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거짓말을 많이 하지. 내가 몇 년 전에 다신 연기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처럼.” 4년 전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랜 토리노>가 배우로서 출연하는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 말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그런 선언을 거짓말로 둔갑시킨 작품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에서 메가폰을 잡은 건 로버트 로렌즈다. 그의 첫 연출작이다. 로버트 로렌즈는 긴 시간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함께 했다. <블러드 워크>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랜 토리노> 등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을 제작하고 기획하며 파트너로서 긴 시간을 공유해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다시 카메라 앞으로 불러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덕분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평범한 드라마다. 늙어가는 한 남자와 그 주변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비범성의 여부와 무관하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상만으로 유사하게 읽히는 작품이 있다. <그랜 토리노> 말이다. <그랜 토리노>와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늙어감에 관한 영화다. 노인에 관한 영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얼굴을 빌린 두 노인은 완고하다. 자기 고집을 좀처럼 꺾지 않는다. 물론 <그랜 토리노> 쪽의 노인이 보다 그렇다. 어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최근 배우로서 남긴 인상이란 그런 것이다. 두 영화 속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캐릭터와 밀착하는 건, 마치 그의 전기적인 캐릭터처럼 보이는 건 당연하다.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처럼 어차피 그 역시 늙어가는 처지니까.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결국 어떤 퇴물에 관한 영화다. 오랫동안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로 일해온 거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점차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구단주의 주변엔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망주를 발굴하는 스카우트 일을 이어나가기엔 그가 너무 늙었다고 말하는 이가 생겼다. 무엇보다도 그의 방식이 낡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그 일에 매진한다. 노구를 끌고 먼 길을 운전해간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낡아가고 있다.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치명적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딸 미키(에이미 아담스)는 자신의 중요한 커리어를 뒤로 밀어내고 아버지의 길을 따라 나선다. 오랫동안 반목하고 지냈던 부녀는 그 길을 함께 하며 갈등과 화해를 경험한다.
빤한 이야기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나 늙어가고, 퇴물이 된다. 빠른 구속을 자랑하며 자신만만하게 직구를 뿌리던 영건도 어느 순간 정교한 제구와 볼컨트롤에 기대어 맞춰 잡는 노장이 돼야 한다. 새까만 후배가 자신의 마운드에 올라와서 자신을 불펜으로 밀어내는 과정을 언젠가 감내해야 한다. 사람들은 젊다는 것에 투자하길 꺼리지 않는다. 반대로 늙었다는 것에 포기하는 것도 당연하다 믿는다. 관록이나 지혜라는 말은 다 풀려버린 두루마리 휴지의 중심을 지키고 있던 봉처럼 유용하게 느끼질 않는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그런 노인의 지혜와 관록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빤한 선악 구조를 내세운다. 패기만만한 젊은 야심가의 빤한 수를 장외로 날려버린다. 역전타가 선명하게 예상되는 구조다. 그럼에도 이 빤한 경기를 종종 비범하게 지켜보게 만드는 건 타석에 들어선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이글거리는 눈빛과 타 들어가는 듯한 음성, 80세가 넘은 나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정도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박력은 대단하다. 주름 하나마다 박력이 새겨진 기분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우리가 아는 병약한 노인들과 조금 다른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런 인물이 자신의 분야에서 퇴물로 내몰리는 상황을 본다는 건 그래서 더욱 슬픈 일이기도 하다. 육체의 노쇠와 함께 반비례하게 축적되는 경험 속에서 익어가는 지혜를 팔 곳이 없다. 퇴물이 되어 세상으로부터 퇴장한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여겨진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에서의 거스 또한 그런 전철을 밟고 있다. 하지만 그런 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증명해낼 뿐이다. 아직 자신의 지혜는 쓸만한 것이라고. 거스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공을 쳐내는 배트 소리로서 구질과 배트 스피드를 파악해낸다. 거짓말같다.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결국 오랜 세월을 그 현장에서 자리하고 지켜본 전문가의 관록이 만들어낸 유산이다. 거짓말 같은 그 연륜은 결국 세월을 소모하지 않고선 얻을 수 없는 어떤 노인만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 노인은 결국 이를 증명한다. 영화 속에서만큼은.
