 울지 않는다’.
전쟁 후 고아가 된 종두(이완)와 태호(송창의)를 주인공으로 둔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어느 한 시대에 관한 이야기다. 1953년 서울을 재현한 스크린 너머의 풍경은 그 시대를 직접 경험치 못한 이들에게 일종의 실감을 안겨줄 만한 설득력이 존재한다. 설득력 있는 이미지는 두 소년의 삶을 둘러싼 시대적 정서를 이해하는 통로다. 전쟁이 끝나고 부모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을 받아주기엔 너무도 허기진 그 시대의 정서는 서슬이 퍼렇다. 법도 질서도 자리잡지 못한 시장을 지배하는 건 오로지 힘이다.
태호와 종두는 시장의 주먹인 명수(안길강)의 도움으로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악도 불사하는 냉혈한 도철(이기영)이 두 소년을 바라보는 시선은 편치 않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자신들이 빼돌린 미제 물건을 처분하려는 태호는 계산에 능한 만큼 사업수완을 발휘한다. 반면 강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종두는 명수의 싸움을 목격한 뒤 그를 동경하며 힘을 기른다. 태호가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종두는 감정적인 인간이다. 태호는 합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하여 이익에 따라 움직이려 하지만 종두는 직관적인 판단과 옳고 그름의 신념으로 전진한다.
영화는 대비적인 성격의 캐릭터를 통해 갈등과 화합을 그려내며 이를 통해 비극적인 시대상을 상충시키려 한다. 아이들이 이루는 군집은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자치적으로 완성한 유사가족이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부모 역할을 하고 아이들을 돌본다. 성장기를 잃어버린 채 어른 행세를 내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 그 자체가 선명한 비극이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상황 속엔 그 자체로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열악함이 선명하다.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엔 큰 무리가 없다. 간혹 상황이 심화되고 발전되는 과정에서 로맨스를 통한 갈등과 같은 클리셰의 흔적들이 발견되긴 하지만 크게 거슬리는 인상은 아니다. 감정이 개입될만한 어떤 여지가 발생하지 않는 까닭이다. 비정한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아이들의 고군분투는 비관적인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 양식을 그저 바라보게 만들 뿐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지 망설이게 만든다. 이는 <소년은 울지 않는다>가 사실감을 주지 못하는 영화라서가 아니라 그 사실적인 풍경 너머의 정서가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만한 비극적 시대상에 대한 수긍을 이미 전제로 두고 있는 까닭이다. 때때로 아역배우들의 연기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영화는 담담하다.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참여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막연한 관찰이 지속될 따름이다. 시대를 충실히 재현하며 그 내부를 지배할만한 비극적 사연도 전시하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처럼 당연해 보인다. 그 세계가 짊어진 거대한 비극의 굴레가 눈앞에 생생하여 어떤 낙관도 버겁다.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 강자와 약자의 우열관계가 생생한 시대에 기본적인 가치는 생경한 언어처럼 무기력하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비극적인 현실을 운명적으로 수용하며 살아온 전후1세대의 삶을 조명한 휴먼드라마다. 비극 자체를 삶이라 치환하며 버틴 이들의 사연이다. 생계에 목숨을 건 인간들의 아귀다툼 속에서 소년의 눈물 따윈 통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소년은 울지 않는다. 성장기를 박탈당한 소년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어른처럼 비열해지거나 스스로 강해지길 꿈꾼다. 가혹했던 시대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했던 소년들은 어른들의 세계에 뛰어들어 비극을 전제로 한 무용담을 기억에 쌓아나간다. 그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그만큼 씁쓸한 일이다. 개입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무력한 수긍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낙관과 비관이 양립한 듯한 극의 말미에서도 의지보단 어떤 체념이 먼저 감지된다. 영화적 재능보다도 시대를 관통하는 관찰자의 야심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출연작의 개봉을 기다리는 것과 특별히 다른 느낌이 있나? 흥행이 어떤 영화보다 궁금한 영화다. 저희 영화가 걸고 있는 모토가 요즘의 관객들과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이 올 지 궁금하지, 과연 흥행하게 될지, 아니면 몇몇 매니아층이 좋아하는 영화로 끝날 것인지, 궁금하다. 대중들의 지지를 얻는 영화가 될 것인지.
2000년에 인터넷에서 상영된 <다찌마와 LEE>는 선풍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사실 예상 밖으로 뜨거운 반응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걸 그냥 우리끼리 재미보고 말자는 생각으로 만든 건 아니니까. 물론 실험적인 부분이 있었고 인터넷 관객들의 일부가 그런 면을 좋아해줄 거라고 생각만 했을 뿐, 그 정도로 많은 분들이 좋아해줄지는 몰랐다. 그런데 그게 벌써 8년 전이다. 그리고 이번엔 정말 완전 상업영화로 나가는 거니까, 과거의 그것에 비해 다른 지점의 긴장감이 있다.
