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나(아르타 도브로시)와 클루디(제레미 레니에)는 한 집에서 살아가는 부부다. 하지만 충만한 애정의 발로에서 시작해 제도적 합의로 나아간 부부가 아닌 그저 제도적으로 계약된 부부 관계에 불과하다. 벨기에 시민권을 얻기 위해 알바니아에서 국경을 넘어 클루디와 위장 결혼한 로나는 자신의 약물중독을 끊고자 도움을 요청하는 클루디를 번번히 외면한다. 정작 사랑하는 연인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전화통화로서 애정을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로나는 이혼과 재혼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다. 역시나 벨기에 시민권을 얻으려는 러시아 남자와의 혼인을 통해 거액을 지불 받을 예정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애인과 함께 식당을 운영하며 정착하리란 기대에 부풀어 있다.
모든 사건의 출발점은 개인의 욕망이다. 개인의 욕망은 때때로 어느 개인의 의지로 돌파구를 만들거나 그렇지 못하면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개인의 욕망이 제도적 결함을 이용한 조직적 대응과 결합할 때 윤리는 심각하게 훼손된다. 알바니아에서 벗어나 벨기에에서 새로운 삶을 정착하려는 로나의 욕망은 위장결혼을 알선하는 전문조직에 의해 성사되고 또 다른 위장결혼을 준비하는 절차로 나아간다. 약물중독자인 클루디는 그 과정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된다. 그는 제거하기 쉬운 수단에 불과하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욕망은 양심과 충돌하며 여기서 발생하는 죄의식은 윤리적 양심에 의해 죄의 발생을 억누른다. 하지만 개인의 욕망이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닐 때, 타자와의 협의를 통한 공통분모의 잠재적 자산이 될 때, 개인의 양심은 공모를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건조하고 서늘한 카메라는 인물에 대한 어떠한 감정을 발생시키지도, 주입하지도, 포착하지도 않는다. 온전히 감정이 결여된 관찰자의 시점에서 사건 속에 놓인 인물을 관찰할 뿐이다. 물론 대부분 로나를 향해있는 카메라는 희미하게 감지되는 그녀의 심리적 변화를 간접적으로 포착하며 극적인 변화를 가늘게 끌어당긴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최대한 인물의 심리에 관여할 가능성은 없다. 단지 객관적인 판단과 관찰의 합의를 통해 상황이 발생시키는 다양한 윤리적 문제들을 분석하거나 판별할 수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객관성의 눈높이가 <로나의 침묵>을 숭고한 관점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숨죽이듯 정적인 카메라의 고정적 시야를 통해 대상을 관찰하는 일차원적인 시선은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게 인물의 심리를 관통한다. 마치 다큐적인 화법으로 인물에 대한 관찰을 도모하고 스크린과 객석의 너비를 인식시킬 만큼 감정과 거리를 둔 시선을 통해 적극적인 감정적 몰입을 배제한다. 인물과 인물을 둘러싼 사건과 사건을 둘러싼 환경의 테두리를 점차 확보해나간다. 인물에 대한 관찰을 도모하는 건조한 스크린은 관객의 시야를 그 인물들의 심리를 결정짓는 사회적 분위기까지 도달하게끔 만드는 수단이나 다름없다. 동시에 <로나의 침묵>은 그 절제된 화법을 통해 종종 서스펜스를 발생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느와르에 가까운 범죄적 소재를 차용한 결과값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와 함께 과장을 배제하고 현실적인 초점에 가까운 카메라의 시선과 연출이 영화의 현실감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음향 등의 효과를 배제한 채 무감정한 시선으로 사건의 과정을 응시하는 담담한 태도가 사건의 흐름 자체에 대한 예상이나 암시의 가능성을 가로막음으로써 연이어질 상황에 대한 충격을 무방비 상태로 체감하게 만든다.
<로나의 침묵>은 벨기에를 배경으로 두고 있으며 카메라의 이동이 지극히 제한적인, 분명 다르덴 형제의 인장을 찍고 있는 영화다. 하지만 전작들이 현실성을 등에 업은 인간적 가치, 즉 용서라는 테마로 마주한 인간의 화해를 담았던 것과 달리 <로나의 침묵>은 종교적 신비에 다다르는 구원의 경지로 나아간다. 자신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던 클루디를 가엾게 여기다 끝내 애정으로 품게 된 로나가 결국 그의 못다한 삶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는 결말은 실로 비범하다. 비인간적인 욕망을 낙태시키고 인간적인 사랑과 윤리적인 신념을 새롭게 잉태하는 우아하고 매혹적인 감상적 깊이를 선사한다. 연약한 육체로 강인한 생명을 잉태하는 여인의 몸처럼 정적이고 차분한 응시 속에서 발견되는 강인한 의지는 역설적이라 더욱 강렬하다. 그 차가운 시선이 피어내는 의지가 놀랍도록 따스하고 아름답다.
어떤 이는 그 폭력 앞에서 생소함을 느끼고 겁에 질려 주저앉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 폭력 앞에서 멱살을 잡힌 채 뺨을 얻어맞으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똥파리>는 그 어느 쪽에게도 관대하지 않은 영화다. 주저 않은 쪽도, 멀쩡하게 일어서서 눈감지 못하는 쪽도 하나같이 폭력을 감내해야 한다. 정제되지 않은 육두문자와 거침없는 구타는 스크린 너머의 세상을 온전히 타자화시킬 것 같지만 실상 어느 곳보다도 현실적인 풍경이다. 가난 앞에 무기력한 수컷들이 무차별적인 증오를 휘두르는 사이 점차 부서지고 파편화되는 가족들의 모습은 지독하게 낯익은 풍경이다. 지독한 폭력에 노출된 가족은 헤어날 수 없는 부조리의 자궁에서 또 다른 증오를 잉태한 채 자라고 엉킨다.
<똥파리>는 99%의 절망으로 채워진 광경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래서 희망적이다. 슬픔에서 비롯된 연민을 부를지언정 스스로 희망을 연출하지 않는다. 절망을 관통하고 멈춰선 채 응시한다. 통증을 각성시키고 폭력을 환기시킴으로써 파묻어 부정하던 폐부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도록 유도한다. 따뜻한 위안이기 보단 거친 윽박을 지른다. 당황스럽겠지만 객석에서 일어날 때 즈음엔 진통과 함께 밀려드는 일말의 가능성을 품고 구상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1%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 절망을 목도하는 자들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유전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한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면 99%의 절망과 1%의 희망은 역전될 수 있다. 그 1%의 희망은 결국 영화 밖에 있다. 똥파리는 죽어도 세상은 여전히 똥 무더기다. 혐오의 대상이 사라져도 혐오의 세계는 남는다. 그걸 걷어내야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건 영화가 아닌 관객이다. 바로 당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