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배우를 어디서 봤더라?’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 비단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기시감을 부르는 대부분의 배우들은 언젠가 다시 당신의 눈에 들게 돼 있다. 샘 록웰이 바로 그런 배우다.
70년대 TV게임쇼의 유명 제작자이자 진행자였던 척 베리스가 CIA요원으로서의 살인 경력을 고백한 자서전을 영화화한 <컨페션>(2002)은 조지 클루니의 첫 연출작으로 화제를 모았다. 클루니를 비롯해서 드류 배리모어, 줄리아 로버츠와 같은 할리우드 톱배우가 등장하는 이 작품의 주연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샘 록웰의 것이었다. “영화가 완성된 건 샘 록웰이 처음부터 매우 용감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비열한 짓을 많이 한 캐릭터지만 보는 이들은 그를 지지해야만 한다. 적임자를 찾기란 어려웠고, 새미가 바로 그였다.” 클루니의 말처럼, <컨페션>은 록웰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했다. 그 신뢰란 전적으로 그의 경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1968년 11월 5일, 캘리포니아 댈리시티에서 배우를 지망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록웰은 두 살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한다. 다섯 살이 되던 해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그는 여름 동안 뉴욕에서 사는 어머니와 시간을 보냈고 그녀가 일하는 뉴욕 시내 극장가의 문화를 일찍 경험할 수 있었다. 심지어 10살의 록웰은 이스트 빌리지의 한 극장 관계자의 제안으로 오디션을 치른 뒤, 곧바로 험프리 보가트가 출연하기도 했던 즉흥 코미디 촌극 무대에 어머니와 함께 오른다.
“나는 열 살부터 극장에서 이상한 짓을 했지만 내 시간 대부분을 보통의 10대가 하는 것을 하며 보냈지. 당신도 알다시피, 나를 흑인이라 생각하며 브레이크 댄스를 연습하거나 대마초를 빨아댔으니까.” 농담 섞인 스스로의 말처럼 록웰의 십대는 파란만장했다. 어머니 덕분에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일찍 발견했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한 생활양식은 록웰의 학업을 방해하고 십대를 잠식했다. 습관적으로 약물을 복용하고, 여자를 찾아 파티를 전전하던 록웰의 방탕한 10대는 결국 부모님의 노력으로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배우로서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제작사가 만든 TV호러영화 <클라운하우스>(1989)로 데뷔한 록웰은 배우로서 미래를 걸고자 다짐했다. 뉴욕의 연기스쿨 ‘윌리엄 에스퍼 스튜디오’에서 트레이닝을 받던 록웰은 틈나는 대로 영화 오디션에 참여했고, <브룩클린으로 가는 비상구>(1989)나 <인 더 수프>(1992) 등과 같은 독립영화의 출연기회를 얻어냈으며 몇 편의 TV시리즈에 단역으로 출연하거나 극단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한편 생계 유지를 위해 레스토랑 서버나 사립탐정 조수와 같은 일을 전전하기도 한 록웰은 1994년, 맥주회사 밀러와 광고 계약을 맺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그 영화는 확실한 터닝 포인트였다.”여기서 록웰이 말하는 ‘그 영화’란 바로 톰 디칠로의 <달빛 상자>(1996)다. 존 터투로가 연기하는 이성적인 엔지니어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괴팍한 히피 역할이란 록웰의 지난 경험을 비춰봤을 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중적인 흥행을 얻지 못했지만 인상적인 평가를 얻은 록웰은 미샤 바튼의 데뷔작 <론 독스>(1997)로 다시 한번 더 큰 주목을 얻는다. 선댄스에서 호평을 얻은 이 작품으로 록웰은 다양한 영화제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저예산의 독립영화를 통해 록웰은 경험과 경력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우디 알렌의 <셀러브리티>(1998)에 참여한 록웰은 이듬해 톰 행크스가 출연한 <그린 마일>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쇼생크 탈출>(1994)에 이어 다시 한번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영화화한 프랭크 다라본트의 <그린 마일>에서 그는 비열한 사형수 와일드 빌을 연기한다. “나는 그를 사탄을 만난 허클베리 핀처럼 보았다”고 밝힌 록웰은 게리 올드만이나 존 말코비치를 참고하며 “구역질 나는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성아소애 변태라고 생각하는 와일드 빌”을 연기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미국 영화배우조합 시상식의 연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그리고 록웰은 이를 통해 할리우드에 한 발을 걸치게 된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TV시리즈를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갤럭시 퀘스트>(1999)와 <미녀 삼총사>(2000)에서 연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런 과정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샘 록웰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 <달빛 상자>였다면 그의 전환점이 된 인물은 조지 클루니일 것이다. <오션스 일레븐>(2001)의 얼간이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웰컴 투 콜린우드>(2002)에 출연한 록웰은 스티븐 소더버그와 공동기획자로 이름을 올리고 단역으로 등장하기도 한 클루니로부터 클리블랜드에 있는 어느 바에서 그의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 록웰은 말했다. “그래, 좋아, 무엇이든, 어떤 것이라도 해주지. 