<다찌마와 LEE>는 당신을 코믹한 배우로 단정짓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했다. 배우로서 당신의 이미지에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나에겐 독이 되고, 약도 되는 영화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독이 될 수 있을지언정 이 영화를 한번 완성시켜보고 싶었다. 인터넷용만이 아닌 상업용으로도 한번 캐릭터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거지. 물론 그것을 완성하는 건 감독이지만 그 작업을 같이 해보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후회는 없다. 다만 이왕이면 관객들도 많이 사랑해줬으면 하는, 그런 기대감이 있을 뿐이다. 배우로서의 고민은 좀 더 나중에 하게 될 거 같다.
첫 번째로 주연을 맡은 영화이기도 했다. 다만 그것이 극장판이 아닌 덕에 그 당시엔 좀 가벼운 마음으로 연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나름 촬영 분위기도 상당히 유희적이었을 것 같고. 재미있었다. 이런 경우가 다 있을까, 신기하기도 했고.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아니라 인터넷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이런 반응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의외였지. 인터넷 영화라는 게 사실 전무후무한 작품이니까. <다찌마와 LEE>이후로도 인터넷 영화가 나오긴 했지만 그만큼의 반향을 부른 영화는 솔직히 없지 않았나. 게다가 요즘은 그런 시도도 없고, 그런 게 지금 생각해보면 재미있더라. 그게 이제 상업영화로 다시 탄생했기 때문에 감회가 새로운 건 있다. 대신 책임감도 그 때보단 더 따르고, 그런 양면성이 생기는 거 같다.
그 뒤로 몇몇 작품의 주연을 맡게 된 것이 <다찌마와 LEE>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그 당시 주연을 맡았던 두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다. 개인적으론 부담을 느낄만한 상황이 아니었나. 그게 내 인력으로 안 되는 거니까, 쉽게 얘기하면 주춤했다고 할 수 있지. 근데 배우가 항상 잘 나갈 수만은 없지 않나. 그건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연을 맡았던 두 편의 영화가 크게 흥행은 못했지만 그 뒤로도 작품을 꾸준히 하긴 했었고, 그래서 후회는 없다. 관객의 선택을 못 받은 것에 대한 아쉬움은 남지만 그 선택을 통해서 하나의 공부를 한 셈이니까. 좋은 추억이라고,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당시 무대에서 활동하던 배우 중, 요즘 쟁쟁한 연기자로 꼽히는 이가 많다. 그 당시 내가 운이 좋았던 게 최민식 선배님이나 설경구 선배님이나 송강호 선배님 같은, 소위 유명해졌다고 할만한 배우 분들이 했던 연극을 다 볼 수 있었다. 내 동기였던 황정민 씨나 정재영 씨도 원래 연극을 했었고. 정말 생각해보면 화려했던 멤버였다. 그 당시엔 연극 판에서 소문난 좋은 재원들이었다고 해야 하나. 그 때는 정말 잠재력 있는 좋은 배우들이 많았다. 정말 대학로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연기 잘 하시는 분들이 넘쳤으니까. 어쩌면 그 분들이 오늘날 명성을 얻은 게 당연한 결과물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요즘에도 그런 재원들이 있다면 몇 년 뒤 빛을 발하겠지. 앞으로도 더 많은 분들이 나올 테고.
극단 ‘목화’에서 4년 동안 활동했었다. 과거에 했던 인터뷰를 보니 힘들어서 극단에서 나왔다는 대답이 있던데 어떤 점이 본인을 힘들게 했나. 4년 정도 있었으니까. 일단 영화를 좀 하고 싶었던 내 입장에서 극단은 나와야 될 거 같더라. 나름대로 건방진 결정이었지.(웃음) 결단이라고 해야 하나. 한 다리라도 걸치면 소속감이란 게 생겨서 극단에 있으면서 영화를 모색하기 힘들더라. 물론 과감히 나왔지만 그 선택도 어려웠다. 그 뒤로 영영 연극을 못할 것 같단 느낌도 들고, 내가 잘 나가는 배우도 아니었고, 그저 영화 한두 편 짧게 해본 게 전부고. 그래도 일단 나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결정에 후회는 없다. 그냥 적당할 때 나왔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지인들의 반응은 어땠나? 사실 내가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었고, 학생도 아니었고, 나름대로 일종의 프로였지 않나. 그 결정에 대해 주변에서 가타부타 할 수는 없었을 거다. 격려는 해줄지언정. 연극하는 선배라도, 너 왜 나가, 임마, 사실 이럴 순 없으니까. 물론 선생님께서는 처음에 말리셨지. 하지만 결국, 네 선택이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해라, 하시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이제 세월이 지나서 종종 뵙게 되면 적당할 때 잘 나간 거 같다는 말씀 해주시더라.