모든 노인이 깊은 지혜와 연륜을 품고 살지 않는다. 중요한 건 결국 자신의 경험 안에서 인생이 무르익어간다는 사실일 거다. 결국 퇴물이 되어 세상의 뒷방으로 밀려날 때 그런 가치나마 손에 쥐고 있지 못하면 다시 세상으로 떠밀려나올 기회마저 상실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나 <그랜 토리노>는 결국 노인들에 대한 영화라기 보단 어떤 노인에 관한 영화다.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온 이에 관한 이야기다. 단지 늙어간다는 것을 노스탤지어로 치환하지 않는다.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건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그는 결코 초라한 노인의 얼굴로 관객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여전히 박력이 넘치는 인상으로 노인에 대한 일방적인 편견에 마주선다. 퇴물이 되어가는 과정 또한 묵묵하게 살아간다. 마치 원래 알았다는 듯이, 그리고 끝내 퇴물로서 멋지게 살아가는 과정을 제시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와 같이 빤한 드라마에 비범한 인상을 새겨 넣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상엔 노인을 위한 변명은 없다. 그것이 그 지혜와 연륜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여생을 지켜보고 싶게 만든다. 마치 이 빤한 드라마를 신중하게 지켜보게 만드는 것처럼.
미키 워드는 WBU 웰터급 챔피언 경력을 지닌 미키 워드는 화끈한 난타전을 불사하는 인파이터로 정평이 난 복서였다. 하지만 그가 챔피언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메사추세스 로웰의 슬럼가에서 태어난 그는 배다른 형제와 누이들을 포함한 9남매 가운데 유일한 남자 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재능 있는 프로복서였다지만 약물에 중독된 퇴물 복서에 가까운 형의 트레이닝은 언제나 아슬아슬했고, 푼돈에 가까운 파이트머니를 좇다 아들을 백업선수로 전락시킨 어머니의 매니지먼트는 참담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경기 스타일처럼 정신력으로 자신의 삶의 키를 놓지 않고 전진했다.
<파이터>는 바로 앞에서 설명한 미키 워드(마크 월버그)에 관한 전기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파이터>는 단순히 미키의 고단했던 삶과 그 삶을 극복해낸 인간의 집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파이터>는 주인공을 접대하지 않는 작품이다. 어쩌면 의도적으로 주인공을 아웃포커싱시키고 주변의 인물들에게 포커싱을 맞춘 작품이라 해도 될 것이다. 이유는 자명하다. 미키 워드의 인간 승리적 드라마를 정직하게 연출해내는 빤한 방식보다도 그 주변부에 놓여 있는 이들의 부조리를 관찰하는 것이 보다 흥미로운 일인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 흥미로운 인물들은 바로 미키 워드의 형 디키 에클런드(크리스찬 베일)와 그의 어머니(멜리사 레오)를 포함한 9남매들, 그리고 그의 애인 샬린 플레밍(에이미 아담스)이다.
이런 측면은 <파이터>에 대한 장르적인 기대감을 바로 잡게 만(들도록 유도하고 싶게 만)든다. <록키>를 비롯한 아메리칸 드림의 복싱영화들이 주로 취하던 드라마틱한 스토리, 즉 가난한 복서가 지난한 삶 속에서 결국 챔피언 벨트를 거머쥔 승리를 거둔다는 내용은 <파이터>의 골자가 될만한 유력한 스토리 문법에 가깝다. 하지만 데이비드 O. 러셀은 이런 전형적인 문법에 따르는 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의 영화를 원한 것 같다. 쉽게 정리하자면 <파이터>는 어떤 유망한 복서를 둘러싸고 있는 어느 지난한 가족에 관한 실화를 재현하는 가족드라마다. 이는 복싱영화라는 측면에서 얻어낼 수 있는 주인공의 성장통을 희석시키고 스포츠영화로서의 쾌감 역시 반감시키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의외적이다.