하루라도 배우가 된다면.” 그리고 한 달 뒤, 소더버그의 ‘섹션 8’에 있는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조지가 혹시 당신이 10월에 시간이 있는지 알고 싶다더군.”록웰의 첫 단독주연 이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배역에 너무 유명한 누군가를 원치 않았다”는 클루니의 바람대로 <컨페션>의 적임자였던 록웰은 “무엇보다도 그는 그 역할에 대한 권리가 있는 배우”이기도 했다. 그리고 <컨페션>은 록웰의 권리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이해시키는 결과물이 됐다. <컨페션>의 트레일러를 본 리들리 스콧은 <매치스틱 맨>(2003)에 니콜라스 케이지의 상대역으로 록웰을 캐스팅했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2006)에 출연한 것도 조지 클루니를 통해 얻은 브래드 피트와의 인연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렇게 록웰은 흔히 비주류와 주류의 진영으로 구분되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를 건넜다.
“나는 항상 조금 이상해지거나 약간 삐뚤어지는 것을 느낀다. 나만큼 괴짜인 사람도 없을 거다.”정형화되지 않는 그의 성향은 어떤 캐릭터나 장르에도 곧잘 어울리는 능력으로 승화됐다. 2007년작인 <조슈아>와 <스노우 엔젤>과 같은 스릴러에 출연한 바 있는 록웰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005)나 <더 문>(2009)과 같은 SF장르에도 익숙한 배우다. <컨페션>이나 <매치스틱 맨>과 같이 범죄물을 바탕으로 둔 코미디는 물론 <에브리바디스 파인>(2009)과 같은 가족드라마에서도 썩 어울리는 연기를 선보인다. 또한 “나는 끊임없이 우울한 연기적 접근을 꾀함으로써 나를 채우는 유형의 배우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고독하고 우울한 감수성이 짙게 드리운 록웰의 인상은 독설적인 언변으로 유머를 이끌어 내는 그의 태도와 어울리며 작품 전반에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한다. 특히 근작인 <더 문>에서 광활한 우주의 달기지 속에서 홀로 생활하는 샘 벨을 연기하는 록웰의 존재감은 단 한 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정도로 흥미로운 것이었다.
확실한 건 이제 록웰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연기를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섰다는 사실이다. <아이언맨 2>(2010)와 같은 대작 블록버스터로 할리우드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는 여전히 <위닝 시즌>(2009)과 같은 독립영화로 선댄스나 시체스에서도 존재감을 자랑하는 전방위적인 배우로 거듭났다. “나는 내 스스로를 캐릭터로서 인식하는 배우다”라고 말하는 그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가늠할 수 없기에 더욱 흥미로운, 지울 수 없는 존재감을 지닌 배우. 그가 바로 샘 록웰이다.
왕년에 ‘놀아봤던 언니’는 이제 진짜 재미있게 노는 법을 깨달았다.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보단 자신을 일으키는 것이 즐겁다는 걸 알게 됐다. 운명 같은 인생의 반환점을 거칠게 돌아온 드류 베리모어는 이젠 스스로 선택한 반환점을 향해 유유히 질주한다.
지난 1월 17일 미국 캘리포니아 베버리 힐튼주 호텔에서 열린 제6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드류 베리모어에게 뜻 깊은 것이었다. 베리모어는 HBO에서 방영된 TV 영화 <그레이 가든스>로 TV 미니시리즈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됐다. 결국 베리모어는 생애 첫 골든글로브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베리모어의 수상 소감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는 7살 때부터 이 안에 있었다.” 드류 베리모어는 일찍부터 배우로 살아왔다. 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E. T.>(1982)의 중심에 인형 같은 얼굴의 소녀가 있었다. 드류 베리모어는 그렇게 불과 6살의 나이로 유명세를 경험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 해부터 골든글로브 시상식장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베리모어는 1984년에 출연했던 <우리 딸은 못 말려>로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된다. 불과 9살의 나이였다.