그 당시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던 배우들로부터 얻은 자극도 있었을 것 같다. 일종의 경쟁심이 발생했을 수도 있고. 대부분 형들이었기 때문에 경쟁심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극은 됐지. 저렇게 잘 되는 배우들도 있구나. 나도 열심히 해야지. 이런 시너지 효과는 있었다. 참 연기 잘하시네. 저분 죽인다. 이러면서 정말 열심히 해야겠구나,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나한테는 행운이었던 거지. 그런 분들 연기를 연극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 자체로 내가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까. 정말 세상에 연기 잘 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충분히 느꼈다.
장진 감독과의 인연으로 영화에 발을 들였다. 그런데 한때 장진 감독이 만든 ‘수다’를 떠나면서 서로 사이가 안 좋아진 게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다. 물론 이것이 오해임을 스스로 해명했지만 이젠 장진 사단이라기보단 류승완 사단이라고 불려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지금도 장진 사단이라고 하고 싶다. 장진이란 사람 때문에 운 좋게 영화를 시작하게 됐으니까. 어떤 사람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냐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가끔 만난다. 얼마 전에도 장진 선배가 일요일마다 하는 ‘북카페’라는 라디오 프로에 출연했었고. 아무래도 내가 장진 사단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지금 찾고 있는 캐릭터가 나랑 맞지 않아서 같이 작업할 기회가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언젠가 자연스럽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하고.
<주먹이 운다>에 출연한 이후로 <식객>의 제작과 개봉이 미뤄지는 까닭에 본인 의사와 무관한 공백기가 형성됐다. 사실 그 중간에 케이블 영화에 두 편 출연하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노출이 빈번하지 않은 탓에 묻히는 경향이 있었다. 나름대로 고민이 많은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배우는 누구나 침체기가 있다고 본다. 하는 족족 매번 뻥뻥 터질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난 나름대로 활동했다. <코마>도 케이블 영화로서 최초의 시도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그 전까지 내가 했던 캐릭터와 다르다는 게 마음에 들어서 했다. 물론 상업영화를 많이 하고 싶었지. 없어서 못한 것일 수도 있고. 결국 그런 상황이 2년 간의 공백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난 그 자리에 있었던 거다. 다만 출연했던 영화가 어쩌다 보니 미뤄지고 해서 그렇게 된 거다. 사실 공백이라고도 할 수 없는 거다.
그렇게 맘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이 힘든 부분이 아닐까 싶다. 코믹한 캐릭터로 깊게 각인된 것도 사실 본인의 의도가 아니었듯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 같더라. 만약 누군가가 임원희 하면 코미디가 떠오른다고 해서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것도 웃기지 않나. 그렇게 하려고 한 건 아니지만 과정이 그렇게 흘러갔고, 어차피 그렇게 보신다면 그것도 내 책임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몫은 스크린에서 나름대로 더 좋은 코믹 연기를 하던지, 내가 코믹연기만 하는 배우가 아니란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것 뿐이다. 만약 이 인터뷰에서 내가 그렇지 않다고 써주세요, 라고 해 봤자 대중이나 관객들이 그 기사만 보고 날 판단할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흘러온 만큼 앞으로 어떻게 또 흘러가느냐가 중요하겠지.
박찬욱 감독의 <쓰리, 몬스터>에서 연기했던 테러리스트를 생각해보면 보여주지 못한 바가 분명 있을 거란 생각도 든다. 나도 매우 아끼고 좋아하는 캐릭터다. 기회가 된다면 그런 역할도 하고 싶다. 나에겐 소중한 캐릭터다.
<실미도>에서 원희 같은 역할도 입담이 재미있는 인물이긴 했지만 희화화된 인물은 아니었다.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지극히 리얼한 캐릭터였지. 물론 극의 숨통을 틔워주듯 희극적인 면을 책임지는 점도 있었다. 사실 내가 그렇게 코믹한 연기만 한 것도 아닌데 ‘다찌마와 리’가 셌나 보더라. 생각보다 안 그랬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말이다. 한 두 가지가 아니라 다양한 이유가 겹친 거 같아요. <재밌는 영화>같은 경우도 좀 컸고.
사실 진지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코미디가 당신의 장기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재밌는 영화>는 조금 과장된 코미디란 점에서 불편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도 <재밌는 영화>가 대한민국 최초의 패러디 영화란 점에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런데 거기서도 보면 시치미 뚝 떼고 하는 연기가 많다. 나는 표정이 이상해진다거나 그런 적 없다. 다만 나름 새로운 시도였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 그 뒤로 패러디 영화가 안 나왔으니까, 만약 그 영화가 성공했다면 아류작들이 많이 나왔겠지. 그래서 내 바람은 <다찌마와 리>가 흥행해서 꼭 류승완 감독이 만들지 않더라도 그런 키치적인 발상이나 B급 같은 장르가 많이 나와도 좋을 거 같다. 한국영화가 요즘 되는 것만 가고, 너무 몸을 사리지 않나. 거기에 숨통을 틔워서 작지만 다양한 시도가 나올 수 있다면 관객이나 한국영화한테도 좋은 게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극장에서 과연 이게 먹힐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이겠다. 가장 큰 고민이고 걱정이지. 인터넷에서 보던 분들이 예매권을 가지고 뛰쳐나올 것이냐, 얼마나 다운로드를 안 받고 극장으로 뛰쳐나올 것이냐. 그런 점에서 입 소문이 참 무섭다. 이거 별로니까 다운받아 봐도 돼, 이런 게 아니라, 재미있더라, 하면 빨리 보고 싶어서 극장을 찾겠지. 이미 <다찌마와 리>라는 배는 떠났으니 그건 운명에 맡겨야지.