하지만 <파이터>는 그 의외적인 선택이 되레 전략적인 목표를 거뒀다고 말해도 좋을 결과물로 완성됐다. 이는 저마다의 인물들이 머리를 들이밀고 서로의 존재감을 과시하듯 자리하고 있는 덕분이다. 이로 인해 <파이터>는 캐릭터 영화와 같이 캐릭터 자체를 지켜보는 관찰적인 재미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결과를 보장하는 건 배우 개개인의 극대화된 역량이다. 마크 월버그가 ‘단단한 주먹’이라면 크리스찬 베일은 ‘현란한 스텝’에 가깝다. 체급을 바꾼 선수의 경기를 관람하는 것처럼 의외적인 면모를 선보이는 에이미 아담스도 돋보인다. 관록 있는 선수가 경기를 이끌어 나가듯 캐릭터를 운영하는 멜리사 레오는 영화의 흐름을 탁월하게 리드한다.
<파이터>가 진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둔 이야기라는 점에서 오차범위를 활용할 자질의 여분이 부족하다. 이는 되레 이 영화의 연출력과 스토리 흐름의 선택을 보다 돋보이게 만든다. 복싱 시퀀스를 마치 중계적인 광경처럼 연출해내는 모습은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완성된 영화라는 것을 스스로 감추지 않고 있다는 방증에 가깝다. 이는 <파이터>가 실화를 바탕으로 둔 영화적 각색이라는 느슨한 우회론을 택하지 않고도 전형적인 이야기에서 탈피해냈다는 점에서 소재 자체가 지닌 가능성의 단면이 어디에 놓여있는가를 탁월하게 파악했다고 인정하게 만든다. 물론 하나 같이 미친 존재감을 자랑하는 배우들의 열연이 없었다면 이런 장점들은 완전히 묻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마치 큰 기대를 품게 만들지 않는 선수의 인상적인 경기 배후에 존재하는 수많은 조력자들의 정체를 알게 되는 느낌과 같다.
가족은 운명이자 속박이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어깨이면서도 벽처럼 서로에게 다가서기 어렵다. 그래서 가족은 때때로 지옥이 되고, 폭력이 되고, 상처가 된다. 애정은 편견으로 이해되고 연민은 간섭처럼 지겹다. 예기치 않게 쌍방향에 놓인 구성원 모두를 파괴하는 폭력이 발생한다. 혈연으로 맺어진 운명공동체라는 이름 하에 뿌리내린 유대감은 때때로 덜어내기 힘든 부채처럼 버거운 의무감을 준다. 그래서 가족이란 슬프고 아픈 것이다. 버겁다고 덜어낼 수 있는 짐이 아니라서, 귀찮다고 내칠 수 있는 타인이 아니라서, 미워도 다시 한번, 끝없는 애증을 삭이며 서로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
로즈(에이미 아담스)는 고교 시절 치어걸 리더로서 화려한 전력을 지녔지만 아들 오스카(제이슨 스페벡)를 홀로 키우는 싱글맘으로서 청소대행업체에서 받는 푼돈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여동생 노라(에밀리 블런트)는 매번 직장에서 잘리는 탓에 백수 생활을 이어나가는 천덕꾸러기다. 그녀들의 아버지 조(알란 아킨) 역시 항상 변변찮은 사업을 기획하고 번번히 말아먹는 탓에 두 딸의 걱정을 산다. 그 가운데 오스카의 사립학교 입학비가 필요해진 로즈는 보다 큰 수익을 기대할만한 일을 찾던 중, 범죄현장 청소라는 고액의 업종을 추천 받고 동생과 함께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게 된다.
