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을 앞두고 산통에 시달리는 산모의 얼굴엔 만감이 교차한다. 휠체어를 탄 채 분만실로 향하는 산모는 당장 맞이한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시에 곧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마음에 설렘이 가득하다. 하지만 곧 잉태의 축복은 사산의 저주로 돌변한다. 갑작스런 출혈과 함께 유산을 알리던 의사는 곧이어 태아의 주검을 꺼내기 위한 절제술에 돌입한다. 비명을 지르는 아내 앞으로 뒤늦게 분만실에 들어온 탓에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남편이 캠코더를 들이민다. 순간 의사가 말한다. “아이가 살아있어요.”온 몸에 피에 젖은 아이가 아내의 얼굴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한번 날카로운 비명으로 분만실을 뒤흔들던 아내는 비로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다.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난다.
아내의 악몽에서 시작되는 <오펀: 천사의 비밀>(이하, <오펀>)은 진짜 악몽 같은 현실을 맞이하게 되는 한 가정의 비극을 담보로 한 스릴러다. 세 번째 아이를 유산한 부부가 그 고통을 극복하고자 영민하고 착한 여자아이를 입양하지만 딸이 된 입양 소녀는 어느 순간부터 괴물 같은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점차 의심에 빠져드는 아내, 이를 부인하는 남편은 지난 날의 비화를 꺼내 들고 갈등에 빠져들며 아이가 계획한 파국으로 발을 담근다. 친절한 이방인의 유입이 갈등을 부르고 감춰진 속내가 파국을 모색하는 과정은 어느 스릴러 영화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주요한 설정 가운데 하나란 점에서 <오펀>이 활용하는 서스펜스의 장치들은 딱히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없다.
악마적 영악함을 지닌 아동 캐릭터로부터 강력하게 발산되는 서스펜스는 <오멘>과 같은 오컬트 무비의 기시감을 부른다. 동시에 입양아가 평화로운 가정을 뒤흔든다는 설정은 <케이프 피어>와 같은 가족 지키기 스릴러에서 활용하던 전술과 유사한 것이다. <오펀>은 ‘낯선 자의 친절을 경계하라’는 스릴러적 규칙에 입각한 캐릭터 장르물이다. <오펀>이 새 술을 담은 부대는 아니란 의미다. 하지만 <오펀>은 뛰어난 응용력을 선보이는 호러이자 스릴러다. 사악한 본능을 고스란히 선보이는 아동 캐릭터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악마적 매력을 선사하며 이는 <오펀>이 곳곳에 매복해둔 장치들과 더불어 장르적 착시를 이룬다. 순진무구한 아동 캐릭터를 악의 근본처럼 묘사하는 동시에 호러적인 연출방식을 더하며 전략적으로 초자연적 예감을 부른다.
캐릭터의 완성도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만큼 어린 배우의 영민한 연기가 관건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오펀>에서 에스터를 연기하는 이사멜 펄먼의 연기는 높게 평가 받을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에스터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노골적인 본심을 드러내는 냉정한 눈빛으로 돌변할 때마다 긴장감이 새어 나오고 이는 서사의 진행과 함께 두텁게 축적되며 영화 안에서 지속적인 서스펜스를 구축한다. 또한 <오펀>은 순진무구한 아동 캐릭터를 절대악의 대상에 국한시키지 않고 아동 특유의 유약한 심리를 이끌어냄으로써 궁극적인 장르적 목적성에 접근한다. 이기적인 아동의 심리를 전시함으로써 절대적인 신비에 기대지 않고 이성적인 병리학으로서 범죄적 논리를 설득시킨다.
말미에 다다라 밝혀지는 진실은 사실 <오펀>이 야기시킨 모든 서사적 이해를 온전히 전복시키는 반전 그 자체다. 아동 캐릭터라는 정보를 통해 이해되던 심리적 구조를 일거에 전복시키는 동시에 스토리의 흐름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예측할 수 없는 흐름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반전으로서의 쾌감을 부른다. 물론 추격과 난투로 점철되는 후반부의 단순화된 흐름은 심리적 긴장감을 유지하던 그 이전까지의 흐름과 배반적인 감상을 부르지만 그 상황을 통한 절대적인 긴장감이 발휘된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서스펜스를 구가하고 있다고 인정할만하다. 정서적 긴장감의 양태가 달라질 뿐, 흐름의 양상은 훼손되지 않으며 서스펜스의 절대량은 보존되거나 더욱 상승한다.
물론 아동 캐릭터를, 그것도 입양아를 악의 이미지로 치환하고 공포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일부 특수한 계층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착취하고 있다는 불순함이 감지되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장르적 완성도를 염두에 두자면 감안할 수 있는 성공적 투자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정도의 의도적인 필요악쯤은 충분히 감안하고 장르적 성취를 즐기는 것이 타당하다. 그만큼 <오펀>은 인상적인 캐릭터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 그리고 효과적인 연출력까지, 수준 이상의 만족감을 부르는 스릴러다.