류승완 감독이 ‘다찌마와 리’를 다시 하자고 했을 때 기분은 어땠나? 생각이 좀 많았지. 물론 합시다, 하긴 했는데 내가 예전에 생각했던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거다. 그 때 내가 그것 때문에……(웃음) 하지만 일단 그런 걱정을 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런 건 나중에 걱정하고, 과거의 ‘다찌마와 리’와 다르게 캐릭터적으로 나름 더 고급스럽게 보여줘야 할 그런 부분의 고민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번 영화를 계기로 과거에 했던 연기를 다시 봤을 것 같은데, 과거에 자신이 했던 연기를 종종 다시 보는 편인가? 생각해봤자 어차피 다 지나간 거니까, 난 과거에 했던 걸 자주 보진 않는다. 물론 이를 계기로 해서 예전 <다찌마와 LEE>를 다시 보긴 봤지. 재미는 있는데 아무래도 유치하더라. 그 당시에 골 때리는 기발함으로 다가왔던 영화였지만 시간이 지났으니까. 요즘에 만약 다시 그대로 인터넷에서 보여준다면 과연 어떨까. 요즘 세대가 빠르지 않나. 최근에 놀랄만한 얘길 들었다. 물론 특이한 경우일지도 모르겠지만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보고 연기 잘 하는 신인 배우 나왔다고 어떤 사람이 그랬다는 거다. 이병헌 씨를 두고. (웃음) 웃기지 않나? 그리고 요즘 다시 상영하는 <영웅본색>에서 우리 세대는 달러에 불 붙이고 이런 장면을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세대는 웃는다더라. 저기에 왜 불 붙여, XX, 이러면서. (웃음) 감각이 다른 거다. 놀랍더라. 요즘은 그만큼 빨리 잊혀지고, 빨리 변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겠다. 그런 그들이 이 <다찌마와 리>를 어떻게 볼지.
<다찌마와 LEE>에서는 난이도 높은 액션 장면에서는 대역을 노골적으로 보여줬다. 반면 이번 작품에선 거의 티가 나지 않더라. 잘 가린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본인이 직접 연기한 씬도 꽤 많았던 거 같다. 아무래도 액션에 대한 대비가 중요했을 것 같다. 그 전에 만들었던 것처럼 대충하면 요즘 관객들이 쳐다보기나 하겠나. 액션은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예전처럼 대역한 티를 팍팍 내서 재미를 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재미를 배제한 다른 재미를 주고자 특별한 장치를 많이 했지. 많이 공을 들이긴 들였다.
그래서인지 <다찌마와 LEE>NG컷과 달리 이번 <다찌마와 리>NG컷에서는 고통을 호소하는 장면이 많았다. 실제로 오토바이 씬과 썰매 씬은 꽤 위험해 보였다. 부상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 액션은 몇 번 찍어봤으니까, 힘든 것도 알고, 힘들어야 관객이 즐겁다는 것도 안다. 힘든 걸 알면서 하는 만큼, 힘들어서 보람이 있다는 것도 안다. 멋있지 않나. 그게 액션의 매력인 거 같다. 솔직히 어디가 크게 다쳤다고 할만한 건 없지만 잔부상이 많았다. 소위 말하면 까지는, 타박상이 많았지. 그래서 어디가 터지고 그래야 다쳤다고 말하고 기사로 생색낼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하더라. (웃음) 찰과상 이런 건 사실 티도 안 나니까.
사실 촬영현장은 치열했을 것 같다. 하지만 현장의 상황과 반비례하게 영화는 상당히 호쾌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본인이 지닌 연기적 경험으로서의 기억과 영화적 결과물 사이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독비도>에 나왔던, 외팔이 검객의 만주 벌판 씬을 촬영한 영종도가 벌판이라 정말 추웠다. 추위 때문에 엄청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아수라장, 아비규환이 따로 없을 정도로 정말 힘들었다. 썰매액션 같은 경우는 아마 세계적으로 최초일거다. (웃음) 외투 타고 내려간 사람은 처음이니까, 누구도 해본 적 없고, 아무런 노하우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될지 서로 모르니까 거의 연구하면서 찍다시피 하고 그래서 고생도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일이다. 스키장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이리 찍고, 저리 찍고 했던 기억이 난다. 새로운 시도란 점도 특별하고.