제목에서 발견되는 공통 분모처럼, <미스 리틀 선샤인>과 <선샤인 클리닝>은 유사한 주제를 끌어안은 작품이다. 콩가루처럼 흩어져 부유하던 가족이 끈끈한 반죽처럼 덩어리를 이루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엮어내는 작품이다. –두 영화는 심지어 제작진도 같다.- 가족을 비극적인 진창으로 몰아넣는 건 가난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하루벌이로 먹고 살 듯 박복한 일상을 이어나가는 세 가족은 일상은 그 자체로 팍팍한 심경을 전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근본적으로 가족은 아물지 못한 상처를 공유한다. 좀처럼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회상 신을 통해 파편화된 기억을 문득 내보이곤 하는 영화는 결말부에 다다라 아물지 못한 상흔을 선명히 비춘다. 좀처럼 보이기 어려웠던 과거의 상처를 드러내기까지의 갈등과 충돌을 그리는 영화적 여정은 성장통처럼 구성원의 성숙을 도모한다.
‘범죄현장 청소’라는 특별한 소재를 통해 보편적인 가족애로 그려나가는 <선샤인 클리닝>은 창의적이고도 탄탄한 선댄스표 영화에 걸맞은 모양새를 자랑한다. 끔찍한 죽음이 남긴 악취와 핏자국은 노라에게 악몽 같은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마음에 봉인한 상처와 대면하게 만들고, 로즈에겐 새로운 삶을 긍정하게 만든다. 아버지 역시 한동안 소통할 수 없었던 딸에게 아버지로서의 진심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찾게 된다. 세 가족의 성장을 비교적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선샤인 클리닝>은 사실 소재로부터 발생할만한 특별한 흥미에 비해 적막한 가족드라마다. 충돌과 갈등을 건너 끝내 화해를 이루는 캐릭터 간의 어울림이 대단한 절정을 선사하지도 않거니와 세 가족을 비추는 영화적 시선이 시종일관 담담한 감정을 유지하는 탓이기도 하다. 인물마다의 비중적 편차가 크고 인물간의 정서적 교류가 선명하게 구축되지 못한 탓에 구성원간의 화합을 묘사하는 결말부의 감흥도 낮아지는 인상이다.
<선샤인 클리닝>에서 돋보이는 지점은 소재의 착상이다. 살해당하거나 자살한 이들로부터 남겨진 끔찍한 흔적을 지우는 범죄현장 청소는 기발한 소재로서의 흥미를 넘어 드라마로서 훌륭한 매개를 이룬다는 점에서 보다 특별하다. 루저로서 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인물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인물들의 희망을 지나치게 부풀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비극이 다른 누군가를 위한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이 어떤 이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동시에 그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도 역설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참신한 이야기를 위한 자격을 지닌다.
현실적 난관들이 빚어내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 당장의 희망을 체념하면서도 새롭게 현실적 활로를 모색하는 인물들의 표정은 지나치거나 부족하지 않은 감정을 자아낸다. 거울을 바라보며 희망적인 주문을 외우는 로즈의 얼굴은 낙천적이라기보단 절박하며 기차가 지나가는 다리 아래 매달려 함성을 지르는 노라의 표정엔 기쁨보다 슬픔이 서린다. 에이미 아담스와 에밀리 블런트의 얼굴은 비관적인 현실 속에서도 긍정의 끈을 놓지 않는 인물들의 절박한 심리를 드러내는 창과 같다. 대책 없는 낙관으로 끝없는 무능력을 드러내지만 결국 딸을 위해 헌신적 대안을 제시하는 아버지 조를 연기하는 알란 아킨의 심드렁한 표정은 속내에 감춰진 진심의 깊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묵묵하면서도 끈기 있게 인물들의 표정을 응시하며 감춰진 속내까지 포착하는 <선샤인 클리닝>은 현실적 한계를 체감하되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휴먼드라마다. 척박한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선택한 가족사업은 결국 현실에서 거대한 빚을 남기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깨닫게 만든다. 누군가가 남긴 생의 흔적을 지워나가며 현실에 대한 꿈을 키워나가는 가족은 자신들의 묵은 상처를 지우고 이는 과거를 극복하는 현실적 대안이 된다. <선샤인 클리닝>은 행복을 쟁취하기보단 그 기준점을 제시하는 영화다. 커다란 변화가 아닌 보편적인 삶의 테두리 안에서 발견되는 삶의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삶이란 이렇게 작은 변화를 통해서 큰 울림을 얻곤 한다. <선샤인 클리닝>은 그렇게 작은 변화 속에서도 깊게 자라나는 어른들을 위한 우화다. 명료하고 깔끔한 여운이 돋보이는.
