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무적>이란 타이틀은 우리가 아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세상에 적()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둑()이 없는 세상을 의미한다. 두서없이 출발하는 이야기는 대략적으로 단명하다. 소매치기 왕보(유덕화)는 그의 연인이자 동료인 왕려(유약영)와 떠돌아다니며 도적질로 삶을 연명한다. 그런 어느 날 왕려는 개과천선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왕보와 깊은 갈등 국면에 들어선다. 그러다 우연히 사근(왕보강)을 만난 왕려는 그의 순수한 천성에 감화되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왕보와 호려(유게)의 일당으로부터 사근의 돈을 지켜주겠다고 다짐한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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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 조운이라고도 불리는 상산 조자룡은 창술의 달인이자 유비 현덕의 의형제 관우 운장, 연인 장비와 함께 유비 현덕을 가까이 보필하고 후에 유비가 건립한 촉나라의 오호장군에 오르기도 하는 용장으로 그려진다. 장판파에서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했던 그는 후에 장강에서 오나라 군사로부터 한번 더 아두를 구해오기도 한다. <삼국지: 용의 부활>(이하, <용의 부활>)은 소설 ‘삼국지’가 충직한 용장으로 그리는 조운, 상산 조자룡(유덕화)을 중심으로 개작된 ‘삼국지’라고 할 수 있다.

<용의 부활>은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필자에 의해 번역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바탕으로 하되 영화적 허구를 노골적으로 숨기지 않는다. 유비가 제갈공명에게 삼고초려를 하며 천하삼분의 계를 얻기 이전에 이미 유비는 조운을 가까이 두었다. 또한 장판파에서 조자룡이 아두를 구하기 전, 조조의 군대를 이끌고 온 하후돈과 대적하게 된 박망파 전투에서 하후돈의 군사를 화공으로 괴멸시키기 위한 유인책에 제갈량은 조운을 이미 중용하기도 했다. 그런 조자룡을 제갈량의 얼굴도 잘 몰랐으며 장판파에서 아두를 구하기 직전에 유비와 처음 대면하는 평범한 병사로 그린 <용의 부활>은 ‘삼국지연의’의 서사를 일부 묵과하고 재편하는 것과 같다.

물론 <용의 부활>에서 상세하게 묘사되는 전후반의 전투는 엄연히 소설에 밑바탕을 두고 있다. 조자룡의 활약을 그리는 전후 두 번의 전투 중 전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삼국지연의’ 중, 조운이 혈혈단신으로 아두를 구출한 장판파 전투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다소 허구가 많이 포함된 후자는 유비와 조조의 사후, 뒤를 이은 촉의 황제 유선을 모시던 제갈공명이 출사표를 던지고 조조의 뒤를 이은 조예의 위나라로 북벌을 결행한 이후, 두 나라의 군대가 처음으로 맞붙은 봉명산에서 선봉에 선 조자룡이 그에 맞선 한덕과 그의 네 아들간의 전투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용의 부활>은 이에 조영(매기 큐)이라는 조조의 손녀를 가상인물로 내세우며 조자룡의 비범한 최후를 그린다.

장대한 서사와 함께 각양각색의 개성을 지닌 캐릭터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삼국지’는 현대에도 다양한 해석과 감상을 부른다는 점에서 효율적이다. 무엇보다도 <용의 부활>은 ‘삼국지’를 토대로 한 영화화 자체란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지금까지 그 장대한 스케일 덕분에 섣불리 시도되지 못했던 ‘삼국지’의 영화화 작업이 무르익은 기술력과 연출력을 기반으로 이뤄진다는 건 분명 매력적이다. 물론 ‘삼국지’의 전사를 영화화한다는 건 상당히 무리한 일이다. <용의 부활>이 조자룡이란 인물을 중점으로 ‘삼국지’를 재편했다는 건 결국 이 장편 서사를 스크린에 옮길 수 없다면 그 일부를 극대화시키는 방편으로 영화화시킬 수 있음을 입증하는 바와 같다. –이는 현재 오우삼의 <적벽>이 인상적인 일부의 서사를 영화화시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소설에서의 관계 구조를 염두에 두지 않고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을 삽입하기까지 하며 사건 자체를 자기 방식으로 재편하는 건 신화적인 영웅들의 이야기인 삼국지 안에서도 조자룡이라는 인물을 극대화시키려는 수단의 방편처럼 보인다. ‘운명은 사람 손에 달려 있다’는 그의 되뇜처럼 <용의 부활>에서 묘사되는 조자룡은 ‘삼국지’ 안의 영웅 조자룡에서 발췌한 인간적 면모의 부각이라고 해석된다. 결국 <용의 부활>은 조자룡의 백전백승 일대기보다도 백전노장의 가공된 실패담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일깨우고 동시에 영웅이라 불리는 자가 짊어져야 하는 숙명 같은 고뇌를 관객에게 짊어주려는 듯 보인다.