유년 시절 대단한 유명세를 경험한 배우들의 성장담은 순탄치 않다. 유년 시절부터 극성스러운 관심을 얻기 시작한 아역 배우들의 지난한 성장스토리는 마치 뻔한 공식처럼 발견되곤 했다. 베리모어 또한 그 공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75년 2월 생인 베리모어는 생후 11개월 만에 애완견 먹이 광고 오디션을 통해 카메라 앞에 섰다. 그리고 1980년, <올터드 스테이트>에서 단역을 맡으며 영화에 데뷔한다. 그녀의 빠른 데뷔는 그녀의 집안 내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 베리모어의 아버지 존 드류 베리모어를 비롯해 그녀의 할아버지 존 베리모어와 할머니 돌로레스 코스텔로는 배우의 혈통을 물려줬다. 아이리쉬 혈통의 연기자 가문에서 태어난 베리모어의 미래는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였다. 다만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빠른 유명세가 그녀의 삶에 이른 전환점을 만들었다. “내가 어린 소녀였던 어느 날로부터 하루가 지난 다음 날, 나는 내 사인을 받기 원하고 함께 사진을 찍거나 나를 만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2년 뒤, <우리 딸은 못 말려>에 출연한 베리모어는 9살의 나이로 생애 첫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 노미네이트를 경험한다. 유명한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베리모어의 연기를 이렇게 평했다. “베리모어는 이 역할에 정확히 들어맞는 여배우다. 그녀는 이미 그것을 엄숙하고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 경험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우리 딸은 못 말려>에서 베리모어는 영화감독인 아버지와 베스트셀러 작가인 어머니 사이의 딸로서 부모의 바쁜 일상과 불화를 관찰하고 그로부터 소외된다. 드류 베리모어는 이미 2년 전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다. 6살의 나이에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경험하며 집 밖에서 피곤한 관심에 시달리던 베리모어는 정작 집안에 들어서면 외로워졌다. “사람들은 7살인 내게 성숙한 29살의 모습을 기대했다.”
9살에 음주를 시작했고, 10살에 담배를 물었으며 12살엔 코카인을 흡입했다. 드류 베리모어의 10대 초반은 (완벽하게 나쁜 의미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뉴욕 브로드웨이에 자리한 악명 높은 디스코 클럽 ‘스튜디오54’의 유명한 단골손님이었다. 끊임없는 파티를 전전하는 야간생활은 가십 거리로서 유용했다. 결국 어머니는 그녀의 약물과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재활병원에 베리모어를 입원시킨다. 심지어 베리모어는 14세 시절, 부엌칼로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결국 3개월 간 제한적인 조치로 재활원을 떠나 가수 데이비드 크로스비와 그의 아내 곁에서 요양하게 된다. “그녀 주변엔 맑은 정신을 지닌 헌신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크로스비의 말처럼, 그녀는 그 3개월 이후 온전히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 더 이상 약물과 알코올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리고 10대 시절 자신의 방황과 극복을 이야기한 자서전 <Little Girl Lost>를 집필한다.
물론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약물과 알코올에서 남성 편력으로 옮아간다. 16세와 17세 때 이미 두 차례의 약혼과 파혼을 경험한 베리모어는 19세의에 처음 결혼한다. 상대는 LA에서 바를 운영하는 제레미 토마스였다. 두 사람은 만난 지 6주 만에 제레미의 바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보통 사람들은 처음 함께 살아보고 나서 결혼한다. 나는 그게 진부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하지만 두 사람은 2달여 만에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2001년 7월, 베리모어는 코미디언 톰 그린과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린다. 이번만큼은 100여 명의 하객이 모인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 “나는 톰을 너무 사랑한다. 그가 항상 좋은 친구로 머물며 변하지 않길 바란다.” 그러나 베리모어의 언약은 그 해를 넘기지 못했다. 두 사람은 그 해 12월 이혼에 합의했다. 그 사이에도, 그리고 그 후로도 베리모어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거듭했지만 그 남자들은 베리모어에게 영원히 반하지 않았다. 하지만 베리모어는 덕분에 더 확실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를 위해 사랑을 추구하고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 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내 삶이 단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야성녀 아이비>(1992)를 통해 남자를 유혹하는 관능적인 십대를 연기한 베리모어는 다시 주목 받는 연기자 대열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해 출연한 <건크레이지>를 통해 생애 두 번째 골든글로브에 노미네이트 된다. 당시 그녀는 과감한 노출을 불사했다. 영화뿐만 아니라 <플레이보이>와 <인터뷰> 매거진 등의 표지에서도 심심찮게 그녀의 누드를 볼 수 있었다. 심지어 1995년에 출연한 CBS의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서, 그녀는 책상으로 올라가 상의를 벗고 등을 보여줬다. 결국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녀의 스무 살 생일선물로, 퀼트로 짠 메시지를 보내줬다.“네 자신 좀 가려라.”