밤이 되면 박물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살아있다. 뼈대만 남은 공룡이건, 모형 사람이건, 크기나 재질에 관계없이 살아나거나 작동된다. 신묘한 힘을 지닌 이집트 아크라 석판의 힘 덕분이건 뭐건 간에 그렇다. 따지고 들수록 스스로에게 연민을 품어야 할 정도로 엉터리 같은 법칙이지만 그 세계가 만들어내는 소동극의 이미지는 분명 오락을 발생시킨다. 연대가 다르고, 종이 다르고, 생사가 다름에도 다들 그냥 어울려서 일으키는 소란이 장관이다. 엉터리처럼 구겨 넣은 레시피가 맛깔스런 잡탕으로 거듭난 형국이다.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엉터리 같은 재료들을 긁어 모아 우려낸 국물이었지만 마시기 편하고 입맛에 너그러운 묘미가 있었다. 그야말로 킬링타임용 엔터테인먼트였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는 온전히 전작의 성공에 편승한 기획이다. 컨셉은 같다. 밤만 되면 오만 잡것들이 살아나는 박물관의 야간 소동극을 재현하는 것. 하지만 그건 딱히 장기적인 유효기간을 지닌 것이 아니다.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란 간단하다. 내려갈 깊이 따윈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드니 너비를 넓힐 것. <박물관이 살아있다 2>를 다른 제목으로 대체한다면 ‘박물관이 넓어졌다’즈음 된다. 넓어진 만큼 채워 넣을 것도 많아졌다. 그만큼 더욱 두서가 없어지고 난장판의 범위는 제어가 되지 않는 지경에 다다랐다. 엉터리 같은 기획상품이 다시 한번 더 많은 엉터리를 끌어 모아서 대박을 노린다.
박물관이라는 장소의 특성을 아이디어로 승화시킨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어드벤처와 판타지의 장점을 두루 갖춘 효과적인 영화가 됐다. 박물관이라는 실내 공간은 적절하게 상황을 통제할만한 너비의 한계를 지님으로서 미니멀한 장르적 수용을 가능케 한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는 너비를 넓힌 속편이다. 넓어진 박물관은 플러스같지만 되레 마이너스다. 자신의 부실한 단점을 가리기 좋은 규모를 간과하고 오히려 곳곳에 한계를 명확하게 전시한다. 연대나 지표 따위와 무관하게 소통하는 캐릭터들은 더 이상 귀엽다기 보단 유치하다. 전작의 매력이 어디서 발생했는가를 심각하게 놓치고 있다. 최소한 전작은 그 열악함을 눈감아 줄 정도의 아량을 발생시킬 정도로 적당한 매력을 구사할 만한 아담한 규모 속에서 소동극을 연출했다. 하지만 속편은 자신의 밑천을 깡그리 부수고 새집을 짓더니 자신의 어리석음을 곳곳에 전시한다.
열악한 스토리를 대체하는 캐릭터의 매력도 전혀 계승하지 못한다. 전작에서 매력을 발생시키던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별 쓸모가 없다. 개체 수를 늘린 새로운 캐릭터들 역시 별반 흥미를 끌지 못한다. 래리(벤 스틸러)의 변화를 설명할만한 단서 따위를 기대할 요량도 없지만 그의 성찰을 도모하는 진지함 자체가 지독하게 작위적이라 감동 대신 조소가 발생한다. 그나마 에이미 아담스의 귀여운 매력이 유일한 숨통이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2>는 전형적인 속편의 한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소한 볼거리와 위트를 구사하는 킬링타임 무비로서 미덕이 유일한 장기였던 전작의 성과가 계산된 결과가 아닌 우연한 취득에 불과했음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플러스 된 모든 것이 하나 같이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역시 머리가 커졌다고 똑똑해지는 건 아니다.