결국 <용의 부활>에서 조자룡은 우리가 아는 삼국지에서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고유명사라기보단 ‘영웅’이라는 고유명사에 가깝다. 나안평(홍금보)이라는 가상인물을 관찰자이자 화자로 삽입하며 영웅이 될 수 없는 자의 비애를 조명하는 건 이를 대비시킴으로서 영웅의 고뇌를 부각시키려는 수단으로 보인다. 하지만 <용의 부활>은 이런 의도를 이해시킬 뿐,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삼국지’라는 가상적 원형에 굳이 변주를 넣어가며, 그것도 다소 격에 맞지 않는 여성캐릭터를 배치하면서까지 어떤 구색을 맞추려는 설정은 너무나도 뻔해 보인다. 정사도 아니고 연의도 아닌 ‘삼국지’의 영화적 변주는 그것이 원작과 달라져야 할 합당한 근거를 명석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아 보인다. 결국 이는 원판을 잘 숙지한 이들에겐 오독(誤讀)이 될 가능성이 높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오역(誤譯)이 될 우려의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무예의 현신들이 구체적인 상으로 등장하는 ‘삼국지’는 그 세계관을 스크린에 전시한다는 것 만으로도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 매력을 반감시키는 건 애매모호한 영화의 성취다. 커다란 스펙트럼을 지닌 영웅의 면모에서 인간을 발췌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용의 부활>은 커다란 가능성을 미약한 성과로 깎아 내렸다. 그저 ‘삼국지’라는 소설의 판본을 영화적으로 시도해봤다는 것 이상의 가치가 <용의 부활>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원본을 훼손하는 방식의 무리수를 두고도 탁월한 성과로 거듭나지 못했다는 건 여러 가지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유덕화의 관록이 조자룡의 위엄을 잘 살리고 있다는 점은 일말의 위안이다. 하지만 그를 보좌하는 가상의 캐릭터, 조영과 나안평은 자신을 잉태한 영화의 모성애를 전혀 얻지 못한 채 존재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고 앙상하게 목숨을 부지하다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어떤 인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TIP>소설과 달리 영화는 가상적인 설정을 통해 삼국지를 재편한다. 애초에 원명 교체기에 집필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진나라 진수의 ‘삼국지 정사’를 토대로 민간구전을 덧씌운 문학적 가공을 거쳐 완성됐다는 점에서 이를 원형으로 하는 현대의 ‘삼국지’ 역시 많은 부분을 과장된 허구에 기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유비의 도원결의로부터 시작되는 ‘삼국지연의’는 나관중이 후한 혈통을 계승한 유비가 건립한 촉한을 노골적으로 두둔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며 이런 지적도 적지 않다. <삼국지: 용의 부활>에서 묘사되는 조자룡의 전투의 원형인 '삼국지연의'의 기록을 소개한다.