미소 너머로 본심을 가린 채 가족을 위협하는 이방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악마적 캐릭터, <오펀: 천사의 비밀>은 기시감을 부르는 영화다. <오멘>과 같은 악마적 아동이 등장하는 오컬트를 비롯해서 <케이프 피어>와 같은 가족지키기 스릴러까지, <오펀>이 흡수한 장르적 전례는 차고 넘친다. <오펀>이 영리한 영화라 말할 수 있는 건 그 덕분이다. <오펀>은 새로운 전형이라기 보단 뛰어난 응용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악한 유아적 캐릭터를 통해 장르적 착시를 발생시킨 뒤, 관객의 호기심과 긴장감을 동시에 유발한다. 무엇보다도 에스터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점차 본심을 드러내는 순간마다 연출되는 긴장감이 서사의 진행과 함께 두텁게 쌓여나간다. 결과적으로 <오펀>이 이룬 장르적 성취의 팔 할은 절대적으로 에스터를 연기하는 이사멜 펄먼의 연기력에 얹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내던져진 반전 역시 호불호의 차이를 발생시킬 가능성은 존재하나 이야기의 흐름 안에서 적절한 흐름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확실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말미에 다다라 난투극으로 변질되는 양상이 영화를 단순화시킨다는 인상도 들지만 역시나 그 순간조차도 절대적인 긴장감이 발생한다. 인상적인 캐릭터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 그리고 효과적인 연출력까지, 수준 이상의 만족감을 부른다.
짧지만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는 <드래그 미 투 헬>을 탐색하기 좋은 밑그림이다. 강력한 저주와 지옥의 이미지가 연동되는 오컬트 소재의 강림은 <드래그 미 투 헬>의 장르적 밑그림이 낡은 시절의 이미지에서 비롯됐음을 알리는 것과 같다. 마치 쌍팔년도 호러 영화의 기시감이 느껴진다. 다만 여기서 쌍팔년도의 어감은 ‘촌스럽다’가 아닌 ‘고전적이다’로 받아들여야 한다. <드래그 미 투 헬>은 요즘 보기 드물게 강렬하고 압도적인 정통 호러 영화다. 신경을 예민하게 만드는 효과음과 이미지를 동원하는 <링>과 <주온>과 같은 일본산 스몰볼 호러영화들과 비교할 수 없게 손이 크고 담대한 정통호러다.
1949년, 멕시코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를 지나 40년 후로 점프컷된 영화는 미국의 한 은행에서 본격적인 서사를 다시 전진시킨다. 대출 업무를 상담하는 크리스틴(알리슨 로먼)에게 대출연장신청을 부탁하는 노파 가누시 부인(로나 가버)의 불결한 이미지를 적나라하게 비추는 카메라는 <드래그 미 투 헬>이 전면에 내세운 공포의 근간이 어느 지점에 있는가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잔혹한 이미지를 통해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기 보단 불결한 이미지를 통해 혐오를 자극하는 <드래그 미 투 헬>은 공포라는 감정을 두려움에 가두지 않고 우스꽝스러움으로 진전시킨다. 전형적인 B급 정서로 무장한 악취미의 이미지 속에서 공포와 유머가 절묘한 궁합을 자랑하듯 맞물려 굴러간다.
대출연장을 거절한 크리스틴에게 노파가 저주를 퍼붓는 광경은 현실적 리얼리티에 초자연적 공포가 주입되는 시작점과 같다. 노파가 크리스틴에게 내린 저주는 염소의 형상을 한 악마 라미아의 저주이며 이는 크리스틴의 일상을 점차 무시무시한 수렁으로 밀고 내려간다. 오컬트적 신비가 가미된 악마주의적 공포가 리얼리티의 풍경 안에서 고스란히 보존되는 광경은 단연 복고적이며 때때로 참신하다. 낡고 낡은 장르의 관습을 고스란히 차용하는 동시에 B급 유희의 이종교배를 통해 관습적인 리듬감에 새로운 활력을 형성한다. 신체훼손과 피칠갑의 이미지를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이고 압도적인 긴장감을 전달한다.
동시에 압도적인 전율의 긴장감 사이로 순발력 있게 끼어드는 유머는 농담처럼 가볍지만 좀처럼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한다. 호러라는 장르적 특성을 전형적인 B급 정서의 악취미와 연동시키는 방식은 오히려 장르적 전형성을 탈피하는 동시에 장르적 자질을 더욱 굳건히 다지는 효과적인 방식이 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이블 데드>시리즈로 대변되는 샘 레이미의 근본적 재능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를 예감했거나 혹은 예감하지 못했거나, 어느 쪽의 입장에 놓여있다 해도 <드래그 미 투 헬>이 만들어내는 난장질의 풍경을 온전히 즐기지 못할 이유는 없다. 특히나 정치적으로 공정하며 압도적인 감상을 부르는 결말부는 오르가슴에 가까운 쾌감을 선사한다. <드래그 미 투 헬>은 공포가 극대화시킬 수 있는 쾌감의 극단적 너비를 실감하게 만드는 문제작이자 <스파이더맨>이 아닌 <이블데드>의 샘 레이미를 새삼 재확인하게 만드는 걸작이다. 21세기의 기념비적인 호러영화라 불려도 단연 손색이 없다.
오프닝 시퀀스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쌍팔년도 시절의 호러 영화의 기시감이 든다. 여기서 쌍팔년도의 의미는 ‘촌스럽다’보단 ‘고전적이다’란 의미에 가깝다. <드래그 미 투 헬>은 신경만 긁다 기분을 잡치게 만드는 근래의 유사 호러물 따위와 종자가 다른 진짜 호러영화다. 악랄하고 장난끼 가득한 B급 유희의 난장질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기분이 든다. 게다가 피칠갑과 신체절단이라는 잔인한 이미지를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압도적인 악랄함을 통해 공포적 전율을 선사하는 동시에 어느 코미디 영화보다도 강력한 웃음을 동반한다. 저주와 주문이라는 오컬트적 신비가 가미된 악마적 공포 가운데서 농담처럼 끼어드는 B급 유희가 단연 발군이다. 분명 ‘으악’과 ‘으하하’를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드래그 미 투 헬>은 분명 21세기의 기념비적인 호러영화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마스터피스다. 그리고 <스파이더맨>이 아닌, <이블데드>의 샘 레이미는 여전히 건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