밤만 되면 박물관의 모든 것들이 살아나고 난장판을 이룬다. 어드벤처와 판타지의 요소를 두루 갖춘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사실 돌팔이 조제법으로 융해한 난장판을 연출하는 기획상품이었지만 소소한 볼거리와 위트를 구사하는 킬링타임 무비로서 미덕이 있었다. 열악한 스토리를 대체하는 캐릭터와 어드벤처는 결국 이 작품을 효자상품으로 만들었다. 속편은 그흥행성을 담보로 내놓은 매물이다. 좀 더 규모는 커지고 캐릭터는 다양해졌다. 하지만 사실상 전작의 엉터리 같은 상황을 확장해서 답습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까. <박물관이 살아있다2>는 애초에 계획되지 않았던 속편의 전형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영화다. 지나치게 방대해진 탓에 아담한 규모로 맹점을 가리던 전작의 단점들이 오히려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결과를 맞이한다. 지나치게 진지한 탓에 때론 유치하며 스토리는 더욱 부실해졌다. 개체 수가 늘어난 전시물들은 다채롭기보단 산만하다. 전작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던 캐릭터들은 지나치게 간과되고, 새로운 캐릭터들은 매력을 보충하지 못한다. 플러스가 오히려 마이너스의 효과를 부른다. 그나마 매력적인 에이미 아담스가 유일한 위안이 된다.
경건한 미사 중 신부의 설교가 시작된다. “확신이 없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의미심장한 물음, 약간의 침묵. 항로를 잃어버린 어느 선장의 사연이 이어진다. 항로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선장이 별자리의 방향까지 의심하게 된다는 이야기. 이에 덧붙여지는 말. “의심은 확신만큼이나 강력하게 지속됩니다.”확신과 의심은 모두 다 마음에서 비롯된다. 의심과 확신은 배반적인 언어지만 그 태생의 기반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의심과 확신은 방향이 다를 뿐, 한 지점에서 출발한 믿음이다.
국내에서도 공연된 바 있는 유명한 동명희극원작을 영화화한 <다우트>는 그 불분명한 믿음의 갈래길에 선 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1964년, 뉴욕 브롱크스의 성 니콜라스 가톨릭 학교에 새로 부임한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는 강권적인 교회 분위기에 온화한 변화를 주도한다. 그러나 학교장 알리시아스 수녀(메릴 스트립)는 권위적이고 원칙적인 방식을 고수하려 하고 두 사람은 은밀한 대립관계로 거듭한다. <다우트>는 성향이 다른 두 인물의 심리적 대결 구도를 치밀하게 묘사하는 작품이다. 그 대립은 점차 갈등으로 발전하고 서로를 향한 험담과 비난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 계기로 작동하는 방아쇠가 바로 의심(doubt)이다.
알리시아스 수녀는 학교의 권위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인물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온화하고 자유주의적인 플린 신부는 요주의 인물이다. 같은 바람을 두고도 ‘바람이 변하고 있다’는 알리시아스 수녀와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는 플린 신부의 견해차는 은밀하되 강경한 대립구도를 암시한다. 제임스 수녀(에이미 아담스)의 증언은 두 사람의 관계에 갈등을 발화시키고 긴장을 가열시킨다. 제임스 수녀는 플린 신부와 학교의 유일한 흑인 입학생인 로널드 밀러 사이에 모종의 의혹이 있음을 의심하고 이에 대해 알리시아스 수녀에게 증언한다. 결국 알리시아스 수녀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모되고 이는 플린 신부와의 갈등을 가열시키는 강한 발화점이 된다.