썰매 씬은 돌발적인 경우가 많았을 텐데. 제어가 잘 안되니까. 외투를 타고 내려가다 보니 쭉 내려가다가 제어가 안되면 구르기도 하고, 잘 내려가다가 갑자기 안 미끄러지는 경우도 있고. 그런 노하우가 없어서 위험한 것도 많았다. 설원에서 타는 차, 스노우 모빌(snow mobile)이라 하나, 거기에 매달려 내려가면서 카메라로 찍고 그랬는데 종종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 가파른 경사에서 내려가며 찍다 보니까.
마음가짐 자체가 과거와 다를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마음가짐이란 건 당연히 달라야 했다. 액션뿐만 아니라 연기적으로도 그렇고. 우리가 2000년에 했던 그런 치기 어린 장난과는 다르지 않나. 몇 십억을 책임져야 되는 입장이고, 극장에 거는 영화니까 관객들이 돈 아깝지 않을만한걸 보여드려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코미디란 게 원래 어렵기도 하고.
캐릭터적으로 좀 더 비장한 느낌이 가미됐다. 좀 진지해졌지. 2000년의 ‘다찌마와 리’는 어디서 나타난 지도 모르는 일종의 협객이자 건달이었지만 이번엔 그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일제시대의 첩보원이 된 셈이다. 물론 캐릭터가 완전히 달라진 건 아니다. 일단 뿌리는 그대로 있고 그래서 ‘다찌마와 리’라고 부르는 거고. 그런데 그가 좀 더 점잖아지고, 진지해진 거지. 여러 캐릭터가 있지만 내가 중심을 잡고 가야 하는 것이기도 했고. 더 웃겨보지 그랬어, 라고 말하는 분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지만 다찌마와 리의 진지함 속에서 오는 웃음을 주려고 했다. 심지어 구르는 장면조차도 진지하지 않았나. (웃음)
구르는 와중에 나오는 어이쿠, 하는 추임새가 상당히 재미있다. 그게 안 들어가면 다찌마와 리가 아니지. 사실 구르면서 좀 더 많은 소리를 냈는데 원래 사운드에 묻힌 건지 잘 안 들리더라. 어~허, 어~허, 하는 이런 것도 있었는데 그게 안 들리더라. (웃음)
사실 다찌마와 리는 애드립이 가미되기 쉬운 캐릭터 같지만 실제로는 대사의 합이 치밀하게 짜인 상태이기 때문에 즉흥적인 것을 가미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본인도 애드립을 잘 안 한다고 들었다. 이번에도 애드립은 별로 없었나? 별로 없다. 왜냐면 대사 자체가 문어체라서 섣불리 애드립을 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처음에 마담 장의 대사 봐라. 외부인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이 곳에서 누군가의 눈빛이 느껴지는 건 긴장 때문에 생긴 나의 착각이겠지? 대사가 어려워서 입에 붙지도 않는다. (웃음) 이런 대사를 가지고 애드립을 하기란 힘들지. (웃음) 물론 약간의 애드립은 있긴 있지만 그게 채 10%가 되지 않을 거다. 철저히 계산된 대사를 해야 하니까 다른 배우들도 아마 별로 없었을 거다.
아무래도 대사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장문의 대사를 외우는 것도 애먹을만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이 영화는 시적인 문어체 대사들이 기교로 작용하면 끝나는 거다. 그걸 재미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려운 거 같다. 난 시종일관 진지하기 때문에 그걸 지루하게 느끼지 않게 만드는 것도 관건이고. 예를 들면 만주 벌판 씬에서 국경 살쾡이가 다찌마와 리를 찾아와서 그냥 싸우면 되는데 멋있게 한마디씩 주고 받는다. ‘죽을 때가 되니 제삿날을 부르는구나.’ ‘뜸을 들여야 음식이 맛있는 법.’ 그런데 요즘 영화는 안 이렇지만 옛날 영화는 진짜 이랬거든. ‘네가 아직 내 주먹 맛을 못 봤구나.’ 이런 식으로 일장연설을 하지 않고 바로 싸우면 어색했던 시대니까. 그런데 요즘은 그게 아니지 않나. 그냥 팍팍 치고 나가는 시대니까. 그런 옛 것의 즐거움을 주려고 잊고 있던 것들을 끌어낸 거지. 그게 재미없다고 하면 할 수 없는 거지만, 그런 과거의 기법들을 요즘 관객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하다.
다찌마와 리는 정체불명 자체를 매력으로 끌고 가는 특이한 캐릭터다. 족보도 없는 듣도보도 못한 캐릭터지. (웃음) 걔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형제는 있는지, 과거에 대해서 캐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다찌마와 리는 다찌마와 리다. 그게 재미있는 거 아닐까? 그리고 다찌마와 리는 무엇이든 갖다 붙여도 다 얘기가 된다. 류승완 감독님하고 농담처럼 얘길 했는데 다찌마와 리가 어느 여고에 교생으로 간 거다. 그렇게 만든 얘기가 ‘여고개담’, 부제가 ‘다찌마와 리 여고 교사가 되다’ 여고에서 다찌마와 리가 여학생들과 함께 귀신들과 싸우는 거지. (웃음) 갖다 붙이면 안될 얘기가 없다. 내년 여름에 대비해서. (웃음) 물론 장난으로 한 얘기다. 그냥 그렇게 된다는 거지.