영화가 조자룡을 처음에 유비군의 일개 병졸 취급하는 것과 달리 조자룡은 이미 공손찬의 휘하에 있을 당시부터 유비와 인연을 맺었고, 언젠가 뜻을 같이 하자는 약조도 나눈다. 결국 후에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망한 뒤, 조자룡은 유비의 휘하에 들어가고 이는 유비가 삼고초려 끝에 제갈공명을 얻는 것보다도 이른 지점이다. 또한 그 이전에 박망파 전투에서 제갈공명이 하후돈을 유인하는 계책에서 중책을 맡길 정도로 조자룡은 공명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조자룡이 공명의 얼굴도 알지 못한다거나 자신이 아두를 구하겠다며 유비 앞에 무명의 장졸로 등장하는 건 영화만의 설정이라 할 수 있다. 조조의 80만 대군에 쫓겨 신야성을 버리고 강릉으로 향하던 유비는 장판파에 이르러 조조의 군대에 가로막혀 고전하고 가까스로 경산으로 피한 유비와 달리 그의 두 아내 감부인과 미부인, 그리고 아들 아두는 고립된다. 유비 가족의 호위를 맡았으나 적들과의 교전 사이에서 결국 그들을 놓친 조운은 30여기의 부하를 이끌고 적진을 헤매다 감부인을 찾아 구출해온 뒤, 다시 장판파로 향한다. 결국 미부인과 아두를 찾았지만 미부인은 상처입은 자신을 이끌고 가면 조운이 힘들어질 것을 알고 우물로 뛰어든다. 결국 조운은 갑옷을 끌러 가슴에 아두를 안고 장판파에서 조조의 80만 대군-실제 정사에서는 5천 정도로 기록됨-을 단신으로 뚫고 간다. 한편, 이를 지켜보던 조조가 조홍에게 급히 물었다. ‘저기 무인지경(無人之境)을 가듯 칼을 휘두르고 달리는 장수가 누구인가?’ 조홍은 조조와 함께 전황을 내려다보던 경산 아래로 내려가 목소리를 높여서 ‘장군! 성함이 어찌되시오?’ 라고 묻자 검을 높게 빼든 그 장수가 외쳤다. ‘나는 상산 조자룡이다! 그대도 내 앞길을 막으려는가?’ 이윽고 조홍이 다시 경산에 올라 조조에게 보고하자 조조는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저 자가 조자룡이구나! 저런 용장이 우리 진에 있다면 천하를 얻지 못해도 한이 없겠다!’ 그리하여 조조는 장수가 상하지 않게 각 진에 활을 쏘지 못하게 명하고 사냥하듯 조운을 몰아 생포하려 했지만 유비의 아들인 아두를 품에 안은 조운은 결국 필사적인 결의로 포위망을 뚫고 장판교를 지키던 연인 장비에게 뒤를 맡기고 유비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그 뒤로 조운을 쫓던 조조의 군대는 장판파에서 버티는 장비의 위엄에 눌리고 결국 그의 뒤 수풀 속에서 움직이는 기병의 모습에 후퇴를 감행한다. 하지만 이는 불과 20여기에 불과한 기병이 수풀 뒤에 숨어서 오간 것에 불과했다. 이 싸움에서 조운은 조조가 총애하는 하후돈의 동생 하후은을 죽이고 그에게 조조가 하사한 보검인 청강검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후, 유비는 결국 오나라로 넘어가 손권에게 의탁하고 이는 그 유명한 적벽대전으로 이어진다.


조영이라는 조조의 손녀를 가상인물로 내세우며 조자룡의 비범한 최후를 그리는 <용의 부활>과 달리 ‘삼국지연의’에서 조자룡은 전사하지 않았다. 조자룡의 비범한 최후를 그린 <용의 부활>의 후반부는 유비의 사후, 유선-조자룡이 두 번에 걸쳐 구한 아두-이 촉의 황제에 오른 뒤, 그 유명한 출사표를 던지며 단행했던 제갈공명의 북벌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북벌군을 편성할 당시 제갈공명은 조자룡의 나이를 염두에 두어 그에게 임무를 맡기지 않았다. 하지만 촉의 오호장군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제갈공명과 함께 남만정벌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던 조자룡은 출전을 요청하고 공명도 그의 뜻을 받아들여 등지를 부장에 두고 5천 군사를 주어 그에게 선봉의 임무를 맡긴다. 이에 위의 대장을 맡은 하후무는 자신의 네 아들과 함께 한덕을 선봉으로 삼아 조자룡에 맞서게 했다. 하지만 결국 영화에서와 같이 한덕의 네 아들은 조자룡에 의해 제압당했는데 영화와 달리 둘째인 한요는 사로잡았고, 나머지 세 아들인 한영, 한경, 한기는 모두 조자룡에 의해 죽음을 면치 못했다. 또한 한덕 역시 하후무의 질책에 부끄럼을 참지 못하고 조자룡과 교합을 벌이지만 결국 그도 창에 찔려 죽었다. 한편, 그 뒤로 봉명산에 진을 친 하후무의 참군 정욱의 아들 정무가 세운 계책에 빠진 조자룡은 위군의 매복군에 둘러싸여 고립되는 위기에 처했지만 관우와 장비의 아들인 관흥과 장포로부터 구출되었고, 그 뒤로 전투에 앞장서며 혁혁한 공을 세우다 후에 공명의 명을 어긴 마속으로 인해 중요한 고지였던 가정(街亭)을 위의 사마의에게 뺏긴 후, 결국 공명은 한중으로 귀환했다. 이때 조자룡은 마지막까지 후방을 사수했으며 후에 제갈공명이 직접 이 공을 치하했다. 또한 그 후, 명을 어긴 마속을 문책한 공명이 결국 그를 처형하라 명한 뒤, 통곡했으며 이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 그 후, 한중에서 북벌을 위해 공명이 군대를 조직하는 중에 조자룡은 천수를 다했고, 그가 죽던 날 공명의 집 앞뜰 소나무 가지가 부러졌다고 한다. 그 후로 북벌을 거듭하는 공명과 그에 맞서는 사마의의 전투가 거듭된다. 한편, 1차 북벌 당시 공명은 마속을 잃은 대신 강유를 얻었으며 강유는 훗날 공명의 뒤를 잇는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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