영화는 두 사람의 심리적 대립 구도를 직설적인 방식보단 행위 등을 통한 간접적인 제스처로 묘사한다. 알리시아스 수녀의 방에 들어선 플린 신부가 알리시아스 수녀의 자리에 앉는 순간 경직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이윽고 차양을 올리는 알리시아스 수녀가 햇살에 눈을 찌푸리는 플린 신부를 모른 체 할 때, 그리고 차양을 내리기 위해 일어선 플린 신부의 자리를 다시 알리시아스 수녀가 탈환(?)하는 과정까지. 두 인물의 심리적 대립이 묵언적인 행위를 통해 일차적으로 묘사된다. 한편 심리적인 대립이 본격적인 격양으로 치닫는 순간, 그 주변부의 도구들이 감정의 온도를 높이는 촉매로 활용된다. 알리시아스 수녀가 플린 신부에게 자신의 의심을 처음으로 드러내고 이를 통해 두 사람의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 울려 퍼지는 전화벨은 팽팽한 감정의 대립을 더더욱 신경질적으로 보완한다. 인물을 하부에서 올려 비추거나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기울이는 카메라의 시선 역시 인물의 잠재된 불안을 적절하게 드러낸다. 저온에서 고온으로 끓어오르는 물처럼 감정적 충돌이 갈등의 파고로 출렁이기까지의 과정들이 세심하고도 견고하게 직조된다.
희곡을 기반으로 한 <다우트>는 다분히 연극적이다. 인물들을 둘러싼 환경을 무대적인 장치로 활용하는데 능숙하기도 하지만 그 중심에 선 배우들의 연기가 연극적인 연기를 가능케 하는 까닭이다. 직설적인 대사보다도 행간의 의미 사이를 읽게 만드는 제스처나 표정, 행위가 영화적 의미를 완성시킨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은 현악기의 떨림처럼 섬세하지만 날카롭게 감정의 고저를 다스리고, 그 사이에 놓인 에이미 아담스는 짓눌리지 않고 제 수준을 유지한다. 특히 짧은 분량임에도 바이올라 데이비스의 연기는 실로 인상적이다. 뛰어난 배우들은 <다우트>에 있어서 최고의 자산이자 일등 공신에 가깝다.
알리시아스 수녀는 플린 신부에 대한 의심 너머의 진실을 놓고 공방하지만 실상 그 대립각의 시작점은 서로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다. 긴 손톱과 설탕의 섭취를 혐오하는 알리시아스 수녀가 손톱을 기르고 설탕을 선호하는 플린 신부의 성향을 알게 됐을 때 이미 구도는 이뤄진다. 정치적 축출을 위해 작동한 의심이 진실에 대한 공방으로 번져나가고 그 지난한 갈등 속에서 승패가 정해졌을 때, 영화는 그 승패 너머의 진실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그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과연 진실은 드러났는가. 실상 그것은 중요한 물음이 아니다. 영화는 그래서 그 진실을 애써 조명하려 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긴 의심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건 진실을 위한 의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스로 자신의 신앙적 원칙을 깨버리면서까지 의심을 확신으로 밀고 나가는데 성공한 알리시아스 수녀는 끝내 눈물로서 자신의 통증을 내보인다. 교구를 떠난 플린 신부보다도 깊은 상처가 드러난다. 사실이 드러내는 순간, 진심이 부서진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진실을 드러낼 때 오히려 승자의 강박은 허위가 된다. 강박에서 튕겨나간 의심이 진실에 적중한다 해도 그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말은 허물을 만든다. 바람에 날린 깃털처럼 퍼져나가 주워담을 수 없게 된 말들이 양심을 자극한다. "이 모든 것이 다 내 의심에서 비롯됐어." 알리시아스의 눈물엔 자신의 의심을 통해 뿌리내린 고통에 대한 뒤늦은 자각이 담겼다. <다우트>는 그 속된 믿음이 낳는 책임과 의무를 지적하고 되짚는 현명한 물음이자 사려 깊은 대답이다. 진실을 위한 믿음은 숭고하지만 의도를 위한 믿음은 현명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고 만다. 그것이 비록 사실을 관통한다 해도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배려하지 못한다. 승패를 위한 의심은 모든 것을 부순다. 그 끝에 남는 건 부끄럽게 선 황폐한 욕망뿐, 어떤 명예도 실리도 남아있지 않다. 믿음이란 이토록 강하고 지속적이라 위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