호환이 그만큼 용이한 캐릭터란 의미다. 다찌마와 리가 미래에 갈 수도 있고, 터미네이터와 맞붙다. 이런 식으로. 이러니까 점점 <영구와 땡칠이>처럼 되는구나. (웃음) 이래저래 재미있는 발상이 아닐까 싶다.
아까 말한 만주 벌판의 대결씬처럼 고전액션영화에서 차용한 장면도 더러 있다. 이번 <다찌마와 리>를 위해 참고한 몇몇 작품이 있을 것 같다. 박노식 감독님의 <악인이여, 지옥행 열차를 타라>가 제목으로 차용된 건 권선징악이란 영화의 주제가 서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이렇게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과거 액션영화에서 여러 가지 소스를 따왔기 때문에 어떤 특정영화뿐만 아니라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한국영화는 볼 수 있는 대로 다 찾아서 봤다. 주성치의 <희극지왕>과 같은 설정도 가미됐고, <서극의 칼>을 의도적으로 재연한 장면도 있고.
아무래도 <다찌마와 리>의 즐거움은 정색하는 코미디가 아닐까 싶다. 특히 그 압록강, 두만강, 흑룡강 씬은 정말 배짱이 두둑하더라. (웃음) 내가 봐도 심하더라. (웃음) 현장에서 농담으로, 화면을 좀만 내리지, 이거 너무 뻥이 심한데, 그랬었다. 그리고 한강대교도 좀 가고, 흑룡강이면 좀 저기 서강대교도 가고 그러지, 너무 성수대교에서만 찍어. (웃음) 농담이고, 물론 그게 의도가 있는 거니까.
사실 이만큼 파격적인 실험영화도 없다고 여길 지경이다. 사실 그저 웃는 관객에게 반대로 무너진 성수대교를 생각헤라, 이런 건지도. (웃음) 그걸 정말 기발한 시도로 받아들이면 영화는 성공한 건데, 장난치고 앉아있네, 쌈마이들, 이러면 끝나는 거다. (웃음) 그러니까 이 영화는 좋게 보면 기발해서 용서가 된다. 반대로 좀 트집잡고 들어가자면 트집잡을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과연 이 영화가 어떻게 될까.
‘다찌마와 리’의 가르마 넓이도 변했다. 2:8에서 3:7비율로 미묘하게 옮겨진 것 같더라. 그것도 사실 의도된 변화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의도된 거다. 사실 예전엔 거의 9:1이었지. 그런데 이번엔 옛날 배우들처럼 보이려고 정확한 8:2로 멋을 낸 거다. 나름대로 그 당시 멋이었으니까. 의상도 자주 갈아입지 않나. 사실 옷도 그 시절로 치자면 촌스럽진 않다. 세련된 다찌마와 리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고. 악당들도 그 당시의 멋을 내려고 노력했고, 여배우들도 그 당시의 화장법, 그 당시의 유행했던 옷을 입고 나온다.
사실 시대적인 분위기가 감지된다. 사실 그 지점이 과거 <다찌마와 LEE>와 이번 <다찌마와 리>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다기 보단 그 당시 영화 속 연기가 그랬다는 걸 보여주는 거지. 물론 그 당시 말은 못 들어봤지만.
시대극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극?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는데.
목소리의 발성톤이 사극에 어울릴 거란 생각이 든다. 한번도 염두에 둔 적은 없나? 이렇게 하면 사극이 들어오겠다, 라는 게 가능한 것도 아니니까. (웃음) 옛날부터, 왜 사극이 안 들어오지? 이런 생각은 해본 적 있다. 목소리가 코믹해서 그런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들라 해라’ 나름 어울리는데. (웃음) 하지만 한번도 제의가 들어온 적이 없다.
아직도 코믹한 장르의 시나리오 제의가 주로 들어오는 편인가? 아직도 그런 편이지. 하지만 그게 많이 상쇄됐다. 2000년에 <다찌마와 LEE>끝나고 3~4년 정도 그랬는데 그 뒤로는 여러 역할이 많이 들어왔었고. 또 모르지. 이번에 다시 그렇게 돌아갈지도.
다시 연극무대로 나가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 하고 싶었는데 못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하긴 해야 한다. 다만 자꾸 영화를 하게 되야 하니까 미뤄지는 거다. 사실 연극도 날 찾아줘야 하는 거지. (웃음) 어쨌든 그런 마음은 갖고 있다. 어차피 난 지금도 연극에서 연기를 배웠다고 생각하니까. 물론 심심찮게 연극은 들어온다. 못해서 아쉽지.