그녀는 배우로서 승승장구했다. 우피 골드버그와 함께 한 <보이즈 온 더 사이드>(1995)를 비롯해 카메오로 출연한 <배트맨 포에버>(1995)와 <스크림>(1996)의 성공을 통해 그녀는 흥행보증수표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배우의 삶이 아닌 다른 계획을 도모하고 있었다. 1995년에 낸시 주보넨과 함께 설립한 제작사 ‘플라워 필름즈(Flower Films)’를 통해 기획자로서 발판을 다지기 시작한 것이다. 플라워 필름즈의 첫 작품은 <25살의 키스>(1999)였다. 당시 베리모어는 <웨딩 싱어>(1996)나 <홈 프라이즈>(1998)와 같은 로맨틱 코미디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플라워 필름즈의 두 번째 작품 <미녀 삼총사>(2000)를 통해 베리모어는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 회사도 탄탄한 밑천을 마련했다. 그 이후 선택한 미스터리 스릴러 <도니 다코>(2001)는 박스오피스에서 처참한 성적을 거뒀지만 컬트 필름으로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기획자로서 자신의 안목을 평가 받은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시리즈물로 거듭난 <미녀 삼총사2: 맥시멈 스피드>의 제작자이자 주연배우로 탑승한 베리모어는 또 한번 전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한다. 한 동안 로맨틱 코미디의 영역에 머무르던 드류 베리모어는 HBO에서 방영한 TV 미니시리즈 <그레이 가든즈>(2009)를 통해 호평을 얻어냈다. 이를 통해 골든글로브와 미배우협회시상식(ASG)에서 트로피를 손에 넣었다. 무엇보다도 2009년은 베리모어의 영역을 한 뼘 넓힌 해라는 점에서 특별할 수 밖에 없다. 그녀는 엘렌 페이지가 주연을 맡은 <위핏>(2009)에서 직접 메가폰을 잡았다. “나는 가능성을 찾는 소녀들의 영화가 좋다.” 베리모어의 말처럼 <위핏>은 자신의 진짜 삶을 찾아가는 소녀의 도전기다. 경사진 트랙 위에서 롤러를 타고 과격한 육박전을 펼치는 여자들의 롤러 더비는 평범한 소녀의 특별한 질주를 통해 보다 짜릿한 쾌감을 낳는다. “드류 베리모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이 일에 자신을 던졌다. 항상 열정적이고, 긍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쳤다.” 엘렌 페이지의 말처럼 베리모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위핏>에 담았다. 그 자체를 즐겼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첫 연출작에 특별한 소망을 담았다. “나는 그녀(어머니)가 이 영화를 볼 것이라고 믿는다.” <위핏>엔 자신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어머니에 대한, 베리모어의 진심이 담겨 있다.
“나는 최근 몇 년간, 어머니를 비롯해 나를 둘러싼 관계들과 관련해 많은 목표를 세웠다.” <에브리바디스 파인>(2009)에서 딸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찾아온 아버지를 바라보는 베리모어의 눈빛엔 연기를 넘어선 애틋한 진심이 맺힌다. 스스로를 망가뜨릴 정도로 일상을 탐닉하던 베리모어는 이제 누구보다도 단단하게 철이 들어 자신의 삶을 일군다. “내 영화의 끝엔 성실이 있고, 진실이 있고, 평화가 있다. 내일이 내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여전히 자문하고 있다. 거기엔 실패나 성공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그것을 향해 열려있다면 그 모든 것들이 내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