종종 멜로 영화를 하고 싶다는 의견을 표했었다. 농담 반 진담 반처럼 보이지만. 그게 약간 와전된 바가 있다. 물론 하고는 싶지. 그런데 하고 싶은 장르를 꼭 찍어서 말해주라고 해서 그냥 농담처럼 멜로, 이런 것뿐이다. 사실 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겠어. (웃음)
‘다찌마와 리’라는 역할이 본인에겐 중요한 전환점이 아닐까 싶다. 과거 배우로서의 인지도를 넓히게 만들어 준 캐릭터였다면 이번엔 또 한번 배우로서의 중간결산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싶다. 반복이란 표현보단 새로운 시작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좋은 결과가 나서 여러 가지 장르적인 발전에도 기여한다면 나 자신에게도 좋은 거고 보람된 거니까 관객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면 하는 게 가장 큰 바람이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가 중요한 거 같다.
낯을 좀 가리는 편인 거 같다. 맞다. 낯을 좀 가리는 편이다.
아무래도 영화에서 보여준 호방한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의외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보여준 그런 캐릭터대로 살자면 차라리 평상시에 살기 힘들다. 지치지. 사람이 진지할 때도 있고, 안 그럴 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 않나. 영화적으로 기대하는 건 다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이미지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영화적인 이미지도 나에게 담겨 있는 것이겠지. 다만 실제로 그런 이미지처럼 살거라 생각하니까 그런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겠지만. 사실 그렇게 살면 미친 놈처럼 보일 거다.
그런 성격으로 연기를 마음먹게 된 사연이 궁금하다. 어쩌다가 학교에서 연극반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게 즐거웠다. 내가 잘 하는 게 있네, 뭐 이런 거. 내가 이걸 하면 참 행복한데 성격이 문제될 리가 없는 거지. 성격을 바꿀지언정 그게 좋으니까. 그래서 많이 적응했던 거 같다. 물론 일부로 바꾸려고 했던 건 아니었고 사람들과 어울려서 공동 작업하면서 자연스럽게 바뀐 것 같다. 바뀌려고 노력했다기 보단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니까.
연기를 통해서 스스로를 극복하게 된 측면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거창할 것까진 없지만 있다고 볼 수 있죠. 내 스스로가 거기에 맞춰져 가는 거니까.
어쨌든 이제 우리는 통성명이 필요 없는 사이가 됐다. 지옥행 급행열차는 안타도 되겠지. (웃음)
지난 2000년, 인터넷에 유포된(?) 류승완 감독의 중편영화 <다찌마와 LEE>를 보며 방구석에서 낄낄댄 기억이 있는 이라면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이하, <다찌마와 리>)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다찌마와 리>는 모니터에서 스크린으로 주소지를 옮긴 자기 복제작,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품종 개량작이라 명명해도 좋다. 버전업된 ‘일백푸로 후시녹음’과 ‘정통 액숀’, 그리고 상하이와 만주, 스위스, 미국까지 이어지는 다국적 비(非)현지(?) 로케이숀으로 돌아온 <다찌마와 리>는 ‘디지털 푸로젝트’ 액션협객물 <다찌마와 LEE>를 글로발 스케일의 잘빠진 첩보액션물로 확장시킨 또 한번의 문제작이다.
과장된 수사를 남발하던 한국고전액션영화의 문어체 대사를 원형 그대로 영화에 활용한 <다찌마와 LEE>는 구시대적 촌스러움을 복고적 유희로 승화시키는데 전략적으로 성공했다. <다찌마와 리>역시 그 전략을 뻔뻔하면서도 노골적으로 답습한다. 다만 모니터에서 스크린으로 스케일이 넓어진 만큼 그것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음을 간파한 것인지 의도적 규모가 넓어졌다. 자신의 문제작을 다시 한번 매만진 류승완 감독이 추가한 메뉴의 정체는 박노식 감독의 1977년작, <악인이여, 지옥행 열차를 타라>에 ‘급행’의 추임새를 넣어 변주된 긴 부제로부터 음미할 수 있다. 권선징악의 목표가 뚜렷한 6~70년대 한국고전액션물에서 만연했던 수사남발 장문대사를 익살스럽게 배치하던 <다찌마와 LEE>의 전략적 응용사례를 헌사수준으로 격상시키는 한편, 그 영역을 한국고전액션물에서 동아시아 첩보활극까지 확대했다. 게다가 유희적 스킬이 추가됐다. TV에서 종종 개그맨들이 구사하던 엉터리 외국어 음차가 거리낌없이 도입됐고, 그와 함께 무단 배포 형식의 인터넷 영화자막을 활용한 풍자적 개그까지 가미된다. 좀처럼 무시할 수 없는 위력적인 화장실 개그도 종종 눈에 띤다. 극장판은 과거 인터넷판보다 분량이 늘고 스케일이 확대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유희적 너비의 폭을 더욱 발전적으로 확충했다.
<다찌마와 리>는 사실 모든 면에서 아이러니한 영화다. 쌈마이 정체성의 구시대적 B급 유희를 발산하지만 때깔은 최신판 세련미로 충만하다. 어찌 보면 이건 굉장히 실험적이다. 낡아빠진 구시대적 유물에 현대적 회화기법을 채색하는 모험이다. 만약 그 누군가가 이 영화를 보고 자지러진다면 그 의도적인 방식을 수용할 의사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관객이라면 그 의도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암묵적인 이해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시대를 배반하는 언어가 유희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 의도된 쓰임새에 대한 충분한 수긍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찌마와 리>는 모든 것이 헐거워 보이지만 실제론 상당히 계산된 구조로 작동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즉흥적으로 발생한 애드립을 추임새로 넣어도 상관없을 듯한 장문대사들의 희극성은 실제로 치밀하게 직조된 대화의 합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쯤 나사 풀린듯한 자세를 취하지만 실제론 확실한 의도를 품고 조율된 경로로써 진행되는 영화적 구조로 이뤄져 있다. 그만큼 모든 경로를 추적하는 배우들의 역할 몰입이 중요해진다. 그런 점에서 극의 전반을 이끌어가는 임원희의 연기는 애초에 <다찌마와 LEE>로 잉태된 그때만큼이나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셈이다. 또한 국경 살쾡이 역을 맡은 류승범은 <다찌마와 리>에서 가장 큰 파괴력을 자랑하는 웃음을 발생시키는 다크호스라 할 수 있다. 물론 가장 무시무시한(?) 웃음의 희생양은 진상 8호 역의 정석용이 맡았다.-이건 보면 안다. 당사자에게 깊은 위로를.- 게다가 박시연의 일관성있는 후시 연기도 꽤나 눈길을 끈다.
하지만 뼈 속까지 유치 찬란해 보이는 이 영화에도 비범함은 있다. 코믹과 액션은 <다찌마와 리>의 양 날개나 다름없다. 전자가 관객과 스크린을 끼워 맞추는 너트라면 후자는 그것을 조이는 볼트나 다름없다. 웃음은 관객을 <다찌마와 리>로 응시하게 만드는 일종의 감상적 매개체라면 액션은 그 감상의 화룡점정을 찍는 결정적 지점이다. 최근 만주벌판을 무대로 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이 실제 만주를 카메라에 온전히 보존하며 호쾌한 활극적 기운을 담아낸 것과 비교했을 때 영종도를 눈 딱 감고 만주로 치환한 <다찌마와 리>의 성과는 더욱 선명해진다. 그것에 실제로 접근하지 않고서도 그것을 전시할 수 있는 대범함은 <다찌마와 리>가 단지 퍼포먼스 위장술에 능통한 혹은 우격다짐이 강한 영화라서가 아니다. 다찌마와 리가 자신을 찾아온 국경 살쾡이와 마적단 일행에 맞서는 일대 다수의 평원 결투씬은 만주 평원에서 말을 타고 내달리던 <놈놈놈>의 그 장면 못지 않게 스펙터클한 감상을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류승완 감독은 세월 너머로 희미해진 한국고전액션영화에 새로운 육체를 대입해 재생하곤 한다. 그 순간만큼은 <다찌마와 리>가 품은 비범한 액숀 로망이 한없이 분출된다.
<다찌마와 리>는 마치 막 꾸며낸 거짓임을 알면서도 그 재미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입담 좋은 이야기꾼의 언변과도 같은 매력이 있다. 물론 그 싸구려 유희의 의도를 체감하지 못하는 관객에게 <다찌마와 리>는 그저 열라 유치한 삼류영화로 몰락해버릴 공산도 있다. 하지만 그 유희는 순간적인 컷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어 만만찮다. 무엇보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뻔뻔함에 기가 차서 감탄할 정도다. 특히 거대한 자막을 패기만만하게 앞세운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흑룡강 씬을 예로 들만하다. 누가 봐도 성수대교임이 분명한 그곳에서 심지어 지나가는 차가 앵글에 포착되고 뒤편으로 아파트까지 적나라하게 보이는데 영화는 그 곳이 압록강이라고 시치미를 떼더니 후에 두만강과 흑룡강까지 재활용하면서도 딱 잡아뗀다. <다찌마와 리>의 다국적 로케이숀은 이렇게 완성됐다. 이 정도면 노골적인 커밍아웃이다. 하지만 그 우격다짐이 실소 대신 폭소를 유발하는 건 실제공간을 대리 출석한 그 짝퉁 공간들의 기능성이 기발하게 발휘되는 덕분이다. 순발력있는 유희를 그 순간에 확실히 소비하되 그것을 토막내지 않음으로서 전체적인 리듬을 해치지 않는다. <다찌마와 리>는 상당히 노련하면서도 민첩하고 성실한 영화다. 류승완 감독의 고군분투를 바탕으로 한 총체적 경험에서 잉태된 의욕적인 시도들이 상당수 엿보인다. <다찌마와 리>의 뻔뻔함을 높게 평가할 수 있는 건 그 의욕이 남기는 잘생긴 호감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